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ng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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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내면아이와 소통하지 못할까?

흔히 세간에 알려진 내면아이 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나의 내면에는 어릴 때의 내 기억이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아이가 있다고 말이지요.

이를 호오포노포노에서는 우니히필리(우니히피리)라고 부릅니다.
나의 안에 잠재의식이 있는데 이는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없고
나와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라 여겨야 하는 것이 우니히필리입니다.

그럼 이 나와는 별개의 존재인 우니히필리(내면아이)와 왜 소통을 해야하나요?

우니히필리는 내가 체험할 현실을 끌어옵니다.
우니히필리(내면아이,잠재의식)는 내가 체험하는 현실을 끌어와서 기억을 재생시키고
우하네로 불리는 현재의식인 나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면아이에게는 이제 이러한 패턴은 더 이상 끌어오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도우려 하는 것이 엄마에게는 오히려 일거리가 늘어나는 것처럼..
우니에게도 .. 나를 위해 애써줘서 고맙지만
이제 더 이상 이러한 방식의 플레이는 하지 않아도 된다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우니히필리와 친해져야 합니다.
어떻게요?
우선적으로는 소통의 노력을 해야합니다.

나 자신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OO 야~ 어때?
OO야 기분이 어때?
OO야 괜찮아? 등등

어릴 때는 누구나 다들 자신의 우니히필리(내면아이)와 사이가 좋았었습니다.
누구라도 자기가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놀았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장난감을 가지고 인격을 나눠서 놀든 혼자서 1인 2역을 하든...

하지만 성장 과정에서 여러가지 문화 규범을 접하게 되고 단죄당하고 제한당하게 되면서
죄책감, 자기 비하, 자기 단죄 등등으로 활발했던 우니히필리와의 소통은 멀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비하와 죄책감은 우니히필리(내면아이)를 칼로 찌르는 행위이기에 그렇습니다.
'나'를 욕하는 것이 우니히필리에게는 본인 탓을 하고 원망하고 저주하는 것으로 들리기에 그렇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혼자 일이 안풀려서 짜증내면 아이들이 울어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기에 다시금 아이를 달래고 아이와 소통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나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하루중에 내게 말을 거는 순간이 얼마나 되나요?
우리는 평소에 의식이 몸에 있지 않고 붕~ 떠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 자신에게, 우니히필리에게 말을 걸고 내 상태를 체크하는 순간.
이 때는 의식이 내 몸으로 돌아옵니다.
현실을 조금 더 생생하게 살 수 있는 순간이며 좁은 선택지에서 더 넓은 선택지가 보일 수 있게 됩니다.

평소에 이렇게 나 자신에게 질문을 못하고 내게 말을 걸며 나를 체크할 수 없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삶에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침에 거울 보면서 내게 괜찮은지 기분은 어떤지 물을 생각조차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질문을 할수록 내 삶에 여유를 다시 가져올수도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노력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답이 느껴지지 않아도 좋고 부정적인 느낌이 와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소통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어필하는 것입니다.
연애로 보아도 당장 상대방의 응답이 없거나 토라진 기분이 안풀린다고 해도
한두번 시도해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것처럼 나 자신과의 소통도 동일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당신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였던 누군가가 
어느날 당신을 무시하고 버리고 고통을 주면서 몇십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제 와서 자기 이익을 위해서건 뭐건 다시 친해지려고 한다면
당신이라면 한 순간에 마음의 문을 열어줄 것 같나요?

우니히필리도 이와 같습니다.
우니히필리는 내가 아닙니다.
내 안의 타자 입니다.

소통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보여주어야 나의 내면이 내게 답을 하는 순간이 옵니다.
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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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미혼인 분들, 혹은 기혼이지만 아기가 없는분들.이 내용 꼭 가슴에 새기길 바래요~아기낳고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더라구요
@ppossong99 아기들, 아이들은 잠재의식(내면아이)와 상당히 친한 상태이기에 이 때 받는 심리적, 육체적 학대가 인생 전반을 좌우하는 트라우마가 되기 쉽습니다. 더군다나 아이에게 학대란.. 기저귀 갈아주다가 주전자 물이 끓어서 잠시 불끄러 다녀오는 것도 아이는 학대와 방치로 여깁니다. 그렇기에 상처입히지 않고 아이를 기르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차선책으로는 단죄하지 않고 스스로 비판하지 않도록 옆에서 잘 돌봐주는 것이 있겠습니다 :)
그림이 멋지네요 ^^ 어린시절 상처 없이 큰 아이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거 같습니다 중요한것은 성인이 되었을때 과거에 억매이지 않고 스스로 용서하고 치유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현재와 미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설상 현재의 불합리한 상황이 나를 힘들게 해도 과거 어린시절 트라우마에 언제까지나 묶여 변화를 주저하는 빌미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ggBebe7 정말로 맞는 말입니다 !! 문제는 무의식은 내가 통제할 수 없고 인지할 수 없는데 작동한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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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박정희(오까모또 미노루)] 1917년 경북 선산출생. 1925년 구미보통학교 입학. 1932년 대구사범입학. 이 해에 일본제국의 괴뢰정권 만주국수립. 1935년 5월 만주수학여행. 일본제국 지배 때 만주견문. 같은 해 김호남과 결혼. 1937년 대구사범 졸업 후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부임. 같은 해 큰 딸인 박재옥 출생. 1939년 교직을 떠남. 1940년 만주신경군관학교 입학(혈서지원으로 특혜 입학 허용). 1942년 만주군관학교에 일제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고 일본육사 3년 편입. 1944년 일본육사 졸업 후 만주군 보병 제8단 배속, 중국항일군토벌종사. 1945년 일제패망, 만군이탈, 북경에서 조선인 광복군에 편승, 이 당시부터 친일행적 은폐. ⊙1947년 소위에서 대위로 승진 사관학교 중대장 근무. ⊙1948년 소령진급.10월 여순반란사건 발발,11월 남로당간부사실이 발각되었으나 수사협조(밀고)로 처형모면하고 석방. ⊙그 후 6.25전쟁 전까지 육군정보국에 근무하면서 보도연맹원 처리안 기획. 이 사실은 미국정보공개에 의한 문서조사에서 드러났다. 월간 ‘말’2001년 5월호에 실린 이도영의 ‘제주도민 예비검속은 이승만 피신을 위한 정지작업’이란 글을 보면 박정희와 김종필은 전쟁 후에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의 주역으로 그 육군본부정보국 작전 과장이었다. 이 사실은 피살자 유족이기도한 제주도 교사인 이도영의 미국에서 공개된 문서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1950년 박정희 소령지위 회복. 중령진급.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결혼.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준장으로 진급. ⊙1957년 제7사단장. ⊙1958년 소장진급. ⊙1960년 부산군수기지사령관. 2군 부사령관. ⊙1960년 4-19혁명으로 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과 친일파죄과에 대한 조사 성토로 불안을 느낀 박정희 등 친일파의 반혁명 음모가 싹틈. ⊙1961년 군사반란인 5-16 쿠데타를 일으킴. 박정희 가계도 가계(家系) 증조부: 박이찬 조부: 박영규(1840년~ 1914년, 호는 일부당(一斧當)) 조모: 성산 이씨(星山 李氏) 숙부: 박용빈 숙부: 박일빈 부: 박성빈(1871년 ~ 1938년) 모: 백남의(1872년 ~ 1949년) 형: 박동희(1895년 ~ 1967년) 조카: 박재홍, 박재선 형: 박무희(1898년 ~ 1960년) 조카: 박재석(1922년 ~ ), 박재호 누나: 박귀희(1902년 ~ 1974년) 의 아들, 은봉남과 은희만 조카: 은봉남(첫째1918년 ~ 1994년), 은희만(둘째,은지원의 부친)약력:단국대,연세대대학원,한국전력지점장,국무총리비서관,청와대, 보광개발(주)회장,현자영업. 형: 박상희(1906년 ~ 1946년) 조카: 박준홍, 박영옥, 박계옥, 박금자, 박설자 형: 박한생(박한희, 1910년 ~ 1928년)[287] 누나: 박재희(1913년 ~ 1996년) 첫 번째 아내: 김호남(1920년 ~ 1990년, 1950년 11월에 박정희와 이혼) 딸: 박재옥(1937년 ~ ) 본처 몰래, 박정희,이현란과(1948년) 약혼 (이현란과~ 3년간 동거)그후 본처와 이혼. 세 번째 아내: 육영수(1925년 ~ 1974년, 1950년 12월에 박정희와 결혼) 딸: 박근혜(1952년 ~ ) 딸: 박서영(1954년 ~ )근령에서 서영으로 개명. 아들: 박지만(1958년 ~ ) 손자: 박세현(2005년 ~ ) 첫 결혼 후 협의 이혼... 한국전쟁 중 육영수 만나 재혼 박정희는 대구사범 4학년 때인 1935년 여름 부친의 강권으로 억지 결혼을 했습니다. 당시 대구사범 교칙에 재학생은 결혼하지 못하도록 돼 있어 비밀결혼을 한 셈이죠. 상대는 선산군 도개면에 사는 김호남(金浩南, 1920~1990)으로 그보다 세 살 아래였습니다. 두 사람은 부부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입학 후 여름방학이 돼 귀국해서도 처자가 있는 고향집 대신에 교사 시절에 머물렀던 문경 하숙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1950년 11월 협의 이혼하였는데, 그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습니다. 박재옥(朴在玉)이 그 주인공인데, 박재옥의 남편 한병기(韓丙基)씨는 3공 시절 민주공화당 국회의원과 UN대사 등을 지내며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박정희가 두 번째 부인인 육영수 여사를 만난 것은 한국전쟁 중이었습니다. 1950년 8월 하순 피난지 부산에서 송재천(宋在千) 소위의 소개로 맞선을 보았는데, 4개월 뒤인 그해 12월 대구 계산성당에서 허억 당시 대구시장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박정희-육영수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일화가 몇 가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우선 육 여사 부친의 불참으로 박정희의 대구사범 스승이 대신 신부를 인도했습니다. 또 주례가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이라며 신랑신부의 이름을 바꿔 불러 식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으며, 또 신부의 예물반지를 갖고 있던 송재천이 이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김재춘이 급히 나가서 새로 하나 사오기도 했습니다. 박-육 두 사람 사이에서는 근혜, 근영, 지만 등 2녀1남을 두었습니다. 육영수와 결혼하기 전 여대생과 동거 한편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하기 직전에 한 여대생과 동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원산 루시여고 출신으로 당시 이화여대 1학년이던 이현란(당시 24세)이 그 주인공인데, 이현란은 이국적인 외모에다 키도 크고 성격도 쾌활해 박정희 눈에 든 모양입니다. 이들 두 사람은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에 있었는데요,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朴璟遠, 작고)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 대위로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현란과 약혼한 후 곧 이현란을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돼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으며, 이후 이현란이 수차례의 가출과 방황을 해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됐습니다. 박정희와 동거녀 이현란에 대해 그간 알려진 내용은 이 정도가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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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인형에 플라스틱 폐기물이?! #NO플라스틱
매일 플라스틱 조각 8백만개가 바다에 흘러 들어간다는 사실을 아시나여! 그리고 매년 1억마리의 해양 생물들이 그 플라스틱 조각들 때문에 세상을 떠나구여ㅠㅠㅠㅠ 많은 사람들이 요 사실을 알고 각자의 실천을 하고 있잖아여. 개인적으로 플라스틱 줄이기 운동을 하기도 하고, 아니면 회사 차원에서 같이 하기도 하구... 환경 단체도 많구. 근데 그 중 귀여운 캠페인이 보여서 제가 가져왔어여 +_+ 학생 다섯명이서 만든 광고 캠페인! 웬만하면 다 한 번은 봤을 이케아 인형을 가지고 하는 캠페인인데 너무 기엽단 말이져. 물론 실제라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고 잔인하지만 ㅠㅠ 이케아에 있는 해양 생물 인형들에 플라스틱 폐기물들을 씌우는 캠페인을 시작한거져 ㅠㅠㅠ 사실 사진으로 많이 돌아다니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관심있는 사람들만 보고 모르는 사람들은 계속 모르잖아여. 이렇게 더 친숙한 이케아 인형으로 한다면 한 번은 더 보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이케아랑 같이 하는 캠페인은 아니구 그냥 학생들이 하는 거예여 +_+ 기엽져. 그럼 이케아는 이걸 보고 왜 가만히 있냐구여? 뭐 이케아는 이미 옛날부터 환경 오염 관련한 캠페인을 계속 실천하고 있거든여. 뭐 간단하게는 제로 플라스틱 운동이라거나 그래서 이케아 카페나 가구에 있는 플라스틱을 점진적으로 제거하고 있구, 이케아에서 생산하는 가구들은 모두 재사용이 가능하게 하는 디자인을 하고 있져. 2030년에는 100프로 재사용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고 합니다 +_+ 그 뿐 아니라 제품들을 만들 때 발생하는 대기 오염까지 막을 수 있는 방안을 계속 연구+실천중! 개개인의 작은 실천부터 기업의 큰 움직임까지... 같이 하다 보면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여 +_+ 우리도 실천해여!
진짜 위대한 사람
가난하지만, 심성이 착한 한 청년은 신문을 볼 때마다 답답하고 슬프고 우울했습니다. 신문 뉴스에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이야기가 가득했고, 힘과 권력을 가졌지만 부패한 사람들의 행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청년은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에게 힘과 권력과 지혜가 있다면, 세상을 위한 더 의미 있는 일을 찾아 해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배움도 짧고 가난한 청년은 세상을 위한 일을 어떻게 시작할지조차 몰라, 영국의 철학자인 토머스 칼라일에게 찾아가 조언을 청했습니다. “저는 지금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제 욕심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세상을 위해 더 좋은 일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단순한 일용직 노동자입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고 세상을 위하는 일도 아닌데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토머스 칼라일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청년에게 따뜻하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당신이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집을 청소하는 단순한 일이라도 그 일에 책임감을 느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어떤 일이라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토머스 칼라일은 다시 청년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다하면 그 일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귀한 일인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어떤 일에도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작고 쉽게 보이는 일도 하나하나가 뭉치고 뭉쳐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열심히 산 여러분들이 있기에 이 세상은 지탱되고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일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책임을 다하면 꼭 성공한다. – 데일 카네기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