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klse
100,000+ Views

곽가 봉효 (郭嘉 奉孝) A.D.170 ~ 207

지금까지 인물들 관련 칼럼을 게시하면
꼭 올라오는 요청이 있었다.

"곽가도 나중에 다뤄주세요"

거의 매번 여러 분들에 의해 올라오는 요청이였고
내심 곽가의 인기와 인지도에 놀라웠다...ㅎㅎ

그 인재 많고 재사 많던 위에서, 본인도 여느 모사들
못지 않게 빼어나던 조조의 총애를 받았던 책사면서
한편으로는 그 활약이 많지 않고 생존기간조차 짧아
그의 업적은 거품이 많이 끼었다하여 '곽푸치노',
그의 가치는 과대평가 되었다하여 '곽대평가'라고도
비판받는 동전의 양면같던 사나이 "곽가"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영천군 양적현이라고, 지금 중국 허난성의 위저우시 태생,
순욱과 동향이고 옛날 후한 기준 허창의 북서쪽에 위치한
지역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의 행적들은, 말 그대로 "천재"
그 자체였다.
학식이 깊었다는 이야기는 없으나, 누구와 이야기 나누던..
무엇으로 이야기 나누건 거침 없었으며 야망의 스케일도 크고
상당히 담대한 편이라 이미 살던 지역 일대에서는
'뭐가 되도 될 놈' 이라는 평판이 자자하던 양반이였다.

음주가무와 당시 사람들 기준의 일탈적인 행동들도 좀
잦았던 듯 하며, 말도 그리 나긋나긋이 하는 편이 아니였고
직언직설을 하는 등....
뭐랄까, 이런 비교는 좀 웃기지만 '스티브 잡스'가 저 나이였을
당시와 스타일이 비슷했던거 같다.

그래서인지 주변의 호불호도 많이 갈려,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를 인격적으로 좋아하는
이는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본래는 원소에게 먼저 임관을 하고자 찾아갔었다.
나중에 원소도 다룰 예정이라 그때도 언급할테지만,
역사는 승자의 편이고, 여러분들이 접한 삼국지는 대개
소설인 삼국지연의이고 거기의 원소가 찌질이로 그려져서
그렇지, 원소는 그냥 단순한 찌질이가 아니였다.

당대에서 가장 명성 높고 실력과 경력과 집안이 상당하던..
누군가 황건적의 난 이후 아작난 후한을 다시 일으킨다면
그 영순위로 꼽히던 게 원소였다.

그래서 어지간한 이름 있는 자들이 가장 선호하던 것도
원소의 세력에 임관하는 것이였고 응당 곽가도 가장 먼저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찾은 사람이 원소였다.



허나, 그럼 그렇지...
며칠의 대기 끝에 만나 이야기 나눈 원소는 곽가 스타일이
아니였고, 당시 원소의 최측근들 중 하나였던 신평과
곽도에게 원소 뒷담화를 남긴 후 박차고 나와 집에서 놀다가
아끼던 책사인 '희지재'의 사망으로 책사에 T/O가 나서
거기 알맞는 사람을 찾던 조조에게 순욱의 추천으로
임관하게 된다.

당시, 순욱도 곽가와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였고
순욱 또한 자기고향에서 머리 좀 돌기로 이름 난 곽가의
명성을 듣고 조조에게 추천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조조와 곽가는 서로 첫 대면 자리에서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운명임을 직감한다......뚜둥...
신입으로 입사한 주제에 첫 시작부터 제법 높은
직위를 받아서 조조를 돕게 되었는데,
사실 원소와 비교했을 때 뒤쳐질 뿐 조조도 이미 당시에
원소 다음가는 튼실한 세력가였다.

오히려 외형성장에 메달렸고 조직내 유연성이 매우
떨어지는 구시대적 조직을 이끌던 원소보다 새롭게
떠오르며 개방적이고 효율과 내실을 중시하는 조직을
이끄는 조조가 응당 곽가에게도 더욱 실력 발휘하기
좋은 조직이였음이 맞다.



비교하자면 원소의 세력은 현재 국내의 대기업들과
엇비슷하고 조조의 세력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IT기업들
비슷한 느낌이였다.
아무리 능력이 좋다한들 자유분방하던 곽가로서는
당시 조조말고는 딱히 자기 재량을 펼칠만한 세력도
없었으리라 본다.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곽가같은 싹수부터 다른
신참이 영입되었음에도 노련하고 뛰어나던 조조의
다른 기존 책사들도 일절 텃새같은게 없었다고 한다.
그의 가장 큰 단점이며 아쉬운 한 가지는 역시
누가 뭐래도 "단명"이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위서 정곽동류장류전,
정사 등을 볼 때 아마도 간이 안좋았던 것 같다.
잦은 과음과 부족한 수면 및 특히 스트레스가
그의 간손상을 부추겼을 듯....

하여간 우루사만 꼬박꼬박 먹었더라면 역사를 살짝
뒤틀었을지 모를 곽가였지만 놀랍게도 역사록들을
아무리 뒤적여도 그가 병법이나 전술관련 제안을 한
기록이 없다.

쉽게 말해 전장에서 용병술이나 전쟁 또는 세력다툼
속에서 승기를 잡을 병략을 짰다는 증거가 없다는 거다.




이리저리 다 뒤져도 군사적인 공적은 삼국지정사에서
여포를 사로잡는 결정적 작전인 "하비성 수공"이 전부,
그나마도 단독입안 아닌 순유와 공동작전입안이다.

당시 조조 휘하에서 껌 좀 씹던 군사들로 순욱과 순유,
정욱 등이 있었는데, 삼국지정사를 분석하고 주석을
달았던 역사가 배송지의 평가에 의하면 이 중 전략전술적
재량이 가장 훌륭한 것은 순유였고 그 다음이 순욱,
그 아래가 정욱이라 했고 곽가는 그 정욱보다 못한 수준
이라고 평 했다.



삼국지연의에는 원소 VS 조조가 결전 벌인 관도대전 속
큰 활약을 한 듯 그리지만 사실 관도대전의 총참모장은
순유였다.

여포와의 대전에서도 주요 전술 입안자는 역시 순유,
게다가 비록 엘리에 가깝게 털리긴 했어도 당시의 기세가
등등하던 적벽대전 당시 조조군의 총참모장 역시 순유였다.
뭔가 쓰다보니 오늘의 주인공은 순유같다...

아무튼 의외로....
매번 많은 분들에게 '곽가도 꼭 다뤄주세요!ㅎ'소리를
들을만한 뭔가가 없이 좀 부풀려진 인물이란 것이다.
그러나 역사 기록들 속의 곽가는 정말 조조의
총애를 받았고, 적벽대전 패전 후 조조가 봉효만
있었다면...T-T 이라며 오열했다는 것도 실제였다.

위의 언급대로 딱히 한 것도 없는 주제에 심지어
일찍 죽기까지 했던 먹튀라면 결코 절대 조조의
사랑을 받지 못 했을 것인데 어찌 그는 깐깐쟁이
조조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일단, 그는 달변이였던 걸로 보여진다.
그리고 역사서들 속의 그의 가장 대단했던 점은
"놀라울만큼 감이 좋았다"는 점이다.

그는 조조세력의 숱한 중대사들 앞두고 거의
확정에 가까운 예측들을 내놓았고 "모두" 맞았었다.

더더 놀라운 것은 그런 예측들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과 반대되는 의견인 경우가 많았고 더더더
놀라운 점은 그런 나름 날고 기는 이들과 반대되는
예측을 던지는 주제에 그리 확실한 근거조차 내지
않고 그냥 말빨로 덮었다는 점이다.

더더더더 놀라운 사실은 심지어 조조가.....
나머지 책사들과 혼자 딴소리를, 그것도 별 근거도
없이 그냥 '아, 내 말이 맞으니 그냥 나 믿고 해보삼'에
가깝던 곽가의 의견을 잘 따라줬다는 것..ㅎㅎ


조조가 여포를 정벌하고는 싶으나 근거지를 비운 틈타
원소의 후방공격을 걱정할 때도 곽가는 별 다른 논거를
제시않고 원소는 절대 내려오지 않으니 여포공격을
해도 괜찮다며...

여포공략이 순조롭지 않아 전황이 루즈해지며
다시 조조가 그 상황 지켜보다 원소가 쳐내려오는건
아닌지 걱정할 때도 역시 별 근거는 대지 않고 그냥 더
해보자는 제안을 했지만 모두 맞았다.

원소와의 전쟁을 앞두고 당시 남쪽의 야망가이던
손책의 후방 공격을 걱정하던 조조에게 손책은 분명
암살 당할 거라는 구체적 예측까지 맞춰버리며
사실상, 책사를 넘어 예언가에 가까운 그였다고..,
Ex.) 당시 조조 책사들의 성향을 표현하자면..

조조 : 나 로또 샀는데, 1등 되면 좋겠다..T-T



순유
로또의 1등 확률은 840만분의 1입니다.
게다가 1인 하루 최대 구매액은 10만원에 불과..
제가 조사해보니 로또 1등 명당은 광화문역
3번 출구 쪽의 가판대던데 주공의 구매처는
지금껏 단 한 번, 4등 당첨이 전부였기에 매우
힘들 것이옵니다...

순욱
로또 1등은 하늘이 내는 것이니 안되더라도
너무 심려치 마시고 차근차근 꾸준히 구매를
하시다보면 언젠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1등도 좋으나 그러다보면 더 확률 높은 2등이나
3등에 여러 번 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생각되옵니다.

정욱
참. 다들 복잡하게들 산다...ㅎㅎ
로또 1등도 결국 당첨금 때문에 되고 싶은건데,
주군! 돈 필요하시면 될 때까지 로또 사는것보다
차라리 병사들을 동원해 은행을 털죠?

곽가
다음주에 1등 될거임. 나만 믿으셈.
열전 및 정사와 배송지의 평가 및 주석 등을
참고할 때... 이룬 것 없음에도 조조의 총애를 받은
이유는 그가 조조와 생각하는 패턴이 비슷했기에
그랬던게 아닌가 학자들은 추측한다.

아무리 조조가 날고 기어도, 한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라면 마냥 자기 뜻대로 할 수가 없으며,
부하들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은 우로 가고 싶으나 대부분의 측근들이
좌로 가야한다며 저마다의 근거와 논거를 제시하면
그럼에도 이를 무시하고 자기 뜻을 내세우기는 참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조 자신도 전략전술 및 병법과 고서에 밝기는
했지만 그런 조조의 신뢰를 받던 휘하의 모사들도
머리만 쓰는 것으로는 결코 조조에 못지 않았고
그런 그들이 나름 그럴듯한 이유를 첨부하여
조조의 뜻과 다른 길을 다같이 이야기 한다면

따르자니 자신의 예측과 달라 마음이 놓이지 않고,
안그러자니 자신을 독선적으로 볼 측근들이 신경
쓰이는 딜레마 속에, 조조의 의견에 동조하거나
또는 조조의 속을 뚫어보듯 조조의 가려운 곳을
긁는 소리를 달변에 실어 확신에 차 우겨주는 곽가가
조조입장에서는 고마웠을 것이다.



게다가 곽가는 한실의 부흥이나 천하의 대세, 정의,
이런 건 관심 없었고 오직 자신을 알아주고 인정하는
주군인 조조의 상승만을 추구했다.

그런만큼 매사에 철저히 조조의 관점과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말했으며 조조에 대한 충성도 높았다.



조조는 비범하고 자신과 일맥상통하며
충성심 깊고 무엇보다 "젊은" 그에게 자신의 다음 세대와
후사를 맡기고 싶어했다.

쉽게 말해, 조조에게 곽가란 유비에 있어 제갈량에
비견되는 위치였다.
조조가 평생 겪은 휘하 대표 전략가들을
살펴보면...

순유는 자신의 출세와 성공에 포커스가 큰 사람,
순욱은 자신보다 한실의 부흥이란 대의를 중시하는 이,
정욱은 세간의 평가는 개의치 않는 독한 술수를
거침없이 계획하는 인물이였으며,
사마의는 마치 자신을 보는 듯한 야망과 음모가
느껴지는 자였다.

오직 곽가만이 자신만을 위해줬고,
자신의 편이였으며 자신을 가장 잘 따랐다.



그런 곽가가 앓다 끝내 병사하자 조조는 통곡을 했고
종종 힘든 난관마다 곽가를 떠올리며 그리워 했다고
역사기록에 남겨져 있다.



유비와 비교해보면...
유비의 조직은 서촉진출 전까지는 주로 인정과
의리가 주요하던 "의협집단"에 가까운 조직이였다.

지도자 이하 각 구성원들이 단순한 이해관계나
주종관계 이상의 끈끈함으로 뭉쳐져 있어 이탈률은
적으나 그런만큼 능력있는 신규진입자의 성장이
쉽지 않다.

하지만 조조의 조직은 비교적 세력의 초창기부터
일절 연줄없는 외부인의 영입에 적극적이였고,
그런 그들이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철저히 능력중심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언뜻 조조의 조직이 유비의 그것보다 현대적이고
실용적이여 보이지만 그만큼 조조조직의 분위기는
유비조직의 분위기에 비해 차가울 수 밖에 없다.



유비 휘하의 관우, 장비, 조운, 제갈량 등은
어지간히 큰 실책을 해도 큰 벌을 받거나 좌천될 걱정
없지만 조조 휘하의 문무장들은 큰 실책 시, 좌천과
징벌이 따르고 그에 따라 상하관계가 역전되는 일도
흔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조의 첫 거병 때부터 조조를
따라 숱한 생사고비 넘겼으나 후에 영입된 장료가
더 인정받아, 결국 장료에게 지위역전 당한 악진,

조조의 원정마다 확실한 후방보급으로 조조가
안심하고 전력투구하게끔한 선봉장 못지 않은
공적이 숱함에도 조조에게 밉보인 후 끝내 자살을
강요받아 죽은 순욱 등....



그런 살벌한 분위기의 조직에서 역시 지도자인들
쉽사리 자기 속내를 드러내기도 쉽잖았을 것이고,
그런 무섭고 엄한 지도자에게 선뜻 다가가는 이도
많지 않았을 것임에도....

조조에게 곽가는 자기 속내를 알아주고 다가와주는
고마운 존재요, 자기 의견에 부스터를 달아주는
미더운 인물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딱히 눈에 보이는 성과가 몇 없음에도
곽가는 조조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122 Comments
Suggested
Recent
오늘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혹시 나중에 시간 되시면 가후편도 부탁드릴께요
당근 가후를 스킵할 수야 없죠ㅎㅎ
곽가를 저평가 하는 댓글이 많아 아쉽군요. 곽가는 순욱이나 순유처럼 뛰어난 모략가는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 합니다. 전쟁에 있어 임기응변이나 공략법 들에서 두각을 나타낸적이 기록엔 없죠. 하지만 곽가의 위치는 그런 책략을 내는게 아니라 최종 판단 하에 조조에게 권유하는 위치로 많이 보입니다. 단순히 다른 모사들의 의견을 종합해서 정리하는게 아니라 되려 대부분이 반대하는 정황상 해선 안되는 결정을 내리고 밀고나가 성공시키는 경우(하비성 함락)도 있었다는 걸로 보아 단순 비서실장은 아닌것 같습니다. 글쓰신 분이 어디서 글을 가져왔는지 대략 예상이 되지만 곽가의 부정적인 부분을 많이 강조된 글만 가져오셔서 안타깝습니다. 곽가는 조조가 난세를 평정하고 후사를 맡길 인물이라 평했습니다. 단순 립서비스가 아닌 보통 모사들과는 다른 위치에서서 되려 더 높은 위치에 서서 판단하는 오른팔이라는게 제 요약입니다.
오, 맞습니다! 맞게 보셨어요ㅎ 곽가는 여러 기록들 토대할 때, 전략가나 내정형 정치가라기 보다는 요즘으로 치면 조언을 하고 최종사안 결정에 대해 의논을 하는 비서관이나 참모같은 개념의 포지션이였던거 같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면모만 가져왔다기보다 소설 속의 너무 과장된 패키징의 거품을 좀 걷어냈을 뿐이며, 저 자체로도 대단한 인물임은 맞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일단 주요한 전공이 없는건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글을 어딘가에서 모판 떠오듯 가져오는 것이 아닌 여러 다양한 출처들 속의 내용들을 취합 및 집대성하여 제가 직접 쓰고 있습니다.
어쩔수 없는 상황이죠 .. 어떤 인물을 평가할때 가장 중요시 되는게 기록인데 너무나 먼 과거의 인물이고 그 인물이 단명 했으니 보여지는 것으로 평가할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과거엔 연의가 가장 핫해서 소설이나 다름 없는 전공이나 활약으로 인해 사람들의 눈을 너무나 높게 자리잡아 놓은게 가장큰 폐단 같네요 또 모 카페에 가보시면 곽가를 너무나 높게 평가하신 분도 계시지만 그건 연의의 전공이다 허구다 소설의 전공 뻥튀기다 라며 반박하시는 분들도 엄청 많으시죠 저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과거의 인물을 논할때 자기와 다른 평가(비판) 한다고 해서 전혀 잘못된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흠, 아마 전체를 보는 눈이나 심리의 달인이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군요. 사실 촉이란게 전체의 상황과 대상의 심리라는 정보를 통해서도 올 수 있으니까요 정확한 근거를 못댄것은 그런걸 '아는' 타입이 아닌, '느끼는' 타입이었다면 그럴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요.(심지어 나이도 어렸음에야...) 이런 가정이라면 곽가는 외교쪽에 특화된 인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ㅎㅎ 타이밍을 느끼고 언변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등... 무서운 외교관이 됐을지도 모르겠네요
하긴 또 저런 감 또한 아무것도 모르고 예상하거나 맞추진 못하니 역시 이래저래 대단한 사람이긴 한거 같아요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ㅎ 댓글도 남겨주시고...T-T
글솜씨가 뛰어나셔서 단숨에 읽혀지네요
칭찬 완전 고맙습니다! 강조 하시려고 두 번이나...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하후돈 원양 (夏侯惇 元讓) A.D.? ~ 220
이 칼럼에서 앞서 다뤄진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나아가 삼국지연의에서 등장한 인물들이 대부분, 본래의 생애와 인물됨이 평가절하 내지는 너프를 잔뜩 받거나 또는 버프를 이빠시 받은데 비해... 버프or너프를 떠나 그 실제와 소설 속의 이미지 차이가 확연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오늘의 주인공인 "하후돈"이다. 오늘날 중국 안휘성 보저우시인 "패국 초현" 출신이며 조조와 동향이고 여기는 당시 서주의 소패 인근인데, 그때의 이 곳은 전한의 수도였던 장안과 후한의 수도인 낙양, 그리고 업과 허창과 함께 후한의 5대 도시 중의 하나인 꽤나 잘 나가는 동네였다. 도시남자 하후돈은 어려서부터 터프가이의 싹수를 뽐내며 자란 대개의 무장들과 다르게 어린시절부터 학문을 배우던 나름 곱상한 유년~청소년기를 보냈고 대체로 학당에 나가 공부하고 교육받던 당시의 학생들과 달리 집으로 스승을 모셔 배우는 '과외'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면 은근 좀 사는 집 아들이였던거 같다. 하기사, 파탄에 가까운 후한 말의 배곯는게 일상인 여느 백성들에게 교육이 사치였던 시절, 공부를 했다는 자체가 중산층 이상은 되었다는 반증.(올~~) 그러던 돈이가 14세 때.... 어떤 이가 그의 스승을 하후돈 앞에서 모욕하자, 그 자리에서 패죽였다는 기록을 보건데 단순 중2병을 넘어 이미 그 나이 때부터 완력도, 의기도 남달랐던 슈퍼청소년이였던거 같다. 지금 만약 어떤 중학생이 누가 지네 담임 흉본다고 그 사람을 때려 죽이면 바로 소년원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하후돈이 강직하다며 사람들이 그의 의로움을 칭찬한걸 보면..... 진짜 후한 말 중국이 개판은 개판이였던 모양.ㅋ 어릴 때부터 조조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며 체구가 작고 근력도 그냥저냥이던 조조의 주먹 노릇을 했던 하후돈은 그 시절부터 죽는 순간까지도 조조가 거느렸던 숱한 인물들 중 가장 드높은 충성을 바친 맹목적인 조조빠였고 조조 역시 자기 휘하의 문무에서 날고 기던 무수한 쫄자들 중 하후돈을 가장 아꼈기에 그런 하후돈은 그래서인지 항상 본인의 능력 이상의 직위와 직책을 맡았었다. 연의에서는 물불 안가리고 무예와 용맹이 대단하여 조조세력의 초창기, 전투에 앞장서는 맹장으로 그려지나 사료에는 그의 군공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심지어 여포가 활개치던 시절에는 조조와 여포의 전투에서 여포군의 사항계에 속아 인질로 잡히는 수모까지 겪었는데, 하후돈을 득템하여 몸값을 요구하던 적들에게 당시 조조휘하의 '한호'라는 하후돈의 부장이 협상 그런거 없이 인질범들을 그대로 공격했고 하후돈은 그 혼란을 틈타 탈출하여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ㅋㅋㅋ 물론, 한호 입장에서는 인질극에 휘둘리다 군세가 꺾이고 군법이 문란해져서는 안된다는 판단에서 그랬고 후에 조조 또한 한호를 매우 치하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앞으로 그 어떤 인질극에서도 절대 상대와 타협없이 인질의 생존과 구출여부 떠나 공격하라는 메뉴얼을 정했다는... (하후돈 지못미;;;) 하후돈은 이 당시 여포와의 전투에서 인질로 잡히는 것도 모자라, 화살에 왼쪽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며 "장애인"이 되는 오지게 재수 잡치는 일까지 당하고 만다는.... T-T 우리가 알고 있는 애꾸간지폭발의 하후돈은 바로 이 때부터라고 할 수 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적장이 쏜 화살에 왼눈을 직격 당하자 화살을 뽑아, 딸려 나오는 안구를 씹어 먹으며 "이 눈은 아버지의 정(精)과 어머니의 피로 이루어진 것인데 어찌 함부로 다룰 수 있겠느냐" 라고 외치고는 그대로 말달려 자기 눈에 활을 쏜 고순의 부장인 조성을 한 창에 꿰어 죽이는 그야말로 개간지의 카리스마를 뿜는 장면이 나오지만.... . 이건 진정 개소리 of the 개소리가 아닐 수 없고 하후돈이 받은 역대 최고최강의 버프라 할 수 있다. 실제로는 전투 중 누가 어디에서 쏜지도 알 길 없는 난전이 어딘가에 맞고 원바운드 되어 눈으로 튀었거나 또는 아슬아슬히 눈가를 스쳤거나 해서 다쳐 그리 된 것. 실제로는 눈에 화살을 맞으면 거의 즉사하거나 쌔뻑좋게 살아도 어마무시한 통증과 출혈에 의한 쇼크로 그대로 의식을 잃는다.... 아무튼 저무튼간에, 하후돈은 이렇게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요즘 기준으로 시각장애 6급에 해당하는 "단안실명 시각장애인"이 된다. 참고로 단안실명은 시각장애 중 유일하게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고...ㅋㅋ 애꾸관련 이야기를 더해 보자면, 일단 한 눈이 저리되면 당장 원근감과 남은 눈의 시력도 크게 떨어지며 일상에서 남은 눈의 피로도 쉽게 온다. 저 당시의 전투는 거의 대개 칼과 창이 맞붙는 백병전! 사지 멀쩡해도 사소한 삑사리 한 번에 죽거나 병신이 되기 십상인 와중에 시야각이 크게 제한되는 애꾸는 엄청난 핸디캡이 아닐 수 없다. 설령 하후돈이 진짜 혼자 무쌍난무를 찍는 무력깡패라 할지라도 저 시점부터는 전투력이 급감했을 것이며, 실제로 하후돈은 저 시점부터 전투의 전면에 나서는 지휘관보다 주로 후방지원이나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각종 미디어에서는 닉 퓨리처럼 검은 안대를 차고 나와 궁예간지를 자랑하지만, 역사기록에는 안대착용에 관련된 언급이 없기에 아마 그냥 드러내고 다녔을걸로 추측한다. 하후돈이 삼국지연의나 그 후의 여러 매체들에서 맹장으로 묘사되는 이유도 "외눈"에서 오는 어딘가 모를ㅎ 오히려 강하고 거칠어 보이는 이미지에서 착안된 것. 동서양 막론, 예나 지금이나 외눈 + 검은안대는 강력한 악당보스의 뉘앙스를 갖고 있어서 지금도 영화나 만화보면 외눈들은 약국이나 안과에서 주는 하얀안대가 아닌 어디서 샀는지 꼭 검은안대를 했고 그 대상들은 해적선장, 빌런, 주인공의 동료라도 나중에 배신 때리거나 또는 악당이였다 어떤 계기로 주인공 일행되는 놈들이 많다. (하긴, 같은 애꾸라도 하얀안대 끼면 바로 환자이미지) 애꾸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어쩔 수 없는 게..ㅋ "애꾸눈"이미지는 정사나 연의나 솔직히 별반 그리 눈에 띄는 업적이 없음에도 하후돈이 조조측의 빼놓을 수 없는 장수 중 하나로 각인되는데 크나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고.. 당시에야 빡치고 우울했을 하후돈 본인이겠지만 눈 하나를 내준 덕에 거의 2,000년 가까이 지난 현세에서도 하후돈을 조조측의 메이커 장수가 되게 해줬으니 너무 억울해 할 건 없지 않나 싶은ㅎㅎㅎ 훗날, 후한 최고의 아가리파이터이자, 모두까기 인형으로 유명한 "예형"이 하후돈을 "완체장군(完體將軍)"이라고 깠는데, 저 말 뜻 그대로는 완벽한 육체를 지녔다는.. 이는 애꾸인 하후돈을 비꼬아 놀리는 말이다. 혹자는 비쥬얼이 좋았던 하후돈을 허우대만 멀쩡하다며 놀리는 한편, 나름 외모는 인정한다는 말이였다고도 하는데, 사료의 원문과 예형의 스타일 및 당시 분위기를 고려 시... 그냥 비꼬고 놀린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위에서 살짝 언급되었지만, 당시 기준에 하후돈은 용모가 꽤 먹어주던 모양인지 외모의 훈훈함, 멋짐을 짧막하게나마 언급된 자료들이 있다. 성격도 대단히 좋은 양반이였던 걸로 전해진다. 조조따라 거병 후, 줄곧 조조진영에서 고위직을 맡았고 훗날 무관직의 정점인 대장군에 올랐음에도 생애동안 청렴하고 검소하여 물욕을 부리지 않았고 간혹 어쩌다 포상을 받아도 자신의 부장들과 병사들에게 배분 해줬으며, 애꾸가 된 다음 하후돈이 지나가면 종종 병사들이 "맹하후(盲夏侯/장님하후돈이란 뜻)"라며 수군대고 놀려도 앞에서는 모른체하고 막사에 들어가 혼자 분풀이를 했다고 한다. 부장들이나 간혹 병사들과도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고 웃으며 떠들기도 하여 병사들에게는 위엄 서린 어려운 지휘관이라기보다 친근한 형님 타입이였고 한중정벌 당시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 순찰 중 예상 못한 코스에서 장로의 병사들과 마주해 난전을 벌이던 생사위기에 처했을 때, 부장 하나가 "장군! 에워싼 적병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라고 다급히 외치자, "다행히 내 눈에는 적병이 반만 보이니 괜찮네!"라며 위기상황에서도 농을 치는 헐리우드 액션 스타일 조크도 날릴 줄 아는 나이스가이였다. 장수들에게는 군법을 엄정히 적용했으나 일반 병사들에게는 비교적 널럴히 대하여 큰 중죄가 아니라면 되도록 너그럽게 봐주는 편이라 누가 조조에게 소원수리라도 긁었는지, 조조에게 불려가 군기강 해이유발 관련으로 지적을 받은 일도 있다. 군중에도 학자를 초빙해와 가르침을 받을만큼 학구열도 대단했고, 그래서인지.. 단지 야전임무뿐 아니라 다양한 군사관련 행정처리도 탁월했다고 한다. 토목에도 소질이 있는지, 진류태수 시절에는 가뭄이 들자 병사들 동원해 저수지를 만들었고 그때 본인도 같이 작업복을 입고 흙을 짊어 날랐다. 위에 나열된 사례들을 보면 알겠지만, 병사들과 가까움 + 후방보급임무 위주 + 군무행정탁월 + 공사에 능함 이런 특징들이 어우러져, 삼국지 좀 아시는 분들 사이에서 불려지는 하후돈의 별명 중 하나인 "행보관" 타이틀이 생겨난 것. 실제로 군사적 업적이 거의 없음에도 조조가 그를 여러 기라성같은 명장, 맹장들의 윗자리에 앉혔던 것도 조조 역시 충성심이 드높고 관리력이 준수하며 훌륭한 인품으로 후배장수와 병사들을 아우르는 큰 형님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또 그게 다행히 하후돈의 적성에도 맞았다. 조조 휘하의 장수들은 출신을 떠나 거의 대부분 하후돈을 잘 따르는 편이였고 전형적 무장임에도 책사들과도 곧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편하게 지냈던 걸로 보여진다. 서황과 장료가 조조휘하로 들어왔을 때 다른 기존 장수들에게 그들을 인사시키며 빠른 적응을 도운 것도 그였고 장합과 고람이 원소측에서 투항했을 때도 관도대전 마친 후 환영한다며 잘 해보자는 서신을 보낸 것도 그였다. 대체적인 이미지처럼 맹장은 비록 아니였으나 무장임에도 뛰어난 보급과 행정능력 및 부하나 후배들을 잘 아우름과 동시에 변함없는 조조를 향한 충성과 겸손, 청렴을 갖춘 듬직한 하후돈을 조조는 매우 아껴, 무슨 일이 있건 좋은일의 포상에서는 항상 하후돈을 챙겼고 수시로 그에게 필요한건 없는지 살폈으며 하후돈이 눈을 다쳤을 때, 하루동안 잠도 안자고 하후돈 곁을 지켰으며 하루에 세 번씩 하후돈의 부상상태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 부득불 하후돈을 꾸짖은 후에도 몰래 하후돈에게 사람을 시켜 선물이나 술, 고기 등을 보내 하후돈을 뒤로 달랬고 공식석상에서는 직위로 부르며 군신의 예로 대했어도 사석에서는 조조가 이름을 부르며 격의없이 대한 몇 안되는 인물이였다. 그런 아낌을 받아서인지.... 조조의 죽음이 임박한 무렵 크게 상심하여 본인도 병을 얻어 앓기 시작하다, 끝내 조조가 사망하자 슬픔 속에 지내다 결국 병상에 누웠고 조조 사후 즉위한 조비가 그를 위로하고 그간의 공로를 기려 대장군에 봉했지만 이미 병이 깊어 골골대던 하후돈은 대장군 임명 후 몇 달 뒤 사망한다. 완력에서는 허저나 전위에 비할 바 아니였다. 무예가 뛰어나 장료나 하후연처럼 전술적 활용도가 뛰어난 것도 아니였다. 장합이나 서황같이 우수한 지휘관도 아니였다. 후방에서 서포트를 잘했다한들, 행정처리가 탁월했다한들, 무수한 조조 아래의 먼치킨 문관들에 비하면 부족했다. 뭐 하나 유별난 게 없이 이도저도 아니라 할 수도 있는 그였지만 주군에 대한 깊은 충정, 부장들은 물론, 당시로서는 소모품으로 여겨지던 병사들에 대한 너그러움과 관대함 그리고 고위직임에도 늘 청빈했던 참공직자의 자질이 충분했던 그였기에 자신보다 뛰어난 숱한 이들을 제치고 철저한 능력지상주의자였던 조조의 총애를 받은 그의 행보는 그 시대는 물론, 지금도 귀감이 된다. 장애를 딛고 오로지 성실함과 인성으로 대장군이 된 하후돈의 성공스토리가 부디 여러분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를 바라며 지금껏 다음 칼럼까지 세월아~ 네월아~ 하며 연재하던 것을 이번은 무리해서 바짝 당겨 연재해봤다는.....ㅎㅎㅎ . 나라 망친 아줌마 투톱의 뿌리가 뽑힌 기념비적인 현시국의 첫 주말을 부디 다들 즐겁고 알차게 보내시길!
법정 효직 (法正 孝直) A.D.176 ~ 220
유비는 평소 눈물 보이는 일이 많은 편이였으나 대체로 진심에서라기보다 일종의 "쇼(Show)"였다. 자신의 이미지 중 가장 대중들에 어필되는 "인의(仁義)"를 챙기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였던 것. 그런 유비 역시 진심에서 슬퍼 운 적이 있고 특히, 주변사람을 잃었을 때 몇 차례 그랬으며 사실상 그 첫 번째는 바로 "법정"이 죽었을 때였다. 오늘은 유비를 진심으로 울게 한 이 남자에 대해 다룬다. 법정의 첫 커리어는 유장의 휘하였다. 그의 고향은 익주에서도 꽤 남쪽이였는데, 지금 중국의 구이저우성 남쪽이였다. 법정의 고향은 당시 유장이 다스리던 익주 관할도 아닌데다 거리도 몹시 멀었기에, 인맥과 연줄 등으로 주로 인사를 배치한 유장에게 중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성격도 물렁하니 우유부단한 편이던 유장으로서는 독설가에 행실도 좋지 못한 법정을 높이 쓸 이유가 없었다. 법정은 전략전술의 귀재인 엄청난 책사였지만, 당시 유장 치하의 익주에서는 그런 법정의 특기를 보여줄 기회조차 없었다. 맹달과는 동향 사람으로, 유장에게 임관도 같이 했고, 임관 후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였던 장송과도 금방 친해졌다. 법정과 맹달, 장송 등은 셋 다 능력자들이긴 했어도 역시 셋 다 인성들은 그닥인 아웃사이더들이였고, 셋은 걸핏하면 술 마시며 유장의 비젼없는 무능함에 대해 뒷담화를 했던 걸로 보여진다. 법정의 진가는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면서부터 발휘되기 시작한다. 야망도 없고 대륙의 변방에 웅크린체, 안정과 유지를 원한 유장 아래에서 법정같은 전법에 능한 인재는 대우를 못받았으나 원체 사람을 잘 보던 유비인데다 또 '한실의 부흥' 이라는 기치 아래, 조조와의 싸움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유비에게 법정같은 전략기재 충만한 책사는 실로 천금같은 재산이였다. 익주정벌 당시 봉추 방통의 전사와 그 이전에 서서의 이탈로 사실상 유비진영의 책사라고는 제갈량 혼자였으나, 유비 휘하 온갖 행정과 내치는 물론 군사관련 업무에 민생 및 치안과 외교까지 도맡던 제갈량은 이미 격무에 치이고 있던데다... 무엇보다 법정의 전술 전개방식은 유비와도 코드가 맞았었다. 전장에서의 전략전술 수행 방법이나 지론에 관해 제갈량과 법정의 스타일은 판이했다. 제갈량이 지형, 기후, 양측의 병력 등 여러 데이터들 토대로 병법의 정석대로 가는 모범생 스타일인데 비해, 법정은 적장이나 적병의 심리를 읽고 빈틈을 노린 후 임기응변을 잘 부리는 편이였다. Ex. 량) 교실의 위치는 4층.. 점심시간 벨이 울림과 동시에 모두 엘리베이터로 달려가겠지만, 3층에서 한 번 멈출터이니 비상계단 통해 빨리 내려간 후, 화단을 가로 지르면 매점에 보다 빨리 당도할 수 있을 터... Ex. 정) 아씨 귀찮고 배고프다. 그냥 양호실 간다하고 수업 째고 매점 가야겠다. 그의 이런 전술적 재능을 통해 공적을 세운 것은 유비의 익주정벌.. 그리고 무엇보다 법정이라는 이름을 전국에 떨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유비 VS 조조의 한중쟁탈전에서 건안 24년 정군산전투에서 조조휘하의 역전의 맹장인 하후연을 격파한 다음부터다. 아깝게도 단명하여 그리 많은 전투에 참전하진 못했으나 조금만 더 살았다면 절대 방통보다 못한 책사가 아니였을 것이며, 행정과 내정의 제갈량과 전략전술의 법정으로 이원화 되지 않았을까 한다. 한중쟁탈전 이후 그 책사 많은 조조측에서도 법정을 탐냈다고 한다. 법정이 막 유비세력에 몸 담았을 당시, 제갈량은 형주에 남아 있던터라 그와 가장 먼저 조우한 유비측 책사는 "방통"이였는데 둘은 상당히 코드가 잘 맞았다. 전술적인 임기응변을 잘 활용한다는 점과 상대의 심리를 읽어 허를 찌르기를 즐기는 점, 원하는 결과 얻고자 수단방법 안가리고 도의적인 부분들도 뒤로 하는 결과지상주의 등. 반대로 법정과 제갈량의 케미는 그닥이였다. 이미 그 이전에 법정과 성향이 비슷한 방통과도 몇 차례 마찰 빚은 적 있던 제갈량은 법정과도 이따금씩 부딪히곤 했다. 익주정복 후 기존 익주의 법규들을 개정하는 과정에서도 제갈량과 법정은 의견다툼이 잦은 편이였다고 한다. 직급이나 유비 휘하에서의 경력은 응당 제갈량이 훨씬 위였으나 유비가 익주를 점령한 이후, 법정은 그런 유비나 제갈량을 크게 의식 않고 자기 마음대로 갖은 횡포와 비리를 저저르고 다녔으며 이같은 사항들이 몇 차례나 유비에게 상소로 올라갔다. 허나 제갈량이 유비에게 올라가는 상소들을 미리 체크 후, 법정과 관련된 상소들은 필터링 후 유비에게 올렸는데, 제갈량 입장에서도 법정의 그런 권한오남용 및 전횡은 내키지 않았으나 워낙 법정의 공적이 컸고 아직 유비의 익주통치가 자리잡지 않아 혼란을 방지하고자 함이였을뿐.. 제갈량은 법정을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눈치는 있었던 법정 역시 어느 정도 선부터는 제갈량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이슈는 더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던 전략전술의 전개방식은 유비와 잘 맞았는지는 몰라도 개인적인 성향에 있어서는 법정은 유비와도 상극이였다. 뭐 어느 세력인들 아니겠냐만... 당시 유비 세력에서 유비의 권위는 실로 대단한 것이였다. 나이도 적잖았던데다가, 유비가 그간 겪어온 산전수전공중전 속에서도 숱한 고난을 이기고 조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심지어 적벽대전을 통해 손권과 연합 후 그 조조와도 대등히 싸운 뒤 형주에 이어 익주까지 차지한 백전노장 유비 앞에서 문무백관들 모두 고개를 숙였으나.... 유일하게 유비 앞에서도 뻣뻣하게 굴며 일절 쫄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는 것은 물론 유비와 언성 높여 언쟁까지 벌이는 것은 당시 2인자인 제갈량이나 의형제로 오랜 시간 유비와 함께 한 관우, 장비 등도 감히 못하던 행동이였다. 심지어 유비와 법정이 언쟁을 벌이던 중 격노한 유비가 주위를 돌아보며 법정의 입을 막고 밖으로 끌어내라 소리치자, 도리여 자신의 입을 막는다고 안될 게 될 거 같냐며, 내 말을 듣지도 않을 거면 난 다시는 의견을 내지 않겠다며 법정도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결국 유비가 사과를 한 후에야 간신히 둘은 화해를 했다고 한다. 이렇듯, 관&장 의형제나 서열 2위 제갈량 등도 못할 말을 법정은 거침없이 했다. 조운 또한 유비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할 말은 하는 편이였으나 유비가 듣기 싫다하면 그 이상은 하지 않았지만, 법정은 유비가 화를 내거나 듣기 싫어해도 할 말은 끝까지 했고 유비가 자리를 떠버리면 같이 쫓아가 따라가며 할 말을 했다고 한다. 훗날 유비가 동오정벌을 밀어붙일 당시 이를 제지 못한 제갈량이 "법효직이 살았더라면 이를 말렸을 것을"이란 말도 다 이랬기에 나왔던 것이였다. 정말 법정이 살았더라면 유비에게 이치를 따져 독설을 퍼부어 유비를 제지했을 것이다. 허나, 유비도 역시 영웅은 영웅이고 대인배는 대인배였던게.... 그리도 법정과 다투면서도 법정의 말이 옳고 그의 말을 따르는 게 맞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비록 울컥해서 그에게 화를 낼 지언정 반드시 뒤에 가서 사과를 했고 화를 내면서도 그의 제안은 대부분 거절 없이 받아들였다. 물론, 여기에는 법정이 비록 말은 거칠지언정 유비에 대한 깊은 충정을 지녔고... 진심에서 유비를 위한 말들과 전략제안을 했다는 것이 전제되었다. 그냥 쉽게 말해 유비와 법정은 서로 츤데레,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딱 츤데레였다. 유비 생전을 넘어, 유비의 사후까지 사실상 전장에서 지략 쓰는 책사로는 제갈량 원톱이나 진배 없었고, 또 거기에서 비롯된 한계들을 돌아볼 때... 역시 장수하지 못함이 매우 아쉬운 인물. 더구나 제갈량과는 승리를 추구하는 방식도 다르기에 더욱 안타까운 인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오히려 만만치않은 정치력과 권모술수가 있었고 제갈량과는 여러 모로 대비되며 잘 맞지 않았었기에, 그가 장수하여 보다 거물이 되었다면 촉의 파벌분화를 일으켰을 지도 모른다는 학설들도 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제갈량과 달리 그는 인격적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사리사욕을 좀 밝히는 편이였고 언행 자체가 거친 편이다보니 주변인들과의 마찰도 있는 편이였으며... 도의적인 부분들에 크게 구애받지 않은 체,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 아님?" 스타일. 게다가 원체 오만하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였다. 무엇보다 이 사람의 주군 섬기는 방식은 주군 자체의 됨됨이를 보는 방식이였기에, 유비에 대한 충성 역시 유비가 그럴만한 사람이였기 때문이기에 유비 사후, 유선의 집권 후에도 유비에게만큼 유선에게도 충성을 다 했을 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이적을 했거나 그만큼 높아졌을 자신의 권위를 악용했을 우려도 없잖은 인성의 소유자.... 내기를 좋아했던거 같다. 여러 정황들과 근거들을 토대로 나중을 예측하는 감이 상당히 좋았던 사람이였고 주식을 했으면 대박이 났을 인재였다. 제갈량과는 공적인 부분으로는 이리저리 전원책과 유시민처럼 이야기도 많았고 대립도 심했으나 어쨌건 서로 공경은 했지만 일절 개인적 교류나 사담이 없었다는 걸로 보았을 때, 사이는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비와 술자리를 갖던 중, 만취하여 유비와 서로 삿대질까지 해가며 격하게 말다툼을 벌인적 있었는데, 다행히도 상대가 유비였던지라 용서를 받았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고 이듬해에 죽었는데 며칠 간 유비가 대성통곡을 하여 유비의 건강이 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놀랍게도 유비는 법정을 영입 후, 그가 죽는 순간까지 제갈량보다 법정과 독대한 횟 수가 더 많다고 한다.
노숙 자경 (魯肅 子敬) A.D.172 ~ 217
이 칼럼을 시작하며 대략 스무 명 가량의 인물들을 다뤘지만 거의 매번 붙는 수식어가 바로 "연의의 피해자"라는 타이틀. 피해자가 있으면 반대로 수혜자도 있어야 하는데, 어쩌다보니 의도치 않게 피해자들만 줄줄이 다루고 있다...;; 오늘의 주인공 역시 비록 그 피해가 앞선 다른 이들에 비해 경미하기는 하나, 그래도 피해자라면 피해자인 인물. 바로 "노숙"이다. 적벽대전 앞두고 항복론자들이 대다수였던 오에서 가장 앞장서서 항전을 외쳤고, 유비세력과 오의 연합에 있어 일등공신에, 주유 사후 오의 군권을 총괄했던 그의 숨겨진 그리고 연의의 각색 전의 본모습에 대해 알아보자! 양주 임회군 동성현.. 오늘날 중국의 안후이성 딩위안 출신이며, 없어 보이는 이름과는 달리 양주의 대호족 출신 금수저였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오냐자식이였으며 대대로 있는 집 아들내미라 마음의 여유가 넘쳐나다보니 재산을 들여 인근의 빈자들을 돕고 베풀며 뜻 통하는 명사들과 사교나 하며 근심없이 살던 양반이였다. 정사의 노숙전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이미지와 달리 체격이 제법 큰 편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난세에 걸맞는 스킬을 보유해야겠다는 생각에 어려서부터 궁술, 마술, 검술 등을 익히고 가난하지만 힘 좀 쓰던 장정들을 어깨로 고용하여 적잖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주유와의 인연도 이때 맺었으며, 당시 이미 공직에 있던 주유가 군량을 좀 협찬 받으러 노숙을 찾아가자 아예 곳간을 들어내다시피 퍼줬고 이에 뻑간 주유와 비즈니스를 넘은 친분을 나누게 되었다고...ㅎ 이래저래 재산과 명성을 다갖춘 노숙을 가장 먼저 리쿠르팅한 것은 역시 당시에 상당한 유력군주였던 "원술". 그렇게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노숙이지만 원술의 하는 꼬라지를 보니 얘는 아니다 싶었고 당시는 무슨 사직서내고 마음대로 퇴사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였어서 원술의 스타일상, 그냥 그만둔다하면 뒤끝작렬이 예상되었던터라... 노숙은 일가친척 다 이끌고 짐을 싸서 '도망'을 친다. 그럼 그렇지, 빡친 원술은 애들을 풀어서 도망치는 노숙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추격대와 마주친 노숙은 이들을 설득하는 한 편, 방패를 세워놓고 활로 이 방패를 꿰뚫는 슈퍼파월을 보여주며, 호락호락 잡혀가진 않겠다는 경고를 했고, 설득도 설득이지만 그 궁술을 보고 쫄아붙은 추격대는 그대로 되돌아 가버렸다. (벌써 이 대목부터 노숙이 문약한 선비가 아님이 드러남) 이러고 도망가서 의탁한 사람은 바로 자신의 과다협찬을 받고 베프를 먹은 '주유'였다. 이 때, 주유는 자신이 모시던 "손책"과 노숙의 미팅을 주선, 손책도 노숙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헤드헌팅을 하려던 때 노숙의 사실상 부모님에 진배없던 할머니께서 돌아가셔, 노숙은 할머니의 장례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 와중에 노숙의 친구였던 "유엽"이 마침 인근에서 세력을 키우던 '정보'(여러분이 아는 그 정보 아님)가 인재를 구한다니까 같이 가보자는 청을 받고 가려는데 (그냥 별 생각없이 아무나 섬기고 보는 스타일인가....) 그 소식 듣고 찾아온 주유의 설득에 당시 손책이 막 죽고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어버버하고 있던 "손권"을 섬기게 된다. (아무나 섬기는거 맞는 듯...-_-;;) 이 면접(?)에서 손권에게 노숙은 "천하이분지계"라는 테마로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여기에 감명받은 손권은 바로 노숙을 임용한 뒤 최측근에 두고 쓰게 된다. 당시 노숙의 프레젠테이션의 거국적 스케일은 아직 미성년자요, 아버지를 여읜지 그리 오래지 않아, 사실상 아버지 역할하던 형까지 잃고 난 후 자기 혼자 어떻게 세력을 굴려야할지 가늠을 못 잡던 손권에게는 실로 파격적이였으며, 심지어 훗날 천하의 남쪽을 평정 후 천자의 자리까지 나가시라는 노숙의 우쭈쭈가 가미되어 손권은 기분이 째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손권의 평생 겐세이맨이였던 "장소"는 노숙이 아직 손권을 곁에서 바로 보필하기엔 젊어서 경험도 적고 태도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노숙의 임용을 반대했는데 그럼 그렇지, 손권은 장소의 말을 그냥 씹고 노숙을 중용했다. 보통 한 세력의 우두머리를 섬기기 전에는 그 휘하의 실세들과도 접견하는 시간을 갖는데, 손권의 당시 오른팔인 주유와 왼팔인 장소를 조우하던 자리에서 주유와는 그닥 코드가 안맞던 장소였던지라 주유가 왠 젊은 놈 하나 데려와서 주군 측근에 바로 꽂을라치니 장소가 노숙에게 시비를 좀 걸었나본데, 노숙 역시 손권 다음 No.2인 주유가 하도 설득을 해서 온건데, 왠 꼰대가 태클을 거니 그닥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던 모양...ㅋㅋ 이때부터 장소와 노숙은 서로를 태클거는 상호태클지간으로 둘의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노숙이 오에서 펼친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친유비정책". 당시만 해도 유비는 자체 세력은 별 볼일 없이 유표에게 의지하다 유표가 죽고, 유표의 뒤를 이은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선언하여 형주의 반조조파였던 유표의 장남 유기와 결탁한 상태였는데.... 노숙은 비록 유비세력이 당장은 부실하지만 그 강대한 원소도 조조에게 작살나고 중원의 큰 세력이던 형주의 유씨집안도 조조에게 꿇은 상황에서, 천자를 등에 엎고 승상이라는 위엄을 지녔던 조조를 도리여 역적으로 몰며 대항하는 유일한 세력이며, 당시 천자인 헌제가 직접 족보를 뒤적여 한실의 종친임을 인정 및 좌장군이라는 결코 낮지 않는 공식직함도 파준 "명분"에 주목했다. 그런 유비와 손을 잡으면 유비가 가진 포텐과 명분을 빌려 조조와도 맞서고, 조조와 맞서는 것은 후한조정과의 맞다이를 의미하여 사실상 역적이 되지만, 유비가 지닌 명분 덕에 오히려 역적을 도모하는 정의파로 이미지 세탁이 되기 때문. 사실 유비의 이 메리트는 상당해서, 비록 한실종친이라고는 해도 서민출신에 세력도 별 거 없던 유비가 공손찬, 원소, 유표, 조조 등의 당시 내로라하던 강자들의 환영을 받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저 중 공손찬은 그런 유비가 지닌 명분보다 유비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유비를 서포트 해주긴 했지만 당시같은 난세에 인격이 꽝이던 공손찬이 단지 그저 동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비를 도왔을리는 없었기에... 당시 오 내부에서 이런 유비의 전략적 가치를 그리 크게 평가하는 이는 사실상 전무했다. 어쨌건 유비의 군세 자체는 당장 오에 있어 큰 전술적 가치가 없을만큼 대단치 못 했기 때문이다. 허나 이건 유비의 군사력만을 놓고 보는 한정적인 '전술적' 시야에서 그런 것이고, 그 외나 그 이후의 여러모로 넓고 멀리 바라보는 "전략적" 시야에서는 유비가 지닌 가치와 그 활용도가 대단했는데, 오에서는 이런 유비의 전략적인 요소를 뚫어보는 정치적 대국안을 지닌 이가 없었다는 뜻. 노숙은 손권에게 자신과 손권이 봐야 하고 가야 하는 길은 당장의 강동수성이 아닌, 장강 이남의 세력을 규합하여 강북을 평정한 조조와 대치하며 나아가 제위에 오르는 길임을 인지시켰고 그 시작점에서 시작하는 사업이 바로 친유비정책이였던 것. 노숙은 진정으로 손권을 위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자였고 유비에 대한 부분도 오로지 자기 주인에게 도움이 되는가 여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지, 전혀 절대 유비가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닌 것이였고.. 이는 내 예전회사의 김이사에게 사람들이 들러붙어 온갖 설탕발림을 쳐바르는 이유가 회식 때마다 누구도 말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알고 와서 술빨, 안주빨 다 극대화 시키고 노래방 가자고 진상 부려서 다음날 출근할 사람들 새벽 4시까지 집 못가게 해놓고는 이사씩이나 쳐되는게 법카로 1원 아니, 1전 한 번 긁는거 없이 시발새끼 담배도 심지어 애들꺼 달래서 피우는 그 새끼를 사랑해서가 아닌, 그 새끼가 인사고과 평점을 메기는 나쁜놈의 새끼라 어쩔 수 없음과 같다. 노숙이 이러한 친유비정책을 진행하며 가장 주안점으로 삼은 것은 손권세력과 유비세력을 서로 상호의존관계로 만들어 이와 잇몸이 되게끔 유비의 세력을 어느 정도 성장시키는 것이였는데, 이러한 투자를 위해 노숙은 철저하고 꼼꼼히 유비를 패트롤 하기 시작 했으며, 유표의 사망 당시 조문을 구실로 유비를 첫 대면한 것을 시작으로 심지어 유비가 조조에게 작살나서 허겁지겁 쫓기는 상황의 장판파까지 가서 유비를 살피며 손권과의 동맹을 제시했다. 삼국지연의에는 이런 노숙의 모든 선견지명과 노력이 다 짤리고 그냥 제갈량이 손권 단물 빼먹으려 뭣도 없는 주제에 허세로 혼자 유-손 동맹을 결성시키는 듯 나오지만 사실은 이렇듯 노숙의 선노력에, 이를 합당하다 여긴 양측의 초천재인 제갈량과 주유의 납득. 그리고 이 재사 셋이 논리를 모아 손권을 설득한 결과. 결국 이 동맹의 시너지는 둘을 합친 것보다도 최소 5배 가까이 더 많고 경험많은 대군단을 거느린 조조군세를 불싸르게 되며 사실상 조조는 이날 이후로 장강 이남을 포기하고 유종의 항복으로 얻은 형주의 장강 이남도 잃게 된다. 이후 적벽대승의 지분으로 유비는 형주의 장사, 영릉, 무릉, 계양 및 남군의 공안까지 다스리는데 손권의 허가를 얻어내는데 여기서도 손권을 강하게 설득한 것이 노숙. 삼국지연의 속 노숙은 제갈량에게 놀아나고, 주유에겐 갈굼 당하며, 손권의 눈치를 보는 뭔가 강동의 빵셔틀처럼 나오지만 사실은 열라 기 쎈 주유, 손권에게 당장은 좀 손해여도 훗날을 위한 투자임을 인지시켜 유비에 대한 지원을 설득하고 또 이런 유비에 대한 서포트를 발판으로 손권을 황제로 만들려는 거국적 스케일의 정치가였던 것. 주유 사후, 주유의 간언 및 손권의 의지로 노숙은 오의 군권전체를 통솔하며 실질적인 오의 서열 2위가 되고 이 때 각 군영들을 시찰하며, 평소 글도 모르는 잡나부랭이 취급하며 무시하던 "여몽"이 니미 도리여 자기도 못 보는 부분까지 캐치해가며 자기를 가르치려들자, 그 유명한 오하아몽 & 괄목상대 사자성어가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후에 여몽편에서 다루기로.... 하여간 이때껏, 스스로 문무겸전이여서 장소처럼 매가리도 없는게 쥐뿔 글 좀 읽었다고 앵기는 것들, 이전 여몽처럼 무슨 대가리도 근육일 것 같은 힘만 쎈 무식종자들을 모두 무시하던 노숙이였으나 이 일을 계기로 여몽과 급친해진다. 이 와중에..... 노숙의 작품이던 유-손동맹의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하니 이는 바로 "유비의 익주정벌"... 일전에 주유와 감녕의 주도로 유장은 좆밥이고 형주도 비록 유비에게 임대주긴 했어도 실상 우리땅이니 이제 천하이분지계의 마지막 퍼즐은 익주를 먹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당시 손권은 익주와 맞닿은 형주의 유비에게 이를 이야기하자 당시 유비는 유장이 자신과 종친이고... 그 땅은 오에서 멀며.. 험한 산악지대에... 들어가는 길목도 좁아 대군과 물자의 수송이 어렵고... 예로부터 장거리원정이 성공한 예가 드물고... 니들 거기 갔을 때 조조의 빈집털이는 어쩔 것이며.... 등등등등등등의 이유로 손권의 익주행을 반대했는데 당근 이는 제갈량과 유비 역시 자신들의 천하삼분지계의 마지막 퍼즐을 익주로 정해서였다. 아무튼 그때는 유비의 반대도 있고 하필 주동자인 주유도 죽어서 흐지부지 되었건만 그때 그렇게 거품물고 반대하던 그 유비가 익주를 따먹었다니까 손권은 빡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렇듯 유비는 익주를 먹으면서 자기의 본진인 형주는 관우를 남겨 수비케 한다. 이 때부터 관우는 명줄을 재촉하는 한편, 본인 스스로의 정치역량이 얼마나 후달리며... 또 본인 스스로 한 방면의 주둔 수비사령관으로서 얼마나 부족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당시의 관우가 어땠는지는 훗날 관우편에서 자세히 언급하기로...ㅎ 아무튼 당시 형주와 오의 접경지역에서는 빈번한 충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때마다 노숙은 자기선에서 우호적으로 재량껏 처신했지만 그 도를 넘어서기 시작하자 참다 못해 관우에게 독대를 요청하고 관우도 이에 응해, 둘의 접견이 성사된다. 연의에서는 관우의 호기와 노숙의 호구의 대비로 표현하나, 실상은 절대 달랐...아니, 틀리다. 이 당시 관우와 노숙은 서로의 경호병력은 물리치고 단둘이 오로지 칼 한 자루씩만 차고서 만나 논쟁을 펼치는데, 물론 당시 장비와 함께 "만인지적" 칭호의 유이한 그레이트 관우는 맨몸이라한들 노숙이 칼 아닌 총을 차고 나갔어도 그런 노숙의 허리를 뒤로 접을만큼의 위력을 지닌 사나이긴 했으나 노숙 또한 풍체가 작지 않고 힘과 패기가 없는 이가 아니였기에 전혀 쪼는 기색없이 관우를 만나 언성을 높이며 따박따박 할 말을 한다. 숙 : 니네형 익주 먹었으니 형주 돌려줘. 우 : 뭔소리냐... 숙 : 땅없어서 가여워 빌려준거잖아. 돌려줘. 우 : 우리형이 가엽다니!!! 숙 : 조조한테 작살나 쫓겨온거 우리가 땅 빌려준거임. 그런데 익주도 생겼으니 꽁으로 빌리던 형주 줘. 우 : 우리 없었으면 니들도 못 먹을 땅이였어. 숙 : 하아.. 주유가 거의 다 차린거, 밥숟갈만 얹었잖아. 그럼 저번에 익주는 형제의 땅이라 우리보고 치면 안된다더니 남인 우린 못 하게 하고 형제라는 너희 형은 왜 그랬음? 그리고 형주 다 내놓을 거 없이 계약상 우리에게 빌린 지역만 달라는데 뭐 문제 있음?? 우 : 천하는 덕 있는 자의 땅이거든!!?! 숙 : 오호라? 그럼 지금 제일 넓은 땅 가진 조조는 니미, 니네형과 우리 마스터보다 덕이 더 많아 땅부자 되신거임? 그럼 그 전 너희형은 덕이 부족해서 땅이 없었다 갑자기 덕폭탄 맞음? 아니 그리고 관우 니는 세상에 땅크기로 사람덕을 측정하는 덕투력측정기였음!??! 와.. 세상이 관우를 의사랬는데 이거 뭐 그냥 복덕방 아저씨였네.. 대실망 우 :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숙 : 그게 아니면?? 우 : 날씨가 좋군! 숙 : 뭐래는거야 이 수염쟁이가... 땅내놔! 우 : 씨팔 형한테 말해! 왜 나한테 지랄이야 지랄이! 결국.... 오는 익주의 유비에게 사자를 보내 강력 컴플레인을 걸고 유비측은 자신들이 실효지배 하고 있으나 영유권을 주장하는 오에 장사, 강하, 계양 세 군을 되돌려 주게 된다. 사실, 유비측 입장에서도 노숙의 저 논리에 마냥 데꿀멍되버릴만큼 명분 없는게 전혀 절대 아니였으나 늘 춘추를 지니고 다니신다는 관운장께서는 그저 폼으로 춘추좌씨전을 갖고 다니신건지, 매번 첫 페이지만 읽다 잠드셨는지는 모르나... 노숙의 어거지에 제대로된 대꾸 몇 마디 못 해보고 리타이어 되버리는게 바로 정사! 아무튼 다 떠나서 이번은 노숙편이니만큼 노숙이 주인공이니, 노숙입장에서 보자면 그 무력깡패인 관우와 독대하고도 일절 위축없이 자기주장을 내세워 관우를 그로기상태로 몰아간 그의 패기와 용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부잣집 금수저에 어려서부터 베풂을 좋아했다고는 하나, 본인 스스로에 대해서는 검소했고 스스로에게 있어서 상당히 엄격했던 사람이였다. 다만, 남에게도 엄격했던거 같다... 기록을 보면 거의 활자중독에 가까운 사람이였는지, 시국이 안좋고 격무에 시달릴 때조차 책을 읽었다. 주량이 약한건 아니였던듯 보이나 필요해서가 아니면 좀처럼 입에 대지는 않았던거 같다. 본인이 인정할만하다 싶으면 스스로를 낮추며 공경하는 자세로 대했으나 그렇지 않다면 단호박이였다. 그리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미지나 당장 그러한 이미지들의 결실인 첨부던 일러스트들만 보더라도 그냥 문관필이지만, 일반 행정관련 내정을 본 적이 없는 군무만 봐왔던 인물로, 전장에도 수 차례 출전하며 야전경험도 적잖았던 사람이였다. 주유 사후에 대도독을 맡으며 오의 No.2였으나... 안타깝게도 장수하진 못 했다. 사망원인으로는 과로에 의한 급성사와 위암설이 있으나 둘 다 유력하진 않다. 언변이 워낙 좋았다고 하는데, 말을 길고 화려하게 하진 않았지만 할 말만 조리있게 딱딱 짚어 하는 스타일이였다. 오와 손권의 미래전략에 있어 오의 마지막 진보주의자였다. 주유와 노숙만이 진정한 오의 팽창주의자였기에 오의 물리적 확장을 추구하며 그와 관련된 전략들을 제시하며 준비했었으나 그 후의 여몽과 육손 등은 물론 훌륭한 인재들이긴 했어도 오세력의 유지와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을뿐 사실상 오의 대외진출에는 소극적이였다. 물론, 훗날 제갈각이 있긴 하나 주유 & 노숙과는 조금 다른 사례이기도 하고... 사실상 노숙의 사망과 함께 오는 천하이분지계나 노숙이 주장하던 개념의 천하패권은 물건너 간 셈이다. 물론, 천하이분은 아니여도 삼분은 했다지만 이는 위와 촉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와중에 오의 의지와는 별개로 형성된 것에, 손권이 제위에 오른 부분 역시 천하의 패권을 쥐고 기성국가의 권한을 이양받으며 제위에 오른 조비나 그 기성국가의 명맥을 이어 부흥을 꾀하고 기성국가를 패망시킨 국가를 타도한다는 명분으로 제위에 오른 유비의 그것에 비해... 딱히 세가 커진 것도, 명분도 없는 그냥 날치가 뛰니 짱뚱어도 뛰는 식의 미투제위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가 제시한 친유비정책은 단기적으로야 오에 손실 또는 이익의 저하를 가져오긴 했으나 바로 그 전략덕에 오는 물론 유비세력 역시 초반의 그 엄청난 기세로 남하하는 조조에 맞서 이길 수 있었던 것. 노숙 사후와 맞물려, 유손동맹이 와해되고 관우의 사망이 겹치며 이는 또 이릉대전으로 옮아가는 와중에.... 훗날 제갈량의 고군분투로 촉오동맹이 재건되기까지 안그래도 둘이 합쳐 위에 못 미치는 촉과 오는 서로간의 싸움으로 적잖은 국력을 소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노숙은 어느 조직에나 있진 않지만, 어느 조직에나 필요한 "미래와 성장"을 내다보는 진취적인 인물이였다. 열 명, 백 명의 현상유지자들보다 이런 한 두 명의 진보주의자들이 있을 때 그 조직은 나중을 준비하고 또 그 나중을 준비하고자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되며 투자라는 것을 할 수 있다. 물론, 미래에 대한 투자의 불확실성은 어쩔 수 없는 리스크지만 이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뛰어난 컨설턴트가 필요한데, 오와 손가에게 있어 바로 그 마지막 컨설턴트였던 노숙이였다.
손견 문대 (孫堅 文臺) A.D.155? ~ 191?
중국의 삼국시대를 구성하는 위, 촉, 오 중의 하나요.. 위, 촉, 오 중 가장 마지막에 망한 오나라의 황실이던 손가의 시작에는 이 남자가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손가의 제네시스라 할 수 있는 "손견"이다. 여기저기에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중국 춘추시대의 위대한 병략가인 '손무(孫武)'의 후예'라는 소문과 추측까지 났지만 일절 그 실제는 확인된 바가 없는 그저 루머에 불과하다. 물론, 절대 아니란 증거도 없지만 유비가 한황실의 종친이라는 사실처럼 족보를 뒤져 팩트를 입증한 것이 아닌 본인의 자칭이며 또 이를 갖고 삼국지정사의 저자인 진수 또한 정황상의 추측을 한 것에 불과하다. 양주 오군 부춘현이 고향이며 오늘날 중국의 최대도시인 '상하이(上海)' 인근쯤이다. 물론, 저 당시의 오군은 이미 전한시대를 넘어 진나라 때부터 살기 괜찮은 지역이였고, "항우"도 거점 삼았던 인구도 적잖던 곳이긴 하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의 상하이와는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유의해두자. 전반적인 사료들 및 역사서와 그 주석본들, 열전까지 죄다 뒤적여 추론해 볼 때... 양주지역의 제법 좀 사는 "호족집안 아들"이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고 또 대대손손 유구한 금수저까진 아닌거 같고, 후한 말에 이르러 떠오른.. 러시아의 올리가르히같은 그런 신흥세력의 자제였다. 어릴 때부터 이미 살던 동네와 고향 일대에서 먹어주는 깡다구와 대담함을 지닌 싹수 다른 소년이였으며, 만 17세에, 모여있는 수적떼들에게 홀로 덤벼 그들을 쫓아내 와해시킨 일화가 있고, 이걸 계기로 벼슬길에 나가 무관이 되어 같은 해 회계군의 허창 & 허소의 난을 제압한다. 이때부터 손견은 고속승진을 시작했다. 참고로 손견이 잘 나가는 호족집안임을 입증해 주는 한 예가 바로 위의 저 허씨들의 난을 제압코자 모병하는 과정이였는데, 관군만으로는 전력이 부족하다 판단.. 사재를 털어 1천 여명의 병력을 추가로 모병하여 임무를 완수했다는 점이다. 당장 천 여명을 모병하고.. 그렇게 모집된 인원들을 무장 및 최소한의 복색을 통일시켜 먹이고 재우고 훈련하는데 투자되는 비용이 벌써 보통이 아니다. 아무튼 놀라운건 손견이 저런 히어로급 활약을 올렸던 연령이 고작 겨우 열 일곱 가량(추정) 나이였다는 것인데, 아무리 저 시절이 평균수명, 사망연령이 낮디 낮아 일찍일찍 결혼하고 얼른얼른 성인대우를 받았던 시절임을 감안해도 참 대단함이... 당장 나도 그렇고, 여러분들이 열 일곱살 때 어땠는지 떠올려보면 바로 답 나온다. 담임선생님의 빠따 한 번에도 고통에 몸을 뒤틀고 쉬는 시간 벨이 울림과 동시에 매점으로 달려나가 빵 사먹으려고 버둥이던 우리의 그 나이에 손견은 홀로 수적떼를 목 베고, 벼슬도 오르고 군사를 모아 전투도 나갔던 것.. T-T 다만.. 어려서부터 아예 학문은 내려 놓았었던 듯. 책을 읽었다는 기록도 없고 심지어 문맹이였다는 설도 있다. 물론, 저 당시에 문맹률은 엄청나긴 했다지만, 그래도 나름 사는집 잘 나가던 자제로서 문맹설은 본인이 얼마나 학업을 멀리 했는지를 보여준다. 저 당시는 오로지 무예만 출중한 이들은 무시를 받았고 높은 직위에 오르는 데도 한계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의 클래스가 되는 무장들은 깊은 학식까진 아니여도 최소한 여러 권의 병략서, 병법서들을 읽는 수준은 되야했던 시절이였기에 문맹설이 돌 정도로 학문을 등한시한 점은 자랑할건 못 됨이 맞다. 허나 그런 무식함에도 불구하고 군사관련 행정처리에는 꽤나 빠삭하게 처리를 했었고 그런 일처리와 용맹 그리고 궂은일은 미루거나 피하지 않고 나서서 쓱싹 처리하는 빠릿함덕에 평판은 좋았던 편으로 성격은 좀 불같을 지언정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시원시원하면서도 화끈한 성격 덕분에 따르는 이들은 적잖았던 모양이다. 군율준수에 매우 엄하면서도 풀어줄 때는 풀어줬고, 병사들을 고압적인 자세 일변도가 아닌 "전우애"로서 대함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식사도 병사들과 함께 동일메뉴로 먹었다고 하니 당근 병사들의 충정도 높았다. 이래저래 빠른 출세가도 달리며 승승장구 했던 손견이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땅 넓고 사람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