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recha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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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인 지금, 우리는 매스미디어인 TV와 인터넷을 통해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 선수들의 소식을 시시각각 접하고 있다. 한국 축구의 전설로 추앙 받는 차범근을 넘어서며 대기록을 경신한 토트넘의 손흥민을 비롯해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 황희찬(잘츠부르크)등 많은 선수들이 세계 각지에서 한국 축구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또한, 한국이 달성한 ‘월드컵 본선 9회 연속 진출’은 세계에서 강호로 손꼽히는 브라질(21회), 독일(16회), 이탈리아(14회), 아르헨티나(11회), 스페인(10회)에 이어 역대 6위 기록에 해당한다.
세계 5대리그에서 한국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있는 많은 축구팬들은 한번쯤 이렇게 생각해 봤을 것이다. ‘우리 한국 축구가 지금의 위치까지 올 수 있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필자는 궁금해 하는 팬들에게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의 한국 대표팀 이야기를 추천해주고 싶다. 축구 변방에 불과했던 한국이 현재 축구계에서 영향력을 꽤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한국 축구의 발전에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스위스 월드컵 당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며 홀로 먼 타국으로 향한 대표팀. 그들은 오로지 ‘헝그리 정신’과 ‘투혼’만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그들의 이야기, 지금 시작한다.

# 투혼의 시작

“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모두가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습니다.”
일본에서 월드컵 지역 예선을 치르고 있는 한국 대표팀

1954년 제 5회 스위스 월드컵을 앞두고 아시아 지역에 배정된 출전권은 단 한 장이었다. 애초 한국, 중국, 일본 3개국이 참가하기로 되어있었지만 중국이 기권을 하게 되면서 한국과 일본의 맞대결로 좁혀졌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최초로 치러지는 한일전이었다.
당시 일본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아 한국 정부는 일본팀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한국 대표팀은 일본에서 홈, 어웨이를 모두 치러야만 했다. 이유형 감독 이하 모든 선수들은 한국을 떠나기 전,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본에게 이기지 못할 경우 선수단 모두가 현해탄(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라고 하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3월 7일 진눈깨비가 내리던 일본 메이지 신궁 외원 경기장은 온통 진창이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은 오직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1차전 5대1 승리, 2차전 2대2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월드컵 티켓을 따내고야 말았다.
쉽지 않은 일본 원정에서 거둔 승리이기도 하지만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가 휴전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뤄낸 것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 험난한 스위스행, 무시 받은 한국

숙적 일본을 꺾으며 사상 첫 월드컵 진출을 달성해냈지만 스위스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복구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던 터라 국가로부터 지원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축구협회 직원 또한 협회장을 포함하여 겨우 5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행정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보통 국가대표팀은 월드컵이 개막되기 전부터 미리 현지에 도착해서 현지적응 및 전술 훈련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 대표팀은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표를 제때 구하지 못하면서 수일간 발이 묶여 있다가, 도쿄-방콕-콜카타-로마-취리히를 거치는 대장정 끝에 경기가 열리는 전날 오후 10시에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시차적응은 물론이고 피로도 제대로 풀지 못한 채 경기에 나서야만 했다. (※ 이 때 모든 선수들이 함께 간 것이 아니라 1진 11명만이 먼저 도착해 헝가리 전에 나섰다. 2진은 헝가리 전이 끝난 뒤에야 도착했다.)
당시 한국은 경기가 치러지기 전부터 세계 외신들의 웃음거리가 되다시피 하며 무시 아닌 무시를 당했다. 제대로 된 단복조차 맞추지 못한 한국 대표팀의 모습을 본 외신 기자가 “당신네 나라에서는 짧은 바지가 유행인가?”라는 질문을 했는데 이때 골키퍼 홍덕영이 “우리는 전쟁을 겪은 나라다. 물자를 절약하는 것이 애국이기 때문에 바지를 짧게 입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1954 스위스 월드컵 공식 팸플릿. 16개의 출전국 중 하나인 한국의 태극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 뿐만 아니라 월드컵을 홍보하는 표지에서는 아예 태극기를 찾아볼 수 없다. 축구전문자료수집가 이재형씨가 입수한 1954년 스위스월드컵 공식 팸플릿을 보면 유일하게 태극기만 빠져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중앙에 위치한 축구공이 태극기를 가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당시 시드 배정국인 브라질, 헝가리, 프랑스, 잉글랜드, 오스트리아, 터키, 우루과이, 이탈리아 등은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분명 사진 아래에 공간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축구공을 중앙에 배치한 것은 FIFA 측에서 의도적으로 한국을 무시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아시아’라는 축구 변방에서 온 한국의 첫 월드컵은 시작부터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 9대0 대패, 하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월드컵에 참가한 한국 대표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당시 세계 최강의 전력을 가진 헝가리였다. ‘매직 마자르’라는 별칭을 가진 헝가리 대표팀의 위상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대회 직전에 치러진 평가전에서 ‘질주의 소령’ 푸스카스와 그에 비견될 수 있는 콕시스를 앞세워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를 7대1로 대파했고, 강호 서독조차도 8대3으로 꺾는 등 그야말로 엄청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 서독이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에서 헝가리를 꺾고 우승하자 축구계가 이를 두고 ‘베른의 기적’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1950년 대를 주름잡았던 '매직 마자르'를 이끈 푸스카스(오른쪽), 콕시스(왼쪽)

‘매직 마자르’와 마주하게 된 한국 대표팀은 ‘마의 10분’(※ 어떤 팀을 만나더라도 헝가리 대표팀은 10분 안에 두골 이상을 넣을 수 있다는 뜻)으로 불리던 헝가리의 공격을 전반 18분까지 잘 막아내며 선전했지만, 결국 ‘월드컵 최다 점수차’라는 기록을 세우며 9대0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9대0. 필자는 이 스코어를 두고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싶다. 9대0이라는 점수는 한국 선수들의 투혼과 정신력이 만들어 낸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뛰고 또 뛴 한국 선수들은 후반전에 4명이 다리에 쥐가 나서 7명만 그라운드에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헝가리의 공격을 막아내며 엄청난 투혼을 발휘했다. (※ 당시 교체선수 규정이 없어 부상으로 선수가 아웃되면 남은 선수들로 경기를 끝까지 치러야 했다.)
당시 한국의 골문을 지켰던 홍덕영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보다 키가 작은 푸스카스가 시도한 슈팅이 골대를 강타하는 순간, 한참을 ‘딩~’하는 소리를 내며 골대가 흔들렸다. 그만큼 슈팅이 너무 강해 맞으면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나중에 너무 힘들어서 공을 잡으면 관중석으로 차냈다. 그때는 공을 1개만 가지고 할 때여서 경기장에 다시 공이 들어올 때까지 시간을 벌 요량이었다.”

100개가 넘는 헝가리의 슈팅을 막아낸 홍덕영의 선방이 없었다면 20대0 또는 그 이상으로 패배할 수 있었다. 오히려 9대0이라는 스코어는 기적과 같은 결과였다. (※ 2차전인 터키와의 경기에서 7대0 패배를 기록하며 탈락 확정. 3차전(서독)은 당시 규정에 의해 치러지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귀국길, 홍덕영은 화물기 안에서 동료들에게 울면서 말했다. “모두 나의 잘못이다. 내가 조금만 더 잘 막았어도 이런 쓰라린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
헝가리 전 당시의 한국 대표팀(왼쪽), 경기에 앞서 망치로 스터드를 수리하고 있는 홍덕영(오른쪽)

“한국은 사자처럼 용감했다. 쓰러져도 계속 일어나 뛰었다.”
- 당시 헝가리 대표팀 감독이었던 구스타보 세베슈 -
“지금 한국 같은 나라가 처참하게 무너졌다 하더라도 수십여 년 뒤에는 전혀 모를 일이다.”
- 쥴리메 당시 FIFA 회장 -

48년 뒤 한국은 월드컵에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격파하고 4강에 올랐다.
“한국 대표팀은 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나라의 선수들이다. 그들은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고 있다.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응원을 부탁한다.”
- 당시 헝가리전을 중계했던 현지 해설진 -

# 선배들의 투지를 후배들이 이어나가야 한다.

비록, 세계 강호들과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며 번번히 조별 예선 통과에 실패해 왔지만 (2002년, 2010년 제외) 우리가 수십 년간 ‘월드컵’이라는 세계 축제의 장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 원동력을 ‘투지’라고 말하고 싶다. 축구 변방에 불과했던 한국이 세계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은 몸을 아끼지 않는 투혼, 쉽게 포기하지 않고 한 발 더 뛰려는 근성과 어떠한 팀을 만나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다.
스포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정신력이다. 정신력의 투지와 집중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어떤 팀을 만나더라도 쉽게 이길 수 없다. 지금의 대표팀은 과거 60년 전 월드컵 1세대인 자랑스러운 선배들의 ‘정신력’을 이어받아야 한다. 최근 가까스로 본선에 직행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며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만, 선배들이 늘 그래왔듯이 위기를 잘 극복하리라 생각한다. 1년도 채 남지 않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했던 선배들처럼 자신감을 갖고 한국축구의 저력을 보여주기 바란다.


* 1954년 스위스 월드컵 한국 대표팀 명단
故홍덕영, 故함흥철, 故박규정, 故이종갑, 박재승, 故이상의, 故김지성, 故강창기, 故한창화, 故민병대(주장) 故주영광, 故이수남, 故박일갑, 故정남식, 故최정민, 故성낙운, 故정국진, 故최영근, 故이기주, 故우상권, 故김용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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