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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을 이끈 스티브 잡스의 정성 10가지

1. '작은 것에도 완벽하라'(Go for perfect)
잡스는 작은 것도 세세히 챙겼다.
아이패드가 출시하기 하루 전에도 모든 애플 직원들은 헤드폰 잭을 교체하느라 밤을 새웠다.
잡스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완벽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2. '전문가를 활용하라'(Tap the experts)
잡스는 루브르 박물관을 설계했던 유명한 건축가 아이 엠 페이(I.M pei)를 영입해 '넥스트(NeXT)'의 디자인을 만들게 했다.
또 그는 의류 기업 갭(GAP)의 대표이자 의류계의 대부격인 미키 드레그슬러를 애플의 이사로 영입하기도 했다.
3. '냉혹하라'(Be ruthless)
잡스는 자신이 내놓은 제품을 한단계 넘어설 때마다 뿌듯해했다.
그는 최초의 PDA인 팜-파일럿을 어렵게 개발한 뒤, 언젠가는 이것을 뛰어넘는 폰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잡스의 이런 자유로운 발상은 아이패드를 발전시켰다.
4. '소수 의견에 연연하지 마라'(Shun focus group)
잡스는 생전에 사람들은 직접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테스트제품이 나오면 집에 들고가 몇 달 동안이나 썼다.

5. '연구를 멈추지 말라'(Never stop studying)
애플 브로셔의 초기 다자인 때, 잡스는 일본 소니가 사용중인 브로셔의 폰트와 레이아웃, 심지어는 종이의 무게까지 분석했다.

6. '단순화시켜라'(Simplify)
잡스의 다자인 철학은 '끊임없이 하나로 단순화시켜라'였다.
그 때문에 그는 아이팟의 다자인을 계획할 때도 디자이너들에게 전원을 제외하고는 모든 버튼을 없애도록 했다.
아이폰의 '원형 스크롤 휠'은 이렇게 탄생됐다.
7. '비밀을 지켜라'(Keep your secrets)
잡스는 직원들에게 아무에게도 애플에 대해서 얘기하지 못하도록 했다.
직원들은 정말 필요할 때에만 얘기하도록 했다.
이같은 잡스의 '비밀전략'은 소비자의 흥미를 유발시켰다.
그의 신제품 발표는 항상 놀라웠고, 그 결과 항상 기사의 헤드라인을 차지했다.
8. '팀은 작게 하라'(Keep teams small)
처음 매킨토시를 개발했던 팀은 100명으로 조직됐다.
만약 101번째 사람을 고용했다면, 누군가는 이 사람을 위해 나가야 했다.
그리고 잡스는 이러한 자신의 직원 100명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다녔다.
9. '채찍보다는 당근을 많이 줘라'(Use more carrot than stick)
잡스는 무서운 경영자였다.
하지만 그의 카리스마는 가장 큰 힘의 근간이기도 했다.
잡스의 열정에 매킨토시 팀은 1주일에 90시간을 일을 해야했고, 이것은 결국 매킨토시라는 결과물로 이어졌다.
10. '견본품도 정성껏 만들어라'(Prototype to the extreme)
잡스는 견본품마저 성심 성의껏 만들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그리고 애플 스토어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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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뉴스 더#] 중기 가겠다는 구직자들, 있는 사람도 내보내는 중기들
장기화된 코로나19 사태, 건강과 형편 걱정을 비롯해 일상 전반에 뿌리내린 심리적 위축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구직자들도 마찬가지. 가뜩이나 좁은 취업 구멍을 바이러스가 막아버린 형국, 코로나 이전보다 눈높이를 낮출 수밖에 없다. 최근 취업포털 커리어가 구직자 374명에게 물어본 결과, 중소기업에 취직해 경력을 쌓겠다는 답변은 63.6%로 나타났다. 대기업·공공기관·공기업 우선이라는 응답(13.1%)을 압도한 것. 2년 전 실시된 조사에서 25.4%만이 ‘첫 직장으로 중견·강소·중소기업에 입사하고 싶다’고 답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커리어 측은 “코로나 여파로 구직자들의 취업 선호 기업군이 변했다”고 말한다. 목표치가 조금 더 현실에 맞게 조정되는 모양새. 워낙 불안한 시기인 만큼 확률이 떨어지는 특정 기업보다는 일단 일자리를 확보하는 걸 1차 목적지로 삼게 된 셈이다. 실제로 국내 10대 그룹사 중 올 상반기 신입 공채를 실시한 곳은 절반에 그치기도 했다. # 이건 중기 입장도 들어봐야 그렇다면 중소기업은 어떨까? 넘쳐나는 예비 인재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을까? 중소기업중앙회가 5월 20일부터 3일간 국내 300개 중소기업(제조업 135개, 비제조업 165개)을 대상으로 ‘코로나19 관련 중소기업 인력수급 실태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응답 기업의 15.3%는 자사의 고용인력이 과다하다고 판단했고, 7.7%만이 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 회사에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인식보다 ‘일에 비해 사람이 많다’는 인식이 2배나 더 되는 것. 과하다고 여기는 곳들의 95.7%는 코로나에 따른 일감축소가 그 이유라는 데 동의했고, 28.3%는 계절적 요인에 의한 단기 일감축소도 꼽았다. 수년간 회사의 성장이 정체됐기 때문이라는 답변은 17.4%였다. 많다는 생각이 생각에만 그치지는 않을 터. 실제로 고용인력이 과다하다고 응답한 기업 10개 중 약 3곳은 코로나 발생 이후 감축을 이미 시작했으며, 평균 10.2명을 줄였다고 답했다. 제조업종은 평균 20.3명을 줄여 비제조업(7.2명)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구직자들은 목표를 현실에 맞게 재조정한다고 했지만, 정작 중소기업들은 이렇듯 손사래를 치는 형국. 인력이 과하다고 답한 곳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나머지, 즉 인력이 부족하거나 둘 다 아닌 보통이라고 말한 기업 중에서도 올해 고용계획이 있는 곳은 18.5%에 그쳤다. 예상 인원도 업체당 평균 3.3명에 불과했다. 300개 중소기업 중 81.5%는 사람을 줄이면 줄였지 더 뽑을 계획은 없는 셈이다. 코로나19라는 초대형 악재가 지금 당장은 물론 근미래에 대한 불안감마저 증폭시켰기 때문일 터. 실제로 중소, 특히 제조기업들의 체감경기는 역대 최악 수준이다. 한국은행의 5월 27일 발표에 따르면, 국내 중소 제조기업의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전월보다 4포인트가 내려간 41포인트로 나타났다. 100보다 높으면 경기 호전을, 반대의 경우 악화를 예상하는 기업이 많다는 이 수치에서 100은커녕 50에도 못 미친 것. 이는 2003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최저치다. 한은은 “중소 및 내수기업뿐만이 아닌 대기업과 수출기업의 BSI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라며, “대기업·수출기업이 글로벌 공급망 차질로 수출 부진을 겪는 가운데 중소·내수기업도 제품 납품 차질 등 영업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은 이름처럼 산업 생태계든 우리 국민의 일자리 체계든 딱 허리에 자리 잡고 있다. 하나둘 무너지면 이 같은 구조는 점차 기형적으로 쪼그라들 테고, 이는 여러 형태의 시련이 돼 국민 각각을 괴롭힐 것이다.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중기중앙회에 따르면 현재 중소기업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지원책은 피해 기업에 대한 특별보증 및 지원 확대, 고용유지지원금 상향 지원 확대, 소득세 및 법인세율 인하 등이다. 관건은 역시 돈, 그리고 절차상의 효율성인 셈이다. 자본시장연구원 신경희 연구원은 최근 보고서 ‘코로나19 관련 해외의 중소기업(SMEs) 지원정책 동향’을 통해 “정부도 피해 기업 지원을 위해 대출금리 인하, 정책자금 보증과 대출업무 실행, 고용유지지원금 확대 등 여러 정책을 내놓는 중”이면서도, “다만 이를 모르거나 체감하지 못하는 업체가 다수”라고 지적했다. 신청한 자금이 지연돼 필요할 때 지원받지 못하거나, 복잡한 절차와 서류로 신청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자격 없는 이가 허위로 지원금을 가로채는 일도 우려되기는 마찬가지다. 이에 관해 신 연구원은 “일시적 미봉책이 아닌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이 이뤄지도록 업종별 세밀한 정책, 간편 신청 같은 실효성 있는 지원책이 요구된다”고 조언했다. 정부의 관심이 없는 건 아니다. 현재 기업은행·중소기업 진흥공단·신용보증기금 등이 특별자금을 운영하고 있으며,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에서도 관련 프로그램을 시행 중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귀도 열어놓은 편이다. 단, 상처가 난 딱 부위에 적절한 시기에 약을 발라줄 수 있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 ‘무엇을’ 지원할지와 더불어 ‘어떻게’ 지원할지가 동시에 고민돼야 한다. 기업의 유형을, 어려움의 유형을 조금 더 잘게 쪼개되 ‘신청-지원’이 양방향으로 신속히 이뤄질 수 있도록, 저마다의 최적화된 경로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 다시 한 번, 행정은 타이밍의 예술이다. 글·구성 : 이성인 기자 silee@ 그래픽 : 홍연택 기자 ythong@ <ⓒ 온라인 경제미디어 뉴스웨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나본 관중 (羅本 貫中) A.D.1330? ~ 1400
여기서 다뤘거나 다룰 인물들 중 예전에 다룬, "유일한" 생존인물 정대리 외에 사망인물들 중 가장 최근(?) 인물이자, 유구한 중국역사 속 찰나에 불과하며 의미도 그닥인 삼국시대를 지금의 메이져 에이지가 되는데 큰 공 세운 삼대장 중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인 "나관중" 을 한 번 다뤄 보고자 한다. (삼대장 중 둘은 정사의 진수와 그 정사에 주석자 배송지) 처음 제목보고 '응? 나본이 뭐야? 백종원의 프랜차이즈?' 하시는 분도 계실 수 있겠으나 삼국지 속 인물들이 이름 외에 자(字)가 있듯, 나관중의 본명은 "나본"이고 관중은 그의 "자"인데 이거 모르는 분 많으실 듯ㅎㅎ(이하 나관중) 사실, 이 칼럼연재를 시작하며 어찌보면 정사의 저자인 진수와 함께 가장 먼저 다뤘어야 도리였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치고 의외로 기록이 그닥 많지 않은편. 일단 이 사람의 사망연도는 딱 떨어지는 A.D. 1400이나 출생연도는 추정치가 있을뿐 정확하진 않고 고향도 지금 중국 산시성의 타이위안이란 곳쯤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긴 하지만 명확한 고향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게 왜 그러냐? 지금이야 삼국지가 동아시아 최고의 히스토릭 미디어떡밥이지만 나관중 생전에는 서점이 있냐, 도서관이 있냐, 스마트폰으로 검색이 가능했냐.... 인쇄라는 개념도 없어, 책 한 권이 두 권 되려면 누가 붓 가져오고 벼루에 먹 갈아 베껴적어야 하다보니 인기를 얻으며 널리 퍼지는데 막대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삼국지연의가 그 넓은, 그러나 유통망이나 인프라가 개떡인 수백 년전 중국일대에서 인기를 끌쯤, 이미 나관중은 천국에서 삼국지속 실제인물들을 만난지도 한참 이후... 게다가 지금 현재의 중국조차 인적사항등록이 누락된 인간이 있는 마당에, 당시 명나라 초기의 일반인의 기록이 세세히 있을리가 없다. 지금에나 그런 베스트셀러작가가 명망높지... 당시의 명은 당연히 관직에 나가 벼슬살이 하는게 갑이였고 그 이하 여타 직군들은 별 큰 인기나 선망직종이 아니였다. 어렸을적에 어떤 어린이였고 소년이였는지는 모르겠고, 여튼 머리 크고는 위 언급대로 벼슬아치가 최고였던 시절이다보니 나관중 또한, 명나라의 인싸가 되기 위해 과거에 응시를 했었나본데, 낙방했다.....;;;; 심지어 세 차례 이상 내리 낙방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 과거는 지금 한국의 공무원 시험 따위와는 댈게 아닌 극악의 난이도여서 벼락치기 좀 했다고 붙는 그런건 아니였어서 수년간 공부했어도 수 차례 물 먹는 사람들이 많은건 사실이였지만, 왠지 뭔가 천재작가 이미지의 나관중조차 여러 번 불합격한건 의외다. 이건 나관중 개인에게는 불행이였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에겐 다행인거지..ㅎ 벼슬 나갔으면 삼국지같은거 썼겠나. 게다가 당시 명의 천자였던 "홍무제"는 뭐가 불만인지 수틀리면 벼슬아치들을 죽여대던 때여서 홍무제손에 킬된 벼슬아치가 10,000 명이 넘었다하니 어쩌면 나관중 본인에게도 잘된 걸 수도~ 뒤에 이야기들 보면 느끼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양반이 뭐가 딸려서라기보다 그냥 공부머리가 없었지 싶다. 정사를 꿰고 그 무수한 민담들을 캐내서 집대성하고 스토리텔링을 해낸 그의 재능은 오로지 포커스가 삼국지에 올인 되었을 뿐이였다. 과거에 계속 떨어지기를 여러 번... 어느 시점부터는 그냥 벼슬에 대한 미련 버리고 부친이 하시던 소금장사를 따라다니며 장사를 도왔는데, 공부도 못 하는 주제에, 장사도 못 했고 장사에 별 도움이 안되다보니 아버지한테 한 소리 들었는지, 나중에는 장사를 따라다니는 것도 그만뒀다.ㅋㅋㅋ 이렇게 원나라(그 시절은 아직 원)의 잉여놈이던 나관중은 동네 찻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당시의 찻집은 옛날 프랑스 파리의 카페와 비슷한... 문학도나 학자들, 혹은 예능인들이 드나들며 의견을 나누던 그런 분위기였다고 보면 된다.(술 안팔았다) 그렇게 드나들던 찻집에서 거의 매일 했던것이 "삼국희곡(三國戱曲)" 이란 공연인데, 이게 뭐냐면 몇 명의 화자가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연기와 나레이션 섞어서 간단한 연극 비슷하게 만담처럼 진행하는 요즘말로 스탠딩공연같은건데 나관중은 여기에 빠져서 이걸 보려고 싸지도 않은 찻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래도 당시에 소금집 아들이면 나름 먹고사는 집이니 가능했던 듯..ㅎ 이 때 이 찻집의 삼국희곡은 한 잉여의 삶을 바꾸게 된다. 이후 단순 삼국희곡덕후에서 끝난게 아니라, 관련 사료들을 모으고 연관 주석과 민담 및 구전설화들까지 모으게 되는데.. 당시에 이짓은 그야말로 엄청난게, 이때 인터넷이 있나, 도서관이 있나 이런저런 자료들과 이야기들을 모으려면 그야말로 발로 뛰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당시 교통이 좋기를 해.. 심지어 "중국"에서... 여튼 덕중의 덕은 양덕이 아닌 중덕이란걸 보여준 나관중은 이렇게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소설을 쓰고 소설 제목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 바로 우리가 삼국지연의라는 그 소설이다. 마치 원래는 연극영화과 전공이였고 관련하여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다 역사에 매료되어 한국사 강사가 된 설민석 선생님과 엇비슷하다. 자료를 취합하는 나관중의 정성과 열의는 실로 대단한건데, 지금같은 정보화시대에서 알기 쉽지 않은 자료나 정보가 많거늘, 그때는 위에서 말했듯 아무런 인프라도 시스템도 없고 심지어 삼국시대는 나관중이 살던 원말~명초때 당시 기준으로도 1,000년전 역사였으니 이에 대한 자료조사는 맨땅에 헤딩이였다. 그러나 소금집 잉여아들은 이 모든걸 해냈다....! 헌데 당시 그런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해 자료수집 하다보니 아무래도 칼같이 정확하고 공정한 기록들만 채집하는건 한계가 있었으며 별 말같잖은 소리나 뜬금없는 자료들도 많아 나관중은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이다.. 게다가 시대상황 따라 인기인물도 바뀌고 그러다보면 아무래도 인기따라 민담이나 에피소드들도 늘고 줄고가 생겼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관중은 삼국지를 기반한 판타지를 쓰려는게 아닌 정말 역사속 사실을 모티베이션한 모큐멘터리급의 작품을 추구했기에 최대한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끔, 설령 쏠림이 발생해도 티나지 않게끔 매끄럽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오늘날에도 한중일 삼국에는 아직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속 이야기가 모두 팩트라고 잘못 아는 이들이 상당수 있고 무엇이 픽션이고 어디부터 리얼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워 하는 수작이 나온 것! 이 또한 삼국지연의가 명작반열에 오르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게 아닌가 싶다. 쉽게 말해, 영화로 치면 나관중은 '운장포터와 도술사의 돌', 이런 판타지나 '삼국불패 -촉한웅사-' 같은 무협물이 아닌 '오호대장군 : 적벽워' 같은 허무맹랑한듯 리얼하게 그려낸 덕에 더 많은 이들이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나관중의 취향을 알 수 있다. 일단 나관중은 지금 표현으로 치면 "마초스러움"을 선호했던거 같다. 서량의 그 마초말고 터프하고 와일드한 전형적 남성미의 그 마초이즘을 말한다. 그 이유는 일단 삼국시대는 물론, 나관중이 생존한 원나라 말 ~ 명나라 초에도 전투시에 그 전투지휘를 일임한 상장이나 총지휘관이 가장 선두에서 지휘하거나 심지어 적장과 1vs1 맞다이를 붙는건 확률이 0에 수렴했음에도 나관중은 그런 네임드간의 일기토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애초에 저런 방식의 전투가 없다시피했기에 당시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언뜻 생각도 못했을 개념인데 저리 도입한걸 보면 소설적 재미추구는 물론, "장수는 싸워야 장수!" 라는 그당시 기준의 마초이즘적 증거가 아닐지.... 또 한가지로, 삼국지연의내에서 장수들의 최후를 그린 부분들이 실제 역사와 다른 경우들이 꽤 있는데 대체로 병사하거나 혹은 죽음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이들이 연의에서 장렬히 전장에서 간지뿜으며 전사하는 걸로 각색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이질로 앓다 병사한 감녕, 역시 병을 앓다 결국 병상에서 숨 거뒀던 서황, 역시 고열로 인해 헛소리까지 했다는 학소, 역시 죽음 과정에 대한 별 기록이 없던 황충 등... 아참 태사자도 있구나 여러 장수들이 누워서 천장을 보다 저승을 갔음에도 나관중은 이들을 명예롭게 전장에서 요단강을 건넌 것으로 그려내줬다.ㅎ 나관중의 또 다른 취향은 "물량공세" 적벽대전 당시 조조군의 83만명. 관도대전 당시 원소군과 이릉대전 당시 촉-무릉만 연합군 70만명. 촉의 남만정벌 당시 50만명 등.... 지금의 중국으로야 가능해도 당시 빈번한 전란과 자연재해 및 극악의 치안상태와 기아 등으로 전 중국의 인구가 지금의 20분의 1수준에.. 제대로 된 인구통계도 못 내며 심지어 대규모 인원이 필요한 농경사회였던 당시로는 엄두도 못낼 규모의 대병력이 마주치는 이런 물량공세는 역시 나관중이 전쟁을 더욱 흥미롭게 표현키 위한 장치였다. 삼국지연의와 함께 "중국의 4대 기서" 라 불려지는 명작들이 있는데 나머지 세 작품은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 유교마인드 뿜뿜인 우리나라 정서상... 야설의 원조격인 금병매는 거의 매장 당하다보니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가 삼대장이 되었고 서유기가 주로 애니매이션이나 게임같은 어린이~청소년 대상 매체들에서 매만지다보니 성인들에게는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이 양대산맥을 이룬다. 놀랍게도 이 중국4대 기서 중 삼국지연의의 나관중이 수호전도 집필했다...!!!! 수호전은 순전히 나관중이 창조했다기보다, 원나라 말기의 시내암(施耐庵)이라는 사람이 원작자에, 나관중이, 쉽게 말하자면 초본상태의 수호전을 사실상 마무리지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자면 시내암이 수호전이라는 그림을 대강 콘티만 그렸다면 나관중이 거기에 펜선을 그려 디테일을 추가하고 컬러링까지 했다고 하면 비슷한 표현?...ㅎ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단편이라도 소설이나 수필 등을 써본 분이 계시는지 모르겠다만... 아무리 적성이 맞고 본인이 원해 쓴다 할지라도 "글을 쓴다"는 작업은 보통의 인내와 센스로는 하기 어려운 작업이며, 더구나 실제역사를 기반해 철저한 자료조사 및 고증을 더한 작품은 요새도 쓰기가 버겁다. 게다가 요즘은 펜에 원고지로 원고작업 않고 대부분의 작가분들이 컴퓨터를 쓰지만.... 나관중은 명나라 사람이라, 벼루에 먹을 갈고.. 붓으로 먹물을 찍어 썼다. 학창시절 혹시 서예해 보신 분 계시는지?.. 먹을 가는거부터가 존니 진짜...하아..(난 그 먹냄새도 싫었어) 게다가 붓글씨는 정말 글씨쓰기가 거지같고 뭐 좀 쓸라치면 그새 붓의 먹물이 다해서 또 찍고.. 붓의 힘조절이 잘 안되면 글씨가 개판되며 오타가 나면 이건 수정이고 뭐고 처음부터 다시 써야된다.. 게다가 서예반 애들은 거의 대개 부모나 담임이 산만한 애들의 정서함양에 좋다고 시켜놓다보니 애새끼들이 전부 산만하다 -_-;;;;; (게다가 손에 묻은 먹물은 잘 씻기지도 않고 옷에 묻으면 그 옷은 그냥 버려야 된다는...) 여튼 그런 붓글씨로 쓴 소설! 심지어 그냥 소설도 아닌 중국의 4대 기서! 게다가 그중 둘이 Write By 나관중의 위엄은 말로 표현불가다. 위에서 언급했듯, 공부머리가 없었을 뿐 그는 천재고 서양의 세익스피어에 뒤지지 않는 동양최고의 문학가였다. 그런데 수호전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세상과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이들이 많이 나오고 그러다보니 명나라에서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벼르고, 그의 가문은 나관중으로 인해 온집안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그를 가문에서 파문!!! 쉽게 말해서 호적을 파버렸고, 나관중 역시 자신의 신상 및 자기네 집안안위 위해 노년에는 인적 드문곳에 짱박혀 이승윤이나 윤택이 찾아가는 그런 자연인처럼 살다 조용히 죽었다..., 그의 업적대비 참 초라한 최후지만, 당시는 뭐.. 아무거나 트집 하나 잘못 잡히면 그냥 모가지가 날아가는 시대에, 잘못 얽히면 온집안이 풍비박산 나는것도 다반사던 시절이였고 또 천재들은 항상 시대를 앞서가다보니 오히려 살아생전에는 인정은 커녕 가난과 무관심 속에 불운한 삶을 살다간 이들도 부지기수다. 아마 나관중은 앞서 언급했듯, 당시 시스템과 인프라에 따른 자기작품의 빠른 대중화의 한계와 당시 사회적인 직업인식 등으로 인해 생전에는 대문호에 대한 존경같은거 없이 살았을거다. 그냥 간신히 밥이나 먹고 맨날 방구석 처박혀 글이나 쓰고 그러는 Nerd였을 듯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와 수호전이란 두 거작을 만들어낸 그의 근성과 집념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매사가 다 그렇다. 뭘 하건 성공을 위해 우리는 당장은 미진해도 꾸준한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쌓여 결국 언젠가는 빛을 발하는거라고 나관중의 삶이 말해준다. . . . 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 - 욥기 8장 7절 - (하지만 난 무신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