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가슴이 답답한 증세(ft.스트레스 해소 마음명상)
가슴이 답답한 증세(ft.스트레스 해소 마음명상) 응용근신경학에 의하면 우리 몸은 화학적, 정신적 요소들이 연관성을 가지고 서로 영향을 주고 있는데 울화가 치밀면서 분노가 생기는 '화' 는 심장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늑골이 압박을 받으면서 호흡이 불편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한다. 스트레스는 press(압박)에서 시작된다. 외부의 환경이 나를 숨 막히게 하거나 내가 스스로 나를 숨 막히게 한다면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을 쉬지 못하며 긴장, 불안, 우울등의 증상을 겪게된다. 사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며 우리의 몸 전체의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가장 위험한 심독일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먹고 사는 최소한의 생존문제는 해결됐지만 타인과의 비교, 노후불안, 인간관계 갈등, 상대적 박탈감 과식, 운동부족, 쾌락적 삶의 적응등 여러가지 원인으로인해 수백년전 옛사람들에 비해서 더 큰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과학과 의학의 놀라운 발전속도에 비하면 정신적인 성장도 그만큼 발전했는지 미지수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세계 3대질병을 교통사고, 심장병, 우울증으로 명시했다. 인간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질병중 마음의 병인 우울증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이러니 하게도 심장병의 주요한 원인중 하나가 우울증이라는것이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진에 의해서 밝혀지기도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스트레스로 인한 이 가슴답답한 증세가 찾아왔을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1. 지금 하던 일을 당장 멈춰라.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는 것은 내 몸에 나에게 주는 경고신호이다. " 형(언니) 우리 집에 불이 났어" " 엄마! 귀신이 나타났어 무섭단 말이야" " 아빠! 나쁜 놈이 나를 때리려고 해 " 어떻게 해야 하나? 소화기를 들고 불을 꺼야 한다. 겁먹은 아이를 달래줘야 한다. 나쁜 놈으로부터 지켜줘야 한다. 2. 가슴 답답함의 원인을 찾아라. 우리는 심리의 뿌리보다는 몸의 증상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단지 증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병원을 찾거나 약을 먹어버리거나 격렬한 운동을 하거나 술로 풀어버리는등 심리적 회피를 하곤 한다. 어찌됐든 가슴 답답함은 심장의 증상이지만 심리적 스트레스가 원인이기에 스트레스를 받은 내 마음을 잘 살펴봐야한다. 엄마가 아이의 마음을 몰라주면 아이는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다. 아이 마음은 답답하고 화가 난다. 짜증난다. 우울해진다. 이처럼 내가 내 마음을 몰라주면 가슴(심장)은 계속 답답해진다. " 자기야! 내가 왜 답답해하는지 모르겠어? " 모르면 큰일난다 ㅎㅎ 3. 몸을 활짝 펼라! 스트레칭 가슴 답답한 증세를 겪고 있다는 것은 이미 스트레스로 인해서 몸이 긴장하고 경직되면서 숨통이 막혀 버린 것이다. 마음이 짓눌리면서 몸까지 짓눌려 버렸다. 그래서 일단 힘든 마음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짓눌린 몸을 활짝 펴줘야 한다. 일어나서 두 팔을 활짝펴서 하늘을 향해 깊은 호흡을 10번정도 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이 편하게 숨을 쉬기 위해서는 몸을 펴야 한다. 몸이 열리는 순간 닫힌 마음이 열리게 된다. 가슴 답답함을 자주 경험하는 사람은 수시로 스트레칭과 함께 숨을 쉬어주자. 물을 자주 마셔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4. 나가서 걸어라.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매일 앉아서 공부하고 일을 한다. 그리고 나의 뇌는 숨 쉴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평상시의 삶은 사실 스트레스 상황이다. 그래서 편안하게 호흡하기보다는 다소의 숨막힘, 답답함속에서 살아간다. 걸을때 가장 자연스럽게 의식하지 않는 기분 좋은 숨을 쉴수가 있다. 그동안 쉬지 못한 숨을 충전하는 것이다. 5. 여유로운 사람이 되라. 가슴이 답답해지고 불안하고 우울하다는 것은 이미 심리적으로 조급해진것을 의미한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하고 침착해야 한다. 너무 두려워하거나 당황해 하면 안된다. 이때부터는 의도적으로 천천히 행동한다. 천천히 호흡하며 생각을 정리한다. 천천히 물을 먹고 밥을 꼭꼭 씹어먹는등 자신에게 이렇게 자기암시를 하면 좋다. " 영국아! 아무일 없으니 괜찮아 " " 영국아! 천천히 차분하게 다시 시작해도 돼 " 6. 명상하라. 명상은 당신의 정신적 문제를 치료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해답을 줄 것이다. 물론 명상을 잘못 배우면 부작용에 시달리고 가슴이 답답한 사람이 무리하게 행하게 되면 상기증등 더 큰 장애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호흡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편안하게 호흡하라. 당신의 고요한 호흡은 불난 가슴을 끌수 있는 소화기가 될 것이다. 당신의 고요한 호흡은 미세먼지를 제거할 공기청정기가 될 것이다. 당신의 고요한 호흡은 연기를 날려보낼수 있는 창문환기가 될 것이다. 당신의 고요한 호흡은 혼탁한 물을 치료해주는 정화제가 될 것이다. 스트레스의 요인이 외부이건 내부이건 결국 내 마음이 이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 내 마음이 불이 나 있으면 작은 반응에도 불이 날 것이다. 내 마음이 우울하면 작은 반응에도 금세 우울해질 것이다. 내 마음이 불안하면 작은 반응에도 금세 불안해질 것이다. 항상 자기 마음의 주인으로서 내 자신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야 한다. 매일 아침 얼굴을 씻고 화장을 하고 밥을 먹고 좋은 옷을 입는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그 정도의 정성과 사랑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하는 이 모든 것은 마음의 행복(평화)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https://youtu.be/i6PXSKXtuuo 김영국 행복명상센터
(no title)
나는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이 고고한 도덕성을 내려놓길 바란다. 그들은 진보라기보다는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그들도 실수하고 투자도 하며 부자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응징도 해야하며 사실확인도 없이 휘갈기는 이들에게 매운맛도 보여줘야한다. 이슬로 사라지지말고 땅에 발딛고 굳건하라.부디 잠을 잘수가 없다. 먹먹해서 견딜 수가 없다. 고고한 학에게 흠집내고 싶어서 열광하는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고 매번 패배하는 것같은 엿같은 기분이 싫다. 왜, 무엇때문에 3천하고도 180일을 일벌레마냥 일하던 사람을 외길 낭떠러지로 내몰리게 하는가. 너는 그리고 나는 깨끗한가. 진짜 그러한가. 악착같이 살아남길 고대한다. 승냥이떼 마냥 구린 입을 벌리고 몰아닥치는 것들을 헤집고 나아가서 반드시 그리고 악착같이 살아남아야한다. 인내하고 참으며 살이 짖무르도록 잡아뜯으면서 악착같이 살아야한다. 단 1퍼센트도 삶에 대한 희망을 놓으면 안된다. 그게 그들을 가장 좌절하게 만들 일이다. 이런분들을 떠나보내며 후회하고 눈물 쏟고 싶지않다. 제발. 우리는 흠결없는 사람을 기대하기보다는 탄력적 사고방식으로 리더들을 바라보길 바랍니다. 더러운 자들은 원래 그러려니하고 옳음을 외치는 자들에게는 티끌하나에도 좀비떼처럼 공격하는 기울어진 저울같은 시선부터 교정해나가야할거 같습니다. 옳은 방향을 가는 사람들을 함께 지켜주고 싶습니다. @트위터 퍼온글
성추행 가해자가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건
2013년 6월 2일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의 펩시 센터에서 진행된 미국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The Red Tour 공연 사전 이벤트인 밋앤그릿 이벤트에서  덴버 KYGO 방송국 소속의 라디오 DJ 데이비드 뮬러,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와 같이 기념 사진을 찍는 도중에 DJ 뮬러가 테일러의 스커트 안쪽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만짐 사진 촬영이 끝나고 테일러는 성추행 사실을 어머니와 보디가드들에게만 얘기했고 당시에는 어떤 법적인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음
 테일러의 어머니가 KYGO 방송국에만 이러한 사실을 알렸고 방송국에서 뮬러와의 면담이랑 관련 사진등을 검토해서 뮬러를 해고함

 근데 그로부터 2년뒤에 DJ 뮬러가 테일러 스위프트 때문에 자신이 해고됐다고 주장하고 테일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함. 피해보상으로 요구한 금액은 무려 300만 달러(약 36억 원).
이에 테일러는 뮬러를 성추행으로 맞고소를 함. 테일러가 요구한 금액은 단 1달러. 그렇게해서 2017년 8월 약 일주일동안 덴버 법원에서 재판이 열렸고, 재판 결과 명예훼손건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었고 성추행 건은 테일러가 승소하고 끝났음 재판 당시 진술 일부  그날 뮬러는 자신의 여자친구인 샤넌 멜처와 함께 밋앤그릿 현장을 찾았다. 맥파렌드(뮬러측 변호사)는 테일러에게 뮬러보다 멜처와 신체적으로 더 가까이 있었다는 점에 의거하여 자신을 만진 건 멜처가 아니냐고 묻자 테일러는 누가 자길 만진 건지 전혀 착각하지 않았으며 “제 엉덩이를 만진 사람은 그녀가 아니에요.”라고 얘기했다.  변호사가 테일러에게 뮬러가 직장을 잃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저는 당신이나 당신의 고객이 이게 모두 제 탓이라고 제 자신을 착각하게 만들 여지를 주지 않을 거예요”라며 테일러가 말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저희는 여기 재판에 와 있고 저는 저의 잘못이 아닌 그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그의 인생에서 불행한 일에 대해 비난을 받고 있어요.”  뮬러가 성추행을 했을 당시 왜 다른 목격자가 없었냐는 질문에 대한 테일러의 최고의 답변은 이때 나왔다. “제 뒷모습에 눈을 정확히 두고 있던 사람은 제 엉덩이를 만진 사람이며 그 사람 외에는 제 뒤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목격자가 나오지 않은 겁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2015년, 뮬러가 자신의 명예훼손과 직장을 잃은 것에 대한 책임으로 테일러 스위프트를 고소하며 손해배상으로 수백만 달러를 청구한 데 있다. 뮬러는 테일러측에서 그때 당시 자신의 직장 동료들에게 자기를 모욕했다며 그로 인해 해고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테일러 스위프트는 성추행 행위로 맞고소를 진행하였으며 단 1달러의 배상을 원했고 테일러 본인 측에서는 그가 해고를 당한 일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맥파렌드가 테일러에게 뮬러가 마땅한 처벌(해고 & 명예훼손)을 받은 것 같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하였다. “저는 뮬러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저는 그 사람에 대해 알지도 못하니까요.”  사건 이후 테일러는 팬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도록 당혹감에도 밋앤그릿을 계속 진행하였다. 뮬러측 변호사가 테일러에게 그렇게 놀랄만한 사건이 벌어졌다면 조금 쉬는 게 당연한 반응이었지 않겠냐고 말하자 테일러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러게 애초에 당신의 고객이 저와 평범한 사진을 찍었으면 됐잖아요.”  맥파렌드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보디가드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성추행이 진짜로 벌어졌다면 보디가드가 나서서 제지를 하지 않았겠냐는 주장이다. 그러자 테일러는 맥파렌드에게 자기를 만진 게 자신의 보디가드인 그렉 덴트가 아니라고 상기시키며 말했다. “제가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사항은 다른 누구의 잘못도 아닌, 당신의 고객이 제 엉덩이를 만졌다는 점이에요.”  사진을 보며 맥파렌드가 테일러에게 반론하길, 시각적으로 부적절한 상황이 벌어지는 걸 확인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치마의 앞쪽을 보면 전혀 움직임의 흔적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자 테일러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 왜냐하면 제 엉덩이는 제 몸 뒤쪽에 달려 있으니까요.” 출처 : 더쿠 으휴..... 모자란놈......
[친절한 랭킹씨] 서울대 지원자들은 어떤 책을 많이 읽었을까?
전국 초·중·고등학교의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휴식을 취하면서 학기 중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가야 할 시기인데요. 그중 하나가 바로 ‘책 읽기’ 아닐까요? ‘집콕’이 일상인 코로나 시대의 방학을 맞아 청소년은 물론 성인이 읽어도 좋을만한 책, 무엇이 있을까요? ‘2020학년도 서울대 수시 지원자들이 많이 읽은 책’ 순위를 통해 살펴봤습니다. ※ 서울대학교 입학본부 웹진 ‘아로리’ 참고 대망의 1위에는 쟝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가 꼽혔습니다.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이 풀리지 않는 세계 기아 문제에 관한 진실을 아들에게 들려주는 형식의 내용이지요. 이어 관계와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로 풀어낸 심리학도서 ‘미움받을 용기’가 2위. 1962년 세상에 나온 이후 20세기 환경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침묵의 봄’이 3위에 올랐습니다. 보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알고 싶은 사람은 다음 목록을 참고할 만합니다. 단과대학별 지원자들이 꼽은 도서에는 앞서 살펴본 20위 리스트 외에도 새로운 이름이 여럿 등장했는데요. 현대 과학의 고전이라 불리는 ‘부분과 전체’를 비롯해 ‘넛지’(경제), ‘숨결이 바람 될 때’(에세이) 등 분야별 개성 있는 책들이 포함됐습니다. ---------- 지금까지 서울대 지원자들이 많이 읽은 도서 목록을 들여다봤는데요. 다가올 여름방학, 불안한 여행보다 쾌적하고 안심할 수 있는 일정을 원하나요? 그렇다면 시원~한 실내에서 흥미로운 책 한 권과 함께 하는 ‘북캉스’로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 글·구성 : 박정아 기자 pja@ 그래픽 : 홍연택 기자 ythong@ <ⓒ 뉴스웨이 - 무단전재 및 재배포·코너명 및 콘셉트 도용 금지>
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3) - 1925년, 숭인동
때는 일제강점기, 경성부 관리들은 고민에 빠져 있었죠. 그들이 고민하는 원인은 지은지 고작 8년 된 부립 도축장때문이었습니다. 1914년 건설한 경성부립도축장은 한일합방 후 본래 아현동, 신설동에 있던 관립도축장, 그리고 현저동, 이태원의 사설도축장 등 여섯 곳을 통폐합해 근대적 위생 규격에 맞게 지은 관영 도축 시설이었죠. 문제는 이 시설이 처음 요망 조건을 다 채우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설비가 부족하고 비위생적이기까지 하다는 평가까지 들었을까요. 이전 구한말 제정된 포사규칙은 민간업자를 규제하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근대적 공공위생 차원에서 도축 장소와 방식을 규정하는 법률은 1900년을 넘어서부터 차례차례 제정되었는데요. 러일전쟁 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이러한 법률 제정은 더 탄력이 붙었습니다. 기존 분리되지 않았던 도축장과 고기를 판매만 하는 정육점을 나누어 규정한 <도수장 및 수육판매규칙(1905.9)>, 도축장을 관영화, 허가제 운영한 <도수규칙(1909.8)> 등이 이 때 만들어지죠. 이에 따라 기존 도축업에 종사하던 백정들의 지위 역시 흔들렸습니다. 부유한 일부 백정은 허가를 얻어 점포를 냈지만, 대다수는 관영 도축장에 소속된 고용노동자 신세로 전락했죠. 1908년 8월, 서대문 밖 합동에 서부도축장이 문을 엽니다. 하지만 불과 3개월만에 부지 협소 등을 이유로 새 시설 부지를 탐색하게 되죠. 그 결과 아현동, 신설동에 대한도수장이란 관영 도축장이 들어섭니다. 아현동 시설이 돼지를 통째로 삶아 털을 제거하는 탕박 시설을 갖춘 방면, 신설동 시설은 철저히 소 도축에만 집중했죠. 한일합방 후 일제는 이들 시설을 총독부 내무부 위생과로 배속합니다. 이것을 나중에 한성부가 생기면서 넘겨받게 되죠. 그 뒤는 맨 처음 문단에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일제는 관리 효율을 명분삼아 기존 관영 및 민간 시설을 통폐합해 부립도축장을 조성합니다. 위치는 서대문형무소 남쪽 현저동 도축장이었죠. 1917년 현저동 경성부립도축장 모습. 대부분 나무 구조물이어선지, 시설은 빠르게 낡아버렸습니다. 거기다 수도 및 배수 시설이 형편없어서 핏물과 오물이 고여 여름마다 곤욕을 치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설은 기대만큼 효율적이지 못했는데, 도축 작업을 하는 백정들이 손에 익은 과거 방식 그대로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이었죠. 시카고의 도살장이 포드에게 컨베이어 벨트 제조 공정의 영감을 줄 정도로 효율화, 고도화된 산업 시설이었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현저동 시설에 문제가 많았기에, 결국 경성부는 지은지 8년 된 부립도축장을 버리고 새 시설을 세우기로 결정합니다. 선정된 부지는 숭인동 동묘 근처였죠. 아직 서울이 지금처럼 규모가 크지 않을 때입니다. 동묘 인근은 서울 외곽이라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청계천 하류와 가까워 배수 조건도 서대문 시설보다 나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엔 이미 1923년 조성된 가축시장이 있었죠. 주요 산지인 강원도 등지에서 소가 들어오면, 동묘 시장을 거쳐 경성부 일대 주민들에게 공급했습니다. 숭인동은 도축장이 들어서기에 최적의 입지처럼 보였죠. 그리하여 일제 강점기 내내 서울 시민들이 먹는 고기는 이곳 숭인동에서 도축해 공급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제 역시 경성부 인구 증가에 맞춰 도시 계획을 수립하고 시가지를 확대하려 했죠. 자연히 도축장은 숭인동 아닌 다른 곳으로 또다시 옮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국 일제 시대 내에는 실현되지 못합니다. 숭인동 가축시장과 도축장이 마장동으로 옮긴 건 광복 후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가능했죠. 시카고 도축장 작업 과정. 시카고에선 이미 1867년부터 기계화된 공정을 도입해 도축에서 최종 제품까지 고도로 분업화된 하나의 라인에서 처리했다고 합니다. 각 단계에는 비숙련공이 투입되어도 충분히 제 몫을 해낼 수 있었다네요. 일부 몰양심한 육가공업체들이 물의를 일으키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요. 이렇듯 도축 관련 법령이 발달하고 시설이 개선될수록 백정들의 처지는 나아지긴커녕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신분 차별은 일제 시대에도 없어질 조짐이 없었죠. 1922년 대구 백정들이 야유회를 가면서 기생들을 불러 끼고 놀았는데, 양민들이 그걸 보고 혀를 차며 기생들을 비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구 기생 조합이 해당 연회에 참가한 기생들을 제명해 버렸죠. 그 뒤로는 백정들이 아무리 불러도 기생들이 백정들 자리에 참석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경제적으로라도 나아지면 기를 펴겠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백정들은 도축 작업을 한 후 쇠기름같은 부산물을 자기 몫으로 주장할 수 있었죠. 그같은 부산물은 일종의 가외 수입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임금 노동자가 된 후로는 그마저도 어려워졌죠. 백정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행하던 가죽 공예도 근대화된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들과 경쟁하기 힘들었습니다. 어쩌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도 사회의 시선은 따가웠습니다. 어떤 백정들은 자기 자식만이라도 공립,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부탁도 넣고 기부도 했지만 입학을 거절당하거나 아이가 차별을 못이겨 중퇴하는 일을 거듭했습니다. 또 어떤 백정은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도중에 학업을 중퇴하고 귀국한 뒤 총독부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다 포기했습니다. 백정은 총독부에서 받아주지 않는단 걸 뒤늦게 알아서였죠. 3.1운동이 일어나고 민족 운동이 활발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백정들은 식민지 속의 영원한 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정책 아래서 우리 민족이 독립하길 꿈꿨지만, 백정들이 오랫동안 겪어 온 차별과 억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결국 백정 사회 스스로 이 모순을 해결할 새 움직임이 대두하죠. 무대는 이제 1923년 경남 진주로 넘어갑니다.
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1) - 1923. 5. 13 진주
1923년 5월, 진주의 일반 농민 250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무언가를 모의합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이하 다섯 개 조의 결의를 내놓죠. 1.형평사와 관계 있는 자들에 한해 백정과 동일하게 대우한다 2. 소고기를 반드시 불매운동한다 3. 진주청년회가 형평사와 절대 관계 없도록 한다. 4. 노동단체에서는 형평사와 절대 관계하지 말게 한다. 5. 형평사를 배척한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들은 그 좋다는 소고기도 끊겠다고 굳게 다짐한 걸까요? 형평사가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청년회와 노동단체까지도 이를 배척하게 한 걸까요? 형평사는 백정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처우 개선을 추구하여 설립한 사회 운동 단체입니다. 잠깐, 그렇다면 왜 노동단체가 그들과 관계하지 말아야 한단 걸까요? 노동단체란 본래 부당한 처우를 받는 노동자들이 조직하는 것 아닌가요? 같은 약자인 백정들에게 어째서 노동자들마저 등을 돌리고 만 걸까요? 이번 글은 조선에서 가장 천한 계급이었던 백정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은 갑오개혁이라고 알려진 일련의 개혁 조치들을 내놓았습니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동학 농민 운동을 어느 정도 잠재우는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이제 막 내정간섭을 개시한 일제의 요구에도 맞춰 주어야 했죠. 여하간 정부는 1894년 7월 2일 그전까지 이어진 신분제를 폐지하는 선언을 내놓습니다. 1.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선발할 것. 2.공사노비법 일체 혁파, 사람을 매매하는 것을 금지. 3. 역노비, 광대, 가죽공인 등 천인을 면천함.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무어 목사는, 이때 백정들이 기뻐하기가 마치 링컨의 노예 해방령에 흑인 노예들이 기뻐하는 것보다 더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백정들 가운데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밤낮없이 갓을 머리에 쓰고 지낸 이도 있다고 하죠. 이전까지 백정들이 받은 차별 대우를 놓고 보면 그들이 이렇게 기뻐하는 것도 이해할 만 합니다. 조선 왕조 내내 백정들은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되도록 온갖 제약을 받아왔죠. 지붕에 기와를 얹을 수 없고, 옷에는 명주를 쓸 수 없다. 갓, 탕건, 털모자 등을 쓸 수 없고 두루마기, 가죽신을 입거나 신을 수 없다. 외출할 때는 봉두난발에 패랭이를 써서 식별 가능케 하는데, 갓끈은 종이나 새끼줄로 한다. 여성은 비녀를 쓸 수 없다. 일반인 앞에서 음주, 흡연, 연회 등을 할 수 없다. 관혼상제시 상여를 쓸 수 없고, 묘지는 일반인과 구분해 쓰며, 혼례에 말과 가마를 쓸 수 없고, 머리에 쪽을 이거나 상투를 틀 수 없다. 집안의 가묘를 쓸 수 없고 풍수를 볼 수 없다. 백정은 상대가 어린아이라도 평민이면 복종하고 자신을 소인이라고 칭해야 하며 평민과 나란히 걸을 수 없다. 공공집회에 출입할 수 없고 일반인 집에 함부로 드나들 수 없다. 거주지는 일반인과 구분해 교외 일정 지역에 집단거주한다. 특정 성씨만 사용 가능하며, 이름에 충, 효, 인, 의 네 글자는 넣을 수 없다. 조선 시대 백정들이 생활 속에서 받은 각종 규제가 이 정도입니다. 1809년 개성의 한 백정은 결혼식 예복으로 관복을 입었다가 사람들에게 폭행당하고 집이 박살난 일도 있었죠. 뿌리 깊은 차별은 정부가 신분제를 폐지한 후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정부 또한 신분제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마음이 없어 보였죠. 1896년 9월 조선은 호구조사규칙과 호구조사세칙을 시행합니다. 이 결과 지금까진 배제되던 백정 역시 호적에 등재될 수 있게 되죠. 그러나 실제로는 이 과정에서도 차별이 공공연히 자행되었습니다. 승려와 백정은 일반인과 별도 호적에 등재되었죠. 또 백정은 호적에 빨간 글씨로 '도한'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도한은 즉 도축업을 하는 사람, 백정을 뜻합니다. 마치 빨간펜으로 이름 쓰면 죽는다는 속설처럼, 호적에 빨간색으로 신분이 적힌 백정을 사람들은 얼마나 꺼림칙하게 여겼을까요? 이런 차별은 일제강점기에도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1922년 일제가 조선호적령을 시행할 때도 백정은 그 본적에 도한으로 기록되었거든요. 1897년 3월 내부의 훈령에 기초해 경무청고시가 발표됩니다. <서울 5개 경찰서 내에서의 금지조항>이란 제목의 고시엔 '천역하던 사람이 분수를 넘어 강상을 범하여 행패하는 것을 금함'이라고 명시되어 있었죠. 한 번 백정이면 끝까지 백정. 국왕의 칙령이 있은 후에도 사회적 차별의 꼬리표는 여전히 떼어지지 않고 따라 붙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백정이란 꼬리표는 사실 처음부터 차별의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1423년 세종 5년, 병조에서 이런 제안을 합니다. '재인, 화척은 본래 양인인데 직업이 천하고 호칭이 달라 백성들이 다른 족속으로 보고 혼인을 꺼리니 이를 백정으로 고쳐 부르자.' 그전까지 백정 및 그와 유사한 천민들은 재인, 화척 등으로 불렸습니다. 오히려 고려에선 백정이 일반 백성을 뜻하는 말이었죠. 그러니까 병조의 뜻은, 과거 재인 화척으로 천대받던 사람들을 이른바 '신백정', 즉 새로 백정 양인이 된 사람으로 고쳐 불러 융화시키자는 의도였을 겁니다. 다만 그 이후로도 백정들은 실록상 재인, 화척, 양수척 등 백정 이외 다양한 이름이 혼용되어 쓰입니다. 또 신백정에서 새로울 신, 한 자가 빠지면서 그냥 '백정'으로 불리게 되지요. 유기장, 고리백정, 갓바치, 도축업자 등 사회에서 천시받는 일을 하던 백정들은 조선 시대 내내 사회 최하층집단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차별이 어찌나 심한지, 외국 선교사들은 백정들의 처우를 보고 곧장 인도의 카스트 최하층 불가촉천인을 떠올리곤 했답니다. 갑오개혁 후 신분제가 법제적으로 폐지된 후에도 차별은 공공연히 이루어졌습니다. 1900년 2월, 진주군 등 16개 군 백정들이 진주 관찰사에게 소를 넣습니다. 갑오개혁 때 칙령에 따라 백정도 관을 쓰고 의복을 갖춰 입을 수 있게 되었으니, 자신들도 칙령에 따라 관을 쓰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나랏님 말씀을 따르겠다고 하는 거니 별 문제가 없을 듯도 하지만, 진주 관찰사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정 백정들이 갓을 쓰고 싶다면 갓끈은 소가죽으로만 해라!' 소청을 하러 온 백정들 앞에서 이렇게 일갈한 후, 관찰사는 백정들을 관청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물러날 백정들이 아니죠. 이제껏 얼마나 차별당해왔는데 겨우 이 정도로 물러날 수 있습니까? 백정들은 중앙 정부에 상소를 넣어 부당함을 호소합니다. 결국 해당 관찰사에게 백정을 천대하지 말라는 지령이 내려오죠. 하지만 같은 해, 진주에서 백정들이 갓, 도포를 쓸 수 있게 되었단 소식을 들은 양민들이 수백 명 떼를 지어 백정들 마을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가옥이 여러 채 파손될 정도로 그 수위가 심각했다네요. 백정 및 천민들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패랭이.A.K.A. 평량립. 재미있게도 <연려실기술> 등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천민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이 패랭이가 잠시 유행한 얘기가 적혀 있답니다. 왜군들이 갓을 쓴 양반이 보이면 잡아가지만, 패랭이를 쓴 천민을 보면 극빈자라 해서 놓아줬다나요? 1898년 시흥에서는 패랭이 대신 갓을 쓰게 해달라는 백정들 요청에 지방관이 생 소가죽을 백정에게 덮어씌워 모욕한 사례가 있습니다. 1901년 예천에선 백정 3인이 백정 신분을 면하게 해 주겠다며 돈을 요구한 군수에게 저항하다 수 개월간 투옥당한 일이 있었죠. 문경의 백정 하나가 이 소식을 듣고 서울까지 가서 이 같은 작패를 모두 금하라는 훈령을 들고 돌아왔는데, 문경군수가 이 사람을 옥에 가두고 재산을 강탈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서울 백정들이 중앙 정부에 호소해 이들을 풀어주고 재산을 돌려줄 것을 청했죠. 백정들도 이런 차별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진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때문에 그들 역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죠. 1898년 만민공동회 연사로 백정 출신 박성춘이 나서는가 하면, 당시 부유한 백정들이 지역 학교 설립에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에선 충북 지역 백정들이 성금을 내고, 심지어 의병 운동에 직접 백정들이 뛰어들기도 했죠. 의병장 최익현 영정. 한때 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지지했지만, 대원군의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등 실정을 규탄하며 고종 친정을 이끌어낸 인물이고, 일본 및 서양과의 문호 개방을 끝까지 반대한 위정 척사파의 대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06년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지만, 관군과 싸우지 않기를 고집해 포위당합니다. 이때 인근 백정 김경철이란 자가 관군의 포위를 뚫고 와 의병대에 가담하길 청했다네요. 승패가 갈린 상황에서 패배가 확정된 편에 선다고 결심했을 때,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기독교나 천도교 같은 종교 단체는 백정들의 편을 들어줬습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백정과 양민을 중재해 함께 예배를 보게 하려 노력했죠. 천도교는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교리를 내세워 천민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에도 패랭이 쓴 무리가 동학군 중에 가담해 있었다고 합니다. 패랭이가 백정 천민의 상징 같은 것임을 놓고 볼 때, 굳이 백정 외 다른 양민이 그것을 일부러 골라 쓰진 않았을 듯합니다. 이렇게 백정들은 자력으로 , 또 사회 각계의 응원으로 차별 편견을 극복하려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차별은 그들 생각보다도 훨씬 끈질기고 집요하게 백정들을 괴롭혔습니다. 백정들이 뒤집어 쓴 사회적 경제적 굴레는 그리 쉽게 벗길 수 없는 것이었죠. 1896년 1월, 조선 정부는 백정들을 직업적, 경제적으로 규제하는 <포사규칙>을 선포합니다. 갑오개혁 후 밀어닥친 근대화의 물결은 이제 백정들에게도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멍에를 씌우려는 것입니다.
김수로왕 부인과 바보 온달은 외국인이다.
가야는 신라보다 99년 늦은 AD 42년에 건국되었습니다. 당시 김해 지역은 9명의 촌장(九干)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내가 있는 곳은 어디냐?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여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임금을 얻으리라.” 이에 촌장과 주민들이 구지봉에 모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는 ‘구지가’ 노래를 부르며 한나절 내내 춤을 추자 하늘에서 자줏빛 줄에 붉은 궤짝이 내려왔고 상자를 열어보니 6개의 황금알이 나왔다네요. 그중 가장 먼저 깨어 난 이가 김수로왕이 되어 금관가야를 건국했고, 나머지 5알에서 태어난 동생들이 각각 나머지 5개 가야국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6년 뒤 김수로왕은 결혼하라고 성화를 부리는 아홉 촌장 들에게 “귀인이 바다 건너올 것이다.”라며 맞으러 나가게 합니다. 그러자 정말 붉은 돛을 단 배가 나타났 는데, 왕이 직접 데리러 오지 않으면 내리지 않겠다고 버티자, 수로왕이 그 말이 일리가 있다며 직접 맞이하러 가니 허황옥이 “저는 인도 아유타국 공주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 입니다.”라고 밝혔다지요. 이에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임시 궁궐을 마련하고 2박 3일간 지낸 후 김해로 되돌아와 알콩달콩 살며 무려 10명의 아들을 두었다는데, 태자 거등왕은 김해 김씨로서 후계를 잇게 되니 현재 대한민국 최대 가문 400만 명의 조상님이 되셨고, 두 아들은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씨가 되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같은 허황후의 인도 공주 기록에 대해 오랫동안 학계는 불교가 도래한 뒤 가문의 신성함을 강조하고자 인도에서 왔다고 윤색한 것으로 추정했는데, 2009년 서울대 의대팀이 김해 이안리 고분 인골을 분석해보니 인도 남부인과 유사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준 바 있고,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고려대학교 조호영 교수팀에 의뢰해 김해에 있는 파사석탑 재질을 분석해보니 우리나라 돌이 아니라는 것도 밝혀진 상황입니다. 따라서 허황옥 공주가 인도에서 온 것은 거의 확실해지고 있습니다. 이미 《삼국유사》에서 일연 스님이 김해 호계사 파사석탑의 유래를 설명하는 내용에 “허황옥 공주가 중국 동한 건무 24년(AD 48년)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왔다. 부모의 명을 받고 바다를 건너 가야로 오려고 했는데 풍랑이 심해 되돌아오자 아버지가 석탑을 싣고 가라고 명령해 배에 실으니 곧 바다가 잔잔해져 두 달여 만에 가야까지 왔다. 탑은 모가 4면에 5층이고 돌에는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는데, 그 질이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다.”라고 적었습니다. 그 사실을 700여 년 뒤 다시금 현대 과학으로 입증한 것이죠. 또한 인도인인데 왜 성이 허(許)씨냐고 반박하는 경우도 있는데 ……, 같은 시대 이스라엘 땅에 살던 귀족 가문 도 허(Hur)씨였어요. 말도 안 된다고요? 아뇨, 진짜에요. 영화 ‘벤허(Ben Hur)’ 보셨을텐데요. 주인공의 이름이 ‘벤’이고 성이 ‘허’씨에요. 유태인 중 ‘허’라고 불리는 가문이 있으니 한국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인도에 허씨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같은 기록을 재해석해보면, 신라 혁거세와 마찬가지로김해 지역에 나타난 북방 철기 세력이 기존 토착 세력을 아울러 금관가야를 세웠으며, 뒤이어 인도에서 유래한 남방계 해양 세력이 도착해 두 세력이 권력을 나눠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는 ‘바보 온달’ 이야기에는 당시 고구려의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고구려가 내분으로 약화되던 25대 평강왕 시절에 그의 딸,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溫達)에게 시집간 뒤 남편을 훌륭히 교육시켜 결국 온달을 장군으로 만들었고, 그후 침략한 중국 후주(後周)군과 맞서 싸워 이기고는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 출정했다가 결국 전사했다는데, 최근 일부에서는 온달이 이란 북쪽 사마르칸트에 살던 스키타이계 유목민인 소그드(Sogd)인으로서, 당시 중국을 거쳐 고구려로 귀화한 세력이 아닐까 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인들이 보기엔 아리아계 백인에다가 고구려 말도 못하는 그들이 추하고 바보스러워 보였을 거라는 거지요.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당시 중국에 피난 온 소그드 왕족이 쓴 성씨가 온(溫)씨였다고 하고, 고구려 각저총 벽화 ‘씨름도’에서도 확연히 우리와 다른 서역인이 등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라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괘릉의 무인상에도 서역인 모습을 한 조각상이 남아 있기에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즉,당시 평강왕으로선 귀족들의 병력 동원이 여의치 않아 왕실 직할 병력이 작다 보니 이주민 세력인 소그드인의 우두머리인 온달을 사위로 맞아 이주민 소그드인들을 직할 군사로 편입해 과감히 영토 회복 전쟁을 벌였을 거란 거지요. 그러니 평강공주는 울다가 바보 온달에게 시집간 게 아니라 이주 외국인 온달에게 시집가라고 하니 싫어서 울었던 것은 아닐까요?
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2) - 1896. 1 한양
1896년 1월 18일, 그 해 첫 법령으로 이른바 <포사규칙>이 반포됩니다. 갑오개혁 이후 정부 당국이 반포한 두 번째 근대적 법률이었죠. 첫 번째 반포한 법률은 1985년 3월 반포한 재판소구성법이었습니다. 단순 법률 반포 순서만 놓고 보자면,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 법안같지 않나요? <포사규칙>이 규정한 내용은 딱 잘라 말해 이렇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도축 및 정육점업은 영업허가증을 발급받아 규정에 맞게 운영하고 세금을 내라.' 김이 새는 얘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법률의 의의는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동안 지방관 및 지방 세력가의 자의적 수탈 대상이었던 백정을 이제부턴 국가가 직접 지배한다, 라고요. 세계 여러 문명에서 어떻게 고기를 얻느냐, 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이슬람의 할랄이나 유대인의 코셔 전통에서 '무엇이 율법에 따라 올바른 방식으로 얻은 고기인가'를 세밀하게 규정한 것만 봐도 그렇죠. 복잡한 도축 과정과 절차를 거쳐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하고, 나머지 부산물과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먼 옛날 인류가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시되었습니다. 비록 오늘날엔 산업화, 고도화된 도축 및 정육 과정으로 인해 보통 사람들이 자신이 먹는 고기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거치는 과정을 대부분 알 필요가 없게 됐지만 말입니다. 코셔 및 할랄 규정의 일부. 몽골인이나 시베리아 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의 도축 방식이, 아마존 정글의 민족들도 그들만의 규율이 있을 것입니다. 그건 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소, 말, 돼지, 양, 닭, 개를 육축이라고 해서 민간에서 이를 키우고 잡는 것을 허용했죠. 최근까지도 시골에선 공공연히 민가에서 직접 소, 돼지를 도축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다만 조선 사람들도 소, 말은 민가에서 함부로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양에선 푸줏간이나 약 20개 정도의 도축소, 이른바 '현방'이 있어서 백정들이 그곳에서만 전문적으로 도축, 판매를 맡아 했다고 하죠. 선비들은 '군자는 푸줏간과 부엌에 드나들지 않는 법'이라고 해서 아예 이들과의 접촉 교류를 삼갔습니다. 1896년 포사규칙이 제정된 이후 민간 도축은 규제가 더 강해졌습니다. <포사규칙>에서 포사란 조선시대 정육점을 말합니다. 즉, 법률의 이름 자체가 정육점에 대한 규칙, 이란 뜻이죠. 포사는 본래 잡은 고기를 판매하는 가게만 의미했지만, 당시엔 현실적으로 도축과 육류 판매가 엄밀하게 분화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법령 내에서도 육류 판매뿐 아니라 도축업에 대해서도 규제했죠. 법령에 따라 정육점, 도살장업은 지방관청을 통해 신고하고 면허료를 지불해 영업허가증을 받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도살 자체는 백정들에게만 나오는 도축자격증인 빙표를 가진 사람만이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영업허가를 취득한 업주가 도축자격을 가진 백정을 고용해 영업을 해야 했죠. 소를 도축해야 할 때, 업주는 1마리에 80전 세금을 백정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면 백정은 그 세금을 군청에 납부하고 영수증을 받아 오죠. 이 영수증 없이 도축을 할 경우 백정은 도축자격을 잃고 거처에서 추방됩니다. 또 해당 백정을 고용한 업주는 영업허가가 취소될 수 있었죠. 세금은 영업장 규모에 따라 물렸습니다. 도축장을 매일 1마리 이상 도축하는 1등지부터 5일에 한 마리 정도를 도축하는 5등지까지 구분한 후, 매월 말 영업장이 무는 세금에 등급별로 차등을 뒀죠. 영업장 규모는 도축하는 소 두수만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돼지나 개는 부수적인 수취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 영업세를 포사세라고 하는데, 정부는 포사세 징수를 위해 군 단위까지 포사위원과 포사파원을 임명했죠. 1897년 독립신문은 당시 전국적으로 연간 2만 7천 여 마리 소가 도살된다고 했습니다. 이건 공식적인 수치로, 민간에서 자행되는 밀도축 수를 뺀 수치였죠. 조선 후기 소 도축이 이렇게까지 활성화된 이유는 두 가지로 꼽습니다. 하나는 조선후기 민간의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주류 및 육류 소비가 증가한 것, 또 다른 하나는 무역이 성황을 이루면서 주요 수출 품목인 소가죽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죠. 이로 인해 일부 지배층이 백정을 사사로이 고용해 소가죽을 수집하고 고기를 팔아 부정축재를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말 개항지를 통해 외국으로 향하는 주요 수출품 가운데서 소가죽과 소뿔 등은 항상 빠지지 않고 포함되었습니다. 특히 일본 상인들이 자국 가죽 산업 발달을 위해 필수적인 조선 소가죽을 확보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다녔습니다. 일본에서 수입한 소가죽 가운데 약 7, 80%가 조선산일 때도 있을 정도였죠. 1824년 일본에 수출한 우피만 1만 5천 장 이상이었고, 이후로도 매년 거의 이 수치를 유지했습니다. 청과 기타 외국에 수출하는 우피 량까지 고려하면 당시 조선 내에서 연간 약 5만 마리 이상 소를 도축하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답니다. 자연히 징수한 포사세 또한 늘어야 했죠.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소 5만 마리면 포사세만 약 4만 원이 걷혀야 하지만, 1898년 실제 포사세 징수액은 고작 1305원 20전에 불과했죠. 단순 계산으로도 추산한 세수의 약 3~4%만이 실제로 걷힌 셈입니다. 이유는 있었죠. 일부 지배층이 공공연히 자행한 밀도축, 지방관과 포사파원 등의 횡령 문제는 물론이고, 일부 포사파원은 업자 및 백정들과 결탁해 멋대로 포사세를 인하하거나 아예 징수세액 자체를 탕감했습니다. 각급 관청간 마찰도 문제였습니다. 포사세 징수를 별도로 임명한 포사파원에게 맡기자, 지방관이 이들과 갈등을 빚었죠. 중앙은 중앙대로 포사세의 운영을 놓고 농상공부와 내장원이 대립했습니다. 포사파원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지급할 운영비를 제대로 주지 못해 포사파원들이 자의적인 수탈 횡령을 벌일 핑계가 생겼죠. 또 지방 세력가와 지방관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각종 명목으로 소고기를 정기적으로 상납받았습니다. <포사규칙>과 포사세를 둘러싼 난맥상은 당대 조선 사회 체계가 얼마나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는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게다가 이 모든 혼란 속에서 정작 주체인 백정들은 소외당했습니다. <포사규칙>과 현존하는 시행세칙 그 어디에도 백정들의 처우나 급료 따위에 대해서는 규정한 바가 없습니다. <포사규칙>을 제정한 지배층의 관심사는 오로지 세금 부과와 징수에 있을 뿐, 그 밖의 문제엔 아예 눈을 감았습니다. 백정들의 처우는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개혁 이전과 다를 바 없었던 거죠. 1900년이 넘어가면 도축업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규정들이 세워집니다. 안타깝게도 이 절차를 진행한 건 대한 제국 뜻이 아니었죠.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 열강으로부터 한반도의 지배권을 사실상 인정받은 일제는 바로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내정 간섭과 침탈을 자행합니다. 러일 전쟁 당시 러시아 해군의 진군로. 러시아는 일본 해군을 상대하기 위해 말그대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대한해협까지 진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적국인 영국 등의 견제를 받아가며 보급과 피로 등 온갖 문제에 시달린 건 물론입니다. 전쟁 결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경쟁에서 완전히 이탈하고, 조선은 일본에 더욱더 예속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