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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부대를 움직이는 실세

▣태극기부대와 보수교계 한국은 경제 성장과 뜨거운 교육열, 인터넷을 통한 정보개방, 그리고 한국 사회의 높아진 민주주의 의식으로 인해 예전에 무조건 강대국을 칭송하던 사대주의 사관을 벗어나고 있다. 이제 “선진국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다”라는 보편적 자신감을 되찾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랬동안 미국에 기대어 온 한국의 보수 기독교계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이 한국역사와 민주주의 성숙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는 것이 불편하다. 이번 최순실 사태에서 대형 성조기들 들고 나와서 시위를 벌인 보수 기독교계가 보여준 행동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언론에다가 무당 최순실, 무당 사이비. 오복낭 등이 미신이라고 공격을 가했다. 사고를 친 당사자는 최순실인데 괜한 무당을 도매급으로 사이비로 매도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전통문화와 고유역사를 사이비로 몰아갔다. 이들이 대형 성조기를 들고 나와서 보여준 극단적 친미적 행동들은 한국이 영원히 미국의 그늘 아래서 머무르고자 하는 사대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한국 정치 개혁과 적폐 청산을 하는데 성조기를 들고 나와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근본주의 우파 기독교도로서는 미국이 신의 나라이자 모든 것을 따라 배워야 할 모범인 반면 한국의 역사 문화는 전부 저열하거나 미개한 미신, 사이비, 우상숭배라고 배웠기 때문에 없애 버려야 할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한국인이 훨씬 많기 때문에 당연히 반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2002년 6월 ‘미선이 효순이 사건’ 이 터지고 2003년 대형교회에서 일제히 대형성조기를 흔들며 “미국 만세”을 외친 기독교단체들의 친미 시위를 두고“기독교는 사대주의적 집단이었다” 라고 크게 국민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그러 인해 한국 기독교의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으로 추락을 했다. 기독교를 ‘개 같은 종교’라고 폄하하는 ‘개독교’라는 유행어가 널리 쓰인 계기도 바로 2003년 3월 1일 기독교 단체들이 대규모로 벌인 친미 시위 때문이었다. 한국 기독교의 친미 사대주의 성향 이외에도 그들이 국민들로부터 개독교라는 욕을 먹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바로 지도자층이 부패하고 타락한 기득권 세력과 결탁하여 스스로 부패하고 타락한 권력 계층이었다는 것을 증명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2016년 10월 벌어진 역사상 최악의 부패 스캔들인 최순실게이트에서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대통령 박근혜와 그 측근 최순실을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세력중 상당수가 바로 근본주의 보수 기독교 계통이라는 사실은 한국 기독교의 극심한 부패와 타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아울러 대형교회들은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광화문 광장에서 개최하면서 대형 성조기와 십자가를 흔들었으며 심지어 이스라엘 국기까지 들고 나왔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사진이 찍힌 겉옷을 입고 다니거나 심지어 미국 정부에 “박근혜 탄핵을 무효화시켜달라!”라는 청원까지 보냈다. 박근혜 탄핵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미국 정부한테 박근혜의 권력을 지켜 달라고 구걸하는 것은 누가 보기에도 한국 기독교가 친미 사대적인 집단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방증해 준 사건이었다. 도올 김용옥은 자신의 저서 『사랑하지 말자』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문화는 현재 근원적으로 그 진리 자체와 무관한 반공이라는 이념과 결탁되어 우리 민족의 통일을 가로 막는 가장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둘째, 한국 기독교는 지나치게 배타적이며 독선적이다. 자기의 교리만 지선이며 그 나머지는 모두 사악하다고 보는 단순논리는 우선 사회의 온갖 양태의 분열을 조장하는 끊임없는 에너지가 되고 있다. 셋째, 한국의 기독교는 지나치게 종말론적이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명료한 의식을 흐리게 만든다. 인간의 모든 문제를 초세간적 실체를 동원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현실을 개선하는 치열한 노력을 너무 쉽게 포가하며, 막연한 하나님의 품에 실존을 방치한다. 넷째, 학국의 기독교는 지나치게 친미적이며, 친서구적이다. 친미는 냉엄한 정치적 이해득실의 문제일 뿐 정신적 굴종의 기반이 될 수 없다.〈사랑하지말자 중-〉 조선의 성리학은 그들이 ‘하늘의 나라天朝國’라고 숭배하던 중국에 기대어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행세했지만, 중국이 서구 열강의 공세 앞에 무너지자 어쩔 줄 모르고 갈팡질팡하다가 일제의 침략에 몰락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한국 기독교 역시 그들이 신의 나라라고 숭배하는 미국의 위세에 빌붙어 부와 권세를 누려오다가 미국이 주도하는 냉전이 끝나고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쇠퇴 등으로 국제 정세가 변하자, 그동안의 온갖 병폐와 부패상이 드러나면서 매서운 비판과 질타의 대상이 되어 그 기득권이 흔들리고 있다. 조선 말 유교는 극심하게 부패하고 타락하여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국민들에게 분노와 환멸의 대상이 되어 기득권을 잃고 버림받았다. 오늘날 대한민국 기독교는 사회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최악으로 타락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어쩌면 현재의 기독교도 조선말의 유교처럼 역사의 뒤안길로 몰락할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끝없이 반복된다.《자주파 VS 사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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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을 연구한 공학자, 길브레스 부부 (3)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 캐릭터들의 움직임이 눈에 띕니다. 각 캐릭터는 마치 살아있는 양 생생하게 움직이지만, 그런 동작 속에서도 확실하게 캐릭터 개개인의 성격이나 특성이 드러나도록 하죠. 애니메이터들의 갖은 연구와 아낌없이 들인 노고가 아니라면 분명 그같은 결실을 보기란 어려울 겁니다. 디즈니 스튜디오가 배우들의 실사 동작을 연구 분석한 사실을 아시나요?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던 백설 공주에서 일곱 난장이 중 하나인 도피란 캐릭터는 코미디언 에디 콜린스의 연기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터들은 도피의 이미지에 가장 흡사한 에디 콜린스를 초청해 그에게 도피의 연기를 하게 하고, 이를 촬영해 프레임 단위로 분석하고 연구했습니다. 이를 통해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가 정말 살아있는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알아냈죠. 비록 지향점은 다르지만, 디즈니 애니메이터들도 길브레스 부부처럼 무척 세심하게 인간 동작을 연구하고 각자 자신들 목적에 맞는 최적의 동작을 도출해 낸 셈입니다. 서로 다른 분야라도 방법론에선 일견 비슷해 보일 수 있단 사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에디 콜린스와 도피. 1934년작 백설공주를 제작하면서 디즈니는 다양한 기술과 역량을 활용했습니다. 세트장에서 실제 연기하는 배우들의 움직임을 따서 캐릭터에 입히는가 하면, 멀티플레인이란 기술로 배경에 깊이감과 입체감을 줬죠. 1924년 프랭크 길브레스가 급사합니다. 동작 연구를 시작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으로 작업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를 통해 회사와 노동자 양측 모두 윈윈할 수 있다고 믿은 인물이었죠. 자연히 그의 컨설팅 회사엔 그의 명성을 듣고 온 전미 유수의 기업들이 고객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으면서, 이들 회사와 맺은 컨설팅 계약도 날아가 버립니다. 어쩌면 프랭크가 평생 세워 올린 업적은 이 때에 사라지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부인 릴리언 길브레스는 결코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죠.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 그가 참석하려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제 1회 국제 경영 컨퍼런스>에 참석해 논문을 발표합니다. 참석자들 중 유일한 여성이었죠. 또 때마침 출범한 영국 여성공학협회에도 <산업공학에서 여성을 위한 기회>라는 글을 기고합니다. 여기서 릴리언은 산업공학이 신생 분야이기에 기존 공학보다 여성 참여가 수월하며, 여성 노동자와 가사노동 분야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여성이 접근하기 쉬운 연구 방법을 활용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여성 공학도들의 참가를 촉구했죠. 1925년에는 퍼듀 대학 기계공학과에 동작연구 강의를 맡아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을 개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직접 기업체에 방문해 현장 실습을 해보는 기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이렇듯 릴리언은 왕성한 활동으로 남편 못지 않은 업적들을 쌓아 올렸습니다. 길브레스 사 사장에 취임한 후 그녀는 '여성지향적 컨설팅'을 내세웠고, 여성들을 고객으로 한 기업들을 신규 고객으로 유치했죠. 한 예로, 1926년 존슨&존슨 사를 컨설팅할 때는 생리가 여성노동자 피로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 생리 기간 중 여성 노동자의 작업 시간을 융통성있게 조절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적 관리를 가정에 접목시키는 시도 또한 이루어졌습니다. 릴리언은 1927년 <가정주부와 그의 일>을, 1928년 <아이들과의 생활>을 출간했고, 가정학, 공학, 경영학 전공의 여자 대학원생들을 모아 가사 노동 분야에 대한 공동 연구를 했습니다. GE 사의 프로젝트에선 4천 명 이상의 여성을 인터뷰해 스토브, 싱크대, 주방 설비 등의 적정 높이를 설계하고 부엌 디자인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죠. 이전까지 부엌은 비효율적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음식 저장고는 집 어딘가에 따로 두고, 각종 가구들도 아무렇게나 집 여기저기에 연관성 없이 놓여 있었죠. 릴리언은 이것들을 한데 모아 현재도 쓰는 L자형 배열을 만들었습니다. 또 쓰레기통에 페달을 달아 밟으면 뚜껑이 열리게 했고, 냉장고 문 안쪽에 계란이나 버터를 보관할 선반을 추가했죠. 당대 남성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생활 속 불편한 부분들을 릴리언은 효율적으로 개선해 나갔습니다. 릴리언 길브레스의 연구에서 영감을 받은 부엌 디자인. 1930년대 후반이면 냉장고를 제외한 모든 주방 가구들이 마치 하나의 유닛처럼 통합되었다고 합니다. 해럴드 트리뷴에서 예전 주방과 길브레스가 고안한 주방을 비교한 결과, 이전보다 새 주방에서 걷는 거리가 1/6까지도 줄었다네요. 과거 주방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구조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페달식 쓰레기통의 유래엔 다른 설이 하나 더 있습니다. 1939년 스웨덴의 홀거 닐슨이란 사람이 아내의 미용실을 위해 발명한 Vipp pedal bin이 시초라는 설인데요.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따져봐야 의미없을지도 모르죠. 1929년 후버 대통령 영부인인 루 헨리 후버가 릴리언에게 걸스카우트의 컨설팅을 요청합니다. 이걸 계기로 릴리언은 행정부에도 발을 들이밀게 되죠. 1930년 대통령 직속 고용위원회에서 일자리 나누기 사업 여성 분과를 담당해 운영하는 등, 공공 분야에도 공헌을 합니다. 2차 대전 시기엔 정부 조직, 위원회, 군에서 조직 내 교육 및 노동 문제를 자문하는가 하면, 트루먼 행정부에선 민방위 자문 역을 맡기도 했죠. 한국전쟁 때도 그녀는 여군 국방 자문위에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40년 퍼듀 대학은 릴리언을 정교수로 임용합니다. 이로써 그녀는 미 공과대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습니다. 릴리언은 퍼듀 대학에 산업공학 교육이 정착되는 데 공헌함은 물론, 공학을 전공하는 여학생들을 상담해 진로 지도에도 힘씁니다. 1948년에는 위스콘신 대, MIT 등 미국 내 여러 대학에서 산업공학 교수로 그녀를 초빙하죠. 처음엔 남편 그늘에 가려졌을지라도, 릴리언은 끝내 세상에 자신만의 업적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릴리언이 없었다면, 오늘날 남편 프랭크 길브레스의 업적도 잊혀지지 않고 지금과 같이 남을 수 있었을까요? 릴리언 길브레스는 93세까지 장수합니다. 공학의 퍼스트 레이디란 별명에 어울리게, 1968년 은퇴하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죠. 은퇴 후 요양원에 들어간 그녀는, 1972년 뇌졸증으로 사망합니다. 그녀가 죽은 후, 사회 각계에서 그녀와 그녀 남편을 기려 젊은 엔지니어와 여성 엔지니어를 표창하고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기념 사업이 지속되었습니다. 평생 자신들 분야를 개척하고 후학 양성에 힘쓴 부부에겐 아마도 기쁠 일이겠죠. 오늘날 미국과 세계의 모습을 만든 데에는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길브레스 부부 역시 그들만의 괴짜같은 방법론으로 현대 문명에 기여했죠. 지금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보는 건 항상 흥미진진합니다.
김수로왕 부인과 바보 온달은 외국인이다.
가야는 신라보다 99년 늦은 AD 42년에 건국되었습니다. 당시 김해 지역은 9명의 촌장(九干)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내가 있는 곳은 어디냐?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임금을 얻으리라.” 이에 촌장과 주민들이 구지봉에 모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는 ‘구지가’ 노래를 부르며 한나절 내내 춤을 추자 하늘에서 자줏빛 줄에 붉은 궤짝이 내려왔고 상자를 열어보니 6개의 황금알이 나왔다네요. 그중 가장 먼저 깨어 난 이가 김수로왕이 되어 금관가야를 건국했고, 나머지 5알에서 태어난 동생들이 각각 나머지 5개 가야국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6년 뒤 김수로왕은 결혼하라고 성화를 부리는 아홉 촌장 들에게 “귀인이 바다 건너올 것이다.”라며 맞으러 나가게 합니다. 그러자 정말 붉은 돛을 단 배가 나타났 는데, 왕이 직접 데리러 오지 않으면 내리지 않겠다고 버티자, 수로왕이 그 말이 일리가 있다며 직접 맞이하러 가니 허황옥이 “저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 입니다.”라고 밝혔다지요. 이에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임시 궁궐을 마련하고 2박 3일간 지낸 후 김해로 되돌아와 알콩달콩 살며 무려 10명의 아들을 두었다는데, 태자 거등왕은 김해 김씨로서 후계를 잇게 되니 현재 대한민국 최대 가문 400만 명의 조상님이 되셨고, 두 아들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씨가 되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같은 허황후의 인도 공주 기록에 대해 오랫동안 학계는 불교가 도래한 뒤 가문의 신성함을 강조하고자 인도에서 왔다고 윤색한 것으로 추정했는데, 2009년 서울대 의대팀이 김해 이안리 고분 인골을 분석해보니 인도 남부인과 유사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준 바 있고,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고려대학교 조호영 교수팀에 의뢰해 김해에 있는 파사석탑 재질을 분석해보니 우리나라 돌이 아니라는 것도 밝혀진 상황입니다. 따라서 허황옥 공주가 인도에서 온 것은 거의 확실해지고 있습니다. 이미 《삼국유사》에서 일연 스님이 김해 호계사 파사석탑의 유래를 설명하는 내용에 “허황옥 공주가 중국 동한 건무 24년(AD 48년)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왔다. 부모의 명을 받고 바다를 건너 가야로 오려고 했는데 풍랑이 심해 되돌아오자 아버지가 석탑을 싣고 가라고 명령해 배에 실으니 곧 바다가 잔잔해져 두 달여 만에 가야까지 왔다. 탑은 모가 4면에 5층이고 돌에는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는데, 그 질이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 사실을 700여 년 뒤 다시금 현대 과학으로 입증한 것이죠. 또한 인도인인데 왜 성이 허(許)씨냐고 반박하는 경우도 있는데 ……, 같은 시대 이스라엘 땅에 살던 귀족 가문 도 허(Hur)씨였어요. 말도 안 된다고요? 아뇨, 진짜에요. 영화 ‘벤허(Ben Hur)’ 보셨을텐데요. 주인공의 이름이 ‘벤’이고 성이 ‘허’씨에요. 유태인 중 ‘허’라고 불리는 가문이 있으니 한국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인도에 허씨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같은 기록을 재해석해보면, 신라 혁거세와 마찬가지로김해 지역에 나타난 북방 철기 세력이 기존 토착 세력을 아울러 금관가야를 세웠으며, 뒤이어 인도에서 유래한 남방계 해양 세력이 도착해 두 세력이 권력을 나눠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는 ‘바보 온달’ 이야기에는 당시 고구려의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고구려가 내분으로 약화되던 25대 평강왕 시절에 그의 딸,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溫達)에게 시집간 뒤 남편을 훌륭히 교육시켜 결국 온달을 장군으로 만들었고, 그후 침략한 중국 후주(後周)군과 맞서 싸워 이기고는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 출정했다가 결국 전사했다는데, 최근 일부에서는 온달이 이란 북쪽 사마르칸트에 살던 스키타이계 유목민인 소그드(Sogd)인으로서, 당시 중국을 거쳐 고구려로 귀화한 세력이 아닐까 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인들이 보기엔 아리아계 백인에다가 고구려 말도 못하는 그들이 추하고 바보스러워 보였을 거라는 거지요.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당시 중국에 피난 온 소그드 왕족이 쓴 성씨가 온(溫)씨였다고 하고, 고구려 각저총 벽화 ‘씨름도’에서도 확연히 우리와 다른 서역인이 등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라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괘릉의 무인상에도 서역인 모습을 한 조각상이 남아 있기에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즉,당시 평강왕으로선 귀족들의 병력 동원이 여의치 않아 왕실 직할 병력이 작다 보니 이주민 세력인 소그드인의 우두머리인 온달을 사위로 맞아 이주민 소그드인들을 직할 군사로 편입해 과감히 영토 회복 전쟁을 벌였을 거란 거지요. 그러니 평강공주는 울다가 바보 온달에게 시집간 게 아니라 이주 외국인 온달에게 시집가라고 하니 싫어서 울었던 것은 아닐까요?
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1) - 1923. 5. 13 진주
1923년 5월, 진주의 일반 농민 250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무언가를 모의합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이하 다섯 개 조의 결의를 내놓죠. 1.형평사와 관계 있는 자들에 한해 백정과 동일하게 대우한다 2. 소고기를 반드시 불매운동한다 3. 진주청년회가 형평사와 절대 관계 없도록 한다. 4. 노동단체에서는 형평사와 절대 관계하지 말게 한다. 5. 형평사를 배척한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들은 그 좋다는 소고기도 끊겠다고 굳게 다짐한 걸까요? 형평사가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청년회와 노동단체까지도 이를 배척하게 한 걸까요? 형평사는 백정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처우 개선을 추구하여 설립한 사회 운동 단체입니다. 잠깐, 그렇다면 왜 노동단체가 그들과 관계하지 말아야 한단 걸까요? 노동단체란 본래 부당한 처우를 받는 노동자들이 조직하는 것 아닌가요? 같은 약자인 백정들에게 어째서 노동자들마저 등을 돌리고 만 걸까요? 이번 글은 조선에서 가장 천한 계급이었던 백정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은 갑오개혁이라고 알려진 일련의 개혁 조치들을 내놓았습니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동학 농민 운동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이제 막 내정간섭을 개시한 일제의 요구에도 맞춰 주어야 했죠. 여하간 정부는 1894년 7월 2일 그전까지 이어진 신분제를 폐지하는 선언을 내놓습니다. 1.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선발할 것. 2.공사노비법 일체 혁파, 사람을 매매하는 것을 금지. 3. 역노비, 광대, 가죽공인 등 천인을 면천함.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무어 목사는, 이때 백정들이 기뻐하기가 마치 링컨의 노예 해방령에 흑인 노예들이 기뻐하는 것보다 더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백정들 가운데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밤낮없이 갓을 머리에 쓰고 지낸 이도 있다고 하죠. 이전까지 백정들이 받은 차별 대우를 놓고 보면 그들이 이렇게 기뻐하는 것도 이해할 만 합니다. 조선 왕조 내내 백정들은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되도록 온갖 제약을 받아왔죠. 지붕에 기와를 얹을 수 없고, 옷에는 명주를 쓸 수 없다. 갓, 탕건, 털모자 등을 쓸 수 없고 두루마기, 가죽신을 입거나 신을 수 없다. 외출할 때는 봉두난발에 패랭이를 써서 식별 가능케 하는데, 갓끈은 종이나 새끼줄로 한다. 여성은 비녀를 쓸 수 없다. 일반인 앞에서 음주, 흡연, 연회 등을 할 수 없다. 관혼상제시 상여를 쓸 수 없고, 묘지는 일반인과 구분해 쓰며, 혼례에 말과 가마를 쓸 수 없고, 머리에 쪽을 이거나 상투를 틀 수 없다. 집안의 가묘를 쓸 수 없고 풍수를 볼 수 없다. 백정은 상대가 어린아이라도 평민이면 복종하고 자신을 소인이라고 칭해야 하며 평민과 나란히 걸을 수 없다. 공공집회에 출입할 수 없고 일반인 집에 함부로 드나들 수 없다. 거주지는 일반인과 구분해 교외 일정 지역에 집단거주한다. 특정 성씨만 사용 가능하며, 이름에 충, 효, 인, 의 네 글자는 넣을 수 없다. 조선 시대 백정들이 생활 속에서 받은 각종 규제가 이 정도입니다. 1809년 개성의 한 백정은 결혼식 예복으로 관복을 입었다가 사람들에게 폭행당하고 집이 박살난 일도 있었죠. 뿌리 깊은 차별은 정부가 신분제를 폐지한 후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정부 또한 신분제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마음이 없어 보였죠. 1896년 9월 조선은 호구조사규칙과 호구조사세칙을 시행합니다. 이 결과 지금까진 배제되던 백정 역시 호적에 등재될 수 있게 되죠. 그러나 실제로는 이 과정에서도 차별이 공공연히 자행되었습니다. 승려와 백정은 일반인과 별도 호적에 등재되었죠. 또 백정은 호적에 빨간 글씨로 '도한'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도한은 즉 도축업을 하는 사람, 백정을 뜻합니다. 마치 빨간펜으로 이름 쓰면 죽는다는 속설처럼, 호적에 빨간색으로 신분이 적힌 백정을 사람들은 얼마나 꺼림칙하게 여겼을까요? 이런 차별은 일제강점기에도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1922년 일제가 조선호적령을 시행할 때도 백정은 그 본적에 도한으로 기록되었거든요. 1897년 3월 내부의 훈령에 기초해 경무청고시가 발표됩니다. <서울 5개 경찰서 내에서의 금지조항>이란 제목의 고시엔 '천역하던 사람이 분수를 넘어 강상을 범하여 행패하는 것을 금함'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죠. 한 번 백정이면 끝까지 백정. 국왕의 칙령이 있은 후에도 사회적 차별의 꼬리표는 여전히 떼어지지 않고 따라 붙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백정이란 꼬리표는 사실 처음부터 차별의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1423년 세종 5년, 병조에서 이런 제안을 합니다. '재인, 화척은 본래 양인인데 직업이 천하고 호칭이 달라 백성들이 다른 족속으로 보고 혼인을 꺼리니 이를 백정으로 고쳐 부르자.' 그전까지 백정 및 그와 유사한 천민들은 재인, 화척 등으로 불렸습니다. 오히려 고려에선 백정이 일반 백성을 뜻하는 말이었죠. 그러니까 병조의 뜻은, 과거 재인 화척으로 천대받던 사람들을 이른바 '신백정', 즉 새로 백정 양인이 된 사람으로 고쳐 불러 융화시키자는 의도였을 겁니다. 다만 그 이후로도 백정들은 실록상 재인, 화척, 양수척 등 백정 이외 다양한 이름이 혼용되어 쓰입니다. 또 신백정에서 새로울 신, 한 자가 빠지면서 그냥 '백정'으로 불리게 되지요. 유기장, 고리백정, 갓바치, 도축업자 등 사회에서 천시받는 일을 하던 백정들은 조선 시대 내내 사회 최하층집단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차별이 어찌나 심한지, 외국 선교사들은 백정들의 처우를 보고 곧장 인도의 카스트 최하층 불가촉천인을 떠올리곤 했답니다. 갑오개혁 후 신분제가 법제적으로 폐지된 후에도 차별은 공공연히 이루어졌습니다. 1900년 2월, 진주군 등 16개 군 백정들이 진주 관찰사에게 소를 넣습니다. 갑오개혁 때 칙령에 따라 백정도 관을 쓰고 의복을 갖춰 입을 수 있게 되었으니, 자신들도 칙령에 따라 관을 쓰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나랏님 말씀을 따르겠다고 하는 거니 별 문제가 없을 듯도 하지만, 진주 관찰사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정 백정들이 갓을 쓰고 싶다면 갓끈은 소가죽으로만 해라!' 소청을 하러 온 백정들 앞에서 이렇게 일갈한 후, 관찰사는 백정들을 관청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물러날 백정들이 아니죠. 이제껏 얼마나 차별당해왔는데 겨우 이 정도로 물러날 수 있습니까? 백정들은 중앙 정부에 상소를 넣어 부당함을 호소합니다. 결국 해당 관찰사에게 백정을 천대하지 말라는 지령이 내려오죠. 하지만 같은 해, 진주에서 백정들이 갓, 도포를 쓸 수 있게 되었단 소식을 들은 양민들이 수백 명 떼를 지어 백정들 마을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옥이 여러 채 파손될 정도로 그 수위가 심각했다네요. 백정 및 천민들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패랭이.A.K.A. 평량립. 재미있게도 <연려실기술> 등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천민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이 패랭이가 잠시 유행한 얘기가 적혀 있답니다. 왜군들이 갓을 쓴 양반이 보이면 잡아가지만, 패랭이를 쓴 천민을 보면 극빈자라 해서 놓아줬다나요? 1898년 시흥에서는 패랭이 대신 갓을 쓰게 해달라는 백정들 요청에 지방관이 생 소가죽을 백정에게 덮어씌워 모욕한 사례가 있습니다. 1901년 예천에선 백정 3인이 백정 신분을 면하게 해 주겠다며 돈을 요구한 군수에게 저항하다 수 개월간 투옥당한 일이 있었죠. 문경의 백정 하나가 이 소식을 듣고 서울까지 가서 이 같은 작패를 모두 금하라는 훈령을 들고 돌아왔는데, 문경군수가 이 사람을 옥에 가두고 재산을 강탈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서울 백정들이 중앙 정부에 호소해 이들을 풀어주고 재산을 돌려줄 것을 청했죠. 백정들도 이런 차별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진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때문에 그들 역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죠. 1898년 만민공동회 연사로 백정 출신 박성춘이 나서는가 하면, 당시 부유한 백정들이 지역 학교 설립에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에선 충북 지역 백정들이 성금을 내고, 심지어 의병 운동에 직접 백정들이 뛰어들기도 했죠. 의병장 최익현 영정. 한때 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지지했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등 실정을 규탄하며 고종 친정을 이끌어낸 인물이고, 일본 및 서양과의 문호 개방을 끝까지 반대한 위정 척사파의 대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06년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지만, 관군과 싸우지 않기를 고집해 포위당합니다. 이때 인근 백정 김경철이란 자가 관군의 포위를 뚫고 와 의병대에 가담하길 청했다네요. 승패가 갈린 상황에서 패배가 확정된 편에 선다고 결심했을 때,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기독교나 천도교 같은 종교 단체는 백정들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백정과 양민을 중재해 함께 예배를 보게 하려 노력했죠. 천도교는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교리를 내세워 천민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도 패랭이 쓴 무리가 동학군 중에 가담해 있었다고 합니다. 패랭이가 백정 천민의 상징 같은 것임을 놓고 볼 때, 굳이 백정 외 다른 양민이 그것을 일부러 골라 쓰진 않았을 듯합니다. 이렇게 백정들은 자력으로 , 또 사회 각계의 응원으로 차별 편견을 극복하려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차별은 그들 생각보다도 훨씬 끈질기고 집요하게 백정들을 괴롭혔습니다. 백정들이 뒤집어 쓴 사회적 경제적 굴레는 그리 쉽게 벗길 수 없는 것이었죠. 1896년 1월, 조선 정부는 백정들을 직업적, 경제적으로 규제하는 <포사규칙>을 선포합니다. 갑오개혁 후 밀어닥친 근대화의 물결은 이제 백정들에게도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멍에를 씌우려는 것입니다.
미국 WHO 공식 탈퇴 통보
CBS노컷뉴스 고영호 기자 (사진=연합뉴스) 미국이 세계보건기구·WHO를 탈퇴를 통보했다. 7일(현지시간) CNN 등 외신에 따르면 미 의회 상원 외교위원회 민주당 대표인 로버트 메넨데즈 의원이 트위터에 "의회가 대통령이 WHO에서 공식적으로 탈퇴시켰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전했다. WHO 탈퇴서는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출됐다. CNN은 유엔으로 보낸 탈퇴서가 3개 문장에 가까운 매우 짧은 내용이라고 보도했다. 공식 탈퇴는 탈퇴서를 낸 후 탈퇴절차를 거쳐 1년 후인 내년 7월 확정된다. 일본 NHK도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가 7일 NHK와 통화에서 "트럼프 정권이 코로나19에 대한 WHO의 중국 성향을 비난하며 WHO에서 내년 7월 6일 탈퇴할 것을 UN사무총장에게 정식 통보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WHO가 코로나와 관련해 중국에 편중됐다며 지난 5월 WHO와 모든 관계를 끊겠다고 탈퇴를 시사했다. 트럼프는 당시 백악관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WHO에 1년에 5천 386억 5천만 원(4억 5천만 달러)을 내는데 중국은 478억 8천만 원(4천만 달러)밖에 내지 않으면서 WHO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미국은 WHO가 취해야 할 개혁 방안을 마련했지만 WHO는 행동하기를 거부했다"며 "미국은 WHO와 관계를 끊고 지원금을 다른 긴급한 국제보건상 필요에 재배치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6일 일본 교도통신과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WHO를 비난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무책임한 태도"라며 ""코로나 발생지가 우한인지 여부는 나중에 조사해도 되고 지금은 WHO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생명을 구하는 것을 우선해야 할 때"라며 WHO를 탈퇴하려는 트럼프를 비판했다. newsman@cbs.co.kr
프랑스는 어째서 알제리를…?
월요일은 역시 역사지. 사실 어제, 7월 5일은 알제리의 독립기념일이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19세기 초중반, 굳이 왜 알제리를 식민지로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프랑스의 19세기 초중반이면 나폴레옹 전쟁 이후 왕정이던 시절이며 본격적인 강대국으로의 재진입은 아마도 크림 전쟁 이후였었다. 알제리는 왜? 당연한 얘기겠지만 불어권 게시판(가령 Quora?)에서 이 주제가 올라오면 단번에 화약고로 변한다. 우리랑 똑같이 식민지 근대화론자와 수탈론자의 논쟁은 물론이거니와 불어권 특유의, 그러니까 구 프랑스 식민지들이 네이티브로 불어를 쓰기 때문에, 서로들 프랑스 옛날 자료를 근거로 불어로 키배를 벌이는 광경은 상당히 흥미롭기 짝이 없다. 우리는 일본과 우선 언어 때문에 키배하기가 쉽지 않다. 자, 일단 북아프리카의 노예 시장부터 알아봅시다.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 이후 북아프리카로 물러난 무어인들은 형식적으로 오토만투르크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워낙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거의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느낌으로는 조선의 사대관계보다 아주 약간 더 종속적인 정도? 지도자를 “국왕(ملك)”이라 부르지 않고 “총독(داي)”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총독을 주민투표로 뽑았다는 점이 더 신기한데, 이들의 주된 먹거리는 농업 외에 노예 무역이었다. 그리고 그 노예화 대상은 주로 남유럽에 살고 있는 크리스트교 신자들이었다. --------- 여기까지 보면, 노예 무역 막다보니 어느새 식민지를? 하는 잘못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노예 무역을 언급한 이유는 당시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 북아프리카가 해적 소굴로 비쳐졌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프랑스가 식민화에 나서는 19세기 초중반은 영국이 대양을 재패한 시기이기 때문에 해적 노릇하기가 영 쉽지 않았었다. 영국만이 아니라 더 이상의 전쟁을 중단한 프랑스와 미국 해군도 해적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 시기에는 해적질/노예 사냥으로 밥벌이를 못 했다는 얘기다. 이는 자연스럽게 북아프리카 내의 내분으로 이어졌고, 이 틈을 타서 프랑스가 진출/침략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리고 이때 부채가 등장한다. 부채? 빚의 의미도 있고 선풍기의 의미도 있는데 둘 다 맞다. 프랑스 대혁명이 나면서 프랑스는 유럽에서 고립됐고, 부족한 밀을 알제리 지역으로부터 수입했는데 대금을 내 줄 형편이 못 됐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전 유럽 국가들과 전쟁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절반만 상환하고 전쟁이 끝나면 다 갚겠다며 사절을 보냈는데… 그 말에 화가 난 알제리 지역의 총독이 프랑스 사절을 부채로 때렸다. 짤방의 이 사건(Le coup d'éventail, 1827, 출처는 위키피디어)이 프랑스 국내에 일으킨 반향이 매우 컸다. 모욕적이라 느낀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알제리 침략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 여기까지 보면, 사소한(?) 사건 하나로 인해, 부채를 탕감하려고 나라를 접수한(…) 이야기가 된다. 물론 시발점이 맞기야 하지만 고작 부채 때문에 알제리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크게 세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영국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이미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결과로 지브롤터를 점령(1714)한 영국에 대해 프랑스도 아프리카 해안 어디엔가 거점을 마련해야 했다. 이미 나폴레옹이 계획을 세웠으며 측량도 다 해놓았지만 유럽 내 전쟁이 더 급했었다. 한편으로는 무하마드 알리 치하의 이집트를 동원하여 알제리 지역을 점령하는 구상도 있었다고 한다. 재주는 이집트가, 돈은 프랑스 걷어가자는 계획이었으나 종주국인 오토만투르크가 이 계획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그래도 혼자 설치려는 이집트가 더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인 오토만투르크의 친구(…) 프랑스로서도 오토만투르크의 지원이 없다면 실행이 불가능한 구상이었다. 두 번째. 프랑스 국내 사정이다. 워털루 전투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뒤를 이은 왕정으로서는 국내 지지율 상승을 위해 “뭔가 확실한 건수”가 필요했다. 게다가 가난한 국내 농부들(특히 코르시카 지역)의 진출을 도울 수 있었다. 세 번째. 프랑스 국외 사정이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글로벌 파워”로서 다시금 내세울 만한 “건수”가 필요했다. 게다가 위치상 서아프리카 식민지역들과 연결도 가능했다. --------- 그런데 말입니다. 역사만 얼핏 보면 1830년에 알제리 전역을 프랑스가 식민화 시킨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19세기 말까지도 알제리 전역을 프랑스가 점령하지는 못 했었다. 매우 긴 시간동안 군사 작전을 실행해야 했다는 의미다. 저항이 거센 것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진행시키지 않은 탓이 컸다. 위의 부채 사건으로 프랑스가 군대를 보낸 것은 맞지만 처음에는 알제 항구만 폭격했었고, 더 이상 들어가려 하지 않았었다. 처음부터의 계획은 아니었던 셈이다. 하다보니까 끝까지 들어가고, 해안가 반란도 막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게 부드럽게 진행되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학살과 방화는 도처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키배가 일어나는 겁니다. 알제리라는 독립된 나라가 그당시에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인들 입장에서 알제리 지역은 “발견됐다”거나, 알제리라는 나라를 프랑스가 130년 동안 세웠다고 볼 여지가 있지만, 알제리인들 입장에서는 프랑스인들 기록을 보더라도 너무나 가혹하게 점령하고 지배한 증거가 많은 것이다. 결론은 영원한 키배… 1960년대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진보당 논평] ‘폭죽 난동’ 미군 전원 공개하고 처벌하라
지난 3~6일 해운대 해수욕장 일대에서 벌어진 주한미군의 난동으로 우리 국민 다수의 생명이 위협받는 일이 발생했다. 수많은 미군들은 해운대 해수욕장 일대에 떼로 몰려다니며 폭죽을 쏴댔다. 미군이 건물이나 지나가는 시민을 가리지 않고 폭죽을 쏴대자, 미군의 광기에 공포를 느낀 시민들의 경찰 신고가 이어졌다고 한다. 해운대 해수욕장 일대에서 난동을 부린 미군은 대부분 오산과 군산, 대구 등지에서 주둔하는 미군이라고 한다. 미군은 자국의 독립기념일을 기념한다는 이유로 무질서하게 음주가무를 즐긴 채 폭죽을 터뜨리며 국민들을 위협했다. 미군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는 등 안전 수칙도 전혀 지키지 않았다. 시청과 구청 직원들이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 두기를 안내했지만 많은 미군들은 이를 무시했다고 한다. 평소 한국의 주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미군의 안하무인에 분노한다. 미군 사령부는 국민의 분노가 높아지자 폭죽 난동에 미군 장병이 연루됐는지 확인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가한 처사다. 미군은 폭죽 난동에 당장 사과하고 연루 미군들을 전원 공개, 처벌해야 한다. 외교부, 국방부 등 미군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관계 당국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점은 씁쓸하다. 미군은 우리 경찰의 제지에도 이를 우롱하며 시민을 직접 겨냥해 폭죽을 쏘는 등 온갖 추태와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우리 경찰은 단 한 명의 미군을 붙잡아 조사한 뒤 5만원의 과태료만 처분했다. 언제나 적극적인 처벌 의지가 미군 앞에서 멈춘다는 점은 서글픈 일이다. 미군의 안하무인은 비루한 사대주의에서 나온다는 것을 관계 당국은 잊어선 안 된다.
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2) - 1896. 1 한양
1896년 1월 18일, 그 해 첫 법령으로 이른바 <포사규칙>이 반포됩니다. 갑오개혁 이후 정부 당국이 반포한 두 번째 근대적 법률이었죠. 첫 번째 반포한 법률은 1985년 3월 반포한 재판소구성법이었습니다. 단순 법률 반포 순서만 놓고 보자면,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 법안같지 않나요? <포사규칙>이 규정한 내용은 딱 잘라 말해 이렇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도축 및 정육점업은 영업허가증을 발급받아 규정에 맞게 운영하고 세금을 내라.' 김이 새는 얘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법률의 의의는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동안 지방관 및 지방 세력가의 자의적 수탈 대상이었던 백정을 이제부턴 국가가 직접 지배한다, 라고요. 세계 여러 문명에서 어떻게 고기를 얻느냐, 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이슬람의 할랄이나 유대인의 코셔 전통에서 '무엇이 율법에 따라 올바른 방식으로 얻은 고기인가'를 세밀하게 규정한 것만 봐도 그렇죠. 복잡한 도축 과정과 절차를 거쳐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하고, 나머지 부산물과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먼 옛날 인류가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시되었습니다. 비록 오늘날엔 산업화, 고도화된 도축 및 정육 과정으로 인해 보통 사람들이 자신이 먹는 고기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거치는 과정을 대부분 알 필요가 없게 됐지만 말입니다. 코셔 및 할랄 규정의 일부. 몽골인이나 시베리아 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도축 방식이, 아마존 정글의 민족들도 그들만의 규율이 있을 것입니다. 그건 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소, 말, 돼지, 양, 닭, 개를 육축이라고 해서 민간에서 이를 키우고 잡는 것을 허용했죠. 최근까지도 시골에선 공공연히 민가에서 직접 소, 돼지를 도축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다만 조선 사람들도 소, 말은 민가에서 함부로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양에선 푸줏간이나 약 20개 정도의 도축소, 이른바 '현방'이 있어서 백정들이 그곳에서만 전문적으로 도축, 판매를 맡아 했다고 하죠. 선비들은 '군자는 푸줏간과 부엌에 드나들지 않는 법'이라고 해서 아예 이들과의 접촉 교류를 삼갔습니다. 1896년 포사규칙이 제정된 이후 민간 도축은 규제가 더 강해졌습니다. <포사규칙>에서 포사란 조선시대 정육점을 말합니다. 즉, 법률의 이름 자체가 정육점에 대한 규칙, 이란 뜻이죠. 포사는 본래 잡은 고기를 판매하는 가게만 의미했지만, 당시엔 현실적으로 도축과 육류 판매가 엄밀하게 분화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법령 내에서도 육류 판매뿐 아니라 도축업에 대해서도 규제했죠. 법령에 따라 정육점, 도살장업은 지방관청을 통해 신고하고 면허료를 지불해 영업허가증을 받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도살 자체는 백정들에게만 나오는 도축자격증인 빙표를 가진 사람만이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영업허가를 취득한 업주가 도축자격을 가진 백정을 고용해 영업을 해야 했죠. 소를 도축해야 할 때, 업주는 1마리에 80전 세금을 백정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면 백정은 그 세금을 군청에 납부하고 영수증을 받아 오죠. 이 영수증 없이 도축을 할 경우 백정은 도축자격을 잃고 거처에서 추방됩니다. 또 해당 백정을 고용한 업주는 영업허가가 취소될 수 있었죠. 세금은 영업장 규모에 따라 물렸습니다. 도축장을 매일 1마리 이상 도축하는 1등지부터 5일에 한 마리 정도를 도축하는 5등지까지 구분한 후, 매월 말 영업장이 무는 세금에 등급별로 차등을 뒀죠. 영업장 규모는 도축하는 소 두수만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돼지나 개는 부수적인 수취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 영업세를 포사세라고 하는데, 정부는 포사세 징수를 위해 군 단위까지 포사위원과 포사파원을 임명했죠. 1897년 독립신문은 당시 전국적으로 연간 2만 7천 여 마리 소가 도살된다고 했습니다. 이건 공식적인 수치로, 민간에서 자행되는 밀도축 수를 뺀 수치였죠. 조선 후기 소 도축이 이렇게까지 활성화된 이유는 두 가지로 꼽습니다. 하나는 조선후기 민간의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주류 및 육류 소비가 증가한 것, 또 다른 하나는 무역이 성황을 이루면서 주요 수출 품목인 소가죽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죠. 이로 인해 일부 지배층이 백정을 사사로이 고용해 소가죽을 수집하고 고기를 팔아 부정축재를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말 개항지를 통해 외국으로 향하는 주요 수출품 가운데서 소가죽과 소뿔 등은 항상 빠지지 않고 포함되었습니다. 특히 일본 상인들이 자국 가죽 산업 발달을 위해 필수적인 조선 소가죽을 확보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녔습니다. 일본에서 수입한 소가죽 가운데 약 7, 80%가 조선산일 때도 있을 정도였죠. 1824년 일본에 수출한 우피만 1만 5천 장 이상이었고, 이후로도 매년 거의 이 수치를 유지했습니다. 청과 기타 외국에 수출하는 우피 량까지 고려하면 당시 조선 내에서 연간 약 5만 마리 이상 소를 도축하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답니다. 자연히 징수한 포사세 또한 늘어야 했죠.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소 5만 마리면 포사세만 약 4만 원이 걷혀야 하지만, 1898년 실제 포사세 징수액은 고작 1305원 20전에 불과했죠. 단순 계산으로도 추산한 세수의 약 3~4%만이 실제로 걷힌 셈입니다. 이유는 있었죠. 일부 지배층이 공공연히 자행한 밀도축, 지방관과 포사파원 등의 횡령 문제는 물론이고, 일부 포사파원은 업자 및 백정들과 결탁해 멋대로 포사세를 인하하거나 아예 징수세액 자체를 탕감했습니다. 각급 관청간 마찰도 문제였습니다. 포사세 징수를 별도로 임명한 포사파원에게 맡기자, 지방관이 이들과 갈등을 빚었죠. 중앙은 중앙대로 포사세의 운영을 놓고 농상공부와 내장원이 대립했습니다. 포사파원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지급할 운영비를 제대로 주지 못해 포사파원들이 자의적인 수탈 횡령을 벌일 핑계가 생겼죠. 또 지방 세력가와 지방관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각종 명목으로 소고기를 정기적으로 상납받았습니다. <포사규칙>과 포사세를 둘러싼 난맥상은 당대 조선 사회 체계가 얼마나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는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게다가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정작 주체인 백정들은 소외당했습니다. <포사규칙>과 현존하는 시행세칙 그 어디에도 백정들의 처우나 급료 따위에 대해서는 규정한 바가 없습니다. <포사규칙>을 제정한 지배층의 관심사는 오로지 세금 부과와 징수에 있을 뿐, 그 밖의 문제엔 아예 눈을 감았습니다. 백정들의 처우는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개혁 이전과 다를 바 없었던 거죠. 1900년이 넘어가면 도축업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규정들이 세워집니다. 안타깝게도 이 절차를 진행한 건 대한 제국 뜻이 아니었죠.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 열강으로부터 한반도의 지배권을 사실상 인정받은 일제는 바로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내정 간섭과 침탈을 자행합니다.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의 진군로. 러시아는 일본 해군을 상대하기 위해 말그대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대한해협까지 진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적국인 영국 등의 견제를 받아가며 보급과 피로 등 온갖 문제에 시달린 건 물론입니다. 전쟁 결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경쟁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조선은 일본에 더욱더 예속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