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대에 다녀온 예비역의 대부분은 자신의 군번을 기억합니다. 나이와 학번, 그리고 군번을 통해 서열을 정하고자하는 촌스러운 사람도 많죠. 국군이 창군할 때 군번은 다섯 자리의 숫자를 부여했습니다. 그 중 10001번, 첫 번째 군번을 부여받은 사람은 이형근 장군이었습니다.
채병덕과 라이벌로 유명한 이형근은 일본육사 출신입니다. 장인이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죠. 6·25 전쟁 때는 2사단장이었고 휴전회담 당시 한국 대표였습니다. 1956년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죠. 이 분이 남긴 업적이 있다면 한 개를 꼽을 수 있습니다. 바로 월간 중앙에 회고록을 연재하며 언급한 ‘10대 미스터리’라는 떡밥이죠.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육군본부의 당직을 서던 김종필 중위는 전쟁이 벌어졌다는 정보를 접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그 JP 맞습니다. 김종필은 육군본부 주요 간부와 총참모장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클럽에서 놀다가 새벽 2시에 들어간 채병덕 총장은 잠깐 깼다가 다시 잠듭니다.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전화코드 뽑아놓고 자고 있었죠.

[ 한국전쟁 발발 직후 상황보고 중인 김종필 ]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아침에 낚시를 하고 있다가 전쟁이 났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다음날 국회의원들은 비상 국회를 개최한 후 서울을 버리느냐 지키느냐를 놓고 밤새 회의를 했죠. 결론은 서울을 지키자는 것이었는데, 이승만은 27일 새벽 2시에 특별열차를 타고 대구로 튀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내려갔다는 측근의 지적에 대전으로 올라갔죠.

국회 국무위원들은 대통령에게 서울을 지키기로 결정했다는 보고를 하러 갔죠. 그런데 사흘 만에 대통령이 피난 갔다는 걸 알고 대성통곡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9시, 대전에서 녹음한 이승만의 목소리가 KBS 라디오로 방송됩니다. “유엔이 우리를 돕기로 했다. 국민들은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안심하라”는 내용이었죠. 자신은 1등으로 피난 가놓고 국민들에게는 피난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함락했죠. 민족의 정론지 조선일보는 호외를 내보냈습니다. “인민군 서울입성”이라는 제목의 기사 마지막은 “우리 민족의 경애하는 수령인 김일성 장군 만세”로 끝납니다. 제105군 부대를 선두로 하여 공화국 수도인 서울을 해방시켰으며 서울시민들이 열렬한 환호로서 환영했다는 기사, 역시 조선일보 클라스는 넘사벽입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신년사를 냈죠.
이승만이 대구로 도망친 후 ‘누군가’(아직 명령자가 명확하지 않음)의 명령으로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최소 500명이 넘는 시민이 사망했습니다. 게다가 미 폭격기 B-29가 한강철교와 경인철교까지 폭격하면서 한강의 모든 다리가 끊어집니다.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고립된 시민 100만 명은 3개월 동안 북한 공산당의 억압을 받으며 지옥을 경험했습니다.
얼마 전 일본 외무성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 하나 더 있죠. 이승만 정부가 일본 정부에 망명의사를 타진했다는 것이 보도로 나왔습니다. 2015년, KBS 취재진은 일본 야마구치 현과 미 군정 기록을 통해 이승만의 망명정부 요청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보도가 나간 후 보수단체는 반발했고 방심위는 ‘주의’ 제재를 했습니다.

다시 이형근 얘기로 돌아가 보죠. 첫 번째 군번의 주인공이 월간 중앙에 연재한 회고록의 제목은 ‘군번 1번의 외길 인생’이었습니다. 이형근의 공과 과에 대한 분석을 떠나 국군의 군번 1번, 육군참모총장까지 지낸 사람이 제기한 내용이기에 주목을 끌었습니다. 이 주장 때문에 지금의 군대를 신뢰할 수 없다는 사람도 많죠.
무엇이든 거침없이 대충 정리해서 배달해 드리는 내 손안의 지식인, 총정리! 이번 65화의 주제는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입니다.
- 6·25 전쟁 최초의 순간, 제대로 알려드립니다.
- 10대 미스터리, 음모론으로 치부하기엔 정황이 구체적입니다.
- 팩트를 기반으로 한 반론도 소개해드립니다.
- 6·25 전쟁의 영웅은 누구였을까요?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닙니다.
- 전작권 회수, 팩트체크는 불가능하지만 상당한 가설을 소개합니다.

6·25 전쟁의 원인은 김일성, 박헌영을 비롯한 북한군과 이를 지원한 소련군, 그리고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밀어준 마오쩌둥과 중공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형근의 회고록에는 당시 국군에 간첩 혹은 북한 동조세력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물론 일종의 음모론이죠.
이형근이 10대 미스터리를 제기한 이후 학자와 전문가가 여기에 대해 분석했고 반대 의견을 제기했습니다. 이형근의 사건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 많고, 정부와 국군의 초기 대처 능력 부족과 불운이 겹쳤다는 얘긴데 반론은 뒤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이형근이 주장하는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일선 부대의 적정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4, 5월까지 이형근은 자신이 지휘한 8사단뿐만 아니라 다른 사단에서도 적의 대규모 남침 징후가 보인다는 보고가 잇따랐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8사단의 경우 1950년 봄, 태백산맥을 통해 침투한 유격대를 토벌하다가 포로를 생포했습니다. 이들을 심문하면서 북한의 대규모 남침을 알아내고 육군본부에 여러 번 보고했으나 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2) 각급 주요 지휘관의 이른바 6월 10일 인사이동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급 지휘관이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했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인사를 단행한 것이 문제라고 이형근은 지적했습니다. 예비역들은 잘 알겠지만 지휘관이 교체되면 부대 분위기는 어수선하죠.
3)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6·25 직전인 6월 13일부터 일주일동안 전후방 부대를 교대한 것도 부적절한 조치라고 주장합니다. 지휘관들이 적정이나 지형은커녕 부하들의 신상파악조차 할 수 없었고, 인사이동과 겹치며 전력공백을 초래했다는 것이죠. 2번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4)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하여 남한은 6월11일부터 6월23일까지 비상경계령을 내림
6월 10일, 북한이 평양 방송을 통해 남한에 대한 비난은 물론 무력행사 위협을 하자 우리나라는 비상경계령이 발령됩니다. 그런데 육본은 6월 24일 자정에 비상경계 태세를 해제했습니다. 김일성이 남침을 위한 준비를 완료하고 전군에 대기 명령을 내린 바로 그 시점이었습니다. 타이밍이 참 거시기합니다.
5) 이런 위기상황에서 육본은 비상 경계령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 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다.
이형근의 주장에 따르면 육군본부 정보분석과는 북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육군참모총장에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는 병력의 반을 부대 밖으로 내보내 전력의 공백을 초래했다는 얘기죠.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6) 육군 장교클럽 댄스파티가 6월24일 밤에 열렸다.

육군 장교클럽 낙성파티를 연다고 전 후방 고급 장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참석 장교들은 6월25일 새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다고 하죠. 여기에 참석한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역시 신나게 놀다가 새벽 2시에 들어갔죠. 미 고문관과 한국 장교들 중에는 2차까지 간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7) 적의 남침 이후 우리 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투입해 불필요한 장병들의 희생 강요
이형근은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고해도 축차투입은 군사적 기초상식을 깬 명령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주장은 사실입니다. 축차투입은 투입 가능한 부대가 먼저 출동하고 나머지 부대는 준비가 되는대로 전투에 투입시키는 것입니다. 이형근의 주장대로 당시 군 지휘부는 서울 방어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북부 방어선에 병력을 축차투입했고 많은 희생을 자초했죠.
8) 적의 공세로 국군이 퇴각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6월25일~27일 중앙방송은 국군이 반격, 북진 중이라고 허위방송을 함으로써 군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판단을 그르치게 했다. 서울 북방에서 접전 중이던 국군이 상황 판단을 제대로 했다면 육본은 그들을 재빨리 전장에서 이탈케 해 다음 작전에 대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건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북한의 침략이 시작되자마자 포천이 뚫려버렸고 의정부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다음은 수도 서울이죠.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서울을 포기할 수 없다며 반격하자고 했지만 아무런 작전계획도 세우지 않았죠. KBS 라디오에서는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라는 이승만의 목소리만 나왔습니다.
9) 우리 측의 한강교 조기폭파
이런 작전은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추격하는 쪽에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강다리가 폭파된 것을 보고 개념 있는 국군 장교는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 폭파는 국군이 한 것이고, 심지어 한강 이북에 수많은 시민과 병력, 군수물자가 있는데도 서둘러 폭파시킨 것입니다. 대통령과 육군참모총장, 고위 관리는 이미 날라버렸죠.
10)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사형 집행
최창식 대령은 명령에 따라 한강교를 폭파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책임을 지고 1950년 9월 21일 비밀리에 처형되었습니다. 이때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시기였죠. 이런 경황을 틈타 책임 소재도 가리지 않은 채 미리 처형한 것에 정치적 복선이 있다고 이형근은 의심합니다.
이형근이 주장하는 10대 미스터리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내에 북한이 침투시킨 ‘제5열’, 즉 ‘북한군의 진격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무력집단’이 있다는 얘기는 음모론에 가깝죠. 팩트를 내세운 많은 전문가들의 반론도 있었습니다. 여기에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의 주장도 있었죠. 이 미스터리에 대한 반론 중 합리적인 것들을 골라 소개해 드립니다.
1) 이형근의 주장대로 남침 징후가 있다는 부대의 보고를 상부에서 묵살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상부가 국군이 아니라 미국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한반도는 남과 북의 충돌이 잦았죠. 일선 부대의 보고가 들어왔지만 미국은 당시 지속되던 위기설 정도로 취급했습니다. 국군은 UN 승인 없이 평시에 탄약을 불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국군 최고위층에서도 남침에 대응할 방안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북진 통일만 주장하고 있었죠.

[ 이승만과 신승모 ]
2),3) 주요 지휘관의 인사이동과 전후방 부대 교대의 의도는 좋았다고 평가됩니다. 유능한 지휘관을 전방 야전 부대로 배치하고, 기존에 빨치산 토벌과 치안 유지 위주 임무를 수행했던 부대의 체질을 개선하자는 것이었죠. 하지만 체질 개선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공교롭게 이 때 북한이 남침한 것입니다.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결과를 바탕으로 앞의 사건을 싸잡아 비난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4), 5) 비상경계령이 해제되고 장병의 반이 휴가를 나간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당시 최고의 정보력을 가지고 있던 미국 정부와 군 정보기관도 6·25를 예측하지 못했죠. 이형근의 주장과 달리 비상경계령이 6월 11일부터 내려진 게 아니라 더 오래됐습니다. 남북 관계가 악화되자 4월말에 비상경계령이 발령되기 시작했죠. 이후 해제와 발령을 되풀이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피로가 누적되고 군 사기가 떨어졌죠. 게다가 농번기에 보릿고개였던 때라 군량미도 떨어집니다. 장병을 휴가 보내 쌀도 절약하고 농번기 일손을 돕게 한 것입니다. 전쟁 소식을 들은 장병들은 즉각 복귀해서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6) 육군본부 장교클럽 댄스파티는 사실입니다. 이것 역시 위의 2, 3, 4, 5번처럼 재수가 더럽게 없던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입니다. 적과 내통한 자가 있었고 대부분의 국군 수뇌부와 상급 지휘관이 술에 취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육본과 서울 지역 부대 장교 일부가 참석했고, 전방의 야전 지휘관은 부대를 지켰다고 합니다. 어지르는 놈 따로 있고 치우는 놈 따로 있는 거죠. 지금도 안보 위기 상황에서 열심히 골프를 치던 합참의장과 똥별들이 있잖아요.
7) 서울을 방어해야 하는 의정부-포천 축선에 축차투입을 한 것은 사실이며, 일반적인 전술학에서 금기사항인 것도 모두 팩트 맞습니다. 지휘 능력이 떨어진 육군본부가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했죠. 클럽에서 놀다 새벽에 들어간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이 축차투입을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2보병사단장이었던 이형근 본인도 예하 연대를 축차투입시켰습니다. 이후 책을 통해 “다급한 나머지 그렇게 연결되는 명령을 했다”고 일부 인정했습니다.
8) 라디오 등을 통한 허위방송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서울 시내의 혼란을 막고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전쟁 발발 직후 포천 축선이 뚫렸고, 서울 방어 전략이 필요했죠. 여기에는 어떤 쉴드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도망치는 동안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내보낸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9) 한강교의 조기 폭파
한강교 폭파 계획은 채병덕 총참모장이 세웠죠. 시기가 문제가 되는데 한강 이북에 있던 아군과 시민들이 강을 건넌 후 폭파했으면 괜찮았을 겁니다. 당시 병력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미아리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죠. 그런데 북한군 전차 몇 대가 서울에 진입했다는 정보를 들은 육군본부는 서울이 함락됐다고 생각하고 폭파명령을 내립니다. 채병덕은 당시 후송된 상태였기 때문에 국방장관이 지시한 것이라는 추측이 유력합니다. 그렇게 서울을 지켜야한다고 반격한 신성모 국방장관 말입니다.
10)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사형 집행
이형근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치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후 다리를 폭파시켰다는 비난을 받은 이승만은 국민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희생양으로 채병덕과 최창식을 선택합니다. 채병덕은 이미 전사했으니 최창식을 골랐다는 것이죠. 이형근은 제5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최창식 대령의 사형집행에는 국방부장관 신성모가 배후로 지목됩니다. 이형근과 최창식은 일본 육사 56기 동기입니다. 그렇기에 동기의 죽음에 대한 분노로 음모론을 제기했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한편 최창식 대령은 사형 집행 후 벌어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습니다.

6·25 전쟁의 영웅이라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언론에서 만들어낸 전쟁 영웅의 대부분은 친일파입니다. 전쟁 중에 작전지역에서 도주한 일본 육사 출신 군단장이 대표적이죠.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에서 국군 3군단은 중공군에게 포위당했습니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군단장이 경비행기를 타고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사단장들, 나중에는 연대장, 대대장, 이등병까지 줄줄이 계급장 떼고 도망갔죠. 이 사람의 이름은 유재흥입니다.

[ 왼쪽이 밴 플리트, 가운데가 유재흥 ]
당시 미국의 제8사령관이었던 제임스 밴 플리트와 유재흥의 대화는 유명하죠. 밴 플리트가 묻습니다.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여기에 유재흥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놀란 밴 플리트가 묻습니다. “예하 사단은?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잃었단 얘기요?” 유재홍은 “그런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밴 플리트는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다른 일자리나 알아보시오!”라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3군단은 해체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작전지휘권은 미군이 가져갑니다.

[ 애국보수의 상징 유재흥 ]
유재흥은 어릴 때부터 일본에서 자라며 일본인 교육을 받았고 일본 육사를 나와 한국말도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그에게 참모총장 대리를 맡겼습니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국방장관에 임명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4년, 고 노무현 대통령이 전작권을 회수하겠다고 하자 예비역 장성 72명이 반대성명을 발표했죠. 대표자가 바로 이 유재흥입니다. 자기 때문에 빼앗긴 전작권 환수를 반대한 것이죠. 2011년 사망한 그는 국립대전현충원의 장군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6·25의 진정한 영웅은 무명용사들입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그 분들이 계시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겠죠. 독재정권에 맞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킨 분들 역시 무명의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름 없이 촛불을 든 시민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있죠. 오늘 하루, 똥별 달고 잘 먹고 잘 살다간 친일부역자들 대신 무명용사들을 위해 짧게라도 묵념 한 번씩 합시다.
- 이 글은 전체 방송의 일부분만 다루었습니다.
- 무엇이든 정리해드리는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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