



내가 빙글에서 주로 발행하는 두 컬렉션이 <푼돈으로 입는 클래식 스타일>과 <Man's Style Workshop>이다. 두 컬렉션 공히 '스타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내 컬렉션을 팔로우 하는 분이나 내 카드를 읽어 오신 분이라면, 내가 이 스타일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대충은 짐작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내가 발행하는 거의 대부분의 카드 내용은 사실 하나의 주제로 수렴한다. 그것은 실패해도 좋으니 자기 나름으로 옷을 골라입고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해 보라는 거다. 이것이 내가 즐겨쓰는 '스타일'의 개념이다.
위 사진들의 룩을 보면, 모두 멋진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이 스트릿 룩이 멋진 이유가 바로 위 옷을 입은 사람만이 표출해 내는 개성에 있다. 이게 스타일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고, 이는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카드는 이를 좀 더 성찰해 보고자 하는 것이고, 아울러 어떤 분이 내게 '스타일 있게 옷을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주관적인 답변이라 하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삶에서 디자인과 스타일을 빼놓고는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삶을 디자인하고 그것을 스타일로 구현해 내면서 사는 거. 이거 말고 삶에서 중요한 게 더 무엇이 있을까.
헌데 이 중요한 스타일이라는 개념을 우리나라는 그냥 패션의 하위 개념으로 마구 소비해버리는 경향이 너무도 강하다. 그래서 좀 못마땅하다. 특히 스타일리스트라는 작자들 때문에 심하게 짜증이 나기까지 한다. 이들은 스타일을 무슨 아이템의 조합쯤으로 여긴다.
각종 패션 잡지나 방송에서 이들이 나와서 떠드는 걸 가만히 들어보면 기가 찰 정도다. “당신은 피부 톤이 검기 때문에 밝은 색상은 어울리지 않는다.”라거나, “당신은 마르고 키가 크기 때문에 핀 스트라이프 수트는 피하는 게 좋다.”라고 한다. 심지어는 “당신은 뚱뚱하니 스트라이프 티셔츠(가로 줄무늬 티셔츠)는 몸을 더 벌키하게 하니 입지 마라.”라고 조언 아닌 조언을 하고 있다.
물론 스타일리스트들의 저런 말들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거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상으로 개개인을 판단하는 건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와 다르지 않다.
뚱뚱하더라도 스트라이프 티셔츠가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피부톤이 어둡더라도 밝은색 옷이 썩 잘 어울리는 사람들도 많다. 이는 순전히 개인의 생활패턴과 기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절대 일반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스타일리스트라는 사람들은 주저 없이 위와 같이 말하며, 이런 망발로 먹고 산다.
나는 정말 그들이 ‘스타일’의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스타일의 개념을 안다면 저따위 식의 스타일 조언은 절대 할 수 없다. 아니, 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 스타일이란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패턴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추구하는 기호와 삶의 철학이 옷과 행동으로 표출되는 방식이 바로 스타일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패션’과 ‘스타일’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다음과 같은 경구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스타일의 본질을 드러내는 이들 경구 속에는 어떤 아이템을 사야하고 어떻게 코디하는 가에 대한 그 어떤 함의도 없다. 오히려 ‘옷(clothes)’을 완전히 넘어서 있다. 이들 경구로부터 공히 직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오직 나를 드러내는 삶’일 게다.
다시 말해서 ‘스타일’은 옷을 입는 방식 이전에 자신의 삶을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 것인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스타일은 개인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 속에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뚱뚱하더라도 스트라이프 셔츠를 좋아하여 자주 입고 그것이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때, 내가 입은 스트라이프 티셔츠는 내게 아주 잘 어울리는 아이템이 되고 그것이 바로 내 스타일이 된다는 말씀.
결국 스타일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아이템의 조합을 찾는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이 오랜 동안 세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나를 표현하는 과정이다. 내가 어떤 옷을 골라 입고, 어떤 상황에 직면하여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하는지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연속된 과정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타일은 명품 브랜드를 사서 입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어떤 브랜드의 어떤 아이템을 잘 매치해서 입기 이전에, 내기 이 옷을 입고 누구를 만나서 어떤 일을 할 건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누릴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어떤 브랜드를 입느냐 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게 스타일 있는 사람의 행동 방식이다.
누가 갖고 있으니 나도 가져야 하며, 이건 이번 시즌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니 사야하고, 유명 연예인이 입은 거니 당연히 구비해야한다는 논리는, 그가 영원히 '따라쟁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신세를 말해준다.
그런 '따라쟁이'는 명품을 입을 수는 있지만, 결코 스타일을 가질 수 없다. 스타일은 ‘다름’과 ‘아니오’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기에. 그래서 스타일은 주체적인 사람의 표상인 것이다. 오래 전에 프롬(Erich Fromm)도 말하지 않았던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고, 주체적인 사람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스타일 있는 사람은 타인의 옷차림에 대해 절대 판단하지 않는다. 오직 내 안으로 관심이 집중되기에. ‘왜 옷을 그따구로 입었지?’, ‘정말 못 봐 주겠군’, ‘그냥 후졌군’ 등등의 말을 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스타일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다. 이런 사람은 심하게 말해서 패션 자본의 호갱일 뿐이다. (패리스 힐튼을 보라!)



한편, 작금의 시대는 무시무시한 '패션 독재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개개인은 쉽게 변하는 것(유행;트랜드)과 거의 변하지 않는 것(클래식)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추와 같은 존재다. 트랜드에 매몰되어 패션 자본의 호갱으로 전락하든지, 아니면 거의 변치 않는 것을 신중히 선택하여 나의 가치를 드러낼 것인지는 순전히 개인에게 달려있다.
‘나-유행’의 관계와 ‘나-클래식’의 관계에서 후자로 가는 게 스타일 있는 삶이다. (혼동하지 말자. 여기서 후자는 유행과 관계없이 나를 드러내는 드레스 코트라는 걸)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전자의 관계가 너무도 강력하기에 우리는 항상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전자에 무릎을 꿇고 만다.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스타일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단지' 따라쟁이(좌표쟁이)'만 되지 않으면 된다. 옷을 하나하나 신중히 선택하면서(엘레강스, 즉 우아함의 라틴어 원뜻은 어떤 것을 신중히 선택하는 행위이다.) 내 옷장을 채워가는 방식이 중요하다.
물론 시행착오가 없을 수는 없다. ‘패알못’일수록 당연하다. 하지만 그 선택 하나하나에 '만족하는 경험'이 쌓이면서 내 옷장을 채워갈 때, 나는 좀 더 자본과 브랜드에 대해 자유로워 질 수 있는 존재가 된다고 확신한다. 물론 옷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도 바뀔 것이다.
무엇이 시대를 초월하여 엘레강스한(elegance) 아름다움을 줄 수 있는지 안다면, 일만 원짜리 옷을 입고도 간지 있다는 소릴 들을 수 있다. 그게 바로 돈을 주고서도 살 수 없는 ‘스타일’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를 코코 샤넬만큼 강렬히 표현한 이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했던 말로 이 카드를 마무리 하겠다.
“여자가 남자를 만날 때 혹은 여자를 만나러 갔을 때 옷만 기억이 되는 여자(남자)라면 그 사람은 만나지 마라. 옷은 인물을 받쳐주는 최고의 배경이지만 그 주인보다 더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뱀말]
다음에는 스타일을 갖기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할 ‘주체적인 삶’ 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