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의 꽃, 수문군)
경복궁 앞을 지나다 보면 가끔 출입문을 지키고 있는 조선시대 병사들이 보인다. 바로 수문군이다. 멋져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저것도 일일 텐데 고생이구나’ 싶다. 얼마를 받고 어떻게 일하는 걸까? 워낙 베일에 싸인 일이다 보니 이런저런 괴소문도 많다.
“저거 돈 안 받고 일하는거래. 봉사활동이라던데?”
“저거 일하는 사람들 다 극단 소속이래!”
“아냐, 저거 공익근무요원이라는 얘기도 있어”
이런 아무말 대잔치가 벌어지고 있어 참다 못한 에디터가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이왕 알아보는 김에 이 분들이 어떻게 근무를 하는지도 직접 체험해 보려고. 자, 이제 나와 함께 조선시대로 떠나 보자. 내 꿈을 위한 여행! 수-문군!
09:00 조선시대로 워프하다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 없다)
경복궁 매표소 좌측 협생문 밖에 직원 전용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는 전통 복식을 한 젊은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EDM을 들으며 바삐 움직이는 수문군들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정겹다.
입소(?)를 하고 나면 한복으로 갈아 입는다. 프리사이즈며, 2017년 S/S 스타일로 통이 넓은 바지다. 다만 버선을 신을 땐 밑단을 잡아주는 천을 덧대어 조거 스타일로 연출한다. 천 년의 유행을 앞서간 선조들의 선견지명을 봤다면 칼 라거펠트도 진작에 재봉틀을 내려놓았을 거다.

(통바지와 조거팬츠를 오가는 선인의 스타일)
겨울이지만 촘촘한 비단 소재가 바람을 칼같이 막아 주는데 유니클로 방풍바지 급이다. 심옥순 여사가 왜 항상 한복을 고집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음, 그런데 여름에도 똑같은 복장으로 근무한다면서요?
시작부터 돌발 상황
한국문화재재단 담당 직원분을 만나 오늘 근무 내용을 전달받았다. 오후에 있을 수문장 교대식 행사에 직접 참여하는 것. 그 전까지는 기초 제식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어라? 에디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하… 그럼 그 교대식이 끝나면 문지기 근무를 할 수 있나요?”
“아, 파수군을 말씀하시는거군요? 그건 수문군과 하는 일이 다릅니다.”
“어라, 저는 그걸 하러 온 건데,,,?”
“음… 죄송하지만 파수군은 신장 180cm 이상만 지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수문군인데도 깔창을 주시다뇨)
아… 입은 옷을 벗을 수도 없고, 이번주 아이템을 무를 수도 없다. 울며 불닭볶음면 먹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사실 178cm만 해도 뽑히는 경우가 있는데요…”라는 직원분의 다음 한 마디가 내 성장판을 아프게 쿡쿡 찔렀다.
수문군은 기본 10개월 계약직 근무이며, 최대 1년 10개월까지 연장 가능하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2시 교대식을 마지막으로 일과가 끝난다. 일당 6만원에 주 5일 탄력근무. 주휴수당까지 지급한다. 보수는 파수군이 아주 약간 더 높다. 점심시간 교대로 잠깐 파수군을 해 본 수문군이 괜찮다 싶어 파수군으로 전향하는 경우도 많다고.
09:30 초짜들의 간접 체험

(참관을 하러 이동하는 에디터와 신입들)
수문장 교대식은 하루에 딱 두 번,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열린다. 교대식 30분 전마다 매표소 좌측에 있는 협생문 바깥쪽에서 공개훈련을 한다. 어디까지나 훈련이기에 관리감독분들이 중간중간 개입해 자유롭게 교정을 해 준다. 훈련이라기보다는 리허설에 가깝달까?
물론 훈련이지만 이미 외국 관광객들이 사진과 영상을 살벌하게 찍어댄다. 실수한 내 모습이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대학생들에게 인스타로 생중계 될 지도 모른다.

(행사는 생각보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에디터를 포함한 신입 훈련병들은 참관을 한다. 리허설일지라도 엄숙한 가운데 진행된다. 행사의 묵직한 공기가 기도를 타고 내려와 폐부를 짓누른다. 순간 푸른 옷을 입은 수문군 한 명이 실수를 저질렀다.
“온 지 얼마 안 된 친구예요. 다들 처음엔 긴장한 나머지 실수를 하죠”
의경 출신인 나는 속으로 미소를 띄웠다. 서장님이 눈물을 쏟고 기립박수를 치게 만들었던 나의 제식을 본다면 저런 인재가 왜 에디터를 하고 있나 싶을 거다.
10:00 실전의 중압감
공개훈련이 끝나고 나면 15분 내로 오전 교대식이 시작된다. 본식은 공개훈련이 이루어진 협생문 안쪽, 흥례문 광장에서 진행된다. 식을 알리는 큰북 소리가 울리면 발을 맞추어 전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본 교대식의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신참인 우리들 뿐 아니라 관광객들조차 숨죽이고 식을 지켜본다. 협생문 안쪽에서 하던 공개훈련은 리허설에 불과했다. 아까 틀렸던 파란 옷 입은 사람은 실수하지 않았다. 숨죽여 식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이 태산이다. “내가 오늘 여기서 걸어야 한다고?”
한참 구경하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직원에게 “이거 군인들인가?”라고 물었다. 직원의 말에 따르면 10년 전 쯤에는 실제로 군인을 차출해 수문군으로 근무시켰다고. 경복궁에서의 군생활은 어땠을까. 7첩 반상에서 직각식사를 시켰을까?
10:30 본격적인 제식 훈련
본식이 끝나면 우리 신입들은 사무실 뒤쪽 영군직소에서 기초제식을 배운다. 마침 엊그제 입소한 신입 분들이 있어 에디터와 함께 훈련을 받기로 했다.

(깃발은 에디터 키의 두 배 정도 된다. 창이라서 커 보이니 다행이다.)
내가 오늘 체험하기로 한 보직은 ‘정병’이다. 조선시대 5위 중 전체 병력 규모가 가장 커서 정규군의 근간을 이룬 병과라고. 현대식으로 따지면 소총수 정도가 아닐까. K2 대신 장창을 들고 제식을 한다. 생각보다 무겁진 않다.
제식이 다 그렇지만 결국은 줄서기와 돌기, 차렷 열중쉬어가 전부다. 대신 창을 들고 내리는 순간을 발동작에 맞춰야 하는데 오바 조금 보태서 펌프 중수 난이도 급이다. 창 날이 정면을 바라보도록 잡아야 하며 기울면 안 되고, 내려놓을 땐 절도있게 살짝 들었다 내리찍어야 한다.

(나는 지금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중추신경이 마비된 듯 몸과 마음이 자꾸 다르게 움직이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좌우향우를 하는데 자꾸 문워크가 나온다. 댄싱나인을 하는 내 모습을 보며 포토그래퍼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후 잠깐동안 이론 수업을 하는데, 수문군에는 어떤 보직이 있는지, 어느 곳에서 근무를 하고 식순에 따른 위치는 어디인지를 알려 준다. 본식이 열리는 흥례문 광장에는 줄을 편하게 설 수 있도록 바닥에 일정 간격으로 표식이 되어 있다. “기자님이 서야 할 곳은 항상 뒤에서 두 번째에 있는 표식입니다” 나는 2차함수 배우는 문과생처럼 반만 이해한 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11:00 밥은 먹고 합시다
교육을 받고 있는데 등 뒤에서부터 밥내음이 향긋하게 풍겨왔다. 아침 식사를 거르고 와서인지 교육 내용이 귀에 안 들어온다. 의식이 희미해져 갈 때 쯤 “네 이제 식사하시고 이따 다시 모일게요”라는 말이 선명하게 들렸다. “수고하셨습니다!”

(굶주린 에디터는 식판 두 개를 갈아치웠다.)
군대 급식표 이후 오랜만에 보는 식단이 식당 벽에 붙어 있었다. 오늘의 메뉴는 어묵볶음과 콩나물국, 제육볶음이다. 너무 배가 고파서였는지 결국 한 식판 더 들이키고 말았다.
흡연하는 직원들은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궁 밖에서 담배를 피운다. 소중한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그리고 관광객들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서일까. 아쉽게도 내부 직원용 곰방대 같은 건 없다.
점심 시간이 끝나면 훈련을 계속한다. 교육받는 신입들은 3일간의 교육이 끝난 후 테스트를 봐서 합/불 여부를 가린다. 불합격해도 기회가 두 번 더 있고 대부분 합격해 본식에 투입된다. 지금까지 3번 전부 탈락한 사람은 딱 한 명 뿐이었다고.
13:30 올 것이 왔는데
이제 본격적인 교대식을 준비하기 위해 분장과 복장을 풀세트로 맞춘다. 조선시대엔 안경이 없었으니 당연히 안경을 벗고 분장실에서 본드로 수염을 붙인다. 이후 벨트, 철릭(외투), 전립(모자) 총 3세트 아이템을 착용한다. 그런데 철릭이 푸른 색이다. 아까 틀렸던 그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이다. 불안한 내 미래를 암시하는 건 아닐까.

(어째 제대로 갖춰입은 게 더 못났냐. 제 안경 주세요…)
“자, 오늘은 외부에서 기자분이 체험 취재를 오셨으니 좀 더 힘차게 움직여 주세요!”
부담스런 멘트와 함께 공개훈련이 시작됐다. 좌심방이 팝핀하는 소리가 귀지를 흔든다. 오른쪽에 선 옆 정병 직원이 긴장을 풀어주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도 자꾸 왼쪽 귀로 김기춘처럼 빠져나갔다. 시험 종료 5분 전 마킹이 밀린 것을 확인한 수험생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행히 초중반까지는 괜찮았다. 오른쪽에서 함께 걷는 정병을 거울처럼 따라하다 보니 술술 풀리는 듯 했다. 이제 마지막 난코스인 수문 교대 순서만 남았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눈을 감고 있는 에디터)
곧 정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군! 후군!”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몸이 얼어붙었다. 이제 “향!”하면 창을 들어올리고 돌아설 준비를 한다. “향!” 창을 들어올렸다. “좌우!” 순간 오른쪽으로 돌아야 했던 내 몸이 좌측으로 30도 돌아가 버렸다. 오류를 감지한 달팽이관이 0.1초간 재부팅되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았다. 어리버리 개인기 쇼타임이 시작되고 말았다. 계속되는 실수를 보다 못한 감독분이 “전후군 부분만 다시 할게요” 라고 외쳤다.
(브레이킹 댄스를 방불케 하는 저열한 몸짓)
본식은 아니지만 병졸이 임금님 앞에서 빠진 모습을 보인 셈이다. 창덕궁 약방에서 사약 달이는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표정 없이 정면을 바라보는 나머지 수문군들이 모른 척하며 “너 임마 조선시대였으면 벌써 망나니 퀵 출발했어”라고 속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비웃어 줘요.
14:00 대망의 본식
공개 훈련의 후유증이 채 가시도 않았는데 15분 뒤 본식이다. 마치 결혼식장에서 전 여친을 마주친 신랑처럼 초조했다. “괜찮아요. 조금씩 틀리는 건 티가 잘 안 나니까요” 아뇨, 제 실수는 개인기 수준이었는데요?
그래도 주변에 있던 직원분들이 나무라지 않고 긴장을 풀어주려 말을 걸어주었다. 망극한 나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윽고 본식이 시작됐다.

북이 울리는 소리에 발을 맞춰 협생문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까와는 달리 수많은 관광객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셔터 울리는 소리와 스피커를 타고 나오는 3개국어 안내 멘트가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그리고 눈 앞이 하얘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본식에서는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
행사는 끝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일일히 언급하지 않겠다. 원래 슬램덩크도 마지막 경기는 안 보여줬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식을 조금 틀리긴 했지만 ‘티가 잘 안 나는’ 정도였다. 사실 앞서 공개 훈련을 먼저 치른 덕에 훨씬 수월했다. 내 실수를 기대했다면 미안하다. 다시 말하지만 에디터는 의경 출신의 제식왕…
체험을 마치고
본 행사를 끝내니 십 분 묵은 찹쌀떡이 내려간 듯 속이 후련했다. 끝난 거다. 미주 순회공연을 마친 싸이의 기분이 이랬을까. 처음 한 것 치곤 꽤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찍힌 내 영상을 보니 긴장한 나머지 동공이 매그니튜드 8.0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수문군은 나름 재미있고 보수도 괜찮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직종 같겠지만, 손에 익으면 익을수록 리스크가 적어지고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이다. 모든 보직을 전부 숙지하고 필요에 따라 바꿀 수도 있으니, 매너리즘에 빠질 일도 적다.
각 잡던 군시절 추억도 떠오르고, 간만에 느끼는 긴장감 덕분에 정신 훈련을 한 기분이다. 새로운 경험에서 얻은 자극이 최근 (소재 고갈로) 피폐해진 내 멘탈에 쓸만한 거름이 되었다. 휴학 중인 대학생들도 학비를 많이 벌어 간다니, 당신도 평생 한 번 쯤 소중한 문화유산의 수호자가 되어 보는 건 어떨지.
Photograph 오준섭
대학내일 웅자 에디터 woongja1@univ.me
[대학내일] 20대 라이프 가이드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