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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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가 아니라 원수였다. "‘엄마 반성문’ 낸 이유남 교장의 호소" 연년생 남매는 이른바 엄친아였다. 전교 1·2등을 자주 했고, 전교회장 출신에 전교 임원을 도맡았다. 서울대 진학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3인 아들이 폭탄선언을 했다. “엄마, 저 자퇴할래요!” 고2 딸마저 오빠를 따라 자퇴했다. 남매는 1년 반 동안 폐인으로 살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게임과 폭력물에 갇혀 살았다. 발레를 하던 딸은 점점 살이 쪄 83㎏까지 불었다. 순했던 두 아이는 짐승처럼 변했다. 마주치기만 하면 죽일 듯 싸워 응급실까지 실려간 적도 있다. 엄마 때문이었다. 교사 엄마는 완벽주의자였다. 서울교대를 수석으로 졸업해 각종 연수에서 1등을 휩쓸고 맡은 반마다 성적우수반을 만들었다. 두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공부 잘하는 아이’ 만드는데 귀재였던 엄마는 두 아이도 모범생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는 아이의 소질과 적성은 논외였다. 대화도 거의 없었다. 부모와 자식간 관계는 지시와 명령이었고, 집안의 규율은 ‘SKSK, 시키면 시키는 대로’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두 아이는 각자의 길을 찾아 신나게 살고 있다. 엄마 때문에 자살하려던 아이는 현재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꼽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문제의 엄마는 서울 종로구 명신초등학교 이유남교장으로 지난 9월 1일, 교장실에서 이유남 교장과 마주 앉았다. 교장실에는 전교생 400명의 사진이 한 벽을 메웠다. “교감 시절에는 전교생의 얼굴과 이름을 다 외웠는데, 지금은 직접 만나는 일이 적어서 30% 정도만 외워요.” 완벽주의자 근성은 여전해 보였다. 먼저 두 아이에 대한 기대를 진짜 내려놓았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솔직했다. “지금도 스멀스멀 올라오죠. 특히 잘나가는 아이를 둔 친구들을 보면 ‘우리 아이들도 저 정도는 될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럴 때는 10년 전을 생각합니다. 방문도 안 열어주고 눈도 안 마주치던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은 아주 사소한 것에 감사해요. 살아 있어줘서 고맙고, 할 일 있어 나가주니 고맙고, 친구를 만나줘서 고마워요. 그런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두 아이의 ‘폐인’ 수준은 상상을 초월한다. 각자 방문을 걸어잠그고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빛이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 싫어 창마다 신문지를 붙였다. 하루 일과는 자고, 먹고, 컴퓨터 하기였다. 컴퓨터 게임과 엽기적인 동영상을 즐겨 봤다. 엄마가 해준 밥은 먹지도 않았다. 한 집에 있어도 밥은 따로따로, 인스턴트 음식으로 때웠다. 어쩌다 둘이 마주치면 죽일 듯 싸웠다. 이유남 교장은 “나는 아이들의 원수였다” 며 과거 자신을 털어놓았다. “두 아이를 자랑거리로 만들고 싶었어요. 엄마가 풀라는 문제집을 풀고 엄마가 가라는 학원을 가고 엄마가 읽으라는 책을 읽으며 자랐죠. 갖고 다니면서 자랑 할 악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들은 클라리넷, 딸은 플루트를 시켰어요. 칭찬은 안 해주고 혼내기만 했어요. 큰 아이는 다 잘하는데 수학을 못하고, 둘째는 다 잘하는데 언어가 약했는데, 큰 아이는 수학을 못한다고 혼내고, 작은 아이는 언어를 못한다고 혼냈어요.” 이유남 교장은 교사 시절 학교에서 유명했다. 그가 맡은 반은 성적이 쑥쑥 올라갔다. 학부모는 좋아했지만 학생들에겐 기피대상 1호 선생님이었다. 멀리서라도 보이면 도망갔다. 심지어 그의 두 아이마저 엄마를 피해 다녔다. “교단에 서서 보면 맘에 드는 아이가 하나도 없었어요. 단점만 보였죠. 교육학의 가장 중요한 이론은 인정, 존중, 지지, 칭찬입니다. 이론에 정통해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으면서 실천은 제로였죠. 죽은 지식 이었어요. 내 자식에게는 더 엄했습니다. 내 아이들은 적어도 나보다 잘해야 하고, 내가 가르친 학생 중 가장 잘하는 학생보다 잘해야 한다고 여겼으니까요!” 두 아이의 목표와 전공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그는 “없었어요. 그게 문제였죠” 라며 말을 이었다. “성적만 잘 나오면 된다는 것이 내 진로교육이었어요. 딸이 ‘엄마는 꿈이 뭐였어?’ 물으면 ‘꿈같이 사치스러운게 뭐가 필요해? 공부 잘하면 갈데는 많아’ 라며 들어가서 공부나 하라고 다그쳤어요. 오염된 성공의 개념을 갖고 있었죠. 1980~1990년대에는 공부 잘하는 아이가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시대였어요.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직장 가서 돈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라고 믿었습니다!” 두 아이는 신경성 장염과 위염을 자주 앓았다. 밥 먹을 때에도 선택권이 없었다. 늘 엄마의 감시와 잔소리 속에 살았다. 이런 식이다. “너 엄마가 뭐라고 했어. 엄마가 도착하기 전까지 숙제 다 해 놓으라고 했어, 안 했어? 많긴 뭐가 많아? 그리고 뭐가 어려워? 너 놀았지? 딴짓 했지?” 순둥이 아이들이 “죄송해요” 하면 “너 엄마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뭔지 알아? 바로 죄송하다는 말이야. 죄송하다고 말할 짓은 하지 말라고 했지? 얼른 들어가! 6시까지 숙제 못 끝내면 저녁밥 못 먹을 줄 알아!” 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식의 말을 날이면 날마다, 눈 뜨면서부터 눈 감을 때까지 했다고 한다. 지시와 명령, 확인과 다그침이 대화의 전부였다. 아버지도 다르지 않았다. 무서운 엄마와 엄마 편을 드는 아빠 사이에서 아이들은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 꿈도, 목표도 없이 타인 주도, 엄마 주도의 삶을 살아온 두 아이는 몸도 마음도 아팠다. 고3이 된 아들은 학교만 가면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하고 죽을 것 같았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해병대 출신의 담임 또한 그에게 스트레스를 더했다. 담임은 부모에게 전화를 해 “올해 한 건 해봅시다” 라며 파이팅을 외쳤다. 특목고를 갈 수 있었지만 내신 때문에 일반고를 선택한 터였다. 전과목 내신 1등급에 모의고사 성적도 좋았으니 서울대 진학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자퇴 선언은 승기를 눈앞에 둔 선수의 기권패나 다름없었다. 알고 보니 공황장애였다. 결국 아들은 고3, 8월 31일에 자퇴서에 도장을 찍었다. (내일은 2부로 이어집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해 졌습니다. 오늘도 자식에게 원수가 아닌, 자상한 부모가 되는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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