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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강한나, 모두를 깜짝 놀란 '반전뒤태'

배우 강한나가 3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우동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고 있다. <가장 가까이 만나는, 가장 FunFun 한 뉴스 ⓒ 스포츠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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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골골 골골
노팬티네...ㄷㄷ쩐당 후루룹
헐헐 엉덩이 보이겠다......
등에 왠지 끈 끼우는거 있는거 같은데? 아닌가ㅋㅋㅋㅋ 안낀게 더 ㅎㅅ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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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악마에 5년간 성폭행 당한 20대 여성의 ‘지옥같은 삶’
지난달 27일 경찰서로 뛰어 들어온 한 여성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눈물범벅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가씨.” 형사들의 거듭된 질문에 박은경(가명·27) 씨는 “저를… 저를…죽이려 해요”라며 1시간 가까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휴대전화가 쉬지 않고 울렸다. 형사들의 설득에 가까스로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스피커폰으로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4년 8개월 동안 성폭행을 당했지만 도저히 신고할 엄두를 못 냈던 그 사람, 이경수(가명·55)였다. 신고 후 일주일 만인 6일. 어렵게 인터뷰에 응한 박 씨는 우윳빛 피부에 단아한 외모였다. 대학 시절 그녀의 꿈은 스튜어디스였다. 5년 전 항공사 면접을 앞두고 찍은 이력서 사진은 이제 경찰서 조사 서류에 붙어 있었다. 담당형사는 “지금도 예쁘지만 그땐 정말 티 없이 맑은 아가씨였네”라며 혀를 찼다. 지난 5년간 그녀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 ‘친절한 아저씨’와의 만남 두 사람의 악연이 시작된 것은 2006년 여름. 박 씨는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한 지역축제에서 영어통역 봉사를 하고 있었다. 말을 타고 해변을 오가던 이 씨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젊은 사람이 참 성실하네. 수양딸 삼고 싶어.” 박 씨는 “머리가 벗어지고 얼굴이 쭈글쭈글한 게 딱 봐도 할아버지였다”고 그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그래도 동네 주민의 호의려니 생각한 박 씨는 부담 없이 마음을 열었다. 박 씨가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취업 준비를 위해 통역 봉사를 하게 됐다는 걸 파악한 이 씨는 “대기업 임원 친구들을 소개해 주겠다”며 저녁 식사자리에 초대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이 씨는 갑자기 모텔 앞에 차를 세우고 문을 잠그더니 17cm 회칼을 꺼냈다. 성폭행을 한 뒤엔 휴대전화로 촬영한 나체 사진을 보여주며 “신고하면 네 엄마 아빠한테 사진 보내고 몰살해버리겠다”고 말했다. 단 하루의 악몽이길 바랐지만 그게 시작이었다. 박 씨가 취업 준비를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가 연락을 피하자 이 씨는 고시원 앞까지 찾아오기 시작했다. 박 씨는 그 와중에도 토익 점수를 만점 가까이로 올리고 회계관리사 등 7개의 자격증도 땄다. 대학을 수석 졸업한 박 씨는 고향에 있는 초봉 3500만 원의 유명 공기업에 취직했다. 하지만 이 씨는 “어렵게 들어간 회사 못 다니게 하겠다”며 박 씨를 협박해 휴일마다 자기 집으로 불러 성폭행했다. 몸부림치며 저항하면 방 안에 있는 비상탈출용 완강기 줄로 목을 조르며 “목숨으로 사랑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또 “같이 죽자”며 각자 한 손씩 손수건으로 묶은 뒤 저수지로 끌고 들어가 익사 직전까지 갔다 낚시꾼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박 씨는 “살려주면 시키는 대로 하겠다”며 애원했다. 정말 죽을 수 있겠다는 공포가 매번 신고할 용기를 꺾었다. 직장 동료들은 금요일이 되면 화색이 돌았지만 박 씨는 목요일부터 두통에 시달렸다. 회사에 안 가는 공휴일, 명절도 마찬가지였다. “달력을 펼쳤는데 그달에 공휴일이 많으면 정말 죽고 싶었어요.” 평일에도 자유는 없었다. 오전 8시와 점심 식사 후 낮 12시 반, 퇴근 무렵인 오후 5시 반, 자기 전인 오후 9시 반, 휴대전화에선 알람이 울렸다. 하루 4차례 중 한 번이라도 전화를 빼먹으면 그녀의 집까지 달려와 밤새 괴롭혔기 때문이다. ○ 그렇게 당하면서 왜 신고도 못 했냐고요? 지옥이 시작된 지 1년쯤 되던 날, 박 씨는 단짝 친구에게서 자신처럼 성폭행을 당한 후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친구와 함께라면 신고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친구가 먼저 신고를 하자 경찰은 범인을 체포해 피해여성 8명을 추가로 밝혀냈다. 하지만 그들은 경찰의 진술 요청에 하나같이 “기억이 안 난다”며 거부했다. 결국 범인은 징역 2년의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박 씨는 이 씨를 경찰에 신고해도 잠깐 잡혀 있다 다시 나와 반드시 보복할 것이란 생각에 또 용기를 접었다. 이 씨는 종종 자신의 동창 모임에 박 씨를 데리고 갔다. 그러곤 “내 마누라야. 영계랑 사는 게 부럽지”라고 자랑했다. 그때마다 박 씨는 죽고 싶을 만큼 치욕을 느꼈다. 하루는 이 씨의 ‘50년 친구’라는 사람이 조용히 박 씨를 불렀다. “앞길이 창창한 처녀가 왜 이러고 사니. 내가 네 아버지라면 지금 당장 저놈을 죽여버릴 거야.” 박 씨가 눈물을 흘리며 “가족을 다 죽이겠다는데 어떻게 신고해요”라고 하자 그는 “그럼 이렇게 계속 살래? 죽을 때 죽더라도 신고해서 잠시라도 편하게 사는 게 낫잖아”라고 했다. 그 사람 말처럼 박 씨도 수없이 신고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끝내 단념하게 만드는 건 ‘엄마’였다. 박 씨가 대학 1학년 때 엄마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경남의 한 소도시에서 홀로 살았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박 씨는 매달 생활비와 한약을 지어 보냈다. “대학 수석 졸업하고 좋은 데 취직한 효녀라고 주변 분들에게 그렇게 자랑을 하셨어요. 근데 제 상황을 아시면…제가 엄마한테 어떻게 그 얘기를….” 박 씨는 내내 침착하게 과거를 얘기했지만 엄마 얘기가 나오면 목이 메었다. 그 효심이 박 씨에겐 아킬레스건이었다. 이 씨는 그녀가 연락을 피할 때마다 그녀의 엄마가 사는 도시로 내려가 해당 지역번호인 0××가 찍히도록 전화를 걸었다. “지금 네 엄마 집 앞인데 쇠망치로 대가리를 부숴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 씨는 늘 회칼과 손잡이 부분에 붕대가 감긴 30cm 길이의 무거운 쇠망치를 가지고 다녔다. 침대 머리맡에 있던 공기총도 수시로 꺼내 겨누곤 했다. 마음을 굳게 먹었다가도 박 씨는 “제발 엄마는 건드리지 마라” 하고 사정해야 했다. 그렇게 억지로 만난 날 밤이면 박 씨는 옆에서 코를 골며 자는 그의 얼굴을 보며 손잡이 붕대가 누렇게 된 쇠망치를 수없이 들었다 놓았다. 박 씨를 만나기 전 이 씨에겐 강간치상 등 6번의 전과가 있었다. 이 씨는 이혼한 전처와 그 이혼을 도와준 처남을 죽이겠다며 칼로 협박하다 2008년 7월 다시 수감됐다. 그는 교도소에 가면서 “미행 붙여놨으니 다른 남자 만날 생각하지 말고 면회와 편지를 꼬박꼬박 하지 않으면 나와서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박 씨에겐 빈말이 아니었다. 이 씨는 전처와 처남을 죽이기 위해 공기총과 청산가리를 구하러 갈 때마다 박 씨를 데리고 다녔다. “너도 반항하면 이걸로 죽는다”며 겁을 줬다. 결국 이 씨가 수감된 10개월 동안 그녀는 매달 2, 3차례 면회를 가고 매주 2통씩 편지를 써야 했다. 이 씨는 철저하고 집요했다. 교도관이 배치된 감옥 면회장에선 박 씨를 부드럽게 대했다. 그러나 그는 출소하던 날 “저번에 보니까 가방도 없이 왔던데 어디서 어떤 놈 만나고 있다가 슬쩍 와가지고 가식을 떠느냐”며 주먹을 휘둘렀다. 박 씨는 고막이 터져 두 달간 치료를 받았다. ○ 자살해 버리겠다는 말에 “기다리자…” 2009년 5월 출소한 이 씨는 “나를 감옥에 보낸 전처와 처남을 죽이고 나도 자살하겠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당뇨로 체중이 20kg 이상 줄고 이도 대부분 빠졌지만 살인 계획에만 몰두했다. 주말에 그의 집에 가면 일주일 동안 혼자 끼적인 메모가 수십 장 쌓여 있었다. “최대한 악랄하고 결단력 있게 계획을 끝내야 한다”며 스스로 다짐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하루 종일 공기총 사격 연습을 해 손가락에 박인 굳은살과 캡슐에 담은 청산가리를 보여줬다. 박 씨는 “아무 희망도 없고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라 언제든 말을 실행으로 옮길 것 같아 신고할 엄두를 못 냈다”고 했다. 신고도 못하고 직접 죽이지도 못하니 박 씨는 그가 자살하겠다고 한 ‘그날’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올여름까지’라던 ‘그날’은 그해 말, 이듬해 여름으로 계속 미뤄졌다. 그 무렵 이 씨는 화투에 몰두했고 박 씨에게서 도박 자금으로 4000만 원을 뜯어 갔다. 힘들게 일해 번 돈이었지만 이 씨가 화투를 치러 가 있을 땐 잠깐이나마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어 차라리 나았다. 그가 해수욕장 인근 도박장에 있는 동안 박 씨는 여행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족들끼리 친구들끼리 큰 소리로 웃으면서 물놀이하는 게 너무 부러웠어요. 나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데….” 도박장에서 파출소까지는 불과 150m 거리였다. 이 씨가 “이번 계획은 진짜”라고 약속한 날을 하루 앞둔 지난달 27일. 박 씨는 조심스럽게 이 씨에게 말을 꺼냈다. “2월이 다 가는데 언제 정리가 되는 거야?” 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 씨는 “넌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냐”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곤 회칼과 쇠망치를 가져왔다. 떨리는 손으로 금고 비밀번호를 눌러 공기총도 꺼냈다. 이 씨는 숫돌에 칼을 갈며 “그동안 아주 가식을 떨었구나. 오늘 너부터 죽인다.” 읊조리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박 씨가 방을 나가려 하자 이 씨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쇠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허벅지에 이미 한 대를 맞은 박 씨는 망치를 든 이 씨의 손을 잡았다. 혹시나 칼로 바꿔 잡을까 봐 20분 넘게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흉기를 내려놓은 이 씨는 “저수지로 죽으러 가자”며 집을 나섰다. 그는 대문 앞에 묶여 있던 강아지의 머리를 쇠망치로 내리쳤다. 목이 돌아간 강아지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났다. 저수지를 100여 m 앞두고 차 옆자리에 있던 이 씨가 담배를 사겠다며 내렸다. 앉았던 자리에는 쇠망치와 회칼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 씨가 편의점에 들어가는 걸 본 박 씨는 핸들을 틀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쫓아올까 봐 신호도 무시하고 10여 분을 무작정 달렸다. 경찰서에 들어서자 박 씨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경찰이 이 씨의 위치를 파악해 도착한 곳은 평소 그가 고스톱을 치던 민박집이었다. 담배를 물고 패를 살펴보던 이 씨는 그 자리에서 체포돼 구속됐다. 도망친 박 씨가 경찰에 신고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 신고는 했지만… 경찰 신고 후 그가 없는 첫 주말. 박 씨는 친구를 만났다. 5년 만에 처음 맛보는 자유였다. 하지만 떠나지 않는 그놈 목소리. 그는 아직 곁에 있다. 이 씨가 쇠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는 악몽을 매일 꾸고 초인종이나 전화벨이 울리면 심장이 미친 듯 뛴다. 공포의 끈질김. 악몽 속에선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박 씨는 “출소하면 어떻게든 나와 가족들을 찾아내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민을 갈까 했지만 혼자 도망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박 씨는 4년째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경찰이 되기로 결심했다. “하루 종일 경찰서에 있을 수 있잖아요. 총을 소지할 수 있는 유일하게 합법적인 방법이고.” 잃어버린 5년의 세월도 엄마에게 털어놓을 생각이다. 출소에 대비해 거처를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피눈물을 흘리시겠지만 결국 얘기하게 될 것을…. 누군가 저 같은 처지에 있다면 공포의 덫에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언제나 현실이 소설보다 영화보다 무섭죠 너무 무서운 일이 현실이었다니ㅠㅠㅠㅠ 지금은 행복하게 지내고 계시길 바랍니다ㅠㅠㅠㅠㅠ
학교 폭력에 시달렸던 박지성
나를 때린 수많은 선배들에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얻어맞는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저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선배의 몽둥이 세례를 견디어야 한다는 것, 축구를 하기 위해서는 부당한 폭력을 묵묵히 참아내야 하는 상황이 나를 힘들게 했다. 잘못해서 맞는 것이라면 100대라도 기분 좋게 맞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제는 저 선배가 기분이 좋지 않아서, 오늘은 이 선배가 감독한테 야단맞았기 떄문에 밤마다 몽둥이 찜질을 당해야 하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었다. 학창시절 셀 수 없을 정도로 선배들에게 두드려 맞으면서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는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후배들을 때리지 않겠다" 그리고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켰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서 최고참 선배가 되었을때도 나는 후배들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후배들에게 진정 권위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면, 실력으로 승부하기바란다. 실력과 인품이 뛰어난 선배에게는 자연스럽게 권위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동안 내가 뛰어난 선배들을 직접 겪으며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어렸을적 어머니 심부름으러 오천원짜리 지폐를 들고 밖에 나섰다 잃어버렸던 날, 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맞았습니다. 고작 한 대 맞은 것이라 그리 아프지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그날 이후 며칠간 내게 무척 미안해했습니다. 축구부 합숙을 시작하면서 정말 정기적으로 매일 구타를 당하던 나를 보셨다면 아마도 까무라치셨겠죠. 박지성 어머니가 박지성에게 보낸 편지中 학창시절 멍이 시퍼렇게 들도록 맞고 들어와 혹시나 엄마 눈에 눈물이 맺힐까봐 친구하고 부딫혀서 그렇게 되었다며 겸연쩍게 씩 웃던 속 깊은 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아버지 자서전 中 지성이가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대 그 중학교 축구부에서 며칠 훈련에 참석했다가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분명 학교에서 무슨일이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추궁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저기 멍자국이 많아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도 신경쓰지 말라고만 했다. 나중에서야 이유를 말하길 "아빠, 내가 단체 훈련 끝나고 따로 개인 훈련을 했거든요. 그런데 선배들이 왜 너만 따로 훈련을 하느냐, 다른 선수들은 쉬고 있는데, 왜 유독 너만 튀는 행동을 하느냐면서 때리더라고요" 그후 박지성은 원래 가려던 중학교를 안가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중학교로감 아버지 자서전 中 "아빠, 전 절대 수원공고엔 가지 않을거에요. 3년 동안 화성에서 생활 하면서 다시는 수원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지금 수원공고에는 절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뛰고 있단 말이에요" 수원공고 1학년 축구부 동기들도 지성이를 싫어했으니, 지성이의 마음고생이 어떠했으리란 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수원공고에 다닐 당시 선배의 구타에 못이겨 몇몇 선수들끼리 팀에서 도망을 치기로 계획을 짰다. 당연히 박지성도 그 멤버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중 디데이 며칠을 앞두고 훈련 후 선배의 구타에 박지성의 팔이 부러졌다. 어쩔 수 없이 박지성은 합숙소에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부상으로 인해 축구부 숙소 이탈 약속을 지킬수 없게 되었다. 수원공고 시절 지성이가 훈련을 마치고 집에왔는데, 방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났다. 무슨일인가 싶어서 방문을 열어봤더나 인기척 소리에 후다닥 이불을 덮고 엎드려 있는 지성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그래? 어디 아픈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요. 그냥 좀 힘들어서.. 별일 아니에요" 아무리봐도 이상하다 싶어 이불을 들쳤더니 세상에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린 부분에 뻘겋게 피멍이 들어있었다. 지성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확인하자, 온통 씨뻘건 멍투성이였다. 운동하는 선수들이라면 훈련 외에 구타와 체벌은 덤으로 따라다니는 부분이라 나 역시 알면서도 웬만해선 눈감고 못 본척 넘기기 일수였다. 그러나 그때 내가 직접 목격한 모습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당장 학교로 달려가서 지성이를 때린 사람을 붙잡고 마구 혼을 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부터일까, 지성이가 한국에서 축구를 했다간 선배들 등쌀에, 또한 줄서기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의  사심에 의해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주저 앉을 것만 같았다. 가끔 지성이는 이런말을 한다 "만약 내가 맞지 않고 축구를 배웠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박지성 축구센터를 세운 이유도 이때문이다. 더이상 아이들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축구를 배우기 보다는 더 나은 환경속에서 축구를 자유로이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박지성 축구센터를 통해 어린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공을 차고 달리면서 희망도 함께 꿈꾸길 바란다. 차범근이 박지성 국가대표 은퇴 발표를 하고 난뒤 쓴글.. "지성이가 은퇴를 합니다. 아니 한다고 합니다.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릎에 물이 많이 차는 모양입니다. 무릎을 너무 많이 쓴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것도 무리하게 어려서 부터.. 지난핸가. 지성이가 어딘가에서 스피치를 하면서 우리나라 처럼 맞으면서 축구를 하는 나라는 없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유독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가 그토록 아끼고 자랑스러워 하던 최고의  선수를 30살에 은퇴시키는 안타까움 앞에서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 : 오유 유소년 대회도 열고 자선경기도 열어서 열악한 환경에서 축구하는 애들한테 다 기부하던데 자기가 맞으면서 축구를 했던 시절이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아서 그런지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처럼 축구를 안 하길 바라는 마음이 엄청 큰거 같습니다.. 예체능계의 똥군기는 진짜 언제쯤 없어질까요
하정우의 인간관계
아버지는 김용건. 하정우의 본명은 김성훈. 동생은 차현우(본명 김영훈). 그러니까 연기자 집안. 어린 시절부터 연기자 집안에서 자랐고, 주위에 잘 나가는 무용가와 운동선수 등 감성과 외모 모두를 도와줄 환경이 갖춰져 있던 게 하정우의 삶이다. 사실 좋은 배우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타고 난 운좋은 남자인 셈인데,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밤샘 촬영하고 낮에 자다가 아버지 전화를 받아도 피곤한 티를 못 내요. 10년 전 집에 닥친 경제적 어려움을 복구하는 데 6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아버지는 드라마를 20편 했어요. 5편 겹치기 출연을 하면서도 집에서도 밖에서도 내색하지 않으셨어요. 저희 형제도 잘 이겨낸다는 걸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고 싶었고요." 씨네21 인터뷰에서 하정우가 했던 말. 외가에서 벌이던 사업이 망했던 때인데, 연기가 직업인 사람들은 이 때 묵묵히 연기를 했다. 연기자 집안의 강점은 화려한 인맥이라거나, 타고난 재능보다는 위기를 겪어도 연기자 집안이니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줄 수 있다는 점 아닐까. 대학 인맥들도 하정우에게 큰 도움이 되곤 한다. 이번 부산영화제 감독작인 롤러코스터의 주연배우를 맡은 정경호가 대표적 사례. 링크된 인터뷰에도 둘이 함께 술 마신 얘기가 나오지만, 학교 때부터 친했다고. 한성천, 최규환, 이지훈 등 다른 출연진들 또한 하성우의 중앙대 연극과 후배들이다. 하정우는 정경호 선배 시절 "너희 학번에서도 연예인이 한 명 나와야 할텐데, 잘 생긴 네가 가망있겠다"며 정경호를 감금해놓고 연기훈련을 시키던 선배였다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니콜라스 케이지, 윤종빈. 하정우의 영화 선생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선 적은 표정으로 많은 감정을 전달하는 모습을,(그리고 아마도 연출가로서의 배우 또는 배우로서의 연출가를) 로버트 드 니로에게서는 배우가 자신의 육체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해가면서 다양한 모습에 도전하는 변화를 배운다. 알 파치노에게는 하나의 모습을 거의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정렬을, 니콜라스 케이지에게서는 연기의 자세를 배운다. 심지어 니콜라스 케이지가 '첫 촬영현장으로 향하던 긴장을 매일 되새기기 위해' 직접 차를 몰고 다니는 것까지 배워서 따라한다. 윤종빈은 그의 연기 초기 시절부터 주요작, 문제작을 함께 만들어 온 영화의 동반자다. 두 사람은 서로를 스콜세지-드 니로의 관계에 비유한다. 또는 그런 관계가 서로에게 되고 싶은 관계로.
영화에 톡톡히 한몫한 부산 맛집 BEST 4
영화 '바람', '친구', '올드보이', '아저씨'의 바로 그곳! 치킨 한 입에 추억과 세월도 한 입 보림치킨 스물셋엔 뭔가 있나보다. 아이유는 ‘스물셋’을 부르고 여성 보컬리스트로서 정상 궤도에 올랐고, 김승옥은 스물셋에 무려 소설 『무진기행』을 썼다. 범일 골목시장 입구에서 5분 남짓 걷다 보면 나오는 빨간 간판의 ‘보림치킨’에도 스물셋의 비밀이 숨어있다. 이곳의 주인 아주머니는 스물셋부터 범일동에서 닭을 튀기셨단다. 그것도 30년 넘게 한결같이. 배우 정우의 실제 경험담을 토대로 만든 영화 <바람>에 ‘보림치킨’이 잠깐 등장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닭을 사는 회상 씬을 이곳에서 촬영했는데, 정우가 어렸을 때 실제로 자주 놀러 왔던 추억의 장소라고. ‘보림 치킨’은 정우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들의 추억도 듬뿍 묻어 있는 진짜 로컬 맛집이다. 옛날 시장 통닭 맛을 그대로 내기 위해 여전히 야외에서 조리하고, 온도계 없이도 딱 알맞게 노릇노릇한 통구이를 내오신다. 30년 넘게 닭만 튀기셨으니 맛은 이미 보장됐고, 덤으로 추억까지 몽글몽글 피어오르게 한다. 통구이 1만 5000원, 똥집 치킨 7000원. ADD 부산 동구 범일4동 1308-14 TEL 051-632-3081 HOUR 매일 12:00~1:00매월 첫째 셋째 주 일요일 휴무 Intern 이연재 jae@univ.me 마이 무따, 더 무믄 안 되겠나 칠성식당 부산 문현동 곱창골목에 자리한 ‘칠성식당’은 60년 넘은 원조 곱창 맛집이자 추억 돋는 영화 <친구>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우연히 재회한 유오성과 서태화가 술을 마시러 가는 곳이 바로 ‘칠성식당’이다. 세월이 흘렀어도 이곳은 여전히 아침마다 연탄을 일일이 갈아 끼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덕분에 불 맛이 제대로 묻어난 쫄깃한 양념곱창을 맛볼 수 있다. 기름기를 쏙 빼기 위한 초벌구이 역시 신의 한 수. 곱 창은 흔히 몇 점 먹다 보면 느끼해서 콜라를 찾곤 했는데, 이곳 곱창은 탄산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그 자체로 담백해서 물리지 않았다. 곁들여 나오는 특제 소스에 푹 찍어 입맛 따라 파무침, 무절임, 상추쌈을 적절히 조합하면 ‘혼곱’ 기준 2인분은 약간 아쉽고, 3인분은 먹어줘야 덜 아쉬운 마음으로 가게를 나올 수 있다는 것! 곱창 1인분 7000원. ADD 부산 남구 지게골로 7 TEL 051-632-0749 HOUR 매일 11:00~5:00 Intern 이연재 jae@univ.me 만두, 넌 대체 누구냐…! 장성향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15년 동안 감금당한다. 그의 반복되는 일상을 상징하는 것은 8평짜리 단칸방, 텔레비전 그리고 ‘군만두’이다. 그는 성인 남자 주먹만한 만두를 입안 가득 넣고 복수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가 매일 먹던 군만두는 중국집에서 서비스로 넣어주는 흔한 만두와는 차원이 달랐다. 영화에서 만두는 단순한 음식이 아닌 오대수가 중국집을 찾아내는 복선으로 기능하기 때문. 만두를 직접 빚는 집이라면 가게 마다 피를 다지고 속을 채우는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동안 만두란 다 똑같지 않나 여겼던 나는 ‘장성향’에 가서 만두에 새로운 눈을 떴다. 한눈에 봐도 거대한 만두는 표면이 노릇노릇했다. 이 집 만두는 젓가락으로 들기엔 무겁고, 손가락으로 집어 간장에 살짝 찍어 먹어야 제맛. 입에 넣자마자 만두피의 담백함과 두툼한 돼지고기 소의 충만함이 느껴진다. 너 대체 누구냐…! <올드보이>를 처음 봤을 땐 만두 맛으로 가게를 구분해내는 게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입 먹자마자 이 집 만두는 여느 가게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단짠궁합을 맞추기 위해 주문한 사천탕수육도 환상. 군만두 6000원, 사천탕수육 2만 4000원. ADD 부산 동구 대영로243번길 29 TEL 051-467-4496 HOUR 매일 11:30~22:00 Intern 윤소진 sojin@univ.me 돈가스빨 제대로 받은 아저씨 스완양분식 이미 품절남이 된 그이지만 덕후의 마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으니, 그 마음 고이 담아 ‘스완양분식’ 을 찾았다. 이곳은 영화 <아저씨> 촬영 당시, 원빈의 끼니를 책임지던 곳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전당포는 ‘스완양분식’이 있는 건물 위층에 촬영용 세트를 만들고 3일 내내 촬영한 것이라고. 사장님 말씀을 빌리자면 ‘자~알 생긴’ 원빈을 무려 3일 내내 코앞에서 보았다고! “원빈이 먹었다던 그 돈가스요!”를 외치면 갈색 소스 범벅이 된 손바닥만 한 돈가스를 뚝딱 만들어주신다. 큼지막하게 썰어서 시원한 깍두기와 함께 먹으면 역시, 옛날 돈가스만큼 깔끔한 게 또 없구나 싶다. 먹고 보니 알겠다. 스완양분식의 돈가스가 없었다면 <아저씨> 속 원빈은 탄생하지 못했으리라. 아, <아저씨>가 원빈빨을 받은 게 아니라 원빈이 돈가스빨을 받은 게 분명하다. 돈까스 5000원. ADD 부산 동구 성남이로 22 TEL 051-634-2846 HOUR 매일 11:30~20:00 Break time 15:00~17:00 일요일 휴무 Intern 이연재 jae@univ.me 대학내일 이연재 인턴 에디터 jae@univ.me [대학내일] 20대 라이프 가이드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