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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온돌 ✈
온돌은 약 2300년 이상 된, 한국의 자랑 온돌. 이런 온돌을 미국 사회에 퍼뜨린 유명한 건축가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닥난방법에 반한 그 남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이야기입니다. 근대 건축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그가 어떻게 온돌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기 전에 먼저 '온돌'에 대해서 살펴보고 들어가 보아요. < 온돌에 대하여 (간단간단) > 온돌은 '아궁이' 하나에 지핀 불로 방 두세 칸을 난방하며, '구들장'을 뜨~끈하게 덥혀 장시간 난방이 가능합니다. 데워진 열기는 위로 상승하는 자연원리를 적절히 이용하는 난방방식이죠. 벽난로는 연기를 그냥 흘러보내면서, 연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죠. 인류에게 필요악의 존재였던 연기를 난방의 핵심으로 이용하면서, 연기에서 열기만을 걸러내어 난방에 활용한 지혜로운 난방방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온돌 홀릭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914년 겨울 일본 제국 호텔의 신축 건을 협의하면서, 일본으로 날아가게 됩니다. 그 곳에서 그 당시에 '일본'에서 사용하던 난방법을 몸소 느껴보았죠. 그가 바라본 당시의 일본 난방 방식은 정말 별로였죠. 그가 자서전에서 한 말입니다 아래 사진이 그 당시 사용하던 일본의 난방방식인 '히바치'와 비슷한 이미지입니다. 소소한 난로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방 안의 모든 공간을 덥히기에는 무리가 있죠. 일본의 난방 방식에 큰 실망을 느낀 라이트는, 식순에 따라 ‘한국방’으로 안내받습니다. 그는 당연히 일본방처럼 추울 줄 알고 단단히 각오하고 들어갔죠. 그런데 왠 일인가요? 그가 한 말을 들어보시죠. 그는 그 즉시 제국호텔의 욕실들의 바닥 밑에 전기난방장치를 넣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그가 시도한 최초의 바닥 난방이었죠! 그는 이를 중력난방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닥의 온기가 상부로 이어진다는 이유에서 지었죠. 이렇게 해서 타일바닥과 붙박이 타일욕조가 항상 따뜻해서 맨발로 욕실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보기 흉하고 목욕탕에서는 위험하기도 한 모든 난방 장치들이 사라지게 되었죠. 그가 온돌을 향해 했던 찬사들을 들어보세요! 그렇게 온돌은 그가 채택하는 주요한 난방 방식이 됩니다. < 온돌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라이트 > 온돌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라이트는 온돌의 원리가 난방법의 새로운 미래라는 확신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온돌을 이리저리 활용하여 스팀, 전기히터, 파이프 등에 적용하죠. 라이트만의 새로운 '온돌'방식을 구상해내고, 이를 실현합니다. 그 후 자국으로 돌아간 라이트는 여러 건축물의 설계를 맡으며, Jacobs House, Usoinian House, Johnson House, Pew House 등 다양한 건축에서 온돌의 원리를 적용하였습니다. (사진 순서대로 입니다.) 특히 Usonian House는 30여건이 넘게 적용 되었다고 알려지므로, 온돌의 원리를 적용한 사례는 적어도 40건은 된다고 추정이 됩니다. 이런 그의 행보로 인하여 그는, 미국내에서 바닥난방에 대해서는, 진정한 '전파자'라고 할 수 있겠죠. 그의 명성을 생각하고, 그의 대표작인 ‘낙수장’도 바닥난방을 사용했다고 하니, 그와 한국 전통의 온돌의 역사적인 만남이, 미국사회의 난방법 발전에 큰 역할을 했음은 분명합니다. 진정하게 기능적으로 인정 받은 온돌, 세계적인 건축가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 마치며 > 지금까지가 제가 준비한 내용이었습니다! 건축에 대해서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관련된 내용을 쉽게 풀어내는 컨텐츠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여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재밌게 보셨기를 바라며, 다음에 더욱 알찬 내용으로 돌아오겠습니다~ㅎㅎ
[퍼오는 공포썰] 사이비 종교 끝장낸 썰
코로나19 때문에 다들 많이 떨고 있을 것 같아 걱정이 크네 그릇된 믿음 때문에, 여러모로 뒤가 구린 사이비 종교 하나 때문에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구나. 사람들의 불안도 점점 커져서 마스크 값이 폭등하고, 마트에 생필품도 다 떨어졌다면서. 사실은 이 정도로 공포에 떨 것이 아닌데. 조심해서 나쁠 건 하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까지 공포감을 조성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더 무서운 건 역시나 불필요한 혐오인 걸. 벌써부터 나뉘어서 싸우고 있는 걸 보니 두통이 다 생기더라. (물론 신천지 혐오는 인정ㅋ) 그래서 오늘 가져온 건 (조금 많이 길지만) 우리나라의, 잔인하기로는 비할 바가 없는 한 사이비 종교 이야기야. 정말 어마어마해서 영화화도 된 지라 아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이비 종교에 빠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혹여 지금 사이비 종교에 빠져 사태 파악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돌아보라는 의미에서 가져온 글. 글이 너무 길어서 내가 중간 중간 좀 솎아 냈는데도 여전히 기네. 그래서 중요한 부분은 두꺼운 글로 표시를 했어. 다 읽기 싫은 사람들은 두꺼운 글자만 읽어도 크게 문제는 없을 거야. 그럼 시작해 볼까? 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이 거칠고 강퍅할수록 종교는 힘을 얻는다. 일제의 강압이 날로 심해지던 1930년대, 피폐해진 식민지 백성들의 신산한 마음을 뚫고 ‘영생복락’과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사이비 종교들이 기승을 부렸다. 이 가운데 온 국민을 경악케 했던 것이 수백건의 살인과 음행이 드러난 이른바 ‘백백교 사건’. 그 참담한 최후의 기록을 살펴보면, 사건의 배경에 가난과 무지, 정치적 부자유에 시달린 반도 백성의 안타까운 현실이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25년, 유곤용은 해주에서 가장 큰 한약국 ‘구명당(求命堂)’의 주인이었다. 본디 그의 집안은 온천이 개발되어 전국적인 휴양지로 번성한 신천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지만, 30여 년 전부터 뚜렷한 이유 없이 재산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여색이나 주색에 빠진 것도, 투기나 도박에 손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유곤용의 조부는 수시로 땅을 팔고, 빚을 얻었다. 유곤용이 해주로 나올 즈음 유씨 집안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몰락했다. 유곤용의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비방으로 약을 처방했는데, 특히 위장병, 임질, 뇌신경질환 치료약 조제에 탁월했다. 10여 년의 관록이 붙은 후 그의 명성은 황해도를 넘어 경기도와 평안도에 뻗쳤다. ‘구명당’은 조선 최초의 한약재 연구소를 설립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거칠 것 없이 뻗어가던 유곤용에게도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1933년 임종하기 전, 조부는 유곤용에게 30년간 지켜온 집안의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할아비는 장차 너의 부귀와 공명을 위해 근 30년간 백백교를 믿어왔다. 대원님께 의지하여 재물 버리기를 초개와 같이 했다. 그러나 아쉬워 말거라. 할아비가 정성을 다해 교에 바친 재물은 이제 곧 몇 곱절, 몇십 곱절이 되어 네 아비와 네게 돌아올 거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집안이 몰락한 이유는 허망하게도 조부가 백백교라는 신흥종교를 믿은 탓이었다. 조부의 죽음으로 집안의 비극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부친 유인호는 조부보다 더 ‘독실한’ 백백교 신도였다. 조부가 죽은 후 부친 유인호는 얼마 남지 않은 가산을 정리해 가솔들을 이끌고 백백교 본부가 있는 서울로 이주했다. 재산 일체는 물론 18세밖에 안 된 딸마저 대원님께 바쳤다. 그 대가로 받은 것이라고는 고작 ‘장로’라는 허울뿐인 직함과 왕십리에 있는 허름한 방 한 칸이 전부였다. 유곤용은 헛된 망상에서 깨어나라고 4년을 두고 설득했지만, 유인호의 30년 믿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교주의 애첩이 된 누이동생 또한 백백교의 열성 신도가 됐다. - 1937년 2월10일, 음력 설을 맞아 유곤용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 아버지 유인호의 처소를 찾았다. 4년 만에 부친을 만난 유곤용은 무릎을 꿇고 그동안의 불효를 고개 숙여 사죄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대원님을 만나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유인호는 자식의 돌연한 개심이 한편으로는 기특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불안했다. 유곤용은 어떠한 곤란한 명령이라도 순종할 터이니 제발 대원님을 승안케 해달라며 거듭 부탁했다. 그제서야 유인호는 자식의 진심을 믿을 수 있었다. 유인호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2월16일 저녁 8시 왕십리 유인호의 자택에서 백백교 교주 전용해와 유곤용이 운명적으로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전용해의 애첩이 된 유정전은 오빠 유곤용에게 대원님을 승안할 때 다섯 가지 계율을 명심해서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첫째, 절대로 대원님의 얼굴을 쳐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든 대원님 앞에서 고개를 들면 안 됩니다. 둘째, 대원님을 뵐 때는 몸에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셔야 합니다. 수건 하나 휴지 한 장이라도 주머니에 있으면 안 됩니다. 셋째, 백지장 같은 결백한 마음으로 대원님을 대하셔야만 합니다. 넷째, 대원님께서 물으시는 말씀에만 대답을 여쭙지 오라버니 편에서 무슨 말씀이고 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다섯째, 대원님께서 내리시는 분부면 어떠한 것이건 절대 복종을 하셔야만 합니다.” 유곤용은 계율을 지키겠노라 다짐하고 사흘 동안 방에 틀어박혀 근신했다. 교주 전용해는 약속한 정각에 애첩 유정전과 부하 두 사람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검정색 외투를 걸치고, 고동색 모자를 쓰고, 검정색 구두를 신은 차림이었다. 겉모양만 보면 영험한 신흥종교 교주라기보다는 흡사 보험회사 두취(頭取·사장)처럼 보였다. 유곤용은 부친과 함께 뜰 아래로 쫓아내려가 공손히 대원님을 영접했다. 방안에 모여 앉은 얼굴과 얼굴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교주 전용해가 어색한 침묵을 깼다. “따지고 보면 자네와 나는 4년 전부터 처남매부지간인데 오늘에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구려. 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거나 대단히 반갑소.” 간단한 인사말이 있은 후 주연이 벌어졌다. 한잔 두잔 술잔이 거듭됨에 따라 전용해는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아버지와 누이동생도 이미 서울에 와 있으니 차라리 그대도 가산 전부를 정리해가지고 서울로 오는 것이 어떠한가?” 조부와 부친처럼 속히 재산을 바치라는 말이었다. 유곤용은 긴장한 어조로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그것도 대단히 좋은 말씀이나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지금 당장 올라오기는 어렵습니다.” ‘신의 아들’ 대원님의 말씀을 감히 거부하는 것은 백백교 교단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용해는 격분한 어조로 다그쳤다. “그럼, 내 명령을 복종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그리고 옆에 앉은 유정전을 보고 또 한 번 소리쳤다. “네 오라비 잘났다.” 일격을 당한 유곤용은 그제서야 본심을 드러냈다. 지난 일주일간 그가 보인 행동은 교주 전용해를 만나 백백교의 악행을 따지기 위한 연극일 뿐이었다. 유곤용은 “백백교의 교리가 도대체 무엇이냐? 그런 얼치기 종교가 어디 있느냐”며 욕질을 했다. 세상에 나서 그런 욕설을 처음 듣는 전용해는 흥분한 나머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나이프’를 빼어들고 유곤용을 찌르려고 덤벼들었다. 이 순간이 그에게는 천려(千慮)의 일실(一失)이었으니 흉악무도한 그들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단서가 될 줄이야 악의 천재인 그도 예상치는 못하였을 것이다. 안방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대청마루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있던 전용해의 수하들이 교주의 신변 보호를 위해 방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유곤용의 힘은 의외로 강했다. 쇄도하는 수하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전용해의 멱살을 잡아 넘어뜨렸다.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음을 직감한 전용해는 죽을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벗어나 도망쳤다. 수하들도 각자 살길을 찾아 도주했다. 유곤용은 위험을 직감했다. 백백교 교도들이 떼지어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그는 동대문서 왕십리주재소에 달려가 사정을 말하고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1930년 소위 ‘금화사건’ 이후 완전히 소탕된 줄 알았던 백백교가 지하로 잠복해 밀교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 경찰은 현장으로 수사대를 급파했다. 수사대가 전용해의 집에 도착했을 때, 전용해는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였지만 전용해의 행방을 찾기 위한 신문 과정에서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다. 백백교는 교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정조를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교단의 비밀 유지를 위해 수백명의 교도를 살해, 암매장한 것이었다. 너무나 흉악한 범죄였기에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경찰은 보도를 전면 금지했다. 경찰은 두 달이 지난 4월13일에야 보도금지를 해제하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백백교는 이름만은 종교단체이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순전한 사기, 부녀자 능욕, 강도, 살인 등을 거침없이 한 흉악무도한 결사다. 소위 교주된 자와 그 간부가 되는 자들은 우매한 지방 농민들을 허무맹랑한 조건으로 낚아 재산을 몰수하고, 부녀자의 정조를 함부로 유린한 후, 그 비밀을 막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살육을 감행했다. 교도 중에서 피살된 자가 사백여 명으로 추정되고, 현재 판명된 자만도 158명에 달한다. 전율할 숫자는 세계범죄사상 전무후무한 범죄기록이 될 것이다. (‘조선일보’ 1937년 4월13일자 호외) 교도의 사체를 파묻은 백백교의 비밀 아지트는 한두 곳이 아니었다. 전국에 산재한 20여 곳의 비밀 아지트에서 모두 314구의 사체가 발견됐다. 살인은 서울 한복판에서도 버젓이 자행됐다. ‘벽력사’ 문봉조는 신당리 자택에서 교도를 살해한 후 대담하게도 사체를 자전거에 싣고 백주에 종로와 남대문을 가로질러 한강까지 내달렸다. 서울에서 살해당한 교도 수십명이 한강물에 던져지거나 마포, 청량리 일대에 암매장됐다. 양주군의 ‘천원금광사무소’는 교도 살해에 이용된 비밀 아지트 중 대표적인 곳이다. 당시 전 조선은 황금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금광이 들어섰다. 그러한 시기, 깊은 산골에 세운 비밀 아지트는 금광으로 위장하는 것이 제격이었다. 부근을 금은광구로 출원하고 인근 유지와 관리들을 초청해 성대한 개소식까지 거행했다. 수시로 빈 화약을 터뜨렸기에 바로 인근 주민들조차 그곳이 금광을 가장한 ‘도인장(屠人場)’임을 까맣게 몰랐다. 천포금광 일대에서만 40여 구의 사체가 발굴되었다. 죽을 때 비명이 새어나갈까 우려돼서 화약을 함께 터뜨렸다고 한다. 백백교는 홍보를 위해 폐광이 된 금광에 금을 숨긴 다음에 전용해의 힘으로 금광이 다시 터졌다는 식으로 사람을 모았다. 전용해는 만일을 대비해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고, ‘김두선’을 비롯한 16가지 가명을 쓰는 치밀함을 보였다. 전용해의 인상착의는 전적으로 체포된 백백교 핵심 간부들의 진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동거하던 애첩들조차 그의 얼굴을 함부로 쳐다본 적이 없어 생김새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2인자 이경득과 교주의 아들 전종기 정도였다. 경찰은 검거에 나선 지 50여 일 만에 양평군 용문산에서 전용해로 추정되는 사체 한 구를 발견했다. 전종기는 코 아랫부분이 산짐승에게 먹혀 없어진 시체를 보자마자 “아이고 아버지!” 하고 대성통곡했다. 양복 주머니에선 전용해가 차고 다니던 시계와 80여 원이 들어 있는 지갑이 나왔다. 부검 결과 전용해의 사망 시각은 2월21일 정오경으로 밝혀졌다.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 주장했고 자신을 믿는 교도들에게 장생불사를 약속했던 전용해는, 유곤용과 다툰 지 닷새 만에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 신의 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일 뿐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백백교의 기원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북 영변 태생의 동학도, 전용해의 부친 전정운은 금강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1900년 천지신령의 도를 체득한 후 세상에 나왔다. 그는 함남 문천군 운림면을 중심으로 인근 사람들에게 도를 전했다. 그를 믿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1912년 강원도 금화군 오성산에 본거지를 두고 정식으로 백도교(白道敎)를 개창했다. 강원도를 중심으로 부근 각처에 지부를 두고 포교에 힘써 1915~16년에는 교도가 1만명을 헤아렸다. 1919년, 교주 전정운이 죽자 교세 확장 방법을 둘러싼 간부들의 대립과 부친 유산 분배를 둘러싼 골육간의 싸움으로 교단이 분열된다. 결국 세 아들이 모두 독립해 각자 교단을 하나씩 차렸다. 1923년 5월 전정운의 맏아들 전용수는 간부 이희용을 표면상의 교주로 하여 경성부 도화정에 본부를 둔 인천교(人天敎)를 창립했다. 같은 해 7월 둘째아들 용해는 차병간을 표면상의 교주로 내세워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서 백백교를 창립했다. 셋째아들 용석도 형들에 지지 않고 경성부 도화정에 도화교(桃花敎)를 세웠다. 파죽지세로 뻗어가던 백백교의 교세는 1930년 7월, 10여 년 전 백도교 교주 전정운이 금화군 오성산에 그의 애첩 4명을 산 채로 파묻은 구악이 폭로돼 한풀 꺾인다. - “일제는 가고 새 세상이 온다” 전용해와 표면상 교주인 차병간은 가까스로 검거망을 벗어났다. 그들은 지방을 전전하며 비밀리에 교단을 재건했다. 이후 전용해는 서울에 본부를 마련하고, 지방에 있는 심복 교도들을 서울로 불러모았다. 백백교 간부들은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을 순회하며 무지몽매하여 세상 물정에 어둡지만 다소 자산이 있는 사람들을 은밀히 포섭했다. 백백교에서는 성별에 따라 외우는 주문이 달랐는데, 남자가 외우는 주문은 아래와 같다.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 위의 해괴한 주문만 외우면 무병장수한다고 한다 (나무위키) “우리 백백교 교주님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천위(天位)에 등극할 인물이다. 지금 일본의 통치 아래 있지만,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백백교 교주의 통솔 하에 독립이 될 것이다. 그때 각 교도는 헌성금(獻誠金)의 다소와 인물의 능력에 따라 대신, 참의,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 등에 임명될 것이다.” “오래지 않아 큰 전쟁이 날 터이니 교도들은 자산을 팔아가지고 상경하라. 교주는 신통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므로 반드시 그대들의 생명을 보장할 것이다.” “3년 내 조선에 서른 자 이상의 큰 홍수가 날 것이다. 일반백성은 모두 물에 빠져 죽더라도 헌금한 우리 백백교도는 금강산 피신궁(避身宮)에 들어가 목숨을 구할 수 있다. 홍수 이후 교주 전용해가 등극하여 천위에 오르면 헌금액에 따라 관직을 제수할 것이다.” (‘백백교 사건의 정체’, ‘조광’ 1937년 6월호) 백백교 간부들은 정감록의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정도령과 소리가 비슷한 교주 ‘전도령’이 후천개벽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 호언했다. 관존민비의 봉건적 인습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관직을 주겠다는 말로, 투기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불로장생, 부귀영화’라는 말로 입교를 권유했다. 일단 백백교에 입교하면 교주의 명령에 따라 토지, 가옥, 가재도구 일체를 정리해 서울 본부로 올라왔다. 교주는 신입 교도가 가지고 온 현금을 헌납하게 했다. 데리고 온 가솔 중 미모의 처녀가 있으면 ‘시녀’로 바치게 했다. 교주는 앵정정 본부로 불려온 시녀에게 ‘신의 행사’를 빙자해 욕정을 채웠다. ‘믿음이 약해’ 교주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여성은 심복 간부에게 넘겨줬다. 간부가 거느린 첩은 모두 이러한 ‘절차’를 거친 여성이었다. 교주는 수십명의 첩을 거느렸다. 7~8명의 첩을 거느린 간부도 있었다. 본부에서 교주와 ‘신의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여성은 4~5명에 불과했다. 새로운 시녀가 들어오면 기존의 시녀 중 ‘믿음이 약한’ 시녀는 양주, 양평 등지의 심산에 사는 심복 교도들의 집으로 보내졌다. 교주는 한 달에 몇 번씩 교도들의 집을 돌며 시녀들과 ‘신의 행사’를 치렀다. 전 재산과 자녀를 교주에게 바친 교도에겐 “오래지 않아 백백교의 천하가 올 터이니 그때까지 농촌에 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교도들은 연천, 양평, 철원, 평강 등 산간벽지 교통이 불편한 외딴집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교도들은 화전을 일궈 근근이 연명했다. 교단은 교도들이 근처 부락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막았고,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교도들을 수시로 이주시켰다. 교도가 수상한 행동을 하면 처자 형제를 각각 다른 지방으로 보내 격리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가족의 신변 걱정에 교도들은 차마 딴 마음을 품지 못했다. 재산과 가족을 빼앗기고 어딘지도 모르는 산간벽지로 보내져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면서도 임박한 백백교의 세상에 대한 꿈을 잃지 않은 교도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고 교단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전용해와 측근 간부는 교단에 불만을 품은 교도를 배교분자로 분류했다. 교주는 배교분자를 비밀 아지트로 데리고 가서 ‘기도’를 올려주었다. ‘기도’는 교도를 살해해 암매장하는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성인들이 타살된 후 딸린 어린 아이들은 산 채로 암매장됐다. 범죄 사상 초유의 대사건이었던 만큼 수사와 예심에만 3년이 소요되었다. 살인기록 보유자 문봉조 외 간부 24명은 보안법 위반, 살인, 사체유기, 상해치사, 살인강도, 외설, 사기 공갈, 횡령, 공사문서 위변조 등 10개 죄목으로 공판에 회부됐다. 피고인 24명 중 살인에 관련된 피고인만 18명이다. 살인 수효를 들으면 한층 더 전율을 느끼게 된다. 문봉조가 공범자와 함께 죽인 사람이 49회에 129명, 이경득이 61회에 166명, 길서진이 48회에 169명, 길군옥이 34회에 121명, 이한종이 11회에 35명 등이다. 그 죽인 방법도 참혹하기 짝이 없어 마치 사람 죽이는 것을 병아리나 죽이듯 쉽게 여겼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공소사실 진술에만 1시간이 소요됐다. 재판장이 검사의 공소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묻자 9명의 피고인이 살인 및 사체유기 사실을 부인했다. 재판장은 피고인들을 앉히고 개별심리에 들어갔다. 재판장은 사건을 최초로 고발한 유곤용의 부친 유인호를 일으켜 세우고 신문에 들어갔다. 장로 유인호는 백백교 30년의 역사를 소상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재판장: 어째서 백백교를 믿었느냐? 유인호: 대원님을 따르면 불로장생 호의호식 한다기에 믿었습니다. 재: 전용해의 부친 전정운이 창설한 백도교에 관계했느냐? 유: 예, 그때부터 믿었습니다. 재: 무슨 동기로? 유: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백도교를 믿으면 모든 재액을 피할 수 있다기에 믿었습니다. 재: 백백교의 교리가 무엇이냐? 유: 무식해서 교리는 모릅니다. 재: 헌성금은 얼마나 바쳤느냐? 유: 전재산을 모조리 바쳤습니다. 재: 네 딸을 전용해의 첩으로 준 이유는 무엇이냐? 유: 선생께서 요구하기에 바쳤습니다. (‘동아일보’ 1930년 3월14일자) 이어 벽력사 문봉조에 대한 신문에 들어갔다. 문봉조는 백백교의 행동대장격으로 49회에 걸쳐 129명의 교도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재판장: 백백교의 교리가 무엇인가? 문봉조 :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머지않아 서양은 불로, 동양은 물로 심판을 받아 인류가 전멸하는데 그 심판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백백교를 믿어야 한다, 심판 때 동해에 영산이 떠오르는데 교도들은 전부 피난해서 거기서 홀로 장생하고 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선생께서는 신이 사람의 모습을 쓰고 내려온 구주라고 하셨습니다. 재: 헌성금이란 어떤 것인가? 문: 입교한 자는 자기 재산을 팔아 교주에게 바치도록 했습니다. 재: 검거 당시까지 얼마나 받았는가? 문: 알 수 없습니다. 재: 전용해가 교도에게 돈을 준 일이 있는가? 문: 생활이 가난하면 얼마간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재: 생활이 곤란한 교도 중에는 교주에게 불평을 품은 교도도 있었겠지? 문: 믿음이 엷은 교도 중에는 혹 불평을 가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재: 그런 불평분자는 모두 피고인들에게 명령해서 죽이게 했다지. 문: 예, 그랬습니다. 재: 전용해는 교도 중에서 딸이나 누이동생이 있는 사람에게 그 딸과 누이동생을 바치라 해서 첩을 삼았다지? 전부 몇 명이나 되는가? 문: 정확한 명수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앵정정에만 34명 있었습니다. 재: 그래 전용해는 매일 술만 먹고 첩과 음탕한 생활을 해왔다지? 문: 밥보다는 술을 좋아하셔서 매일 ‘월계관’이나 ‘백학’ 한 되쯤씩 자셨습니다. 재: 전용해는 자기 재산은 없이 교도에게서 모은 돈을 물 쓰듯 하여 방탕하고 사치한 생활을 했는가? 문: 예. 재: 그런 음탕한 생활을 하는 전용해를 어떻게 신의 아들이라 믿을 수 있었는가? 문: 지금 생각하니 잘못 믿고 있었습니다. 술 먹은 때는 그렇지만 선생께서 가르치는 말은 모두 훌륭해서 믿었던 것입니다. 재: 그래, 아직도 전용해를 신의 아들로 믿는가? 문: 천만에요. 지금 생각하면 모두 어리석어서 속았던 걸 깨달았습니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문봉조를 비롯한 피고인 전원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다고 했지만, 교주를 지칭할 때 꼬박꼬박 경어를 썼다. 오랜 습관 때문인지 뉘우친다고 거짓 진술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백백교의 2인자 이경득은 전용해의 인격을 숭배해서 믿었는지 반역하면 죽이는 것이 두려워 믿었는지 묻는 질문에 정말로 신의 아들로 믿었다고 진술했다. 불평을 품고 있을 때마다 교주가 “이 놈 네가 불평을 품고 있구나. 다른 데 가고 싶거든 가거라” 하여 독심술을 가졌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나머지 피고인들도 모두 교주가 진짜 ‘신의 아들’인 것으로 믿고 백백교에 귀의했다고 진술했다. 23명의 교도를 살해한 이창문은 백백교만 믿으면 가족의 병도 낫고 또 불로장수하는 줄만 알고 입교했으나 교주가 자칫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알고 무서워 도망까지 해보았지만 교주 밑에 남기고 온 처자의 목숨이 염려되어 죽음을 각오하고 되돌아간 적이 있었다고 말해 재판정을 숙연케 했다. - 1940년 3월15일, 수은주가 영하 7℃까지 떨어지고 연 이틀 눈이 내렸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314인의 원귀가 내린 저주라 말했다. 때늦은 혹한에도 불구하고 방청석은 여전히 만원이었다. 제2회 공판에서는 살인죄에 대한 사실 심리가 진행됐다. 314건의 살인혐의가 차례로 확인되었다. 재판장: 1930년 8월 둘이서 제2세 교주 우광현을 무주군 설천면 야산에서 목매 죽였는가? 이경득, 길서진: 예. 재: 이유는? 이경득, 길서진: 모릅니다. 대원님께서 죽이라고 해서 죽였을 뿐입니다. 재: 1931년 2월 20세가량의 여자와 그 젖먹이 애를 죽였나? 이경득, 길서진: 예. (중략) 재: 1931년 5월 교주의 첩 문봉례를 죽일 때 업고 가던 젖먹이도 죽였는가? 문봉조 : 문봉례를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애는 안 죽였습니다. 대원님께서는 애까지 죽이라 하셨지만 이경득이가 “어린애야 무슨 죄가 있느냐?”며 죽이지 말자고 했습니다. 저 역시 젖 먹다가 어미를 잃은 계집애 처지가 하도 가련해서 집에 데려다가 기르고 있습니다. 재: 문봉례를 죽인 이유는? 문: 처음엔 몰랐습니다만 후에 알고 보니 오빠를 죽인 것을 알까봐 죽이란 것이었습니다. 재: 어째 친형인 문봉진과 그 가족을 죽였는가? 문: 자꾸 서울 오겠다는 걸 말렸지만 듣지 않아 할 수 없이 상경시켰습니다. 어느 날 대원님께서 먼저 “봉진은 어떤가?” 하시는 태도가 죽이자는 뜻이었습니다. 만일 형을 안 죽이면 나도 죽겠고 내 가족 친척도 남모르게 죽겠기에 형을 죽였습니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피고인들은 아녀자는 물론 젖먹이 어린애, 친형까지 대원님의 명이라면 서슴없이 도륙했다. 사흘 후 속개된 제3공판에서도 살인죄에 대한 사실 심리가 계속됐다. 심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살인 사실을 한 묶음 두 묶음씩 통틀어 심리했다. 피고인이 부인하면 부인하는 대로 그냥 넘어가는 식이었다. 몇 가지 혐의에 대해 부인해도 판결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00건의 살인혐의 중 99건의 혐의를 부인해도 판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살인사건은 1932년 이후 갑자기 증가했다. 그때부터 불평분자 본인만 아니라 한 가족 전부를 몰살해버린 탓이었다. 불평을 가진 자만이 죽은 것도 아니었다. 먹여 살리기에 귀찮다든가 한 장소에 너무 많은 교도가 있어 경찰에 발각될 우려가 있어 죽인 교도도 적지 않았다. 1년은 족히 걸리리라는 예상과 달리 공판은 일주일, 단 4회만에 종결됐다. 검사는 살인과 관련된 18인의 피고인 전원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먼저 피고 가족석에서 울음이 터져나오고 연이어 나이 어린 피고인 몇 명이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과오를 뉘우치고 흘리는 눈물인지 목숨이 아까워 흘리는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재판장은 가담 정도가 경미한 피고인 4명만 징역 7~15년으로 감형하고 나머지 14명에게 검사의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출처]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__________________________ 읽으면서 많이 놀랍지 않아? 지금 '그' 종교의 실태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말야. 물론 살인까지는 아니지만... 일제강점기라 사람들의 마음도 많이 약해져 있고, 제대로 된 법 체계도 갖춰져 있지 않았으니 저렇게 안하무인일 수 있었겠지. 약한 마음을 파고들어서 나중의 구원을 약속한 후 재산을 다 헌납하게 하고, 가족까지 끌어들이고 여색을 취하는 게 정말이지 어떤 종교와 같지 않아? 헌금액에 따라 관직을 주고, 처음부터 순박하면서 재산이 있는 사람을 노리는데다 사바사로 그가 혹할 말로 꼬드기고, 게다가 마음 먹고 빠져나오려고 해도 가족들을 볼모로 잡고 있어서 힘든 일인 것 까지. 저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밝혀진 것만) 몇백명을 살인했기 때문에 모두 큰 벌을 받게 되었지만 지금의 종교는 어떨까. 훨씬 더 교묘하게 사회에 파고 들어 있어서 잘 걸러내 질 지도 모르겠네. 부디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혹여 아직도 '그'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 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이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한 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해. 그들은 너를 구원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너의 심약한 마음을 부풀려 잡아 먹는 괴물들일 뿐이니까. 참고로 사형을 선고받은 저들에게 실제로 사형이 집행이 됐는지는 몰라. 직후에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으니까. 아. 사건이 일단락된 후에 일제는 범죄형 두개골에 대한 연구 목적으로 교주인 전용해의 머리를 잘라내서 포르말린에 절여 범죄형 두개골 표본으로 만들었다고 해. 정말 일본은 박제하는 걸 좋아하지 참? 해방 후에는 국과수가 (이유도 모른 채) 보관하고 있다가 2011년에야 화장을 했고. 약한 사람들 마음을 좀먹고 살았던 사이비 교주의 마지막은 이 정도로 비참해야지. 암.
아껴 읽고 싶은 너와 나의 이야기: 17
한차례 시원하게 비가 내리고 난 뒤 공기가 제법 쾌적하게 느껴집니다. 저 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빼면 무언의 것이 나올까 싶어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경찰 헌장이 헌장일 뿐이라며 그들을 달갑지 않게 봤었다. 어긋난 경험이 만든 이미지란 그러했다. 그런 내가 경찰관 속으로 들어간 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왜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을까. 책을 산지 8개월 만에 마지막 장을 덮었고 묘한 울대가 덜컹거린다. 자꾸만 입술을 앙다물게 된다. 산 사람 죽은 사람 남은 사람. 잔혹한 짓밟힘을 딛고 일어선 지구는 오늘도 자전하고 수많은 생이 지고 피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휘지 않도록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경찰관을, 단순히 직업을 넘어서 그들을 존경하고 응원한다. 이겨낼 수 있을 만큼만 아프기를 바라면서. ⠀ #경찰관속으로 #이후진 #원도 짧지만 강한 글은 뇌리에 깊게 남는다. 시간은 늘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협박한다. 나 없으면 존재하지도 않는 새끼가. 시간 나 새끼. 글쓴이의 남다른 시각과 사고가 유쾌하다. 쿸 웃다가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공감의 고개를 끄덕인다. Strong Words. 슬픔이 어색할 수 있도록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웃음 지을 수 있게 해준 글쎄를 응원한다.  *시밤 같은 느낌의 책으로서 딥박님이 힘겹게 내신 책이라 개인적으로 보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으셨으면 좋겠단 생각이 듭니다. ⠀ #글쎄 #딥박스 #딥박 아무도 주우려 하지 않는 더러운 동전 같은 하루. 나는 가끔 그 새까만 동전을 주워 남몰래 닦아본다. 닦아도 닦아도 가치는 그 정도일 걸 알면서도. ⠀ 당신 그거 알아요? 1966년도에 발행된 10원짜리 동전이 현재 30배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거. 웃으며 웃지 않는 사람의 얼굴을 한 채 아무도 주우려 하지 않는 하루를 살아내느라 고생했어요. 우리, 3000만큼 달콤한 꿈을 꿔요. ⠀ #나는너라는문장속으로걸어들어갔다 #다시서점 #정맑음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 #참을수없는존재의가벼움 #민음사 #밀란쿤데라 '지난해 우울증이 심해져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세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 혼수상태에서 운 좋게 살아돌아온 뒤로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다.'라는 두 문장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다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방향도 없이 방황하는 자의 일상은 생각보다 흥미로웠고 생동감 있는 활자는 그곳으로 날 데려가곤 했다. 글의 유속이 빨라졌다. 더듬어도 감각 없는 기억이 있다는 건 슬픈 일이라는데 아 그러면 못 이기는 척 버스에 올라탈까. 읽을 수 없는 역마의 눈이 날 바라본다. ⠀ #역마 #이김 #이묵돌 사랑은 할수록 크기를 계속 키우는 그릇 같아서, 많이 할수록 크고 깊어지기만 했다. 한 번 깊어진 것은 좀체 메워질 생각을 않는다. 덕분에 많은 것에 애정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다. 세상천지 온갖 것을 다 담아도 그럭저럭 아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의 역치가 커지는 바람에, 이제 어지간한 관계로는 그 그릇을 온전히 채우기 힘들어졌단 뜻이기도 했다. 사랑한단 말을 하고 살 일이 잘 없게 됐다. ⠀ 입안이 찐득해질 정도의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마치 그 감정만 결여된 사람처럼. ⠀ #다정함의형태 #부크럼 #여태현 여기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단 한 번도 여기에 속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 온몸이 함구하는 나이가 되어갈수록 고여있는 것이 영하권으로 떨어진다. 온기 같은 허기가 남아있었다는데 유명무실 사이엔 상실의 잔해만이 바스러진 채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 #유에서유 #문학과지성사 #오은 세계는 황폐해졌고, 신들은 떠나버렸으며, 대지는 파괴되고, 인간들은 정체성과 인격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버렸다. ⠀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났기에 지금과 같은 사태가 발생하였고 속성만 상이해질 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근원을 직시하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해야 한다. 네크로필리아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니. 근시안적인 안경을 벗어던질 때다. 그래야만 한다. ⠀ #삶은왜짐이되었는가 #21세기북스 #박찬국 최근에 종로의 한 꽃집에서 장미 열 송이를 단돈 만 원에 구매했습니다. 만 원이면 꽃 두 송이 값인데 웬일이야. 신문지에 싸인 꽃을 안고 집에 왔습니다. 가려져있던 신문지를 푸르고 나서야 왜 이것이 만 원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컨디셔닝이 되지 않은 것은 그럴 수 있지만 꽃 밑부분이 썩어가고 있거나 줄기가 상한 게 태반이었습니다. 물은 금새 연갈색이 되었고 옅은 장미 향을 맡으며 삶의 결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싸여있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며 겪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속이는 것은 속 없는 겉이 하는 일이라는 시구가 떠오릅니다.
[전시] 칸딘스키 & 음악을 그리는 사람들
2월에 하는 전시 리스트를 보다 이 곳에 가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번주에 다녀왔으나 한 번 날리고 이제서야 포스팅을 재개합니다. 기간: ~2020. 3. 9. 월 장소: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요금: 성인 15,000 / 청소년 12,000 / 어린이 9,000 칸딘스키는 미술사에서 최초로 완전추상에 도달한 화가입니다. 완전추상이란 사물을 유추할 수 있는 그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고 요약, 응축한 형태를 주제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화면에 존재하도록 한 것을 말합니다. 칸딘스키가 활용했던 점, 선, 면의 기본 요소가 우주공간에서 표현된다는 상상을 전제로 한 3D미디어아트 입니다. 초반에 느끼는 생동감은 꽤 좋습니다.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칸딘스키의 전 생애를 집약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원형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말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 경우지만 원형이 말보다 더 나를 강렬하게 끌어당겼다. 이는 원형이 수용하고 있는 강한 내면의 에너지와 가능성 때문이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 자의 작품은 단시간내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작품들도 디지털화 되어 있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음악으로부터 받은 감명과 청각적 체험에 대한 인상을 표현하던 칸딘스키의 작품이 살아 움직입니다. 김소장실험실 <무대2020> 는 칸딘스키가 구상한 무대 디자인을 재해석했다고 합니다. 앞에 놓여져있는 화면 내 진한 테두리의 도형을 클릭하면 음악과 함께 해당 도형이 움직입니다. 우측엔 피아노 건반 모양이 있는데 빛도 들어옵니다. 눈과 귀의 움직임이 동일해져갑니다. 오순미 <봉인된 시간_과거> 는 이 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였습니다. 유리로 이루어진 사면 가득 칸딘스키의 컬러가 시시각각 변해가고 오묘한 기분과 함께 다채롭게 물들어가는 나를 볼 수 있습니다. 아 이 공간 너무 좋았습니다. GECC <Beauty of line> 미디어아트 혹은 프로젝션 맵핑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이번 전시 만족도가 낮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음악이 부분적인 시각화로 형상화 되었으며, 음악의 울림이 가슴속으로 밀려와 내 영혼을 통해 각기 화려한 빛으로 변해 눈앞에 나타났다 요약 혹은 응축은 시적이고 음악적이며 낭만적이었기 때문에 이지적 또는 분석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보다 인간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그 의도가 드러나게 된다는 문장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현악 4중주 클래식 연주와 함께 Impression 3-Concert의 조각 이미지들이 디지털 영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이 영상을 보냈더니 'olafur Arnalds, Nils Frahm- 20:17, 21:05도 들어보라고 답장이 왔습니다. 하루의 끝에 들어보시는걸 추천드립니다. 이 작품을 보고나면 나오는 공간으로서 이 곳에서 칸딘스키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전시해설을 원하시는 분은 11시와 16시를 노려주세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라 당신은 예술을 통해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 적이 있는가 음악을 그리는 사람들 두터운 터치가 돋보이는 정상윤님의 작품입니다. 여러 작품들 중 쇤베르크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유를 물으신다면 그저 눈길이 계속 간다고 답하겠습니다. 잔나비 앨범 커버 디자인으로 더 유명해지시게 된 콰야님의 작품입니다. 위 작품은 수많은 시선을 신경쓰지 않은 채 연주하고 있는 여인이라고 하는데 눈의 각도 때문일까요, 강단보다는 슬픔이 떠오릅니다. 스팍스에디션(다수의 앨범 브랜딩을 기획) 아카이빙룸입니다. kokooma 작가님의 책이 눈에 띕니다. 서 있는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습니다. 키네틱아트 <댄싱블루> 로서 푸른색의 염료가 돋보이는 파티클 작품들도 배치되어 있고 조각들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방식으로 협업한 레이어라는 이름의 작품이 있습니다. 코발트블루 계열의 상 속의 상이 되어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인테리어적 요소로도 원과 선을 표현하신것 같아 센스있다고 느꼈습니다. 한 작품이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고 재창조 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색연필, 오일 크레파스가 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좋아해서 헤밍웨이와 그의 고양이, 꽃과 책 앞에 서있다 왔습니다. (LG U+와 협업하여 U+AR앱으로 비추면 작품들이 움직이는 것도 있었는데 귀찮아서 그냥 구경만 했습니다. 신기한 세상입니다.) 미디어콘서트 <빛의 멜로디>를 통해 미술과 음악이 분리될 수 없이 완연하게 어우러진 장면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촬영불가인 김에 가운데 자리잡고 앉아 이 작품을 온 몸으로 느끼다왔습니다. 작품과 하나가 되고 모든것이 삼켜지는듯했습니다. 진짜 좋았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것이 빛을 잃어갑니다. 서로 얼굴을 붉히며 탓하고 피하며 몸을 사릴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짧지만 이 게시글을 보시는 동안만은 색을 띄셨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아프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