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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위서론의 허구

▣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들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에 대해서는 『세조실록』에 명확하게 등장한다. 팔도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한 내용 중에“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고 하여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위서론자들은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진서론에서 전거로 사용하는 『조선왕조실록』의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라는 기록이 잘못되었으니 ‘안함·원로·동중의 삼성기’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앞서 나온 책을 인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세조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이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다는 상식 밖의 주장으로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그리고 『세조실록』에서는 저자가 세 명 이상일 경우 ‘문태, 왕거인, 설업 등 세 사람이 쓴 책’이라고 사람 수를 명시하였다. 즉 이름을 나열할 때 몇 사람인지 혼동이 생길 여지가 있으면, 몇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안함로와 원동중 두 사람이 『삼성기』를 저술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안함安咸’은 『세조실록』에 나오는 ‘안함安含’과 독음만 같을 뿐 글자가 다르다. 더욱이 『왕조실록』은 정확성을 요구하는 정사正史이므로 기록자들이 ‘안함安含과 안함安咸’, ‘로원老元과 원로元老’를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따라서 이들을 동일 인물로 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문헌고증을 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부분에서 오류를 범하며 견강부회牽强附會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삼성三聖이 아니라 삼인三人이라 기록하고 있으므로, 삼성三聖과 삼인三人을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은 억측일 뿐이다. 설혹 『세조실록』 에 있는 해당 기록을 ‘안함, 로원, 동중이라는 세 성인에 대한 기록’으로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수양산성을 쌓은 세 사람을 과연 성인聖人이라 볼 수 있는 어떤 증거도 없다. 만약 성인으로 기록할 정도라면 기록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에서 이 인물들의 업적이 없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성인 정도라면 그들의 행적에 대한 책이나 가르침이라도 전수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원동중의 삼성기가 실재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이맥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원동중元董仲 삼성기三聖記 주注’라는 대목이다. 이것을 보면 이맥이 원동중의 『삼성기』에 주注가 달린 책을 보고 『태백일사』를 저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위서론자들이 말하는 ‘안함·원로·동중의 세 성인에 대한 기록’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오로지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는‘안함·원로·동중 세 성인의 기록’이 아니라 ‘안함로, 원동중의 삼성기’인 것이다. 또 위서론자 이순근은 구한말에 나온 도기론道器論이 『단군세기』에 나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주역』에는 이미 “형이상자위지도形而上者謂之道 형이하자위지기形而下者謂之器”라는 문구가 나온다. 도기론은 이에 근거해서 도道와 기器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또한 이순근은 “당대當代의 왕을 상上이라고 하면서도 자기 나라를 고려라 칭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표기법이다. 이 경우는 아조我朝, 본조本朝, 혹은 아국我國 정도로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단군세기』를 고려 때 이암이 아니라 후대에 다른 사람이 지은, 사료적 가치가 없는 위서로 몰았다. 그리고 서울대 국사학 교수를 역임한 한영우 또한 “또 한 가지 결정적 의문은 고려高麗니 몽고蒙古니 하는 용어다. 공민왕 시기의 당시 사람들은 고려니 몽고니 하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더욱이 원나라 간섭기에 대신을 지낸 행촌의 입장에서는 쓸 수 없는 용어다”라고 하여 저자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암이 고려와 몽고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선가의 의식과 유가의 의식의 차이’를 들어 이해할 수 있다. 『청학집』을 보면, 조선조 유가에서 잘 사용하지 않던 조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가나 선가에서는 일상적으로 우리나라 또는 우리 민족의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군세기』 서문이나 본문을 읽어 보면 이암의 사상적 경계는 유가보다는 오히려 한민족 신교문화의 전통 도가 쪽에 가깝다. 따라서 이암이 아국이라 하지 않고 고려나 몽고라 호칭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단군세기』 서문은 논리가 매우 치밀한 글이다. 이암은 ‘국유형하고 사유혼하니’라는 구절을, 그 논리를 마무리 지을 때까지 세 번이나 반복한다. 『단군세기』 서문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이암이 이 글을 쓰던 당시의 시대 배경을 알아야 한다. 12세기 초엽에 원나라는 세계의 3분의 1을 점령한 대제국을 건설했고,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채 내정간섭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오잠, 류청신 같은 역적이 나와서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없애고 원나라의 속국이 되기를 주청했다. 이렇게 국운이 기울어져 고려 5백 년 사직이 패망당할 통탄스러운 상황에서, 행촌은 동북아 창세 시대의 뿌리 종교이자 시원 사상인 신교의 핵심인 ‘삼신의 우주사상과 인간론’을 전하면서 위정자들에게 매서운 질타를 한 것이다. 조정에는 만고역적이 들끓고, 역사상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한 원나라의 침략으로 망해 가는 조국의 허망한 현실에 비분강개하여, 신교문화와 시원역사의 부활을 절규하며 글을 쓴 것이다. 또한 이암은 『단군세기』 서문에서 마음의 근원과 신의 상호관계를 명쾌하게 정의한다. 그 중에서 “성자性者는 신지근야神之根也” 즉 ‘인간 마음의 바탕 자리는 신이 존재하는 뿌리가 된다’는 구절은 인간과 신의 관계에 얽힌 수수께끼를 완전히 풀어 주는, 깨달음의 극치를 보이는 문장이다. 그것은 공자의 중용, 석가모니의 중론보다 훨씬 위대한 말씀이며, 환단의 천지 광명 사상을 활연관통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쓸 수 없는 간결한 명문이다. 한영우는 또 『단군세기』에 나오는, 초대 단군왕검이 백성에게 내려 준 생활 실천 과제라 할 수 있는 ‘팔조금법八條禁法’의 문장이 간결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단군세기』를 이암이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단군왕검이 고조선 창업자로서 백성들에게 삶의 지침으로 여덟 가지를 정해서 내려 준 것을 놓고 문장이 길다고 트집을 잡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단군왕검의 가르침은 그 구성과 체계가 매우 논리정연하다. 그래서 이도학은 위서론자이면서도 『단군세기』 서문을 분석하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단군세기』를 이암이 아닌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고, 거짓으로 몰면 안 된다’고 결론지었다. 이처럼 사리에 맞지 않게 문제를 제기하는 위서론자들의 무지몽매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있다. 그것은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아붙이면서 저지른 결정적인 실수인데, 바로 ‘잠청배潛淸輩’라는 문구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잠청배는 원래 이암이 『단군세기』 서문에서 처음으로 쓴 말이다. 고려의 역적이었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 ‘오잠과 류청신과 같은 간신배’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을 위서론자들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 ‘청과 몰래 내통한 무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잘못 해석하였다. 역사의 상식에 무지한 소치이다. 이렇게 잠청배를 잘못 해석한 그들은 잠청배가 조선 말기에 나온 말이므로 『단군세기』 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 쓴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한다. 이승호는 이러한 잘못에 대하여 “(위서론자들의) 이런 오류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인데 특정한 시각이나 목적으로 『환단고기』를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한다. 즉 위서론자들이 위서로 낙인찍기 위한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환단고기』를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이처럼 위서론자들은 『환단고기』의 가치를 파괴하고 훼손하기 위해 어떤 무리한 비판도 불사한다. 이러한 예만 보아도 위서론자들이 식민사학의 변론자로서 동북아 원형 문화의 눈을 가리는 반민족적 행태를 얼마나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지 새삼 절감하게 된다. 《환단고기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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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2년간 노트를 쓰며 내게 일어난 변화
저는 노트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회사에서 업무 수첩을 쓰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노트에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죠. 초등학교 이후로는 일기를 쓴 적도 없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2012년 9월 3일부터 노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났습니다. 2년 동안 3권의 노트를 썼습니다. 노트 즐겨 쓰시는 분들에 비하면 쓴 분량이 많지는 않습니다. 문득 2년 동안 나는 노트에 어떤 것들을 적었나? 정리를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나중에 노트에 쓴 내용 중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쓰려면 내용의 색인도 필요할 것 같았지요. 그래서 노트 색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2년 동안 쓴 노트를 처음부터 한 페이지씩 넘기며 어떤 내용들을 썼는지 구글드라이브 스프레드쉬트에 적어 보았습니다. 2년 동안 작성한 노트, 통계를 내보다 스프레드시트에 각 메모의 작성 날짜, 주제, 카테고리, 키워드, 중요도, 발행 여부(블로그 글 또는 프리젠테이션 발표), 발행 글 링크 등을 써넣었습니다. 스프레드시트에 다 정리한 다음 통계를 내봤습니다. (작성 기간이 2012.9 ~ 2014.9 인데 아래에 잘못 써져 있네요. 나중에 수정해야 겠습니다.) 노트에 작성한 메모들의 Source를 분류해 보았습니다.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한 것이 가장 많고, 그다음으로 제 생각을 정리한 글이 많았습니다. 세미나를 듣고 내용을 정리한 것도 25회로 꽤 되네요. 노트에 작성한 글의 주제를 분류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글의 주제를 분류해보니, 지난 2년 동안 제가 어떤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한눈에 보이네요. 노트 작성, 어떤 식으로 했나? 노트를 쓰는데 형식을 따지지는 않았습니다. 글씨를 예쁘게 쓰려고도 하지 않았구요. 1) 책 내용 정리 책을 읽고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노트에 적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줄 친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고, 그 부분에 대한 제 생각을 짧게 적었습니다. 책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해보기도 했구요. 책 표지를 조그맣게 따라 그리는 것도 재밌더라구요. 2) 생각 정리 주로 블로그 글이나 프리젠테이션의 내용을 구상할 때 생각 정리를 위한 메모를 많이 했습니다. 글의 바탕이 되는 이론을 정리해 보기도 하구요. 글의 구성을 마인드맵으로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글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보는 연습도 해봤습니다.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만들기 전에 슬라이드 구성을 그려보았네요. 3) 세미나 내용 정리 세미나를 들으면서 실시간으로 마인드맵을 그린 적도 있었는데요. 요즘은 마인드맵을 그리지는 않고 그냥 빠르게 받아적고 있습니다. 세미나 중요도에 따라서 전체를 정리할 때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나에게 새롭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선별해서 적고 있어요. 4) 팟캐스트 정리 팟캐스트도 그냥 수동적으로 듣지만 말고, 내용을 정리해보면 실제로 내 삶에 적용하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5) 그림 그리기 가끔은 실력은 없지만 그림도 그려보구요. 제 사무실 책상에 있는 노호혼도 그려보고… 아들이 읽는 동화책 그림도 따라 그려보구요. 비쥬얼씽킹 좀 해보겠다고 책에 나온 그림들 따라 그려보기도 했었네요 ^^; 2년 간의 노트 작성, 무엇을 남겼나? 2년 동안 노트 3권, 300여페이지를 쓰면서 저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살펴봤습니다. 1. 책 읽기의 변화 저는 원래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책을 보고 나서 항상 이런 고민이 있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기는 하는데 나중에 생각이 안 나는 거죠. 참 좋은 책을 본 것 같은데 나중에 기억을 못하니 활용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책의 중요한 부분을 복사를 해서 따로 철을 해서 보관을 하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해둬도 나중에 다시 보는 일은 생기지 않더라구요. 결국 한 번 본 책이 잊혀지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노트를 쓰면서 책 읽기가 달라져습니다. 책의 줄 친 부분을 노트에 옮겨 적고, 거기에 제 생각을 쓰기 시작하면서 책과의 만남이 바뀌었습니다. 저자와 대화를 주고 받기 시작한거죠. 그리고 노트에 적은 내용을 바탕으로 블로그에 쓸 글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노트에 정리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글을 완성하고 나면 이제는 그 책과 저자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아이템이 하나씩 생겼습니다. 노트 작성을 통해 한 번 만나고 잊혀지던 사람과 같았던 책이 편지를 주고 받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노트 작성의 효과를 체험하다보니 책을 읽고 메모하는 습관이 다시 책 읽기를 불러오는 선순환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고 노트를 작성하는 것이 즐거운 시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책을 읽고, 노트 작성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블로그 글로 마무리하는 사이클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죠.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  ‘다윈의 노트’에서 찾은 창의성의 비밀 <아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났다>  최고의 남자로 키우는 10가지 대화방법 <이카루스 이야기>  지금 당장 아티스트가 되어야 하는 이유 <Why Not?>  비쥬얼 씽킹으로 배우는 재미있게 사는 법 2. 블로그 글쓰기의 변화 메모-생각정리가 습관화 되면서 쓰고 싶은 주제가 계속 생겼습니다. 블로그 할 시간이 없어서 못 쓰지, 소재가 부족해서 못 쓰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혹시나 블로그 소재가 떨어지면 이번에 만든 노트 색인을 보면서 아직 블로그 글로 발행하지 않은 주제를 찾아서 써도 되겠더라구요. 그리고 책을 읽고 내 생각을 더해서 글을 쓰는 일을 자주 하게 되면서 블로그 글의 질도 조금씩 향상되었습니다. 블로그 초창기에 사진과 단문 위주의 글을 주로 썼던 것과 비교하면 요즘은 하나의 주제를 구조를 갖추고 에세이의 형태로 쓰는 글쓰기로 발전했습니다. 3. 세미나 소화하기 세미나 내용을 노트에 정리하고, 다시 읽어보고,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나의 삶과 접목되는 부분을 찾아 적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셜미디어 콘텐츠 관련 세미나를 듣고 쓴 블로그 글입니다. 이 글을 쓰고 나서부터 제 블로그 글의 제목을 짓는데 좀 더 신중해 졌죠. > SNS에서 인기끄는 3가지 비결 세미나를 듣고 전에 읽었던 책과 연결해서 글을 써보기도 했습니다. ‘미생’ 윤태호 작가의 강연과 <아들러 심리학 해설> 책을 연결해서 쓴 글입니다. > 내 안의 열등감과 만나는 방법 4. 정보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변화 생각정리 세미나 2차(2012.11.24) 이상혁님 강의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 <세미나 내용 요약> 메모는 왜 해야하는가? – 생각정리 세미나 2차 : 생각과 시간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출처. 생각정리 기술2차 생각과시간 배포본 정보를 소비하는 사람과 정보를 만드는 사람, 이 두 종류의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정보를 소비하는 사람 = 생각하지 않는 사람 = 메모하지 않는 사람 정보를 만드는 사람 = 생각하는 사람 = 메모하는 사람 노트에 메모를 하고, 생각을 정리하고, 블로그에 글을 써서 다른 이와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에는 정보의 소비자에 머물렀던 제가 정보의 생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포탈 다음의 추천글 목록에 오르기도 했구요. <겨울왕국> 엘사의 let it go 노래 가사에 숨겨진 의미 해석 다음의 ‘많이 본 글’ 섹션에 제 글이 뜨는 일도 종종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이 제공하는 정보를 받아먹기만 하던 제가 메모를 하고 노트를 쓰면서 남과 공유할 수 있는 정보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거죠. 노트를 쓰면서 느낀 점 2년간 노트를 쓰면서 느낀 점입니다. - 노트에 손으로 쓰면서 생각이 발전하는구나. - 노트에서 생각이 성숙해진다. 노트는 생각의 발효가 일어나는 옹기와 같다. - 메모-생각정리-글쓰기를 통해 하나의 주제가 완전히 내 안에 자리잡는다. - 노트에서 서로 다른 생각이 충돌하고 융합이 이뤄짐. 서로 다른 주제의 노트 메모가 합쳐져 하나의 글로 탄생. 노트는 생각의 반응로. - 손으로 쓰는게 즐거워진다. 필사의 즐거움. - 생각의 일기장을 갖게 됨. - 노트에 적히는 내용을 통해 내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알게 됨. 마인드와칭! 처음 노트를 만들면서 ‘ReBirth Note’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2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이름을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2년 동안 노트를 쓰면서 저는 다시 태어났으니까요. 노트 쓰기를 통해 나에게 일어난 변화 - 책 읽기, 세미나 듣기, 블로그 글쓰기의 질 향상 - 생각이 충돌하고 성숙하는 반응로를 갖게 됨 - 정보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변화 - 내 마음을 바라볼 수 있게 됨 회사에서 쓰는 연구노트를 같이 찍은 사진입니다. 신기하게도 개인 노트와 거의 같은 분량을 썼더라구요. 출처 : http://ppss.kr/archives/62074 요즘 기록하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 외출할 때 항상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니는데 초반에는 엄청 열심히 몇장쓰고 점점 노트 꺼내는 횟수가 줄어드는 중입니다 ㅠ_ㅠ 그러다 발견한 글인데, 여러분과 함께 읽고 싶어서 퍼왔어요 *_* 우리 같이 자신만의 역사를 기록해볼까요 ? 으쌰으쌰 !
[펌] 단무지의 유래와 색에 관한 이야기
단무지의 유래에 대한 설은 매우 여러가지이다. 심지어 한국의 승려인 택암이 전파했다고도 알려져있는데 뭐 이건 같은 승려인 신미대사가 한글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동급인 내용이고 전국시대 당시 일본의 타쿠앙 소호라는 승려가 만든 타쿠앙즈케라는 선식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타쿠앙은 절에서 장기간 동안 보관할 수 있는 간단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쌀겨와 소금으로 무를 절이고 버무린 뒤 항아리 담아 익히는 방법을 개발하게 된다. 이후 타쿠앙이 있던 동해사라는 사찰에 당시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방문하게 되어 대접을 해야하는데 산해진미에 익숙한 이에미츠를 위한 고기 같은게 절에 있을리가 없고 그냥 이 무절임에다 밥을 내어주게 됐다. 의외로 담백한 맛에 이에미츠가 반하게 됐고 이에미츠는 이 반찬의 이름을 물었지만 아무 이름도 없는 무절임이라는 말에 개발자인 타쿠앙의 이름을 붙혀 타쿠앙즈케 즉 타쿠앙절임 이라고 이름을 지어주게된다. 이 간단해보이는 무절임이 긴박한 전장터에서 밥을 제때 챙길 수 없는 병사들에게 쓸모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에미츠는 이후 출병하는 병졸들에게도 통으로 허리춤에 차게한 채 전쟁을 하도록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타쿠앙’은 오랜 시간동안 일본의 대표적인 야채절임으로 전해져 왔고 쌀겨로 수개월간 숙성시키는 방식으로 인해 제작 비용이 높은 고-오급 반찬으로써 막부의 장군이나 호위무사들의 밥상에서나 볼수 있는 음식이 됐다. 그런데 원조인 타쿠앙의 색깔은 지금 우리가 먹는 단무지처럼 노란게 아니라 뒤죽박죽이었다. 앞서 말한 쌀겨로 숙성시키는 과정에서 숙성기간에 따라 무가 노랗거나 회색 또는 갈색으로 변색되는데 만드는 사람마다 색이 달라서 이게 무슨 절임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결국 타쿠앙을 만드는 사람들은 색을 통일하기 위해 치자나무 열매를 우린 물 또는 울금을 첨가해서 노랗게 만들게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 타쿠앙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면서부터 아예 황색 색소를 이용하는 케이스가 정착해 우리가 아는 단무지 색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엔 언제부터 단무지가 나온 것일까? 일제강점기 때 명월관이라는 식당이 처음 문을 열게되는데 이 명월관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외식문화가 성행하게 됐다. 근데 당시엔 돈있는 사람들만 이런 고급식당에서 외식을 즐길 수 있었는데 주 고객이 누구일까? 바로 일본인이었다. 이 일본인들을 대접 하기 위해 고오급 반찬인 타쿠앙를 내오게 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에 정착하게 된것이다. 중국집에서 단무지를 반찬으로 내게 된 것도 역시 일제 강점기 동안 인천에서 문을 열기 시작한 산동성 출신 중국인들의 요리집이 외식열풍으로 인해 전국으로 퍼져나가며 마찬가지로 주 고객인 일본인 들의 입맛을 고려하여 내오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도 타쿠앙 이나 다꽝으로 불리던 이 고급반찬은 시대가 흐르고 급성장한 한국의 경제 상황에 맞춰 만만하고 친숙한 식재료가 됐고. 부르는 이름이 타쿠앙에서 단무지라고 변하게 되어 가장 성공적으로 일본의 잔재를 털어낸 단어가 됐다. 이렇게 한 중 일의 근대역사의 흐름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단무지는 어엿한 한국의 대표반찬이 되어 우리의 밥상을 지키고 있다.
내란음모 관여 의혹 황교안을 수사하라.
군인권센터가 박근혜 정권 말기 계엄령 실행을 논의한 기무사 문건을 공개하였다. 이 문건에는 계엄령 실행 논의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기무사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이 기각되고 국민의 저항이 거세지면 서울시내에 탱크 200대, 장갑차 500대, 무장병력 4,800명, 특전사 1,400명을 동원하여 국민을 짓밟겠다고 계획한 것은 명백한 내란음모다. 그런데도 주범겪인 당시 기무사 사령관 조현천이 도주하자 합동수사단은 확인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들며 수사를 덮어버렸다. 지금까지도 의혹만 무성한 채 사건의 실체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무사가 작성한 문건대로 계엄령이 실행되었다면 광주처럼 국민에 대한 피의 학살이 벌어졌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참혹한 일이다. 이 문건이 만들어진 시기는 2017년 2월이다. 남아 있는 조현천의 청와대 출입기록과 문건의 내용을 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황교안 대표와도 논의가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도 합동수사단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황교안 대표에 대한 조사도 진행하지 않았다. 제1야당 대표가 내란음모 혐의자라면 보통일이 아니다. 검찰은 즉각 재수사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과연 문건의 내용대로 NSC가 계엄을 검토했는지 당시 NSC 의장이었던 황교안 대표와 관련자들을 소환하여 철저히 수사하길 바란다.
"문래동 주민분들 도와주세요..." 강아지와 산책하던 여성의 간절한 외침
얼굴을 반으로 가르는 하얀 털, 베이지색 몸통이 특징인 귀여운 강아지. 평소엔 귀가 쫑긋 서 있고, 꼬리가 몸 쪽으로 말려있는 9살의 믹스견 '소한이'입니다. 약 3주 전인 10월 5일 토요일, 소한이가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현대 1차 아파트 근처에서 실종됐습니다. 최종 목격지는 도림고가와 삼환아파트1차 사이에 있는 찻길이며, 보호자에 의하면 소한이는 도림교 사거리까지 쭉 달려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보호자는 소한이를 찾기 위해 전단지를 배포하며 주변을 꼼꼼히 수색했지만, 소한이의 흔적은커녕 소한이를 보았다는 주민의 제보조차 없다고 호소했습니다. 보호자는 "소한이에 대한 어떠한 제보나 단서도 없어 무엇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태"라며 가슴을 졸이고 있습니다. 이어 애타는 목소리로 "10월 5일 토요일, 소한이가 실종된 당시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소한이를 목격한 누군가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문래동에 있던 주민분들의 제보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소한이가 실종된 지 3주가량이 지났기에 소한이가 문래동이 아닌 신도림, 영등포, 대림, 신림 등의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서가 전혀 없는 만큼, 문래동 그리고 문래동과 인접한 지역 주민분들의 제보가 간절합니다. 위 사진은 소한이의 실종 당시와 최대한 가까운 모습이지만, 오랜 실종으로 털이 무척 길고 더러울 수 있습니다. 소한이 보호자는 "소한이가 개와 사람을 무서워해 다가가면 도망가는 모습을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전했습니다. 또, 소한이가 발작을 앓고 있어 하루빨리 찾지 않으면 간질 발작 증상이 올까 무척 걱정하며, 소한이를 찾는 데 결정적인 제보를 해주신 분께 사례금 30만 원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소한이를 보시거나 소한이와 닮은 아이를 보신 분은 아래 보호자의 연락처로 전화, 사진, 문자 등의 제보 바랍니다. 실종아 정보 이름: 소한이 나이: 9살 성별: 여아 품종: 믹스견 특이사항: 4kg의 소형견으로 귀가 쫑긋 서있고 꼬리가 말려있으며, 전체적인 털색은 베이지색이나 미간에 흰색 털이 나있는 게 특징. 제보 문의 연락처: 010-4606-8163 이메일: jetaime812@naver.com 문래동, 신도림, 영등포, 대림, 신림동에 사는 주민분들은 꼭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