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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단독]인사혁신처, “국가공무원 공채시험 기간 단축 고려할 것” 답변










글=이안나 기자/ 그래픽=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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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답변도 중요하지만 그에따른 후속조치가 더 중요한거 같아요. 정작 본인은 육아휴직도 못쓰는 사회복지사들 현실에 민원을 넣었더니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받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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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존스에게도 다른 위대한 발명가들처럼 영감이 불현듯 찾아온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밤, 호숫가에 차를 세워두고 잠시 운전석에 앉아 시간을 보낼 때였습니다. 창문을 열자 선선한 밤바람이 차 안으로 불어들어왔죠.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열린 창문으로 불청객도 들어왔거든요. 모기가 들어와 윙윙거리자, 프레데릭은 짜증이 나서 창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차 안은 금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더워졌죠. 창을 열자니 또 모기가 들어올 것같고, 그렇다고 창을 계속 닫고 있자니 더워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 때에 프레데릭에게 한 영감이 찾아옵니다. 바로 차량용 에어컨을 만들어 팔자는 생각이었죠. 그는 자기 상사이자 파트너인 누메로를 찾아가 자기 아이디어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걸 만드는 회사는 어디에도 없으니, 분명 성공할 거라고요. 누메로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누메로는 프레데릭의 아이디어에 대해 시큰둥하게 굴었습니다. 어째서 누메로가 새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는 모릅니다. 더군다나 당시 회사는 새로운 사업 분야를 찾아야 할 처지였는데도 말이죠. 누메로의 회사에서 개발한 극장용 음향 시스템 설비는 미 중서부 전역에서 팔려 나갔습니다. 곧 선발주자인 웨스팅하우스와 RCA가 그 존재를 의식하게 되죠. 치열한 경쟁과 소송전이 거듭되었습니다. 상대는 미 전역에 먼저 진출한 대기업들이죠. 누메로의 회사가 저렴한 가격과 품질로 승부를 거는 데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누메로에겐 대안이 필요했죠. 프레데릭의 아이디어가 묻히나 싶자, 곧 다른 방향에서 기회가 돌아옵니다. 1983년, 누메로는 골프 친구들과 경기를 하며 친목을 다지고 있었습니다. 개중 한 친구가 우연히 누메로가 듣는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죠. '요전번에 시카고에서 닭고기를 잔뜩 사들였는데 말야, 트럭이 길에서 퍼지는 바람에 고기가 다 상해버렸다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당시 운송용 냉각 시스템은 초보적이었고 취약했습니다. 트럭의 진동 때문에 민감한 장비는 쉽게 고장났고, 그나마도 차체와 독립된 동력원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죠. 때문에 육류나 상하기 쉬운 상품을 육지에서 수송하는 데는 한계가 따랐습니다. 누메로는 친구 말을 듣고 농담조로 이렇게 말하죠. '혹시 그 문제, 전문가가 해결 못 하면 까짓거 내가 해 버리지.' 누메로에겐 농담이었지만 친구에겐 아니었습니다. 이제 누메로가 기댈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죠. 자신이 운영하는 영사 기기 회사에서 수석 엔지니어를 맡은 프레데릭 존스가 아니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기껏 제안한 차량용 에어컨 아이디어를 걷어찬 고용주가, 뒤늦게 와서는 세상에 없는 차량용 냉각 설비를 발명해 내라고 합니다. 프레데릭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 프로젝트를 맡았을까요? 그의 생각이야 어쨌건, 프레데릭은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해냅니다. 1938년 최초의 육상 운반용 냉동장치 모델 A의 특허를 발표하죠. 1938년 발표된 모델 A는 냉각용 핵심 부품이 차체 하단에 설치되었습니다. 이것이 도로 사정에 따라 손상을 입는다는 사실을 알자, 프레데릭은 해당 유닛을 트레일러 상부로 옮깁니다. 무게가 2200파운드나 나갔던 초기 모델도 나중에는 950파운드까지 경량화하죠. 비록 우연히 이뤄진 개발이었지만, 누메로는 이 냉동 트레일러가 곧 자기 미래라고 판단을 내린 모양입니다. 그는 곧 자신이 운영하던 극장 설비 회사 Ultraphone과 보유하고 있던 음향 설비 특허, 티켓 발권 기계 특허를 RCA에 팔아치워 정리해 버립니다. 여기에 자신의 생명보험을 담보로 1만 달러를 빌려 자금을 융통하죠. 이 돈을 가지고 누메로는 몇몇 동업자와 함께 써모컨트롤 컴패니Thermo control company를 설립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 트레일러에 올인한 거죠. 하지만 초기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습니다. 이전에도 냉동 트레일러 기술이 여럿 소개된 바 있지만, 사용자들이 원하는 대로 작동한 경우가 아직 없었던 거죠. 누메로는 고민 끝에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냅니다. 육류 포장 체인인 Amour 사와 접촉한 그가 담판을 짓습니다. '저희와 거래하시죠. 처음 트럭 두 대는 아무 비용 청구 없이 설치해 드리겠습니다. 혹시나 우리 장비가 고장나면 그로 인한 모든 손실도 보상해 드리죠. 어떻습니까?' 상대방 입장에선 손해보는 것이 없는 거래였습니다. 상대편 사장은 누메로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얼마 지나지 않아, Amour 사는 트럭 8대를 추가 구매합니다. 누메로와 프레데릭의 상품이 비로소 시장에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겨우 첫 시작을 끊었지만, 회사 경영은 여전히 순탄치 못했습니다. 거기에 곧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죠. 이때 회사 사장인 누메로는 진지하게 자원 입대를 고민했습니다. 이미 한 번 군대를 다녀왔는데도 말입니다. 마치 그 결심이 허풍이 아니란 듯, 누메로는 지원을 하러 워싱턴 DC로 훌쩍 떠납니다. 그가 모든 것을 걸어 이제 막 반석을 닦아놓은 회사는 다시금 표류할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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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한 번 가기도 꺼리는 군대를 두 번 가겠다고 자원한 누메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첫 영화 <퍼스트 어벤저>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까요? 영화 초반에 비쩍 마른 주인공이 군대에 자원했다가 퇴짜맞는 장면이 있었죠. 1차 대전 발발 즈음엔 젊은이들 사이에서 군에 자원하는 것이 의무이자 일종의 모험 같은 것으로 여겨진 모양입니다. 낯선 유럽 대륙에 가서 군에서 선전한 것처럼 안전하고 안락한 참호에 틀어박혀 적을 노려보며 몇 개월쯤 있다보면 어느새 예정된 주둔 기한이 끝나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당시 군에 지원한 청년들이 전쟁에 대해 가진 인식은 그런 정도였죠. 그 전쟁이 수년이 넘게 이어지고 전세계 열강이 참전하는 국제전이 될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https://youtu.be/JerVrbLldXw <퍼스트 어벤저> 영화 트레일러. 영상 가장 앞부분에 주인공이 군에 지원했다 퇴짜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실제에 비하면 신병 지원소가 만화처럼 과장되게 표현되긴 했지만요. 어쨌거나 누메로도 캡틴 아메리카처럼 호기롭게 군에 자원하러 일부러 워싱턴까지 옵니다. 막 설립한 회사 운영이 아직 채 본궤도에 오르기도 전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누메로와 프레데릭에겐 전화위복이 됩니다. 워싱턴에서 누메로는 우연히 육군이 가진 고민을 알게 됩니다. 미 육군은 유럽 대륙으로 보낼 장병들을 위해 각종 보급품을 안정적으로 수송해야 했죠. 그 보급품들 가운데는 물론 식료품이나 의약품 따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도중에 상하거나 훼손되지 않고 신선하게 목적지까지 물품을 수송하자면 무엇보다도 향상된 냉동 기술이 꼭 필요했죠. 마침 누메로에겐 그들의 고민을 해소해 줄 기술이미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자, 누메로는 군에 자원하겠다는 계획을 접고 다시 서모컨트롤 사로 돌아옵니다.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 유닛을 군 사양으로 개량해 생산하기 위해서였죠. 완성해 군에 납품한 냉동 장비는 현장에서도 고장 없이 잘 작동했습니다. 미군은 정식으로 서모컨트롤 사 제품을 군 장비로 채택하기에 이르죠. 곧 미군의 식수부터 혈장에 이르기까지 온도에 민감한 모든 품목이 서모컨트롤 사의 냉동 트럭으로 미군이 진출한 모든 전역에 배송됩니다. 유럽과 아프리카, 심지어 태평양 전선에서도 누메로와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가 수송을 맡았죠. 군과 협력하면서 서모컨트롤 사는 비로소 두각을 보였습니다. 프레데릭이 완성한 기술은 단순히 트럭을 개선할 뿐 아니라, 야전병동과 병기창, 심지어 B-29 폭격기의 조종석과 엔진에까지 적용되었죠. 전쟁 동안 서모컨트롤 사가 미군과 계약한 금액은 천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서모컨트롤 사는 더 이상 작은 회사가 아니었죠. 1949년 기준 직원 200명에 매출 400만 달러 이상을 달성한 회사는 냉동 기술 훈련 학교를 자체 설립해 보유했고, 미 대륙과 중동, 유럽까지 진출해 제품을 판매했습니다. 프레데릭은 대전 후 기차, 배, 트럭 등으로 쉽게 옮겨 실을 수 있는 냉장 컨테이너를 개발했고, 동업자 중 하나인 Myron Green은 전국 유통 및 서비스망을 구축해 회사의 기틀을 세웠죠. 때맞춰 1950년대 새로운 산업이 등장해 급속히 성장합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냉동 식품과 슈퍼마켓 산업이죠. 프레데릭은 이 이후로도 다양한 기술을 연구해 특허를 내고 신제품을 출시했습니다. 1955년 버스용 에어컨을 최초 개발했고, 58년에는 기존 가솔린 엔진보다 훨씬 뛰어나 장거리 수송에 적합한 디젤 엔진 냉동차 설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가 생전 제출한 특허만도 60개가 넘죠. 그 분야도 냉동 설비에만 국한하지 않고, 엑스레이와 엔진, 음향 설비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1944년 프레데릭은 미국 최초로 냉동 엔지니어 협회 회원이 된 흑인이었습니다. 누메로는 계속 프레데릭과 다른 동업자들 도움을 받아 회사를 키웠죠. 50년대 중반에 서모컨트롤 사는 사명을 변경, 써모 킹Thermo king coperation 사로 바뀝니다. 현재도 전세계에서 검증된 기술력과 우수한 품질로 트럭용 냉동기뿐 아니라 다양한 냉동 수송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 진출해 있는 기업입니다. 써모 킹 사가 1960년에 발표한 NWD 62 모델. 현재 써모 킹 사의 냉동 트레일러 제품들의 기본 틀이 된 모델입니다. 냉동차 이외에도 프레데릭 존스는 화물 열차의 냉동 차량, 군에서 혈장이나 약물 따위를 수송할 수 있는 휴대용 냉장 장치 등도 발표했습니다. 써모 킹 사가 발표한 상품 가운데는 심지어 우유 냉각기나 골프 카트 따위도 있습니다. 자신의 발명이 세상을 바꾸어놓은 것을 본 후, 1961년 2월 프레데릭 존스는 폐암으로 사망합니다. 미네소타는 1977년 그의 공로를 인정해 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죠. 고아로 자라나 흑인이란 이유로 차별받던 그가 마지막엔 어느 누구도 그 공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위인이 된 겁니다. 한편 사장인 조셉 누메로는 평생을 함께 한 파트너가 사망한 후, 회사를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 사에 팝니다. 1963년까지 그는 계속 사장으로 자리를 지킨 후, 동업자였던 마이론 그린Myron Green에게 넘기고 스스로는 명예 회장으로 물러납니다. 회사는 60년대 극심한 파업을 여러 차례 겪지만 흔들리지 않았죠. 하지만 66년, 써모킹 사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참사를 겪게 됩니다. 때는 1966년 3월. 회사는 우수 딜러와 직원들을 뽑아 포상 여행을 보내 주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출발해 하와이 호놀룰루, 일본 하네다를 거쳐 홍콩 카이탁 공항으로 향하는 영국해외항공 소속 911편 비행기에 75명의 임직원이 몸을 싣죠. 회사는 이들에게 17일간의 동양 여행 패키지를 제공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행 도중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호놀룰루에서 도쿄 하네다로 향하던 중, 비행기는 기상 악화로 후쿠오카 공항으로 회항합니다. 후쿠오카에서 하루 대기한 후, 비행기는 다음날 원래 계획했던 하네다 공항에 착륙하죠. 기상 상황은 좋아서 후지산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맑았다고 합니다. 지상에서 비행 계획을 브리핑한 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륙한 비행기는 예정대로 홍콩을 향해 날아갔죠. 그러다 문득 기장은 기수를 잠시 돌려 후지산 정상으로 향합니다. 물론 비행기 고도는 충분히 높아서 산 정상에 부딪칠 우려는 없었습니다. 탑승객들에게 하늘에서 보는 후지산 정상 풍경이라도 보여주려 했던 걸까요? 하지만 정상 즈음에서 비행기는 난기류를 만나 견디지 못하고 동체가 공중분해되어 버립니다. 날개를 잃은 항공기는 후지산 동쪽 6킬로 떨어진 숲에 뿌연 연기를 내며 추락하죠. 써모킹 임직원 75명을 포함해 당시 탑승객과 승무원 124명은 모두 사망합니다. 사망한 임직원 가운데엔 임원급이 3명, 주요 딜러가 35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망한 임원 가운데엔 부사장 랄프 포터도 있었죠. 또 회사에서 보내주는 포상 여행이었기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한 경우가 총 52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바람에 63명의 아이가 부모를 잃었죠. 써모 킹 사 입장에선 창사 이래 최악의 참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BOAC 911편 추락 사고. 피해자 중엔 일본인, 한국인도 소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써모 킹 사 임직원과 같이 외국인들이었습니다. 이 사고 이후 난기류에 대한 주의 대응이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는 이후로도 건재했습니다. 모기업 웨스팅하우스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그룹 내에서 유일하게 좋은 성적을 내어 알짜 기업 노릇을 톡톡히 해냈죠. 1991년 누메로가 사망할 당시엔 이미 회사는 수백만 달러 규모 사업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2700여 명을 고용하고, 도미니카나 아일랜드, 스페인에도 공장이 있었죠. 1993년엔 일본 시장 거의 절반을 점유했고, 이듬해에는 동유럽, 아시아 지역에서 딜러망이 36%나 신장했습니다. 1991년, 미리 적은대로 조시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프레데릭 존스는 이미 사망한 뒤여서 직접 훈장을 전달받지는 못했지만, 그 미망인이 행사장에서 대신 수령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이 흑인에게 수여된 건 프레데릭 존스가 최초였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냉동 운송 기술을 개발해 선적과 식료품 시장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공로가 인정되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 1985년 레이건 행정부에서 처음 수여한 이래, 역대 대통령들이 산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들을 선정해 표창했습니다. 듀폰 사나 빌 게이츠, 3M 등도 같은 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이러한 영광을 누릴지는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는 대공황으로 완전히 파산하고 학점이 모자라 법대 졸업을 하지 못한 청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경주용 차를 가지고 대회에 나가길 바랐던 극장 영사기사였죠. 그들에겐 기회가 있었고, 기회를 붙잡을 능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편의점과 마트에서, 혹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그들이 남긴 유산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1930년대 누메로와 프레데릭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맞잡은 그 때 덕이란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