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그 계절에 더 맛있는 제철 음식이 있다.
우리가 더 알고 사랑해야 할, 지금 우리가 먹는 음식 그것이 바로 '한식'이다.

우리에게 '겨울'은 무엇인가?
하얀 눈? 따뜻한 커피? 크리스마스?
우리 민족에게는 겨울이 돼야만 즐길 수 있는 기대되는 맛들이 있다.
겨울의 별미 [과메기]
겨울 별미 과메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숙종 11년 1685년 12월 28일 자 《승정원일기》다. 여기에는 과메기가 “경상도에서 정월에 대전大殿에 진상하는 관목청어貫目靑魚”라고 나와 있다. 관목이 경상도 사투리로 불리면서 ‘관목이’가 ‘관메기’로, 그게 다시 ‘과메기’로 변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과메기는 본래 청어를 꾸둑하게 말린 생선이었다. 과메기의 주 생산지는 경상도 영일현迎日縣, 현 포항이었다. 물고기에 대한 기록 《전어지》1827년에 청어과메기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 관목을 사투리로 부르다 보니 '관목이', '관메기', '과메기 '가 됐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원래 청어를 말린 생선이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꽁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고려 시대부터 먹어왔던 청어가 말린 채 내륙으로, 일본, 중국으로도 유통되며 개체 수가 줄었다가 최근 청어가 다시 잡히기 시작하면서 청어과메기가 다시 늘어나고 있다.

출생의 비밀 [설렁탕과 곰탕]
요즘은 뼈가 중심이 되어 하얗고 탁한 국물이면 설렁탕,
뼈보다는 내장이나 살에서 우려내 맑은 국물이면 곰탕이라고 구분한다.
하지만 명확한 기준은 아니다!
20세기 이전 동서양을 막론하고 쇠고기는 귀한 식재료였다. 가죽을 벗겨 내 내장과 피를 빼내고 뼈를 발라낸 뒤 남은 정육을 먹을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사람들이 쇠고기 맛을 못 보고 살아온 것은 아니다. 먹는 방식이 조금 달랐을 뿐이다.
귀한 소고기를 많은 사람들이 먹기 위해서는 국물이 유일하다.
>> 설렁탕, 너 누구니? <<
조선시대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선농단'에 참석했던 세종대왕이 비가 와서 재단에 바친 소를 잡아 탕으로 끓여 먹었다는 이야기는, 세종대왕의 성품과 설렁탕의 한자 표기와 맞물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거짓 신화가 되었다. 거기에 야사와 각종 언어학적 창작이 더해져 설렁탕의 탄생은 '선농단에서 만든 탕'의미로 '선농탕' 되기도 했으며, 음의 변화를 통해 설렁탕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예상치 못한 곰탕의 등장! <<
선농단의 설렁탕 설은 1940년 홍선표가 출간한 《조선요리학》이라는 책에 처음 등장한다. 설렁탕 이야기만으로도 벅찬데 여기에서 갑자기 곰탕이 설렁탕 이야기에 끼어든다. 막장 드라마로 치면 배다른 동생이거나 신분이 다른 쌍둥이가 나타난 것이다. 곰탕의 등장은 설렁탕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다. 미국 아이비리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돌아온 동생처럼 곰탕이 등장하면서 설렁탕은 몽골이라는 고기 문화의 절대 강자와 맞닥뜨린다.
1768년 이억성이 엮어 간행한 몽골말 학습서인 《몽어유해》에는 ‘공탕空湯’이 나온다. 공탕을 ‘고기 삶은 물’이라는 해석과 함께 몽골어로 ‘슈루’라고 적고 있다. 1788년에 지어진 외국어 학습서인 《방언집석》에는 공탕을 ‘고기물'이라고 표기하고, 한나라에서는 ‘콩탕’, 청나라에서는 ‘실러’, 몽골에서는 ‘슐루’라고 부른다고 쓰여 있다. 음식문화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이 이 설에 대한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슈루나 슐루는 곰탕과 설렁탕의 확실한 친부모로 굳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진짜 친부모일까? 출생의 비밀은 그리 간단치 않다. 두 학습서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슈루 혹은 슐루가 설렁으로 음운이 변하거나 공탕이 곰탕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공탕의 설렁탕ㆍ곰탕 기원설의 핵심이다. 하지만 두 책이 모두 외국어 학습서인 점을 감안하면, 한국말 설명인 고기물을 우리 민족이 더 보편적으로 사용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냉면은 원래 겨울 음식이다 [냉면]
물냉면의 발상지 평안도에서는 추운 겨울에 주로 먹는 ‘쨍’한 냉면을,
서울 사람들은 예로부터 더운 여름에 먹었다
기후와 문화의 차이는 같은 음식도 다른 방식으로 먹게 한다. 평양냉면이라는 이름 때문에 서울의 ‘평양냉면집’ 역사를 한국전쟁 이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서울에서 평양식 물냉면의 역사는 19세기 중반부터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
도 메밀로 만든 ‘국수’의 서울 정착기는 심한 굴곡의 역사와 다름이 없다.
평양냉면의 본모습이 수많은 굴곡 속에서 서울식으로 변형되어 이제는 ‘서울냉면’이라 불러도 될 만큼 다양한 이야기와 레시피가 만들어졌다.
냉면은 대중이 즐겨 먹는 서민 음식이자 왕도 즐겨 먹는 고급 음식이었다. 고종의 황후 윤비를 모신 김명길 상궁이 구술한 《낙선재 주변》이라는 책에는 “냉면의 꾸미는 가운데에 ‘십十’ 자로 편육을 얹고 나머지 빈 곳에는 배와 잣을 덮은 모습이었다.
배는 칼로 썰지 않고 수저로 얇게 떠서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어 국수 전체의 위에 얹고 꾸미로는 편육과 잣뿐이었다. 국물은 육수가 아니고 동치미에 배를 많이 넣어 담근 것이라 무척 달고 시원한 김칫국을 부어 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종이 즐겨 먹던 냉면은 ‘배동치미 냉면’ 혹은 ‘고종냉면’으로 불리며 레시피가 전해진다.
이렇듯 왕도 한양에서 즐긴 냉면이지만 냉면의 본고장은 역시 평양이었다. 평안도 출신인 김구 선생도
19세기 말의 평양냉면에 관한 기록을 《백범일지》에 남겼을 정도로 평양냉면은 평양과 평안도 사람들의
일상 음식이었다.

평양의 국숫집과 서울의 평양냉면집의 큰 차이는 육수와 먹는 계절이었다.
서울 사람들은 더운 여름에 냉면을 먹었고, 겨울이 아니면 제맛을 내기 힘든
동치미 국물 대신 고기 육수가 ‘서울냉면’ 국물의 주인공으로 자리를 잡는다.
육신과 영혼의 허기를 채우다 [돼지국밥]
돼지국밥의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일제강점기와 광복, 한국전쟁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친 세파를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궁핍의 시대가 낳은 산물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돼지국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북한 실향민들의 돼지 음식 문화에서 나온 이북식 돼지국밥, 밀양의 무안면에서 시작된 밀양식 돼지국밥, 그리고 경상도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경상도식 돼지국밥이 주를 이룬다.
돼지국밥이 가진 것 없이 오직 노동으로 살아야 했던 고단한 육신을 위한 음식이라는 사실이다. 시대를 달리하며 장터에 가득했던 장돌뱅이와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모여든 노동자와 운전기사 등으로 신분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고시 공부를 할 때 울산에서 막노동을 했다고 한다. 영화 <변호인>에서 그는 돼지국밥 한 그릇 사 먹을 돈이 없어 국밥을 먹고 도망을 친다. <변호인>의 숨겨진 주인공인 돼지국밥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변화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영화 속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노동자에서 변호사로, 속물 세법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변신하는 과정마다 돼지국밥은 그를 한 단계 성숙시켜 준다. 부산의 음식 전문가들은 돼지국밥이 먹먹해서 먹기 힘들다 하지만, 난 돼지국밥이 더 먹고 싶어졌다. 나도 <변호인>의 주인공처럼 돼지국밥을 먹을 때마다 몸이 아니라 영혼이 성장할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음식평론가 박정배의 <한식의 탄생>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