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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두번은 살지 못합니다

인생 두번은 살지 못합니다

누가 그럽디다
인생 나이별로 구분을 해보면

10대 나이 때
부모님이 가는 곳은 ,
무조건 좋아라
따라 나섰던 나이...
인생은 신기했습니다.

20대 나이 때
친구들과 함께라면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그냥 좋았던 나이...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흠모하는 연보라빛 마음
인생은 무지개 였습니다

30대 나이 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행선지를 묻지 않았던 나이...
인생은 데이트 였습니다.

40대 나이 때
어디 한번 가려면
애들 챙겨야 하고,
이것저것 준비로
걸리적거리는게 많지만
꼭 한번 가보고 말겠다고
다짐했던 나이...
인생은 해외여행을
꿈꾸는 것 같습니다.

50대 나이 때
종착역이 얼마나 남았나,
기차표도 챙기고
놓고 내리는 물건 없나
이것저것 살피는 나이...
인생은 기차여행 같습니다.

60대 나이 때
어딜가도
유서 깊은 역사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나이...
인생은 고적답사 여행 같습니다.

70대 나이 때
나이,학벌,재력,외모 등
아무것도 상관없이
어릴 때의 동무를 만나면
무조건 반가운 나이...
인생은 수학여행 입니다.

80대 나이 때
이때는,
누굴 찾아 나서기보다는
언제쯤 누가 찾아올까?
기다려지는 나이...
인생은 추억여행 입니다.
드문 나이

90대 나이 때
지금 누굴 기다리십니까?
아니면 어딜 가시려 합니까?
아무도 오지않고
갈데도 없는 나이...
눈도 귀도 근력도 다 떨어진나이
인생은 추억 여행 시간 여행 입니다

인생이란?
가는 승차권있어도 오는 승차권이 없으니 한장만
손에 쥐고 떠나는 단 한번 뿐인
여행과 같습니다.

인생은 되돌아 오는 길이 없습니다
인생은 다시 라는 말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
돈만 좋아 하다가
사랑만 좋아 하다가
인생 끝내지 말고!
인생 제대로 삽시다!

황혼의신사/김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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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사랑놀음 입니다 사랑하나에 목숨걸고 사랑을 이루고자 사는거 아니겠습니까? 부모 사랑받고 성장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자식을 낳아 사랑으로 기르고 온가족의 사랑속에 살아가는 인생 사랑을 이루고자 사는거 아니겠습니까? 인생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제대로 하는게 인생 제대로 사는거 아닐런지요 사랑하며 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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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응급차와 고의사고? 응급환자 사망
서울 강동구 고덕동 고덕 사거리에서 있었던 일 입니다. 당시 응급차를 못가게 막아세워며 실갱이 하는 내용 블박영상이지만 소리만 들리내요~ 택시기사의 블박영상은 더 가관이지만 경찰에서 못준다고 합니다. 퍼온 영상입니다. 아래 글은 돌아가신 고인의 아드님이 쓰신 글입니다. 그간 어머님께서는 암 선고를 받고 투병하시며 회복되었다가 다시 아프셨다가를 반복하며 어언 수년간을 싸워 오셨습니다. 아플때마다 급히 응급실을 찾으면 금방 다시 좋아지시고 하시기를 여러번 그때마다 온식구들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어머님 회복에 감사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2020년 6월 8일 월요일 오후 3시 15분 그날따라 평소와는 다르게 어머님의 호흡이 너무 옅고 심한통증을 호소하시어 응급실을 예약하고 응급실로 급히 모셔야 했기에 응급차를 불러 이동하기로 하였습니다. 처와 아버지와 동승하여 응급차로 어머님을 모시고 가고 있는 도중 2차선에서 1차선으로 차선 변경을 하다 영업용 택시와 가벼운 접촉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응급차 기사분은 신속하게 차에서 내려 택시 기사에게 “사경을 헤메는 위급 환자를 급히 응급실로 이송중에 있으니 응급실에 먼저 모셔드리고 사건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지만 야속하게도 택시기사는 막무가내 막아서며 위급환자 맞냐며 “응급환자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환자 죽으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죽으면 책임지겠다”라고 말하며 응급차 문을 열어제끼고 얼굴이 사색이 되어 신음하시는 어머님 얼굴을 사진을 찍고 응급환자 아닌거 같다는둥의 망언을 하며 응급차에 올라타 응급차가 이동하지 못하도록 막아세우며 위중환자가 있으니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저의 처와 아버지의 말도 아랑곧 하지않고 15분~20분가량 내리쬐는 때앙볓에 어머님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면서 어머님의 눈동자가 뒤로 뒤집히시고 급기야 하혈까지 하시면서 상황이 걷잡을수 없도록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한참후에야 119 구급차가 도착하여 어머님을 옴겨 태우고 병원으로 향하였지만 이미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탓인지 어머님은 고통 속에서 매우 신음하시다가 돌아 가셨습니다. 저와 저의처,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님의 배우자이신 저의 아버지... 수년간 병마와 싸우면서도 누구하나 소홀함없이 어머님 간호에 집중하며 곧 병마를 딛고 일어서리라는 희망으로 간호해왔던 우리식구들은 세상을 잃어버린양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그 허망함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을정도로 원통합니다. 지금도 그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고 조금만 빨리 병원에 도착했으면 어머님은 아직도 우리 식구 곁에 머물며 우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고 계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로 몇날 몇일을 보내고 있으며 아버지는 평생의 동반자를 먼저 보냈다는 생각에 식음을 전폐 하시며 지내고 계셔서 또한번의 불행이 오지않을까 매우 걱정이 됩니다.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Temp/7jT0fT ↑↑↑↑↑↑↑↑↑↑↑↑↑↑ 고인의 아들이 올린 국민청원 입니다 이슈화되게 도와주십시오. ----- 글만 보는데도 너무 화가 납니다. 미친 건가요...?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4)
남들 한 번 가기도 꺼리는 군대를 두 번 가겠다고 자원한 누메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첫 영화 <퍼스트 어벤저>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까요? 영화 초반에 비쩍 마른 주인공이 군대에 자원했다가 퇴짜맞는 장면이 있었죠. 1차 대전 발발 즈음엔 젊은이들 사이에서 군에 자원하는 것이 의무이자 일종의 모험 같은 것으로 여겨진 모양입니다. 낯선 유럽 대륙에 가서 군에서 선전한 것처럼 안전하고 안락한 참호에 틀어박혀 적을 노려보며 몇 개월쯤 있다보면 어느새 예정된 주둔 기한이 끝나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당시 군에 지원한 청년들이 전쟁에 대해 가진 인식은 그런 정도였죠. 그 전쟁이 수년이 넘게 이어지고 전세계 열강이 참전하는 국제전이 될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https://youtu.be/JerVrbLldXw <퍼스트 어벤저> 영화 트레일러. 영상 가장 앞부분에 주인공이 군에 지원했다 퇴짜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실제에 비하면 신병 지원소가 만화처럼 과장되게 표현되긴 했지만요. 어쨌거나 누메로도 캡틴 아메리카처럼 호기롭게 군에 자원하러 일부러 워싱턴까지 옵니다. 막 설립한 회사 운영이 아직 채 본궤도에 오르기도 전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누메로와 프레데릭에겐 전화위복이 됩니다. 워싱턴에서 누메로는 우연히 육군이 가진 고민을 알게 됩니다. 미 육군은 유럽 대륙으로 보낼 장병들을 위해 각종 보급품을 안정적으로 수송해야 했죠. 그 보급품들 가운데는 물론 식료품이나 의약품 따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도중에 상하거나 훼손되지 않고 신선하게 목적지까지 물품을 수송하자면 무엇보다도 향상된 냉동 기술이 꼭 필요했죠. 마침 누메로에겐 그들의 고민을 해소해 줄 기술이미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자, 누메로는 군에 자원하겠다는 계획을 접고 다시 서모컨트롤 사로 돌아옵니다.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 유닛을 군 사양으로 개량해 생산하기 위해서였죠. 완성해 군에 납품한 냉동 장비는 현장에서도 고장 없이 잘 작동했습니다. 미군은 정식으로 서모컨트롤 사 제품을 군 장비로 채택하기에 이르죠. 곧 미군의 식수부터 혈장에 이르기까지 온도에 민감한 모든 품목이 서모컨트롤 사의 냉동 트럭으로 미군이 진출한 모든 전역에 배송됩니다. 유럽과 아프리카, 심지어 태평양 전선에서도 누메로와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가 수송을 맡았죠. 군과 협력하면서 서모컨트롤 사는 비로소 두각을 보였습니다. 프레데릭이 완성한 기술은 단순히 트럭을 개선할 뿐 아니라, 야전병동과 병기창, 심지어 B-29 폭격기의 조종석과 엔진에까지 적용되었죠. 전쟁 동안 서모컨트롤 사가 미군과 계약한 금액은 천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서모컨트롤 사는 더 이상 작은 회사가 아니었죠. 1949년 기준 직원 200명에 매출 400만 달러 이상을 달성한 회사는 냉동 기술 훈련 학교를 자체 설립해 보유했고, 미 대륙과 중동, 유럽까지 진출해 제품을 판매했습니다. 프레데릭은 대전 후 기차, 배, 트럭 등으로 쉽게 옮겨 실을 수 있는 냉장 컨테이너를 개발했고, 동업자 중 하나인 Myron Green은 전국 유통 및 서비스망을 구축해 회사의 기틀을 세웠죠. 때맞춰 1950년대 새로운 산업이 등장해 급속히 성장합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냉동 식품과 슈퍼마켓 산업이죠. 프레데릭은 이 이후로도 다양한 기술을 연구해 특허를 내고 신제품을 출시했습니다. 1955년 버스용 에어컨을 최초 개발했고, 58년에는 기존 가솔린 엔진보다 훨씬 뛰어나 장거리 수송에 적합한 디젤 엔진 냉동차 설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가 생전 제출한 특허만도 60개가 넘죠. 그 분야도 냉동 설비에만 국한하지 않고, 엑스레이와 엔진, 음향 설비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1944년 프레데릭은 미국 최초로 냉동 엔지니어 협회 회원이 된 흑인이었습니다. 누메로는 계속 프레데릭과 다른 동업자들 도움을 받아 회사를 키웠죠. 50년대 중반에 서모컨트롤 사는 사명을 변경, 써모 킹Thermo king coperation 사로 바뀝니다. 현재도 전세계에서 검증된 기술력과 우수한 품질로 트럭용 냉동기뿐 아니라 다양한 냉동 수송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 진출해 있는 기업입니다. 써모 킹 사가 1960년에 발표한 NWD 62 모델. 현재 써모 킹 사의 냉동 트레일러 제품들의 기본 틀이 된 모델입니다. 냉동차 이외에도 프레데릭 존스는 화물 열차의 냉동 차량, 군에서 혈장이나 약물 따위를 수송할 수 있는 휴대용 냉장 장치 등도 발표했습니다. 써모 킹 사가 발표한 상품 가운데는 심지어 우유 냉각기나 골프 카트 따위도 있습니다. 자신의 발명이 세상을 바꾸어놓은 것을 본 후, 1961년 2월 프레데릭 존스는 폐암으로 사망합니다. 미네소타는 1977년 그의 공로를 인정해 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죠. 고아로 자라나 흑인이란 이유로 차별받던 그가 마지막엔 어느 누구도 그 공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위인이 된 겁니다. 한편 사장인 조셉 누메로는 평생을 함께 한 파트너가 사망한 후, 회사를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 사에 팝니다. 1963년까지 그는 계속 사장으로 자리를 지킨 후, 동업자였던 마이론 그린Myron Green에게 넘기고 스스로는 명예 회장으로 물러납니다. 회사는 60년대 극심한 파업을 여러 차례 겪지만 흔들리지 않았죠. 하지만 66년, 써모킹 사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참사를 겪게 됩니다. 때는 1966년 3월. 회사는 우수 딜러와 직원들을 뽑아 포상 여행을 보내 주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출발해 하와이 호놀룰루, 일본 하네다를 거쳐 홍콩 카이탁 공항으로 향하는 영국해외항공 소속 911편 비행기에 75명의 임직원이 몸을 싣죠. 회사는 이들에게 17일간의 동양 여행 패키지를 제공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행 도중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호놀룰루에서 도쿄 하네다로 향하던 중, 비행기는 기상 악화로 후쿠오카 공항으로 회항합니다. 후쿠오카에서 하루 대기한 후, 비행기는 다음날 원래 계획했던 하네다 공항에 착륙하죠. 기상 상황은 좋아서 후지산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맑았다고 합니다. 지상에서 비행 계획을 브리핑한 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륙한 비행기는 예정대로 홍콩을 향해 날아갔죠. 그러다 문득 기장은 기수를 잠시 돌려 후지산 정상으로 향합니다. 물론 비행기 고도는 충분히 높아서 산 정상에 부딪칠 우려는 없었습니다. 탑승객들에게 하늘에서 보는 후지산 정상 풍경이라도 보여주려 했던 걸까요? 하지만 정상 즈음에서 비행기는 난기류를 만나 견디지 못하고 동체가 공중분해되어 버립니다. 날개를 잃은 항공기는 후지산 동쪽 6킬로 떨어진 숲에 뿌연 연기를 내며 추락하죠. 써모킹 임직원 75명을 포함해 당시 탑승객과 승무원 124명은 모두 사망합니다. 사망한 임직원 가운데엔 임원급이 3명, 주요 딜러가 35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망한 임원 가운데엔 부사장 랄프 포터도 있었죠. 또 회사에서 보내주는 포상 여행이었기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한 경우가 총 52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바람에 63명의 아이가 부모를 잃었죠. 써모 킹 사 입장에선 창사 이래 최악의 참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BOAC 911편 추락 사고. 피해자 중엔 일본인, 한국인도 소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써모 킹 사 임직원과 같이 외국인들이었습니다. 이 사고 이후 난기류에 대한 주의 대응이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는 이후로도 건재했습니다. 모기업 웨스팅하우스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그룹 내에서 유일하게 좋은 성적을 내어 알짜 기업 노릇을 톡톡히 해냈죠. 1991년 누메로가 사망할 당시엔 이미 회사는 수백만 달러 규모 사업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2700여 명을 고용하고, 도미니카나 아일랜드, 스페인에도 공장이 있었죠. 1993년엔 일본 시장 거의 절반을 점유했고, 이듬해에는 동유럽, 아시아 지역에서 딜러망이 36%나 신장했습니다. 1991년, 미리 적은대로 조시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프레데릭 존스는 이미 사망한 뒤여서 직접 훈장을 전달받지는 못했지만, 그 미망인이 행사장에서 대신 수령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이 흑인에게 수여된 건 프레데릭 존스가 최초였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냉동 운송 기술을 개발해 선적과 식료품 시장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공로가 인정되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 1985년 레이건 행정부에서 처음 수여한 이래, 역대 대통령들이 산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들을 선정해 표창했습니다. 듀폰 사나 빌 게이츠, 3M 등도 같은 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이러한 영광을 누릴지는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는 대공황으로 완전히 파산하고 학점이 모자라 법대 졸업을 하지 못한 청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경주용 차를 가지고 대회에 나가길 바랐던 극장 영사기사였죠. 그들에겐 기회가 있었고, 기회를 붙잡을 능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편의점과 마트에서, 혹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그들이 남긴 유산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1930년대 누메로와 프레데릭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맞잡은 그 때 덕이란 생각이 듭니다.
느린 엘리베이터
지금 같은 고속 엘리베이터가 없던 시절 어느 백화점에 엘리베이터가 너무 느리게 움직여서 고객의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백화점 지배인은 이 문제 때문에 여러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 봐도 가장 현실적인 해결 방법은 최신형 엘리베이터를 새로 설치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데 필요한 예산을 보는 순간 지배인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이유는 너무 비쌌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공사 기간 손님들이 불편을 겪으며 나타날 매출 하락을 생각하면 새로운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지배인이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담당 청소부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나섰습니다. 지배인은 속는 셈 친다는 생각으로 한 번 원하는 대로 해보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정말로 고객들의 불평이 없어졌습니다. 청소부가 고안한 해결책은 엘리베이터 안에 큰 거울을 달아놓는 것이었습니다.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두커니 서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고객들이 이제는 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도 쓰다듬어보고, 음식물이 이빨 사이에 끼었는지 체크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매를 보면서 시간 가는 줄 잊어버렸습니다. 호텔 지배인은 청소부보다 호텔경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엘리베이터 엔지니어는 청소부보다 엘리베이터 구조와 원리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느린 엘리베이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는 손님들의 마음은 바로 그 손님들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청소부가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항상 문제 곁에 있다는 말처럼 멀리 돌아볼 필요 없이 편견 없는 마음으로 주변을 바로 살필 수 있다면 어떤 문제든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어떤 돌을 옮기려고 할 때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다면 주변의 돌부터 움직여라. - 비트겐슈타인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