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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 대한 이해도 높이기 3.

우리가 흥미진진하게 여기는 중국의 삼국시대와
우리의 이목을 끄는 당시의 영웅호걸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처럼, 그 영웅들 또한
후한 말의 난세가 만든 영웅들이며 난세와 영웅탄생의
시작은 바로 "황건적의 난"(黄巾之乱)이였다.



사실, 여러분들이 접하는 삼국지 관련 매체들에서는
황건적의 난에 대해 디테일한 설명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난은 역사적으로는 오히려 우리가 열광하는
영웅들의 일대기들과 비교 안될만큼 중요한 사안이며
어쨌건 후한이 결국 삼분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에,
오늘의 삼.이.높 세번째 주제로는 삼국지의 서막을
올리는 결정적 계기였던 황건적의 난에 대해 다룬다.

1. 왜 "황"건적인거지??


"창천이사 황천당립 세재갑자 천하대길"
(蒼天已死 黃天當立 歲在甲子 天下大吉)
'푸른 하늘이 죽고 노란 하늘이 일어나니, 
갑자년에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저 문장은 황건적의 난의 일종의 슬로건같은건데,
중국 고대의 자연철학인 "오행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첨부된 사진을 보면 오행설에서는 세상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근원으로 '화, 수, 목, 금, 토' 라고 주장했다.
(저기에 태양과 달을 넣어 일주일의 명칭이 된거다.)

마치 캡틴 플래닛을 소환하는 땅,불,바람,물,마음같은데
살짝 다르다.

아무튼 저 오행들은 서로 상생하기도, 또 서로
상극이기도 하는데... 황건적의 난의 슬로건은 저 중
상생설을 차용한 글귀이다.
잘 보면 가위바위보처럼 절대적인게 없고 서로서로
맞물려 먹고 먹히는 구조다.
(첨부사진 2가 상생, 3이 상극)

오행에 의하면 중국의 한(漢)은 불(火)의 기운을 받아
이룩되고 흥한 왕조여서 그 다음의 세력은 응당
흙(土)의 기운을 받은 사람이나 세력이라 생각했고,
바로 그 흙의 상징색인 "노란색"을 아이콘으로 삼은 것.

덧붙여, 불의 기운을 지닌 한나라의 상징컬러는 당근
빨간색이다.(그래서 장기에서도 한 쪽은 글씨가 레드!)

참고로 왜 한이 그럼 불의 기운이냐면....
한이 건국 전, 진의 시황제의 꿈 속에서 커다란 태양이
자신을 들이받아 자신이 죽는 악몽을 꿨다는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저 꿈이 태양의 기운을 가진 이가
자신(진)을 제끼고 다음 황제(유방의 한)가 된다는
예지몽으로 받아들여 그렇다고.. (물론 본인에게는 흉몽)

이건 나도 정확한 학계 주장이 맞는지가 기억이 가물가물.
아무튼 태양은 오행설에서 당근 '불'의 기운을 지닌 것으로 본다!




하여튼 저 오행설 중의 상생설 탓인지, 후한 이후
삼국시대가 열리고 삼국의 군주들이 저마다 제위에 오르며
썼던 연호에도 이게 반영되어, 후한을 멸망시킨 위의
첫 연호도 '황초(黃初)', 오의 경우도 손권이 왕을 칭하며
사용한 첫 연호가 '황무(黃武)', 다시 황제를 칭하며 쓴
첫 연호가 '황룡(黃龍)'이다.

반대로 한의 계승을 주장한 촉한의 마지막 연호는 
'염흥(炎興)'이었다.
후한이라는 불(火)이 꺼져가며 작아진 불꽃(炎)이
다시 흥(興)하여 크게 불타오르리라는 거창한 뜻이였으나
결과는.........

쉽게 말해, 위와 오는 자기들이 후한의 다음 세력이란,
촉은 자기들이 말 그대로 후한을 잇는 세력이란 주장.

2. Who Is 장각?

황건적의 난에 있어 그 시발점이 된 "장각"의 존재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

오늘날의 중국 허베이 성 싱타이 시 쥐루 현 출신의
종교가이자 도사였던 그는 역시 도사였던 "우길"
그 개념과 교리를 정립한 "태평도"라는 종교를 사실상
창시하고 전파한 인물이다.

후한 말기의 어수선한 민심을 틈타, 주술이나 부적 등으로
병을 고치는 일종의 사이비 야매 수법으로 민심을 얻었고
이는 오늘날 심리학에서 일컫는 "플래시보 효과" 였을 듯.
보통 사이비교에서 저런 주술이니 부적 따위로 병을 고치는
행위들이 대개 다 그렇듯, 플래시보가 겹쳐 나으면 내 덕,
못 고치면 니새끼 믿음이 부족하고 마음이 불경한 탓이 된다.

아무튼 그짓거리 하고 다니다, 그래도 또 난세는 난세라
그런게 꽤나 먹혔는지 일정 세력이 따르기 시작하자 결국
184년, 장보와 장량 두 동생들과 함께 대장노릇 하며 난을
일으킨다.

거의 중국의 양쯔강 이북 8주(유주, 병주, 기주, 연주,
서주, 청주, 사주, 예주)에 걸쳐 수만 여 명이 봉기했고
사실... 이 시점부터 실질적으로 후한은 멸망이나 진배없는
상태가 된 것이라고 본다.

이때부터 후한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준했고
한황실도 통제력을 상실했다.



참고로 종교집단에 의한 황실타도의 난리가 일어난 것은
중국의 기나긴 역사상 이 때가 처음.
그리고 저런 거국적 정권타도 목표가 아닐지라도 어쨌건
"종교집단에 의한" 난도 황건적의 난이 최초.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장각 본인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그 해에 병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워낙 기세가 거셌고 장각의 두 동생의 리드도
있었으며 방대한 지역에 걸쳐 연쇄적으로 발생한
난이여서 그 세가 장각이 죽었다하여 바로 사그라들진
않았다.

일단 당시는 대중매체도, 통신도 전무하다보니
장각의 사망을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였고
이미 당시 난의 파워가 있다보니 관성에 의해 기세는
계속 유지되었다.

3. What Is 태평도?


자, 그럼 "태평도"는 또 뭐냐?
위에서 말했듯 일종의 종교였는데, 이 종교라는게...
카톨릭이나 불교, 이슬람과 개신교, 유대교 등등등등 처럼
뭔가 반드시 절대적인 신이나 그에 준하는 존재들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민족의 멘탈적 근간이 되는 "유교" 역시 무슨 유교의 신이
존재해서 엑스멘 시리즈의 뮤턴트들처럼 초능력을 흩뿌리고
그래서 생긴 종교가 아니고 평범한(?) '인간'이 만들고
정리한 여러 사상과 제약 등을 일컫는 "교리"가 생기고
이 교리를 따르고 받드는 사람들이 생겨나며 형성되는 것.
어찌 보면 사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 회사동료였고 퇴사 후 거제도에
빙수집 차렸다가 거제 조선경기 망하며 같이 망한 정호형이
내세우는 이론들 중에....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피우는 것이다."

"여자의 피임은 임신을 피하고,
남자의 피임은 임신시킨 여자를 피하는 것"

"일부다처제란 말처럼 처제도 내 여자다"

뭐 이딴 개소리들이 있는데, 이것도 누군가
'오.. 시발 진리다 +_+' 하며 그 가르침을 따르고
저기에 맞춰 생각하고 생활하며...(....)
심지어 그런 찐따들이 늘어나고 지들끼리 저걸
전파하며 그러다보면 저 말같잖은 소리들을 교리 삼아
정호형을 교주로 여기는 종교가 탄생하는 것.
그런데 정호형 뭐 하고 사나? 번호도 바뀌었던데...
결국 깜빵 간건가..




어쨌건 삼천포로 빠졌는데, 태평도 역시 종교고
그 기원은 이미 여러분도 한 두 번은 들었을 "도교"에서
비롯되었는데, 위에 언급한 우길이란 도사가 도교를
베이스로 자기가 음양과 오행관련 이론 등을 믹스해서
교리를 정립한 종교다.

황건적의 난이 중국을 씹창내고 각지의 호걸들과
제후들이 다시 그 황건적들을 씹창냈지만..
하도 호된 엿을 잡수신 후한의 지도층들은
"태평도 = 황건적"이라는 공식을 성립시킨 후,
황건적과 무관한 태평교도들에게도 홀로코스트를 자행,
태평도가 탄압을 받기에 이르른다.


결국 태평도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게 되었지만
이 도교라는 종교가 갖는 파급력이 당시에는 꽤나
먹어줬던 모양이다.

당장 우리가 흔히 쓰는 도 닦는 "도사"라는 표현도
본래 도교의 교리를 공부하고 또 거기 맞춰 생활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였다.

결국 우리에게 옛날 이야기 구수히 들려주시던
배추도사와 무도사도.. 탈모인들을 좌절에 빠뜨린
머털도사도... 전우주 최강의 전사인 카카로트를
키워낸 명스승 무천도사도... 도교를 연마하시는
분들이였다!!!......는건 뻘소리고 아무튼 그렇게
우리네 일상 속 단어의 유래를 꿰찰만큼 영향력이
있던 종교라는 거다.


하여간 도교는 태평도처럼 여러 아류들이
생겨났는데 또 그 중 하나가 삼국지 속 유명인사 중
한 명인 한중의 "장로"가 이끌던 "오두미도"였는데
이는 추후 따로 설명!

4. 황건이 배출한 스타들.


중국 전역에서 수 만 여 명으로 스타트하여 전성기 때
대략 추산 20여 만 명에 이르던 황건적들답게 삼국지연의
속에는 어느 정도 난이 제압된 이후 그 출신 스타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모두 다 나열할 수는 없으나 네임드들만
대충 거론해 보자면....

관우의 사이드킥이던 주창,
역시 관우의 사이드킥 출신으로 훗날 촉의 주력 장군까지
올라갔던 요화,
관우의 사이드킥 합류 일보 직전, 조운의 한 창감으로
전락한 비운의 소시민 배원소,
관우의 오관육참 스테이지의 보스 중 하나던 변희,
(뭐 이리 관우랑 엮이는 것들이 많나)
유비가 떠돌던 시절, 힘을 합쳐 조조세력과 잠시
맞다이 뜨던 여남의 유벽공도 콤비,
도겸의 지시를 받고 조조의 부친인 조숭을 호위하던 중
재물을 노려 조숭일행을 올킬하고 먹튀한 장개,
뭐 당연한 소리지만 장각, 장보, 장량의 삼형제 등등..

그럼 그렇지, 이 중 반 가까이는 허구의 존재들이다.
주창, 배원소, 변희는 나관중이 지어낸 인물들이고
요화는 황건적 출신은 커녕 오히려 나름 명문가의
귀한 아드님을 나관중이 뭔 억한 심정인지 도적출신
떠돌이로 전락시킨 연의의 피해자 1...
장개도 사료에는 그냥 도겸군의 도위라는 계급의
하급 장교였다고만 나오지, 황건출신이란 언급 없다.


나머지 인물들 및 소설 속 등장하는 다른 황건출신들
역시 실존은 했으나 하지도 않은걸 했다 하거나,
반대로 한걸 안했다거나 스킵하는 등의 각색들을
당한 경우가 많다.

뭐 대개는 삼국지속 영웅들의 초창기에 경험치를
올려주는 잡몹 수준의 비중들이긴 하지만...ㅎ

5. 무엇을 원했나?


황건적의 난 이전에 저런 전국구급 대규모 난으로 진나라
말기에 있었던 "진승 & 오광의 난"이 있다.

이 또한 중국사 최초의 농민(서민)의 난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는 난이며 이 난의 모토는 여러분들도 들어봤을 법한
"왕후장상 따로있나, 못살겠다 갈아엎자" (박력있다ㅋㅋㅋ)

아무튼 저 난의 주동자나 모토나, 여러모로 신분 및 계급에
의한 차별과 부조리를 타파 위한 평등지향적 쿠데타였지만,
황건적의 난은 엇비슷해 보이긴 해도 근본이 다르다.



장각한테 누가 직접 인터뷰를 한 게 아니고,
장각도 어디에 딱 꼬집어서
'아, 저희 황건은 XX를 위한 서민집회입니다! 박ㄹ혜 하야!!'
했던건 아니다보니 역시 여러 정황근거들 통한
훗날 사학자들의 추측이긴 하지만, 여러 근거들과
장씨 3형제의 행태를 볼 때....

결국 그들의 파이널은 유씨의 한 황실을 엘리시킨 후,
장씨들의 새 황실을 만들려던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 들고 일어난 백성들 역시 이미 타락할대로 타락하고
무능한 한 황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에 분노하여
'장각이나 태평도가 어떤진 잘 몰라도 일단 한은 뻑큐!'라며
분기한 것이 대부분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일단 황실의 몰락과 그로 인한 권신들의 부정부패와 비리,
그런 황실의 레인지에서 벗어난 지방 제후들의
마구잡이식 백성 프레스,
설상가상의 갖은 대규모 자연재해...
이런 이유들로 전염병과 기아의 확산,
그에 따른 엄청난 인구감소...
위의 이유들에서 비롯된 1차 산업 붕괴로 인한 경제파탄,
높아지는 범죄율과 반비례하는 치안..

이건 뭐 그야말로 헬, 그 자체.

막장궁지에 다다른 백성(농민)들은 이래죽나 저래죽나
에라 모르겠다가 되어, 마침 가려운 곳 긁어주는 태평도와
인간 사이다 장각의 쇼에 넘어가게 되었던 것.

당시 백성들은 당연히 지적수준들도 낮고 정치에 관한
성숙한 의식과 식견들도 없다보니 냉철한 판단도 없었고...

6. gg........


기세 좋게 번져 오른 황건적의 난.

그러나 여러 한계들로 인해 결국은 실패하여, 성공했다면
지금쯤 우리들은 황건혁명, 황건운동 등으로 들었겠지만
승자의 편인 역사 탓에 끝내 "난"으로 명명되고 말았다.



패인 1. 장각의 부재.

일단 장각은 이 모든 사태의 주동핵심이였다.
그런 장각이 난의 시작해에 병사함으로 인한
컨트롤타워와 구심점의 부재는 실로 치명적이였다.

예를 들어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 없이 대회를
치렀어도 과연 그 결과가 나왔을지 생각해본다면 뻔하다.

황건적은 정규군대 아닌, 그냥 농사짓고 생선잡고
장사하던 평백성들... 그것도 대개 굶주림에 지쳐있던,
무기 한 번 안잡아보고 전투 한 번 못치뤄본 평민들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지휘자의 리딩이 중요했는데,

역시 군지휘관도 아니라 지휘통솔력이 검증안된 장각이
살아 이끌었어도 어떨지 모를 와중에 어쨌건 황건적들의
정신적 지주인 장각의 부재는 매우 컸다.

패인 2. 전투력.

위의 언급대로 황건적의 9할 이상이 그냥 백성들...
아무리 후한이 괴멸직전의 상태였다한들,
정규군이 있었고, 각지의 지방을 이끄는 제후들은
제법 상당한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로마군과 게르만족들의 전투,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에스파냐 콩키스타도르들과의 전투, 동학군v일본군,
광주민주화항쟁 등등 아무리 숫자 많고 기세 등등해도
체계적 군율로 통제되며 훈련된 정규군을 이기긴
매우 버겁고 벅차다.

일반 백성들이 그저 숫자 많고 기세만 높다하여
제대로 통솔도 안되는 와중에 싸움이 될 리 없고,
개개인의 전투력과 무장수준도 형편 없었으며,
또 저런 급조된 오합지졸들은 약간만 전세가 불리해지면
나 살자고 도망치다 자기들끼리 밟히고 치여 죽기 바쁘다.

패인 3. 명분.

황건적들도 쪽수가 불고 세가 오르자 결국 일반 백성들을
약탈하고 겁탈하고 죽이긴 매한가지였다.

일단 기강이 없어 제대로 된 컨트롤도 안되고
정규훈련이나 교육도 부재하니 무슨 최소한의 기본적
윤리나 규율도 없었고...
당장 배는 고픈데, 병참체계가 있길 한가, 지원시스템이
있길 하나.. 결국은 도적질이 답.

그러다보니 황건에 가담 않은 다수의 백성들의 인심도
잃고, 농민들 입장에서는 그냥 삥 뜯는 세력이 늘었을 뿐.
그렇게 명분을 잃다보니 백성들의 지원과 후원도 줄고,
가담자들 역시 실망과 현실의 한계에 좌절하여 이탈하고..

저런 쿠데타나 혁명 등의 봉기는 구성원들의
집결과 응집을 위해 무엇보다 명분이 중요하다.
명분을 잃은 봉기는 그냥 끈 떨어진 연이 될 뿐.

정말 확실분명한 대의명분이 있고 또 그게 유지 되었다면...
유비, 조조, 손견, 원소, 동탁, 마등, 공손찬 등의 숱한
히어로들은 아마, 머리에 노란 두건을 둘러멨을지 모른다.
이번 삼.이.높.3의 주제인 황건적의 난은 삼국지에 대한
칼럼을 다루려면 결코 생략해선 안될, 오히려 반드시
거론하고 가야할 주제라 생각해서 쓰게 되었는데...

오우, 막상 쓰려다보니 지금까지 써온 주제들에 비해
제가 아는 부분, 기억 나는 부분이 적더라구요...
그래서 이리저리 여러 자료들 다 찾고 뒤적이며 저도
공부해서 쓰느라 좀 시간도 더 걸리고 힘들었어요 T-T

다들 쉽게 이해가 갈지, 지루하고 두서 없어 노잼은
아닐런지 가장 걱정되는 카드가 될 듯 합니다.
쓰기는 제일 고생해서 썼는데...ㅎㅎ



아무튼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의 팔로우, 좋아요, 클립과 댓글들이
이런 힘듦과 시간할애를 아깝지 않게끔 해줍니다ㅎ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79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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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시최고에요..너무재미나게보고있습니다 ㅋㅋ감사합니다
흐하하하ㅎㅎ 칭찬 덕에 춤추게 되고 사기백배예요ㅋ 고맙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ㅋ 즐거운 주말보내세요 ㅋㅋ
너무너무 잘 보고 있는 1인 인데요. 혹시 삼국지 관련 역사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시는지 여쭤도 되나요? 너무 신기해서요 ㅋㅋㅋㅋㅋ
여쭤봐도 됩니다ㅋㅋㅋㅋ 그리고 뭐 별 건 없고 그냥 어려서부터 좋아하다보니 이것저것 찾고 읽고 보고 뒤지고 그러다보니 이렇게 되었네요ㅎㅎ 뭐 덕후들이 대개 별 비결없이 이렇게들 되더군요
녜 황건적의 난에 대하여 아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참고로 한나라가 불의 기운을 가진 나라인 것은 중국 사마천의 역사서 <사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기본기의 고조본기편에 보면 고조는 한나라 시황제의 시호이고,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에는 한왕 또는 패왕으로 표기되었다 패현에서 태어날 때의 이름은 유계이며, 황제로 즉위한 후의 이름이 유방이다 고조가 젊은 시절에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이후 장년이 되어 시험으로 정장의 관리가 되었다 정장의 직무로 역도들을 인솔할 때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모두 도망칠것을 알아차리고 밤중에 모두 풀어주고 자신도 도망치고자 하였다 이에 따르고자 하는 무리 10여명과 같이 길을 가다가 큰 뱀이 길을 가로 막을 때 고조가 검을 뽑아 죽여버렸다 뒤쳐저오던 사람이 뱀 죽은 자리에 한 노파가 "내 아들이 백제인데 적제의 아들에게 참살당했다"며 통곡한다고 전해주었다 고대 전설상에 뱀신을 백제라 하였고 오행중에 금덕을 가졌고 진나라는 금덕을 가진 백제에 제사지냈다 이에 반하여 한나라는 화덕을 가진 적제의 자손이므로 오행설에 따르면 화는 금을 이길수 있다(화극금) 다시 말하면 화덕 기운의 한나라가 금덕을 지닌 진나라를 멸하고 중국을 통일한다 사마천의 사기가 실제 역사책이나 사마천 자신이 한나라 사람이므로 한나라 중국 통일의 당위성을 갖기 위하여 전설상의 이야기를 차용했다고 보여지나 오행설에 비추어 상당히 타당하다고 보여진다 참고하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계속 부탁드립니다
언제나 그렇듯 재미지게 보고잇숩니다! 감사해요!ㅎㅎㅎ 매주가 기다려지내요!! 웹툰들처럼 ㅎㅎㅎ 저번에 까먹고 댓글을 안남겻네요 ㅠ.ㅠ ㅎㅎ 그래서 이렇게 남기고 갑니다! 다음주도 기대기대~
오우ㅎㅎ 항상 기다려 주신다니 뿌듯하고 보람 있네요 ^^ 게다가 댓글까지... 정말 고맙습니다!
너무 재밌다........
흐흐.. 고마워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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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스팅스 전투를 다룬 가장 긴 산문 기록은 푸아티에의 기욤이 쓴 '노르만인들의 공작이자 잉글랜드인들의 왕 윌리엄의 무훈' (Gesta Willelmi ducis Normannorum et regis Anglorum)이다. 푸아티에의 기욤은 노르만인이며, 처음에는 군인으로서 나중에는 군종사제로서 윌리엄 공작을 섬긴 신하였기 때문에 이는 매우 가치있는 기록이다. 그는 군사 분야의 전문가였고, 비록 1066년 원정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참전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투가 있은 지 불과 몇 년 후인 1071년경에 이 기록을 썼다. 따라서 1066년의 원정에 대한 그의 설명은 대체로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편향된 시선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노르만인이자 공작의 열렬한 숭배자이며, 그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영웅서사의 수사법과 고전의 이미지를 빌려온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앵글로색슨측의 명분과 행동에 대한 서술은 신뢰도가 떨어지며, 사건들에 대한 그의 해석과 표현은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Stephen R Morillo, The Battle of Hastings: Sources and Interpretations 공작은 교황이 보내준 깃발 뒤에 군대를 매우 효율적인 대형으로 배치한 뒤 전진시켰다. 그는 활과 쇠뇌로 무장한 보병들을 선봉에 배치했다. 사슬갑옷을 입은 더 강한 보병들이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후위에는 기병 부대들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 공작 스스로 정예 기병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후방에서 그는 명령과 동작으로 전군을 지휘할 수 있었다. 만약 고대의 작가가 해럴드의 군대의 행군을 묘사한다면, 그들이 지나간 길의 강이 말라붙고 숲이 평야가 되었다고 적었을 것이다. 수많은 잉글랜드인들이 잉글랜드 각지에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사랑하는 조국을 외국인들로부터 지키려는 열망에 불탔고, (비록 그 명분은 부당했지만) 그중 일부는 해럴드를 흠모했다. 그들의 피의 동맹인 데인인들의 땅에서도 많은 지원군이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윌리엄 공작을 노르웨이의 왕보다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감히 선제공격을 하지 못하고 방금 지나온 숲 근처의 언덕 위에 진을 쳤다. 그리고 곧바로 말에서 내린 다음 밀집한 채 정렬했다. 공작과 그의 신하들은 지형의 불리함에도 전혀 겁먹지 않고, 가파른 경사를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트럼펫 소리가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노르만인들은 대담하고 신속하게 공격을 개시했다. 마치 법정에서 소송을 변론할 때 원고측이 먼저 발언을 시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노르만인 보병들은 많은 잉글랜드인들을 화살로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며 가까이 접근했다. (궁수들의 후방에서 진격하는 노르만 기사들) 잉글랜드인들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용감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투창을 비롯해 치명적인 도끼와 막대기에 묶은 돌 등 다양한 원거리 무기를 던졌다. 이 치명적인 우박 아래에서 노르만인들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기사들이 그들을 구하러 왔고, 그렇게 후위가 선봉으로 바뀌었다. 기사들은 원거리 전투를 멸시하고 거부하여 검을 들고 대담하게 공격을 가했다. 노르만인들과 외국인들이 곳곳에서 지르는 커다란 함성이 무기 부딪치는 소리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찬 신음에 파묻혔다. 그렇게 한동안 양측 군대는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잉글랜드군의 방패벽에 돌격하는 노르만 기사들) 잉글랜드인들은 높은 지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방어에만 전념하는 전술의 이점, 많은 병력과 밀집대형, 그리고 방패와 다른 방어 장비들을 쉽게 관통하는 그들의 전쟁 무기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그들은 감히 검을 뽑아 들며 공격해온 적들을 완강하게 막아서거나 쫓아냈다. 심지어 멀리서 투창을 던지는 적들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그래서 이 맹렬한 반격에 겁을 먹은 좌.익의 보병들과 브르타뉴 기사들, 그밖의 보조병들이 등을 돌려 도망쳤고, 무적의 노르만인들에게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공작의 전열의 대부분이 패주했다. (브르타뉴 빤스런) 육지와 바다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던 로마 제국의 군대도, 자신들의 지휘관이 전사한 것을 알았거나 그렇게 믿었을 때는 도망쳤다. 노르만인들은 공작이 전사했다고 믿었고, 그들의 후퇴는 부끄러운 도주가 아니라 비탄에 잠긴 퇴각이었다. 공작은 잉글랜드군의 상당수가 노르만인들을 추격하기 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고, 도망치는 부하들을 가로막고는 창대로 때리며 위협해서 멈춰 세웠다. 그는 투구를 벗어 올려 얼굴을 드러내고는 이렇게 외쳤다. "날 봐! 난 살아있고, 주님의 도움으로 승리할 것이다.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도망치는 거야? 너희에게 열려있는 퇴로 따윈 없다! 양처럼 도살할 수 있는 나약한 적들에게 쫓기고 살해당하는 꼴을 봐라! 너흰 패배와 영원한 불명예를 얻기 위해 승리와 불멸의 명성을 포기하고 있어. 지금 도망치면 너희들 중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용기를 되찾았다. (윌리엄 공작의 생존 확인) 공작은 신하들의 앞에 서서 돌격했고, 왕인 자신에게 반역했으므로 죽어 마땅한 반항적인 종족을 검으로 베어 넘겼다. 그것을 보고 사기가 오른 노르만인들은 자신들을 추격해오던 수천 명의 잉글랜드인들을 포위해서 순식간에 학살했고, 단 한 사람도 살려 보내지 않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노르만인들은 잉글랜드군의 본대를 향해 다시 강한 결의를 가지고 진격했다. 방금 입은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인들의 숫자는 전혀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잉글랜드인들은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싸웠고, 특히 대열에 틈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대열이 얼마나 빽빽한지, 전사자들이 바닥에 쓰러질 공간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빼어나게 용맹한 기사들의 검 아래에서 곳곳에 길이 뚫렸다. 비록 그들 중에는 멘, 프랑스, 브르타뉴, 아키텐 출신의 기사들도 있었지만, 가장 돋보인 것은 노르만 기사들이었다. 젊은 노르만 기사 로베르는 보몽의 로제의 아들이며 묄랑 백작 위그의 조카이자 후계자로...... (후략) (노르만 기사들의 2차 돌격) 노르만인들과 그들의 동맹군은 자신들이 처음 도주했을 때 일어난 일을 기억했다. 그래서 그들은 단단하게 밀집한 적군을 큰 피해 없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부러 등을 돌려 도망치는 척했다. 잉글랜드인들은 환호했고, 승리의 함성으로 서로를 격려하면서 노르만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도망치는 적을 쫓아 수천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마치 날갯짓하듯 뛰어 내려왔다. 노르만인들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고 그들을 포위해서 전부 학살했다. 같은 수법이 두 번이나 성공하자 사기가 오른 노르만인들은 다시 잉글랜드군 본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적의 대열은 여전히 위협적이고 틈이 없었다. 그래서 한쪽은 못이 박힌 듯 굳건히 서서 움직이 않고 다른 쪽은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을 가하는 특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잉글랜드군은 갈수록 약해졌고, 마치 패배로써 죄를 자백하고 있는 것처럼 고통을 감내했다. 노르만인들은 화살 세례를 가했고, 잉글랜드인들을 부상 입히고 제자리에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죽어서 바닥에 넘어지고 있는 전사자들이 살아서 서 있는 자들보다 더 역동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경미한 부상을 입은 자들은 동료들의 밀집한 대열 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짓눌려 죽었다. 그렇게 운명은 서서히 윌리엄 공작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은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와...... (후략) 적들 중 상당수는 한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기마 전사의 모습을 보고 싸우기도 전에 겁에 질렸다. 공작의 말 세 마리가 전투 도중 죽어서 쓰러졌다. 그는 위기에 굴하지 않고 세 번 모두 땅으로 뛰어내렸고, 준마를 잃은 원한을 지체 없이 갚았다. 여기서 공작의 속도와 체력과 용기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분노를 실은 칼날로 끊임없이 방패와 투구와 사슬갑옷을 꿰뚫었고 방패로 많은 공격을 받아쳤다. 많은 기사들이 부상당하고 지쳤음에도 공작이 도보로 싸우는 것을 보고 경탄하여 다시 용기를 얻었다. 심지어 피를 많이 흘려 쇠약해진 부상자들도 일부는 방패에 몸을 기댄 채 용감하게 싸웠다. 싸우지 못하는 부상자들은 동료들이 두려움 없이 공작을 따라가 승리를 놓치지 않도록 말과 몸짓으로 격려했다. 공작 자신도 많은 부상자들을 돕거나 구조했다. (해럴드 왕의 죽음) (해럴드의 동생들의 죽음) 날이 저물 무렵 잉글랜드인들은 노르만인들에게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많은 병력을 잃어서 약해졌으며, 왕 자신과 왕의 형제들, 그리고 왕국의 귀족들 중 많은 수가 전사했고, 남은 병사들도 거의 탈진해서 어떠한 구원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노르만인들이 동료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약해지지 않고, 마치 싸움 도중 새로운 힘을 끌어낸 것처럼 처음보다 더 맹렬하게 밀어붙이는 것을 보았다. 공작은 분노에 가득 차서 적들에게 아무런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오직 승리만이 군인으로서의 열정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등을 돌려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도망쳤다. 일부는 말을 잡아탔고, 나머지는 두 발로 도망쳤다. 일부는 길을 따라 뛰었고, 나머지는 인적 없는 삼림으로 들어갔다. 일부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나머지는 너무 쇠약해져서 멀리 도망치지 못했다. (잉글랜드인들의 도주) 군사갤러리 prevot님 펌
어느 일본도시의 캐릭터 맨홀 테러사건.txt
5년 전, 일본 시즈오카현 누마즈시에 설치된 러브라이브 선샤인 캐릭터 맨홀 11종. 팬들이 3400만엔을 클라우드 펀딩으로 모금하여 완전자비로 설치한 물건. 덕후들이 스스로 관광 컨텐츠를 만들어준 셈이라 시에서도 반기며 홍보책자까지 만들어 배포했고, 주민반응이나 관광효과가 은근 좋아서 뉴스도 여러번 타게됨. 결과 다른 시에서도 따라하며 일본 지자체에서 캐릭터 맨홀 붐이 일어나기도 함. 덤으로 설치 초창기에는 팬들이 찾아가서 맨홀을 깨끗히 닦아주는 유행도 퍼지며 별개로 화제가 되기도. 암튼 지역와 오타쿠 서로서로 행복하게 끝난 사업... 이였는데.... 분위기가 좋은걸 본 관종들이 찾아가 맨홀을 긁거나 페인트를 뿌리는 테러사건이 발생. 성지순례하는 덕후를 생각해 인적이 드문 공원이나 시골쪽에도 설치한게 범죄의 표적이 됐던 것. 설치로부터 열흘도 안 된 시점이였다. 소식을 들은 팬들이 곧바로 찾아갔지만 긁힘과 페인트가 물수건으로 없어질리가.... 그리고 이런 사건이 벌어진 누마즈시는 절대로 이걸 단순한 소동으로 여기지 않았다 사건이 알려진지 얼마 안 된 새벽에 시의원들이 달려가서 현장을 둘러보고 피해현황과 복구일정을 확인하며 심상치 않은 상황을 공유. 아침이 되자마자 누마즈 시청에선 맨홀의 회수, 피해현황, 향후대응에 대한 성명을 발표. 이어서 공공기물 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발장을 접수하였다. 덕분에 트위터에서 '다음엔 정x을 뿌려줄것'이라며 낄낄대며 상황파악도 못하던 테러범들은 누마즈시가 전력으로 휘두른 공권력 풀스윙을 처맞고 모조리 체포당했다. 이후엔 추가피해 방지를 위해 기존 위치에는 색이 없는 맨홀이 설치되게 되었고 컬러 맨홀은 인적이 많은 역앞 상점가와 전시관에 설치한 뒤 CCTV로 24시간 감시하여 테러사건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됐다고 한다 출처 : 더쿠 오.. 지자체가 일을 아주 잘 하네요.. 남의 기쁨과 성의를 왜저렇게 망치고싶어할까요 참 할짓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이다엔딩이라 다행이군요
장합 준애 (張郃 儁乂) A.D.?~231
누차 말했듯... 픽션(허구)이 가미된 "소설"인 삼국지연의는 여러 인물들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반면 그네들의 영웅화 ~ 신격화를 위해 숱한 이들을 엿 먹이기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도 역사범죄자 나관중에 의해 너프 당한 또 한 명의 피해자, "장합"에 대해 다뤄 보기로..! 장합은 삼국지정사, 위의 역사록인 위지, 후한의 역사록인 후한서, 본인의 열전인 위서의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에도 생년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사망 당시의 연령을 알 수는 없지만 원소에게서 조조 휘하로 들어갈 당시 대략... 40대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저 '장악우장서전'은 조조가 자신이 공을 이루는데 그 기여가 으뜸이라며 추켜세운 다섯 장수인,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을 묶어 편찬된 열전이다. 저 다섯을 일컬어 당시에 "오자양장(五子良将)"이라 불렀고, 촉한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과 살짝 비슷한 뉘앙스인데, 오호대장군이란 별칭은 그 때는 없었고 후대 사람들이 붙인데 비해 저 오자양장은 당시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오호대장군같은 저 시절의 '드림팀' 또는 '어벤져스' 느낌의 패키징은 위의 다섯 장수가 원조다. 고향은 당시로는 기주의 하간군 막현(오늘날 중국 허베이성 중남부 인근)이라는 그때 치고도 꽤나 궁한 시골 작은 마을 출신이였다. 참고로 진짜 중국이 겁나 드넓긴 드넓은게... 삼국지 게임 내의 맵에서 기주는 작은 주로 나오나, 조운의 고향인 기주 상산군과 장합의 고향인 기주 하간군의 거리는 무려 166km고, 이 거리는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보다 멀다..ㅎㄷㄷ 만화, 게임, 책, 기타 여러 미디어물들을 봐도 다른 네임드급 인물들과는 달리, 외형 이미지가 일관적이지 못한 편인데... 이는 사료 어디에도 장합의 외모 묘사가 일언반구도 없고 그를 그린 그림조차 몇 없는데다, 그것들 마저 묘사가 모두 중구난방이다보니 도무지 이미지 통일이 안된 것. 다만, 장합의 리즈시절이 펼쳐지는 것이 조조에게 투항 이후인데 그 당시의 추정 연령이 위의 언급처럼 40대로 보고, 조조세력 합류 후부터도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활약하다 전장에서 전사한만큼, 사실상 각종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젊은'느낌의 장수로 표현하는 것은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장합은 조조 휘하 장수들 중 가장 많은 전장에 참전했고, 위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전공이 많은 장수였으며, 주/부장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여러 숱한 전투에서 닳고 닳은 백전노장이였다. 그러다보니 큰 전장의 주요한 임무는 물론, 작은 전장의 자잘한 임무까지 가림없이 두루 맡았고 야구로 치면 4~5선발과 롱릴리프, 경우에 따라 급하면 불펜으로까지 던지면서 하루 걸러 등판하며 혹사 당하는 노예투수 비슷한 포지션의 장수였다. 그 깐깐한 조조가, 또 당시 휘하에 숱한 명장, 용장, 맹장들이 수두룩 빽빽 채이고 밟히고 널렸던 위에서 저토록이나 빈번히 굴렸다는건 그만큼 능력 있기에 믿고 쓸만큼 훌륭한 장수였다는 증거다. 심지어 백발노인 되어 집에서 손주들 재롱이나 보고 탑골공원가서 장기두며 야쿠르트나 얻어 마실 나이에 전장에서 한창 싸우다 전사하니... 죽어 눈감는 그 순간까지 위의 군밀레에 갈려나간 군돌이였다. 삼국지연의나, 연의를 바탕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각종 미디어물들을 보면 장합은 그냥 본인의 무예와 전장에서 구르며 익힌 짬밥으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장수로 그려지나... 위에서 언급하듯, 저렇게 숱한 전장을 누볐고 또 깐깐깐돌 조조에게 신임받으며 주장으로도 쓰인만큼 사실 전략적 대국안도 상당히 뛰어난 "지략을 갖춘" 장수였다. 본래 기주의 군소 군주인 한복 휘하에 있다가 한복이 패망하자 원소의 세력에 속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전장의 시국을 살핀 후 원소나 원소의 책사들에게 여러 전략들을 입안 했으나 거의 다 씹혔다.... 원소는 사람 자체가 선입견, 편견 이런 게 가득한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데다 또 고집은 있는 전형적 꼰대인 우리 회사 김대현 이사님같은 스타일이라 그저 야전에서 뒹구는 장수인 장합의 계책을 귀 담아 들어주질 않았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는 전형적 예였던 당시 원소의 책사들 역시, 지들끼리도 서로 내가 옳네, 내가 맞네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장합까지 거기 껴서 자기 의견을 제출하니 고스란히 즈려밟아 무시했다. 이렇듯, 자기 아이디어와 의견이 매번 밟히던 끝에, 원소 VS 조조의 관도대전에서도 자기가 낸 계책이 원소의 책사 중 한 명인 곽도에게 씹혔고... 그 전투에서 결국 패하며 장합이 옳았음이 드러나자 곽도가 원소에게 장합을 모함하였으며, 이에 겁 먹은 장합은 결국 원소군 내에서 베프면서 역시 원소의 아쉬운 대우에 불만가득하던 '고람'과 함께 원소군의 망루에 불을 지르고 투항한다. 역사기록에는 이 "방화 후 이적"이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패배 전인지, 후인지가 안나와 있으나 어쨌건 장합과 고람이 불 싸지른 망루는 당시로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레이더'역할을 하는 중요한 군사시설이였기에 이를 없앤 것 자체는 어쨌건 원소군에게 치명적이긴 했다. 삼국 정립 이후에는 주로 대촉전선에 투입되었고 이유는 조조가 양쯔강을 끼고 있던데다 북진의사가 거의 없는 손권에 비해, 명목상 "한실부흥" 내세워 줄기차게 자신들에 덤벼 오는 유비세력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여겼기 때문. 그때 손권과 대립하는 동부전선은 장료와 악진으로 묶어 두고 가용 가능한 네임드 장수들은 대부분 대촉전선에 투입되던 시기였다. 장합은 유비도, 유비 사후의 제갈량도 상당히 껄끄러워 하던 장수였다. 대촉전선의 총사령관 역할을 하던 하후연과 조홍보다 장합의 위치는 아래였으나 이는 위에서의 커리어, 또 하후, 조 두 장수는 조조와의 친인척 관계인지라 그럴 뿐... 장수로서의 자질은 저 둘을 뛰어넘던 장합이였으며 그래서인지 조홍과 하후연은 장합을 꽤나 견제했다. 아무리 자신들의 커리어가 앞서고 조조와 혈족이긴 하다지만 철저히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쓰던 조조는 언제던 장합이 더 유능하다 드러나면 속절없이 자기들보다 장합이 더 상전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이를 막아낸 위방어군의 총사령관은 연의와 달리 사마의가 아닌 장합이였고, 4차 북벌 때, 목문도에서 유인책 쓰며 거짓 후퇴하는 촉군을 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뒤쫓자며 바득바득 우기고 쫓아가다 기어이 전사하는 연의와 역시 또 달리... 당시 제갈량의 흉계가 의심된다며 추격을 만류하던건 오히려 장합이요, 이에 대해 군령까지 내세워 제갈량을 추격할 것을 밀어붙여 장합을 사지로 내몬게 사마의였다. 이에 대해서도 또 제기되는 설이.... 당시 장합과 사마의는 위의 대촉전선에서 은연중에 경쟁관계였었다. 쟁쟁한 커리어의 백전노장 장합, 그리고 위 군부 신진세력의 주축이던 사마의는 서로 견제하던 관계였으며 당시 직급상 사마의가 높았지만 그렇다해도 사마의에게 장합은 결코 직위로 쉽게 누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였고.... 그런 장합을 이이제이 방식으로 간접 제거 하고자 제갈량의 계책을 눈치채고도 등 떠밀었다는 설이다. 연의에서의 묘사처럼 빗발치는 화살에 벌집이 되어 바로 죽기보다 화살을 여기저기 맞고 후퇴하던 중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였다. 기록에는 허벅지에 맞은 화살로 인한 과다출혈이 결정적 사인이라 나와 있다. 참고로 허벅지는 대동맥을 비롯 여러 혈관 뭉치들이 지나는 곳이라 흉기에 잘못 찔리면 지혈도 힘들만큼 과다출혈이 발생하여, 옛날 야쿠자나 조폭들도 서로 칼부림 당시 오히려 방어하기 좋아 찌르기 여의치 않은 복부나 흉부보다 허벅지를 많이 노렸다고 한다. 동물을 좋아했는지, 직접 먹이를 주며 키우던 개가 있었다는 설이 있고 자신이 타던 말이 힘들까봐 행군하는 경우에는 중간중간 말에서 내려 걷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사료기록은 아니다.) 원소 휘하에서는 고람과만 거의 이야기를 나눴으나 조조에게 투항 후 각기 다른 부대에 배치되며 연이 끊어진 듯... 여러 장수들과 열전이 묶음으로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신상과 일상에 대한 기록이 그닥 없다. 쉽게 말해 위의 장수로서의 공적인 기록은 좀 있지만 인간 장합으로서의 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다.. 장합이 커리어나 능력에 비해 그닥 인기 많은 인물은 아니다보니 왠지 이번편은 반응이 별로일거 같은 좀 불길한 예감이... T-T 그래도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 드린다는 ;;;
손견 문대 (孫堅 文臺) A.D.155? ~ 191?
중국의 삼국시대를 구성하는 위, 촉, 오 중의 하나요.. 위, 촉, 오 중 가장 마지막에 망한 오나라의 황실이던 손가의 시작에는 이 남자가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손가의 제네시스라 할 수 있는 "손견"이다. 여기저기에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중국 춘추시대의 위대한 병략가인 '손무(孫武)'의 후예'라는 소문과 추측까지 났지만 일절 그 실제는 확인된 바가 없는 그저 루머에 불과하다. 물론, 절대 아니란 증거도 없지만 유비가 한황실의 종친이라는 사실처럼 족보를 뒤져 팩트를 입증한 것이 아닌 본인의 자칭이며 또 이를 갖고 삼국지정사의 저자인 진수 또한 정황상의 추측을 한 것에 불과하다. 양주 오군 부춘현이 고향이며 오늘날 중국의 최대도시인 '상하이(上海)' 인근쯤이다. 물론, 저 당시의 오군은 이미 전한시대를 넘어 진나라 때부터 살기 괜찮은 지역이였고, "항우"도 거점 삼았던 인구도 적잖던 곳이긴 하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의 상하이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유의해두자. 전반적인 사료들 및 역사서와 그 주석본들, 열전까지 죄다 뒤적여 추론해 볼 때... 양주지역의 제법 좀 사는 "호족집안 아들"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고 또 대대손손 유구한 금수저까진 아닌거 같고, 후한 말에 이르러 떠오른.. 러시아의 올리가르히같은 그런 신흥세력의 자제였다. 어릴 때부터 이미 살던 동네와 고향 일대에서 먹어주는 깡다구와 대담함을 지닌 싹수 다른 소년이였으며, 만 17세에, 모여있는 수적떼들에게 홀로 덤벼 그들을 쫓아내 와해시킨 일화가 있고, 이걸 계기로 벼슬길에 나가 무관이 되어 같은 해 회계군의 허창 & 허소의 난을 제압한다. 이때부터 손견은 고속승진을 시작했다. 참고로 손견이 잘 나가는 호족집안임을 입증해 주는 한 예가 바로 위의 저 허씨들의 난을 제압코자 모병하는 과정이였는데, 관군만으로는 전력이 부족하다 판단.. 사재를 털어 1천 여명의 병력을 추가로 모병하여 임무를 완수했다는 점이다. 당장 천 여명을 모병하고.. 그렇게 모집된 인원들을 무장 및 최소한의 복색을 통일시켜 먹이고 재우고 훈련하는데 투자되는 비용이 벌써 보통이 아니다. 아무튼 놀라운건 손견이 저런 히어로급 활약을 올렸던 연령이 고작 겨우 열 일곱 가량(추정) 나이였다는 것인데, 아무리 저 시절이 평균수명, 사망연령이 낮디 낮아 일찍일찍 결혼하고 얼른얼른 성인대우를 받았던 시절임을 감안해도 참 대단함이... 당장 나도 그렇고, 여러분들이 열 일곱살 때 어땠는지 떠올려보면 바로 답 나온다. 담임선생님의 빠따 한 번에도 고통에 몸을 뒤틀고 쉬는 시간 벨이 울림과 동시에 매점으로 달려나가 빵 사먹으려고 버둥이던 우리의 그 나이에 손견은 홀로 수적떼를 목 베고, 벼슬도 오르고 군사를 모아 전투도 나갔던 것.. T-T 다만.. 어려서부터 아예 학문은 내려 놓았었던 듯. 책을 읽었다는 기록도 없고 심지어 문맹이였다는 설도 있다. 물론, 저 당시에 문맹률은 엄청나긴 했다지만, 그래도 나름 사는집 잘 나가던 자제로서 문맹설은 본인이 얼마나 학업을 멀리 했는지를 보여준다. 저 당시는 오로지 무예만 출중한 이들은 무시를 받았고 높은 직위에 오르는 데도 한계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의 클래스가 되는 무장들은 깊은 학식까진 아니여도 최소한 여러 권의 병략서, 병법서들을 읽는 수준은 되야했던 시절이였기에 문맹설이 돌 정도로 학문을 등한시한 점은 자랑할건 못 됨이 맞다. 허나 그런 무식함에도 불구하고 군사관련 행정처리에는 꽤나 빠삭하게 처리를 했었고 그런 일처리와 용맹 그리고 궂은일은 미루거나 피하지 않고 나서서 쓱싹 처리하는 빠릿함덕에 평판은 좋았던 편으로 성격은 좀 불같을 지언정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시원시원하면서도 화끈한 성격 덕분에 따르는 이들은 적잖았던 모양이다. 군율준수에 매우 엄하면서도 풀어줄 때는 풀어줬고, 병사들을 고압적인 자세 일변도가 아닌 "전우애"로서 대함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식사도 병사들과 함께 동일메뉴로 먹었다고 하니 당근 병사들의 충정도 높았다. 이래저래 빠른 출세가도 달리며 승승장구 했던 손견이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땅 넓고 사람 많은 중국의 어느 지역, 어느 군벌에나 두엇쯤은 있는 준재였던 그가 전국구로 발돋움하는 계기는 다 필요없고 바로바로 원소의 격문에 의해 집결한 18로 제후들의 유니온인 "반동탁연합군 VS 동탁군"과의 대립이였다. 참고로, 삼국지연의 속에는 마치 손견이 원소, 원술, 조조 등 당시 각자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참전한 여러 제후들과 역시 동등한 제후들 중 하나로 그려지는데 이는 왜곡이다. 그때까지도 손견은 독자적인 자신만의 세력을 이끌던 군벌이 아니였다. 이미 그전, '황건적의 난' 당시에는 엄연히 조정의 벼슬에 임관된 상태로 '주준'의 부장으로 참전, 그 후, 서량에서 184년에 변장 & 한수의 난 당시에는 십상시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것으로 밉보여 지휘관직을 박탈당한 '황보숭'의 후임으로 정벌군 사령관을 맡았던 '장온'의 부장으로 참전 하는 등... 주로 황실직속의 고위장군들의 부장으로 참전한 경우가 많았던 만년부장이였다 덧붙이자면... 변장 & 한수의 난 당시에는 서량에서 그 위명 높던 동탁도 장온의 천거로 참전한 상태였는데, 손견과는 여러 모로 행실과 견해의 차이로 몹시 사이가 안좋았던 터였고 손견과 달리, 상관인 장온에게도 불손하며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으로 굴던 동탁이였기에 둘은 상극.. 게다가 서량에서는 먹어주던 동탁이 상당한 군공을 쌓았음에도 손견은 몇 차례 패전하는 등 재미를 못 봤다. 반동탁연합군에 합류했을 무렵도 당시의 위세가 천하에서도 세 손에 꼽히던 "원술"의 사실상 부장에 가까운 자리로 원술의 지시와 서포트를 받으며 참전했었다. 아무튼 하여간 그렇게 반동탁연합군 소속으로 참전한 손견은 그야말로 군계일학적인 대활약을 벌이며 동탁군을 양민학살하여 후한의 슈퍼스타로 발돋움 하는데... 일단 첫 타석에서는 접고 들어갔다. 동탁의 부장이던 '서영'과의 전투에서 박살이 나서 간신히 최측근의 호위병력 몇 십여 기만 이끌고 살아나왔고 그마져도 위급상황까지 몰려.... 자신의 한 팔과 다름없던 "조무"가 손견의 붉은 두건을 대신 쓰고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준 덕에 겨우 살았다. 참고로, 삼국지연의에서 조무는 저렇게 손견을 살리고 간지 뿜으며 장렬히 전사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저 때 손견의 두건을 걸어놓고 적병들이 돌아갈 때까지 짱 박혀 있다가 살아남았다. 다만.... 그 이후로 정사에 더 기록이 없어서 어찌 되었는지는 알 길은 없다. 저 패배를 보약 삼아 그 다음부터 나선 손견은 다른 사람이 되어 동탁군을 거침없이 관광 태우기 시작한다. 동탁의 부장 '호진'의 군대를 엘리시키고, 무력의 화신이던 그 "여포"의 부대조차 지워버렸으며, 심지어 이 와중에 연의에서는 관우가 "데운 술이 식기 전에" 목을 베었다는 "화웅"도 참수한다. 솔직히 화웅이 연의에서 관우버프용 적장으로 나와서 동탁군의 에이스던 여포와 함께 원투펀치를 이루는 맹장으로 그려지지만 솔직히 정사나 그밖의 기록들에서는 별 다른 언급이 없어서 그 정도의 장수인지는 알 길이 없다. 허나 당시 화웅이 맡았던 임무나 직위등을 볼 때, 그렇다고 또 듣보잡은 결코 아니였음을 예상할 뿐! 결국 이런 손견의 크레이지 모드 탓에 동탁은 당시의 후한 수도이던 낙양을 죄다 초토화 시킨 후, 장안으로 천도를 하게 되며... 이 와중에 한 번 여포부대를 박살냈던 손견은 다시 한 번 낙양에서 여포부대를 짓이겼다. 이렇게 수복된 낙양성에 진입하며 손견이 옥새를 득템하게 되었고 그 옥새는 당시 손견의 주군이던 원술이 반협박을 하여 삥뜯기고 만다. 삼국지연의처럼 옥새를 꿍쳤다가 손책에게 물려주고 손책이 그 옥새를 담보삼아, 원술에게 병력을 인수받아 독립했다는 것도 삼국의 한 축을 맡는 손가의 라이프를 보다 드라마틱하게 만들고자 각색된 것이였다는...ㅎ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손견은 명백한 "원술의 부하"였다. 삼국지연의만 보셨거나 게임 등으로만 접하신 분들은 절대 몰랐을 사실이다. 허나 원술이 그럼 그렇지, 명군이 아니다보니 그 아래에서 손견이 이래저래 속앓이를 하긴 했다. 일단 저 동탁과의 전투에서도 파죽지세였지만... 손견이 너무 잘 나가, 그 위세나 명성이 높아지면 그를 컨트롤하기 벅찰 것을 염려하고 시기했던 원술이 겐세이를 놓고자 군량보급을 끊었던 탓에 손견은 그 드높던 기세가 주춤해질 수 밖에 없었고 위의 언급대로 옥새마져 협박으로 빼앗기며 심지어 그 아들 손책마져도 원술로 인한 스트레스가 여간 아니였다고 한다. 그 후.. 그 원술의 명으로 유표를 공격하던 중, 당시 손견에 맞선 유표측 장수인 "황조"의 부대와 전투 중, 원정군 총지휘관답지 않게 퇴각하는 황조를 직접 앞장서 추격하는 무리수를 두다 가뜩이나 눈에 잘 띄는 붉은 두건을 두른 탓에 빗발치는 화살과 돌에 맞아 젊은 나이에 허망히 생을 마감한다. 직접적인 사인은 날아온 돌에 머리를 직격으로 맞고 두개골의 골절에 의한 즉사. ... 손견 본인의 전투 스타일 자체가 겁대가리 상실하여 앞뒤 재고보고 할 거 없이 자신이 앞장서는 스타일. 심지어 공성전에서조차 자신이 앞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고 위에서 언급된, 손견을 전국구스타로 만들어준 동탁과의 전투에서도 그 잘났다는 18로 제후들 중 거의 유일하게 손견 혼자 동탁군 전군을 발랐을 당시 역시 가장 선두에서 미친 듯 싸웠던 손견이였다. 일기토기록이나 무예솜씨에 대한 언급은 따로 남아있는 자료가 없으나, 저렇게 밑도 끝도 없이 앞장 서서 날뛴걸 보면 결코 힘과 무예가 뒤쳐진 사람은 아닐 거라는 것은 기정사실. 저런 스타일은 뭔가 간지넘치고 상남자스러워 보이긴 해도 정말 크나큰 리스크를 안고 있는 '하이 리턴 & 하이 리스크' 타입이라 할 수 있다. 총지휘관이 후방에서 지령만 내리는 부대와 직접 장병들을 독려하며 자신이 선두에서 달려 나가는 부대의 사기 차이는 극명하다. 저 당시의 병사들은 딱히 긴 시간 제대로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드물었고, 대개 필요시에 허겁지겁 긁어모은 농부들 출신이 대부분에 장비나 무기도 별 볼일 없었다. 우리가 삼국지관련 각종 미디어에서 보듯, 무슨 요새군대처럼 통일된 군복을 입은 것도 아니였다. 쉽게 말해 거의 오합지졸이였는데... 그런 병구성일수록 몹시 중요한 요소는 딱 두 가지! "병력의 수"와 "병력의 사기"이다. 헌데, 그 둘 중에도 더욱 중요한 것은 "사기"였다. 기세가 드높은 소수가 그렇지 못한 다수를 일방적으로 도륙하는 경우도 저 당시는 부지기수였고. 서양의 역사를 봐도 숫자가 많다고 볼 수 없던 로마군이 다수의 게르만족, 북아프리카에서 승리를 거둔 큰 이유는 잘 훈련되고 통제된 정예병들의 자신감에서 오는 결국은 "앞선 기세" 탓에, 상대들이 더 많은 수나 지리적 이점을 가졌음에도 오히려 기가 꺾인 탓이였다. 심지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그 무섭다는 '코끼리부대'를 앞세우고도 보병중심의 로마군에게 패했다. 이유는 카르타고는 코끼리를 앞세우고 나머지는 뒤로 배치, 코끼리가 짓밟고 휘저으면 나서서 시마이하는 전법인데, 로마군의 화살과 투창에 결국... 살로 이루어진 코끼리가 쓰러지면 그 후로는 대책이 없던 카르타고군은 기세가 꺾였기 때문. 아무튼 그렇다보니 저런 용감한 지휘관이 선두한 부대에, 겁을 먹는 장수나 병사가 있을리 만무하여 손견의 부대는 어지간한 적세력은 별 다른 전략없이도 죄다 씹어버렸던 것이다. 허나... 저 방식이 반대로 정말 극히 위험한 게.. 앞장 선 지휘관은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적병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고, 제아무리 무예가 뛰어난들... 절대 다수의 병력이 다구리를 놓으면 장사가 없고, 활같은 원거리무기에 대해서도 취약하며 또 언급했듯, 만에 하나 지휘관이 전사하면 그 중요한 기세가 꺾이기에.. 다수여도, 승세를 타고 있었어도,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패할 위험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저 방식의 장점덕에 열 번, 백 번 이긴들... 저 방식의 단점탓에 한 번 패하면.. 그 당장의 전투는 물론, 그 세력 자체의 존망이 걸리게 된다. 그렇기에 이미 진즉부터 손견의 측근들은 그의 무모한 선두돌격을 자중시켰으나 그때껏 멀쩡한 손견은 당연히 씹고 지고집대로 했고, 그러다 결국은 누가 어디서 던졌는지도 모를 돌팔매에 맞고 허망히 사망한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이러한 성향은 장남에게도 고스란히 유전된다는... 성격은 시원시원했던 모양이다. 처벌도, 용서도 화끈했고 철저한 행동파였다. 대개의 맹장들이 그렇듯, 성격이 불같고 급했으며 전략전술 등은 비겁한 꼼수로 생각하여 비중을 크게 두지 않았다고 한다. 물욕은 없으나 고집이 센 편이였고 대단히 헌신적(?)인 아버지로서 어느 정도 나이가 된 아들들은 전장에 늘 데리고 다니며 각종 군사전투관련 경험과 지식들을 쌓게끔 지도했고 무예도 직접 가르쳤다. 아내(오국태 부인)를 몹시 사랑했던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는데, 낙양에서 얻은 옥새를 원술에게 바치게 된 이유가 바로 원술이 손견의 아내를 인질 삼았기 때문이였다. 물론, 현대의 기준으로 아내가 인질인데 그깟 도장은 당연히 포기하는게 맞는거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여성인권은 지금과 비교불가인 거의 남성의 부록으로 여겨지던 때고 다른 인물들은 자신의 야망이나 위급시에 아내의 안위는 내팽개 친 경우가 부지기수에 심지어 아내가 여럿인 경우도 많았고 "옥새"는 그냥 열쇠도 같이 하는 도장집 가서 인감으로 쓸 거니까 소뿔로 파달라며 3만원 주고 잠깐 기다리면 도장아저씨가 돋보기끼고 레이져로 파주는 그런 물건이 아닌! 상당한 야망가였던 손견같은 이에게는 대단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당시로는 황실의 권위와 정통을 의미하는 물건이였다. 괜히 삼국지게임에서 옥새를 얻으면 여포도 매력이 100이 되는게 아니고, 원술이 아무리 또라이인들 이 옥새 얻고부터 황제의 꿈을 현실화시킨게 아니다. 게다가 당시 옥새를 분실한 후한 황실도 분실한 옥새를 새로 제작하지 못 하고 전전긍긍하던 것도 옥새는 어디 뒀는지 기억 안나면 다 서랍 뒤지고 엄마한테 어디 있냐 소리질러 찾다 끝내 기억 안나면 새로 마련하는 그런 물건이 아니였기 때문이였다. 옥새 이야기가 길어졌다만, 결론은.. 그런 어마무시대단굉장한 슈퍼레어템을 겨우(?) 아내 때문에 포기한 손견의 가족애가 깊었다는 것. 게다가 그런 가족애는 당시의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들에게는 결여된 가치관이였다는 점이다. 당장 조조만 해도 자기 죽게 생겼으니 장남 조앙을 내버렸고(당시의 장남의 가치와 위치는 상당했음!) 인의의 아이콘 유비도 자기가 위급하니 부인들과 형제들 내팽개치고 지살자고 혼자 내뺐으며, 기타 숱한 인물들이 아내나 기타 가족들에 대한 안위는 뒷전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여러분들도 만약 강남 테헤란로 한복판의 15층 짜리 빌딩 하나를 얻었거나 국회의원 공천권을 받았는데 누군가가 여러분의 아내나 여친을 인질삼아 내놓으라면 내놓겠나? (잠깐.. 당연히 안내놓는다는 전제로 이리 물어본 나만 혼자 지금 쓰레기가 되는건가!?) 하여간 단점도 적지 않았다만 이런저런 영웅호걸의 면모들이 있었기에, 그 DNA가 전달된 손책, 손권같은 이들이 그 인물많고 사건많던 중국 삼국시대 속에서도 큰 획을 그은 히어로가 될 수 있었다는 말씀! 오늘의 주인공인 굵고 짧게 살다 간 손견의 이야기는 여기서 매듭 짓는다. 이번 칼럼은 원래도 늦었지만 유독 더 많이 딜레이가 된 점 깊은 사과 드립니다...T-T 변명을 해보자면, 제가 늦은 나이에 다시금 학구열을 불태우느라 지금 사이버대학에 등록해 퇴근 후에 공부를 하고 있는데, 중간과제 제출 기간 및 중간고사 기간을 앞두고 과제와 시험공부 탓에 틈내기 쉽지 않았고, 또 한 가지는 제가 좀 더 좋은 회사에 보다 나은 조건으로 이직을 하게 되면서 이것저것 좀 정신이 없었어요.. 아무튼 저도 노느라 늦어진 것은 아닌 점 양해 바랍니다. 이번주와 다음주중으로 중간과제 제출도, 중간고사도 다 마무리 지어지니 그 후부터는 제깍제깍 올리겠습니다!
노숙 자경 (魯肅 子敬) A.D.172 ~ 217
이 칼럼을 시작하며 대략 스무 명 가량의 인물들을 다뤘지만 거의 매번 붙는 수식어가 바로 "연의의 피해자"라는 타이틀. 피해자가 있으면 반대로 수혜자도 있어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의도치 않게 피해자들만 줄줄이 다루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 역시 비록 그 피해가 앞선 다른 이들에 비해 경미하기는 하나, 그래도 피해자라면 피해자인 인물. 바로 "노숙"이다. 적벽대전 앞두고 항복론자들이 대다수였던 오에서 가장 앞장서서 항전을 외쳤고, 유비세력과 오의 연합에 있어 일등공신에, 주유 사후 오의 군권을 총괄했던 그의 숨겨진 그리고 연의의 각색 전의 본모습에 대해 알아보자! 양주 임회군 동성현.. 오늘날 중국의 안후이성 딩위안 출신이며, 없어 보이는 이름과는 달리 양주의 대호족 출신 금수저였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오냐자식이였으며 대대로 있는 집 아들내미라 마음의 여유가 넘쳐나다보니 재산을 들여 인근의 빈자들을 돕고 베풀며 뜻 통하는 명사들과 사교나 하며 근심없이 살던 양반이였다. 정사의 노숙전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이미지와 달리 체격이 제법 큰 편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난세에 걸맞는 스킬을 보유해야겠다는 생각에 어려서부터 궁술, 마술, 검술 등을 익히고 가난하지만 힘 좀 쓰던 장정들을 어깨로 고용하여 적잖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주유와의 인연도 이때 맺었으며, 당시 이미 공직에 있던 주유가 군량을 좀 협찬 받으러 노숙을 찾아가자 아예 곳간을 들어내다시피 퍼줬고 이에 뻑간 주유와 비즈니스를 넘은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고...ㅎ 이래저래 재산과 명성을 다갖춘 노숙을 가장 먼저 리쿠르팅한 것은 역시 당시에 상당한 유력군주였던 "원술". 그렇게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노숙이지만 원술의 하는 꼬라지를 보니 얘는 아니다 싶었고 당시는 무슨 사직서내고 마음대로 퇴사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였어서 원술의 스타일상, 그냥 그만둔다하면 뒤끝작렬이 예상되었던터라... 노숙은 일가친척 다 이끌고 짐을 싸서 '도망'을 친다. 그럼 그렇지, 빡친 원술은 애들을 풀어서 도망치는 노숙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추격대와 마주친 노숙은 이들을 설득하는 한 편, 방패를 세워놓고 활로 이 방패를 꿰뚫는 슈퍼파월을 보여주며, 호락호락 잡혀가진 않겠다는 경고를 했고, 설득도 설득이지만 그 궁술을 보고 쫄아붙은 추격대는 그대로 되돌아 가버렸다. (벌써 이 대목부터 노숙이 문약한 선비가 아님이 드러남) 이러고 도망가서 의탁한 사람은 바로 자신의 과다협찬을 받고 베프를 먹은 '주유'였다. 이 때, 주유는 자신이 모시던 "손책"과 노숙의 미팅을 주선, 손책도 노숙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헤드헌팅을 하려던 때 노숙의 사실상 부모님에 진배없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셔, 노숙은 할머니의 장례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 와중에 노숙의 친구였던 "유엽"이 마침 인근에서 세력을 키우던 '정보'(여러분이 아는 그 정보 아님)가 인재를 구한다니까 같이 가보자는 청을 받고 가려는데 (그냥 별 생각없이 아무나 섬기고 보는 스타일인가....) 그 소식 듣고 찾아온 주유의 설득에 당시 손책이 막 죽고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어버버하고 있던 "손권"을 섬기게 된다. (아무나 섬기는거 맞는 듯...-_-;;) 이 면접(?)에서 손권에게 노숙은 "천하이분지계"라는 테마로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여기에 감명받은 손권은 바로 노숙을 임용한 뒤 최측근에 두고 쓰게 된다. 당시 노숙의 프레젠테이션의 거국적 스케일은 아직 미성년자요, 아버지를 여읜지 그리 오래지 않아, 사실상 아버지 역할하던 형까지 잃고 난 후 자기 혼자 어떻게 세력을 굴려야할지 가늠을 못 잡던 손권에게는 실로 파격적이였으며, 심지어 훗날 천하의 남쪽을 평정 후 천자의 자리까지 나가시라는 노숙의 우쭈쭈가 가미되어 손권은 기분이 째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손권의 평생 겐세이맨이였던 "장소"는 노숙이 아직 손권을 곁에서 바로 보필하기엔 젊어서 경험도 적고 태도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노숙의 임용을 반대했는데 그럼 그렇지, 손권은 장소의 말을 그냥 씹고 노숙을 중용했다. 보통 한 세력의 우두머리를 섬기기 전에는 그 휘하의 실세들과도 접견하는 시간을 갖는데, 손권의 당시 오른팔인 주유와 왼팔인 장소를 조우하던 자리에서 주유와는 그닥 코드가 안맞던 장소였던지라 주유가 왠 젊은 놈 하나 데려와서 주군 측근에 바로 꽂을라치니 장소가 노숙에게 시비를 좀 걸었나본데, 노숙 역시 손권 다음 No.2인 주유가 하도 설득을 해서 온건데, 왠 꼰대가 태클을 거니 그닥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던 모양...ㅋㅋ 이때부터 장소와 노숙은 서로를 태클거는 상호태클지간으로 둘의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노숙이 오에서 펼친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친유비정책". 당시만 해도 유비는 자체 세력은 별 볼일 없이 유표에게 의지하다 유표가 죽고, 유표의 뒤를 이은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선언하여 형주의 반조조파였던 유표의 장남 유기와 결탁한 상태였는데.... 노숙은 비록 유비세력이 당장은 부실하지만 그 강대한 원소도 조조에게 작살나고 중원의 큰 세력이던 형주의 유씨집안도 조조에게 꿇은 상황에서, 천자를 등에 엎고 승상이라는 위엄을 지녔던 조조를 도리여 역적으로 몰며 대항하는 유일한 세력이며, 당시 천자인 헌제가 직접 족보를 뒤적여 한실의 종친임을 인정 및 좌장군이라는 결코 낮지 않는 공식직함도 파준 "명분"에 주목했다. 그런 유비와 손을 잡으면 유비가 가진 포텐과 명분을 빌려 조조와도 맞서고, 조조와 맞서는 것은 후한조정과의 맞다이를 의미하여 사실상 역적이 되지만, 유비가 지닌 명분 덕에 오히려 역적을 도모하는 정의파로 이미지 세탁이 되기 때문. 사실 유비의 이 메리트는 상당해서, 비록 한실종친이라고는 해도 서민출신에 세력도 별 거 없던 유비가 공손찬, 원소, 유표, 조조 등의 당시 내로라하던 강자들의 환영을 받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저 중 공손찬은 그런 유비가 지닌 명분보다 유비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유비를 서포트 해주긴 했지만 당시같은 난세에 인격이 꽝이던 공손찬이 단지 그저 동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비를 도왔을리는 없었기에... 당시 오 내부에서 이런 유비의 전략적 가치를 그리 크게 평가하는 이는 사실상 전무했다. 어쨌건 유비의 군세 자체는 당장 오에 있어 큰 전술적 가치가 없을만큼 대단치 못 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건 유비의 군사력만을 놓고 보는 한정적인 '전술적' 시야에서 그런 것이고, 그 외나 그 이후의 여러모로 넓고 멀리 바라보는 "전략적" 시야에서는 유비가 지닌 가치와 그 활용도가 대단했는데, 오에서는 이런 유비의 전략적인 요소를 뚫어보는 정치적 대국안을 지닌 이가 없었다는 뜻. 노숙은 손권에게 자신과 손권이 봐야 하고 가야 하는 길은 당장의 강동수성이 아닌, 장강 이남의 세력을 규합하여 강북을 평정한 조조와 대치하며 나아가 제위에 오르는 길임을 인지시켰고 그 시작점에서 시작하는 사업이 바로 친유비정책이였던 것. 노숙은 진정으로 손권을 위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자였고 유비에 대한 부분도 오로지 자기 주인에게 도움이 되는가 여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지, 전혀 절대 유비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닌 것이였고.. 이는 내 예전회사의 김이사에게 사람들이 들러붙어 온갖 설탕발림을 쳐바르는 이유가 회식 때마다 누구도 말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와서 술빨, 안주빨 다 극대화 시키고 노래방 가자고 진상 부려서 다음날 출근할 사람들 새벽 4시까지 집 못가게 해놓고는 이사씩이나 쳐되는게 법카로 1원 아니, 1전 한 번 긁는거 없이 시발새끼 담배도 심지어 애들꺼 달래서 피우는 그 새끼를 사랑해서가 아닌, 그 새끼가 인사고과 평점을 메기는 나쁜놈의 새끼라 어쩔 수 없음과 같다. 노숙이 이러한 친유비정책을 진행하며 가장 주안점으로 삼은 것은 손권세력과 유비세력을 서로 상호의존관계로 만들어 이와 잇몸이 되게끔 유비의 세력을 어느 정도 성장시키는 것이였는데, 이러한 투자를 위해 노숙은 철저하고 꼼꼼히 유비를 패트롤 하기 시작 했으며, 유표의 사망 당시 조문을 구실로 유비를 첫 대면한 것을 시작으로 심지어 유비가 조조에게 작살나서 허겁지겁 쫓기는 상황의 장판파까지 가서 유비를 살피며 손권과의 동맹을 제시했다. 삼국지연의에는 이런 노숙의 모든 선견지명과 노력이 다 짤리고 그냥 제갈량이 손권 단물 빼먹으려 뭣도 없는 주제에 허세로 혼자 유-손 동맹을 결성시키는 듯 나오지만 사실은 이렇듯 노숙의 선노력에, 이를 합당하다 여긴 양측의 초천재인 제갈량과 주유의 납득. 그리고 이 재사 셋이 논리를 모아 손권을 설득한 결과. 결국 이 동맹의 시너지는 둘을 합친 것보다도 최소 5배 가까이 더 많고 경험많은 대군단을 거느린 조조군세를 불싸르게 되며 사실상 조조는 이날 이후로 장강 이남을 포기하고 유종의 항복으로 얻은 형주의 장강 이남도 잃게 된다. 이후 적벽대승의 지분으로 유비는 형주의 장사, 영릉, 무릉, 계양 및 남군의 공안까지 다스리는데 손권의 허가를 얻어내는데 여기서도 손권을 강하게 설득한 것이 노숙. 삼국지연의 속 노숙은 제갈량에게 놀아나고, 주유에겐 갈굼 당하며, 손권의 눈치를 보는 뭔가 강동의 빵셔틀처럼 나오지만 사실은 열라 기 쎈 주유, 손권에게 당장은 좀 손해여도 훗날을 위한 투자임을 인지시켜 유비에 대한 지원을 설득하고 또 이런 유비에 대한 서포트를 발판으로 손권을 황제로 만들려는 거국적 스케일의 정치가였던 것. 주유 사후, 주유의 간언 및 손권의 의지로 노숙은 오의 군권전체를 통솔하며 실질적인 오의 서열 2위가 되고 이 때 각 군영들을 시찰하며, 평소 글도 모르는 잡나부랭이 취급하며 무시하던 "여몽"이 니미 도리여 자기도 못 보는 부분까지 캐치해가며 자기를 가르치려들자, 그 유명한 오하아몽 & 괄목상대 사자성어가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후에 여몽편에서 다루기로.... 하여간 이때껏, 스스로 문무겸전이여서 장소처럼 매가리도 없는게 쥐뿔 글 좀 읽었다고 앵기는 것들, 이전 여몽처럼 무슨 대가리도 근육일 것 같은 힘만 쎈 무식종자들을 모두 무시하던 노숙이였으나 이 일을 계기로 여몽과 급친해진다. 이 와중에..... 노숙의 작품이던 유-손동맹의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하니 이는 바로 "유비의 익주정벌"... 일전에 주유와 감녕의 주도로 유장은 좆밥이고 형주도 비록 유비에게 임대주긴 했어도 실상 우리땅이니 이제 천하이분지계의 마지막 퍼즐은 익주를 먹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당시 손권은 익주와 맞닿은 형주의 유비에게 이를 이야기하자 당시 유비는 유장이 자신과 종친이고... 그 땅은 오에서 멀며.. 험한 산악지대에... 들어가는 길목도 좁아 대군과 물자의 수송이 어렵고... 예로부터 장거리원정이 성공한 예가 드물고... 니들 거기 갔을 때 조조의 빈집털이는 어쩔 것이며.... 등등등등등등의 이유로 손권의 익주행을 반대했는데 당근 이는 제갈량과 유비 역시 자신들의 천하삼분지계의 마지막 퍼즐을 익주로 정해서였다. 아무튼 그때는 유비의 반대도 있고 하필 주동자인 주유도 죽어서 흐지부지 되었건만 그때 그렇게 거품물고 반대하던 그 유비가 익주를 따먹었다니까 손권은 빡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렇듯 유비는 익주를 먹으면서 자기의 본진인 형주는 관우를 남겨 수비케 한다. 이 때부터 관우는 명줄을 재촉하는 한편, 본인 스스로의 정치역량이 얼마나 후달리며... 또 본인 스스로 한 방면의 주둔 수비사령관으로서 얼마나 부족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당시의 관우가 어땠는지는 훗날 관우편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ㅎ 아무튼 당시 형주와 오의 접경지역에서는 빈번한 충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때마다 노숙은 자기선에서 우호적으로 재량껏 처신했지만 그 도를 넘어서기 시작하자 참다 못해 관우에게 독대를 요청하고 관우도 이에 응해, 둘의 접견이 성사된다. 연의에서는 관우의 호기와 노숙의 호구의 대비로 표현하나, 실상은 절대 달랐...아니, 틀리다. 이 당시 관우와 노숙은 서로의 경호병력은 물리치고 단둘이 오로지 칼 한 자루씩만 차고서 만나 논쟁을 펼치는데, 물론 당시 장비와 함께 "만인지적" 칭호의 유이한 그레이트 관우는 맨몸이라한들 노숙이 칼 아닌 총을 차고 나갔어도 그런 노숙의 허리를 뒤로 접을만큼의 위력을 지닌 사나이긴 했으나 노숙 또한 풍체가 작지 않고 힘과 패기가 없는 이가 아니였기에 전혀 쪼는 기색없이 관우를 만나 언성을 높이며 따박따박 할 말을 한다. 숙 : 니네형 익주 먹었으니 형주 돌려줘. 우 : 뭔소리냐... 숙 : 땅없어서 가여워 빌려준거잖아. 돌려줘. 우 : 우리형이 가엽다니!!! 숙 : 조조한테 작살나 쫓겨온거 우리가 땅 빌려준거임. 그런데 익주도 생겼으니 꽁으로 빌리던 형주 줘. 우 : 우리 없었으면 니들도 못 먹을 땅이였어. 숙 : 하아.. 주유가 거의 다 차린거, 밥숟갈만 얹었잖아. 그럼 저번에 익주는 형제의 땅이라 우리보고 치면 안된다더니 남인 우린 못 하게 하고 형제라는 너희 형은 왜 그랬음? 그리고 형주 다 내놓을 거 없이 계약상 우리에게 빌린 지역만 달라는데 뭐 문제 있음?? 우 : 천하는 덕 있는 자의 땅이거든!!?! 숙 : 오호라? 그럼 지금 제일 넓은 땅 가진 조조는 니미, 니네형과 우리 마스터보다 덕이 더 많아 땅부자 되신거임? 그럼 그 전 너희형은 덕이 부족해서 땅이 없었다 갑자기 덕폭탄 맞음? 아니 그리고 관우 니는 세상에 땅크기로 사람덕을 측정하는 덕투력측정기였음!??! 와.. 세상이 관우를 의사랬는데 이거 뭐 그냥 복덕방 아저씨였네.. 대실망 우 :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숙 : 그게 아니면?? 우 : 날씨가 좋군! 숙 : 뭐래는거야 이 수염쟁이가... 땅내놔! 우 : 씨팔 형한테 말해! 왜 나한테 지랄이야 지랄이! 결국.... 오는 익주의 유비에게 사자를 보내 강력 컴플레인을 걸고 유비측은 자신들이 실효지배 하고 있으나 영유권을 주장하는 오에 장사, 강하, 계양 세 군을 되돌려 주게 된다. 사실, 유비측 입장에서도 노숙의 저 논리에 마냥 데꿀멍되버릴만큼 명분 없는게 전혀 절대 아니였으나 늘 춘추를 지니고 다니신다는 관운장께서는 그저 폼으로 춘추좌씨전을 갖고 다니신건지, 매번 첫 페이지만 읽다 잠드셨는지는 모르나... 노숙의 어거지에 제대로된 대꾸 몇 마디 못 해보고 리타이어 되버리는게 바로 정사! 아무튼 다 떠나서 이번은 노숙편이니만큼 노숙이 주인공이니, 노숙입장에서 보자면 그 무력깡패인 관우와 독대하고도 일절 위축없이 자기주장을 내세워 관우를 그로기상태로 몰아간 그의 패기와 용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부잣집 금수저에 어려서부터 베풂을 좋아했다고는 하나, 본인 스스로에 대해서는 검소했고 스스로에게 있어서 상당히 엄격했던 사람이였다. 다만, 남에게도 엄격했던거 같다... 기록을 보면 거의 활자중독에 가까운 사람이였는지, 시국이 안좋고 격무에 시달릴 때조차 책을 읽었다. 주량이 약한건 아니였던듯 보이나 필요해서가 아니면 좀처럼 입에 대지는 않았던거 같다. 본인이 인정할만하다 싶으면 스스로를 낮추며 공경하는 자세로 대했으나 그렇지 않다면 단호박이였다. 그리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나 당장 그러한 이미지들의 결실인 첨부던 일러스트들만 보더라도 그냥 문관필이지만, 일반 행정관련 내정을 본 적이 없는 군무만 봐왔던 인물로, 전장에도 수 차례 출전하며 야전경험도 적잖았던 사람이였다. 주유 사후에 대도독을 맡으며 오의 No.2였으나... 안타깝게도 장수하진 못 했다. 사망원인으로는 과로에 의한 급성사와 위암설이 있으나 둘 다 유력하진 않다. 언변이 워낙 좋았다고 하는데, 말을 길고 화려하게 하진 않았지만 할 말만 조리있게 딱딱 짚어 하는 스타일이였다. 오와 손권의 미래전략에 있어 오의 마지막 진보주의자였다. 주유와 노숙만이 진정한 오의 팽창주의자였기에 오의 물리적 확장을 추구하며 그와 관련된 전략들을 제시하며 준비했었으나 그 후의 여몽과 육손 등은 물론 훌륭한 인재들이긴 했어도 오세력의 유지와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을뿐 사실상 오의 대외진출에는 소극적이였다. 물론, 훗날 제갈각이 있긴 하나 주유 & 노숙과는 조금 다른 사례이기도 하고... 사실상 노숙의 사망과 함께 오는 천하이분지계나 노숙이 주장하던 개념의 천하패권은 물건너 간 셈이다. 물론, 천하이분은 아니여도 삼분은 했다지만 이는 위와 촉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오의 의지와는 별개로 형성된 것에, 손권이 제위에 오른 부분 역시 천하의 패권을 쥐고 기성국가의 권한을 이양받으며 제위에 오른 조비나 그 기성국가의 명맥을 이어 부흥을 꾀하고 기성국가를 패망시킨 국가를 타도한다는 명분으로 제위에 오른 유비의 그것에 비해... 딱히 세가 커진 것도, 명분도 없는 그냥 날치가 뛰니 짱뚱어도 뛰는 식의 미투제위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가 제시한 친유비정책은 단기적으로야 오에 손실 또는 이익의 저하를 가져오긴 했으나 바로 그 전략덕에 오는 물론 유비세력 역시 초반의 그 엄청난 기세로 남하하는 조조에 맞서 이길 수 있었던 것. 노숙 사후와 맞물려, 유손동맹이 와해되고 관우의 사망이 겹치며 이는 또 이릉대전으로 옮아가는 와중에.... 훗날 제갈량의 고군분투로 촉오동맹이 재건되기까지 안그래도 둘이 합쳐 위에 못 미치는 촉과 오는 서로간의 싸움으로 적잖은 국력을 소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노숙은 어느 조직에나 있진 않지만, 어느 조직에나 필요한 "미래와 성장"을 내다보는 진취적인 인물이였다. 열 명, 백 명의 현상유지자들보다 이런 한 두 명의 진보주의자들이 있을 때 그 조직은 나중을 준비하고 또 그 나중을 준비하고자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되며 투자라는 것을 할 수 있다. 물론, 미래에 대한 투자의 불확실성은 어쩔 수 없는 리스크지만 이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뛰어난 컨설턴트가 필요한데, 오와 손가에게 있어 바로 그 마지막 컨설턴트였던 노숙이였다.
[칼럼] '메타버스'는 '헛소리'가 맞았던 걸까?
'Tech World in 2023' ① 최근 인터넷에서 한 사진을 보고 복잡한 웃음을 지었다. 'Tech world in 2023'이라는 이름의 사진은 물놀이를 2023년의 기술 동향에 빗댄 일종의 인터넷 밈이다. 이미지 속 챗GPT(ChatGPT)는 보호자와 즐거운 물놀이를 하고 있는 반면에, 메타버스(Metaverse) 아이는 무관심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화면을 내리면 바닷속에 수장된 해골이 보이는데, 거기에는 'NFT'라는 딱지가 붙어있다. 이 '짤방'이 흥미로운 이유는 근래 모습을 함축적으로 나타냈다는 데 있을 터. 지난 몇 년간 게임업계는 메타버스와 NFT(넓게는 P2E, 블록체인까지)라는 키워드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공룡'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글로벌 게임사부터 영세한 규모의 개발사까지 모두 이 키워드에 발을 걸치려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기자의 메일함에는 신규 프로젝트 소개, MOU 보도자료, 취재 요청 등 각종 문의 메일이 쏟아졌다. 어떤 날에는 100통 가까이 관련 키워드가 담긴 메일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메일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요컨대 지금 업계는 갓 꿈에서 깬 몽롱한 사람을 보는 듯하다. 그가 꾼 꿈이 예지몽인지 백일몽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대체로 달콤한 꿈이었고, 그 꿈은 당장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입 안이 쓰다. 그리고 날은 대단히 춥다. 여러 게임 회사에서 '정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짤방' 속 물놀이를 즐길 때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단정 지으려는 것은 아니다. 메타버스는 홀로 잘 헤엄쳐서 'Young'하고 'MZ'한 모습으로 각광받을 수 있다. 잠겨있던 NFT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 짧았던 영광을 더 길고 뜨겁게 재현할 지도 모른다. 곳곳에 그런 희망은 남아있고, 몇몇 프로젝트는 중단되지 않고 진행 중이다. 아직 기자에게는 메타버스와 NFT의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할 재주가 없는데, 판을 벌인 쪽에서 로드맵을 제시할 것으로 믿고 있다. 2023년 2월 14일, 마냥 달콤한 전망을 내놓기에는 씁쓸한 구석이 있다. Tech world in 2023이라는 이름의 유머 자료.  본래 이 사진은 지금 뜨거운 트렌드와 한물 간 트렌드를 비교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일종의 밈이다. # 메타버스: 두 마리 공룡이 어디로 가는지 보면... 업계의 공룡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자. 메타버스 사업은 그것이 애초에 중장기적인 계획이었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신속하게 취소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2022년 10월부터 홀로렌즈, 서피스 노트북, 그리고 엑스박스 관련 부서에서 일부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불확실한 경제 상황 속에서 MS는 전체 직원의 5%에 달하는 10,000여 명의 직원을 정리해고할 방침이다. 그리고 아예 정리한 부서가 있으니, B2B 메타버스 사업부다. 감원 수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아예 해체했다. 이 사업부는 산업용 메타버스(Industrial Metaverse) 소프트웨어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일했던 곳이다. 이 소식을 최초로 전한 디인포메이션(The Information)에 따르면, 메타버스화(化)된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기업들에게 전력, 로봇, 운송 네트워크 등을 제어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산업용 메타버스 코어(Industrial Metaverse Core)라는 팀에서는 100명의 직원들이 일하고 있었지만, 출범 4개월 만에 팀이 사라졌다. 디인포메이션은 MS가 이 팀을 '죽였다(killed)'라고 썼다. MS가 발표한 B2B용 산업용 메타버스 프로젝트는 팀 자체가 해산되면서 잠정 중단됐다. 그간 AR, VR 기술은 메타버스의 핵심 동력으로 여겨졌다. 기업들은 HMD를 착용한 직원들이 가상 공간에서 회의를 나누는 모습을 멋지고 대단한 일처럼 소개했다. 그러나 당분간은 조금 더 팀즈나 줌을 이용해야 할 것 같다. (그마저도 코로나19에 대한 우려가 사실상 종식되면서, 일터에서 재택근무는 빠르게 지워지고 있다. 사장님들은 직원이 밥값 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하는 듯하다.) MS는 알트스페이스VR(AltspaceVR)의 서비스를 3월 10일 종료한다. 2017년 MS로 인수된 이 서비스는 VR 플랫폼으로 월드에 입장해 각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MS는 개발자를 위한 MR 툴킷인 MRTK 개발팀도 해산했다. 일선 VR 개발사들이 대부분 MRTK를 이용해 콘텐츠를 개발해왔다는 점에서 충격적인 발표다. MS의 홀로렌즈 프로젝트도 잠정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현재 MS에 남아있는 유의미한 VR 툴은 개발자용 클라우드 플랫폼 매시(Mesh) 정도다. 회사 이름을 메타로 바꿔버린 (구)페이스북은 어떨까? 지난 2월 2일 발표된 메타의 연간 실적을 보면, 메타의 VR, AR 사업을 총괄하는 리얼리티 랩스는 지난 한해에만 137억 달러, 약 16조 8,236억 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전조는 2022년부터 있었다. CEO 마크 저커버그는 11월 사원 13%에 달하는 11,000명을 정리해고했다. 주력 인력 감축 대상은 VR·AR 사업 부문이었다. 저커버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다. 그는 해당 발표에서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전 세계가 급속히 온라인으로 이행하고, 전자 상거래 급증으로 해당 시장의 매출이 대폭 확대되었다. 이러한 가속 현상이 판데믹 종료 후에도 지속할 것으로 다들 내다봤고 나 역시 그랬다. 이에 투자를 대폭 확대했으나, 예상만큼의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다"라고 썼다. 메타는 지난 1년간 메타버스 기술에 100억 달러(약 13조 원) 넘는 돈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메타버스 <호라이즌 월드>에서 회사 새 비전을 소개했던 저커버그는 훗날 자신의 선택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전설적인 FPS 개발자이자 VR 산업의 토대를 다졌던 존 카맥마저 메타를 떠났다.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오큘러스의 최고 기술 책임자(CTO)를 맡았다가 최근까지 메타의 VR 총괄 고문직을 수행했던 그는 "VR에서의 내 10년은 이제 끝났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메타를 떠나면서 페이스북에 남긴 글에 "시스템 최적화 담당자로서, (메타 퀘스트 2) GPU 사용률이 5%인 것이 고통"이라며 "말도 안 되는 양의 인력과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끊임없이 낭비하고 있다"라고 썼다. 메타버스는 공룡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거시적인 경제 환경만 좋아지면 MS와 메타가 메타버스로 다시 뛰어들 수 있다. 공룡들이 떠난 틈을 타서 다른 기업이 멋진 메타버스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기업들이 MS와 메타의 공격적인 투자를 언급하며 메타버스의 정당성을 획책했던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기자가 보고 들은 강연, 발표, 논문, 보고서, 상품소개서는 하나 같이 두 회사를 보증수표처럼 써왔다. 같은 반열에 이름이 올라가는 메타버스의 상업성에도 물음표가 가시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메타버스로는 <제페토>가 있다. 이 서비스를 운영 중인 한국의 네이버제트는 2021년 기준 1,129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몇 분기 째, <제패토>도, <이프랜드>(SKT)도 콜라보나 MAU(월 이용자 수)만 이야기되고 있다. 명품을 걸친 아바타만 봐서는, 일회성 이벤트만 봐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구찌를 입은 <제페토> 아바타는 분명 멋있고, 예쁘지만 <제페토> 운영사의 실적은... # 메타버스 열풍이 지나가면, 누가 책임지지? 다시 존 카맥으로 돌아오자. 그 정도 되는 개발자의 말이라면, 조금 더 알아볼 가치가 있다.  존 카맥은 2021년 페이스북 커넥트 기조연설에서 "메타버스 수립계획을 세우는 것은 메타버스를 실현하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라고 했다. 메타버스란 기술의 발전으로 자연스럽게 도달될 것으로, 인위적으로  앞당길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는 "나는 메타버스가 존재하기를 원하지만, 메타버스에 곧바로 착수하는 것이 메타버스를 실제로 만들어 내는 좋은 방법은 아니다"라고 고백했다. 2013년부터 VR 기술 개발에 매진했던 존 카맥은 메타를 떠났다. 그런데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세금을 들여 메타버스의 기반을 만들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뒤이은 윤석열 정부도 메타버스를 '4차 산업혁명', '미래 먹거리'로 지정하고 육성에 열을 올려왔다. 메타버스를 두고 '헛소리다', '멈춰야 한다', '투자를 줄여라'와 같은 정면 비판, 신중론, 회의론 등이 무수히 많이 제기되었지만, 정부 부처들은 메타버스에 투자하는 것을 기정사실화한 채 '메타버스의 게임 심의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수 개월 넘게 갈등해왔다. 문체부와 과기부 두 부처는 메타버스 내 게임물의 심의를 어떻게 할 지를 두고 수 개월 째 갈등하다가 최근 게임산업법을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국회에서는 메타버스 진흥을 위한 입법 활동까지 이루어지고 있으니 꼴은 점입가경이다.  바로 오늘(2월 14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는 '메타버스 진흥법' 3종을 병합심사해 통과시켰다. 메타버스의 정의를 내놓고, 전문 인력 양성과 기술 개발을 위한 조세 감면 근거 등도 마련했다. 이 법에 따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메타버스 산업 진흥을 위해서 세금을 감면할 수 있다. 자율규제를 적용해, 장관 인가를 받은 협회가 자율적으로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수 있게 했다. 이 법이 과방위 법안소위를 방금 넘어갔다. 이 법은 국회 본회의로 갈 것이다. 심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과방위 소속 의원들은 메타버스를 얼마나 많이 접했을까? 한국남부발전에서 제주도 한경풍력단지를 <제페토> 메타버스로 만든 'KOSPO 재생에너지테마맵'을 들어가서 해봤을까? 1단계 사업비에 39억 원이 배정된 서울시 공식 메타버스인 <서울 메타버스>에 들어가봤을까? 메타버스 자격증 실태를 알까? 전술한 맥락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메타버스 서울> (2023) 기자는 게임개발자들이야말로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고 믿는다. GDC는 매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개발자 콘퍼런스다. 2023년 개최를 앞두고 주최 측은 2,300명의 개발자에게 설문을 돌리고 '메타버스 개념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기업/플랫폼'을 골라달라고 요청했다. 45%의 선택을 받아 1위를 한 항목은 '없음 - 메타버스 콘셉트는 절대로 구현되지 않을 것'이다. 2위와 (공동) 3위는 메타버스 유행 전에 출시된 '게임', <포트나이트>(14%), <마인크래프트>(7%)였다. 네이버의 제페토는 1% 미만의 응답을 기록했다.  "메타버스 개념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기업/플랫폼은?" 이어서 NFT 이야기를 해보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