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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이 백인처럼 문명을 발달시키지 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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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도 농경, 가축, 과학의 발전을 독자적으로 이루다가 항해기술이 발달하면서 유럽이나 동남아와 교류하며 성장하지만 역시나 백인문물의 힘에 굴복당해 침략됩니다. 직간접적으로 우리나라도 서양문물을 받은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 왕이 없어지고 민주공화국이 됩니다. 한편으론 유럽에서 자체적으로 민주화가 되었듯이,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우리나라도 그런단계를 밟아가는 와중에 일제강점을 당한 상황이라 외국의 통치 없이 한국 고유 문화를 유지해가면서 민주화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지금 서양문물이 저도 편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문화를 찾기 힘든건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이 책 읽어보고 싶었는데 책이 두꺼워서...몇장 읽다 실패한 기억이 나네요ㅠㅠ;; 핵심내용을 알차게 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문명 처음 스타팅이 중요한 이유를 이책에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군
제목이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편견을 심어주게 돼있네요. 흑인 대신에 수렵채집민, 백인 대신에 농경민족으로 하는게 어떨까요?
@tearess 카드 만드는 사람이니.. 자극적인 제목은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싶네요 제목만이라면 충분히 그리 생각할 수도 있다 봅니다.
백인, 흑인이라는 단어에만 집착해, 차별이 아닌 것을 무조건 차별로만 보는 사람이라고 제가 오해했습니다. 처음 단 댓글에 "제목이"라고 써 놓으셨는데, 제가 한 말들은 이 것을 못보고 글 내용 전체를 차별이라고 한줄 알고 쓴 말들입니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seonghunyun18 @tearess 아니 이분들 넘나 멋진거 아닙니까? 배운신 분들이네요! 갑자기 훈훈해졌어요 🥺
역사적인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책인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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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전쟁 당시에 쓰인 총
사무라이의 몰락 사가에서는 16세기부터 쓰여온 매치락 화승총, 18세기~19세기에 두루 쓰인 활강식 머스킷, 강선이 파인 머스킷, 후장총 다양하게 등장한다. 실제 역사 속 보신전쟁에서도 몰락처럼 다양한 총기가 등장했을까? 그걸 알아보자 1. 철포 무대뽀할때의 대뽀가 뎃뽀, 바로 철포다. Matchlock 스타일, 흔히 화승총으로도 부르며 조선에서는 조총이라 불렀다. 역탈을 하지 않는 순수 햄탈 토붕이라면 제국 핸드거너가 이런 총을 쓴다고 생각하면 된다. 전국시대에 일본에 유입되어 임진왜란 때 조선에 큰 인상을 남겼었다. 개항하기 전까지 일본의 주력 화기로 인식되곤 하지만 이미 개항 전부터 이런 스타일의 총이 구닥다리인건 당시 일본도 어느정돈 인식하고 신무기로 대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건 2번에서 후술하겠다. 2. 활강식 머스킷 페리의 개항 이전까지 일본은 쇄국정책을 고수해 서구 세력과의 통상을 거부했으나 유일하게 네덜란드와의 교류는 끊지 않았었다. 다른 동양 국가들이 강제로 갑자기 개항하든 스스로 문을 열던 준비되지 않아 어설프게 문을 여는 바람에 피를 보는 와중에 그나마 개항으로 피해를 덜 본 이유가 네덜란드를 통해 꾸준히 서구권에 대한 정보를 접해오고 있었던 덕이 컸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개판이 났을때 당시 나가사키에서 관리로 근무하던 타카시마 슈한은 그 강국이었던 청나라가 영국에 의해 굴육을 맛보았단 사실을 알고 서구식으로 군사력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타카시마는 네덜란드로부터 1840년대부터 서양식 머스킷과 대포를 수입해 네덜란드 교본에 따라 시범으로 만들어진 신식군대를 훈련시켰다. 이에 설득된 막부는 서양식 화기의 도입을 승인했지만 1852년, 막부가 경계하던 도자마 다이묘 번인 사츠마와 사가 번이 서구식 공정을 도입해 자체적으로 서양식 화기 생산에 필요한 철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흐름이 바뀌게 된다. 도자마 다이묘들의 성장을 두려워하던 막부 보수파들이 타카시마를 비난해 그를 실각시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카시마의 공로로 일본은 개항 이전부터 서양식 머스킷이 유입되었고 장기적으로 보면 자체적으로 생산이 가능하게 되는 기반까지 깔아놓게 되었다. 사무라이의 몰락에서 징집병 따위들이 구식 철포가 아닌 머스킷을 들고 나올 수 있던 것은 타카시마 덕이라 보면 된다. 3. 미니에 라이플 본래 강선이 없는 활강식 머스킷이 주류인 시대에도 강선이 파인 라이플은 꾸준히 쓰여왔으나 강선을 파게 될시 장전이 불편해지는 문제로 인해 총신을 짧게 하고 소수의 특등사수들에게만 지급되는 무기에서 벗어나질 못했었다. 하지만 미니에 탄이 도입되면서 모든 보병이 강선이 있는 머스킷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게 되면서 활강식 머스킷은 차츰 도태되기 시작한다. 미니에 탄은 강선이 파인 라이플에서도 장전이 편한데다가 탄두가 원뿔형이라 구형의 탄에 비해 살상력이 오르는 소소한 효과도 있었다. 막부파의 머스킷은 상술한 활강식 머스킷이 많았던 반면에 영국과 일찍이 붙어먹었던 존왕파는 영국제 엔필드 라이플을 주력으로 사용해 사격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역덕후가 아닌 대중적인 라스트 사무라이의 이미지에서는 총, 칼, 활 조금더 봐주면 화승총 수준의 무기로 신식 서양식 무기와 싸운 이미지였겠지만, 실제로는 서구식 머스킷 vs 더 진보된 서구식 머스킷의 양상이었다고 보면된다 대충 이 친구들이 바닐라 상태면 활강식 머스킷, 대장간에서 명중 버프 붙고 나왔으면 미니에 라이플이라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3. 후장총 사실 후장총이라 하면 단순히 전장식이 아닌 총으로 굉장히 그 범주가 넓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뒤로 장전한다는 발상은 이미 초기의 화포였던 불랑기포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에 그 발상 자체는 굉장히 오래 되었다 할 수 있다. (불랑기포의 원형이 되는 기술은 무려 14세기에 등장했다. 사실상 화약의 등장과 함께했다는 것) 18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엠토에서도 후장총인 퍼거슨 소총이 등장한다. 하지만 뒤로 장전할 때의 문제는 화약이 연소할때 발생하는 가스압을 완전히 폐쇄하지 못해 위력이 감소한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19세기 중반에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기 때문에 상술한 미니에 라이플의 완성형이라 평가받는 로렌츠 머스킷을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군과 최초의 볼트액션 라이플인 드라이제 소총을 사용하는 프로이센군의 대결에서 야전에서는 연사력이 뛰어난 드라이제 소총이 압승이었으나 엄폐물을 낄 경우 가스압이 새지 않아 명중률과 사거리가 뛰어난 오스트리아군의 머스킷이 후장총인 드라이제 소총을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음을 입증한 바가 있다. 요약하자면 19세기 중반까지만해도 후장총은 나오자마자 머스킷을 도태시킬 정도의 고급기술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3.1. 트랩도어 후장총 1800년대 중반의 후장총에서 가장 흔한 타입이자 보신전쟁에서도 많이 쓰였던 타입은 트랩도어 스타일이다. 트랩도어는 단순히 '경첩을 달고 열고 닫는 방식'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트랩도어 방식은 기존 머스킷을 개조해서 만들기 쉽다는 특징이 있었다. 실제로 보신전쟁 당시 존왕파 번들이 사용한 후장총에는 처음부터 후장총으로 설계된 물건뿐만 아니라 기존 머스킷을 트랩도어 방식으로 개조한 물건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앞서 언급한 존왕파의 주력 머스킷인 엔필드 라이플을 개조한 스나이더-엔필드 라이플 또한 존왕파의 주력 무기였다. 막부파에서도 스나이더 소총을 사용한 번들이 있었는데 쇼나이 번과 사무라이의 몰락에서도 등장하는 나가오카 번이 있다. 이 둘은 독일 상인들과 협력 관계에 있어 독일 상인들이 상하이에서 구매해온 서양식 무기를 사용해 아직 전장식 머스킷밖에 없는 존왕파 군소 번 상대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3.2. 볼트액션 후장총 이 시기 가장 고급기술이며 현재까지도 저격수의 무기로는 볼트액션 방식이 남아있을 정도로 신뢰성이 있는 방식이었다. 물론 상술했듯이 최초의 볼트액션 소총 드라이제조차 가스압 차단이 완벽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랩도어보단 확실히 진보한 방식이었다. 막부는 독일의 드라이제 소총과 프랑스의 샤스포 소총을 도입했으나 드라이제 소총의 경우 도입한 것은 분명하나 실제로 쓰였다는 기록은 잘 나오지 않으며 샤스포 소총의 경우 막부의 근위대이자 프랑스식의 신식군대 전습대가 쓴 것으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총만 도착하고 그 총으로 훈련을 하지 못해 보신전쟁에서는 원래 쓰던 머스킷을 들었다고 한다. 3.3. 레버액션 레버액션은 그 유명한 터미네이터가 오토바이 타면서 쏘는 샷건에 사용된 방식이다 보다싶이 레버를 당겨서 탄피를 배출하고 다음 탄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게다가 동시기 후장총들이 한발 쏘고 한발 장전해야 했던 것과 달리 관형탄창을 쓸 수 있어 속사에 가장 유리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레버액션 방식은 결국 후장총의 주류가 되지 못했는데 레버액션 방식은 사용할 수 있는 탄종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레버액션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관형탄창을 사용할 경우 뾰족한 탄두가 앞에 있는 탄을 찔러 폭파하는 사고가 날 수 있었기 때문에 탄두의 형태에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보병들의 소총보다는 기병용 카빈에 많이 사용되었다. 보신전쟁에서 사용된 레버액션 소총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제 스펜서 연발소총으로스펜서 연발소총의 관형탄창에는 7발의 탄이 들어갔다. 왕파의 도사 번이 특수유닛으로 보유한 도사 소총병의 주무기도 스펜서 연발소총이다. 막부파에서는 아이즈의 여걸이었던 야에가 사용한 총이었다. 토탈워갤러리 브라우닝자동소총님 펌
그리스와 터키가 사이가 안좋은 이유
1453년의 콘스탄티누폴리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η 함락이후 약400년에 걸쳐서 그리스인(당시에는 룸인으로 불렸음)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아왔고 정교회 그리스인들이 독립을 쟁취 한건 19세기에 들어서 물론 이른바 룸인들끼리는 여러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걸 다 이야기하면 길어지니 생략하고 아직 에게해 연안이나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많은 그리스 계통의 사람들이 살고있었고 독립 그리스는 이 영토를 전부다 수복하는것이 큰 국가적 기조로 삼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강경론적인 민족주의적 팽창론은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 라고 불렀는데 이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아무튼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 땅은 전부다 그리스의 영토이다 라는 접근론 한편 1차 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투르크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아르메니아등에게 나라가 분할되게 되는 상황이였는데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 무스타파 케말를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의 해체와 터키 공화국의 수립이 선언되고 무스타파 케말이 소아시아 연안에서 내륙으로 밀고 들어오는 그리스군대를 격파하여 소아시아 영토를 지켜냄 결국 뒤이어 체결된 로잔 조약을 통해서 터키의 영토가 획정되고(그래서 아나톨리아와 이스탄불일대는 터키영토가 되고, 에게해의 섬들은 죄다 그리스 영토가 됨)그리스와 터키간의 인구 교환이 실시되어서 터키 영토로 획정된곳에 살던 정교도들은 죄다 그리스인으로 취급당해서 그리스로 보내지고, 그리스 영토로 획정된 곳에 살던 이슬람교도들은 죄다 터키인으로 취급되어 터키로 보내짐 예외가 있다면 이스탄불 주변의 그리스인들은 그대로 남아서 살수있게 되었다는것 정도? 문제는 이스탄불에 남은 그리스인들은 수십년에 걸쳐서 터키인들의 온갖 박해를 받고 그리스로 이주를 하거나 개종을 해버림으로서 현재 이스탄불 일대의 그리스인들은 수천명 규모로 축소됨 한편으로는 또다른 갈등도 있었음 키프로스섬 역시 오스만 제국 통치를 거치면서 많은 터키인들이 살게되었는데 영국으로부터 키프로스섬이 독립할때즈음 이들 지역에서 민족적인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함 그나마 이 분쟁을 어떻게든 조정하고 화해를 하려고 하는 노력도 있어서, 당시 키프로스 대통령으로 취임한 키프로스 정교회 대주교 마카리오스 3세가 여러 노력을 했는데, 그리스계통 장교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그리스 군사정권의 지원을 받아서 쿠데타를 감행함 이걸 본 터키는 즉각 반발하고 군대를 보내서 키프로스섬 북부를 점거하고 북 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을 수립. 이때 그리스 군사정권도 군대를 보내서 전쟁을 벌였지만, 이렇게 전쟁을 벌여대는 그리스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 사라져버리고 현지의 그리스계들도 터키군에게 힘을 못쓰다가 못해서 본국의 명령을 거부함으로서 군사정권이 붕괴해버리고 전쟁이 종결됨 키프로스는 아직도 터키계과 그리스계로 분단되어있고, 터키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들이 북키프로스 터키 공화국을 터키의 괴뢰국으로 취급함 그와 함께, 70년대 즈음부터 해서 터키는 그리스의 에게해 섬들에 대해서 비무장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위에 올린 지도에 나와있듯이 3개의 지역에 관한 조약들을 그 근거로서 사용하고 있음 1.도데카니사 제도: 이탈리아와의 파리 평화 조약에서 이탈리아령 에게해 제도가 그리스에 할양되며 대신 비무장화 됨 2.레스보스 히오스 사모스 이카리아, 프사라 등의 섬:로잔조약에 부분적인 비무장화가 명시됨(요새 건설 ,해군 배치 아나톨리아에 대한 그리스 군용기 비행 금지, 에게해에 대한 터키의 군용기 비행 금지, 그리스는 이 섬에 경찰 병력 및 지역 주민으로 구성된 군 병력 배치 가능) 3.림노스, 사마트라케스 섬: 로잔조약에 전면적인 비무장화가 명시되었음 여기에 대해서 그리스는 이렇게 주장함 1.도데카니사 제도는 애당초 그리스가 터키에 대해서 비무장 요구를 지는게 아니라 이탈리아에 지는것이다.(애당초 터키와 이탈리아 상호간에 전시 상태였던적이 없고 이탈리아와 연합국간의 평화조약 당사국도 아님) 2.레스보스 히오스 사모스 이카리아, 프사라: 이 지역은 비무장화가 되는것이 아니라, 조약 내용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그리스는 해군 기지를 설치하거나 요새화를 금지 시키는것일뿐이고 지역 주민을 징병하거나 경찰 병력을 배치하는건 문제가 없는데, 터키의 에게해에서의 위협과 북 키프로스 강점으로 그러한 제한된 병력을 증강시키는 것뿐이라고 주장함. 거기에 에게해에 터키 군용기가 에게해의 그리스 영공을 침범함으로서 터키가 조약 내용을 위반해왔다고 주장. 3.림노스, 사마트라케스 섬:해당 섬의 비 무장화는 다르다넬스 해협 비무장화에 동반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1936년 몽트뢰 조약으로 해협의 비무장화에 대한 로잔 조약의 조항이 무효화 됨에 따라서 해당 섬들도 재무장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몽트뢰 조약 당시 터키 정부도 이 사실을 그리스 정부에게 인정한다고 수차례 이야기 했고 터키 국회에서도 외교 장관이 그리스의 재무장화를 인정한다는 발언을 했으며, 실제로 몽트뢰 조약 이후 수십년간 터키는 그리스의 림노스, 사마트라케스 섬 재무장화에 대해 아무런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저러한 갈등 요인은 특히 동지중해일대의 석유시추와 관련해서 실질적인 갈등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중 요약 역사적 문제 경제적문제 영토주권의 문제 민족적 감정문제 모든게 다 같이 압축되고 150년간 숙성된것이 지금의 그리스와 터키의 갈등이다 군사갤러리 ㅇㅇ님 펌
북한의 기괴한 주체무기들
1. 해상급 해삼급은 2015년경에 공개된 스텔스형 고속정으로 아마 서해교전때 뚜까맞은거에 대응해서 개발한 아군 고속정에 대한 트롤링용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함체는 쌍동선(선체가 2개라 만능의자처럼 생김)형태이고,  해삼급의 함명은 북한에서 통용되는 명칭은 아니고 자체분류한 명칭이라 정식명칭은 모른다. 위에 금성-3호(KH-35) 경사발사대와 이글라 원격발사기, AK-630을 탑재한 기본모델이 있고 이란에서 들여온게 거의 확실한 짭토멜라라 76mm를 달고 금성3호와 이글라를 제거한 대신 마스트에 스텔스형상을 주려고 덮개를 씌운 후기형 모델도 있다. 형상은 스텔스를 추종했지만 당연하게도 마스트에 어정쩡하게 덮개를 씌운거랑 함포랑 부포 등이 기존설계 그대로 박아다놔서 스텔스성능은 영 메롱일듯 싶다 2. 신포급 현재까지 1척이 존재하는 북한 유일의 탄도미사일 재래식잠수함이다. 1번함 함명은 8.24 영웅함이라고 부른다. 원자력추진이 아니라 재래식이고 대신 탄도미사일(Ballistic Missile) 탑재가 되서 SSB라는 21세기 기준으로 좀 기괴한 형식을 가졌다. 함체 측면에 구멍이 송송송 뚫려있는 이유는 저게 북한에서 철판두들겨본 기록이 있는 로미오급을 기반으로 설계한거라 그렇다. 배수량은 대충 2000톤 언저리로 보이는데 2천톤따리에 어떻게 중거리 이상의 탄도미사일을 실었냐면 그냥 옛날 골프급 하던거처럼 코닝타워에 구멍뚫어서 탄도미사일 딱 1발을 박아논 형태이다. 물론 골프급보다 체급이 작아서 딱 1발밖에 안 들어간다. 덕분에 거주성이나 각종 마스트다발 설치는 개좆박았다. 아 근데 어차피 북괴 잠수함들은 다 1950년대 로미오급이나 마을버스만한 잠수정들이 주력이라 딱히 없어서 상관없을 듯 신포-C형으로 알려진 신형 잠수함이 건조중인데 얘는 코닝타워 뒤쪽에 돌출부가 있고 북한이 공개자료에서 자체적으로 모자이크처리한거 보면 정석적인 설계를 한 것으로 보이나 역시나 이래도 자체 전자장비가 개박살난 3천톤따리 로미오설계기술 기반 재래식잠수함에 어거지로 발사관 1~3개 박아논거다 3. 14.5mm 발칸 북한이 개발한 14.5mm 구경 게틀링기관총이다. 김정일 시절부터 나온거라 아마 최소 20년 이상 된거로 보이고 일시에 즉각적인 화력을 투사하는 목적으로 만든거 같은데 버전이 다양하다. 일단 위에 보이는 해군형이 가장 일반적이고 대전차포마냥 포방패달린 수레에 장착된 지상형겸 대공형도 있다. 4. 1984년형 370mm 3신 자행비반충포 이 무슨 건담에 나올거 같은 무기는 북괴가 미사일에 스탯찍기전인 1984년경에 장거리 포격을 위해 개발한 물건으로 그냥 370mm짜리 말같지도 않은 구경의 무반동포 3개를 묶어다가 5축 10륜짜리 T-62(천마호) 차체 위에 올린 기괴한 물건이다. 김정일 선전영상에 전시된 개체 1대만 나오고 그 뒤로 전혀 등장하지 않는거보면 미사일로 스탯을 찍고나서 지들이 봐도 말도 안 된다고 느껴서 접은거로 보인다. 5. 초대형방사포 이 물건은 대구경조종방사포라고도 불리는데 북한에서도 지들끼리 명칭을 여러개 혼용해서 써서 정확한 명칭은 모른다. 암튼 북한에서 이 놈은 공식적으로 방사포(다련장로켓)라고 분류되는 놈인데 암만 짝게봐도 구경만 600mm에다가 여기에 들어가는 로켓이라는 놈이 종말속도 마하7에 풀업기동을 해서 절대로 방사포라고 부를만한 수준은 아니다. 발사관 4개 / 5개짜리 미제 HEMTT짭형 8륜트럭에 올린 모델도 있는데 궤도형이랑 동일한 물건으로 보인다. 요약하자면 북괴가 하는 짓은 스커드미사일보다 훨씬 진보되고 컴팩트한 600mm(추정)짜리 풀업비행도하는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최대 6개를 다발로 묶어놓고 다니면서 암튼 다연장로켓이라고 우기는거라고 보면 된다. 6. 주체 AN-2 북괴 특수작전용 공중침투자산 1티어인 AN-2인데 요즘 북괴는 알다시피 저걸 뛰어넘는 특수작전용 공중침투자산을 도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닥치고 AN-2를 개량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래서 보면 저 1940년대 복엽기에다가 하단에 지형추적레이더를 박고 상부에는 위성항법장치도 박아놨다. 심지어 콕핏도 디지털 LCD 계기판을 박아놔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개량을 했는데 이 정도면 광기라고 봐야할 듯 싶다. 7. 차호급 화력지원정 이 어선만한 배는 구소련제 P-6 경비정에 무장을 다 떼고 BMD-20 200mm 다연장로켓포드를 단 물건이다 이런식으로 배에 BMD-20 포드를 여러개 달아서 연안 강습상륙시 상륙포인트에 저항을 로켓으로 녹이려는 목적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통할지는 모르겠다. 요약 북괴의 주체식 무기들은 북괴의 현실적인 사정을 반영한  기괴한 설계사상의 종합선물세트이며 이 무기들은 대한민국에 대해 전문적인 트롤링을 선사하도록 태어났다. 군사갤러리 ㅇㅇ님 펌
가디언지 - "곧 세계는 알아볼 수 없을 것"
온난화 기후재앙 이야기 가디언지에 좋은 기사 있어서 가지고 와봄 영어 되면 그냥 읽고 안돼도 ㄱㅊ  밑에 요약함 - 런던대 교수 빌 맥과이어의 논설 모든 기후학자들의 주장은 아님 - 재앙을 돌이킬 수 있는 임계점은 이미 넘었다 다른 기후학자들 대부분이 '아직 멈출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일종의 유화정책(appeasement)같은 것 그러니까 공적인 자리에서 사람들 들을 때 쫄지 말라고 하는 말이고 사석에서는 훨씬 공포어린 분위기에서 말이 오간다 - 책 쓰다가 영국에서 40도 깨졌다는 이야기 들어서 다시 썼음 겨우 평균 1도 올랐는데 이지경인거 봐라 초기 기후모델 예측보다 지금은 훨씬 온도가 가파르게 오르는 중인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음? - 21년엔 cop26 회의에서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 45% 줄여야 한다고 결론지음 (cop26 = 파리협정 후에 자세한 내용 정하는 회의. 국제적인 탈메탄 서약 / 석탄 단계적 감축 합의됨) (물론 1.5도 달성 시나리오와는 거리가 멈 그러려면 석탄발전부터 완전히 멈춰야 할텐데 그럼 얼어죽을 사람 많기도 하고 중국 인도가 반대해서 무산) 하지만 배출 감축이 정말 완벽하게 이뤄지는 가장 희망적인 경우에서도 지구는 결국 2.4도~3도 오를거라고 예측됨 하지만 이대로면 2030년까지 배출량은 줄기는커녕 이대로면 14% 넘게 증가할거임 10년 뒤 1.5도 상승? 그보다 전에 1.5C 가드레일은 개박살날것 - 세계가 좆같이도 늑장부리는 이유를 맥과이어는  무식해서/타성에 젖어서/형편없는 통치력탓에/말귀를 쳐 못알아먹어서/기후변화 부정론자의 거짓말이 방해공작을 형성했고 그 짓이 인류가 1.5도 가드레일 앞으로 0.5도 안까지 몽유병 환자마냥 걸어오게 만들었다고 생각함 - 이런 상황에서 '기후 붕괴'는 피할수 없음 대신 온실세계에 적응하고 악화를 막기 위해 조치가 시급함 빌 맥과이어는 여전히 재앙은 불가피하지만 멸종은 막을수 있다고 봄 - 빌 맥과이어가 보기에 이건 전시상황 수준임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 그러니까 부디 1. 어디 갈거면 전기차/대중교통/걷기/자전거타기 2. 고기 덜 먹기 3. 비행기 타지 말기 4. 지역/국가의 대표자에게 탄원 5. 기후 비상사태에 대해 논의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하기 - 물론 그래도 우리는 좆될것이다 조금이라도 덜 좆돼보자 이거지 3줄 요약) - 학자들은 사석에선 더 암울한 이야기를 나눈다 - 우리는 이미 좆됐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보다 더 좆될 것이다 - 덜 좆되기 위해서라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마 이건 2040년쯤에 우리가 쌀밥에 백김치라도 얹어서 먹을지  아니면 풀죽과 단백질블록이라도 배급받아 먹을 수 있을지 그도 아니면 다 타죽게 될지를 결정하는 문제일 것 (출처) 원래라면 8월 말에 와야 했을 두번째 장마가 지금 이렇게 큰 단위로 덮친 것도 기후 변화의 한 부분이죠. 멸종까지 논할 정도로 큰 위기라고 합니다. 나 하나 노력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 하나가 모이다보면, 기술이 우리를 살릴 수 있을 경지까지 갔을 때 조금이라도 유의미한 버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