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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트 파이트

선물을 한다는 건 일종의 커밍아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웃하는 대상이 대중이 아니라 딱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다르고 그 여파가 ‘충격’보다는 감동적이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겉으로 봐서는 긴가민가했던 부분을 명확히 하여 내민다는 점에서 말이다.

속에 있던 마음을 보여주는 보다 구체적인 물증. 저 사람의 마음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겠을 때 쓰는 징검다리. ‘너를 좋아한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증표이자 ‘좀 더 친해지고 싶다’는 말이 쑥스러울 때 쓰는 고백. 기대에 못 미쳐도 섭섭하고 너무 과해도 부담스러운 까다로운 물건.

사실 경제학적인 논리에서 볼 때 선물을 주고받는다는 건 비효율적인 거래가 되기 십상이다. 나에게 필요한 물건과 취향은 내가 가장 잘 아는데 그걸 남이 골라준다고? 다시 비슷한 가격대로 돌려줘야 할 것 같은 부담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물이 싫지 않은 것은 일단 받는 순간만큼은 무언가를 공짜로 얻은 기분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내 돈으로 사는 물건과 남이 사주는 물건의 만족감이 다르기 때문. 내 돈으로 살 때 느끼는 만족감은 물건 자체에 집중된다. 쇼핑이란 게 끌리는 데로 취향저격할 수 있는, 내 의지 중심의 활동이라 단체생활의 눈치 보기에 찌들어 있던 쭈구리를 펴주기에 제격인 것. 윗분들 눈치 보며 너무 집중적으로 고기반찬을 소모하지 않기 위해 신경 쓰고, 치마 길이의 적정선도 암묵적인 룰 안에서 맞춰 입었던 회사를 벗어나면 내 맘대로 돌아다니면서 핑크색 미니백을 만지작거리거나 가격비교할 수 있다. 보라색을 사든 핑크를 사든 무난하게 검정으로 하든 선택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흔치 않은 시간.

그러다가도 누군가 건네는 선물을 받으면 그동안의 자체 공급만으로는 해갈하지 못한,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마음의 빈자리가 있다는 것을 타인이 건넨 물건을 통해 확인받는 느낌이다. 그건 아마도 함께 건네받은 마음의 조각이 내 마음의 비어있던 피스를 채워주었기 때문일 테고.

선물을 줄 때의 기쁨은 받을 때와는 또 다르게 설레는 일인데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활동인 쇼핑과 ‘나누는 기쁨’이 합쳐진, 이기심과 이타심이 모두 채워지는 선택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것이 이기심인지 이타심인지 점점 구별이 안 갈 정도로 선물을 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히, 빈번하게 찾아오고는 한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다 보니 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사랑의 무게를 물건들과 함께 나눠야 할 때가 찾아오는 것. 무채색 계열이 잘 어울리는 사람과 사귀면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무채색 계열의 옷을 지나칠 때마다 그가 떠오르고, 냉면을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면 냉면 맛집을 발견할 때마다 함께 먹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 현상. 좋아하는 것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듯,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걸 주고 싶은 마음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너무 퍼주면 남자가 질린다’는 충고에 동의하면서도 그가 좋아하거나 필요할 만한 것들을 역으로 추적해 채워주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기 힘든 게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으니 말이다.

결국은 사게 된 회색 티셔츠를 “잘 어울릴거 같아서”라며 건네주고, 다음 데이트 때는 지난번 그 냉면집으로 데려가 깔끔한 육수에 감동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흐뭇해하는 것. 회색 티셔츠와 냉면 등에 내 마음을 간신히 분산시켜 놓았는데 그걸 받고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사랑의 마음이 더욱 증폭되어 버리는 게 바로 선물 주는 맛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말이다. 그랬던 연인들조차 부부가 되고 연차가 쌓일수록 기념일이나 생일선물 따위를 점점 귀찮아하게 된다. 이미 생활비만으로도 빠듯한데 굳이 지출을 하기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포장된 선물이 상징하는, 두근거리는 깜짝 이벤트가 어색해진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이미 너무 자주 주고받는 것이라 선물이란 단어에 무감해져 버린 탓인지도 모른다.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부부들은 선물에 딱히 인색하지 않다.

딱히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레시피를 익히며 밥을 차리는 것도, 퇴사 욕구를 참고 자존심 구기며 퇴근 시간까지 견디는 것도, 배우자의 부모에게 최소한의 도리를 하기 위해 신경을 쓰는 것도 상대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이라고 한다면 많은 부부가 서로에게 선물을 건네는 일에 무심해지는 건 이미 너무 자주 있는 일이라 질려버렸기 때문인지도.

문제는 너무 자주 주고받는 선물은 그 진정성이 퇴색되어 묻혀 버린다는 것. 정성스레 포장하지 못했을 뿐 분명 부부는 서로에게 많은 선물을 해왔는데 선물이 일상이 되다 보니 이것이 점차 거래인지, 의무인지, 권리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끊임없이 선물을 하겠다고 언약을 맺는 것이 결혼이라면 부부 관계의 특이점과 어려운 점은 바로 ‘선물’이라는 이름하에 주고받는 일들이 점차 불균형을 이루기 때문이 아닐까.

부부가 서로에게 주는 선물의 양을 재는 저울이 있다면 무게를 재는 눈금이 남편과 아내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게 많은 부부싸움의 원인일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 눈금은 남편이 볼 때는 남편의 무게가 더 많은 것으로, 아내가 볼 때는 아내가 더 많은 킬로그램으로 표시된다. 그러니 내가 준만큼 받지 못한, 부족한 킬로그램 수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할 수밖에.

받은 사람은 잊어버려도 준 사람은 잊지 못하는 것이 양보와 배려라면 준 사람은 기억 못 하여도 받은 사람은 잊지 못하는 건 상처가 아닐까. 잊어야 할 일은 잊지 못하고 기억해야 할 일은 잊어버리는 것. 번지수를 잘못짚은 망각은 기프트조차 파이트로 변질시켜 놓고는 한다. 이상하다. 내 기억에는 분명 그에게 마음이 담긴 선물을 건넸는데 나는 받은 기억이 없으니. 기억상실증이란 막장드라마보다 부부 사이에 더 자주 일어나는 증상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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