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cinemafia
10,000+ Views

'너의 이름은.' 노다 요지로 "'전전전세', 처음엔 위화감 들었다"

이 정도로 많은 관객이 올 것을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도 많지 않았다.
약 270만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일본영화 흥행 2위를 기록 중인 영화 '너의 이름은.' 이야기다. 역대 1위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 약 301만 관객을 뛰어넘을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말이 이제는 허언이 아닌 순간이다. 시네마피아 패널들도 '너의 이름은.'의 리뷰와 분석 기사를 통해 흥행 이유를 짚어보기도 했다.
▲ 영화 '너의 이름은.'의 한 장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음악이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세계에서 작화 만큼이나 음악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선택은 2001년 결성해 록, 재즈, 힙합, 전통음악까지 다양한 활동을 통해, 기존 틀에 억매이지 않은 음악을 만들어온 래드웜프스(RADWIMPS)였다. 래드웜프스는 1년 이상의 작업 끝에 4곡의 주제가인 '전전전세', '스파클', '꿈의 등불', '아무것도 아니야'와 배경음악 22곡을 완성했다. 그리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결국, 시너지는 통했다. OST는 일본 발매 동시 오리콘 차트 1위, 6주 연속 음원 차트 TOP5를 기록했고, 한국에서도 주요 음원 사이트 인기검색어, 인터파크, 알라딘, 교보문고 등에서 음악 종합 부문 주간 베스트 1위를 기록하며 열렬한 반응을 끌어냈다.
이런 흥행에 보답하고자 래드웜프스의 보컬을 맡은 노다 요지로가 한국에 왔다. 17일과 18일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팬들과 만난 노다 요지로는 18일 오전 서울시 중구에 있는 메가박스 동대문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노다 요지로는 "한국에서 많은 분이 '너의 이름은.' 영화를 보신다는 소리를 듣고, 어제(17일) 급히 한국에 왔다"며 "한국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입을 열었다. 그에게 다양한 영화 음악 제작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노다 요지로가 포토타임 포즈를 취하고 있다.
16일 제40회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 우수 감독상, 우수 각본상, 우수 음악상 수상이 결정됐다. (편집자 주 : 최우수상 결정은 3월 8일 열리는 시상식에서 발표된다) 소감을 들려 달라.
ㄴ 수상 소식을 그저께 들었다. 2015년 '화장실의 피에타'에서 배우로 출연했을 때 신인연기상을 받았었다. 음악으로도 상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 바람이 이뤄져 기쁘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노다 요지로가 만든 영화 음악에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작업하면서 감독과 어떤 교류가 있었나?
ㄴ 감독님과 1년 6개월 동안 함께 작업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번 영화 속에서 가사가 있는 곡이 4곡이 있는데 사실은 이 작품을 위해서 가사가 있는 곡을 10곡 정도 만들었다. 가사가 없는 극 중 음악도 어떤 한 부분을 10번 이상 수정하는 등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하며 음악을 많이 바꾸어 나갔다. 때로는 내가 음악적으로 양보를 못 하는 부분도 있고, 어떤 부분은 감독님이 양보를 해주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화 음악을 매우 밀접하고 농밀한 작업을 이어갔다.
영화 OST 작업을 전반적으로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ㄴ 처음에는 감독님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애매하게 "음악을 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뒤에 두세 번 만남을 거듭했고, 감독님이 "사실은 영화 음악을 전반적으로 작업을 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순서를 밟아 내 음악을 보면서, 제의한 것 같다.
'너의 이름은.' OST가 한국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ㄴ 한국에서 이 정도 반응이 있는 것에 대해 많이 놀라고 있다. 일본에서 개봉했을 때도 사실 그 정도의 반응이 날것이라고는 상상을 못 했다. 이 작품이 좋은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끈다기보다 가늘고 길게 오래가는 작품이 될 거로 생각했다. 상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실 우리가 상상 못 했던 굉장한 힘을 가진 영화 같다.
▲ 밴드 '래드웜프스'
나로서는 첫 OST 작업이었다. 그래서 1년 6개월 동안 그 어떤 제한도 두지 말고 일단 작업을 하자는 마음으로 계속했고, 그러한 마음들이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아서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으며 잘해냈다는 자신감이 어느 정도 생겼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내한 공연을 하고 싶은 계획이 있다고 말했다. 일정이 잡혔나?
ㄴ 영화 음악으로 래드웜프스의 음악을 소개했지만, 빨리 라이브로 직접 연주를 해서 퍼포먼스와 함께 한국의 많은 관객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보통 애니메이션의 서정적인 느낌과 달리 영화 '너의 이름은.'의 OST는 J팝과 같은 신나는 음악이라고 느꼈다. 감독의 의견인가 아니면 본인의 의견인가?
ㄴ 감독님의 의지가 매우 강했다. 영화라는 포맷 속에서 가사가 있는 곡이 극 중에 4곡이나 들어간다는 것에 나 또한 위화감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음악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도 되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어 감독에게 "이건 좀 아니지 않나"라고 의견을 말한 적도 있다. 또한, 음악에 대해서 감독님이 나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감독님은 나에게 "영화 씬 속에서 장면으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을 음악이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감독님은 지금까지 없었던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으며 음악도 굉장히 개성 넘치는 곡을 써달라고 했다. 때로는 가사가 많이 들어가게 하고 때로는 가사를 빼라고 했다. 감독님은 지금까지 없었던 영화와 음악을 만들려고 했고, 그러한 감독님의 영화를 보는 눈이나 발상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 함께하게 되어 매우 좋았다.
OST 작업이 래드웜프스의 새 앨범과 비슷하게 방대한 분량이다. OST 작업을 하며 힘들었거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해달라.
ㄴ 전체적으로 즐거운 작업이었다. 그동안 음악을 할 때 내 판단을 최종으로 음악을 완성했는데 이번 OST 작업은 처음으로 제삼자의 판단을 통해서 음악이 완성되는 과정이 있었다. 감독님이 오케이를 해야만 음악이 완성되는 작업은 새로운 작업이었다. 때로는 나는 "이게 좋은데 왜 안 되지?"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었고, 반면에 내가 알지 못했던 내 내면의 것들이 표현되기도 했었다.
또한, '이 정도까지 표현해도 되는구나'라고 발견한 적도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만들려고 할 때 내가 몰랐던 부분이 발휘된다는 것을 알았고 누군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매우 큰 동기가 되었다. 나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을 매우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 노다 요지로가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일본 밴드가 한국 음원 차트에 올라온 게 굉장히 드문 상황이다. 이 일을 계기로 한일 간의 교류가 더 활발해질 것으로 생각하는가?
ㄴ 이번 일을 계기로 한일 문화교류가 더 좋아진다면 나도 기쁠 것 같다. 나에게 있어 한국은 매우 특별한 나라이고 한국에 있는 특별한 친구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한국에 라이브 공연을 왔을 때 한국분들의 반응이 특별히 남달랐다. 그래서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한국과 일본은 무언가 특별하게 이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러한 계기로 일본의 음악이나 문화에 대해서 많이 알아줬으면 좋겠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한국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OST의 가사는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ㄴ 내가 곡을 만들어 나가는 1년 6개월 동안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완성된 실제 영화를 보지 못한 채 작업을 했다. 그래서 이 곡을 쓰고, 가사를 쓸 때는 감독님이 그려준 러프한 스케치를 기본으로 작업했으며 그 스케치들은 이 영화의 중요한 요소들을 그린 스케치였다. 러프한 스케치에서 하늘의 색이나 인물의 표정을 전혀 알 순 없었으나 몇십번 각본을 읽으며 미츠하와 타키의 감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면서 작업했다. 단순히 주인공들의 감정을 가사로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그 감정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 안에서 새로운 느낌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어 나갔다.
영화 음악을 앞으로도 할 계획이 있는지?
ㄴ "그렇다"고 답을 하긴 어렵다. 시간적으로나 여러 가지로나 그렇다.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 감독님의 작품을 또다시 하겠느냐?"는 제안이 온다면 하고 싶다고 할 것이다. 다만, 내가 직접 노래하기보다는 연주곡이나 배경 음악을 메인으로 하고 싶다. 이번처럼 내 목소리가 영화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매번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노다 요지로가 뽑은 '너의 이름은.' 최고의 장면.
처음 음악 작업을 하며 생각했을 때랑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한 것이 달랐을 것 같다. 어떤 느낌이었나?
ㄴ 처음에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 충격이었다. 왜냐면 감독이 그려준 스케치만 보았을 때 하늘 같은 부분이 그저 하얀 종이였기 때문이다. 채워진 영상을 보았을 때 이렇게 아름다운 영상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각본을 읽어 스토리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었으나 영화로 봤을 때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되었고, 엄청난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보기 전에는 영상에 음악이 입혀졌을 때 영상과 음악이 뜨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오랜 기간 함께 작업해서 그런지 완성된 영화에 음악과 영상이 괴리감이 없었다. 단지, 영화 속의 내 목소리가 크게 나와 부끄러웠다. (웃음) 영화를 보았을 때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우리가 일심동체가 되어 영화를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으로, 이는 매우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은 무엇인지 들려달라.
ㄴ '타키'가 '미츠하'의 몸에 들어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가슴을 만지며 몸을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아마도 많은 남성의 염원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장면 직접적인 반응을 노리며 나온 장면이 아닐까 싶은데,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매번 미소가 나온다. 그리고 과연 가슴만 만져보고 끝이 났느냐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내용과 '전전전세'의 가사 내용이 다른 이유는?
ㄴ '전전전세'는 가사의 내용이 영화의 내용이 다르다. 영화의 내용을 그대로 가사에 써 영화 속 음악을 표현한다면 100이면 100만큼만 표현할 수가 있다. 음악으로 세계를 부풀리는 등의 것들을 전혀 할 수 없으므로, 나는 이 영화의 내용으로 내가 느낀 감정과 그 감정의 움직임을 통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미츠하'와 '타키'의 이야기와 직접적인 내용이 같지는 않지만, 나는 이 이야기 속에서 받은 감정 중 가장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전전전세'의 가사로 표현했다. 또한, 이 가사의 내용 중 나에게 가장 와 닿을 수 부분이 어떠한 이야기인지 생각하며 가사를 써내려갔다. 내용은 다르지만, 이 영화의 영상과 내 가사가 콘티의 흐름상으론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이 곡을 만들어 감독님에게 들려줬을 때 감독님이 매우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여 이 곡을 사용하자고 생각했다.
한국의 인디밴드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지?
ㄴ 일본에서 유행하거나 인기 있는 분들은 들어서 아는데, 인디밴드는 잘 모른다.
좋아하는 한국영화작품이 있는지 궁금하다.
ㄴ 굉장히 충격을 받으면서 며칠 동안이나 나를 붙드는 것 같은 작품들이 있었다. 그중 양익준 감독님이 주연했던 '똥파리'라는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으며 좋아한다. 양익준 감독님은 그 뒤로도 인연이 있어 일본에 올 때 집에서 만나기도 한다. 어제도 문자를 주고받았고 지금도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본 영화 중에 인상 깊었던 영화 음악이 있는가?
ㄴ 솔직히 나는 영화를 볼 때 영화 음악에 의식하지 않았다. 근데 근래 2년간 '너의 이름은.'을 작업하면서 영화를 볼 때 음악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작업하며 영화를 보는 시점이 달라졌다. 사실 그 이전까지는 인식을 잘하지 않았기에 영화 음악에 대해 꼭 집어 말씀드리기 어렵다.
'너의 이름은.' 음악을 맡으면서 뮤지션 노다 요지로 삶의 변화가 있나?
ㄴ 실제로 영화 음악을 하며 많이 바뀐 것을 실감하고 있다. 래드웜프스는 사실 메이저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만 하며 십몇 년을 계속 활동해왔다. 거의 매스컴에 노출되지 않으면서 일본에서도 매우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음악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세상의 한복판에 나오게 되면서 뮤지션으로서의 삶이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꼭 이때까지 해온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좀 더 여러 가지로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 '화장실의 피에타'에 출연한 노다 요지로.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된 '화장실의 피에타'에서 주연을 맡았었다. 배우로서 노다 요지로의 행보는 어떻게 되는가?
ㄴ '화장실의 피에타'에 출연했던 직후로 밴드와 음악 활동을 해 그 뒤로는 배우 활동에 대해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요새 조금씩 출연제안도 들어오고 있어 만약 시간과 타이밍이 맞는다면 활동하고 싶다. 이 모든 일은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시작이 된다. 영화 '너의 이름은.'도 아주 조그마한 방에서 시작된 이야기였고, 이렇게까지 확장되었다. 어떤 사람이 만든 것이 재미있고, 그 사람에게 신뢰가 가며 우리가 뭔가 함께 한다면 아주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곳에 뛰어들어서 하고 싶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데, 감독에게 래드웜프스 다음 앨범 뮤직비디오 작업을 제안해볼 생각이 있는가?
ㄴ 한번 뮤직비디오 건에 관해 감독에 물어봤던 적이 있었다. 근데 감독님의 작품은 몇 초의 영상을 위해서 몇십장의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라 뮤직비디오를 만들기 위해서는 좀 시간적으로나 여러 가지 제약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뮤직비디오 말고 함께할 수 있는 작업이 있다면 같이 해봤으면 한다.
[글] 미르 from 문화뉴스
0 comments
Suggested
Recent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도호(東寶)
1930년대는 일본영화의 과도기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시기이기도 하지만 일본은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경계에서 점차 국가에 순응하는 형식을 취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1930년대는 일제 식민지 영화에 대한 지배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시기이기도 하다. 그 시기 영화는 대중예술의 총아로서 상품처럼 국경을 넘어 소비되고 만들어졌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이 식민지 정책을 펼쳐나가면서 조선, 대만, 만주를 지배함에 있어 일체(一體)를 지향했던 까닭에 일본 본토의 영화사들과 식민지 지배하의 영화사들간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본래 영화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창작이라기보다는 자본과 기술에 영향을 받는다. 하여 일본은 이들 3곳의 식민지에 영화산업의 기초를 닦아주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전쟁 이후 영화산업을 이어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일본영화산업과 식민지 토착영화자본의 형성은 필연적이었고 국책영화들을 통해 근대 대중문화의 형성은 물론 보다 더 효율적인 문화적 지배도 가능할 것이라고 일본 스스로가 믿었기 때문이다. ‘만주사변’(1931)이후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 도쿄·나치독일연맹조약(1936)에 서약을 하면서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경계에서 극단적 민족주의가 지식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면서 기존 친마르크스주의 예술가와 작가, 예술가들이 연행되고 검열이 강화되던 시기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 인물인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 1903~1933)는 일본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대표 작가이다. 그는 암살되었고 그의 대표 서적인 ‘게공선’(1929)의 경우에는 대표적인 일본의 노동문학으로서 ‘게잡이 공선’의 잔혹한 노동과 학대에 대하여 폭로하는데, 두 번째 파업으로 비로소 어부들은 ‘동물’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주의적 작품이다. 이 작품은 훗날 감독 겸 배우인 야마무라 소(山村聰)에 의해서 우여곡절 끝에 각색되어 ‘해공선’(1953)으로 다시 2009년에 ‘게어선(Kanikosen, 蟹工船)’으로 사부(SaBu)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절 일본영화는 민족주의 정치를 위해 헌신하는 영화인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때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영화사가 바로 ‘도호(東寶)’다. 1932년 8월 12일 주식회사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으로 시작한 도호의 역사는 처음에는 영화와 연극배급회사로 출발했는데 제3의 대형 영화사이면서, 현재는 한큐한신홀딩스(한큐 전철, 한신 전기철도), H2O 리테일링과 함께 한큐한신도호그룹의 핵심 기업으로 우리에게는 ‘도라에몽 시리즈’나 ‘짱구는 못말려’시리즈 등으로 친숙하다. 도에이, 쇼치쿠와 함께 일본 3대 영화 배급사 중 하나로 아직도 활발하며 도쿄도 치요다구 유라쿠쵸에 본사가 위치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공공질서와 미풍양속을 해치는 소재를 다루지 않고 보수주의로 유명한 이 회사는 1930년에 설립한 토키연구소인 PCL(사진 화학 연구소, Photo ChemicalLaboratory, 통칭 : PCL, 후에 소니 PCL이 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기 출신이 바로 세계적인 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와 그의 평생 지기이자 ‘고질라’ 시리즈로 유명한 혼다 이시로(本多猪四郎)이다. PCL은 일본 최초로 프로듀서 시스템을 채택해 가족적, 봉건적, 인맥 위주의 영화제작을 일체 거부하고 자유롭고 현대적인 경영방침을 정했다. 때문에 암울한 시대가 시작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미술이론가 다키구치 슈조(瀧口修造, 1903-1979)부터 훗날 SONY를 일으킨 이부카 마사루(いぶかまさる) 등 다양한 부류들이 모여들었는데, 좌익이나 전위예술운동에 관한 청년들의 치외법권적 대피소의 양상까지 보인다. PCL은 에노모토 겐이치(榎本健一)의 희극에서부터 지다이게키(현대극)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만들어낸다. 도호는 사내에 영화기획, 제작을 담당하는 부서를 뒀다. 사원 프로듀서는 기본적으로 유명한 원작을 대상으로 기획을 했으며 원작에 대한 정보는 베스트셀러가 되기 전부터 각 출판사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기적으로 정보제공을 받는다. 이렇게 작성된 기획안은 사내에서의 기획 회의를 거쳐 승인을 받게 되고 기획개발에 들어간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작가를 정하고 섭외하고 진행하는 것 또한 기획을 한 사원 프로듀서가 맡는다. PCL은 전용 배급 영화관이 없이 출발하여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1937년 간사이(關西) 사설 철도의 대주주이자 다카라즈카(寶塚) 가극단의 소녀 가극 경영자인 고바야시 이치조(小林 一三) 의 산하에 있으면서 도호(東寶)로 개명, 흥행의 어려움을 단번에 해소했다. 이후 SONY PCL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지만 그 뿌리는 같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군부(軍部)와 적극적으로 유대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사업상 우위에 서게 된다. 게다가 특성상 도피처 역할을 한 까닭에 만주영화협회(약칭 滿映)가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 : 지금의 長春)에 설립되어 국책영화에 착수하게 될 때 시류적 면에서나 인맥이 모두 도호에 의존하고 있을 정도로 많은 인력을 파견했으며 활발한 공동제작을 했다. 일본에서 활동하기 부자연스러워진 좌익, 우익, 군인 출신들이 기회의 땅이라는 만주로 찾아와 계몽영화와 오락영화를 제작했으며 전후에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八路軍)이 공산당 최초의 스튜디오로 삼아 중공(중국공산당)영화의 기초를 닦는 계기가 된다. 물론 이들이 귀국하여 ‘도에이(東映)’의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도호의 역할은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경계에서 한 축을 담당한다. 다시 PCL로 돌아가서, 맨 처음 두각을 드러낸 것은 기무라 소토지(木村莊十二)로 훗날 조선 경성촬영소의 이규환 감독과 함께 춘향전을 같이 함으로써 우리 영화사에도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한데, 군국주의가 뒤덮기 전 최후의 경향주의 영화인 ‘강 건너의 청춘(1933)’, ‘남매(1936)’등을 발표하게 된다.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나루세 미키오(なるせみきお)로, 쇼치쿠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한 사람이면 족하다’는 다소 황당한 이유로 해고 당하자 이적하여 기량을 펼쳐 나가게 되는데 걸작 중에 걸작인 ‘아내여, 장미처럼(妻よ薔薇のやうに, Wife! Be Like A Rose!, 1935)’을 연출하여 뉴욕에서 일반에게 최초로 공개된 일본영화의 기록을 남긴다. 또 한 사람인 이시다 다미조(石田民三)는 ‘꽃은 져 버리고(1936)’를 통해 막부 말기 교토의 유흥거리를 무대로 활동하는 게이샤의 관점으로 외부의 정치적 변동을 그려내기도 했다. 그러나 앞서 기술하였듯 도피처 역할을 담당한 만큼 좌익 계열의 영화인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기 때문에 훗날 노동쟁의로 심각한 인력난을 겪는가 하면 1948년부터는 영화제작을 중단하고 1947년부터 이 회사의 재정지원을 받아온 신도호(新東寶 )영화사에서 만든 영화를 배급하는 수난을 당하기도 한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조선인 영화제작자본과 일본인 자본과의 연관성에 있어서도 도호는 중요하다. 1935년 조선인 영화업자들이 세운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와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는 30년대 후반의 조선영화제작을 이끈 주요한 영화제작회사로 이 중 고려영화협회는 일본의 영화배급회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으며, 이들 회사의 도움으로 제작한 영화를 일본에 수출하기도 했다.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설립도 일본영화산업과의 연관성을 가지고 살펴보게 되면 중요인물인 이재명(李載明)이 도호의 전신인 PCL에서 근무한 바 있었다. 도호는 조선 영화사와 일본 영화사에 동시에 기록되는 영화사인 셈이다.<이훈구 시나리오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92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장합 준애 (張郃 儁乂) A.D.?~231
누차 말했듯... 픽션(허구)이 가미된 "소설"인 삼국지연의는 여러 인물들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반면 그네들의 영웅화 ~ 신격화를 위해 숱한 이들을 엿 먹이기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도 역사범죄자 나관중에 의해 너프 당한 또 한 명의 피해자, "장합"에 대해 다뤄 보기로..! 장합은 삼국지정사, 위의 역사록인 위지, 후한의 역사록인 후한서, 본인의 열전인 위서의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에도 생년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사망 당시의 연령을 알 수는 없지만 원소에게서 조조 휘하로 들어갈 당시 대략... 40대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저 '장악우장서전'은 조조가 자신이 공을 이루는데 그 기여가 으뜸이라며 추켜세운 다섯 장수인,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을 묶어 편찬된 열전이다. 저 다섯을 일컬어 당시에 "오자양장(五子良将)"이라 불렀고, 촉한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과 살짝 비슷한 뉘앙스인데, 오호대장군이란 별칭은 그 때는 없었고 후대 사람들이 붙인데 비해 저 오자양장은 당시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오호대장군같은 저 시절의 '드림팀' 또는 '어벤져스' 느낌의 패키징은 위의 다섯 장수가 원조다. 고향은 당시로는 기주의 하간군 막현(오늘날 중국 허베이성 중남부 인근)이라는 그때 치고도 꽤나 궁한 시골 작은 마을 출신이였다. 참고로 진짜 중국이 겁나 드넓긴 드넓은게... 삼국지 게임 내의 맵에서 기주는 작은 주로 나오나, 조운의 고향인 기주 상산군과 장합의 고향인 기주 하간군의 거리는 무려 166km고, 이 거리는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보다 멀다..ㅎㄷㄷ 만화, 게임, 책, 기타 여러 미디어물들을 봐도 다른 네임드급 인물들과는 달리, 외형 이미지가 일관적이지 못한 편인데... 이는 사료 어디에도 장합의 외모 묘사가 일언반구도 없고 그를 그린 그림조차 몇 없는데다, 그것들 마저 묘사가 모두 중구난방이다보니 도무지 이미지 통일이 안된 것. 다만, 장합의 리즈시절이 펼쳐지는 것이 조조에게 투항 이후인데 그 당시의 추정 연령이 위의 언급처럼 40대로 보고, 조조세력 합류 후부터도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활약하다 전장에서 전사한만큼, 사실상 각종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젊은'느낌의 장수로 표현하는 것은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장합은 조조 휘하 장수들 중 가장 많은 전장에 참전했고, 위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전공이 많은 장수였으며, 주/부장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여러 숱한 전투에서 닳고 닳은 백전노장이였다. 그러다보니 큰 전장의 주요한 임무는 물론, 작은 전장의 자잘한 임무까지 가림없이 두루 맡았고 야구로 치면 4~5선발과 롱릴리프, 경우에 따라 급하면 불펜으로까지 던지면서 하루 걸러 등판하며 혹사 당하는 노예투수 비슷한 포지션의 장수였다. 그 깐깐한 조조가, 또 당시 휘하에 숱한 명장, 용장, 맹장들이 수두룩 빽빽 채이고 밟히고 널렸던 위에서 저토록이나 빈번히 굴렸다는건 그만큼 능력 있기에 믿고 쓸만큼 훌륭한 장수였다는 증거다. 심지어 백발노인 되어 집에서 손주들 재롱이나 보고 탑골공원가서 장기두며 야쿠르트나 얻어 마실 나이에 전장에서 한창 싸우다 전사하니... 죽어 눈감는 그 순간까지 위의 군밀레에 갈려나간 군돌이였다. 삼국지연의나, 연의를 바탕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각종 미디어물들을 보면 장합은 그냥 본인의 무예와 전장에서 구르며 익힌 짬밥으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장수로 그려지나... 위에서 언급하듯, 저렇게 숱한 전장을 누볐고 또 깐깐깐돌 조조에게 신임받으며 주장으로도 쓰인만큼 사실 전략적 대국안도 상당히 뛰어난 "지략을 갖춘" 장수였다. 본래 기주의 군소 군주인 한복 휘하에 있다가 한복이 패망하자 원소의 세력에 속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전장의 시국을 살핀 후 원소나 원소의 책사들에게 여러 전략들을 입안 했으나 거의 다 씹혔다.... 원소는 사람 자체가 선입견, 편견 이런 게 가득한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데다 또 고집은 있는 전형적 꼰대인 우리 회사 김대현 이사님같은 스타일이라 그저 야전에서 뒹구는 장수인 장합의 계책을 귀 담아 들어주질 않았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는 전형적 예였던 당시 원소의 책사들 역시, 지들끼리도 서로 내가 옳네, 내가 맞네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장합까지 거기 껴서 자기 의견을 제출하니 고스란히 즈려밟아 무시했다. 이렇듯, 자기 아이디어와 의견이 매번 밟히던 끝에, 원소 VS 조조의 관도대전에서도 자기가 낸 계책이 원소의 책사 중 한 명인 곽도에게 씹혔고... 그 전투에서 결국 패하며 장합이 옳았음이 드러나자 곽도가 원소에게 장합을 모함하였으며, 이에 겁 먹은 장합은 결국 원소군 내에서 베프면서 역시 원소의 아쉬운 대우에 불만가득하던 '고람'과 함께 원소군의 망루에 불을 지르고 투항한다. 역사기록에는 이 "방화 후 이적"이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패배 전인지, 후인지가 안나와 있으나 어쨌건 장합과 고람이 불 싸지른 망루는 당시로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레이더'역할을 하는 중요한 군사시설이였기에 이를 없앤 것 자체는 어쨌건 원소군에게 치명적이긴 했다. 삼국 정립 이후에는 주로 대촉전선에 투입되었고 이유는 조조가 양쯔강을 끼고 있던데다 북진의사가 거의 없는 손권에 비해, 명목상 "한실부흥" 내세워 줄기차게 자신들에 덤벼 오는 유비세력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여겼기 때문. 그때 손권과 대립하는 동부전선은 장료와 악진으로 묶어 두고 가용 가능한 네임드 장수들은 대부분 대촉전선에 투입되던 시기였다. 장합은 유비도, 유비 사후의 제갈량도 상당히 껄끄러워 하던 장수였다. 대촉전선의 총사령관 역할을 하던 하후연과 조홍보다 장합의 위치는 아래였으나 이는 위에서의 커리어, 또 하후, 조 두 장수는 조조와의 친인척 관계인지라 그럴 뿐... 장수로서의 자질은 저 둘을 뛰어넘던 장합이였으며 그래서인지 조홍과 하후연은 장합을 꽤나 견제했다. 아무리 자신들의 커리어가 앞서고 조조와 혈족이긴 하다지만 철저히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쓰던 조조는 언제던 장합이 더 유능하다 드러나면 속절없이 자기들보다 장합이 더 상전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이를 막아낸 위방어군의 총사령관은 연의와 달리 사마의가 아닌 장합이였고, 4차 북벌 때, 목문도에서 유인책 쓰며 거짓 후퇴하는 촉군을 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뒤쫓자며 바득바득 우기고 쫓아가다 기어이 전사하는 연의와 역시 또 달리... 당시 제갈량의 흉계가 의심된다며 추격을 만류하던건 오히려 장합이요, 이에 대해 군령까지 내세워 제갈량을 추격할 것을 밀어붙여 장합을 사지로 내몬게 사마의였다. 이에 대해서도 또 제기되는 설이.... 당시 장합과 사마의는 위의 대촉전선에서 은연중에 경쟁관계였었다. 쟁쟁한 커리어의 백전노장 장합, 그리고 위 군부 신진세력의 주축이던 사마의는 서로 견제하던 관계였으며 당시 직급상 사마의가 높았지만 그렇다해도 사마의에게 장합은 결코 직위로 쉽게 누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였고.... 그런 장합을 이이제이 방식으로 간접 제거 하고자 제갈량의 계책을 눈치채고도 등 떠밀었다는 설이다. 연의에서의 묘사처럼 빗발치는 화살에 벌집이 되어 바로 죽기보다 화살을 여기저기 맞고 후퇴하던 중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였다. 기록에는 허벅지에 맞은 화살로 인한 과다출혈이 결정적 사인이라 나와 있다. 참고로 허벅지는 대동맥을 비롯 여러 혈관 뭉치들이 지나는 곳이라 흉기에 잘못 찔리면 지혈도 힘들만큼 과다출혈이 발생하여, 옛날 야쿠자나 조폭들도 서로 칼부림 당시 오히려 방어하기 좋아 찌르기 여의치 않은 복부나 흉부보다 허벅지를 많이 노렸다고 한다. 동물을 좋아했는지, 직접 먹이를 주며 키우던 개가 있었다는 설이 있고 자신이 타던 말이 힘들까봐 행군하는 경우에는 중간중간 말에서 내려 걷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사료기록은 아니다.) 원소 휘하에서는 고람과만 거의 이야기를 나눴으나 조조에게 투항 후 각기 다른 부대에 배치되며 연이 끊어진 듯... 여러 장수들과 열전이 묶음으로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신상과 일상에 대한 기록이 그닥 없다. 쉽게 말해 위의 장수로서의 공적인 기록은 좀 있지만 인간 장합으로서의 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다.. 장합이 커리어나 능력에 비해 그닥 인기 많은 인물은 아니다보니 왠지 이번편은 반응이 별로일거 같은 좀 불길한 예감이... T-T 그래도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 드린다는 ;;;
[애니추천] 노라가미
대용량 움짤.gif 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이터 가출 주의!! 노라가미 제작사 본즈 줄거리 유명하지도 않고 모셔주는 신도가 없어 신당조차 없는 무명 신(神) 야토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50원을 받고 소원을 들어주는 일(거의 잔심부름과 요괴퇴치 등)을 한다. 설상가상 신의 무기 역할을 해주는 신기(神器)도 가난한 무명 신은 지긋지긋하다며 그만둬버리고, 의기소침해있던 야토에게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달라는 소원이 접수된다. 한참을 찾아다니던 야토는 도로 건너편에서 고양이를 발견하고 뛰어가는중 트럭에 치일위기에 처하는데 '이키 히요리' 라는 여학생이 몸을 던져 대신 치이고마는 사고가 발생한다. 다행히 히요리는 큰 상처없이 무사하지만, 틈만나면 잠에 빠지며 유체이탈을 하는 체질로 바뀌게 된다... 성우 이 애니는 성우분들이 꽤 탄탄해요 신(神) 야토 - 카미야 히로시 진격의 거인 > 리바이 하이큐 > 타케다 잇테츠 원피스 > 트라팔가 로우 오소마츠상 > 쵸로마츠 신기(神器) 유키네 - 카지 유우키 진격의 거인 > 에렌 예거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 토도로키 쇼토 니세코이 > 마이코 슈 하이큐 > 코즈메 켄마 감상평 일본 특유의 신 종류도 개성있게 잘 그려넣었고, 적당히 웃음포인트도 있어서 너무 진지하거나 무겁지만은 않아서 재밌게 봤어요. 일단 신들의 액션신이 너무 화려하고 멋있어요 ㅋㅋ 막 주문같은것도 외우고 싸울때 배경음이 엄청 독특한데 중독성 있어서 보다보면 흥돋아버려욬ㅋ 노라가미가 2기까지 있는데 혹시나 보실분들 헷갈리실까봐 적어둡니당 ㅋㅋ 노라가미 aragoto 가 2기에용 즐감하세욤~♡
제갈량 공명 (諸葛亮 孔明) AD.181~234
"삼국지"가 큰 영향력 갖는 동아시아 3개국인 한국, 중국,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 꼽으라면 중국은 관우, 일본은 조운, 한국은 바로 "제갈량"이다. (예로부터 문을 숭상한 전통기조 탓인지...) 이 칼럼의 첫 포문도 그래서 제갈량으로 준비했다.. 여러분이 읽었던 삼국지에는 잘 나오지 않은 소제들 위주로 갈테니 다들 Focus! 고향은 서주 낭야현.(지금의 장쑤성 쉬저우) 조조가 부친 잃은 빡침으로 서주 제노사이드 자행 시 부친 제갈규가 형주로 거처 옮길 때 함께 이주. 부친 사후 숙부 제갈현 슬하에서 자란다. 3남2녀 중 넷째였고 당시 기준으로 신장이 무려 189cm가량으로 전란과 기근 탓에 성인남성의 평균신장이 140cm중후반이던 3세기 중국 기준 가히 거인이나 진배없던 장신에 용모도 잘 생겼단 기록이 남아있고 마른 체형이였다고 한다. 당시의 선비들의 주류 학업스타일은 토시 하나까지 달달달 외우던 방식이였는데, 제갈량은 그런 암기 위주가 아닌 요약정리 방식으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후한 마지막 천자인 헌제와 동갑인데다 사망한 해도 같았다. 그 유명한 유비와의 "삼고초려"는 나관중의 각색이 들어가긴 했으나, 실제로 사료에도 유비가 세 번 찾아간 끝에 제갈량을 만났다고 남아있다. 연의에서처럼 제갈량이 유비를 피한건 아니였고 정말 서로 타이밍이 안맞았으며, 휴대폰도 없던 시절 이다보니 당시로서는 어찌보면 다짜고짜 찾아가서 마침 딱 만나는것도 쉽진 않았기에 그랬던듯 싶다. 그는 딱히 유비를 따를 마음은 없었으나, 임관하여 모실 마땅한 군주가 없던데다 당시 절친이던 서서의 권유도 있고 해서 유비를 모신다. 대기업 서류전형에서 컷트되던 유망주가 입사제의 하는 중소기업 들어간 꼴. 연의내용과 달리 모친이 인질 잡혀 서서가 조조에게 가기 전까지 한 동안 제갈량과 서서는 유비 휘하에 있었고 방통과도 인척 관계였는데, 제갈량의 누나 중 한 명이 방통의 숙부의 아내.. 즉 숙모였다. 유비에게 임관 후부터 관우, 장비 형제의 그에 대한 텃새는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였다. 장비는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재사를 공경하는 편이라 제갈량이 일정 수준 능력을 보인 후로는 그닥 태클이 없었으나, 유비 다음은 자신이라 자부하던 관우의 견제와 경계는 제갈량으로서도 관우 사망시까지 참 벅찬 일이였다. 상명하복이 투철한 전형적인 군인이라 제갈량의 지시도 잘 이행하여 케미가 잘 맞은 덕에 제갈량이 가장 의지하던 무관은 "조운"이였다. "마량"과도 코드가 맞았는지, 사석에서는 호형호제 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촉빠에 제갈량빠던 나관중에 의해 가장 주인공버프 크게 받은 인물 중 하나인 제갈량이였기에 소설 속 모습은 거의 닥터 스트레인지에 가깝게 묘사되나 그도 사람인지라 완벽의 면모만 있던건 아니고...ㅋ 분명 단점도 있었고 매사에 뛰어난건 아니였다. 우리에게 그는 탁월한 전략가의 이미지가 강한데, 실제로 전장에서의 전략과 전술, 병법에 능했던건 맞으나 당시 그 분야의 최강자는 사실 아니였다. 당대의 평가 등과 커리어들을 볼 때, 그는 전략가보다는 오히려 정치가로서의 실적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업적도 그쪽이 훨씬 많았다. 전체적 판세를 파악하는 전략적 면모는 오히려 주유, 조조가 앞섰고.. 전투에서의 전술적 재량은 방통, 법정에 뒤졌으며.. 후방보급에서는 순욱도 결코 제갈량 못지 않았고 심리전에 있어서는 가후나 정욱이 더 나았고 방어전술은 사마의가 우위였다는 평가가 지배적. 특히 중국에서의 책략,전략가로서의 자질을 따질 때 큰 척도로 삼는 것은 기책.. 쉽게 말해 창의적이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임기응변 더 쉽게 풀어 전술적 "에드립"여부였는데, 제갈량은 앞서 말한 책사들에 비해 이 부분이 특히 좀 빠지는 편이였다. (중국 역사상 이 분야의 갑은 바로 "한신") 역사기록에서나, 소설에서나 제갈량 전술의 주요패턴은 지형 및 기후 등의 사전정보 철저 숙지를 베이스로 한 정석 응용이였던 범생 스타일. 그의 임기응변 부족론에는 반론도 있었는데, 사실 유비를 처음 섬기는 순간부터 오장원에서 숨 거둘 때까지 그는 남만정벌같은 일부를 제하면 대부분 조조~위를 상대하며 늘 열악한 자원과 인력으로 압도적인 적을 맞이했고.... 그가 이끄는 것은 유비세력 & 촉의 거의 전부였기에, 성공하면 대박이지만 실패시의 리스크가 큰 기책을 선뜻 쓰기는 무리였다는 반론이 그것. 정치적인 치적은 소설에는 잘 안나오는데, 그는 촉의 경제발전 및 과학기술 개발과 심지어 사법제도 개편 및 군의 현대화 등 여러 분야의 내정에서 눈부신 업적들을 이뤄냈다. 당시 서천지방의 대표적 특산물은 "비단"이였는데 이 비단의 생산량과 퀄리티를 높이고자 다양한 개량을 시도했고, 이 비단사업의 대성공 덕에 촉한의 비단재벌들은 중원의 어지간한 부호들 싸닥션을 날릴 수준의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농지개간과 경작법도 많이 손봤고 천연가스 시추에 성공했으며, 내륙이라 소금이 금값이던 그때에 암염이라는 바위에서 소금을 추출하는 방법도 개발, 놀라운 건 당시로는 의심만 받아도 목이 날아가고 삼족 멸하는건 우습던 위나 오와 달리 전문 수사관 시스템을 도입하여 증거와 증인심문 등 통한 체계적 수사시스템을 구축했던 것도 제갈량이였다. "인간" 제갈량은 친절하고 예의바른 성격이였고, 상당히 도덕적이였으며 청렴했음은 물론, 매사에 꼼꼼을 넘어 깐깐한 완벽주의자로 자신이 직접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안심 못 하는 스타일로서... 지금으로치면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비서실장, 외교부장관, 행정부장관, 산업경제부장관, 감사원장, 국정원장, 경찰청장, 대법원장, 검찰총장을 합친 것보다 많고 다양한 업무들을 일일히 서류 뒤적이며 직접 처리했다. 이런 사람이 부하라면 더할 나위 없지만 직위가 황제 바로 아래인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승상이였기에 이런 사람이 상관이면 아랫것들 여럿 죽어나가는거 일도 아니였다... 제갈량 본인도 끝내 과로사했지만, 위, 촉, 오 통틀어 촉의 고위관료 과로사 비율이 가장 높은건 결코 우연이 아니였다. 참고로 그는 유비 사후 그냥 승상이 아닌, 황태자와 동급에 왕보다 높은 "상국"의 지위였으며, 그의 사후 승상직 자체가 영구 결석 처리되어... 촉한 역사상 유일한 승상이였다. 어벙띠리하기 그지 없던 유선도, 부친 유비의 유조도 있었고 제갈량의 영향력과 충심이 워낙에 굉장했던터라 제갈량을 부친처럼 대했고 꼬박꼬박 경어를 썼으며 제갈량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 및 토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입헌군주제 수준이였으며, 오너는 따로 있으나 전반적 경영은 제갈량이 일임하는 전문 경연인체제의 C.E.O.나 다름 없었다. 지금까지만 보면 퍼펙트같은 제갈량의 단점은 사람 보는 "안목"이 그닥이였다는거다... 촉에서 사람 잘 보는 분야의 최고수는 "유비"였는데, 이에 반해 제갈량은 그 뛰어난 여러 분야에도 불구.. 사람 보는 안목은 별로였다. 그가 발탁한 이들의 대표적인 케이스를 보자면.. 장완 - 결과적으로 훌륭했으나 대체로 직무태만인 스타일로서 제갈량이 뒤봐주지 않았다면 유비에게 밉보인 그로서는 진즉 Fired... 마속 - "읍참마속"이란 고사를 만들어 낸 대표적인 실패작으로서 전투경험 전무에 글로 전투 배우고 나대다 끝내.....-_-;; 이엄 - 제갈량이 평하길, "육손에 견줄만 하다!"라고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육손 근처도 못 감. 양의 - 업무능력에 대해 제갈량이 치켜세웠으나 인성 쓰레기에, 제갈량 사후 위연과의 불화로 위연의 사망을 초래. 위연 - 제갈량이 발탁하진 않았으나, 유비는 잘만 활용한 최고의 맹장이건만 제갈량은 내내 겐세이만 줬고 결국 위연과 양의의 불화의 단초를 제공하는 계기를 줌. 강유 - 능력과 인성은 좋았으나, 근자감에 휩싸여 끝없는 북벌시도로 촉한을 멸망으로 가는 특급열차에 태운 일등공신. 마량 & 비위 - 능력 자체는 대단들 했으나 단명. 오에서 마지막에 대장군 직위까지 오른 친형, "제갈근"과는 서로 모시는 주인이 달랐고 둘 다 각자의 소속집단의 중역이였기에 볼 일이 거의 없어 주로 편지를 주고 받았고 막상 만나도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마흔 후반대에 들어 유일무이한 자식(제갈첨)을 하나 얻었고 꽤나 예뻐했는지, 제갈근에게 어린 첨의 자랑으로 가득 채운 편지를 보낸 기록이 있다. 위, 촉, 오는 모두 이민족(그들 기준 오랑캐) 문제가 난제였는데 무력으로 굴복 시키거나 축출 일변도였던 위나 오에 비해 제갈량의 남만정벌은 비록 무력으로 제압은 했으나 이후 먼저 교섭 시도 후, 이민족들로 하여금 지금으로보면 "자치구"개념의 자율통치권을 인정하여 삼국 중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대이민족 대응법을 보여줬다. 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맵고 짠 음식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편식이 좀 있었던거 같다. 그리고 식사도 정해진 때에, 정해진 장소에서 먹기 보다 대강대강 챙겨서 이런저런 일들을 보며 아무곳에서나 먹었다고 한다.(가정교육이...ㅋ) 이건 정확한 건 아니지만, 무릎이나 고관절 쪽이 좋지 않아서 장년 이후 휠체어 비슷한 작은 의자형 수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있다. 적벽대전 앞두고 오에 가서 그곳의 재사들의 다구리를 말발로 역관광 시킨 이야기는 허구다. 짚단을 실은 배를 타고 노숙과 함께 조조군 진영으로 가서 화살 10만 개를 슈킹해온 일화도 허구다. 과로사는 분명해 보이지만, 정확한 사인으로는 "폐결핵"설과 "위암"설이 팽팽하다. 워낙 불규칙한 식습관과 수면부족 및 극도의 스트레스, 과로 등 암 발병에는 최적이긴 했다. 첫 칼럼인데, 두서도 없거니와 일단 너무 양 많고 내가 봐도 지루하다.... 그래도 뭐 읽을 사람들은 읽겠지 T-T 피드백 괜찮으면 앞으로도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대중적이지 않은 스토리 위주로 갈 예정. 삼국지 관련 궁금증에 대한 질문이나 다뤄줬으면 하는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신청도 받음.
[애니추천] 갑철성의 카바네리
갑철성의 카바네리 제작사 Wit studio 진격의 거인과 같은 제작사, 같은 감독이 맡은 애니입니다. 진격거 재밌게 보신분들에게 추천드려요! (주인공친구 성우가 진격거에렌 성우인건 안비밀) 줄거리 막부 시대 사람들은 카바네라 불리는 좀비(?)의 공격을 받아 증기기관차로 피난하여 기차역을 요새삼아 생존한다. 다른 좀비물과는 달리 카바네는 심장을 감싸는 심장피막이 매우 견고하고 단단해져 평범한 검이나 총기류로는 쓰러트릴수 없는 존재인데, 카바네로 인해 여동생을 잃은 주인공 '이코마'는 점점 퇴보하는 인간들의 처지를 비관하여 카바네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을 무기를 발명하게 된다. 이코마는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에렌과 비슷한 캐릭터인데, 인간도 카바네도 아닌 카바네리 가 되어 인간의 편에서 카바네와 맞서 싸워준다. 감상평 개인적으로 6화까지는 상당히 몰입해서 봤는데 7화부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서 조금 다른 전개로 흐르더라구요. 약간 진격거 3기 느낌? 7화부터는 확실하게 호불호가 많이 갈리던데 저는 나름 볼만 했습니다. 엔딩을 위해 필요한 이벤트정도 느낌으로 봤음ㅋㅋㅋ 그리고 아마도 보다보면 진격거느낌이 많이 날거에요. 액션신 배경음악이라던지 캐릭터들의 목표같은거? 그런게 좀 많이 겹침 암튼 주저리가 너무 길었나보네여 즐감하세욤~♡
[일뽕영화]고양이 여행 리포트 (약스포)
안냐세여 또왔네요 댓글강박증환자입니다 일본영화덕후이기도하구여 일본은 참 신기한나라입니다. 역사 정치적으로 좋아해선 좋아할수없? 나라인데 문화적인 부분은 제게있어서 흥미로운 부분이많군요. 이런 참신한 영화를 뚝딱 만들어서 보던지 말던지 한국에 던지고 가는걸 보면요 허허거참 줄여서 허참 오늘으 일뽕영화는 '고양이 여행 리포트' 애묘인 분덜 모여주세여 여기 님들위한영화 있다요 ヽ|❛ρ❛。|ノ 저는 강아지키우지만 고양이인형 안고잡니ㄷ(퍽 "내 사생팬.널 집사로 임명할께" 시니컬 그 자체 고양이 나나. 나나의 나레이션이 너무 재밌었네요 ㅎㅎㅎㅎ 영화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 나나에게 새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자신의 지인들을 만나러 떠나는 로드무비(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인가.차타고 떠나면 로드무비지 머야) 자신의 고양이를 소개해주면서 하나 둘 떠오르는 고양이와 얽힌 지인들과의 우정,추억 그리고 가족에 대한 기억 머 큰건없습니다 고양이가 엄청 귀엽다. 그 이유로 충분합니다. 극중 동물들의 나레이션을 성우가 연기도하는데요 멘트하나하나가 매력터지는 시크대사가 넘처나요ㅋㅋㅋ 아 또 생각하니 웃기고귀엽고ㅋㅋㅋ 나나는 배우 타카하타 미츠키가 목소리를 맡으셨는데요 식물도감의 그녀 아니신가?! 나만 알아보나? 고양이목소리로 딱이었네요 귀엽다기보단 도도한 목소리 ㅎ (어떻게 귀여운 외모에서 도도한 목소리가 나온단말인가?) 남주는 '나는 내일,어제의 그녀와 만난다'의 후쿠시 소우타 첨엔 잘생겼는지 몰랐는데 자꾸보니 나랑닮음 웃을때 예쁘게 웃는 배우네요 역시 나만알아보나? 어우 덕력ㅡㅡ; (저런 덥수룩한 헤어스타일 어울리기 쉽지않은데) 저는 번역가도 궁금해졌는데요 진짜 번역 재밌게 잘하신듯해여.각 캐릭터 성격에 맞게 한국적 맛깔을 잘살리신거같음 '너의이름은..' 번역하신 강민하 번역가님♡ "여기서 헤어지면 모든게 끝이야" 영화는 이별에 대해 얘기하는거 같아요 시작부터 고양이 매력에 입벌리고 헤헤 하면서 보다가 동물키우는 빙글러로서 ' 그 때'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영원한건없자나여ㅜㅜ 아름다운 이별이 있을까요? 적어도 영화에선 아름답게보이네요 그래서 영화를 봅니더 껄껄 "내 마지막 집사가 너라서 참좋았어" 어떠세요 고양이나오고 잘생긴 남주나오고 쬐께 감동도있는 그런 영화 땡기져? ㄱ? 역시나 상영관은 별로없으니 각오ㅇㅇ (((ꎤ๑‾᷅༬‾᷄๑)̂—̳͟͞͞o ;◔д◔ 이별 할 준비 되셨나요? ㅎ . . . . . 술마시고 작성햇더니 계속 수정하게되네요ㅋㅋㅋㅋㄱ ㅅㄱㅇ~~~
삼국지 좋아하십니까?
여자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남자분들은 책과 영화, 특히 게임 등으로 다들 "삼국지"를 접해 보았을터. 주로 게임을 통해 많이들 삼국지를 알게 되었을거라 예상되지만, 게임 하다보면 이게 또 스토리를 알고 해야 더 재미가 붙으니 책도 읽게 된다ㅎ 헌데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삼국지는 "소설"이다. 즉, 작가적 상상력... 다시 말해, "픽션"(허구)이 섞인 문학작품이란거다. 의외로 이걸 인지 못하는 분들 제법 있어서, 삼국지속 내용이 모두 참인줄 알고 감탄한다ㅋ 삼국지는 중국에서 "칠실삼허"(七實三虛)라 한다. 7의 실제와 3의 허구, 쉽게 말해 3할은 뻥이란 소리. 우리가 서점 가서 본, 이리저리 전해들은 삼국지관련 내용들은 "삼국지연의"라는 소설로서, "나관중"이란 중국 원나라 말, 명나라 초의 소설가가 실제 역사와 구전되어 내려오는 민담 등에 자신의 창의력으로 반죽해 쓴 작품이다. 소설은 많은 이가 재미있게 읽어야 함이 기본이기에 당연히 감동과 웃음과 휴머니즘에 교훈도 있으니 참 재미진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아는 여러 삼국지 관련 유명 일화들 중, 안타깝게도 나관중이 지은 뻥이 대부분... (이는 차차 설명하기로~) 실제의 역사적 사실만을 무미건조하게 엮어놓은 사료도 있고 이는 "삼국지정사"라고 따로 있다. (니가 생각하는 그 정사 아님.. 正史 바른 역사) 지은이는 "진수"라는 중국의 촉한 말기의 역사가. 나도 읽어봤는데, 지루하다..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성경 읽어보는 그 느낌이다. 그리고 열전이라 해서 각 인물의 이야기만 다룬 것들도 있는데, 이건 모든 인물들이 다 있지도 않고, 또 이 열전은 진짜 구해 읽기 쉽지 않다ㅋ 여담으로 삼국지 관련, 가장 많은 정보와 자료는 당연히 본진인 중국국가기록원이 갖고 있지만, 민간 중 그에 버금가는 방대한 자료는 바로 일본의 게임회사인 "코에이"(KOEI)에서 갖고 있다ㅋㅋ (전략 시뮬레이션 삼국지 시리즈의 바로 그 코에이) 워낙 많은 자료와 기록 토대로 심지어 각 인물들의 외형의 이미지메이킹도 상당히 잘 해놓은 덕에 숱한 미디어 속 삼국지 인물묘사는 코에이의 묘사를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는ㅎㅎ 아무튼 우리가 아는 삼국지가 삼국지의 전부가 아니며, 그냥 부풀려진 구전민담..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이 더해진 것들이 많은데 앞으로 여기에서는 누구나 아는 그런거 말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비화, 실제의 기록 등... 삼국지의 껍질을 벗겨보는 칼럼들을 다뤄본다. 삼국지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기대해도 좋을 듯! 부디 많이들 와서 적극적인 피드백들 해주시길!
5
Comment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