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wonleee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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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K리그 챌린지 6R 베스트 골!

안녕하세요 Jongwon Lee 입니다
지난주에 있었던 K리그 챌린지 6라운드
베스트 골을 꼽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

이번주는 5경기에서 총 17골이 터지는 골 잔치가 벌어졌는데요
이번주 클래식에서 나온 9골의 거의 2배에 가까운 수치네요 !

17골 중 가장 멋졌다고 생각한 3골을 뽑아보겠습니다!


1. 성남 vs 부천 후반 45+3분

진창수(부천) Goal

경기 종료직전 문기한의 크로스를 받아 멋지게 마무리 하는 진창수의 극장골!
이 골로 부천은 리그 3연승을 기록하게 되었죠!!

2. 안산 vs 수원FC 전반 44분

이승현(수원FC) Goal

로벤의 '매크로 슛'과 흡사한 이승현의 멋진 중거리 슛!
이날 이승현은 두 골을 기록하며 엄청난 활약을 했죠 !
(카메라 각도가 너무나도 아쉬웠던 멋진 골 ㅠ)


3. 부산 vs 서울E 후반 16분

이정협(부산) Goal

리그에서 펄펄날고 있습니다
5경기 연속 골을 뽑아내는 부산의 공격수 이정협!



움짤이 잘 안보이시는 분들을 위해 영상도 준비하였습니다
재밌게 봐주세요 ^^



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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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협은 팀에선 닐아댕기는데 국대에선 참..
그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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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슬픈 이야기 : 부산의 강등, 왜 서포터들만 속앓이해야 하는가?
'리그 4회 우승' 에 빛났던 K리그 명가의 추락 2015년 12월 5일, 부산의 축구성지인 구덕운동장에는 K리그의 새로운 역사가 2개가 수립되었다. 하나는 순수하게 2부리그에서 출발하였던 수원FC가 험난했던 플레이오프 일정을 모두 치르고 첫 1부리그 승격 확정 이라는 굿 뉴스(Good news)가, 다른 하나는 30년 넘은 K리그 역사에서 무려 4번이나 리그를 제패했던 부산이 이번 시즌 끝으로 2부리그로 강등을 확정지었다는 배드 뉴스(Bad news)였다. 이미 두 팀의 분위기는 지난 1차전이었던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어느정도 갈려있던 상황이었다. 1차전에서 양 팀 각각 한 명씩 퇴장당했던 상황에서, 조금 더 간절했던 수원FC가 후반 종료 직전에 결승골을 뽑아내면서 기선제압에 성공했던 터였고, 가뜩이나 분위기가 가라앉아있던 부산은 완전히 의지를 상실해버린듯 했기 때문이었다. 이 분위기는 그대로 2차전으로 이어졌다. 양 구단의 구단주들이 직접 방문한 부산 구덕운동장에서 홈팀인 부산은 여전히 무기력했고, 오히려 원정팀인 수원은 어떻게든 승격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어필했다. 이것은 그대로 득점으로 연결되었고, 수원은 후반에 임성택과 자파의 연속골에 힘입어 멀리 부산 원정까지 온 천 여명에 가까운 서포터즈에게 '1부리그 승격' 이라는 선물을 안겨다주었다. 종료 휘슬이 울리고 난 뒤, 구덕운동장에는 "그따위로 축구하려면 나가 XXX" 같은 안티콜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경기 후 퇴장하는 선수들에게 야유를 하다못해 이물질까지 던지는 팬들도 있었고, 일반석에서는 그 날 경기를 보러온 부산 구단주인 정몽규 축구협회 총재를 비난하는 말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부산 구단 버스를 가로막으면서 말그대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따로 없었다. 이러한 부산 팬들의 분노는 순식간에 언론과 SNS를 통해 퍼져나갔고, 그들의 거친 태도에 일부는 왜 그렇게까지 지지하는 팀을 물어뜯어야만 하느냐는 비판도 했다. 물론 거친 행동 자체는 그 어떠한 변명으로도 합리화할 수는 없는 일이고 잘못한 것은 맞다. 하지만, 부산 팬들이 이 경기 끝나자마자 잠잠했던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듯이 분노를 표출하는 이유를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부산이 강등되었다는 결과물이나 부산의 지지부진한 투자도 분명 팬들의 분노를 샀던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이 뿔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부산의 강등, '예견된 수순' 이었기에 부산 서포터즈들의 가슴이 더욱 아팠다. 모든 이들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2015년 시즌의 부산의 행보에 대해 짚어보겠다. 올시즌 부산은 강등당하지 않고 잔류한다는 자체가 미스테리였을 정도로 부산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제3자가 보더라도 정말 못했다. '1시즌동안 겨우 5경기 승리' 밖에 하지 못했고, 부진에 대한 책임의 일환으로 먼저 윤성효 감독이 자진사퇴했고, 데니스 감독대행 체제로 긴급처방하려 했으나 이 또한 실패했다. 결국 10월에, 최영준 한국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감독으로 선임하여 불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끝끝내 부산은 자력으로 승점 3점 이상을 챙기질 못했고, 다른 팀들(인천, 광주 등)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강등 플레이오프까지 갈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꼴지인 대전과 순위가 뒤바뀌었을 것이다. 팀이 심각한 사태에 직면했을 때, 팬들이 먼저 움직였었다. 강등 플레이오프가 열리기 한 달 전, 그러니까 스플릿경기가 한창이었을 당시, 팬들은 구단 클럽하우스 앞에서 피켓시위를 열면서 강등의 심각성을 최대한 표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팬들만 발을 동동 굴렸을 뿐, 부산은 팬들의 절실한 외침에 귀를 닫고 있었다. 부산을 보고있자면, 선수들부터 시작하여 코치진, 그리고 구단 운영진까지 하나같이 승리에 대한 갈망, 살아남겠다는 치열함이라곤 눈꼽만큼 보여주지 않았다. 리그 최하위로 강등된 대전의 경우에는 바로 1부리그로 승격하다보니 제대로 된 준비가 되지 않았고, 1부리그 팀과의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이유라도 있지만, 부산은 그러한 변명거리 조차 없었다. 솔직히 부산은 제대로 준비만 되어있다면 충분히 중위권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있는 팀이고, 과거 황선홍-안익수 감독 시절에도 그러한 모습을 증명했었다. 그러나 2015년의 부산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항상 부산의 경기패턴은 이랬다. 경기 초반에는 열심히 하다가 한 골 헌납하여 사기가 꺾이게 되면, 그 때부터 속절없이 무너져 경기를 포기해버리는 그야말로 '프로답지 못한' 모습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강등되기 훨씬 전부터, 일부 선수들이 강등에 대비해 다른 팀으로의 이적을 알아보고 있는다는 식의 유언비어까지 떠돌면서 팬들은 구단과 선수들을 보며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며 불신의 골이 깊어졌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부산 구단의 운영이 그동안 얼마나 잘못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부산의 모기업이었던 대우가 IMF로 무너지면서 2000년에 현대개발산업에게 팀이 넘어갔다. 잘나가던 명가는 공교롭게도 이 시점부터 하락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부산이 뚜렷하게 잘했다고 생각되는 시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들의 행보는 점점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번시즌처럼 하위권에 머물렀던 적도 한 두 번은 아니었다. 2005년에는 무려 24경기 무승이라는 흑역사도 가지고 있다. 물론 부산을 지원해주는 현대개발산업이 대우그룹에 비해 자금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성적 부진과 선수 유입이 끊어진 것이 원인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막장 운영도 적잖았다. 이안 포터필드, 앤디 에글리, 박성화 등 책임감 없이 도망쳤던 감독들이 있었던 반면, 안익수처럼 지켜야할 사람을 순순히 내주는 등 팀 사기를 상당히 저하시켰고, 결정적으로 2004년 시즌 시작을 앞두고 서울로의 연고이전을 시도한 것으로 인해 기존의 부산 팬들 상당수가 떨어져 나가는 일도 벌어졌다. 경기장 밖에서는 폭행 사건, 성추문 사건 등 스캔들이 끊임없어 바람 잘 날이 없을 지경이었다. 악순환의 연속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구단주로 있는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은 무슨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가 궁금할 따름이다. 정몽규가 비록 K리그 연맹과 대한국축구협회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은 충실히 하여 일반 리그 팬들에게는 좋은 이미지가 박혀 있겠으나, 부산 팬들 입장에서 정몽규는 공공의 적으로 분류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2년 수원과의 개막전에서 부산 로고가 박힌 옷이 아닌, 수원 로고가 박힌 옷을 입으면서 오점을 남겼고, 총재 역할을 한답시고 정작 자신이 구단주로 있는 부산에 대해선 너무나도 무관심으로 일관하였고, 사건사고 및 부진으로 허덕이는 팀을 구원해주거나 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강등이 확정되고 나서도 문제다. 부산 지역에서도 소외된 이가 된 상황에서 해결책을 딱히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예산이 없어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음성녹음기 같은 대답만 번번히 되돌아오고 있다. 강등이 확정되고 난 뒤에 구단과 구단주가 공식 입장을 밝혔을 때, 팬들은 '열정도 그대로, 관심도 그대로, 투자도 그대로' 라는 문구 때문에 피가 거꾸로 솟고 있다. '이전처럼 그대로' 가 된다면, 부산의 앞날은 더더욱 암울하기 때문이다. K리그 챌린지로 강등된 부산, 그들은 나아갈 것인가? 표류할 것인가?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난 후, 부산은 전열을 가다듬고 내년 2부리그인 K리그 챌린지 준비를 하기 위해 지난 9일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신인 공개 테스트를 실시한다고 소식을 알렸다. 이번 시즌 실패를 거울삼아 미리 전력 보강하여 다음 시즌을 준비하겠다는 계산이다. 이번 공개 테스트에는 대략 200여명이 지원했고, 지원자들 중에는 지난 KBS2 에 방영되었던 <청춘 FC>에서 활약했던 염호덕과 이웅재도 포함되어있다고 밝혔다. 최영준 부산 감독은 이번 공개 테스트를 통해 숨어있는 진주를 찾겠다는 일념 하 면밀히 관찰하겠다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고, 부산은 이번 신인 공개 테스트를 병행하면서 내년 시즌 대비를 위해 벌써부터 새로운 외국인 선수를 물색하고 있다. 강등이라는 불주사가 일단 표면적으로는 부산이 정신차리라는 자극제로 한 번 먹혀들고 있다. 물론 2부리그 강등으로 인해 기존 부산의 젊은 선수들의 이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향후 부산의 행보를 좌우할 '슈틸리케의 황태자' 이정협이 이번 겨울이적시장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는 전역하기 직전에 상주 소속으로 안면 부상을 당하면서 부산으로 복귀한 이후 남은 시즌을 뛸 수 없었다. 현재 K리그 내에서 최전방 스트라이커 품귀현상을 겪고 있는 터라, 이정협은 K리그 클래식의 수많은 팀들의 레이더망에 잡혀 있는 상황, 그렇기에 그가 델피에로처럼 의리로 남아 부산의 승격에 힘을 쏟을 지, 아니면 이브라히모비치처럼 실리를 택해 좀 더 나은 클럽으로 이적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정협 뿐만이 아니다. 이번시즌 부산의 중원을 책임졌던 주세종 또한 이적시장에 언급되기 시작했고, 최근 불어닥치고 있는 골키퍼 연쇄이동에 의해 부산의 수문장인 이범영이 다른 팀으로 이적할 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그렇기에 부산의 전력이 전보다 더 약화될 가능성도 매우 농후하다. 확실한 것은 이번 강등이라는 성적표는 부산은 15년이라는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그들은 성적도 잃었고, 흥행도 잃었고, 팬들의 지지기반도 잃어버렸다. 동정할 필요가 없으며, 이것은 그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선수들이 뛸 의지가 없고, 이길 의지가 없다. 그리고 구단도 절실하거나 끊임없이 고민했던 흔적이 없었다. 강등을 통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가 될 수도 있다. 대전과 광주는 어찌되었건 2부에서 발판을 삼아 다시 승격신화를 만들어냈고, 대구 또한 비록 승격엔 실패했지만 내실있는 전력을 다지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원과 경남처럼 영원히 표류해버리는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구단 운영진이 방향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나아가기는 커녕 오히려 정체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수습하기가 힘들어져가고 있다. 부산은 이번 강등이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일까? 서포터들만 속앓이하는 모습을 이제는 그만 보았으면 좋겠다. 원문 : http://blog.daum.net/manutdronaldo/670
[슛토리] 한국 축구, 한국 스포츠 언론의 추악한 민낯
안녕하세요. optimic입니다. 한동안 바쁘다가 이제서야 글을 올리네요. 제가 일하던 사무실이 '확장이전'!!!을 했기 때문에! 그 동안 바빴습니다... '아니 확장이전을 했는데, 왜 님이 바쁨? 이삿짐센터가 해 주지 않음?' 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삿짐센터가 이사철이라서 전부 예약이 차 있어서... 제가 옮겼습니당... 아버지랑 아버지 친구분들이랑... 제 친구들이랑... 정말 뒤지는 줄... 책장 옮기다가 남은 수명 저승으로 배송할 뻔... 그래도 넓은 곳에서 넓은 책상을 갖고, 새 의자에 앉아 있으니 기부니가 참 조크등요..? 아무튼! 오늘 다룰 이야기는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이며,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룰 예정입니다! 빠르게 시작해볼게요! ------------------------------------------ 안녕 친구들! 오늘 다룰 이야기는 정말 무거운 이야기야.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해외축구를 좋아하고, 오랫동안 즐겨 왔던 친구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사람이 있지. 바로. 이 성 모 기자님. 한국 해외축구 팬들에게는 '갓성모'로 불리며 활발하게 활동을 하시던 기자님이었어. 이 분이 한국 축구팬들에게 받는 지지는 어마어마해. 대한민국에 많지 않은 '참 기자' 중 한 분이지. 네이버 스포츠 뉴스에서 거의 최초로 축구기사에 '움짤' 을 넣은 걸로 유명하고, 축구에 관한 열정과 지식이 어지간한 해설위원보다 낫다고 평가받는 사람이야. 기자들 중에서는 단연 원탑이고. 실제로 다른 기자들이 해외축구 소식을 전할 때, 유럽 현지 언론에서 쓴 기사를 그대로 번역해서 한국에 '전달'하는 수준이라면, 이 분은 영국, 스페인,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직접 기자석에서 경기를 보고, 분석하고, 선수들과 인터뷰 및 구단 관계자들과 소통해 생생한 정보를 기사로 쓰는 분이지. 외국어에도 능통해서 선수, 감독 및 구단 관계자들과 막힘 없이 인터뷰도 가능하고, 한국에 나오는 많은 축구 관련 자서전, 서적 등을 번역기도 해. '누구보다 ㅇㅇ 전문가가 되고싶다' 라는 책 시리즈도 만드시고, 아르센 벵거 전 아스날 감독, 안드레아 피를로 현 유벤투스 감독, 위르겐 클롭 리버풀 감독 등. 수많은 선수 및 감독들의 자서전도 번역했어. 축구에 대한 지식과 열정이 정말 어마어마한 기자님이야. 이성모 기자님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당시 토트넘의 감독이었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이 직접 애도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어. 구단 관계자, 선수, 감독이 기자에게 거부감이 없다는 건 그 기자가 정말로 옳은 정보만은 전달하며 열심히 발로 뛰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사실 나는 가장 존경하는 기자님이라서, 꾸준히 DM으로 이성모 기자님과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기자님과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서 지원서도 몇 번 넣어봤지만, 기회가 되지 않았지... 그 때 이것 저것 많이 물어봤는데, 감사하게도 기자님께서 직접 축구에 관련된 책을 택배로 보내주셔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됐던 기억이 나.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이성모 기자님께 피드백을 받고, 도움을 받았어. 축구기자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는 분이지. 그런데, 지금 이성모 기자님은 법적 분쟁에 휘말려서 기사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야. 누구와 법적 분쟁이냐고? 기자님이 뭘 잘못했냐고?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려고 해. (이 글은 이성모 기자님께 메시지로 허락을 받고 올리는 글이야. 누구든 어디든 마음껏 퍼나르고 옮겨도 되니,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알았으면 해.) 어느 날. 이성모 기자님의 페이스북에 하나의 게시물이 올라왔어. 간단하게 글을 요약하자면, 손흥민이 100호 골을 넣은 날. B라는 통신원이 영국 현지에서 손흥민을 직접 취재하고 인터뷰를 해서 기사를 올렸어. 하지만 이성모 기자님은 그 현장에 있었고, B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어. 허위로 기사를 작성한 거지. 그렇지만 B의 사기 행위는 이 뿐만이 아니었어. - 자신이 가지 않았음에도 현장에서 취재한 것처럼 기사를 내는 행위 - 스포츠 브랜드 행사 초청 자리에 무단으로 자신의 지인을 참석시켜 축구계 스타플레이어와 만나게 하는 행위 - 빅매치 때 한국 기자진들에게 할당된 기자석에 대학생이자 자신의 단체 일원인 일반인을 무단으로 들어가게 해 정작 취재를 해야 할 기자들이 들어가지 못했던 일 - 방금 경기를 마치고 나온 손흥민 선수를 자신들의 지인(어르신이라고 부르는)들에게 마음대로 데리고 가 인사시키는 행위(토트넘 관계자들이 그 당시 '저 사람이 쏘니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냐'라고 물어보며 황당해했다고 함) - 외신 기자들은 물론 토트넘 관계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공동 취재 구역에서, 본인의 지인들이 부탁한 손흥민 선수 유니폼을 들고 와 사인을 받아 나눠주고, 이런 행위를 SNS등에서 마치 선심 쓰듯 홍보하고 자신을 과시하는 행위 - 영국 축구 관계자에게 “대한민국 대표팀 OO선수가 내 조카다”라며 거짓말을 했던 행위(해당 관계자에게 이것이 사실이냐며 제보가 들어왔고, 확인 결과 팩트가 아닌 것으로 밝혀짐) - 본인 이외의 타 언론사에서 본인과 가까운 선수들과 인터뷰를 하려고 시도할시, 본인을 거친 후에 진행하도록 유도하고 뒤에서 조정하는 행위 (본인은 이 인터뷰를 '허락했다' 라고 말함) 정말 쓰면서도 어이가 없네. 어떻게 인터넷이 이렇게 발달한 세상에서 아직도 이런 일이 발생할 수가 있을까? 그것도 3년 동안이나. 이성모 기자님도 처음에 이런 행위들을 목격했을 때는 B에게 '절대로 거짓말하지 마라' 라고 경고했다고 해. 이성모 기자님은 '기자'라는 직업은 가장 중요한 건 '정확하고 정직한 정보 전달'이라는 본인의 가치관과 신념을 여러 번 기사 및 유투브, SNS를 통해 내비쳤기 때문에, B의 저런 행태들에 더욱 화가 났을 거야. 아울러 기자님은 3년 동안 저런 행태들을 지켜보면서 그 때 바로 폭로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오히려 대중들에게 사과를 했지. 그렇다면 이 B라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선수들, 관계자들을 무시하고 귀족처럼 행동할 수 있었나? 바로 이 사람. 이미 많은 커뮤니티 및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밝혔고, 이성모 기자님도 거론한 사람이야. 대체 어떤 힘이 있고 어떻게 인맥이 닿아있는 지 모르겠지만, 해외축구계에서 거의 '천룡인'에 가까운 힘을 내는 사람이야. 여러 사이트에서 나온 추측들 중에는 '목사'라는 지위가 한 몫 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 엄청난 인맥과 부를 축적해 그걸로 움직인다고 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팩트는 나도 잘 모르겠어. 내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여러 링크들을 타고 들어가서 사건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보는 게 더 빠를 거라 생각해서 링크 첨부해! https://bad-mouth.net/2020/02/19/info12/ https://badmouth2.net/2020/10/07/info7/ 내가 즐겨보던 페이지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다뤘어. 정리가 잘 된 글이니 읽어보면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야. https://youtu.be/FiJTO7czv5s 이 영상도 마찬가지. 내가 이 글에서 내 생각대로 글을 쓰지 않고, 관련 자료들을 첨부한 이유는. 나는 이성모 기자님을 존경하고, 이성모 기자님의 팬이야. 이성모 기자님이 '골닷컴'에 입사했을 때, 음악을 배우고 있던 내가 '골닷컴'에 입사지원서를 넣었을 정도로. 심지어 대학교 졸업 논문도 기자님의 기사와 번역한 책들을 갖고 썼을 정도야. 오히려 그렇기에 내가 직접 쓴 글에는 '감정'이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나는 내 글을 읽는 빙글러들이 '이번 사건'만큼은 정확한 팩트를 기반으로 판단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관심을 가져주고, 부조리와 불합리에 용기있게 홀로 맞선 어느 정직한 기자님에게 힘을 실어 주기를 바라. 정직하고 정확한 양질의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려고, '돈'보다는 '신념'을 위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기사를 쓰고, 유럽 각 국의 경기장을 발로 뛰면서 활동하는 이런 기자님이 '돈'과 '권력'에 무너진다면, 과연 이 대한민국 언론에 어떤 희망이 있을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건은 언론들에게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어. 그나마 엠스플 뉴스만이 적극적으로 사실을 알리려 하고 있고,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쉬쉬하는 분위기지.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현실이 그래. 일을 하지 못하고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은 '천룡인'인 김상열 목사가 아니라, 우리에게 '진실'을 밝혀 준 이성모 기자님이야. 아이러니하면서 정말 화가 나. 이 글을 보는 모든 친구들. 한 번만 관심을 가져주고 귀 기울여 줘. 그리고 주변 여러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알려 줘. 부탁이야. 축구를 좋아한다면, 손흥민, 박지성, 이강인 등 수많은 한국 선수들을 보고 한 번이라도 즐거웠다면. 우리 나라 최고의 기자님 중 한 분인 이성모 기자님이 다시 좋은 기사를 쓸 수 있게 관심 가져줘. https://youtu.be/A6IhuIYPvkk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에 기자님이 올린 글과 영상을 첨부하면서, 오늘의 [슛토리]. 여기서 마칠게. -------------------------------------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양질의 기사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참된 기자 중 한 명이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일로 펜을 손에서 놓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다음에는 좀 더 가볍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축구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optimic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재성을 노리는 클럽들 클라슫ㄷㄷ
토트넘과 레스터 시티를 포함한 몇몇 EPL 클럽들이 대한민국 대표팀의 이재성을 노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재성은 최근 전북 현대 모터스와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하며 유수의 유럽 클럽들의 레이더망에 걸렸습니다.. 스카우트들은 화요일에 있었던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8강전 상하이 상강 vs 전북 현대 경기에서 이적 시장이 닫히기 전에 이재성을 영입하기 위해 관찰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토트넘은 그의 성장을 계속해서 주시하는 상황이며 레스터 시티 역시 그의 영입을 통해 아시아에서 상업적인 이익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재성은 11월까지 전북 현대와 계약되어있고 위 두 클럽들은 자유 계약 상태에서 이재성의 영입 경쟁이 가열될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번에 영입할 수도 있습니다. 출처 http://www.teamtalk.com/news/leicester-spurs-track-south-korean-ace-lee 캬 이재성 진짜 대단하네요! 작년에 우승경쟁했던 두 팀의 관심을 받고 있다니 ㅠㅠㅠㅠ 확실히 포텐이 보였고 좋아하는 선수였는데 이적이 성사될 지 궁금하네요 ㄷㄷㄷ 전북도 이번시즌 무패 시즌을 보내고 있고 강력한 아챔 우승 경쟁팀들이 떨어진 상태라 아챔 욕심이 엄청날텐데 과연 이재성을 놔줄지도 궁금쓰
FM으로 선수 스카우팅 #24 헥토르 베예린
안녕하세요 스몰파티입니다 오늘은 @kimisu501님께서 문의하신 벵거 유치원 우등생 헥토르 베예린입니다! 올시즌 EPL의 라이징 스타를 꼽으라고 하면 그 중 하나로 베예린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베예린의 자리에는 프랑스 국가대표 드뷔쉬와 소튼에서 영입한 챔버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부상으로 이탈한 상황에서 베예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국적 : 스페인 나이 : 20살 키/몸무게 : 177/72 포지션 : 풀백 소속팀 : 아스날 축구팬이라면 올시즌 베예린의 스피드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항간에는 초반 30m는 베예린이 우사인 볼트보다 더 빠르다는 이야기도 있었죠. 그 정도로 베예린의 스피드는 현 축구계에서 본좌급입니다. 베예린은 수비보다는 공격에 재능이 출중한 선수입니다. 빠른 스피드가 가장 큰 무기이며 안정적인 드리블 스킬과 정신적인 능력이 이런 공격재능을 받쳐줍니다. 아직은 수비에 미숙한 부분이 있지만 나이가 어리기에 충분히 발전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베예린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스피드입니다. 그냥 좋은 것도 아니고 폭발적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월클 이상급의 스피드입니다. 또한 수비수로서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기복이 없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다만 여느 풀백들처럼 공중볼에서는 아직 미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점프력과 헤딩에서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않습니다. 또한 아직 어린 수비수이기 때문에 수비적인 능력, 수비위치 선정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경험만큼 어린 수비에게 좋은 보약은 없겠죠. 베예린의 포지션은 오른쪽 풀백입니다. 하지만 공격적인 재능이 좋은 선수기 때문에 오른쪽 라인에서는 어디서든 좋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거 첼시의 버틀란드를 떠올린다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베예린은 공격적인 풀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피드가 좋기때문에 공격시에도 이 점이 크게 작용합니다. 공격시에는 최전방 깊숙이까지 들어가 어시스트를 곧잘 올리기도 합니다. 베예린에 대해 알아야 할 5가지 1. 베예린은 바르셀로나 라 마시아 출신입니다. 라 마시아에서 그의 포지션은 오른쪽 윙이었습니다. 2. 베예린은 아스날에서 처음으로 수비에 대해 배웠습니다. 3. 아스날 멤버들 중 베예린은 월콧보다 더 빠른 선수로 등극했습니다. 베예린은 더 빨라지기 위해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4. 2013년 베예린은 왓포드로 임대를 떠났고 왓포드는 베예린을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5. 베예린은 소위 바르셀로나 DNA를 지닌 라 마시아들과는 달리 아스날에 계속해서 남고 싶다며 복귀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6. 한국에서 지어준 별명으로는 백예린, 예린이 등이 있습니다. 볼라시, 자하등 스피드가 빠른 윙들을 상대로 특히 강한 모습을 보여주네요. 확실히 스피드로 승부하는 윙어들은 베예린에겐 재물일 뿐이네요. 위치선정이 아쉽지 태클은 나름 좋은 것 같습니다! 몸 관리만 잘한다면 진짜 아스날은 10년 이상은 오른쪽 풀백 걱정없겠네요! ## 평소에 궁금했던 선수나 알고 싶은 선수가 있다면 댓글 달아주세요! 적극적으로 스카우팅 해보겠습니다^^ ## ## 선수 스카우팅을 받아보고 싶으신 분들은 댓글로 태그를 신청해주세요! ##
2017 K리그 챌린지 10R 베스트 골!
안녕하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챌린지 베스트 골을 들고 찾아온 Jongwon Lee 입니다 시즌 첫 평일 경기! 3~4일만에 치러진 경기라 선수들도 체력 부담이 상당했을 텐데요 이번 라운드에서는 무승부 경기가 하나도 없는 승부가 갈리는 경기가 나왔구요 서울이랜드만을 제외하면 나머지 경기는 홈팀이 승리를 거두었네요! 1위를 사수하는 중요한 대결에서 승리한 경남이 부산과 승점차를 더 벌리게 되었고 플옵권에서 잠시 내려와 있었던 부천은 승리를 거두며 다시 플옵권에 진입하게 됩니다 지난 라운드까지 최하위였던 서울 이랜드는 이번경기 승리로 7위까지 뛰어오르게 되었구요 성남은 탈꼴찌를 하자마자 3일만에 다시 최하위로 내려앉게 되었습니다 자 그럼 이번 10라운드에서 가장 멋졌던 3가지 득점 장면을 소개하겠습니다 ~! 1. 경남 vs 부산 배기종 (경남) Goal 1위와 2위간의 빅매치! 그 승자는 경남이 되었네요! 그 승부를 결정짓는 배기종의 결승골 입니다! 2. 안양 vs 대전 김민균 (안양) Goal 2:2 상황에서 팀의 역전을 안겨다주는 김민균의 환상 발리슛! 결승골의 주인공 김민균 선수는 경찰청 입대를 앞두고 치른 마지막 홈경기라고 하네요! 3. 아산 vs 수원FC 이현승(아산) Goal 팽팽했던 전반을 보내고 후반 시작과 동시에 터진 이현승의 멋진 중거리 슛! 이 득점이 결승득점이 됩니다! 영상으로도 확인해보세요 !!
[부산 여행]산복도로 르네상스, 까꼬막길을 걷다
‘이바구’는 부산 사투리로 ‘이야기’라는 뜻이다. 시대의 아픔을 피할 수 없었던 피란민들에게 이바구길은 삶의 터전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었다. 초량 이바구길은 비탈진 언덕배기 골목마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살아온 따뜻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부산역 앞에서 초량 이바구길을 향해 뚜벅이 여행을 시작한다. 산동네 이야기를 따라 걷다 보면, 부산의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굴곡진 역사를 담은 부산의 진정한 속살 이야기 초량 이바구길은 부산의 명물인 차이나타운 끝자락에 있는 옛 백제병원에서 시작해, 남선창고 터와 168계단, 김민부 전망대, 이바구 공작소를 지나 유치환 우체통과 까꼬막까지 약 2km에 걸쳐 이어져 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옛 백제병원이다. 초량 이바구길에는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는 근대 문화유산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인 ‘백제병원’은 1922년에 지어진 부산의 최초 개인종합병원으로 붉은 벽돌로 5층까지 탄탄하게 쌓아 올린 독특한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세련된 외관은 여행자들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내부도 색다르다. 낡은 층계와 속이 훤히 드러나는 벽면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한때 서양 의료진까지 갖춰 성업하는 병원이었으나, 악성 루머와 경영난이 겹쳐 관리권이 중국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중국집, 예식장 등 여러 차례 용도로 변경했지만, 설립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2014년에는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 64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카페로 운영되어 부산시민과 여행객들의 문화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백제병원 바로 뒤편에는 1900년에 세워진 부산 최초의 근대식 물류창고인 ‘남선창고 터’가 있다. 전국의 특산물을 배로 부산항까지 운송해 와서 경부선을 통해 각 지방으로 보내기 전에 보관하던 곳이었다. 함경도 명태가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어 명태고방으로 불리기로 했던 이곳은 ‘부산 토박이치고 남선창고 명태 눈알 안 빼먹은 사람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산 수산물 거래의 중심이었다. 당시 남선창고 상인들은 창고를 경영하면서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으며, 1920년대에 조선인 학교를 짓는 등 교육과 문화 사업을 후원하였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깊은 건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2009년 4월 소유주에 의해 철거되었다. 현재는 붉은 벽돌로 쌓은 한쪽 담벼락만 남아있고, 남선창고 자리에는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다. 천 평이 넘던 창고의 위용은 사라지고 없다. 남선창고의 흔적은 일부러 찾아야 겨우 볼 수 있는 너비 15m 정도의 담장이 다다. 마치 역사 책의 찢어진 한 페이지를 마주한 느낌을 준다. 의미있는 건축물을 둘러본 뒤 이바구길 이정표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담장 갤러리를 만난다. 담벼락에 옛 초량동의 정경 사진과 동구 출신 유명 작가들의 문학 작품들이 함께 전시된 공간으로 산복도로의 추억을 들려준다. 담장 갤러리를 지나면 연출가 이윤택, 가수 나훈아, 개그맨 이경규 등을 배출한 명물 초량 초등학교가 나온다. 맞은편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초량교회가 있다. 초량교회는 1893년 호주의 선교사 애덤슨에 의해 세워진 부산 최초의 교회다. 100년이 훨씬 넘는 이 교회는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진원지였다. 또한 독립운동가들의 항일민족운동과도 관련이 깊어, 한때 3·1 교회로도 불렸다. 예스러운 벽돌식 교회의 외관과 건물의 규모는 위풍당당한 초량교회의 오랜 역사를 나타낸다. 모진 세파를 이겨낸 눈물의 168계단 담벼락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초량 이바구길의 상징이자 하이라이트 명소인 ‘168 계단’을 만난다. 168계단은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까지 가장 빨리 내려갈 수 있는 지름길로, 까마득한 급경사의 계단 수가 168개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애환이 뿌리 깊이 서려있다. 부산항에 배가 들어오면 선착순으로 부두 일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무거운 지게를 지고 168계단을 부리나케 뛰어 내려가야 했다. 올해 5월부터 모노레일이 가동되고 있다. 주민과 여행객들을 배려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계단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도 크다. 밑에서부터 37번째 계단을 오른 후 샛길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시원한 부산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김민부 전망대’가 나온다. 김민부는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라고 시작하는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가이자 시인이다. 부산 동구 출신인 그를 기리는 이 전망대에서는 바다가 닿아있는 산동네의 정겨운 모습과 탁 트인 부산 앞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168계단을 힘차게 올라와 가파른 언덕 끝에 닿으면, 산복도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해 전시하는 이바구 공작소에 도착한다. 이곳에서는 산복도로에서 살아온 부산 사람들의 역사를 모아 2개월마다 새로운 전시를 열고 있다. 산복도로의 정점인 망양로를 따라 시원한 가로수 길을 10분 정도 걷다 보면, 청마 유치환을 기리는 ‘유치환 우체통’ 전망대를 만난다. 유치환은 동구에서 터를 잡아 살다가 생을 마감한 시인으로, 유치환우체통 전망대는 그의 예술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치됐다. 이곳에서 편지를 부치면 1년 뒤에 주소지로 배달 해준다. 마음담은 편지 한 통 띄워보는 것도 잊지 못할 여행을 만드는 방법 중 하나다. 부산항대교를 배경으로 빨간 우체통과 청마의 동상, 그의 대표시인 ‘행복’조형물이 나란히 서있다. 영도부터 부산역, 부산항 대교 전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반이 되면 더 환상적인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꼬불꼬불한 가파른 초량 이바구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격동의 세월을 살아왔던 열정적인 부산사람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등 끊임없이 겪어야 했던 모진 세파에서도 골목골목 빼곡하게 자리한 삶의 터전처럼 함께 의지하며 거칠게 살와왔을 그들의 세월이 짙게 물들어 있다. 부산의 진정한 속살을 느낄 수 있는 이곳, 초량 이바구길로 이번 주말 떠나보는 건 어떨까. 가는길 : 지하철 부산역 5번과 7번 출구 중간 지점에서 시작. 옛 백제병원부터 까꼬막까지 9개 주요 명소를 모두 방문할 경우 약 2시간 소요. ‘부산 원도심 스토리 투어’를 이용하면 ‘이야기 할매·할배’와 함께 알찬 걷기 여행을 할 수 있다. 무료. 부산 관광공사 홈페이지(http://www.bto.or.kr)에서 신청.
서울 이랜드 FC 레니의 아이들
레니의 아이들 – Rennie’s Fledglings’ 이란?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알렉스 퍼거슨 전 감독이 어릴 때부터 선발하여 키워낸 베컴, 긱스, 스콜스 같은 선수들이 맨유의 황금세대를 이끌면서 ‘퍼기(퍼거슨 감독의 애칭)의 아이들’ 이라는 별명을 가진 것에 빗대어 레니 감독이 선발한 14명의 선수들이 서울 이랜드 FC의 황금세대를 이끌어 가기를 바라며 지은 별칭입니다. 레니의 아이들, 14명의 서울 이랜드 FC 선수들을 지금 소개합니다. [서울 이랜드 FC 미드필더 김창욱 선수] “수비와 공격 가릴 것 없이 넓은 공간을 커버하면서 수비에 기여하는 것이 좋았다. 공격 시에 빠른 템포로 도전적인 패스를 연결하는 것도 맘에 들었다. 첫 시즌 주전급으로 바로 경기에 투입할 수 있는 수준이다.” 마틴 레니 감독은 김창욱의 플레이를 박지성같다며 위와 같이 평가했습니다. 김창욱은 이에 덧대 싸비나 이니에스타와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U리그 전 경기 풀타임 출전이라는 엄청난 체력을 보여준 김창욱 선수의 내년이 기대되네요. [서울 이랜드 FC 미드필더 오창현 선수] 마다가스카 애니메이션의 알렉스를 기억하시나요? 오창현 선수를 처음 봤을때 저는 묘한 싱크로율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요. 고향으로 돌아온 알렉스가 고향 아프리카를 구한 영웅이 되었듯 국내로 돌아온 오창현 선수가 서울 이랜드 FC를 이끄는 영웅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오창현 선수는 “레니 감독과의 통화에서 축구 감독이기 전에 좋은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특히 레니 감독이 나에게 장점을 이야기하면서 또 보완해야 할 점까지 이야기해주었는데 그런 점이 신뢰가 가고 나를 진심으로 존중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레니 감독은 나에게 선수로서 보완할 점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내년에 잘 보완해서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선수가 되어달라고 하면서 자기 팀의 일원이 되어줘서 고맙다고까지 말해 주었다. 좋은 감독을 만났으니 이제 내가 잘 하는 일만 남았다. 창단 팀은 처음 멤버들이 잘해야 한다. 다른 선수들과 힘을 합쳐 꼭 좋은 팀을 만들어 드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레니의 아이들로서 당찬 포부를 밝혔다네요. [서울 이랜드 FC 라이트백 전현재 선수] 전현재의 몸에는 두 개의 문신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아들로 태어나겠습니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 번 아들은 영원한 아들’입니다. “경기장에서 뛰는 1분 1초가 너무 소중하다. 난 항상 내 모든 것을 걸고 경기장에 선다.”며 성공이 너무 간절하다는 전현재 선수는 어려운 환경에서 나를 위해 지금까지 가난과 고달픔을 견디신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축구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전현재 선수는 “프로선수로 가장 큰 목표는 리버풀의 스티븐 제라드처럼 오래 한 팀에 남아 선수생활을 마치고 싶다. 이랜드에서 10년 넘게 뛰며 주장을 하고 은퇴하고 싶다”고 합니다. 레알마드리드의 수비수 마르셀로는 브라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난을 극복하고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했고, 무리뉴 감독을 만나면서 잠재력이 폭팔하면서 세계 최고의 윙백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마르셀로가 본인의 롤모델이라는 전현재 선수가 레니 감독을 만나 세계 최고의 윙백이 되기를 간절히 응원해봅니다. [서울 이랜드 FC 레프트백 김민제 선수] 김민제의 꿈은 독특합니다. 선수보다는 더 먼 미래를 보고 있죠. 그는 “이랜드에서 전설로 남고 싶다.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혹여 많이 뛰지 못하더라도 헌신하는 선수가 되겠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뛰어난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봤다. 전문 지도자가 되고 싶다”며 “그 시기가 가장 중요한 시기다. 나도 전문 육성 시스템이 아쉬웠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유소년 지도법을 전문적으로 배워 좋은 선수를 길러내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하네요. 청소년기 어려운 가정환경에 구타를 당하는 환경에서도 묵묵히 참아내며 강인한 성품을 지닌 김민제는 유소년 육성에 관심이 특히 많습니다.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레전드가 구단의 미래를 키워내는 즐거운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사진출처 : 서울 이랜드 FC 공식 페이스북)
일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성남FC 선수들의 선행
지난 7일부터 전지훈련지인 일본 구마모토로 떠난 성남FC 선수들. 그런데 이곳에서 발생한 일이 훈훈함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일본 축구 매체 게키사커는 9일 "K리그 성남FC의 미드필더 남준재와 김성준, 골키퍼 박준혁과 정산, 수비수인 윤영선 등 5명이 7일 길가에 쓰러진 여고생을 구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당시 5명의 성남 선수는 식사 후 구마모토 시내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 위 사진과 해당 사건은 무관 그때 횡단보도에서 한 여고생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습니다. 이를 목격한 성남 선수들은 여고생을 도왔습니다. 특히 일본 오사카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김성준이 일본어로 주변 주민들에게 구급차를 부를 것을 요청해 별 탈 없이 일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해당 소식은 9일 야후 포털 사이트에 톱 기사로 등재되는 한편 SNS 사용자 사이에서 2000여회 공유되며 널리 퍼졌습니다. 한 일본인 사용자는 차분하게 일본어로 주위에 도움을 요청했던 김성준에게 ‘지난 한해만 일본에서 활동을 했음에도 차분하게 일어를 사용하며 여학생을 구조해서 감사하다’는 훈훈한 내용의 댓글을 달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이용자는 ‘해당 여고생에게 운이 따랐다. 적극적으로 도와준 K-리그 선수들에게 감사하단 말을 전한다’고 적었습니다. 이번 선수들의 선행은 팬들과의 소통 및 투명한 구단운영을 통해 시민구단의 롤모델로 성장하는 목표를 설정한 성남FC에 호재가 될 전망입니다. 매일 국위선양을 입에 달고 사는 우리들이지만 진정한 국위선양은 거창한 업적보다 이런 선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여고생을 구한 성남FC 선수들 명단> 성남 골기퍼 박준혁, 정산, 수비수 윤영선, 미드필더 남준재, 김성준
[울산 레전드 특집] 04. 영원한 '밀레니엄 특급', 이천수
사람들에게 있어 팀에서 '레전드' 로 평가받는 선수들이 공통분모격으로 해당되는 기준이 '해당팀의 원클럽맨' 이라거나, 아니면 '최소 그 팀에서 오랫동안 뛴 선수' 로 클럽에서 얼만큼 뛰었는지를 중요시하게 여긴다. 물론 그 클럽에서 오랫동안 뛴 시간은 중요하다. 그만큼 클럽을 지지하는 이들과 오랫동안 추억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외나 국내나 레전드로 꼽는 선수들에게 '멘탈' 부분도 중요하게 보고 있다. 즉,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피치 위에서의 행동이라던지, 대중매체에 노출되는 모습이 프로의식이 투철해야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 또한 선수들에게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예외도 분명 존재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었던 에릭 칸토나, 바이에른 뮌헨의 주장출신인 슈테판 에펜부르크의 경우에는 각각 맨유와 바이에른에서 5시즌 이상 뛴 것도 아니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다혈질이며, 어느 순간에는 시한폭탄같은 분노를 피치에서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들은 두 클럽의 레전드 반열에 올라있으며 팀의 영광과 함께했다. 지금부터 언급하려는 4번째 울산의 레전드는 이것과는 정반대격인 스타일이다. 앞서 언급했던 유상철, 김현석, 김병지와 달리 오랫동안 울산에서 뛴 것도 아니며, 진중하거나 겸손한 스타일이 아닌, 화끈하면서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럼에도 이 선수는 울산 팬덤 내에서는 말그대로 '언터쳐블(Untouchable)' 이며, 2000년대 이후 울산 팬이 된 사람들이 울산에 빠져들게 만든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이쯤되면 눈치챘을 것이다. 바로 '밀레니엄 특급' 이자, '2000년대 K리그 대표 사기유닛' 으로 언급되는 이천수다. 이천수의 일대기를 지금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울산 레전드 특집 - 04. 영원한 '밀레니엄 특급', 이천수 1. 모든 이들로부터 주목받던 '밀레니엄 특급' 10대 소년, 그렇게 2002년 월드컵까지 종횡무진 이천수는 프로 데뷔하기 전부터 한반도 전역에서 주목받는 '슈퍼 탤런트' 였다. 그가 고등학생 신분일 당시인 1990년대 후반에 고교리그는 이천수가 다녔던 부평고가 주름잡고 있었고, 이천수와 더불어 최태욱-박용호를 '부평고 귀각 3인중' 이라 불렸다. 그들을 앞세운 부평고는 국내 대회를 제패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천수는 청소년대표팀에도 선발되는 영광을 누렸다. 1999년에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방가반두 컵에 청소년대표팀 주전으로 참가하였고, 태국 올림픽 대표팀을 7대2로 대파하였고(이천수가 무려 4골을 기록하였다), 브라질 청소년 대표팀까지 격파하며 결승까지 올라갔다. 비록 일본 실업리그 팀에게 2대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대회에서 통합 8골을 기록하면서 득점왕에 올라섰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이천수를 '밀레니엄 특급' 이라 불렀고, 그는 10대의 나이에도 벌써부터 전국의 축구팬들이 주목하는 유망주로 등극했다. 이천수는 곧바로 1년 뒤인 2000년, 시드니올림픽대표팀으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동시에 국가대표팀 데뷔까지 끝마쳤는데, 그 때 그의 나이 겨우 19세에 불과했다. 이천수는 반짝 스타로 끝나지 않고, 2년 뒤인 2002년 월드컵 본선에서도 당당히 엔트리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물론 비슷한 연령대였던 박지성처럼 주전선수로 월드컵 무대를 밟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대표팀이 치뤘던 모든 경기에 출장했다. 주로 그는 교체선수로 투입되곤 했는데, 득점이나 도움을 기록하진 않았지만 폭발력 있는 스피드와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진을 흔드는 역할을 하였고, 미국전에서 안정환이 동점골을 기록하고 쇼트트랙 세러모니를 할 때 오노 역할로 전파를 타기도 하였고, 이탈리아전에서는 최고 수비수로 평가받는 파올로 말디니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등 팬들 뇌리에도 상당히 강렬하게 남았다. 거스 히딩크가 이끌었던 한국대표팀은 '월드컵 4강' 이라는 한국축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대표팀 엔트리에 포함되었던 23인에 대한 해외 클럽들의 관심은 점점 높아져갔다. 월드컵 때 모두의 시선을 끌었던 박지성과 이영표는 히딩크의 부름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따라 네덜란드로 날아갔고, 차두리도 아버지인 차범근의 뒤를 이어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에 성공했으며, 이을용은 한국인 최초로 터키 수페르리가 진출을 하는 등 대표팀 선수들의 해외이적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그에 맞물려 이천수 또한 월드컵 직후 곧바로 해외이적을 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예상하였다(월드컵 시작하기 이전에 이천수는 2001년에도 유럽 진출할 기회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의 달리, 그는 해외보단 국내리그를 택했다. 이미 그는 월드컵이 시작하기 이전에 국내 프로팀 입단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2. 반시즌만에 K리그를 접수한 '사기 유닛' 으로 등극하다(2002 ~ 2003 여름) 2001년 말, 고려대 2학년에 재학중이던 이천수는 학교를 자퇴하고 울산과 계약하면서 프로 선수가 되었다. 계약금 3억원에 연봉 2000만원, 당시 신인선수가 받을 수 있는 역대 최고액을 갱신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계약에 붙어있는 특별조항들이다. 우선 울산은 이천수가 원할 때에는 언제든지 그의 해외 진출을 돕겠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의 이적료 전액을 이천수에게 지급하는 조건으로 당시 이적료의 10%를 선수에게 주는 관례와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뿐만 아니다. CF 광고시에도 이천수에게 전액 보장되었다. 예를 들어, 그가 이천수의 이적료가 10억원이고 CF 광고를 몇차례 촬영한다고 가정하면 그는 1년에 무려 20억원을 버는 구조인 셈이다. 사실 그는 모교였던 부평고를 졸업하고 프로팀에 입단하길 갈망했었고, 함께 뛰었던 최태욱은 졸업 후 안양 입단을 확정지었다. 집안형편도 어려웠던 상황이었기에, 그는 하루빨리 집안에 큰 힘을 보태기 위해 프로전향을 강력히 원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교 진학을 택하기 되었던 케이스였다. 그렇게 오매불망 프로선수를 꿈꿔왔던 이천수는 실질적인 프로데뷔는 2002년 여름이 되어서야 이뤄졌다. 그 전까지는 히딩크 감독 지도 하에 월드컵 이전까지 대표팀 선수들을 합숙식 해외 전지훈련이 연달아 소화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푸른색 유니폼을 입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반시즌간 공백이, 울산이나 이천수 양 쪽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후반기에 울산은 무시무시한 팀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그가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뛰는 순간, K리그 모든 클럽들은 그를 경계할 수 밖에 없었는데 2002년 시즌 그의 기록이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18경기 출전에 7골에 9도움으로 데뷔 첫 해에 K리그 도움왕과 신인상, 나아가 AFC 신인상까지 거머쥐었고, 그는 유상철과 함께 팀을 리그 준우승까지 끌어올렸다. 만약 울산이 성남을 제치고 2002년에 리그 챔피언에 올랐더라면 이천수가 올해의 선수상까지 거머쥘 뻔 했을 것이다. 데뷔 첫 시즌에 보여준 그의 능력 때문에 그의 별칭이 괜히 '밀레니엄 특급' 이 아니라는 것을 만천하에 각인시켜주었다. 울산에서의 두번째 시즌을 맞이하는 이천수, 그를 막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2003년 여름이 되기 전까지 이천수가 기록한 스탯은 18경기 출전 8골 6도움, 가히 "리그를 씹어먹는다" 는 표현의 적절한 예시였다. 그렇기에 이천수를 보는 상대팀은 그의 존재 자체가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2003년 5월 21일, 상대팀이 얼마나 이천수를 견제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던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당시 울산은 수원 원정을 왔던 상황이었고 후반 23분, 이천수는 수원 수비수와 충돌하다가 어깨가 빠져 한동안 피치 위에 누워있었다. 그 때, 수원 서포터즈는 이천수를 도발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 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던 이천수는 화가 나서 서포터즈를 향하여 가운데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며 응수했다. 이에 뒤질세라 수원 서포터즈는 '삽질개천수' 라는 플랜카드를 내걸며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다. 그 날 경기는 0대0 무승부로 마쳤고, 이천수는 이후 벌금 300만원 징계를 받았다. 수원 쪽에서 이천수를 도발했던 것은 그가 수원킬러로 유명할 정도로 수원전에 강한 면모를 보여왔다(지난 시즌 7골 중 2골은 수원이었고, 공교롭게도 데뷔무대도 빅버드였다). 그랬기에 그들은 이천수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천수는 참지 못하고 화답해버린 셈이다. 그 후, 이천수는 수원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었고 이천수가 울산 선수로 있는 동안 수원은 거의 이겨본 적이 없었다. 이 당시엔 서로가 몰랐을 것이다. 몇 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말이다. 3. 한국인 최초 프리메라리가 1호, 하지만 순탄치 않았던 스페인 생활(2003 여름 ~ 2005 여름) 워낙 국내무대를 손바닥 위를 내다보듯이 마음껏 휘젓고 있던 이천수, 그는 분명 국내에서 뛰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이천수에게 뜻하지 않는 손님이 스페인에서 찾아왔다. 그를 보러 멀리서 온 손님은 바로 레알 소시에다드. 소시에다드는 2002년 월드컵 때부터 줄곧 이천수의 모습을 지켜봤었고, 그의 K리그 활약상을 보고 확신을 가져 그를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기본 3년 계약에 이적료 42억원에 연봉 6억원, 의식주 부분 모든 것을 지원받게 되었다. 먼저 유럽으로 진출한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보다 더 파격적인 조건이었고, 울산 입단 시에 체결한 계약 조건이 발효되어 그는 이적료의 70%인 27억 3천만원을 챙기게 되었다. 성남과 리그 우승경쟁을 벌이고 있던 울산 입장에서는 전력상 상당한 타격이지만, 울산 성향이 선수들의 해외진출에는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를 쿨하게 보내주기로 결정했다. 그의 스페인 진출은 마치 1990년대 후반에 안정환이 이탈리아 무대로 진출하는 것과 맞먹을 만큼의 이슈를 몰고 왔다. 등번호 19번을 받은 이천수, 때마침 레알 소시에다드가 지난시즌 리그 2위를 기록해 챔피언스리그 무대까지 진출한 상황이었기에 그는 한국인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출전할 수 있는 영광까지 누렸다. 하지만 이천수는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나 저질렀는데 바로 "레알 마드리드로 진출하는 것이 꿈" 이라는 발언이었다. 레알 소시에다드는 레알 마드리드와 앙숙 관계였는데 이천수는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인터뷰 도중 실언을 해버린 것이다. 그가 입단할 당시 매우 환영했던 현지 팬들과 구단은 그의 인터뷰 때문에 소시에다드를 그저 "거쳐가는 클럽"으로 생각한다며 반감이 생겼다. 논란 속에서 레알 소시에다드 선수로서 라리가에 모습을 드러낸 이천수, 하지만 K리그에서 보여줬던 이천수 특유의 위풍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오히려 위축되어 있었다. 2003/04 시즌, 그는 총 13경기에 무득점으로 실망스럽게 시즌을 마쳤고, 팀 또한 중위권으로 추락하며 시즌을 마쳤다.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소집될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결국 그는 2004/05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에 2부리그에서 갓 승격된 팀인 누만시아로 임대가게 되었다. 당시 소시에다드에선 Non-EU 규정 때문에 카르핀, 니하트, 코바체비치 등에 밀려 출전기회가 다소 적었고, 반면 누만시아는 스쿼드가 빈약했기 때문에 다소 출전기회는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누만시아로 임대가서도 이천수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누만시아와의 임대가 끝난 후, 국내로 복귀할 준비를 하였다. 그의 유럽 진출기는 실패로 막을 내리고야 말았다. 4. 한국으로 돌아온 '사기 유닛' 울산의 제2 전성기를 만들다(2005 여름 ~ 2007 여름) 국내 복귀를 모색하던 이천수, 그에게 손길을 내밀었던 것은 바로 친정팀이었던 울산이었다. 이천수가 떠난 이후, 울산은 막강한 수비를 앞세워 최강방패의 면모를 보여줬지만, 경기의 흐름을 한순간에 바꾸거나 상대의 심장을 꿰뚫을 창끝이 무뎠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울산이 번번히 우승으로 가는 문턱 앞에서 좌절해야만 했고, 팀을 이끌던 김정남 감독의 발목을 잡고 있던 주요 고민거리이기도 했다. 김정남은 이 문제를 이천수로 해결하기로 결심한 셈이다. 그렇게 2005년 여름, 그는 호랑이굴로 컴백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으로 컴백할 때, 사람들은 과연 이천수가 스페인 생활동안 잃어버렸던 감각과 자신감을 재빠르게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고 보통 웬만한 선수들은 복귀하고 난 뒤에 적응하는 시간이 제법 필요했다. 이것은 부상에서 회복한 선수들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천수는 여론의 상식을 완전 뛰어넘어버렸다. 이천수를 다루는 법을 잘 알았던 김정남이었기에 그것이 가능했고, 그는 최대한 이천수를 최전방에 배치하면서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천수는 그에 보답하는 듯한 모습으로 반시즌 밖에 소화하지 않았음에도 무려 7골 5도움을 기록하면서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다. 플레이오프에서 선보였던 그의 모습은 실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플레이오프 3경기동안 무려 3골 2도움을 기록했고 그 중 챔피언결정전이었던 인천과의 홈&어웨이 경기 중 1차전에서 3골 1도움으로 혼자서 인천을 초전박살내는 말그대로 끝판왕의 아우라였다(이것이 후에 제작된 인천의 다큐멘터리인 '비상'에서도 고스란히 담겨졌다). 결국 울산은 이천수의 맹활약 덕분에 2005년 두번째 별을 달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이천수처럼 반시즌동안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건 이전에도 없었고, 오늘날까지도 찾아볼 수 없다. 리그 MVP와 베스트 11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이천수, 그 다음해인 2006년에도 선봉장에 선 그는 두고두고 회자될 이야기들을 여러가지 만들어냈다. 짧고 굵직한 족적이 바탕이 되어 그는 딕 아드보카트의 간택을 받아 독일월드컵에 출전하였다. 첫 경기인 토고전에서는 안정환이, 두번째 경기인 프랑스전에서는 박지성, 그리고 마지막 조별경기였던 스위스전에서는 심판판정 논란이 부각되긴 했지만, 이천수는 박지성에 버금가는 대표팀의 에이스 역할을 수행하였고, 토고전에서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며 4년 전 무득점의 한을 풀기도 했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기가 나오니 바로 A3 챔피언스컵 대회였는데, 울산은 한국 대표로 출전하였고, 감바 오사카와 제프 유나이티드, 그리고 다롄 스더와 풀 리그 형식으로 치뤘다. 특히 감바 오사카와의 경기가 이천수라는 이름을 아시아 전역에 떨치는 경기가 되었는데, 당시 이천수는 감기기운으로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교체출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전에 무려 해트트릭을 달성하면서 감바 오사카를 6대0으로 격파하는 선봉장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다롄 스더 경기에서도 2골을 쓸어담아 울산이 대회 우승을 하는 데 1등 공신으로 떠오르면서 득점왕과 MVP까지 싹쓸이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울산은 '아시아 깡패' 라는 별칭까지 탄생하였다. AFC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울산의 위용은 대단했다. 특히나 8강전이었던 알 샤밥(사우디)와의 홈 앤드 어웨이 경기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이야기로, 1차전에서 6대0 대승, 그리고 2차전에 1대0 승리로 통합 7대0 승리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선사하였다. 이천수는 역시나 이 경기에서도 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비록 4강전인 전북과의 두 차례 경기에서 통합 6대4로 역전패를 당하긴 했으나, 이천수의 역량이 가장 만개하던 시기가 아니었나하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2007년 2월, 대표팀으로 차출되어 그리스전에서 프리킥 골을 성공시켜 팀의 승리를 이끌었고 그 골은 후에 팬들이 선정한 아름다운 골이 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천수는 못다 핀 꿈이었던 유럽 진출을 다시 한 번 노크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스페인이 아닌 네덜란드 무대였고, 송종국이 뛰었던 페예노로트였고, 그 해 8월에 이적완료하였다. 5. 날개가 꺾인 비호(飛虎), 악마의 재능으로 불리게 되다(2007 여름 ~ 2012) 페예노르트에서 등번호까지 부여받은 이천수, 하지만 그는 페예노르트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새 팀에 적응해야할 시기에 한국에서 소송문제로 심적으로 묶여있는 상태였고, 이천수가 여기에 신경쓰다보니 페예노르트에 제대로 녹아들 리가 없었다. 그의 부진한 모습에 네덜란드 현지 언론들과 팀에서는 당연히 그를 곱게 보질 않았다. 결국 2008년 7월, 이천수는 한시즌만에 페예노르트를 떠나 다른 팀으로 임대가야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그는 K리그 무대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울산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그를 가장 껄끄러워했던 수원이 당시 차범근 감독의 요청 하에 그를 임대영입한 것이다. 가장 싫어하는 선수 중 한 명이 빅버드에서 뛰게 되었으니 당시 수원팬들은 말그대로 '충격' 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이천수가 부진과 부상으로 3경기 밖에 소화하지 못한데다가 팀 내 항명사건까지 일으키니 그를 증오 수준으로 배척하였다. 항명 도중 팀 내 동료 폭행을 저질러으니 차범근 또한 억누르던 분노를 참지 않고, 그를 임의탈퇴로 공시해버렸다. 임의탈퇴 처분을 받게 된다는 것은, 사실상 이천수는 더이상 K리그에서 뛸 수 없다는 소리나 다름없었고, 그의 선수생활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위기에 봉착했던 이천수를 구원해준 인물은 바로 과거 2002년 월드컵 때 함께했던 전남의 박항서 감독이었고, 극적으로 임의탈퇴까지 가진 않았다. 이천수는 페예노르트 소속으로 전남으로 임대가는 모양새로 광양에 둥지를 틀었다. 7경기 4골을 기록하는 등 기량은 서서히 예전의 모습으로 찾아나가는 듯 했지만, 다른 문제가 이천수의 발목을 잡았다. 쉽게 설명하면, 2009년 2월, 이천수가 전남에서 뛰기 직전에 선수 본인 동의 없이 에이전트와 전남이 말도 안되는 계약을 체결했었다. 그러던 와중, 원소속팀인 페예노르트는 그 해 여름 사우디의 알 나스르로 이천수를 이적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천수 또한 알 나스르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찰나였다. 이 사실을 안 전남은 이천수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껴 그의 이적에 제동을 걸려고 했었고, 이천수는 자신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으려고 하는 전남을 떠나고 싶어했다. 그러던 와중에 또 한 번 그는 코치스태프들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고, 공식적인 인터뷰에서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면서 전남의 뒤통수를 쳤다. 전남은 이에 이천수를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하였고, 연맹은 그것을 받아들여 그를 임의탈퇴로 처분하였다. 사실 이 문제는, 양 측의 잘못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전남은 선수가 알지 못하게 어떻게 해서든 갑의 입장에 서기 위해 치졸한 모습을 이적과정에서 보여주었고, 이천수는 전남에서 뛸 때에도 적잖게 사건사고를 일으킨 데다가 떠나는 과정까지도 트러블을 만들어 모든 이의 비난을 샀던 것이다. 모든 논란을 만들고 사우디로 떠났던 이천수, 알 나스르 선수로서의 삶도 그렇지 평탄치 못했다. 알 나스르에서 15경기 출장하여 3골을 기록하며 나쁘진 않았으나, 문제는 구단에서 급여를 제 기한에 맞춰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금 체불이 길어지자, 이천수는 이 명목 하에 무단 이탈하였고, 다음 행선지는 J리그의 오미야로 정했다. 이천수는 오미야에서 연습생 신분부터 시작하는, 왕년의 스타플레이어로 군림했었던 시절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2011년 말 계약이 종료되면서 그는 무적신세가 되어 새로운 팀을 알아봐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듬해 호주 A리그의 어느 클럽에서 오퍼가 왔지만, 이천수는 거절했다. 그는 K리그로 돌아가길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타향살이가 힘들었던지, 이천수의 마음 한 켠에는 'K리그에 복귀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국내무대에서 뛰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있는데, 바로 전남과의 틀어진 관계를 되돌려놓아야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가 간단해보이면서도 쉽지 않았다. 비록 전남 또한 잘못한 점은 있지만, 이천수가 전남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부분 등이 합리화시킬 수는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고, 전남의 공식 입장 또한 "진정성이 부족하다" 고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실제로 전남 입장에선 일종의 배신감이 느껴졌던 건 사실이다). 그러던 2012년 10월, 이천수는 직접 광양까지 내려가 전남의 홈경기를 보러온 관중들 한 명 한 명 대상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것이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천수는 이후에도 본인이 용서받을 때까지 홈경기가 열리는 날마다 와서 사과하겠다고 말했으나, 축구인 상당수는 그의 진정성을 여전히 의심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2013년 2월 5일, 프로축구연맹에서 그의 임의탈퇴 신분을 풀어주었고, 22일에는 전남도 그를 풀어주기로 확정지은 것이다. 드디어 이천수의 고난의 연속이 끝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6.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마음으로, 고향팀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2013 ~ 2015) 극적으로 K리그로 복귀할 수 있었던 이천수, 전남이 임의탈퇴를 풀어주기로 한 소식과 동시에 그의 입단소식이 보도되었다. 팀은 자신의 고향팀인 인천이었고, 등번호는 10번을 받았다. 4년만의 복귀라 그런지, 이천수는 절주선언에 이어 오로지 가족과 축구에만 전념하겠다고 남다른 각오를 밝혔다. 1년동안 무적신세였던 탓이 예전같은 기량을 보여주진 못했으나, 당시 팀의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이 절실히 필요했던 인천 입장에서는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팀 전력에 충분히 보탬이 되었다. 그러던 4월 16일, 전남과의 홈경기에서 선발로 풀타임 소화한 후에 전남 서포터들이 포진하고 있던 원정석으로 다가가 깍듯이 인사하였고, 이에 박수로 화답하는 등 서로간의 앙금이 완전히 풀렸다. 그 후 4일 뒤에 전북과의 홈경기에서 역전골을 어시스트하면서 1,428일만에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급작스런 현역복귀로 몸이 적응안되었는지 발목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적도 있지만, K리그 복귀 후 첫시즌은 19경기 2골 5도움으로 팀 성적을 고려하면 제법 괜찮은 스탯이었다. 그리고 이천수는 연봉 삭감까지 감수하면서 인천과 2015년까지 함께하며 인천과의 의리를 과시함과 동시에 팀 내 최고참으로서 후배들에게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2000년대를 풍미하던 사기유닛도 나이에는 장사 없었고, 예전과 달리 날카로움과 체력이 떨어지고 있는데다가 부상 빈도 또한 높아져서 출전 횟수조차 점점 줄어들었다. 부상으로 인천이 FA컵 결승전에 진출하던 모습을 관중석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2015년 11월 5일 JTBC 뉴스룸을 통해 은퇴를 선언했고, 11월 28일인 마지막 홈경기는 부상으로 인해서 은퇴식으로 대체하여 그의 파란만장했던 선수로서의 생활도 비로소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는 부분 중 하나가, 이천수는 "게으른 천재", 또는 "트러블메이커" 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이는 적합하지 않다. 그가 경기 때마다 번뜩이는 모습이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그는 승부욕이 강해서 그 어떤 누구에게도 지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열심히 노력하는 악바리 스타일이며 이천수 본인 또한 악바리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도 이 부분 때문이다. 트러블메이커라고 표현하는 부분에서도 조금 억울한 것이, 해외 사례만 하더라도 이천수보다도 더 심하면 심한 선수는 끝도 없다. 호마리우, 안토니오 카사노, 조이 바튼, 아드리아노, 마리오 발로텔리, 하르템 벤아르파 등 피치 밖에서 더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으면서도 잘만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국내에서 이천수 같은 유형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을 뿐이다). 그가 비록 언론에서 보여줬던 인터뷰 방식 등이 경솔했던 것은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이천수의 업적이나 기량 등을 폄하하는 것은 금지했으면 하는 바다. 인천에서 마지막 선수생활을 통해 개과천선 했으니 이만하면 훈훈한 결말이다. 은퇴식을 치르고 나서 인천 서포터즈는 "풍운아를 품은 우리가 행운아" 라는 걸개를 내걸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플레이어를 배웅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쓰고 싶었던 것은 울산 쪽이 아니었나 싶다. 이천수의 전성기는 곧 울산의 전성기 중 하나로 꼽힐만큼 일종의 공동운명체로 함께 해왔다. 김정남 감독이 이천수에게 모든 걸 맡기듯이, 울산에게 있어서 이천수는 "쟤만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이천수는 무언가 해줄 것이다." 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고, 이천수는 언제나 기대에 부응하여 결국 울산을 리그 챔피언에 올려놓은 후에 아시아 깡패라는 칭호까지 선사했다. 실제로 이천수가 임의탈퇴 신분으로 K리그에서 한동안 떠나있을 때에도 남들은 다 적으로 돌아서도 항상 그의 편에 서있었던 것은 울산 팬들이었고, 그가 다른 유니폼을 입고 오더라도 집 나갔던 자식이 돌아온 것마냥 환호해주곤 했다(심지어 울산으로 돌아오라는 걸개도 걸렸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JTBC 해설위원으로 종종 울산 문수경기장을 방문할 때마다 울산 팬들로부터 이천수콜을 받는다. 누가 뭐래도 그는 울산의 또 하나의 레전드였고, 영원한 '밀레니엄 특급', 'K리그 사기 유닛' 이다. 두고두고 기억하리, 이.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