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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상조사 시작도 안했는데… 제멋대로 결론 내놓고 '입맛대로'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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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헬기사격 및 전투기대기관련 특별조사위원회’가 9월부터 3개월간 진상조사에 착수한다. ▲아직 조사를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몇몇 언론은 벌써부터 입에 맞는 결론을 미리 내놓고, 이를 기정사실처럼 보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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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 관련된 2가지 의혹에 대해, 23일 국방부에 진상조사를 지시했다. 해당 의혹은 △계엄군이 헬기를 이용해 전일빌딩에 있던 시민군을 향해 기총사격을 했는지 △공군 전투기에 광주 출격대기 명령이 내려졌는지의 2가지다.   이튿날인 24일 각 언론이 보도한 기사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아직 조사가 시작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벌써부터 특정 방향으로 결과를 단정하는 듯한 보도까지 나왔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보니… 헬기 사격 의혹에 대해서는 22년 전이던 1995년, 서울지검과 국방부검찰부(현 국방부검찰단)가 정식으로 수사한 바 있다. 수사 결과는 그해 7월 19일 발표됐다. 이중 헬기 사격 의혹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광주에서 무장 헬기의 공중사격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야기되었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었고, 조비오 신부, 이광영 승려, 아놀드 피터슨 목사 등이 헬기 기총소사를 목격하였다고 주장하였음.  △그러나 군 관계자료상으로는 5월 21일 2군사령부가 전교사에 수송용 헬기인 UH I 1H 10대, 무장헬기 AH I 1J(코브라) 4대를 지원하고, 사태 기간 중 헬기가 총 48시간동안 무력시위를 하였다는 기재 외에, 실제 공중사격 실시 여부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재를 발견할 수 없었음.  △이광영은 5월 21일 오후 2시경 헬기 사격으로 15, 16세의 여학생이 피격, 적십자병원으로 후송하였다고 진술하였으나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헬기 사격 피해자가 내원하였음을 확인할 수 없었음.  △조비오 신부가 5월 27일 헬기 사격의 피해자라고 지목한 홍난은 검찰 조사에서 부근 건물 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소총사격에 의하여 다쳤다고 진술하였음.  △아놀드 피터슨 목사는 헬기가 선회하고 상공에서 총소리가 들려 헬기에서 기총사격을 한 것으로 믿고 있으나 헬기사격 자체를 목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동인이 사격장면을 촬영한 것으로 검찰에 제출한 사진상의 헬기 하단불빛은 기관총 사격시 발생되는 섬광이 아니라 헬기에 부착된 충돌방지등 불빛임이 확인되었음.  △그 당시 각 병원에서 헬기 총격에 의한 피해자가 내원하였거나 입원, 치료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고,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 165명에 대한 광주지방검찰청 사체 검시기록에서도 특별히 헬기 기총사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음.  △AH I 1J 헬기의 장착 무기인 토미사일, 20mm 벌컨포(분당 750발 발사)나 500MD 헬기의 장착 무기인 2.75인치 로켓, 7.62mm 6열 기관총(분당 2000~4000발 발사)에 의한 표적 사격의 경우 나타나는 대규모의 인명 피해와 뚜렷한 피탄 흔적, 파편 등이 확인되지 않았고, 헬기장착 무기에 의한 사격으로 인명 피해를 야기한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음.  이를 요약하면 ①무장헬기 4대가 광주 상공에서 48시간 동안 무력시위를 했다. ②그러나 헬기 사격의 피해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③헬기 사격을 직접 목격한 사람도 없다. ④헬기 사격에 의한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⑤헬기 사격에서 나타나는 대규모 인명피해나 뚜렷한 피탄 흔적, 파편 등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헬기 사격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건물 고층에서 탄흔으로 보이는 흔적 나와
그런데 올해 뜻밖의 흔적이 나타났다.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 고층(10층)에서, 탄흔으로 보이는 185개의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이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조사해, 올해 1월 광주시에 분석 결과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국과수는 “헬기가 호버링(hovering, 정지) 상태에서 고도만 상하로 변화하면서 사격한 상황이 유력하게 추정된다”고 밝혔다. 1995년 7월 19일, 서울지검과 국방부검찰부(현 국방부검찰단)이 발표한 수사 결과와 다른 것이다.
국과수 "헬기가 호버링하면서 사격한 것으로 추정"
문 대통령이 진상조사를 지시한 이유는 ▲광주 전일빌딩에서 탄흔으로 보이는 의문의 흔적이 발견된 것과 ▲국가수가 이를 조사한 결과, 헬기 사격 가능성이 제기됐다는 것의 2가지 때문이다.
사실이 무엇인지는 진상조사가 끝난 이후에야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상태에서 언론이 할 일은 ▲조사가 정확하고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과 ▲결과가 나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의 2가지뿐이다. 
지금 상황에서 섣부르게 결론을 예단하려 한다든지, 특정한 방향으로 결론을 유도하는 보도는 모두 공정한 보도가 아닌, 선전-선동이다. 그런데 일부 매체는 이같이 선동적인 보도 태도를 취했다. 한겨레 신문은 항간의 의혹이 사실인 것처럼 기정사실화 했고, 조선일보는 의혹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한겨레 “무차별 학살하려 했던 정황 드러났다”
한겨레는 수원 제10전투비행단 101대대 소속이었던 한 전투기 조종사가 "1980년 5월 21~22일 비행단 전체에 광주 출격 대기명령이 내려졌다"고 JTBC에 말한 내용을 먼저 인용한 뒤, 이를 “당시 신군부가 광주 시민들을 적군으로 간주해 무차별 학살하려고 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조선일보 “증언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
반면 조선일보는 1995년 조사결과를 소개하면서 "목격자들의 증언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22년 전의 조사결과로, 아직 새로운 진상조사는 시작되지도 않았다.
이 신문은 ‘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정확한 것은 조사해 봐야 밝혀지겠지만 전투기 출격 대기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5월 17일)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이를 광주 폭격 시도와 연결 짓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도했다. 
경향 “계엄군이 헬기 사격… 이미 확인됐다”
경향신문은 국과수의 전일빌딩 탄흔 조사 결과를 전달한 뒤 “5.18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헬기에서 사격을 했다는 것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공식 보고서를 통해 이미 확인됐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이 역시 과장된 보도다. 국과수가 “헬기 사격이 유력하다고 추정된다”고 밝힌 것이 곧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헬기에서 사격을 했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향신문 기사처럼 이로써 사실관계가 확인됐다면, 문 대통령이 다시 "진상조사를 하라"며 특별지시를 내릴 이유가 없다. 
동아, 중앙일보는 상대적으로 객관적 
반면 동아일보중앙일보는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동아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일빌딩의 시민군을 향해 계엄군이 헬기 기총사격을 했다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됐다”면서 해당 주장들을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대통령의 지시사항 △국과수의 감식결과 △JTBC의 보도 △‘5.18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발의한 최경환 국민의당 의원의 발언 △국방부의 입장 △5.18기념재단 김양래 상임이사의 말 등을 건조하게 나열해 기사화했다.  
9월부터 3개월 동안 조사 
국방부는 25일 “국방부가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두 의혹에 대해 조사를 할 예정”이라며 “9월초부터 3개월 전후로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특조위 이름은 ‘5.18 민주화운동 헬기사격 및 전투기대기관련 특별조사위원회’로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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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모든걸 파헤쳐야 합니다. 빨갱이로 몰아간 억울한 시민들의 한을 풀어줘야죠. 폭동이 아니라 민주화에 앞서나간 영웅들입니다.
중립의 의지가 없는 편파 언론때문에 국민들은 정확히 알 권리를 상실하였습니다. 더불어 판단능력도 많이 상실하였죠. 현재의 민주화는 그동안 빨갱이다 간첩이다 몰아간, 그렇게 당했던 희생덕분이란걸 알아가는 중입니다. 언론의 중립을 요청합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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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차대전 시기만 다룸, 미해군 수병들은 평균적으로 4,000칼로리를 하루에 소비하는데 이런 폭발적인 열랑의 소모를 메꾸기 위해서 미해군은 새로운 직별을 1900년대에 창설함, 조리병에서 시작해서 제빵사, 요리사, 도축업자, 그리고 조리최선임 담당관이였음, 최선임 담당관은 함선의 식량 수량을 확인하고 조리병들한테 재료를 배분하고, 또한 주방에선 주방장을 도와 식단을 짜기도 함, 대부분의 배는 조리장, 빵집, 그리고 정육소가 있었음, 대부분의 장구류는 수백명의 수병들의 수요를 맞춰서 거대했음, (BB-35 텍사스의 조리실) 조리실은 오븐과 구이용 팬, 그리고 사람만한 찜통이 있었음(위 사진에서 보이는 흰색의 통들), 제빵사는 사람만한 혼합기와 도축업자는 소고기를 한번에 썰수 있는 톱을 배당받았음, (BB-55 노스캐롤라이나의 제빵소) 요리책은 수준급의 식사와 효율성을 위한 조리법으로 구성되었음, 조리법은 기본이 100인분이였음, 조리법에는 가끔가다 비엔나 소시지와 고구마같은 괴식이 나오기도 했지만 영양학적으론 필요한 식단이였음, (BB-55 노스캐롤라이나의 감자 깎기실) 감자 깎기는 매체에서 흔한 처벌 수단으로 나타나지만 의외로 효율성이 영 좋지 않아서 나중에는 기계식 감자 깎기 기계를 도입했음(사진 왼쪽의 흰색 기구) 전투배치 상황에서도 조리병들은 수병들을 위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준비하며 일했음, 2차대전 미해군의 식단 예시는 다음과 같았음, 봄, 금요일의 식단으로는 아침 반으로 자른 자몽, 밀로 만들어진 시리얼, 구운 콘밀 무쉬, 메이플 시럽, 바삭한 베이컨, 버터, 토스트, 우유, 커피 점심 토마토 주스, 연어 구이,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자요리, 버터랑 같이 볶은 당근, 견과류와 포도를 넣고 섞은 샐러드, 스펀지 케이크, 빵, 버터, 커피 저녁 양배추와 함께 구운 소고기, 웨지감자 비슷한 구운 감자, 양상추 심지 샐러드와 1000드레싱, 반으로 자른 배, 코코넛 버터 쿠키, 빵, 버터, 코코아 이외에도 아침, 점심, 저녁의 구성은 다음을 따라야 했음, 아침 과일:신선한, 동결된, 가루형, 건조, 혹은 통조림 과일은 에피타이저와 영양학적 이유로 포함되지만 굳이 아침에 제공될 필요는 없고 식단에 따라 조정될수 있음, 시리얼:시리얼은 힘의 근원이며 또한 우유와 함께 먹을수 있다는 장점이 있음, 상황에 따라 뜨거운 혹은 차가운 우유와 배식됨, 주식:주식은 햄이나, 베이컨, 계란, 소시지, 크림 건조된 소고기, 구운 무쉬, 프렌치 토스트, 핫케이크, 아니면 다른 음식이 올라갈수 있음, 프렌치 토스트나 구운 무쉬가 올라간다면 잼이나 시럽, 젤리도 같이 배식되었음, 빵:빵은 토스트나 롤케이크, 옥수수빵, 비스킷, 혹은 커피 케이크 형태로 배식됨, 도넛이나 팬에 구운 빵도 배식될수 있음, 잼과 젤리:잼과 젤리는 버터를 대체하여 배식될수 있음, 음료류:음료는 커피나 차, 코코아, 우유가 배식되었음, 점심 수프:수프는 아침이나 저녁식사라도 배식받을수 있음, 만약에 야채수프가 배식된다면 샐러드도 같이 배식되었음, 수프는 수병들의 주된 야채 섭취원중 하나임, 고기:고기는 언제나 가장 선호되는 음식임, 해군에서 구매되는 고기는 최상급이지만 부주의한 요리 방식으로 많은 양이 낭비될수 있음, 과조리를 삼가하며 배식됨, 그래이비:그래이비 소스는 고기와 함께 배식됨, 좋은 그레이비는 부드럽고 간이 잘되있으며 느끼하지 않음, 뜨겁게 배식할것, 채소:감자를 제외한 초록색 혹은 노랑색의 채소는 맛과 비타민적인 요소로 필요함, 절임:절임은 샐러드를 대체하여 나올수 있음, 주로 당근 절임과 양파, 무, 순무, 양배추 절임이 배식됨, 피클이나 비트도 배식될수 있음, 샐러드:고기나 초록색 채소, 과일로 만들어진 샐러드는 차갑고 아삭한 상태로 배식됨, 디저트:디저트는 행복감을 위해 필요함, 대부분은 단 디저트를 선호함, 무거운 식사에는 가벼운 디저트가 배식됨, 음료류:커피나, 차, 코코아, 우유, 그리고 과일음료가 배식됨, 저녁 주식:고기는 보급품 현황에 따라 쓰일수도 안쓰일수도 있음, 저녁은 대부분 점심보다 가벼웠음, 하지만 수병들의 일과에 따라 변동됨, 고기와 쌀, 마카로니와 치즈, 찹 수이, 크림 소고기, 걸쭉한 차우더, 베이크드 빈즈, 그리고 비슷한 요리들이 배식됨, 또한 점심으로부터 남은 재료들이 재활용됨, 샐러드:채소와 과일로 만든 샐러드, 혹은 주방장이 만든 샐러드는 주식과 함께 배식되며 영양학적으로 중요함, 디저트:디저트는 저녁의 양과 칼로리 수준에 따라 변동됨, 음료류:커피나, 차, 코코아, 우유, 그리고 과일음료가 배식됨, 날씨에 따라 냉차나 차가운 과일음료가 배식되었음, 이런 식단들은 함의 보급품 현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뀌었음, 미해군 수병이 배식이 권장된 음식의 수량은 다음과 같은 우유:470ml 계란:1알 육식류:1번 이상의 배식 콩류(땅콩버터 포함):주마다 1~2번 버터:20~50g 시리얼과 빵:2번 이상의 배식 과일:2번 이상의 배식, 귤류는 자주 배식할것, 채소:감자를 제외해서 2번 이상의 배식, 초록색 혹은 노랑색 채소는 날마다 샐러드 형태로 배식 (이오지마로 항해하는 배 안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수병들) (미해군 바지선 Quartz에서 아이스크림 배식을 받는 수병들) (해군 항공대 소속 조종사인 조세프 클린턴 클리프턴 대령이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퍼먹는 모습) 아이스크림은 미해군의 거의 모든 함정, 심지어 잠수함에도 제조기가 달렸을정도록 아이스크림 보급에 열정적이였음, 육군만해도 3척의 아이스크림(그리고 냉동식품)보관용 바지선을 건조해서 운영했을 정도로 미군 전체가 아이스크림에 열광함, 미해군은 구축함 선원들한테 추락한 조종사 1명마다 일정량의 아이스크림 보급을 약속함, USS Hancock의 선원이던 Daniel W. Klohs가 2005년 사망하기전 쓴 회고록에 따르면, 조종사 1명당 25갤런의 아이스크림과 함장과 부장한테는 2병의 위스키를 보급하는게 맞지만 아이스크림은 10갤런씩 포장되어 왔기 때문에 총 30갤런을 보급받음, 또다른 선원인 Tom Kocurko의 회고에 따르면 조종사 1명당 10갤런의 아이스크림을 배급받았기 때문에 그 당시 농담으로 하나 격추시키진 말이 나왔다고함, 다만 조종사들은 자신이 고작 아이스크림에 비교당하는게 좀 아나꼬왔음, 미해군 조종사인 중령 Norman P. Stark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해군 구축함인 USS Yarnall에 구조당했을땐 수병들이 잃어버린 형제라도 찾은듯 반겨줬다고함, 그 당시엔 몰랐지만 조종사 1명당 10갤런 아이스크림의 가치가 있다는걸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고 함, 항모로 복귀하고 USS Yarnall의 수병들이 떠나면서 던진 말에 비로소 자기가 10갤런의 아이스크림의 가치를 가진걸 알고 불쾌한 표정을 지음, 또다른 유명한 이야기로 1942년 렉싱턴이 침몰하던중 수병들은 조리실 냉장고로 뛰어가 빠루를 가지고 냉장고를 따기 시작함, 그렇게 따인 냉장고에선 수병들이 주변에 잡히던 모든것을 동원해서 아이스크림을 주워 담음, 심지어 땀범벅인 헬멧에다가 담아서 깨끗이 핣아먹은 수병도 있었다고 전해짐, 미해군 공식 페북 계정 피셜론 미해군 수병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스크림 보급선에서 2명의 장교가 끼어들자 뒤에서 뒷통수에 쌍욕을 갈김, 쌍욕을 갈긴건 다름아닌 해군 대장 윌리엄 할시였음, 2명의 장교의 행방은 지금까지 전해지진 소식이 없음, USS Quartz는 미해군이 바지선을 개조해서 아이스크림 보급함으로 만든 예시임, 2000갤런(7,570리터)의 아이스크림을 수용하고 7분마다 10갤런(37리터)의 아이스크림을 생산했음 (2차대전때 현역이던 USS Quartz와 현재 브리티쉬 컬럼비아에 방치된 USS Quartz) 1945년 추수감사절 당시에 미해군이 소모한 음식의 수량은 약 7,400명이 600마리의 6.8kg짜리 칠면조를 먹어치우고 또한 같이 먹어치운 음식의 수량은 다음과 같음, 1,300kg의 컬리플라워, 680kg의 방울다다기양배추, 907kg의 감자, 90kg의 크랜베리, 450kg의 견과류, 1,580kg의 사탕류, 1,136kg의 아이스크림, 378kg의 홀스레디시 소스, 1,000개의 호박파이, 12,000개의 롤케이크, 378kg의 피클, 그리고 전원한테 공짜 담배 1갑이 배급됨. 군사갤러리 ravdozka님 펌
19세기 프랑스의 시체 관람
1886년 8월, 프랑스 파리 한적한 외곽에서 호화로운 드레스를 입은 소녀의 시체가 발견됐다. 프랑스 신문사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호기심 가득한 파리 시민들은 소녀의 시체를 보기 위해 시체 안치소로 몰려 들었다. 무려 15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일시에 시체 안치소로 몰려들면서 인근 교통이 전부 마비되었다. 자신이 먼저 보려고 주위 사람들을 밀치는 바람에 이곳에서 저곳에서 드잡이질이 벌어졌고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옷이 찢어지거나 기절하는 사람하는 사람까지 속출했다. 소녀 시체에 대한 관심은 이상할 정도로 고조된 편이지만, 사실 19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시체 안치소에서 시체 관람을 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유리 벽으로 만들어진 시체 관람소는 파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 명소였다. 시체 안치소 내부가 훤히 보이는 유리창으로 도배한 용도는, 신원 불명 시체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시체를 확인할 수 있게 돕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 그런 식으로 시체를 찾아가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었다. 관광 명소가 될 정도로 사람들이 왕창 몰려 들었지만, 그들의 목적은 대부분 한가지, 죽은 자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다.  죽은 자의 사인이 극적이거나 수수께끼일수록 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언론사들은 시체가 발견될 때마다 대서특필하며 온갖 추측성 기사를 쏟아냈다. 실제로 위에 언급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고 이틀 뒤 세느강 가에서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 시체가 발견되자 어떤 프랑스 일간지는 두 소녀를 엮어서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자매'라는 소설을 기사로 내보기도 했다. 이 기사가 나가고 소녀들의 시체를 보려는 구경꾼은 한층 더 늘었다. 1885년, 미국인 기자가 묘사한 파리 시체 안치소의 정경을 쓰자면,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치켜세운 신사들은 시체를 구경하며 히히덕거렸다. 노인들은 장터에서 물건을 흥정하듯 큰소리로 시체의 사연을 떠들었다. 창백한 안색의 귀부인이 동정어린 어투로 죽은 자의 명복을 빌었으나 시체 구경을 그만두지 않았다. 아이들은 시체가 옮겨질 때마다 양팔을 휘두르며 환성을 내질렀다. 오로지 시체 구경을 하기 위해 방문하는 방문객 숫자가 늘어나자, 파리 시청은 시체 안치소의 관람 구역을 확장했다. 노점상들은 돈을 벌기 위해 시체 안치소 주위에 몰려들었다. 시체 안치소는 일주일 내내 아침 9시부터 새벽까지 개장했으며, 시체를 보기 위한 관광객은 더욱더 늘어났다. 어떤 시기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방문하는 관광객보다 시체 안치소를 구경하려는 사람 숫자가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시체 안치소가 관광객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면서 시체의 유류품 역시 관광 상품이 되었다. 이에 따라 시체 안치소는 마치 백화점 쇼윈도 같은 형태로 재개장되었다. 초기에는 시체의 부패를 늦추기 위해 천장에 달린 수도 꼭지에서 차가운 물을 시체 위에 방울져 떨어지게 하는 방식을 취했으나, 1882년, 본격적인 냉장 시스템의 도입으로 시체 안치소의 시체들은 좀 더 오랫동안 구경거리가 되었다. 파리 경찰은 시체 관람을 범죄 수사에 활용하기도 했다. 1888년, 살인 용의자를 시체 안치소에 데려가서 희생자와 대면시키는 행위를 공식 절차에 추가 시켰다. 제 아무리 완고하게 무죄를 주장하던 용의자도 밝은 빛 아래에서 희생자의 유해를 마주하고 나면 금방 죄를 자백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의 시체 관람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점차 인기가 사그라들다 1940년대를 전후해서 완전히 금지되었다. 출처:한류열풍 사랑
최초로 미국을 방문한 일본인 존 만지로 이야기
1827년, 만지로는 일본 도사시미즈 시에서 (당시 도사 번 카카하마무라) 가난한 농민 집안의 둘째로 태어난다 만지로의 형이자 장남인 토키초는 병약해 별 보탬이 되지못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된다 돈이 없어 데라코야(서당)에도 다니지 못하고 9살 때 아버지가 죽어 10살 때부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어업을 하러 바다에 나가게 된다 14살이던 정월 5일 새벽, 고등어와 전갱이를 잡으러 다른 형제들과 같이 7.5미터의 배를 타고 나왔다가 폭풍우를 만나 10일 간 망망대해에 표류하게 된다 배에 실려있던 건 쌀 두 말과 약간의 물과 장작 뿐. 급작스런 북서풍을 만나 흘러서 도착하게 된 곳은 일본에서 남쪽으로 760km 떨어진 둘레 8km의 작은 무인도 도리시마 섬 만지로와 동료들은 해초와 물고기, 알바트로스, 오줌물을 먹으며 이 섬에서 143일을 연명했다 그러다 1841년 6월 27일, 만지로 일행은 동남쪽 근방을 지나던 미국의 포경선 존 하울랜드(John Howland) 호에 의해 구출된다 "다섯 명의 초라한 피곤한 인간을 발견. 데려오지만 그들이 배고프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 항해 일지 만지로 일행은 처음 보는 범선에서 흑인 선원도 처음 보고 각종 항해 도구, 세계 지도, 서양 가구도 처음 보고 놀라게 된다 만지로는 구조되었지만 엄한 쇄국 체제인 일본으로 돌아가면 중죄 처벌을 받을 것이었기에 존 하울랜드호의 다음 기항지인 하와이로 따라가게 된다 /당시 일본은 귀찮게 굴던 포경선 때문에 1825년 발효된 이국선 타격령(異国船打払令)때문에 접근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배의 선장 윌리엄 윗필드와 선원들은 낯선 동양인 무리에 우호적이어서 소년 만지로는 갑판 청소, 가축 돌보기 등을 하고 고래잡이 일도 배우며 영어도 조금씩 배운다 반년 만에 하와이 호눌룰루 항에 도착해 만지로의 동료들은 하와이의 선교사에게 맡겨졌는데 지식욕이 높은 만지로는 세계지도의 작은 일본을 보고 놀란 후 포경선의 선원이 되고싶다고해 모험을 계속하게 된다 선장 왓필드는 배의 이름을 따 그에게 John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그때부터 만지로는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일본어도 못 쓰던 그가 일본어-영어 학습자가 전무하던 시절 글을 익히는 것은 최초인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만지로의 머리가 좋은 걸 눈치 챈 선장은 미국에 가서 교육을 받는게 어떠냐 권유했고 만지로는 꼭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존 하울랜드호는 괌 섬, 대만 근해에서 포경을 마치고 남미의 드레이크 해협을 거쳐 미국(13개 주 시절) 메사추세츠 주 뉴 베드포드 항에 도착한다 1843년 5월, 당시 이곳은 세계 최대의 고래잡이 기지였고 윗필드 선장은 만지로를 모두에게 소개했다 만지로는 윗필드 선장의 고향 페어헤븐에서 양자처럼 같이 살며 영어, 수학, 측량, 항해술을 배운다 최초의 일>영 학습 교재가 된 '영미대화첩경'을 저술하기도 하고 고등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할 만큼 낯선 땅에서 만지로의 학습욕은 불타올랐다 포경업 및 귀국 편에서 계속... 일본여행-관동이외갤러리 비기뇽님 펌
소련 산업은 디트로이트에서 건설됐다.
먼저 아래 영상을 보시기 바란다. 드미트리 고든(Дмитрий Ильич Гордон) 쇼의 2019년 클립이며 인터뷰어는 우크라이나의 유명 방송인, 드미트리 고든이고 인터뷰하는 할아버지는 마크 솔로몬(Марк Семёнович Солонин, 1958-)으로서 러시아의 군사 역사학자였다가 우크라이나로 쫓겨나다시피했던 인물이다. 당연히 사실을 말해서였을 것이다(참조 1).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러시아는 친구 없이는 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죠. 나폴레옹 전쟁 때에는 영국이 러시아를 도와줬고, 세계대전에서는 미국이 러시아를 도왔으며, 이게 단순히 “도와줬다”거나 혹은 그냥 화이팅 해줬다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T-34 탱크 자체를 미국이 설계했었고, 미국이 만들어준 공장에서 생산했거니와 모든 원자재, 항공유, 의약품까지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을 미국이 대줬기 때문이다. 바로 이 모든 것이 아메리칸스키였다는 증언이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미국 물자와 지원이 쏟아진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작업(?)은 1920년대 스탈린과 미국의 끈끈한 교류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 소련 산업은 디트로이트에서 건설됐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인데(소련 산업을 헨리 포드가 일으켰다는 말도 있다), 설명(참조 2)하자면 이렇다. 소련의 경제 설계자 칭호를 받는 미코얀(참조 3)에게는 심복이 한 명 있었으며, 그의 이름은 사울 브론(Саул Григорьевич Брон, 1887-1938), 소련대표로 직접 미국에 들어가서 지원을 얻어내는 장본인이다. 그는 뉴욕에 Amtorg 무역회사를, 런던에 All-Russian Co-operative Society를 세웠고, 그가 Albert Khan이라든가 헨리 포드라든가, 그 외에도 온갖 지원을 받아낸다. 이를 당시 미국 공화당 외교위 상원의원, Wiliam Borah(1865-1940)의 지지를 받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1920년대 미국인 기술자들이 대거 소련으로 들어와서 소련 산업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특히나 디트로이트 엔지니어와 건축가들이 많이 동원됐으며, 트랙터와 자동차, 항공기, 발전소, 주조, 단조, 제강, 압연, 야금, 볼베어링, 알루미늄, 석면, 기계, 섬유, 식품가공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류의 공장을 1920-30년대 미국인들이 만들었다. 스탈린의 치적으로 손꼽히는 ДнепроГЭС, 그러니까 드네프르 댐도 미국이 전체 과정을 감독했었다. 그래서 히틀러가 11941년 8월 소련의 공급망과 여러 공장들을 많이 파괴시키기는 했지만, 이거 원래 다 미국이 해준 겁니다. 사실 소련의 공급망은 미국이 제일 잘 이해하고 있었죠. 그래서 미국의 원조가 적재적소로 들어가고, 렌드리스로 몰아주기가 더욱 더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전술적으로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겠지만 전략적으로 히틀러의 가장 큰 실수는 미국 렌드리스의 효과를 얕잡아봤다는 점 아닐까? 그래서 이번 전쟁을 보고 제1차세계대전이네, 리보니아 전쟁이네, 한국전쟁이네 말이 많은데 어쩌면 제2차 세계대전의 성격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말씀. 지금의 렌드리스가 어디로 향하는지 보시라. ---------- 참조 1. 영상 클립 자체는 우크라이나 내무부 자문관, 안톤 게라슈첸코의 트윗에서 가져왔다. https://twitter.com/Gerashchenko_en/status/1620113612818767882 드미트리 고든 쇼의 2시간 정도 되는 인터뷰 영상은 여기: https://youtu.be/wrUq7QQOkZA 참고로 표정이 영 뚱하기는 하지만 드미트리 고든은 우크라이나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인물이며, 마크 솔로몬은 러시아 내부에서는 “수정주의 역사학자”로 널리 비판받는 인물이다. 2. 이 부분은 이번 전쟁 때문에 유명해진 카밀 갈레예프 덕분에 알았었다. 그의 롱트윗(2022년 3월 19일)을 보자. 러시아가 친구 없이는 전쟁에서 못 이겼다는 말도 그의 트윗에서 가져온 발언이다. https://twitter.com/kamilkazani/status/1505247886908424195 3. 소련의 햄버거(2020년 9월 6일): https://www.vingle.net/posts/3099447
우러전쟁 이야기 (갈려 나가는 기갑)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흑토 때문에 이질적인 지형을 갖고 있음. 이 이질적인 지형은 우러전쟁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 그것은 바로 라스푸티차라고 불리는 광역 슬로우 디버프임. 기갑의 이동을 제한하는 라스푸티차는 봄과 가을에 발생하고 겨울이 따뜻하면 겨울에도 발생함. 우크라이나군, 러시아군 모두 이 라스푸티차라는 페널티에 걸려 있음. 요즘 러시아군이 무리한 공세를 하다 많이 갈려 나가는 중이라 지형 페널티를 받고 갈려 나가는 우러전쟁 기갑에 대해 쓰려고 함. 우러전쟁 기갑은 진흙탕 서핑을 하고 싶지 않으면 길 따라 기동해야 함. 근데 우크라이나 도로는 협소하고 길이 많지 않아 진격로가 제한됨. 제한된 진격로, 좁디좁은 길, 거지 같은 도로. 기갑이 갈려 나가기 딱 좋은 조건임. 박살 난 선두 전차 때문에 잠시 멈춤 러시아 전차. 어버버하다가 결국 포격 엔딩을 맞음. 우러전쟁, 기갑 부대의 진격을 막는 방법. 대전차 지뢰든, 장애물이든 뭔가로 길을 막는다. 길이 막혀 움직이지 못하는 기갑 부대를 차근차근 박살 낸다. 원숭이도 할 간단한 방법인데, 이게 계속 통하는 상황임. 그렇다고 도로가 아닌 진흙밭을 통과하는 것도 미친 짓임. 라스푸티차 때문에 굼벵이 속도로 진격하다 쓸려나감. 또 우러전쟁 기갑을 위협하는 문제점이 하나 더 있는데 너무 탁 트인 개활지라는 점임. 이런 전장은 공군이 활약하기 최적의 지형인데 아쉽게도 우크라이나, 러시아나 공군이 없음. 탁 트인 개활지여서 생기는 단점. 드론 정찰에 너무 쉽게 잡히고 조금만 멈춰 있으면 포격 맞아 사망임. 드론 정찰로 러시아 기갑을 찾을 우크라이나 보병대. 대전차 미사일 사격으로 깔끔하게 제거함. 라스푸티차로 인한 슬로우 디버프 & 개활지로 인한 엄폐 불가 때문에 기갑이 매우 취약함.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우러전쟁에서 기갑이 쉽게 터져나가고 있음. 날씨와 지형을 면밀히 살펴보고 상황에 맞춰 운영해야 하는데 무지성 돌격하다 갈려 나가는 중임. 그리고 러시아제 기갑은 종이 장갑이라고 할 정도로 장갑이 약해서 포격 몇 방에 쉽게 궤멸되는 편임. 궤멸된 기갑부대에 놀라 달아나는 러시아 병사들. 이게 우러전쟁 전선이 교착 상태인 이유임. 기갑이 힘을 쓰기 힘든 조건이 너무 많음. 다만 우러전쟁에서 기갑이 쉽게 갈려 나가는 것은 기갑 자체의 문제라긴 보단 전장 상황을 무시한 무지성 작전 탓이 큼. 겨울 라스푸티차 기간에는 존버하고 강추위 시기에만 공세했으면 저런 일 없었음. 기념일 따위의 정치적 목적으로 무리하게 작전하는 게 문제임. 우러전쟁에서 기갑이 너무 쉽게 박살 나고 있지만 기갑 자체의 문제라기 보단 무지성 운용이 문제이며 기갑은 전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 3줄 요약 1. 우크라이나는 기름진 흑토 때문에 라스푸티차가 매우 매우 심함. 2. 제한된 진격로, 거지 같은 지형 때문에 기갑이 무수히 많이 갈려 나감. 3. 날씨와 지형을 면밀히 살펴보고 진격해야 하는데, 무지성 돌격하다 궤멸됨. 군사갤러리 후지토라님 펌
1960~70년대 아시아 제일가는 마약 제조국과 아시아 마약 카르텔
메스 암페타민이라는 마약이 있어 종주국 : 일본 증상 : 강력한 환각, 각성 특징 : 만들기 쉽다 존나 쉽다 개개개개개 쉽다 메스암페타민은 일본 의사가 1893년 감기약을 개발하다가 발견했어 성분이 감기약과 유사하다보니 아편 대마 코카인 등 원재료 중요한 다른 마약에 비해 화학지식만 있으면 쉽게 만들수 있음 울나라에서도 걍 고딩 이과생이 저거 만들었다가 걸려서 난리난적 있더라고 이 성분을 주목한 일본의 다이닛폰 제약은 메스암페타민을 첨가한 피로회복제를 만들어 대대적인 광고를 했지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건너간 히로뽕은 시험공부 중인 학생이나 장거리 주행하는 트럭운전기사들을 중심으로 남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중독현상에 대한 심각한 보고가 없었고, 위험성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https://cm.asiae.co.kr/article/2019052814320517335 히로폰 익숙하지? 맞아 흔히 우리나라에서 히로뽕, 필로폰으로 불리는 그 마약이야 이 히로뽕이 대대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2차 세계대전 바로 전쟁시기야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 추축국 가리지 않고 많은 군인들이 마약을 했어 왜냐? 피로를 빨리 회복시켜주고, 더 용감하게 잘 싸우게 해주거든 각성제 효과로 죄책감이나 피로감 두려움을 일시적으로 감춰주거나 원하는 환각을 보여주니까 당연히 만들기 쉬운 메스 암페타민, 히로뽕도 많이 사용했고 이후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히로뽕은 연합국이던 추축국이던 거의 모든 전장에서 군인들에게 보급됐다. 야간행군 때 졸지 않고 집중력을 유지시켜주고, 한편으로 병사들의 겁을 없애준다는 이유 때문이다. 각 군의 지휘관들은 중요한 보급물자 중 하나로 이 메스암페타민을 수만정씩 보유하고, 병사들의 사기와 내구력 향상 등의 목적으로 정기 지급했다. https://cm.asiae.co.kr/article/2019052814320517335 종주국인 일본은 특히 말할 것도 없었지 특히 전쟁 막바지로 갈수록 심각한 난전, 악전고투를 겪던 일본 군인들의 필수품이었음 가미카제에 탔던 병사들도 히로뽕을 투여한 채 자살테러를 감행했고 그 전쟁의 결과는 우리도 다 아는 빵 그렇게 전쟁은 한순간에 끝났고 일본에세 남은건 패배와 반쯤 박살난 국토 그리고 군창고에 쌓인 수많은 히로뽕이었어 사실 메스 암페타민은 화학 실험으로 만들어지는 마약이야=제조하는 화학 기술자가 따로 군대에 고용돼 있었다는 거임 근데 일본 패망 후 갑자기 메스암페타민을 제조하던 기술자들이 한번에 실업자가 된거야 굶어 죽을수는 없잖아? 그래서 기술자들은 군인을 위해 제조하던 메스암페타민을 민간에 팔기 시작했지 이미 메스암페타민이 첨가된 피로회복제가 팔리는 판에 군대에서 쓰이던 순수 메스암페타민까지 등장한거야 그러자 일본에는 이미 메스암페타민에 중독된 군인들 뿐 아니라 민간에도 많은 중독자가 발생에 큰 문제가 생겼고 1945년 패전 후에는 구 일본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량의 필로폰 재고가 암시장을 통해 흘러나왔다. 일본 전역에 마약 중독자가 속출했다. 일본은 1951년까지 각성제 유통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1965년에는 ‘제2차 각성제 남용기’가 도래했다. 전쟁 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재건에 열을 올리는 노동자, 밤낮없이 활동하는 연예인과 그 뒤에 암약하는 야쿠자들의 손을 타고 각성제는 일본의 대표적인 마약으로 자리 잡았다. http://economychosun.com/client/news/view.php?boardName=C06&t_num=13608109 1951년 일본 정부가 금지약물로 지정해서 제조, 판매를 금지했어 어 정부가 잘했네 그..으렇긴 그런데... 2022년으로 점프해볼까? 미국은 주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하드드럭+일부 소프드드럭이 불법이야 강력하게 마약을 단속하고 있고 마약 단속반은 거의 특부부대라 해도 과언이 아님 근데 미국에서..마약을 안해?? 존!!!!나 하잖아 미국 살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상상이상으로 많음 가끔 길거리 걷는것도 무서움!!! 그것도 무시무시한 마약 갱단이 붙어서 하지 물론 미국의 마약 중독이 단순히 마약 금지때문만은 아니고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마약을 금지한다고 마약이 뚝 끊기는건 아니란거지 오히려 불법화되고 위험해지니까 폭력 조직들이 개입해 일본도 야쿠자가 메스암페타민 사업에 뛰어들었어 당연히 마약산업은 각종 불법+검은돈이 몰리는 산업이 됐음 일본 정부도 굉장히 강경해서 대대적인 체포 작전으로 5만명 넘게 체포하기도 했어 그야말로 일본판 마약과의 전쟁이었음 심지어 1960년대에는 마약 제조자에게 최대 사형까지 구형하도록 법을 개정했는데 이렇게 마약관련 법이 강해지자 마약업자+야쿠자들은 눈을 돌리기 시작했음 잠깐 2022년으로 다시 점프해볼께 미국이 마약을 많이 한다고 했잖아 그럼 이 마약은 어디서 올까? 미국? ㄴㄴ 미국 아래있는 멕시코부터 더 아래있는 중남미 국가에서 재배, 제조되서 유통돼 그래서 그 국가들은 마약카르텔에 국가가 잠식되어 있는 수준이고 미국내 단속이 엄격하고 빡세질수록 마약 산업은 돈이 되는 산업이 됨과 동시에 근처 다른 곳에서 제조하려고 하는거야 그리고 미국이 단속 빡세질수록 그 카르텔에 마약상과 마약카르텔 갱들은 더 활개치고 시민들은 더 괴로워하지 OEM이라고 알지? 주문자가 요구하는 제품과 상표명으로 완제품을 생산하는 것. 따지자면 미국의 마약은 멕시코와 중남미 국가에서 OEM 생산하여 판매되는거라고 봐야해 다시 1960년대로 가서 마약 제조업자들과 야쿠자들에게 메스암페타민 산업은 너무나 ~ 돈이 되는 산업이지만 자칫하다간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산업임 이때 얘네 선택을 고르시오 1. 회개하고 새삶을 산다? 2. 죽기를 각오하고 계속 만든다? 둘다 놉 3. 가까운 곳에 생산 기지를 만든다 돈도 되고 안전하고 개굿! 자 이제 눈치챘겠지 일본에서 제일 가까운 나라는 좆같게도 우리나라야ㅋㅋ 그것도 제일 가까운 곳은 제2의 도시 부산 일본과 가깝고 항구라 해상교통도 편리하니까 맞아 일본에 유통할 마약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조하기 시작해어 이때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마약왕인데 안봐서 뭐라 말을 못하겠다 아무튼 스토리라인이 일본에 마약 파는 내용이더라구 그때까지 우리나라는 마약에 대한 제재가 별로 없고 큰 문제를 일으킨적도 없었어 소프트드럭이라는 대마도 시골 어르신들이 종종 키워서 사용했었고 은근히 피는 사람도 흔했으니까 그런 헛점을 이용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야쿠자 세력 및 마약 상들이 마약을 제조하기 시작했고 그 아래 일하는 사람들도 점차 기술을 배우고 마약 장사에 참여하기 시작해 그리고 한국 조폭들의 큰 자금줄이 됐지 당시 한국에 뭐 4대 마약왕이니 마약 거물이니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걍..아오안이라 더 안찾아봄..알빠쓰레빠 방식은 이래 대만에서 원료를 사온다->부산에서 만든다->일본에서 판다 어 따지자면..가공무역?..을 가장한 카르텔이지 뭐 저기에 개입되는건 일본의 야쿠자/한국의 조폭들이었고 폭력 조직과 각종 불법이권의 돈줄이 되어준게 바로 마약이었거든 그렇게 60년대~70년대까지 일본 히로뽕 생산량의 80%를 한국, 부산이 차지헀어 그것도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의 히로뽕보다 한국 히로뽕이 유독 질이 좋아서 일본 시장을 장악했다고 해 참...어떻게 마약도 굳이굳이 더 잘만드네..재능낭비? 그렇게 1970년대까지 부산 지하경제는 히로뽕이 장악했고 돈이 어마무시하게 들어왔어 그렇지만 히로뽕 중독자는 우리나라에 거의 없었지 물량을 죄다 일본에 팔았거든 왜냐면 우리나라사람들은 가난했고 돈을 버느라 바쁘지 돈주고 비싼 마약을 살 여유가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1980년대들어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해 1. 돈이 되니 사람이 몰리고 사람이 몰리니 기술(???)이 발전했다 =양질의 히로뽕 생산량이 늘었다 + 2. 일본에서 코리안 마약 카르텔을 눈치채고 대대적으로 한국산 수입품을 단속했다 =대부분 일본에 수출되지 못하고 부산에 물량이 남았다 그래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히로뽕 물량이 촤악 풀렸지 실제 우리나라에서 다른나라와 다르게 유독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의 마약이 바로 히로뽕임 왜 오죽하면 SON of 정희, BROTHER of 근혜인 박지만 (=약쟁쓰)도 가장 많이 걸린게 히로뽕이겠어 헐 우리나라도 그럼 완전 약쟁이 나라 된거아냐? 놉 다행이 우리나라는 마약이 퍼지는 속도보다 정치 경제 사회 변화가 개빠른 나라였고 마약이 우리나라를 장악하기전 마약을 여러 선진적 체계가 빠르게 자리잡았어 단속반이 생기고, 마약단속법이 생기고 인식이 바뀌고 등 더불어 빠른 경제성장으로 인건비, 물류비, 물가 모든게 상승하다보니 계속 OEM을 하기엔 단가가 안맞았지 어쨌든 마약 산업(?)도 돈벌려고 하는건데 울나라에서 만들면 더이상 돈이 안되는거야 마이너스 수준임 걍 평범한 합법 공산품도 우리나라에서 만들면 인건비 임대료 등으로 가격이 비싸지는데 하물며 마약은.. 그래서 많은 마약 제조상들이 다른나라로 떠났고 우리나라는 다행이 마약제조국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 만약 우리가 빠르게 변화하지 못했다면, 사실 거대한 마약카르텔이 나타났을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마약 카르텔의 가장 최악의 결과는 현재 멕시코나 남미를 보면 되고 또 아프가니스탄 같은 최빈국+분쟁국가도 부자국가의 마약 OEM으로 먹고 살며 마약카르텔에 갇힌 나라거든 물론 그 흔적은 아직 남아있지만..우리나라 아직도 가장 높은 비율의 마약이 히로뽕임 히로뽕은 투약횟수, 정도에 비해 몸에 끼치는 해가 아주 큰 마약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손도 대지 말자 막간 TMI 최근 개봉한 디즈니 영화 엔칸토는 화려한 색감과 신나는 음악이 특징인데 그 밝은 연출 뒤로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어 엔칸토의 시작이 바로 콜롬비아 내전이야 주인공 가족은 내전을 피해 도망쳐온 사람들이고 콜롬비아는 마약 카르텔의 큰 영향을 받은 나라고 당연히 콜롬비아 내전도 그 마약과 카르텔의 영향을 받았음 마약왕으로 불리던 나르코스가 콜롬비아 출신이기도 하고 마약과 콜롬비아는 절대로 뗄 수 없지 미국에서도 콜롬비아와 마약을 많이 연관지은 미디어, 콘텐츠가 많이 나오는데 사실 본인들도 책임 아주 크다는건 가끔 망각하는 것 같아 ㅋㅋ ㅊㅊ
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갔을까? (길지만 재밌는 글)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중에 일부분인데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대략 우리가 좀 비루하게 인식하기도 하는 조선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가 하는 부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 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출처 : http://dotty.org/2699099
시모노세키의 복어 이야기
북규슈와 혼슈를 잇는 지리 상의 거점이자 메이지 유신 때 사쓰마 번(가고시마)와 연합해 260년의 에도 막부를 끝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슈 번(長州藩)의 도시기도 했던 '시모노세키' 간몬 해협을 사이에 두고 가마쿠라 막부를 연 단노우라 전쟁(1185)이 일어나기도 했고 왜란 후의 조선통신사들이 일본 본토에 처음 기항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 곳 시모노세키 바다에는 예로부터 복어가 많이 잡혀 이 지역의 향토음식이었다 관짝 짜놓고 먹는다고 '관 요리'라고 불렀다고 1592년 히데요시가 각 지방의 다이묘들을 들들 볶아 마련한 노인과 아이를 제외한 15만 8천 7백명의 조선 침략군이 이 곳, 시모노세키 항구에 집결했다 일본 각 지역에서 모인 다양한 장정들이었으니 바다를 처음 보는 산골 출신들도 많았는데 복어에 맹독이 있다는 걸 모르는 병사들이 독이 든 알과 내장까지 먹으며 하나둘 죽어나가자 히데요시는 ㅈㄴ 빡쳐서 그렇게 죽고싶으면 조선에 가서 싸우다 죽으라며 복어금식령읕 내리기에 이른다 그 후, 복어를 먹고 죽는 이는 없어졌지만 전쟁이 끝나도 복어 금식령은 300년 동안 남아있었다 근대화 중이던 1882년에도 지방 영주에 의해 복어를 먹으면 구류 or 벌금형에 처한다는 법령이 있었다 이 복어금식령이 해금된 것은 1892년,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서다 총리가 되고 시모노세키를 방문한 이토는 춘범루(春帆樓)라는 여관에 머물게 된다 춘범루는 원래 안과의사 후지노 겐요가 1877년에 '츠키야마 의원'을 개원한 곳인데 그가 죽자 그의 아내 미치가 여관으로 운영하던 곳이다 여튼 이토가 여관에 있을 때 태풍이 불어 조업이 어렵게 되자 대접할 게 없어서 주방장은 금지된 생선인 복어를 이토에게 주었고 이토가 그 맛에 감탄해 이 집 한정으로 복어 판매를 허용했는데 이를 계기로 금식령이 풀리게 된다 그 이듬해인 1895년,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을 이기고 춘범루에서 청나라 북양함대 대신 이홍장과 정전협정을 맺게 된다 왼쪽 세번째 수염 풍성한 놈이 무쓰 무네미쓰 그 옆이 이토 무쓰는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봉기)에 대한 외교 문제를 일본 입장에서 저술한 '건건록'을 남겼다 춘범루 앞에는 회담이 이뤄진 곳을 전시해놓은 '일청교류기념관'이 생겼다 이 조약으로 청은 조선에서 완전 발 빼고 막대한 전쟁 보상금, 요동 반도와 대만을 할양받고 서구 열강과 같은 최혜국 대우를 받게 된다 이홍장은 숨이 턱턱 막히는 요구에 하얗게 질려 "가혹! 가혹!"을 외쳤다고... 쨌든 그 후 복어 요리는 발전했고 점점 다양화해졌다 도쿄의 츠키지 어시장처럼 시모노세키엔 가라토 어시장이 유명한데 이 곳에서 여러 복어요리를 찾아볼 수 있다 끝 일본여행-관동이외갤러리 비기뇽님 펌
주 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사건(1996년)
16세기 잉카제국이 멸망했어도 그 잔존세력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며 페루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후잉카제국은 스페인과 대립하였다 1571년 즉위한 후 잉카 제국의 투팍 아마루는 1572년 스페인의 페루 부왕령 총독에게 끌려가서 우상숭배를 명목으로 처형을 당한다. 이렇게 후 잉카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지만 18세기에 이르러 원주민 족장 한명이 스스로를 투팍 아마루 2세로 자칭하면서 잉카제국의 승계를 주장하고 독립 운동을 이끈다 그는 흑인이나 메스티소에 대해서 차별을 철폐할것을 요구하며 거병하였지만 스페인의 페루 부왕령 군대에 진압당하고 처형당한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이르러 호세 데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의 활약으로 페루는 마침내 독립하고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페루는 여러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갔었다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인들은 미주 지역으로 대거 이주했는데  미국과 브라질에는 대규모 일본계 커뮤니티가 형성될 정도였다 그 다음으로 규모가 큰곳은 페루였는데 이곳에서 한 일본계 페루인이 주목 받았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Alberto Kenya Fujimori Fujimori는 페루 리마에서 일본 구마모토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페루로 돌아와서 tv 토크쇼 진행자로 큰 주목을 받아서 1990년 대통령 자리까지 올라간다 특히 페루는 신자유주의로 나라 경제가 한번 박살났었는데 후지모리는 거기에 반대하는 공약을 내놓았으며 아무튼 80년대말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인 일본의 경제 지원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페루인들의 지지가 컸다고 한다(1990년 시점에서의 페루인들 생각이 저러했다고 하는거지 실제로 어떠했냐 앞으로 어떻게 따지냐를 이야기하는건 무의미함) 그리고 실제로 1990년대 중반까지 그는 페루 경제의 성장을 이끄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996년.... 1996년 12월 일본의 덴노인 아키히토 생일 축하연이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열렸고 페루에 주재하고 있는 여러 나라의 외교관들이 참석하였다 그런데 이때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의 조직원들이 일본 대사관으로 쳐들어가서 대사관을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들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은 과거 페루의 독립운동을 이끈 투팍 아마루 2세의 이름을 따와서 만들어진 페루의 좌.파 반군 조직이였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조직에 소속되어있던 인원의 석방과 알베르토 후지모리 정권의 경제 정책을 자신들의 요구대로 전환 시킬것등의 조건을 걸고 페루에 주재한 외교관들(주 페루 대한민국 대사 포함)과 일본인 주재원등 600명을 인질로 잡았다 이후 페루 정부는 어떻게든 인질들을 빼내기 위해서 테러범들과 협상을 했으며 주 페루 한국 대사는 운좋게도 4일만에 탈출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주 페루 쿠바 대사가 한국 대사에게 먼저 나갈수있도록 테러범들과 이야기를 해줬기 때문)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직접 방탄복을 입고 범인들과 협상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페루 해군 특수 작전군은 미군과 연계하여 테러범 진압작전을 3개월에 걸쳐서준비하고있었다 페루군은 주 페루 일본대사관 주변의 모든 건물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 후에 주 페루 일본 대사관 건물로 통하는 터널을 파기 시작한다 이 당시 인질들은 대사관 2층에 모여있었으며 인질들이 1층에 대부분 모여서 운동을 하는 시간에 맞춰서 대사관 지하까지 파둔 터널을 폭퍄시켜서 개통을 하였다 페루군은 대사관으로 진입 투팍 아마루 해방 운동 단원들을 차례차레 사살하였으며 페루군 2명이 이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 단원은 총 14명이 사살당한다. 결과적으로 페루군은 인질 전원을 구출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인질 구출 작전중 하나로 평가받게된다. 거기에 페루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인기는 더욱 치솟기도하였다. 그러나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이후 온갖 부패에 연루하여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다시 페루로 돌아와서 감옥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다. 군사갤러리 ㅇㅇ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