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
1,000+ Views

[2017 청년포럼, 문화예술이 젠더를 묻다3]


젠더평등은 한 사회의 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문화 예술환경 조성과 해결을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백마디의 말보다 나와 함께 변화를 위해 행동하고 실천하는 이들과 소통의 기회를 마련하고
연대하여 사회·문화적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특별 강연이
11월 24일 대학로 이음에서 펼쳐집니다!
❍ 포럼일시: 11월 24일 (금) 오후7시~오후9시
❍ 포럼장소: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음센터
(서울 종로구 대학로 112,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
❍ 참여방법: 네이버 예약 <문화예술이 젠더를 묻다3>에서 사전 신청가능
❍ 성평등에 관심 있는 누구나 무료 참여가능 (단, 사전 신청 150명 선착순 마감)
❍ 문의: 02-2036-9214 (사)여성·문화네트워크
주최 (사)여성·문화네트워크 주관 여성신문사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포럼구성
- 오프닝 (19:00~19:10) : 사회자 인사 및 오프닝 영상
* 사회자: 손희정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 문화평론가)
- 강연 (19:10~20:15) :
1) 오지은 (싱어송라이터)
주제: 여성 음악인으로서 사회가 기대하는 모습과 그 한계
2) 이윤정 (스타일리스트)
주제: 워킹맘 아티스트로서의 고충과 또 한편의 희망
3) 손아람 (소설가)
주제: 문화예술계 내에 젠더평등이 필요한 이유
- 특별 공연 (20:15~20:25) : 슬릭 (페미니스트 가수)
- 토론/Q&A (20:25~21:00) : 참여자와의 소통
* 주최 측의 사정에 의해 강연내용 및 순서는 변경될 수 있습니다.
<예약링크>
2 Comments
Suggested
Recent
페미니즘은 정신병
동성애는 정신병이니 빨리치료를 요망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맥주]: 10년 가까이 유럽 최정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맥주 - Zombination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뭔지 모를 이유로 1주일 가까이 빙글 접속이 안되었다가 인제야 다시 접속하게 되어서 후다닥 카드를 쓰고 있네요 ㅎㅎㅎ (일해라 빙글!!) 오늘은 아주 특별한 맥주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이번에는 평소처럼 하나의 맥주를 소개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시리즈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2014년에 출시하여 맥주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맥주이자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럽 최정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벨기에 맥주 Zombination 맥주입니다. Zombination 맥주는 무려 유럽 9개 양조장이 협업하여 만들어진 특별한 맥주인데요. 벨기에 양조장 De Struise Brouwers 중심으로 벨기에- Brouwerij Alvinne, 영국의 Magic Rock, Beavertown, Brodies 양조장, 네덜란드의 Kees Bubberman, De Molen. 노르웨이의 Haandbryggeriet 그리고 스폐인의 Naparbier가 합심해 만든 맥주입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맥주를 소개 시켜드렸지만 이렇게 많은 양조장이 협업하여 만든 술 자체를 찾는 것도 참 쉽지 않을 거 같네요. 해당 맥주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스폐인 바틀샵 사장 가브리엘 Gabriel Bocanegra 의해서 만들어졌는데요. 원래 그는 스폐인에서 맥주 글을 쓰는 블로거였지만, 유럽에서 바틀샵을 운영하면서 유럽 전역 맥주 양조사와 넓은 인맥을 쌓았고 그의 바틀샵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벤트 성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양조사들을 초대해서 만든 맥주가 바로 Zombination입니다. 해당 맥주 시리즈는 스트루이스의 Black Damnation 맥주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만든 특별한 맥주이기도 합니다. 보통 사용하기 드문 피트 위스키 배럴을 사용하였고 이 외에도 버번 위스키, 와인 배럴을 사용하여 총 6종을 출시합니다. 모든 맥주들은 무려 17도 알코올 도수를 가지고 있지만 그 도수와는 별개로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게 다채로우면서도 강렬한 캐릭터도 가지고 있어 현재까지도 수많은 맥주 애호가로부터 극찬을 받는 맥주 시리즈 입니다. 아래 제가 리뷰한 글도 있는데 조만간 다른 시리즈 리뷰도 올려야 겠네요. ㅎㅎ https://www.vingle.net/posts/4745914?q=zombination https://www.vingle.net/posts/4653635?q=zombination https://www.vingle.net/posts/4706818?q=zombination 모든 술에도 그렇듯이 항상 정상급 자리를 지키는 술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를 긴 시간 동안 유지하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트랜드는 매 순간 빠르게 변하하고 새로운 맥주는 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러한 시간 속에서도 Zombination 맥주는 여전히 정상급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많으로도 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고 운이 좋게도 이 맥주는 여전히 저에게 최고의 임페리얼 스타우트 자리로 남아 있습니다. 참 시간이 지나면서 술의 모습도 변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 맥주가 저에게 줄 수 있는 즐거움과 감동은 여전히 변함 없길 바라는 욕심도 생기는 맥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는 다음에 더 재밌는 맥주 이야기와 찾아뵙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마음 속 1등 술이 있나요?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후보 벽보 훼손 사건
"남성 취업 안될까봐" 신지예 선거벽보 찢은 30대 취준생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여성 후보들의 벽보를 찢은 남성은 여성 인권이 증진되면 남성의 취업이 어려워진다는 생각을 갖던 취준생으로 경찰조사에서 드러났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지난 6·13 지방선거에 출마한 녹색당 신지예 전 서울시장 후보와 대한애국당 인지연 전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 벽보를 찢은 혐의로 A(30)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28일 밝혔다. A씨는 지난 2일 오전 4시 30분쯤부터 약 2시간 30분 동안 서울 강남구 일대에서 신 전 후보의 벽보 20장과 인 전 후보의 벽보 8장을 찢은 혐의를 받고 있다. 과거 정신병 진단을 받은 적이 있으며, 현재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A씨가 경찰에 털어놓은 동기는 여성 인권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었다. A씨는 경찰조사에서 "여성 인권이 증진되면 남성의 취업이 어려워질 것 같았다"는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A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에서 영장이 기각됨에 따라 사건을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송치했다. 앞서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선거에 나선 신 전 후보는 지난 5일 수서경찰서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벽보 훼손 사건은 명백한 여성혐오"라고 주장하며 빠른 수사를 촉구했었다.
912명이 동시에 자살하게 만든 미국의 사이비집단.jpg
존스타운 집단자살사건 : 인민사원 집단자살이라고도 불리는 참사로 무려 918명이 동시에 목숨을 잃었다. 1978년 11월 18일 912명의 사람들이 독극물을 마시고 집단자살하는 괴이한 사건이 발생한다. 사망자 중 276명은 어린이였다. 사건의 주동자는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의 이름은 짐 존스. 사건이 발생하기 20여년 전... 1956년 6월 짐 존스는 인민 사원(Peoples Temple)이라는 인종 통합의 교회를 세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봉사 단체의 성격의 종교 지도자로서 출발했다. 시기가 50년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흑인과 백인을 구별하지 않겠다는 통합의 메세지는 확실히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 존스가 자신만의 교회를 생각하게 된 계기도 다른 교회의 흑인 차별 때문이라고 한다. 1966년 교세가 점점 거치는 중 짐 존스는 인디애나폴리스는 핵참화에 휘말릴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교인들에게 알린다. 따라서 짐존스와 교인들은 인민 사원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전한다. 존스는 공산주의에 심취한 자로서 모두가 공평하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회를 꿈꿨다. 따라서 모든 교인들의 재산을 교회에 바치게 하고, 교인들끼리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다. 교회가 완전히 존스의 통제하에 들어가자, 인민사원 교인들은 지역사회의 봉사에 힘을 썼고, 당연히 언론이나 지역사회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존스는 자신을 자주 예수와 같이 신격화했고, 교인들에게 곧 인류 멸망이 오게 될 것이니, 자신을 메시아로 따를 것을 요구한다. 1973년 짐 존스는 캘리포니아의 작은 커뮤니티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미국을 벗어난 자신만의 왕국을 꿈꾼다. 자신만의 왕국으로 선택된 곳은 남미의 가이아나로, 존스는 가이아나 정부로부터 땅을 빌리는데 성공한다. 교인들 중 일부를 소규모로 이주시키기 시작한다. 그러나 계속 존스 자신은 미국 땅에 머무른다. 1977년 미국 언론에서 남성 교인과의 변태 성행각과 신도 폭행, 그리고 기적치유의 사기 등 각종 전 신도의 증언이 수면에 떠 오르자 존스는 미국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폭로기사가 나오기 전 날, 본격적으로 교인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한다. 언론의 폭로 전에는 가이아나에 이주한 교인의 숫자는 50여명에 불과했지만, 폭로가 임박해서는 무려 수 백명이 한번에 가이아나로 이주하게 된다. 존스는 악이 없는 순수한 지상낙원이라 교인들을 꾀었지만, 도착한 곳은 열대 우림. 각종 부대시설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교인들은 돼지우리처럼 좁은 곳에서 한데 지내게 된다. 그리고 오두막은 성별로 나뉘어 수용되었고, 부부인 경우에도 예외없이 나뉘어 수용되었다. 가이아나에 도착한 교인들은 존스 타운 건설에 내몰리게 된다. 정글의 열기와 습기 속에 고된 노동을 11시간 넘게 지속하니 병이 안생길리 없는 법 거기다가 짐 존스는 거대한 스피커를 설치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설교를 했다고 하는데, 이 설교는 낮밤을 가리지 않아, 교인들이 잠을 설치게 했다고 한다. 일부 교인들은 존스타운을 지상낙원이라고 여겼지만, 현실의 고된 노동에 지쳐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존스는 탈출하면 원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협박을 하며 탈출을 막았고, 존스타운 주변을 무장경비로 봉쇄해 자신의 허락이 없으면 탈출이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1978년 11월 17일 사소한 시작이 비극을 낳게 되다. 미국에 남아있는 교인들의 가족의 요청과 존스타운에 관한 불길한 루머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캘리포니아 하원의원인 리오 라이언이 직접 조사차 존스타운을 방문하기로 결정한다. 캘리포니아 하원의원인 리오 라이언이 직접 조사차 존스타운을 방문하기로 결정한다. 하원의원은 NBC 방송국 직원과 교인들 가족 일부를 대동하고 존스타운을 방문했는데, 교인들은 리오 라이언을 웃음으로 맞고, 즐거운 것 처럼 행동을 하였지만,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실제 교인들 일부가 NBC 직원에게 쪽지를 통해 존스타운을 나가고 싶다는 의향을 전한다. 1978년 11월 18일 아침이 밝자 리오 라이언의원은 탈출 희망자와 함께 미국으로 귀환하려 하지만, 존스의 보복을 두려워해 교인들 중 소수 만이 탈출에 응한다. 라이언 의원과 수행단들과 함께 트럭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존스타운을 떠나 공항으로 떠난다. 일행이 탄 트럭이 공항에 도착했지만, 비행기가 준비가 덜 되어 바로 떠날 수가 없었다. 그 때 트랙터를 타고 나타난 존스타운 교인들에 의해 의원 일행은 기관총 세례를 받게 되고, 대부분이 그 즉시 목숨을 잃는다. 한편 존스타운의 짐 존스는 교인들을 모두 한데로 모이게 한다. 존스는 교인들을 향해 설교를 했는데, 공포감에 휩싸여 안절부절 못하는 것 처럼 보였다고 한다. 일부 교인들이 떠난 것에 화를 냈고, 라이언 의원 일행을 공격했다고 시인한다. 또한 존스는 이번 라이언 의원에 대한 공격에 따라, 존스타운은 안전하지 못 할 것이라고 교인들에게 얘기하며, 곧 미국 정부의 대규모 공격이 임박할 것이라고 교인들에 경고한다 "놈들이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면, 죄없는 아이들까지 죽일 것이다!" 존스는 이걸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자살이라는 혁명적인 행동이라고 하며, 교인 전체에 집단 자살을 얘기한다. 한 여신도가 다른 방법은 없겠느냐고 존스에게 물었으나, 다른 신도들의 항의에 의해 묵살된다. 곧 라이언 의원이 죽었다는 전갈이 전해오자, 존스는 더욱 급박해졌다. "놈들이 이 땅에 오게 되면 우리 아이들을 고문할 것이고, 우리 사람들을 고문할 것이고, 우리 노인들을 고문할 것이다. 우린 이걸 감당할 수 없다" 며 자살을 재차 권유한다. 존스는 신도들을 포도맛 쥬스에 청산가리와 발륨을 섞어 신도들에게 서둘러 마시게 한다. 유아와 아이들부터 먼저 마시게 했는데, 마실 수 없는 경우에는 주사기를 통해 입에 뿌렸다고 하며, 아이에게 주고 남은 음료수는 엄마가 마셨다고 한다 계속해서 독이 포함된 음료수가 돌려졌는데, 돌려지는 동안 먼저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일부 마시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총부리로 먹기를 강요했으며, 각자 죽는데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1978년 11월 18일 912명이 독극물이 포함된 음료수를 먹고 죽었고, 그 중 276명은 어린이였다. 정글이나 존스타운에 숨어있던 소수만 살아남았고, 공항에서 죽은 라이언 일행을 포함하면 총 희생자는 918명. 흔히 인민사원 집단 자살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희생자 중 276명은 어린이였으므로 존스타운 학살이 더 적절하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다. (어린이와 유아는 자살 불가) 주동자 짐 존스는 머리에 총을 맞고 발견되었는데, 내부자의 소행인지 아니면 자살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존스타운 참사는 미국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는  (자연재해 제외한)  가장 많은 사망자를 기록한 참사로 기억되고 있다.
야쿠시마/ 소설가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 속 공간'
안개가 걷힌 강마을의 전경. 일본 근대문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소설가 하야시 후미코가 묵었던 호텔 바로 옆에 있다. 일본 근대문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하야시 후미코 그녀는 야쿠시마에서 역작 ‘부운’(浮雲)을 썼다 그녀가 묵었던 호텔로비에서 강마을을 찍었다 # 지난해 5월과 6월, 일본의 외딴 섬 야쿠시마(屋久島)에서 열흘 가량 묵었다. 두 번째 방문인 6월의 어느 날, 나는 ‘산장호텔’이라는 이름의 숙소 로비에서 호텔 밖 창문을 열고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은 빨간 다리가 놓여진 강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호텔 로비는 5층. 나는 로비 창문을 열어젖히고 강을 뒤덮은 안개가 걷히길 1시간 째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 셔터에 손을 얹어놓은 채. 이윽고 비를 머금고 있던 안개가 서서히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이마를 서로 맞대고 있던 강가의 작은 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강 기슭에 몸을 묶은 작은 배들도 따라서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가 그라데이션처럼 밀려나고 맑은 강이 얼굴을 내밀었다. 빨간 다리를 걸어가면 하야시 후미코가 묵었던 산장호텔이 보인다. 때는 왔다. 며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사진은 테크닉 보다는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하지 않던가. 셔터 위에 얹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파인더속 뷰(view)를 맞춰나갔다. 아, 그런데 웬걸. 머리가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벌써 손은 셔터를 차르르~ 누르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니(네) 마음대로 하세요’라는 식으로 내버려두었다. # 남들이 보면 대단한 걸 찍는 전문가처럼 ‘사설’을 풀어 놓았는데, 사실 그런 사진 기교나 깜냥이 있지는 않다. 이 호텔을 사진 포인트로 잡은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호텔 로비의 한 쪽 벽에는 한 소설가의 삶을 담은 사진들이 붙어있다. 여성이다. 이미 68년 전에 죽었다. 그녀의 이름은 하야시 후미코(林 芙美子: 1903~1951). 일본 근대문학의 한 축을 이뤘던 소설가다. 하야시 후미코는 필생의 역작 ‘부운’(浮雲)이라는 소설을 이곳 야쿠시마에서 집필했다. 더 정확히는 이 산장호텔에서. 호텔입구에는 ‘하야시 후미코 부운의 숙소’라는 글이 쓰여 있다. 야쿠시마는 1993년 일본에서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수령 수천 년 된 삼나무와 이끼가 장관을 이루는 섬이다. 그 4년 뒤인 1997년엔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이곳을 배경으로 ‘원령공주’(모노노케히메)를 만들었다. 지금은 야쿠시마가 세계자연유산과 원령공주의 섬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훨씬 그 이전에는 하야시 후미코가 ‘부운’을 쓴 소설의 섬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됐다 # 독자들이 ‘강 사진 하나 찍는데 뭐 그리 기다릴 필요가 있나’라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야시 후미코 소설의 한 대목을 읽고 나면 ‘아~ 그렇구나’라고 고개가 끄덕여 질 것이다. 소개하면 이렇다. “야쿠시마는 한 달에 35일은 비가 내릴 정도이니까요.” 30일도 모잘라 거기다 5일을 더 붙였다. 비가 많이 내린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산장호텔 로비에 비치된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 ‘부운’ 소설 ‘부운’은 1949년부터 1951년 4월까지 3년간 일본 월간지 ‘풍설’(風雪)과 ‘문학계’(文學界)에 동시 연재되면서 완성됐다. 사생아로 태어난 하야시 후미코는 하녀, 노점상, 여공, 여급 등의 직업을 전전하면서 방랑하는 인생을 보냈다. 베스트셀러가 된 ‘방랑기’라는 작품도 있지만, 특히 죽은 해(1951)에 마무리된 ‘부운’은 그녀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 소설의 제목처럼 인생은 곧 ‘뜬구름’이니 말이다. 하야시 후미코는 특히 생생한 인물묘사가 특징이다. ‘부운’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12시, 시계가 울렸다. 도미오카(남자 주인공)는 아침목욕을 했다. 5, 6일 동안이나 목욕을 하지 못한 가난한 생활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코발트 타일이 붙은 작은 욕조 가득 뜨거운 물이 넘쳤다. 흰 외국 비누로 몸을 씻자 도미오카는 말라서 죽어간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작은 창으로 눈이 내려 쌓여 있는 것을 보자 도미오카는 방대하고도 위협적인 인간사회의 단면을 훔쳐본 기분이었다. 자신의 마음은 어디에도 없다. 눈이 내리는 넓은 들판을 목적도 없이 방황하고 있는 듯한 황량한 정취가 현실의 발바닥에 붙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쉭쉭하고 소리를 내며 가스에서 솥이 타고 있었다.> # 하야시 후미코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6월 28일, 4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추도식에는 아이를 업은 엄마, 직공 등 2천여 명의 여성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작품 대부분은 나루세 미키오(成瀨巳喜男)라는 걸출한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호텔 벽에 붙은 하야시 후미코 관련 자료. 일본 유명 문학상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와 나오키 산주고(直木三十五)를 기리는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만 있는 게 아니다. 가난한 여성의 삶을 살다간 하야시 후미코를 추억하는 ‘하야시 후미코상’도 있다. 한국과 일본에선 여성문학상을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지만, 하야시 후미코 만큼은 죽어서 ‘문학상’은 남겼으니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 하지만 하야시 후미코 문학상이 만들어 진 건 2014년에 불과하다. 권위있는 문학단체나 기관이 아닌 그녀의 출신지인 기타큐슈시가 제정했다. 문학상 중단편을 대상으로 시상하는데 연령, 성별, 국적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 #. 2019년 6월 3일 현재, 나는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6월 13일까지)을 열고 있다.하야시 후미코가 묵었던 호텔, 그 로비에서 찍었던 강마을, 야쿠시마의 삼나무 사진들이 서울 종로구 북촌의 한옥카페 삼청동 4차원에 전시돼 있다. 사진전인 만큼 사진들이 주인공이지만, 전시 공간 한 켠에 하야시 후미코가 쓴 ‘부운’의 한글 번역본(뜬구름)도 비치해 놓았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02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서양에 코르셋이 있었다면, 중국 여성들에게 존재했던 미의 상징 `전족`
요즘 페미니즘의 상징으로 서양의 '코르셋'이 이야기되길래, 약 1000년 이상 지속되었던 중국 여성들의 미의 상징, '전족'에 대해 소개하려구 해 전족이란? 10세기부터 20세기까지 거의 1000년 동안 중국 여성들에게 지속되어온 풍습으로, 여성의 발을 인위적으로 묶어 저렇게 작게 만드는 거야 이렇게 전족으로 만들어진 작은 발은 미녀의 조건이었고, 큰 발은 추녀의 대명사로 결혼에도 불리했어. 또 결혼을 하면 사람들이 신혼의 침실을 엿보고서는 여성의 발에 대해 품평했고, 시댁에선 발이 크면 며느리를 구박하는 구실로 삼았다고 해. 따라서 전족을 하지 않은 큰 발은 일족의 수치로 여겨졌고 결국 자살로 이어지는 심각한 경우도 있었어. 이 때, '작은 발'이란 얼만한 사이즈를 말하는 걸까? 이상적이고 가장 아름답게 여겨진 발 (세로)길이가 약 7.5~10cm 였다고 해 현대 여성들 발의 절반보다도 작다는 얘기지... (사진주의) 이렇게 작은 발을 만들기 위한 작업은 뼈가 아직 굳지 않은 3, 4세부터 시작됐다고 해. 엄지발가락을 뺀 나머지 발가락을 발 안으로 구부려서 천으로 감은 후 작은 신발을 신기고, 7, 8세가 되면 발등뼈를 탈골시켜 활처럼 구부린 채로 꽁꽁 묶어서 발 자체를 하이힐 모양으로 변형시키는 거지. 그러면 발뒤꿈치부터 발가락까지의 길이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대... (눕혀서 찍은 거 아님.. 까치발 든 것도 아님...) 당연히 고통은 말할 것도 없이 심했고, 열이 나고 마비가 돼서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참고 견뎌야 했어. 잘 때에도 붕대를 감아두기 때문에 비위생적이었고, 무엇보다도 걸어다니는 게 거의 불가능 했지. 전족을 경험했던 89세 할머니의 체험담 할머니의 모친은 우선 발허리가 솟아오르도록 발 밑에 직포기에 달린 사통을 넣고 발을 칭칭 감은 후 억지로 걷게 했다. 천천히 발허리가 부러지고 할머니는 근 한 달을 걸을 수 없었다. 다음으론 발이 썩는 것이 순서였지만 할머니의 발은 좀처럼 썩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깨진 접시 조각을 발바닥과 발허리 등 곳곳에 넣고 천으로 꽁꽁 동여맨 후, 발에 작은 신을 밀어넣고 걷게 했다. 접시 조각이 발을 파고들어 피가 전족 밖으로 흘러나올 정도였고, 발은 검게 썩어 들어가며 악취를 풍겼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하는 할머니는 당시의 악몽이 되살아난 듯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심지어 살아있는 벌레 십 여 마리를 전족 속에 넣기도 했다고.. 살을 물고 파고들던 벌레들이 죽고 벌레 사체와 접시조각, 피고름이 한데 뒤섞여 발에서는 엄청난 악취를 풍겼다. 그의 어머니가 하루 한 번씩 피를 닦아주었는데, 할머니는 자신의 발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전족은 이처럼 발의 성장을 멈추고 살을 썩게 만들어 작은 발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이런 비인간적인 풍습이 언제까지 유지되었을까? 195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폐지할 수 있었어. 고작 60년 전... 19세기 말-20세기 초, 전족에 대한 비판이 많이 등장했지만 1930년대에도 여전히 많은 문인들, 일반인들이 전족의 아름다움을 찬양했어. 1906년, 도쿄로 유학을 간 저우쭤신(루쉰의 동생)은 일본에서의 첫날 가장 신기하고 특이한 것을 자기가 묵고 있던 하숙집에서 여성이 "맨발로 집안을 걸어 다니는 것"이라고 할 정도였어. 그렇다면 여성들은 이렇게 고통스럽고 억압적인 전족을 무슨 생각으로 했을까? 과연 전족이 100% 여성들에게 강요된 것이었을까? 1) 20세기 초에 태어난 어떤 여성은, 아버지가 전족을 비판하여 전족을 풀라고 하자 "나는 방족(전족을 하지 않는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세치의 금련(전족)은 천족보다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라고 생각해 거부했다는 기록을 남겼어. 2) 또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태평천국운동에서는, 그들의 이념상 전족을 반대해서 마을에 전족을 한 여성들이 있으면 방족(전족을 하지 않는 것)을 하도록 했는데 여성들이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자살하기까지 했다고 해... 3) 전족 폐지가 결정될 즈음에는 다퉁이란 지역에서, 전족 존속을 주장하는 여성들의 청원 운동까지 일어났지. 결국 이 잔인하고 기이한 풍습에 여성들의 자발적 동참이 있었다는 거지... 아마 이 때의 여성들은 강요되어진 미의식에 길들여져  그것을 '자기 만족'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이 전족이 그냥 옛날옛적에 있었던 일일 뿐일까... 현대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는 것들은? 하이힐, 화장, 성형, 브라자 등등은 이것과 다를까? 우리는 왜 발이 아프고 때론 발이 변형되면서 하이힐을 신고 뼈를 깎고 살을 째며 과도한 성형수술을 하고 건강을 해쳐가면서도 무리한 다이어트를 할까? 우리가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하며 하는 것들은 정말 자기만족일까? 여성에게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가 이걸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든 것은 아닐까? 몇 십년 혹은 몇 백년 후, 우리 자손들은 연예인들의 무리한 다이어트 식단 기사를 보면서 저 하이힐을 신은 무대 사진을 보면서 야만적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 사카모토 히로코, <발에 관한 담론>, <<중국 민족주의의 신화>> 출처 : 쭉빵
상아없는 코끼리, 뿔 없는 코뿔소
세상에서 가장 크고 멋진 상아를 가지고 있는 코끼리 "슈퍼 터스커" 많은 사람들이 코끼리 하면 크고 웅장한 상아를 자랑하는 우두머리 코끼리와 그 주변의 수많은 크고작은 코끼리들을 떠올릴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커다란 상아를 가진 우두머리 코끼리를 슈퍼 터스커라고 부른다. 항공기를 타고 슈퍼 터스커들을 따라다니며 연구하고 있는 닉 할러 할러는 "코끼리 무리에서 슈퍼 터스커가 다른 코끼리보다 훨씬 더 존경받는 것을 볼 수 있다"며 "슈퍼 터스커가 코끼리 무리의 리더 역할을 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런 멋진 상아를 가진 슈퍼 터스커는 지금 지구상에 20마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밀렵꾼들 때문. 이들의 주 목적은 다름아닌 상아. 이렇게 뽑힌 상아들의 목적지는 대부분 중국이다. 중국에서는 코끼리 상아를 약재나 장식품으로 많이 구매하려 한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베트남이나 필리핀 등에도 많은 수요가 있는 모양이다. 밀렵꾼들의 코끼리 상아 채취과정은 매우 잔혹한데 트럭을 타고 코끼리 무리를 습격한 뒤, AK 소총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하며 도망치는 코끼리들을 따라다니고, 지쳐 쓰러져버린 코끼리의 상아를 전기톱을 이용해 갈아내서 뽑아버린다. 위 사진 속 코끼리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전기톱에 안면부를 갈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로는 주로 중국이나 미국, 유럽 등지의 부유층들의 유흥거리인 사냥 때문이다. 2017년 사타오2라는 이름의 슈퍼 터스커가 차보 트러스트에서 이런식으로 죽은 채 발견되었고, 한 트로피 헌터는 보츠와나의 가장 큰 슈퍼 터스커를 사냥하기 위해 5만달러를 지불하기도 했다. 할러는 코끼리들을 24시간 따라다니며 모니터링 하는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에, 이런 스포츠 트로피 헌팅이나 밀렵을 완전히 막을 구실이 없다는 점이 정말 안타깝다고 입장을 밝혔다. 참고로 상아 채취 목적이 아닌 스포츠를 위한 밀렵도 정말 심각한 문제인데, 짐바브웨의 국민 사자 라이온 킹 "세실" 또한 미국의 한 치과의사의 트로피 헌팅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크고 멋진 상아를 가진 코끼리들은 밀렵꾼들의 표적이 되어 대부분이 사냥당해 죽어버렸고, 반면 볼품없고 상품성이 떨어지는 상아를 가진 개체들만 밀렵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번식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인간에 의한 자연선택으로 야생 코끼리들의 상아가 점점 줄어들다 못해 소멸해가는 추세이다. 현재 국립공원에 생존해 있는 코끼리의 대다수는 작은 상아만을 달고 있으며, 심한 경우 아예 상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유전학적 측면에서도 거대한 상아를 가진 슈퍼 터스커들의 생존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코끼리의 상아 뿐 아니라 코뿔소의 뿔 역시 중국인들에게 인기있는 약재이다. 따라서 코뿔소도 뿔 채취를 위해 어마어마한 숫자가 밀렵당하고 있다. 코뿔소는 최근에 멸종한 종도 몇 종 있는데다가, 남아있는 모든 코뿔소들이 전부 다 멸종 위기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뿔소의 뿔인 서각에 대한 수요가 많아 엄청난 숫자가 밀렵당해 죽고 있는 것. 남아공에서는 이러한 불법 밀렵을 완전히 막을수 없다 판단해 서각 거래를 합법화 하기도 했다. 역효과가 될 거란 우려도 많지만, 이전에 코끼리 상아 거래를 합법화 하자 상인들이 발벗고 나서 코끼리 개체수를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선례가 있어 조금 더 두고봐야 할 듯 싶다. 뿔이 잘린 채 발견된 인도의 코뿔소 사체들 남아프리카 노스웨스트 주에서 발견된 산채로 뿔이 잘리고 버려져 울고있는 새끼 코뿔소 코뿔소 서각 채취 역시 코끼리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잔혹하다. 밀렵꾼들은 코뿔소에게 소총을 난사한 뒤 전기톱으로 뿔을 도려낸다. 이 과정에서 코뿔소가 움직이거나 저항하면 전기톱으로 안면을 갈아내 버리기도 한다. 이 때문에 각 국립공원에서는 코뿔소들을 보이는대로 포획하여 뿔을 절단한 뒤 풀어주고 있다. 이렇게 되면 상품성이 떨어져버린 뿔 때문에 밀렵꾼의 표적에서ㅠ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뿔이 잘려버린 코뿔소는 자기방어 수단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사자나 호랑이 같은 대형 고양잇과 포유류에게 매우 취약해 질 뿐 아니라 동족과의 경쟁에서도 밀려나기 십상이다.. 또한 코끼리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큰 뿔을 가진 코뿔소들이 전멸해 버리면 작은 뿔의 코뿔소들만 살아남아 자연선택으로 코뿔소의 뿔들도 점점 없어져 버릴 것이다. 실제로도 코뿔소들의 뿔은 점점 작아지고 있는 추세다. 이대로 가다간 코소만 남아버리고 말 수도... 인도에서는 조금 극단적인 방법으로 국립공원에서 코뿔소 밀렵을 시도하려는 인원은 전부 사살해 버리겠다고 발표했는데, 이후 코뿔소 밀렵 시도가 많이 감소한 것으로 보아 나름 성공적인 대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에서는 정말 황당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는데, 밀렵꾼들이 야밤에 동물원에 침입해 흰코뿔소의 뿔을 잘라간 사건이 있었다. 이 불쌍한 코뿔소의 이름은 "뱅스" 였는데 밀렵꾼들은 뱅스에게 총을 쏴서 죽여버린 뒤 뿔을 잘라서 도주해 버렸다. 뿔 하나는 완전히 절단됐고 나머지 하나는 반쯤 잘리다 만 상태였다고 한다. 북부 흰코뿔소 최후의 개체들 흰코뿔소의 두 종류중 하나인 북부 흰코뿔소는 사실상 멸종 상태이다. 수컷은 이미 죽어버렸고 현재는 모녀관계인 암컷 둘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행이 이들은 체코, 독일, 수단 등등 국제 동물원들의 주도로 남부 흰코뿔소를 이용해 복원사업을 추진중이다. 이는 꽤나 노력이 많이 들어가서 북부 흰코뿔소의 배아를 만들어 낸 적 까지 있다. 그러나 21년 마지막 남은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프로젝트에서 은퇴하면서 복원계획의 미래는 조금 어두워 졌다. 아프리카 코끼리와 대치중인 흰코뿔소 아프리카 평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행복하고 자유로운 천국이 아니다. 아프리카 국립공원의 모든 동물들은 언제든지 밀렵꾼들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들을 막기 위한 역량은 언제나 항상 부족하다. 그러니 동물원들을 없애고 동물들을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기 전에, 동물들을 보낼 자연환경의 안전성부터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싱글벙글지구촌갤러리 [//]푸르덕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