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agnzig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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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말

이런 저런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싫어서 조용히 있는 쪽을 택했다
어느 순간 해야할 말도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적절함을 찾는 것이 참 어렵다.

#2015년 8월30일에 썼던 일기.
아주 가까운 사람이 본인 생각과 이야기만 하고 상대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아 상당히 지쳐 있던 상태였다.
여전히 떠벌떠벌 말이 많은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내 생각과 마음은 되도록 표현해보려고 노력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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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남의 눈치를 보는 경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존감이 낮거나,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경우 등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 중에서도 핵심 요소로는 판단력이 부족해서일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가 특정 상황에 대한 판단을 잘 못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죠. 예를 들면 아이가 낮선 환경에서 처음 보는 타인에 의해 일을 도와줄 것을 요청을 받게 되면 그 아이는 그 일을 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치를 보며 주변을 살피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성인에게 허락을 구하는 과정이 아이에게 필요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상황이 성인 되어서도 진행 된다면 그것은 판단력의 부족 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즉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는 상태를 말할 수 있는데요. 이는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과도한 보호 행동과 같은 잘못된 환경에서 발현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신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현상의 기저에는 개인의 내면에 있는 책임 회피의 마음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스스로의 판단의 결과로 인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내포 되어 있기 때문이죠. 이 과정에서 스스로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성장을 할 수 있지만 남의 눈치를 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책임이라는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자신 스스로 판단기준을 명료화 하거나 확정하는 것을 몸시 두려워하는 데요. 따라서 이런 판단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판단을 하던 그 선택의 결과가 항상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판단의 기준을 세우는데 방해물로 작용하게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는 남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되는 성격으로 고정되기 쉬운데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 가능한 간단한 팁을 있습니다. 편의점이나 슈퍼에 가서 원하는 물건을 하나 삽니다. 그리고 그것을 점원에게 가지고 가서 그 물건을 사지 않는 것입니다. 즉 점원에게 미안 하다는 말을 하며 자신이 집었던 물건을 거부 한다는 말이요. 그리고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스스로 느끼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말입니다. 그리고 눈치를 볼 필요 없는 상황에서 합리적으로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의 결정 여부를 사람들 속에서 경험적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유지할지 아니면 버릴지를 결정하고 살아가면 됩니다.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려 하거나, 자신감을 기르려고 하는 행동은 하지 마세요. 사실 남의 눈치를 보는 행동은 그런 것들과는 무관합니다. 남을 계속 의식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해서 판단을 못 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팁을 통해 자신 스스로 판단을 하다 보면 남의 의견도 눈치를 보기 보다는 여유롭게 판단의 참고 정보로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zcV7O-bU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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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테토칩 에그토스트 맛을 우연히 먹게 되었는데 조금 놀랐다. 어쩌면 고작 감자칩일 뿐인데, 정말로 에그토스트의 맛을 이토록 완벽하게 구현하다니. 전에는 김치사발면 맛인가? 그런 걸 먹어보고도 놀랐던 것 같은데, 에그토스트 맛은 한술 더 뜬다. 아니 어떻게 이런담. 특정 과일 맛이나 초코 맛, 커피 맛도 아니고, 김치사발면과 에그토스트라니. 김치사발면과 에그토스트는 어떤 복합적인 맛 아닌가. 식감을 구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이건 먹자마자 아, 정말 그렇네,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사실 전에는 이런 특이한 맛으로 구성된 과자들을 편의점 진열대에서 보면, 이건 뭐 괴식 아닌가 싶었는데 생각을 고쳐먹게 됐다. 이 정도면 거의 미각 예술이다. 에그토스트. 그러니까 달걀과 버터에 구운 식빵과 여기서 보태자면 몇 가지 소스들이 구성하는 복합체를 감자칩 하나로 거의 완벽에 가깝게 구현하다니. 이건 단순히 맛있다는 감각을 떠나서 어떤 예술 체험 같다. 맛 하나로 내가 지금 감자칩이 아니라 노량진 어느 거리의 노점 앞에서 에그토스트를 들고 있는 것 같달까. 아니면 유년 시절 엄마가 해주던 토스트를 먹고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하게 될 수도 있겠다. 각종 예술 장르들은 인간의 오감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든다. 청각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이 우리를 어떤 특정 시간대로 데려다주기도 하지 않던가. 또 후각을 기반으로 하는 향수는 우리가 특별히 예술 장르라고는 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시향이 예술 체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 향수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 특정 향을 구현하려고 하기도 하지 않는가. 언젠가는 거리를 걷다가, 어떤 남자와 지나쳤는데 그의 향수 냄새가 너무 황홀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냥 평범한 성인 남자였는데, 그 향이 그를 굉장히 지적이고 섹시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향수란 것은 대단한 힘이 있구나 싶었다. 또 언젠가는 지하철 옆자리에 어떤 중년의 아주머니께서 앉으셨는데 그녀의 향이 너무나 좋아서 잠깐 설레기까지 한 적이 있다. 뭐 어떤 아방가르드한 예술가가 언젠가 어디에서 시도해봤다고 해도 놀라울 일은 아닐 것 같은데, 특정 향을 전시하는 것도 충분히 전시회가 될 것 같다. 그러니까 냄새를 전시하는 거다. 특정 향을 구현한 각종 냄새로. 물론 작품의 온전한 시향을 위해 일종의 분리벽은 있어야겠지만. 아니 그보다 인간의 후각이 나약해서 몇 작품을 체험하기도 전에 분별력이 없어지려나. 시각과 청각은 아주 대중적인 예술의 기반이 되었지만 후각과 촉각, 그리고 미각은 좀 별개로 치부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일개 과자, 아니 일개 과자라고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단순히 간식거리로 치부돼온 것이 사실인 과자가 어떤 독특한 미각 체험을 시켜주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미각 예술하면 사실 고급 요리 정도를 예로 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포테토칩의 맛 실험이 오히려 예술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게 꽤 어려운 것이 이 맛을 구현해낸 기술자들은 에그토스트의 보편적인 맛을 설정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새로움이 아니라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보편성을 전제할 만큼 예리하다는 거다. 아무도 수긍하지 못하는 새로움은 적어도 당대에는 완벽한 무용지물이다. 살다보니 과자 맛에 열등감을 다 느껴본다. 분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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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인 나로서는 코로나가 가져다준 여러 불편들이 사실 감수할 만하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즐겨 찾던 장소들이 정말 많이 폐업하여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건 아쉬운 걸 넘어 좀 서글픈 수준이다. 며칠 전부터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을 보기 시작했다. 다시 보는 게 아니라 처음 보는 거다. 이 드라마는 2007년 7월에 첫 방송됐다. 당시에 어쩌다 못 보게 됐는데, 어서 시간을 내서 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다가 거의 15년이 돼버렸다. 그런데 보다 보니 다소 억지스러워 보이는 관계 설정들이 눈에 띈다. 뭐 시간이 지났으니 그럴 수 있다. 억지 설정이 있다고 해도 그 시절 생각이 나서 좋기는 한데, 이 억지 설정이라는 것이 생각해보니 옛날 드라마라서 작법이 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시대 감수성이 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싶은 거다. 저렇게 좋은 사람들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이런 생각. 뭐랄까. 이제는 어지간해서는 가능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순수한 호의 같은 것이 억지스러워 보인다는 거다. 시대가 달라진 것인가, 시대를 바라보는 내가 달라진 것인가. 드라마에 푹 빠져있다 나오면 당최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지, 어떤 시대적 감수성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감이 오질 않는다. 이쯤에서 뻔한 생각이 다시 도출된다. 당시에 그걸 봤다 해도 그때는 지금과 같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 어차피 다 지나온 것이니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다는 것. 정말 그런 걸까. 지금 느끼지 못하는 이 시대의 감수성은 또다시 15년 정도가 흐른 뒤에 새삼 아름다워 보일까. 나는 또 그런 것이 서글퍼지는 것이다. 지나고 나서야만, 되돌릴 수 없을 때가 돼서야만 나는 그것을 애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이론적으로는 이와 같은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어왔으므로 현재를 사랑하면 될 것을, 깨달은 대로 행하면 될 것을, 왜 도무지 그렇게 하지를 못 하는 것인가.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있는데도 왜 거듭 하지 못하는가. 왜 매번 깨닫고도 나는 언제나 우매한가. 깨닫고도 하지 못하는 것은 무지보다도 더한 어리석음 아닌가. 언젠가 꿈에 동자승이 나와 내게 아리송한 말을 남겼다. 나는 내내 어리둥절했었는데, 그 말인즉슨 이렇다. 깨달음을 깨달아야 한다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