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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들이 대부라 불렀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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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우리는 나라를위해 목숨을 바친분들을 잊어버리고, 나를 팔아먹은 놈들이 잘사는 그런민족이 되었는지, 선조들에게 차마 고개를 들수없습니다. 이런 어른을 보고 큰 우리 후손들이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때, 제 한목숨 바치겠습니까.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런 인물들은 왜 우리 역사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배울수 없는건가요?
오늘도 뜻깊은인물을 알게되니 꼭기억해야될 인물이네요!
친일파 재산 환수 새누리당에서 적극 반대했죠..
지금 이라도 반성하고 바뀌는 계기가 된 것이 기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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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제작해주지 않았던 영화
영화 클래식 아무도 제작해주지 않아 4년동안 제작이 되지 않았던 영화 하지만 그리고 개봉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의 인생영화로 꼽히며 '클래식'한 영화가 되어버림 강 건너에 귀신이 나온다는 집 알아요? 예? 거기 데려다 줄 수 있어요? ..예 노 저을 줄 알아요? 예. 그럼 내일 열 두시에 쪽배가 있는 곳에서 만나요 정말 신기한 우연이네요 필연 아닐까요? 저 많이 무겁죠 아니요 하나도 안 무거워요 저 몸무게 많이 나가요. 밥도 많이 먹구 걱정마세요 주희씨 업고 서울까지도 갈 수 있어요 공갈 안공갈 공갈! 안공갈 와 반딧불이네 잡았어요. 손 줘보세요 고마워요 축하해요. 다리는 다 나았어요? 네 감기도? 네 걱정 많이 했어요..그리고 비창, 너무 잘 들었어요 (입모양) 보고싶었어요 (입모양) 나도요 얼굴은 왜 가려~ 아이 몰라..세수도 안했단 말이야 그래도 이뻐 보고싶어. 나 준하가 보고싶어서 병이 날 것 같아 그리고 우리들의 그 강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 귀신이 나온다는 집하고 원두막...강가의 쪽배에게 내 안부 좀 전해줘 잘 있느냐고 나도 잘 있다고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희미한 달빛이 샘물 위에 떠있으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기다리고 있어 응 하나도 안 변했어 지금도 옛날처럼 예뻐 피아노 치는 소녀네. 저거 우리집에도 있는데 저걸 보면 주희가 피아노 칠 때 생각이 나 그 때 주희 모습하고 너무 닮았어 그치? 나 지금 어때보여? ------------------------ 영화 클래식 특히 피아노 치는 도시소녀와 시를 사랑하는 문학소년 이야기 조승우-손예진이 많은 사랑을 받음 김광석-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자전거 탄 풍경-너에게 난, 나에게 넌, 한성민-사랑할수록 등 클래식 OST들도 다 명곡 손예진은 지금까지도 주변에서 인생작으로 클래식이라 듣는다고 함 13년 후 둘이 정통 멜로 또 해줬으면.... 관심좀 주세요.. 귀찮으실까봐 댓글 달아달라고 못하는데 클립과 하트 정말 좋아해요...♥
콘돔을 매일같이 씻어야만 했던 소녀들
엄마, 아빠에게 투정부리고 재롱부릴 꽃다운 나이에 낮에는 자신을 범한 짐승이 사용한 콘돔을 안팎으로 깨끗이 씻고 밤에는 씻긴 콘돔을 다시 사용하는 낯선 짐승들에게 범해지는 소녀들이 있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은 소녀들에게 공부를 시켜주고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이유로 어디론가 데려갔다. 이 새빨간 거짓말에 설득되지 않은 소녀들은 협박, 폭력, 납치, 유괴를 하여 타지로 끌고갔다. 사람이 아닌, '황군을 위한 암캐'가 될 소녀들은 회전목마를 탄 아이처럼 자꾸만,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본 소녀들은 최소 5만명, 최대 20만 명으로 추산되며 소녀들은 기차가 이끄는 대로 향했다. 소녀들의 도착지는 전범국이 중국과 동남아 등 각 주둔지마다 설치한 위안소, 그곳에서 소녀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인간이기를 포기한 전범국의 짐승들이었다. 소녀들이 도착한 곳에서 해야 했던 것은 공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들에게 소녀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짐승 취급을 받는 것이었다. 짐승들에게 소녀들은 전범국 천황의 '하사품'이었고, 합법적 강간의 대상이었다. 소녀들이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언젠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메마른 희망이 산산조각 나기 전에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 비참하다는 표현도 사치스러운, 지옥같은 생활의 연속. 매일같이 낮에는 콘돔을 씻어 소독해 말리고, 밤에는 짐승들을 보았지만 소녀들은 구렁텅이 속에서 희망을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짐승들은 자유롭게 소녀들의 자유를 가져갔고, 소녀들의 성을 짐승처럼 유린했고, 매우 손쉽게 희망을 짓밟았다. 방에선 짐승들이 매일 벨트를 땅에 떨구며 요란한 쇳소리가 울렸고, 혼자 남은 소녀들은 매일 고개를 떨구며 숨죽여 울었다. 뿐만 아니라, 짐승들은 성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소녀들의 몸에 수은 등 각종 제제들을 투여하여 생식의 기능을 잃게 하면서까지 투약 효과를 지켜봤고, 의학과 전범국의 발전을 위해 목숨과 맞바꾸는 생체실험 대상으로 소녀들을 죄책감 없이 '사용'했다. 전범국의 실험체가 된 꽃들은 짐승들의 이빨에 희망의 끈이, 목숨의 끈이 잔인하고도 쉽게 뜯겼다. 전범국의 위안부 존속을 위해 일본 정부 못지 않게 일본 기업의 역할과 도움이 컸다. 그리고 그 기업의 중심에는 무한정으로 콘돔을 납품했던 오카모토 주식회사가 있었다. 1개월에 수만개의 콘돔이 필요했던 전범국을 위해 오카모토 주식회사는 공장을 24시간 가동하며 '돌격일번'이라는 콘돔을 무제한으로 찍어냈다. 목적과 사용처를 모두 알면서도 끊임없이 생산해냈고, 회사는 양심과 콘돔을 충성스럽게 전범국에게 오롯이 팔아 80여년 이 지난 현재 업계 1,2위를 다투는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콘돔을 찍어낸 숫자의 수만 배가 소녀의 몸에,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낙인 찍혔다. 광복 후에 그토록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살아돌아온 상처투성이 소녀들은 '몸을 굴린 창녀'로 취급받았고,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습지로 들어가 입을 닫고 고개 숙여 살았다. 전범국은 60년이 넘도록 증거가 없으니 잘못이 없다고 시종일관 주장해 고개 숙인 꽃들의 소리 없는 절규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1991년 광복전 하루 전날인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있는 증언으로 절규의 침묵은 깨졌고, 이후 피해 소녀 238명이 고개를 들어 꽃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소녀들은 용기를 내 1992년 1월부터 일본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시작, 처음에는 부끄러운 역사를 왜 들춰내냐며 현장에서 봉변도 당했지만 점차 많은 사람들이 꽃들의 해가, 비가, 땅이 되어주었다. 아직도 몸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낙인과, 더 잔인하게 남아있을 마음 속의 낙인을 금전적 보상이 아닌 진심 어린 '사죄'로 보상받고 싶던 소녀들. 꽃다운 소녀들의 어여쁜 청춘과 처참했던 평생. 여전히 지옥같을 내일은 전범국의 진정한 사과, 소녀들의 동의 없이 얼마전 고작 "10억 엔"의 보상에 팔렸다. 돈이 아닌 '사과'를 받고 '명예회복'을 위해 시작한 소녀들의 수요집회. 24년이 지난 4월 20일, 여전히 '사과'와 '명예회복'을 위해 1227번째 집회가 열렸고 무궁화는 활짝 피었지만, 아직도 피지 못한 꽃을 두손에 꼭 쥐고 이번 주 집회가 마지막이길 바라는 소녀들은 이제 44명 남았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후쿠시마 등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오카모토 주식회사 콘돔의 판매량이 시장의 1,2위를 차지하는 한국은 여전히 그 회사의 VIP이다. 출처 : 피키캐스트 https://r.pikicast.com/s?fr=iSKW&t=PtxI5ya&m=lk&c=as&v=shr&cid=rMF&i8n=kr
대통령에게 유행어를 시킨 '전설의 이등병'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당직자, 국방위원들과 추석을 맞아 9월 6일 경기도 파주의 육군 포병 부대를 방문해 장병들과 함께 내무반에서 취침하고 야간 근무까지 체험한다고 합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새누리당 대변인은 “명절에도 고향에 못 가는 전방 장병들의 노고를 위로하려는 자리인 만큼 잠시 잠깐 방문해 기념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방식의 형식적인 행사는 지양하려는 것”이라며 “집권여당으로서 겉치레가 아닌 ‘현장 중심’의 민생 행보를 보이려는 의지가 반영됐다”고 밝혔습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와 일행의 군부대 방문은 온라인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높은 사람들이 오면 장병들이 고생하는데 굳이 가느냐’는 주장부터 ‘노무현, 문재인은 되고, 이정현은 안된다는 이유가 뭐냐’는 반박도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군부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군부대 방문 비화를 통해 정치인들의 군대 방문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현역미필 많아 난감했던 ‘TV내무반 신고합니다’에 출연한 노무현’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노무현 대통령은 군부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 ‘TV내무반 신고합니다’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TV내무반 신고합니다’는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이 출신 부대를 방문해 현역 장병과 만나 군 시절을 회상하며 옛 전우를 만나는 프로그램입니다. 당시 제작진들은 모두 병장 출신으로 구성됐는데, 불과 10회 만에 출연진 섭외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국회의원을 섭외하려고 전화를 해보면 상당수가 미필자거나 방위병 출신이라 출연할만한 정치인들이 극히 한정됐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의원은 1968년 전방 을지부대에 복무하다 1971년 상병 만기 제대를 해 출연이 가능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상병 만기 제대를 한 이유는 당시에 존재했던 계급별 정원 때문) 1999년 3월 방송된 ‘TV내무반 신고합니다’ 을지부대 편에는 노무현 의원과 함께 갔던 예비역 아버지가 철책에 근무하는 아들을 만나는 장면이 방송됐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아버지들이 이 장면을 보고 가족들 몰래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이등병의 패기에도 웃으며 선뜻 응했던 노무현’ 노무현 대통령의 군부대 방문 모습 중 아직도 화제가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군부대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등병이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유행어를 해달라는 장면입니다. 노 대통령은 ‘근데 요새 이병도 용감하네요’라며 ‘괜찮습니다. 괜찮고요’라는 말로 받아 주기도 했습니다. 노 대통령 뒤에 있는 부대장은 웃고 있었지만, 내무반 선임들은 뜨끔했을 것입니다. 군 계급에서 가장 낮은 이등병이 군 통수권자에게 감히 유행어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사실 노무현 정권에는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유행어를 가지고 정치 풍자를 했던 시절이었고, 누구나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고 말해도 잡혀갈 염려도, 고소, 고발 당한 일도 없었습니다. ‘경호원을 깜짝 놀라게 했던 장병의 갑작스러운 포옹’ 2004년 12월 프랑스 공식 방문 일정을 마친 노무현 대통령은 비밀리에 이라크에 있는 자이툰 사단을 방문합니다. 장병들을 만나 이동하던 중 갑자기 한 병사가 뛰어나와 “대통령님 한번 안아보고 싶습니다.”라며 노 대통령을 안고 한 바퀴 돌기도 했습니다. 사진을 보면 경호원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무리 자국의 군인이지만 갑자기 대통령에게 돌진했기 때문입니다. 제대 후 김준석 상병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을 안기 위해 뛰어나갔을 때) 그 순간 검은 복장의 경호 요원들이 나를 제지했고, 이어 ‘큰일났다. 이거 내가 잘못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지휘관들로부터 “대통령님이 다치면 어떻게 할 뻔 했나”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뒤탈은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자이툰 병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흘린 노무현’ 갑작스러운 병사의 포옹에도 노무현 대통령은 ‘다칠라’고 하면서도 활짝 웃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자이툰 부대 병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3년 이라크전쟁 파견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의료지원단인 ‘제마부대’와 건설지원단인 ‘서희부대’를 파병했지만, 미국은 더 많은 전력의 파병을 요구했습니다. 북핵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빚던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8천 명 규모의 사단 병력을 이라크에 파병합니다. 당시 이라크에 파견된 자이툰 사단의 파병은 비공개로 진행됐고, 국민의 지지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약소국의 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국의 요청에 자국 병사를 파병시켰다는 미안함 때문인지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자이툰 부대를 방문하고 그로부터 1년 뒤, 노무현 대통령은 자이툰 부대 장병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인정받지 못한 파병으로 마음 상했던 장병들은 자신들을 잊지 않고 편지를 보낸 노무현 대통령의 배려가 신기하면서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인들이 군대에 오면 장병들은 힘듭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우리 군대 생활할 때는 높은 사람 오면 힘들었는데’라며 그 고충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군대가 좋아졌어도 ‘그래도 제대하고 싶나?’라고 묻는 대통령과 ‘네’라고 대답하는 군인들, 노 대통령은 군인들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정치인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높은 사람들이 군대를 방문하는 행사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방문이 진정으로 고생하는 군인들을 위로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틀에 박힌 격려보다 아들을 면회하고 오는 길에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오랜만에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을 보니, 군대 면회 후 어머니 몰래 건빵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며 ‘PX가서 고참 몰래 맛있는 거 사 먹어라’는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발해에서 고려로 계승된 발해 문화 정리
발해가 멸망한 이래 많은 수의 유민들이 고려로 왔던 만큼 이들이 고려 사회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발해 문화의 영향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단지 발해가 한국사라는 주장의 차원에서 고구려에서 발해로 계승된 문화만 다소 알려져 있지 발해에서 고려로 계승된 문화는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이 글에선 발해가 고려에 미친 물질문화에 대해 정리해 보았음 1. 발해계 막새기와 최근 수년 전부터 고려 시대 유적에서 발해 시기 전형적 와당 양식인 심엽형 연화문 와당들이 출토됐고 이에 따라 관련 연구 역시 진행되었는데 발굴 지역으로는 대표적으로 안양사지와 원지동 원지 등이었으며 안양사는 고려 왕실과 상당히 관계가 있는 유적이었고 원지동 원지 역시 원(院)의 특성상 고려 조정의 지속적 관리가 필요한 점을 미루어 볼 때 고려 조정과 고려로 내투한 발해인들의 관계가 상당히 깊었다고 추정됨 박순우, 고려 내투 발해인들의 처치 지역 검토 - 고려시기 유적 출토 발해계 막새기와를 중심으로 – 백산학보, 2019, vol., no.114, pp. 97-120 (24 pages) 2. 고려 청자 백주는 고려사에서 발해 세자 대광현이 고려로 내투했을 때 왕건이 직접 내린 식읍으로 발해 유민 관련 유적이 상당수 존재하는 곳임 특히 대광현을 따라온 수만명의 유민 가운데 요업(도자기) 기술자가 많았는데 그들이 여전히 고려 왕실에 소요되는 자기 생산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현 황해도 배천(백주) 원산리에서 출토되는 고려 자기가 발해의 것과 공통성(색, 형태, 무늬장식)을 지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눈여겨 볼 점이라 할 수 있음 리창진, 「고려푸른자기는 발해푸른자기의 계승발전」, 『조선고고연구』, 2001년-1호, 38쪽. 또 고려도경에서 “고려는 장인[工技]은 매우 〈솜씨가〉 정교하여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는 모두 관아[公]에 귀속된다. 복두소(幞頭所)註 ·장작감(將作監)註 이 그런 곳이다. 이들은 항상 흰 모시[白紵] 도포에 검은 두건을 쓴다. 다만 역(役)을 맡아 일을 할 때는 관에서 자주색 도포[紫袍]를 지급한다. 또한 거란(契丹)에서 항복한 포로 수만 명 중 장인이 열에 하나 꼴인데, 그 중 정교한 솜씨를 가진 사람을 뽑아 왕부(王府)에 머물게 하였다고 들었다.” 라는 구절이 존재하는데 고려 역사상 거란의 포로가 다수 잡힌 시기는 여요전쟁이고 당시 거란인들은 유목민족이였으므로 거란인 포로이면서 전문직인 장인은 매우 드물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거란이 여요전쟁을 수행할 당시,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발해인들을 다수 징집해 전쟁을 수행했던 만큼 결국 위 구절의 포로로 잡힌 장인들을 뜻하는 건 대다수가 발해인일 것으로 보이며 이 중 뛰어난 이들이 왕부에 속해 종사했으므로 고려의 기술력 상승에 전체적으로 기여했을 것임 더욱이 추가적으로 고려도경에서 서긍이 말하길 “근래에 기복(器服)은 더욱 정교해졌으나, 경박하고 겉치레[浮僞]가 너무 많아져서 예전의 순수하고 질박[純質]한 것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라는 구절 역시 발해 문화의 유입에 인한 영향일 것으로 보임 渤海遺民의 高麗流入과 役割 - 북방사논총 10호, 우리역사넷 3. 머리 뒤꽂이 홍준어장고분과 러시아 크라스키노성 유적에서 청동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발해 여성 머리 뒤꽂이는 발해 ‘ㄷ’자형(혹은 U자형) 뒤꽂이에 ‘山’자 형태의 장식이 달려 있는게 특징인데 이러한 유물이 고려시대 유적지에서도 출토된 사례가 나와 발해 문화가 고려로 전승된 것으로 보이는 한 측면이라 할 수 있음 이블리예프 알렉산드르, 「러시아 연해주의 중세시대 성곽」, 『2013 ASIA ARCHAEOLOGY』(국제학술심포지엄 발표 자료집), 2013, 75·85쪽. 임누리, 『渤海 土器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51~52쪽. 이효형, 「발해 문화의 고려 전승」, 『백산학보』67, 2003. 조선유적유물도감 편찬위원회 편, 『북한의 문화재와 문화유적-고려 편 Ⅳ』,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220쪽. 4. 기둥밑 장식기와(주초장식와) 발해의 기와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것은 기둥밑 장식기와인데 건물을 장식하는 효과와 함께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기둥과 주춧돌이 만나는 부분에 도자기를 만들어 씌운 것이 특징이고 또 기둥이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커다란 고리형태인데 몇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조립하는 방식이 겉에 연꽃을 장식한 것이 있는가 하면 푸른색의 유약을 바른 것도 있으며 이러한 형태의 기와는 발해 상경성에서 발굴된 게 대표적임 그런데 고려의 개성 만월대 궁궐유적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적이 발견된 사례가 있어 두 나라 사이에 문화전승이 이루어 졌을 것으로 보여짐 東亞考古學會 編, 『東京城-渤海國上京龍泉府址の發掘調査』(東方考古學叢刊 甲種 第5冊), 1939, 58~60쪽 및 揷圖55 綠釉柱座實測圖, 圖版 91~95. 주영헌, 『발해문화』, 사회과학출판사, 1971 ; 在日朝鮮人科學者協會歷史部會 譯, 『渤海文化』, 雄山閣, 1979, 112~113쪽. 조대일, 「발해의 공예」, 『발해사연구론문집(I)』,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2, 226쪽. 서울대학교박물관, 『해동성국 발해』, 통천문화사, 2003, 70쪽 조선유적유물도감 편찬위원회 편, 『조선유적유물도감』10(고려), 1991, 274쪽.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고려의 유물』(고고학전서48, 중세편25), 진인진, 2009, 103쪽. 5. 고누 국내에 발견된 고누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신라시대에 조성된 경북 칠곡 송림사 내의 전탑에 고누가 새겨진 벽돌인데 유물들의 시기가 고려, 조선 등으로 각기 달라 고누 벽돌 역시 도중 중건했던 시기의 것으로도 볼 수 있으므로 통일신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임 발해에서의 고누 놀이는 크라스키노성 유적에서 나온 바위에 새겨진 고누 그림과 다수의 놀이 알을 통해 알 수 있고 국내 유적의 경우 북한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초기 고누의 발견 장소는 황해도 봉천군 원산리(현재 배천군 원산리)  도자기가마터 갑자의 밑창 바깥면에 참고누판이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배천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왕건이 대광현에게 식읍을 내린 곳이니만큼 발해 고누 놀이는 결국 이곳에 내투한 발해인들에 의해 고려로 퍼진 것으로 추정됨 또한 고구려 국내성에서 자기와 석재로 만들어진 고누놀이용 말을 보았다는 견해와 도편을 연마하여 만든 말의 도면을 제시하고 있어 고누가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졌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는 측면이라 볼 수 있음 V.I.볼딘·E.I.겔만, 『2004년 러시아연해주 발해 유적 발굴 보고서』, 고구려연구재단, 2005, 178쪽. 김은국·E.I.겔만 외,『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성 2012년도 발굴조사』,동북아역사재단·러시아과학원 극동 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극동연방대학교,2013,128쪽. 김영진, 『도자기가마터 발굴보고』, 사회과학출판사, 2002 ; 백산자료원, 2003, 203~204쪽 V.I.볼딘·E.I.겔만, 『2004년 러시아연해주 발해 유적 발굴 보고서』, 고구려연구재단, 2005, 30쪽.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編著(宋玉彬 主編), 『國內城 : 2000-2003年集安國內城與民主遺址試掘報告』, 文物出版社, 2004. 발해 유민사 관련 고고학 자료의 검토 - 고구려발해연구 2015, vol.52, pp. 297-333 (37 pages) 이효형 현재 국내의 열악한 발해 연구 환경상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이 정도이지만 앞으로 더욱더 발해 연구가 진전될 것으로 기대되기에 단순히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이므로 한국사라고 주장하는 영역에서 발해에서 고려로 전파된 문화들로 인해  고려의 발해 계승국으로서의 면모로 점차 영역이 확대될 전망임 이종격투기카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