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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숲을 달린다! 트레일 러닝

그해 여름, 어느 아름다운 초원에서
오후 5시,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산장의 창문은 바깥으로 젖히게 돼 있었다. 창문 너머 빗물이 새어 들어와 다다미 위를 적셨다. 어두운 방 안으로 빛도 함께 새어 들어왔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문득 이 여름의 끝을 지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바람 서늘한 가을을 건너 모든 것이 하얗게 얼어붙는 겨울이 오면 그악스러운 이 시간도 그리워지겠지. 그렇다면 밖으로 나가 비를 좀 맞아야겠다. 그것도 아주 신나게. 혹여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을지라도.
우츠쿠시가하라는 일본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와 우에다시에 걸쳐 있는 해발 2,000m의 초원이다

●빗속의 달리기

7월 초순. 대회장까지 가는 길은 제법 멀었다. 나리타공항에서 신주쿠역까지는 국영철도를, 신주쿠역에서 JR지노역까지는 쾌속열차를 탔다. 지노역에 도착했을 때는 철로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대회장인 브란슈 타카야마 스키리조트로 가는 셔틀버스 좌석을 미처 예약하지 못해 난감해 하고 있는데 상황이 비슷한 현지 참가자 세 사람이 다가와 고맙게도 택시 합승을 제안했다. 택시는 구불구불한 지방도로를 1시간 동안 달려 우리를 대회장 앞에 데려다 줬다. 벌써부터 먼 세상에 떨어진 것 같았다. 인근 체육관 강당에 들어가 참가등록을 한 뒤 배번을 받았다. 2006번, 잘 부탁해! 

올해로 7회째를 맞이한 ‘우츠쿠시가하라 트레일 레이스(Utsukushigahara Trail Race)’는 일본 나가노현 나가와마치에서 열리는 트레일 러닝 대회로, 크게 45km와 80km 부문으로 치러지게 된다. 대회의 메인 코스인 80km는 새벽 4시에, 내가 참가하는 45km는 아침 8시에 출발한다. 2011년 처음 개최된 이 대회는 이제 전체 참가자가 1,500명을 훌쩍 넘을 만큼 일본 동호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 그 이유는 이곳 자연이 간직한 천혜의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일본 내에서도 높은 산지가 많은 나가노현, 그중에서도 ‘아름다운 초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우츠쿠시가하라(美ヶ原)는 사방이 해발 2,000m급의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연중 운무 속 신비로움을 피워 낸다. 
오전 8시, 출발선 위에 섰다. 여명이 걷히고 회색빛 하늘  아래로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풀숲이 싱그러웠다. 스키 슬로프를 3km 정도 뛰어올라 본격적으로 산마루 위에 섰다. 달리는 동안 시야에 들어오는 나무와 꽃들이 일상에 지친 두 눈을 쉬게 했다. 스키 슬로프가 끝나는 동시에 넓은 임도가 나타났고 30분 동안 평평한 길 위를 달리며 몸을 달궜다. 분초를 다투며 올랐던 초입과 달리 이곳부터는 속도전이라 서로간의 간격이 벌어졌다. 그래서 한참은 혼자 달릴 수 있었고, 그래서 더없이 자유로웠다.  어느덧 25km 지점. 간이 휴식처인 체크포인트에서 식수와 간식을 서둘러 보급 받고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지난밤 내린 비 때문에 진창이 된 산길을 10km 정도 달리자 대회 하이라이트 코스인 목장이 나타났는데 이곳은 80km 코스와 45km 코스가 만나는 교차점이라 많은 참가자들로 붐볐다. 해발 1,500m 구간인지라 시원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인데 온통 안개 속이다. 하지만 온몸이 이미 흠뻑 젖었고 숨을 몰아쉬며 체력을 다 소진했던 까닭에 무언가를 마구 보고 싶다는 아쉬움은 들지 않았다. 시간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고 주어진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 
●행복을 향하여
발 앞으로 이어지는 길을 달리며 뭉쳐 있었던 생각의 끈을 서서히 펼쳤다. 왜 나는 이곳에 왔고 왜 이렇게 달리고 있는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불안함과 설렘 사이를 오간다. 혹은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애틋해한다. 온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일은 왜 이리도 어렵고 요원한지. 그런데 한 가지를 알았다. 적어도 달리는 순간만큼은 온몸으로 지금 이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이 애써 불행을 향해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 고민하고 지금보다 좀 더 따뜻해지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걸 테다. 결코 길지 않은 인생,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빛나기 위해. 
대회 전야, 산장의 방을 함께 쓴 현지 선수 Y는 일전에 한국의 대회에도 출전해 우승하기도 했다. 나이가 같아 친구가 됐는데 운동 경력이 많고 지난해 결혼도 해서 그런지 어딘지 어른스럽다. 그녀는 이번에도 80km 여자부 우승컵을 가뿐히 거머쥐었다. 
초반에 힘겹게 올랐던 스키 슬로프를 다시 거침없이 내려가면 처음 출발했던 곳에 도착한다. 결승선까지 마지막 3km를 남기고 신나게 달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개고 중천에 해가 반짝 떠 있다. 그리고 완주. 결승선 가득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응원을 마음 깊은 곳으로 가져가며 부디 오늘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참가자들에게 무상으로 무제한 제공되는 우동을 두 그릇이나 꾸역꾸역 먹고, 나 역시 무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사람들을 향해 힘내라며 소리쳤다. 사는 곳도, 살아갈 삶도 다르지만 같은 길을 달린 사람들. 새벽부터 긴 길을 달려온 저들의 얼굴에 묻어 있던 피로감은 성취감에 씻겨 보이지 않았다. 만면에 웃음을 품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대자로 드러누웠고 누군가는 자신을 기다려 준 이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 또한 함께 웃었고 또 함께 울었다. 
지역특산품인 채소세트를 품에 안고 신주쿠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그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결승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고 허공 높이 응원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언가를 두고 온 사람처럼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글 장보영  사진 Nobuhiro Shimoyama  에디터 고서령 기자
*글을 쓴 장보영은 2011년 네팔과 인도 히말라야에서 6개월을 보내고 그해 겨울 월간 <사람과 산>에 입사해 지금까지 산악기자의 삶을 살고 있다. 3년 전 등산경주라는 취미가 생긴 후로는 여러 나라의 산을 달리는 꿈을 꾸고 있다.  purn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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