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 푸아티에의 기욤의 기록
헤이스팅스 전투를 다룬 가장 긴 산문 기록은 푸아티에의 기욤이 쓴 '노르만인들의 공작이자 잉글랜드인들의 왕 윌리엄의 무훈' (Gesta Willelmi ducis Normannorum et regis Anglorum)이다. 푸아티에의 기욤은 노르만인이며, 처음에는 군인으로서 나중에는 군종사제로서 윌리엄 공작을 섬긴 신하였기 때문에 이는 매우 가치있는 기록이다. 그는 군사 분야의 전문가였고, 비록 1066년 원정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참전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투가 있은 지 불과 몇 년 후인 1071년경에 이 기록을 썼다. 따라서 1066년의 원정에 대한 그의 설명은 대체로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편향된 시선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노르만인이자 공작의 열렬한 숭배자이며, 그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영웅서사의 수사법과 고전의 이미지를 빌려온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앵글로색슨측의 명분과 행동에 대한 서술은 신뢰도가 떨어지며, 사건들에 대한 그의 해석과 표현은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Stephen R Morillo, The Battle of Hastings: Sources and Interpretations 공작은 교황이 보내준 깃발 뒤에 군대를 매우 효율적인 대형으로 배치한 뒤 전진시켰다. 그는 활과 쇠뇌로 무장한 보병들을 선봉에 배치했다. 사슬갑옷을 입은 더 강한 보병들이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후위에는 기병 부대들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 공작 스스로 정예 기병들과 함께 자리를 잡았다. 후방에서 그는 명령과 동작으로 전군을 지휘할 수 있었다. 만약 고대의 작가가 해럴드의 군대의 행군을 묘사한다면, 그들이 지나간 길의 강이 말라붙고 숲이 평야가 되었다고 적었을 것이다. 수많은 잉글랜드인들이 잉글랜드 각지에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사랑하는 조국을 외국인들로부터 지키려는 열망에 불탔고, (비록 그 명분은 부당했지만) 그중 일부는 해럴드를 흠모했다. 그들의 피의 동맹인 데인인들의 땅에서도 많은 지원군이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윌리엄 공작을 노르웨이의 왕보다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감히 선제공격을 하지 못하고 방금 지나온 숲 근처의 언덕 위에 진을 쳤다. 그리고 곧바로 말에서 내린 다음 밀집한 채 정렬했다. 공작과 그의 신하들은 지형의 불리함에도 전혀 겁먹지 않고, 가파른 경사를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트럼펫 소리가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노르만인들은 대담하고 신속하게 공격을 개시했다. 마치 법정에서 소송을 변론할 때 원고측이 먼저 발언을 시작하는 것처럼. 그렇게 노르만인 보병들은 많은 잉글랜드인들을 화살로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며 가까이 접근했다. (궁수들의 후방에서 진격하는 노르만 기사들) 잉글랜드인들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용감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투창을 비롯해 치명적인 도끼와 막대기에 묶은 돌 등 다양한 원거리 무기를 던졌다. 이 치명적인 우박 아래에서 노르만인들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기사들이 그들을 구하러 왔고, 그렇게 후위가 선봉으로 바뀌었다. 기사들은 원거리 전투를 멸시하고 거부하여 검을 들고 대담하게 공격을 가했다. 노르만인들과 외국인들이 곳곳에서 지르는 커다란 함성이 무기 부딪치는 소리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찬 신음에 파묻혔다. 그렇게 한동안 양측 군대는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잉글랜드군의 방패벽에 돌격하는 노르만 기사들) 잉글랜드인들은 높은 지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방어에만 전념하는 전술의 이점, 많은 병력과 밀집대형, 그리고 방패와 다른 방어 장비들을 쉽게 관통하는 그들의 전쟁 무기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그들은 감히 검을 뽑아 들며 공격해온 적들을 완강하게 막아서거나 쫓아냈다. 심지어 멀리서 투창을 던지는 적들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그래서 이 맹렬한 반격에 겁을 먹은 좌.익의 보병들과 브르타뉴 기사들, 그밖의 보조병들이 등을 돌려 도망쳤고, 무적의 노르만인들에게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공작의 전열의 대부분이 패주했다. (브르타뉴 빤스런) 육지와 바다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던 로마 제국의 군대도, 자신들의 지휘관이 전사한 것을 알았거나 그렇게 믿었을 때는 도망쳤다. 노르만인들은 공작이 전사했다고 믿었고, 그들의 후퇴는 부끄러운 도주가 아니라 비탄에 잠긴 퇴각이었다. 공작은 잉글랜드군의 상당수가 노르만인들을 추격하기 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고, 도망치는 부하들을 가로막고는 창대로 때리며 위협해서 멈춰 세웠다. 그는 투구를 벗어 올려 얼굴을 드러내고는 이렇게 외쳤다. "날 봐! 난 살아있고, 주님의 도움으로 승리할 것이다.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도망치는 거야? 너희에게 열려있는 퇴로 따윈 없다! 양처럼 도살할 수 있는 나약한 적들에게 쫓기고 살해당하는 꼴을 봐라! 너흰 패배와 영원한 불명예를 얻기 위해 승리와 불멸의 명성을 포기하고 있어. 지금 도망치면 너희들 중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용기를 되찾았다. (윌리엄 공작의 생존 확인) 공작은 신하들의 앞에 서서 돌격했고, 왕인 자신에게 반역했으므로 죽어 마땅한 반항적인 종족을 검으로 베어 넘겼다. 그것을 보고 사기가 오른 노르만인들은 자신들을 추격해오던 수천 명의 잉글랜드인들을 포위해서 순식간에 학살했고, 단 한 사람도 살려 보내지 않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노르만인들은 잉글랜드군의 본대를 향해 다시 강한 결의를 가지고 진격했다. 방금 입은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인들의 숫자는 전혀 줄어든 것 같지 않았다. 잉글랜드인들은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싸웠고, 특히 대열에 틈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대열이 얼마나 빽빽한지, 전사자들이 바닥에 쓰러질 공간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빼어나게 용맹한 기사들의 검 아래에서 곳곳에 길이 뚫렸다. 비록 그들 중에는 멘, 프랑스, 브르타뉴, 아키텐 출신의 기사들도 있었지만, 가장 돋보인 것은 노르만 기사들이었다. 젊은 노르만 기사 로베르는 보몽의 로제의 아들이며 묄랑 백작 위그의 조카이자 후계자로...... (후략) (노르만 기사들의 2차 돌격) 노르만인들과 그들의 동맹군은 자신들이 처음 도주했을 때 일어난 일을 기억했다. 그래서 그들은 단단하게 밀집한 적군을 큰 피해 없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부러 등을 돌려 도망치는 척했다. 잉글랜드인들은 환호했고, 승리의 함성으로 서로를 격려하면서 노르만인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도망치는 적을 쫓아 수천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마치 날갯짓하듯 뛰어 내려왔다. 노르만인들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고 그들을 포위해서 전부 학살했다. 같은 수법이 두 번이나 성공하자 사기가 오른 노르만인들은 다시 잉글랜드군 본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적의 대열은 여전히 위협적이고 틈이 없었다. 그래서 한쪽은 못이 박힌 듯 굳건히 서서 움직이 않고 다른 쪽은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을 가하는 특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잉글랜드군은 갈수록 약해졌고, 마치 패배로써 죄를 자백하고 있는 것처럼 고통을 감내했다. 노르만인들은 화살 세례를 가했고, 잉글랜드인들을 부상 입히고 제자리에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죽어서 바닥에 넘어지고 있는 전사자들이 살아서 서 있는 자들보다 더 역동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경미한 부상을 입은 자들은 동료들의 밀집한 대열 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짓눌려 죽었다. 그렇게 운명은 서서히 윌리엄 공작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은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와...... (후략) 적들 중 상당수는 한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기마 전사의 모습을 보고 싸우기도 전에 겁에 질렸다. 공작의 말 세 마리가 전투 도중 죽어서 쓰러졌다. 그는 위기에 굴하지 않고 세 번 모두 땅으로 뛰어내렸고, 준마를 잃은 원한을 지체 없이 갚았다. 여기서 공작의 속도와 체력과 용기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분노를 실은 칼날로 끊임없이 방패와 투구와 사슬갑옷을 꿰뚫었고 방패로 많은 공격을 받아쳤다. 많은 기사들이 부상당하고 지쳤음에도 공작이 도보로 싸우는 것을 보고 경탄하여 다시 용기를 얻었다. 심지어 피를 많이 흘려 쇠약해진 부상자들도 일부는 방패에 몸을 기댄 채 용감하게 싸웠다. 싸우지 못하는 부상자들은 동료들이 두려움 없이 공작을 따라가 승리를 놓치지 않도록 말과 몸짓으로 격려했다. 공작 자신도 많은 부상자들을 돕거나 구조했다. (해럴드 왕의 죽음) (해럴드의 동생들의 죽음) 날이 저물 무렵 잉글랜드인들은 노르만인들에게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많은 병력을 잃어서 약해졌으며, 왕 자신과 왕의 형제들, 그리고 왕국의 귀족들 중 많은 수가 전사했고, 남은 병사들도 거의 탈진해서 어떠한 구원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노르만인들이 동료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약해지지 않고, 마치 싸움 도중 새로운 힘을 끌어낸 것처럼 처음보다 더 맹렬하게 밀어붙이는 것을 보았다. 공작은 분노에 가득 차서 적들에게 아무런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오직 승리만이 군인으로서의 열정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등을 돌려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도망쳤다. 일부는 말을 잡아탔고, 나머지는 두 발로 도망쳤다. 일부는 길을 따라 뛰었고, 나머지는 인적 없는 삼림으로 들어갔다. 일부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나머지는 너무 쇠약해져서 멀리 도망치지 못했다. (잉글랜드인들의 도주) 군사갤러리 prevot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