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zo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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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보는 근현대사 4컷 요약

독립운동가 말고 친일파가
혁명 세력 말고 쿠데타 세력이
민주주의 외친 사람이 아닌 전두환 세력이
직선제 쟁취 세력이 아닌 반대 세력이
이번에는 다를거라는 것을 국민들이 직접 보여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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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최순실은 정권에서 내려올진 몰라도 국정농단 사실을 알고있으면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묵인하고 있었던 국회의원 300명은 바뀌지 않습니다. 꼭 사건이 터져야 국민들이 모여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정부가 바뀔수 있는지 고민됩니다.
팩트..
고위간부 아구리에서 나오는 말하는 꼬라지가 몰라요 몰라요.. 근현대사만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박근혜 최순실 이 사건 계기로 젊은 친구들 정치 참여율이 높아지고 착한,좋은 인재 산출해서 친일 정리할 때가 온것 같습니다. 지나가는 초등학생이 나라 걱정하는 때가 올줄이야ㅋㅋㅋㅋㅋㅋㅋㅋ....
정부를 바꾸지말고 없애고 새로하나 만드는것도 방법
20~30대 투표참여 의사가 굉장히 높아졌으니 부정개표만 아니면 이번에는 바꿀 수 있다고 봅니다
듣고 보니 진짜 저게 다네요...
투표를잘해주셔야합니다...
까고말해서 박근혜최순실도 문제지만 윗대가리 국회의원전체가 문제다 쟤네들 다 털어보면 박근혜 최순실급 이상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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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고요한 휴식, 호캉스하기 좋은 국내 호텔
Editor Comment 겨우내 긴장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기엔, 멀리 떠나기보단 가까운 도심 속 호텔에서 느긋하게 즐기는 '호캉스'만 한 것이 없다. 문턱 높던 호텔 가격도 낮아지고 부대시설도 풍부해지면서 호텔에서 휴일을 보내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 봄과 겨울,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호캉스'하기 좋은 국내 호텔을 모아봤다. 잘 쉬고, 잘 먹는 것만으로도 일상에 지친 당신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해줄 테니, 아래 리스트를 통해 이번 주말 쉼과 여유를 만끽해보자. 수애당 오래된 전통한옥 '수애당(Suaedang)'은 진짜 ‘쉼’을 느낄 수 있는 숙소다. 화장실, 세면장이 외부에 있어 다소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으나, 이내 적응하고 고택에서의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곳. 준비해온 책을 읽으며 온돌방에서 자는 낮잠은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여유로움을 선사하며, 곳곳에 숨겨진 포토 스팟을 찾아 사진을 찍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더불어 웰 메이드 조식은 이곳만의 특별한 이벤트. 주변 자연과 오래된 한옥만의 고즈넉한 감성은 무언가 하지 않아도 여행 분위기를 내기 충분하다. 수애당 경북 안동시 임동면 수곡용계로 1714-11 스몰 하우스 빅 도어 ‘스몰 하우스 빅 도어(SMALL HOUSE BIG DOOR)'는 디자인 스튜디오 '디자인메소즈(Design Methods)'가 54년 된 물류창고를 매만져 완성시킨 호텔이다. 예술과 디자인, 스테이가 공존하는 작지만 크리에이티브한 복합공간을 만들고자 꿈꿨던 '디자인메소즈'의 작품. 공유와 소통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1층 비스트로와 갤러리에서는 다양한 이벤트가, 옥상 라운지에서는 주말마다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하는 파티가 개최된다. 작은 공간이지만, 새로운 문화의 발신지로서의 목표를 이어가고 있는 호텔이다. 스몰하우스 빅도어 서울 중구 남대문로9길 6 대한빌딩 락고재 회색빛 도심 속에서 고즈넉한 여유의 호캉스를 즐기고 싶다면, 북촌에 위치한 전통 한옥에서의 하룻밤은 어떨까. '락고재(Rakkojae)'는 130년 된 한옥을 인간문화재 정영진이 개조한 전통문화 공간이다. 과거 양반들의 향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서울 한가운데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이지만, '락고재'는 숙박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 콘텐츠까지 제공해 눈길을 끈다. 전통 한정식부터 다도, 궁중 한복 체험, 찜질방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곳. 가까운 곳에서 새로움을 느끼고 싶다면, 옛 풍류가 살아 숨 쉬는 '락고재'를 향해보자. 락고재 서울 종로구 가회동 218 눅서울 각진 고층 빌딩들이 빼곡히 수놓아진 서울 도심 속 예스러운 향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곳이 있다. 바로 용산에 위치한 호텔 '눅서울(nookseoul)'. 아파트같이 정렬된 객실이 기존 호텔과 달리 단독주택 구조를 띄고 있어 마치 오래된 가정집에 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옛 생활 도구인 배틀과 다듬이로 현관을 꾸미고, 목조 건물처럼 실내를 조성해 포근함을 더하기도. 지겨운 일상에 지쳤다면 '눅서울'에서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눅서울 서울 용산구 소월로2나길 6-2 보눔 1957 북촌에 위치한 한옥 호텔 '보눔 1957(Bonum 1957)'은 전통 한옥과 모던 양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통의 현대화’라는 설립 정신이 곳곳에 녹아있는 이곳은 정원을 사이에 두고 한옥과 양옥이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내부는 전통방식의 온돌구조로 건축됐다. 1950년대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으면서, 동서양 그리고 나아가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엿볼 수 있는 곳. 보눔 1957 서울 종로구 북촌로 53 아난티 남해 '아난티(THE ANANTI)' 호텔의 세 번째 지점 '아난티 남해'. 이곳은 다른 호텔과 달리 드넓은 잔디정원과 서점 및 40여 개의 브랜드로 채워진 라이프스타일 존이 있어, 여행객들이 직접 책을 읽거나 다양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는 강점을 갖췄다. 또한 어메니티에서도 느껴볼 수 있는 '아난티 남해'만의 차별점. 친환경적인 트렌드가 대세인 요즘, 이를 반영한 플라스틱 용기가 필요 없는 고체 친환경 어메니티 ‘캐비네 드 쁘아쏭’이 그것이다. 용기 역시 분해 가능한 종이로 만들어져, 자연과 사람이 건강하게 공존하는 호텔만의 철학을 담아냈다. 아난티 남해 경남 남해군 남면 남서대로1179번길 40-109 플레이스 캠프 제주 빡빡한 여행 스케줄보다 한 장소에서 한적한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제주도에 위치한 '플레이스 캠프(playce CAMP JEJU)'만 한곳이 없다. 숙박부터 식사, 놀거리까지 다채로운 경험이 가능한 복합문화공간 '플레이스 캠프 제주'. 성산일출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1인실 객실은 물론, 제주 감귤 따기 체험부터 요가 클래스까지 다양한 원데이 클래스가 마련돼 있어 '혼놀족'에겐 안성맞춤이다. 또한 호텔 내에는 디자인 편집숍 ‘조슈아 페이보릿(Joshua Favorite)’이 입점되어 있어 빈티지 의류와 프라이탁 등 다채로운 아이템을 쇼핑할 수 있는 장점마저 겸비했다. 플래이스 캠프 제주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동류암로 20 포도호텔 하늘에서 바라본 모습이 마치 한 송이의 포도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포도호텔(podohotel)’.건축가 이타미 준(Itami Jun)이 건설한 호텔은 제주의 광활한 자연 속에 잘 어우러진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는 듯하다.객실 테라스 너머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편백나무 욕조 안에서 온천욕을 즐기다 보면, 지금 있는 곳이 곧 지상 낙원이지 않을까. 제주 포도호텔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산록남로 863 by eyesmag supporters 안홍준 / 장유한 / 김문주 / 김보미 박제현 / 진정훈 / 백은세 / 김건호
[진보당 논평] ‘폭죽 난동’ 미군 전원 공개하고 처벌하라
지난 3~6일 해운대 해수욕장 일대에서 벌어진 주한미군의 난동으로 우리 국민 다수의 생명이 위협받는 일이 발생했다. 수많은 미군들은 해운대 해수욕장 일대에 떼로 몰려다니며 폭죽을 쏴댔다. 미군이 건물이나 지나가는 시민을 가리지 않고 폭죽을 쏴대자, 미군의 광기에 공포를 느낀 시민들의 경찰 신고가 이어졌다고 한다. 해운대 해수욕장 일대에서 난동을 부린 미군은 대부분 오산과 군산, 대구 등지에서 주둔하는 미군이라고 한다. 미군은 자국의 독립기념일을 기념한다는 이유로 무질서하게 음주가무를 즐긴 채 폭죽을 터뜨리며 국민들을 위협했다. 미군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는 등 안전 수칙도 전혀 지키지 않았다. 시청과 구청 직원들이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 두기를 안내했지만 많은 미군들은 이를 무시했다고 한다. 평소 한국의 주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미군의 안하무인에 분노한다. 미군 사령부는 국민의 분노가 높아지자 폭죽 난동에 미군 장병이 연루됐는지 확인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가한 처사다. 미군은 폭죽 난동에 당장 사과하고 연루 미군들을 전원 공개, 처벌해야 한다. 외교부, 국방부 등 미군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관계 당국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점은 씁쓸하다. 미군은 우리 경찰의 제지에도 이를 우롱하며 시민을 직접 겨냥해 폭죽을 쏘는 등 온갖 추태와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우리 경찰은 단 한 명의 미군을 붙잡아 조사한 뒤 5만원의 과태료만 처분했다. 언제나 적극적인 처벌 의지가 미군 앞에서 멈춘다는 점은 서글픈 일이다. 미군의 안하무인은 비루한 사대주의에서 나온다는 것을 관계 당국은 잊어선 안 된다.
프랑스는 어째서 알제리를…?
월요일은 역시 역사지. 사실 어제, 7월 5일은 알제리의 독립기념일이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19세기 초중반, 굳이 왜 알제리를 식민지로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프랑스의 19세기 초중반이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왕정이던 시절이며 본격적인 강대국으로의 재진입은 아마도 크림 전쟁 이후였었다. 알제리는 왜? 당연한 얘기겠지만 불어권 게시판(가령 Quora?)에서 이 주제가 올라오면 단번에 화약고로 변한다. 우리랑 똑같이 식민지 근대화론자와 수탈론자의 논쟁은 물론이거니와 불어권 특유의, 그러니까 구 프랑스 식민지들이 네이티브로 불어를 쓰기 때문에, 서로들 프랑스 옛날 자료를 근거로 불어로 키배를 벌이는 광경은 상당히 흥미롭기 짝이 없다. 우리는 일본과 우선 언어 때문에 키배하기가 쉽지 않다. 자, 일단 북아프리카의 노예 시장부터 알아봅시다.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 이후 북아프리카로 물러난 무어인들은 형식적으로 오토만투르크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워낙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거의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느낌으로는 조선의 사대관계보다 아주 약간 더 종속적인 정도? 지도자를 “국왕(ملك)”이라 부르지 않고 “총독(داي)”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총독을 주민투표로 뽑았다는 점이 더 신기한데, 이들의 주된 먹거리는 농업 외에 노예 무역이었다. 그리고 그 노예화 대상은 주로 남유럽에 살고 있는 크리스트교 신자들이었다. --------- 여기까지 보면, 노예 무역 막다보니 어느새 식민지를? 하는 잘못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노예 무역을 언급한 이유는 당시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 북아프리카가 해적 소굴로 비쳐졌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프랑스가 식민화에 나서는 19세기 초중반은 영국이 대양을 재패한 시기이기 때문에 해적 노릇하기가 영 쉽지 않았었다. 영국만이 아니라 더 이상의 전쟁을 중단한 프랑스와 미국 해군도 해적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 시기에는 해적질/노예 사냥으로 밥벌이를 못 했다는 얘기다. 이는 자연스럽게 북아프리카 내의 내분으로 이어졌고, 이 틈을 타서 프랑스가 진출/침략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리고 이때 부채가 등장한다. 부채? 빚의 의미도 있고 선풍기의 의미도 있는데 둘 다 맞다. 프랑스 대혁명이 나면서 프랑스는 유럽에서 고립됐고, 부족한 밀을 알제리 지역으로부터 수입했는데 대금을 내 줄 형편이 못 됐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전 유럽 국가들과 전쟁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절반만 상환하고 전쟁이 끝나면 다 갚겠다며 사절을 보냈는데… 그 말에 화가 난 알제리 지역의 총독이 프랑스 사절을 부채로 때렸다. 짤방의 이 사건(Le coup d'éventail, 1827, 출처는 위키피디어)이 프랑스 국내에 일으킨 반향이 매우 컸다. 모욕적이라 느낀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알제리 침략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 여기까지 보면, 사소한(?) 사건 하나로 인해, 부채를 탕감하려고 나라를 접수한(…) 이야기가 된다. 물론 시발점이 맞기야 하지만 고작 부채 때문에 알제리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크게 세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영국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이미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결과로 지브롤터를 점령(1714)한 영국에 대해 프랑스도 아프리카 해안 어디엔가 거점을 마련해야 했다. 이미 나폴레옹이 계획을 세웠으며 측량도 다 해놓았지만 유럽 내 전쟁이 더 급했었다. 한편으로는 무하마드 알리 치하의 이집트를 동원하여 알제리 지역을 점령하는 구상도 있었다고 한다. 재주는 이집트가, 돈은 프랑스 걷어가자는 계획이었으나 종주국인 오토만투르크가 이 계획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그래도 혼자 설치려는 이집트가 더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오토만투르크의 친구(…) 프랑스로서도 오토만투르크의 지원이 없다면 실행이 불가능한 구상이었다. 두 번째. 프랑스 국내 사정이다. 워털루 전투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뒤를 이은 왕정으로서는 국내 지지율 상승을 위해 “뭔가 확실한 건수”가 필요했다. 게다가 가난한 국내 농부들(특히 코르시카 지역)의 진출을 도울 수 있었다. 세 번째. 프랑스 국외 사정이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글로벌 파워”로서 다시금 내세울 만한 “건수”가 필요했다. 게다가 위치상 서아프리카 식민지역들과 연결도 가능했다. --------- 그런데 말입니다. 역사만 얼핏 보면 1830년에 알제리 전역을 프랑스가 식민화 시킨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19세기 말까지도 알제리 전역을 프랑스가 점령하지는 못 했었다. 매우 긴 시간동안 군사 작전을 실행해야 했다는 의미다. 저항이 거센 것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진행시키지 않은 탓이 컸다. 위의 부채 사건으로 프랑스가 군대를 보낸 것은 맞지만 처음에는 알제 항구만 폭격했었고, 더 이상 들어가려 하지 않았었다. 처음부터의 계획은 아니었던 셈이다. 하다보니까 끝까지 들어가고, 해안가 반란도 막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게 부드럽게 진행되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학살과 방화는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키배가 일어나는 겁니다. 알제리라는 독립된 나라가 그당시에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인들 입장에서 알제리 지역은 “발견됐다”거나, 알제리라는 나라를 프랑스가 130년 동안 세웠다고 볼 여지가 있지만, 알제리인들 입장에서는 프랑스인들 기록을 보더라도 너무나 가혹하게 점령하고 지배한 증거가 많은 것이다. 결론은 영원한 키배… 1960년대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