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rydary
10,000+ Views

과학 한국을 이끈 역사 속 명저


어느 분야에서든 뛰어난 두뇌를 가진 우리 한국인의 자부심을 느끼게 만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문화재에 대한 재해석이다.
건축학자이신 이종호님이
왕오천축국전, 칠정산, 산가요록, 표해록, 동의보감,자산어보, 대동여지도, 지봉유설등에 대한 위대한 문화재적인 가치와 저술 배경, 역사적인 내용들을 살펴 보고,
우리들이 잘 못 알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도 믿을 만한 역사 문헌들과 논문을 통한 증명도 하고 있다.

많은 명저중에서 《규합총서》를 쓴 빙허각 이씨의
음식에 대한 도 5가지를 살펴보자.
심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요즘 우리네들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반성해야 할 부분들도 많은 듯 하다.

1.내 눈앞에 있는 이 음식들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여기 놓였는지를 생각해보라.
밭갈고, 씨 뿌리고, 거두고, 찧고, 까불고,요리하기까지 한 사람이 먹는 것은 열 사람이 애쓴 것이므로 어찌 아끼지 않겠는가?

2. 음식을 먹기 전에 자기 할 도리를 다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어버이를 섬기고, 나라에 충성하고, 스스로 몸을 닦아 이름을 떨쳤는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하지 못했을 때 어찌 맛을 탐할 수 있겠는지 반성하라.

3.탐내는 마음을 막아 참다운 성정을 쌓아야 한다.
좋은 음식을 탐내고, 맛없는 음식에는 상을 찌푸리고, 배불리 먹을 생각에 마음을 흩뜨려서는 참된 심성이 길러지지 않는다.

4. 모든 음식에는 저마다의 영양과 기운을 북돋우는 힘이 있으니, 음식 맛에 지나치게 취하지 말고 약처럼 먹으라.

5.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을 다 해 덕을 쌓지 않는다면 어찌 맛있는 음식을 탐할 수 있겠느냐.

(간병 도중에 병원 내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은 책이다.)

Comment
Suggested
Recent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그의 끝을 기리며, 영화 '말콤x' 후기/리뷰/해설 [5분고전겉핥기]
후우 요즘 시험기간과 과제 덕분에 숨막혀 죽겠네요ㅋㅋ 빨리 방학해서 하고 싶은 거 몽땅하구 보고 싶은 영화 몽땅 보고 싶네요오오오오 조금만 더 힘내잣 오늘의 영화는 '스파이크 리'의 또 다른 랜드마크작 '말콤x'입니다. 말콤x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권운동가로 흑인의 권리와 보호를 위해 삶을 바친 위인이죠. 사실 그는 태어나고 청년이될 때까지는 격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약과 불법사업, 매춘에도 손을 댈 정도로 방탕한 삶을 이어갔죠. 그런데 어느날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가 종교에 관련된 흑인 동료의 말에 감명을 받게되고 밤낮으로 공부에 매진해 그는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나와서는 이슬람 운동단체에 들어가 명성을 쌓고 사회로부터 큰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는 그 이후 진정으로 흑인의 인권을 위해 투쟁했고 주위에 위협해도 절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마틴 루터킹 주니어와 달리 그는, 자기방어를 위한 폭력은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며 긴 시간동안 억압받고 당하기만 했던 흑인들이 당당하게 일어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흑인 사회 내에서 그를 안 좋게 본 세력에 의해 그는 이른 나이에 살해를 당하죠. 그의 성이 x인 이유는 노예습성이 계속되온 흑인의 과오를 벗기위해 진정한 흑인으로서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미지수를 뜻하는 x를 사용했다고 하네요. 그는 진심으로 인류를 사랑했고 흑인을 위해 싸웠지만 오히려 그 흑인들의 손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비운의 영웅이라고 봅니다. "어떤 수단이라도 필요하다면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의 다짐은 흑인이 동등한 인격체로 완전히 대우받는 그 날이 오려면 얼마나 더 큰 갈등과 비극이 있어야할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을 줍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인종 간의 대립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까요, 그가 더 오랫동안 살아남아 인권을 위해 싸웠다면 지금의 상황은 달라졌을까요? 죽는 그 순간까지 가슴을 폈던 그를 기리며 적어봅니다. 영화 '말콤X'였습니다.
[펌](스압) 냉혹한 벌거숭이쥐의 세계
저번에 오리너구리를 존나 특이한 새끼라고 소개한 적이 있는데 사실 그 오리너구리만큼이나 특이한 포유류가 하나 더 있다 존나 와꾸가 비참하기가 이루말할수 없을 정도라 미디어에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얘는 진짜 지구 생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능력으로 떡칠한 사기캐다 찍-찍- 이 새끼의 이름은 '벌거숭이두더지쥐'라고 한다. 정말 충격적인 와꾸다. 이름만 봐도 대충 어떤 생물인지 짐작은 갈 건데 일단 벌거숭이란 이름답게 전신 탈모에 시달리는 네츄럴본 탈모충들에다 두더지라는 이름답게 눈깔도 거의 멀었고 평생 흙만 파먹고 사는데다 쥐라는 이름답게 쥐새끼다 이것만 보면 모든 구린 특성만 찍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랬다면 구글이 얘네를 연구하지도 않았을 거다 뜬금없이 구글이 왜 얘를 연구하냐면 이 새끼가 인류한테 불로장생의 비밀을 풀어줄 지도 모르는 개쩌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벌거숭이쥐와 비슷한 덩치의 사촌인 쥐들은 길어야 3,4년 사는게 고작이다. 예외는 있지만 생물은 대게 덩치가 작을수록 최대수명도 짧은 편이다. ㅈ만한 쥐들이 빨리빨리 죽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덩치가 작을 수록 신진대사가 활발하고 그만큼 수명이 빨리 소모되니까 근데 벌거숭이두더지쥐는 30년을 산다. 동족들보다 10배를 넘게 산다. 인간으로 치자면 벌거숭이쥐들은 800년을 넘게 사는 거다. 또 개쩌는게 단순히 오래사는 것만이 아니라는 거다. 사실 이쪽이 중요하다. 위의 그래프는 나이에 따른 각종 동물들의 사망률을 나타낸 그래프다 문과충들을 위해서 설명하자면 나이가 많을수록 사망률이 폭증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타낸 그래프다. 까놓고 말해서 20대 청년이랑 80대 노인이랑 누가 더 죽을 확률이 높겠냐? 당연히 후자지. 그런데 맨 위의 벌거숭이쥐를 보자. 방금 태어난 신생아쥐도 혈기로 넘치는 젊은쥐도 늙어죽어가는 노년쥐도 모두 사망률이 비슷비슷하다. 뭔뜻이냐면 이 새끼들은 늙질 않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벌거숭이두더지쥐들은 이거 면역이라고. 안 늙어. 언제 죽어도 그냥 사고사임.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면 벌거숭이두더지쥐들은 DNA가 늙으면 그냥 DNA를 새걸로 갈아버리는 능력이 있기 때문임 근데 더 놀라운게 뭐냐면 저 수명30년이란 것도 확정이 아니라는 거임 왜 수명을 30년이라고 했냐면 벌거숭이두더지쥐의 연구가 시작된게 30년 전인데 그 30년 전에 잡아서 연구한 표본들 중에 아직도 쌩쌩하게 나이먹고 있는 놈들이 있거든 한마디로 이 새끼들 최대수명이 언제까지 늘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임. 제일 처음에 잡은 벌거숭이두더지쥐가 35살이니까 20년 뒤에도 살아있으면 최대수명은 55살이 되는 거지 동족들보다 10배 가량 오래사는 것도 모자라 그 기간동안 늙지도 않는다니 쥐새끼계의 엘프가 따로 없다 생긴건 골롬이라도 능력은 레골라스임 저 수명만으로도 벌어둔 돈은 많고 뒤지기는 싫은 전세계 금수저들이 침흘리면서 관심가질만한데 이 새끼의 능력은 이제 시작임 벌거숭이쥐는 암 면역인 유일한 포유류다 암이 얼마나 암같은 새끼냐면 유전자 돌연변이로 발생하는 복불복 질병이라 유전자를 가진 동물이면 절대 피해갈 수 없는 좆같은 질병이라는 거다 인간은 물론이고 토끼부터 시작해서 흰긴수염고래까지 암을 피할 수 있는 고등생물은 지금까지 없었음 근데 벌거숭이두더지쥐는 암 면역임 금수저 새끼들 눈 돌아가는 소리 들리냐 불로장생에 암 면역이랜다 암-암? 암은 나약한 노예들이나 걸린다, 그래-그래! 그것도 모자라 벌거숭이두더지쥐들은 고통을 안 느낀다 피부세포에서 통증을 전달하는 펩타이드가 아예 없거든 노화면역 암면역 통증면역 벌써 3연타 찍었음 게다가 얘들은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기까지 하다 원래 지하에서 사는 놈들이라 그런지 기괴할 정도로 생존능력이 높은데, 보통 인간은 산소가 10% 이하인 환경에선 바로 골로 간다. 산소 농도가 5% 아래면 5분도 못 버틴다 근데 벌거숭이두더지쥐들은 10%는 커녕 5%짜리 극단적인 저산소환경에서도 5시간은 너끈하게 활동한다. 심지어 산소가 아예 빠구난 0% 무산소 환경에서도 18분 동안은 살아남을 수 있다. 더 웃긴게 뭐냐면 저 18분도 뒤진게 아니다. 18분 지나니까 심장 멈추긴 했는데 시체인줄 알고 다시 공기 중에 방치하니까 다시 되살아났다. 미친 놈들임. 노화면역 암면역 통증면역 무호흡저항 벌써 트레잇이 꽉꽉 차서 터질려고 그런다 이러니 금수저새끼들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얘네를 지켜보고 있다. 부작용으로 탈모 좀 오면 어떠냐 암 안 걸리고 오래 살 수 있는 엘프가 될 수 있다는데 탈모있는데 오래 살아서 뭐하냐고 묻는 풍성충들은 니가 언제까지 풍성할지 어디한번 지켜보자 근데 이 새끼들은 그 특성을 제외하고 생존양식이야말로 제일 특이한 놈들이다 일단 벌거숭이두더지쥐는 포유류 주제에 변온동물임 그래서 3시간에 한 번씩 밥 먹지 않으면 굶어뒤지는 설치류 친척들이랑 다르게 항상 밥처먹는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지 않음 쥐들이 금방금방 굶어뒤지는 이유가 높은 신진대사 때문에 체온 유지를 빡세게 해야 되기 때문인데 벌거숭이들은 응 좆까 이러고 체온유지를 쿨하게 포기해버렸거든 그 때문에 움직임은 좀 느려도 굳이 많이 먹지 않아도 되고 오래 안 먹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여유로운 슬로우 라이프를 얻었다 뭣보다 제일 신기한게 벌거숭이두더지쥐들은 포유류 주제에 곤충이랑 똑같은 군집생활을 한다는 거임 포유류 중에 무리생활을 하는 종은 많지 근데 벌거숭이쥐들은 그런 어설픈 무리생활이랑 차원이 다른 완벽한 계급사회 군집생활을 함 벌거숭이두더지여왕은 수컷 여러마리를 데리고 하루종일 교미만 하면서 출산하는 씬나는 라이프를 즐김. 벌거숭이두더지병정은 큰 덩치를 가지고 굴을 습격하는 적들을 몰아냄. 벌거숭이두더지노가다꾼은 이빨이 크게 자라서 땅굴을 파고 흙을 바깥으로 옮기고 식량을 캐옴. 그리고 수컷 몇 마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암컷임. 근데 새끈한(어디까지나 지들 기준으로)수컷들은 오로지 여왕이랑만 교미할 수 있음. 나머지 암컷쥐들은 노처녀인것도 서글픈데 아예 자궁이 막힌 불임들임. 여왕이 호로몬을 분비해서 암컷쥐들의 난소를 영원히 미성숙상태로 만들거든. 여왕이 죽기 전까지는 근육 빵빵한 암컷병정쥐도 노가다암컷쥐도 새끼를 못 만듬. ㅅㅂ 안 그래도 불로장생 종족이라 언제 뒤질지도 모르는데 여왕쥐는 즐기면서 상황에 따라 출산을 하면서 개체수를 조절함.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냐? 맞음 딱 개미들이 사는 방식임 도대체 어떻게 벌거숭이두더지쥐가 저런 면역능력을 가지면서도 개미들과 똑같은 생존방식을 가지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벌거숭이두더지쥐들은 동아프리카에서 사는데, 적게는 70마리에서 많게는 300마리까지 모여서 지하도시를 이루고 살아감. 근데 대자연의 코미디가 여기서 또 시작된다. 불로장생 암면역 통증면역 호흡면역이라는 개쩌는 특성까지 가지고 무리생활이라는 메리트까지 있는데 정작 벌거숭이두더지쥐들은 그 동네 생태계에서 최하위라는 거임 특성만 보면 전지구를 정복해도 이상하지 않은 놈들이 왜 동아프리카에서 찌질대다고 있냐면 왜냐면 동아프리카엔 전통의 설치류 담당 일진인 파충류가 개 많기 때문임 얘들같은 쥐엘프들과 흙수저 쥐들의 공통점이 뭐냐면 파충류 빠따 한 방이면 골로간다는 거야 쥐가 파놓은 동굴로 쓱쓱 들어가서 다 처먹고 나올 수 있는 팔다리없는 뱀부터 시작해서 쥐이빨로는 절대 안 뚫리는 비늘로 무장한 육식성 도마뱀들한테 벌거숭이두더지쥐들의 엘프 도시는 그냥 냉장고에 불과함. 수명길고 통증 안 느끼고 호흡 안 해도 살 수 있으면 뭐하냐 배고픈 뱀새끼는 그딴거 신경 안 씀 벌거숭이두더지쥐는 땅파는데 써먹는 길쭉한 이빨 빼면 방어수단이 전무함. 그리고 당연히 이걸로는 파충류의 피부에 기스도 못낸다. 뱀 한 마리가 둥지에 쳐들어오는 순간 그 날로 벌거숭이 도시 하나가 끔살당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암만 노화면역 질병면역 통증면역 무호흡 특성 같이 면역특성 다 찍어놔도 정작 물리데미지 방어 못하면 그냥 ㅈ되는 거야 어떻게 보면 자연도 참 공평하다 [출처 - 디시인사이드 고질라맛스키틀즈] 왜 난 걍 귀엽게 생긴거같지
[맥주]: 10년 가까이 유럽 최정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맥주 - Zombination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뭔지 모를 이유로 1주일 가까이 빙글 접속이 안되었다가 인제야 다시 접속하게 되어서 후다닥 카드를 쓰고 있네요 ㅎㅎㅎ (일해라 빙글!!) 오늘은 아주 특별한 맥주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이번에는 평소처럼 하나의 맥주를 소개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시리즈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2014년에 출시하여 맥주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맥주이자 현재까지도 여전히 유럽 최정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벨기에 맥주 Zombination 맥주입니다. Zombination 맥주는 무려 유럽 9개 양조장이 협업하여 만들어진 특별한 맥주인데요. 벨기에 양조장 De Struise Brouwers 중심으로 벨기에- Brouwerij Alvinne, 영국의 Magic Rock, Beavertown, Brodies 양조장, 네덜란드의 Kees Bubberman, De Molen. 노르웨이의 Haandbryggeriet 그리고 스폐인의 Naparbier가 합심해 만든 맥주입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맥주를 소개 시켜드렸지만 이렇게 많은 양조장이 협업하여 만든 술 자체를 찾는 것도 참 쉽지 않을 거 같네요. 해당 맥주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스폐인 바틀샵 사장 가브리엘 Gabriel Bocanegra 의해서 만들어졌는데요. 원래 그는 스폐인에서 맥주 글을 쓰는 블로거였지만, 유럽에서 바틀샵을 운영하면서 유럽 전역 맥주 양조사와 넓은 인맥을 쌓았고 그의 바틀샵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벤트 성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양조사들을 초대해서 만든 맥주가 바로 Zombination입니다. 해당 맥주 시리즈는 스트루이스의 Black Damnation 맥주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만든 특별한 맥주이기도 합니다. 보통 사용하기 드문 피트 위스키 배럴을 사용하였고 이 외에도 버번 위스키, 와인 배럴을 사용하여 총 6종을 출시합니다. 모든 맥주들은 무려 17도 알코올 도수를 가지고 있지만 그 도수와는 별개로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게 다채로우면서도 강렬한 캐릭터도 가지고 있어 현재까지도 수많은 맥주 애호가로부터 극찬을 받는 맥주 시리즈 입니다. 아래 제가 리뷰한 글도 있는데 조만간 다른 시리즈 리뷰도 올려야 겠네요. ㅎㅎ https://www.vingle.net/posts/4745914?q=zombination https://www.vingle.net/posts/4653635?q=zombination https://www.vingle.net/posts/4706818?q=zombination 모든 술에도 그렇듯이 항상 정상급 자리를 지키는 술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를 긴 시간 동안 유지하는 것은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트랜드는 매 순간 빠르게 변하하고 새로운 맥주는 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러한 시간 속에서도 Zombination 맥주는 여전히 정상급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많으로도 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고 운이 좋게도 이 맥주는 여전히 저에게 최고의 임페리얼 스타우트 자리로 남아 있습니다. 참 시간이 지나면서 술의 모습도 변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 맥주가 저에게 줄 수 있는 즐거움과 감동은 여전히 변함 없길 바라는 욕심도 생기는 맥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는 다음에 더 재밌는 맥주 이야기와 찾아뵙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마음 속 1등 술이 있나요?
어디서 살 지가 고민된다면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글.jpg
도시와 야망 - 폴 그레이엄 위대한 도시들은 야망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도시 속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수백 가지의 미묘한 방식으로 도시는 메세지를 보낸다. 당신은 더 할 수 있다, 당신은 더 노력해야 한다. 놀라운 것은 이 메세지가 도시마다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뉴욕은 다른 무엇보다도 “당신은 돈을 더 많이 벌어야한다”고 말한다. 물론 다른 메세지들도 있다. 당신은 더 힙해야 한다. 당신은 더 잘생기거나 예뻐야한다. 하지만 가장 분명한 메세지는 당신은 더 부자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스턴이나 특히 캠브리지 (*하버드와 MIT가 있는 도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당신은 더 똑똑해야한다”는 메세지를 보내기 때문이다. 맨날 읽어야지 하고 마음만 먹었던 그 책을 어서 읽어라, 하는 그런 메세지. 도시가 어떤 메세지를 보내는가는 예상을 벗어날 때도 있다. 실리콘밸리 역시 똑똑한 사람들을 존경하지만, 실리콘밸리가 보내는 진짜 메세지는 “당신은 더 영향력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이건 뉴욕이 보내는 메세지와는 사뭇 다르다. 뉴욕에서도 영향력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뉴욕은 누가 1조원을 그저 상속받았을 뿐이라고 해도 그걸 퍽 대단하게 여긴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몇 부동산 중개업자 빼고는 별로 그걸 대단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건 당신이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냐는 점이다. 실리콘밸리의 사람들이 구글의 창업자인 래리와 세르게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들이 부유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구글을 지배하고, 구글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가진다는 데에 있다. _____ 도시가 무슨 메세지를 보내는지가 중요하기나 할까? 내가 겪은 바로는, 아주 많이 중요하다. 당신이 위대한 일을 하고자하는 굳건한 의지가 있다면 환경이 어떻든 그걸 초월할 수 있다고, 당신이 어디에서 사는가는 몇 퍼센트의 영향 밖에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인 근거를 살펴보면, 어디에서 사는가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위대한 일을 했던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그 일이 일어났던 지역들에 뭉쳐 살았었다. 나는 항상 캘리포니아의 버클리가 내게 이상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날씨가 좋은 버전의 캠브리지일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몇 년 전 마침내 버클리에 살게 됐을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버클리는 “당신은 더 나은 삶의 질을 가지고 살아야한다”라는 메세지를 보낸다. 버클리에서의 삶은 매우 문명화되어있다. 아마 북유럽에서 미국으로 온 사람은 버클리가 가장 고향같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버클리에서 야망은 별로 활발하지 않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 좋은 날씨와 살기 편한 환경이 삶의 질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도 당연하다. 날씨가 좋은 캠브리지는 캠브리지와 본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캠브리지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어쩌다보니 캠브리지에서 살게 된 게 아니다. 캠브리지에 살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캠브리지는 물가가 비싸고 약간 지저분하고 날씨도 자주 나쁘다. 그러니 캠브리지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물가가 비싸고, 지저분하고, 날씨가 별로인 곳에 살더라도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살고싶다고 결정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_____ 도시는 당신이 창문 너머로 보게되는 광경이나 엿듣게 되는 대화를 통해서, 마치 실수처럼 당신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이런 것들은 당신이 먼저 찾아나서는 것도 아니지만, 또 원한다고 해서 음소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90년대 후반 실리콘밸리로 이사한 한 친구가 그 곳에 살면서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게 엿듣는 대화의 수준이 별로라는 점이라고 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그 친구가 일부러 사차원같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대화를 엿듣는 게 재미있을 수는 있지만, 엿듣는 대화의 질이 어디서 살 지를 결정할만큼 중요하다는 말인가? 이제는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해한다. 일상에서 엿듣게 되는 대화가 바로 당신이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_____ 아무리 의지가 강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받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이 무조건 도시가 보내는 메세지대로 살게 된다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는 소중한 일이지만 주위의 누구도 그 일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의욕이 꺾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의욕을 얻는 것과 잃는 것 사이의 불균형은 돈을 벌거나 잃는 것 사이의 불균형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주로 돈을 잃는 것을 과대평가한다. 만 원을 벌기 위해서보단 만 원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본인에게 강제로 내려진 일을 하지 않을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꽤 있지만, 주변의 누구도 신경쓰지 않을 일을 본인의 의지만으로 할 수 있을만큼 강한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적다. 어떤 의미에서 여러 야망은 공존할 수 없고 사람들의 동경이라는 것은 제로섬 게임이나 마찬가지기에, 주로 하나의 도시는 하나의 야망에 집중한다. 캠브리지가 지식의 수도인 데에는 그냥 똑똑한 사람들이 그 곳에 집중되어 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지식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다른 요소가 없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뉴욕이나 실리콘밸리에서 교수들은 이류 시민처럼 대우받는다. 물론 그러다 뉴욕의 경우 헤지펀드, 실리콘밸리의 경우 스타트업을 시작하면 대우는 달라진다. 뉴욕 시민들은 금융위기 이후로 뉴욕이 실리콘밸리에 대항하는 스타트업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궁금해 해왔는데, 이 논리가 어느정도 답변을 제시해준다. 뉴욕은 실리콘밸리 규모의 스타트업 중심지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뉴욕에서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본인이 이류 시민인 것 같이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뉴욕에 사는 사람들이 동경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이미 따로 있으니까.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창업자들 중 회사가 성공하기 전과 똑같이 검소하게 사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대학원생 때 몰던 낡은 차를 몰며, 똑같이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만약 뉴욕에서 이랬다면, 사람들에게 개무시를 당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의 고급 레스토랑에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들어서도 직원들은 당신을 친절하게 대한다. 당신이 어떤 사람일 줄 알고 막 대하겠는가? 하지만 뉴욕에서는 다르다.  _____ 모든 도시가 메세지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야망의 중심지가 된 도시들만 메세지를 보낸다. 그리고 그 도시에 직접 살지 않고서 그 도시가 어떤 메세지를 보내는 지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내가 뉴욕, 캠브리지, 그리고 실리콘밸리가 무슨 메세지를 보내는지 아는 건 이 도시들에 몇 년씩 살아봤기 때문이다. 워싱턴DC (*미국 정치의 중심)와 LA (*할리우드가 있는 도시)도 메세지를 보내는 것 같은데, 그 메세지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만큼 오래 살지는 않았다. LA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건 명예인 것 같다. 그 곳엔 수요가 가장 높고 인기가 가장 많은 A등급 사람들의 명단이 존재하고, 그 명단에 오르거나 그 명단에 오른 사람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가장 존경받는다. 결국 그 기저에 있는 메세지는 뉴욕과 맥락이 비슷하지만, 구분을 하자면 LA에서는 외면의 아름다움에 두는 비중이 더 높다. 워싱턴DC가 주는 메세지는 당신의 인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당신은 내부자가 되고 싶다. 사실 이건 LA와 비슷하다. A급의 사람들 명단이 있고, 그 명단에 오르거나 그 명단의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다는 것. LA와 다른 점은 그 A급 명단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인데, 사실 그것조차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식에 대한 야망이 캠브리지만큼 큰 곳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영국의 옥스포드나 영국의 캠브리지는 코넬 대학교가 있는 이타카나 다트머스 대학교가 있는 하노버처럼 느껴진다. 분명 지식을 중요시하는 메세지가 있지만, 캠브리지만큼 강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파리도 한 때는 지식의 중심지였다. 1300년대에 파리를 방문했다면, 지금 캠브리지가 보내는 메세지와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작년에 파리에 어느 정도 살았을 때, 파리 시민들의 야망은 더이상 지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 파리가 보내는 메세지는 “모든 일을 스타일리쉬하게 하라”는 것이다. 사실 꽤 마음에 드는 메세지였다. 내가 살아본 곳 중 사람들이 정말 진정성있게 예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은 파리 뿐이었다. 미국에서 예술품 원작을 구매하는 건 몇몇의 부자들 뿐이고, 예술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조차 예술품을 예술가의 브랜드 네임과 결부시켜 판단한다. 하지만 해질녘 파리를 걸으면 사람들이 미술작품을 보는 것에 정말 신경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파리의 시민들이 예술에 가장 관심이 많다면, 왜 뉴욕이 예술 산업의 중심이 된 것일까? 왜냐면 20세기부터 브랜드로서의 예술과 상품으로서의 예술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뉴욕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들이 있는 곳이고, 그들이 예술로부터 원하는 것은 바로 브랜드다. 그리고 브랜드의 가치는 다른 브랜드들과 구분되는 스타일만 있다면 충분하기에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가까운 곳, 즉 뉴욕의 상품을 사용하면 된다. _____ 그래서 위대한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모두 대도시에 살아야 하는 걸까? 아니다. 모든 위대한 도시는 어떤 종류의 야망에 불을 지피지만, 그런 곳이 도시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들은 몇 명의 유능한 동료들만으로 추진되기도 한다. 도시가 제공하는 건 관객이고 또 비슷한 사람들과의 연결 통로다. 수학이나 물리 같은 학문에서 이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런 학문에서 중요한 관객은 같은 수학자와 물리학자들 뿐이고, 이 학계에서 능력을 판단하는 건 꽤나 간단해서 인사팀이나 입학처에서 능력있는 사람을 잘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필요로 하는 건 좋은 동료 학자들이 있는 학과일 뿐, 그게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술이나 문학, IT 같은 분야에서는 환경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런 업계의 종사자들은 모두 편리하게 몇몇 명문대 학과나 연구실에 모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건 이 분야에서 재능을 판가름하는게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돈을 내고 소비하는 업계이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 교직이나 연구에 몸담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더 무질서한 업계일수록 좋은 도시에 있는 게 도움이 된다. 주변의 사람들 역시 당신이 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기분이 의욕을 자극하고, 또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찾는 데에 도시의 규모와 구조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인상파 화가들이 이런 현상을 보였다. 인상파 화가들은 프랑스 각지에서 태어났고 (인상파 화가들의 대부인 피사로는 캐리비안에서 태어났다) 또 프랑스 각지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각자의 전성기에 그들은 모두 파리에서 함께 활동했다. _____ 무엇을 하고 싶은지 확고하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어디인지 아는 게 아니라면, 아마 젊을 때 여러 곳에 살아보는 게 가장 안전할 것이다. 그 도시가 메세지를 보내는지, 보낸다면 어떤 메세지를 보내는지는 그 곳에 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살아보기 전 당신이 했던 상상은 주로 틀렸을 것이다. 나는 25살 때 예술의 중심지에 사는 것을 꿈꾸며 피렌체로 갔다. 살아보니 예술의 중심지인 피렌체에 살고 싶었다면 450년 전에 왔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도시가 아직도 번영하고 있는 야망의 중심지라고 해도, 그 도시가 보내는 메세지가 정말 당신의 마음을 울릴지는 그 메세지를 직접 느낀 후에야 알 수 있다. 내가 처음 뉴욕으로 이사했을 때 나는 매우 들떠있었다. 충분히 들뜰 만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그 곳에 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항상 뉴욕 속에서 캠브리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보니 내가 찾는 캠브리지는, 뉴욕에서 비행기로 한시간을 가야 있는 진짜 캠브리지밖에 없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16살에 이미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야망 있는 아이들은 야망의 대상을 정하기도 전부터 야망을 먼저 느낀다. 뭔가 굉장하고 위대한 일을 하고싶다는 걸 알지만, 가수가 될 지 외과 의사가 될 지는 정하지 못한 것이다. 이게 잘못 됐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런 근본적인 야망을 가졌을 때는 이곳 저곳에 직접 살아보고 또 아니다 싶으면 떠나며 시행착오를 통해 어디에 살 지를 결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정말 집처럼 느껴지는 곳을 찾았을 때, 비로소 자신이 어떤 종류의 야망을 가지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 수학 물리학 얘기할 때 포공이랑 카이스트 생각나서 소름... 나는 서울 밖에 잘 모르지만 뭔가 종로/광화문/강남은 뉴욕, 가로수길은 LA 느낌... 판교가 실리콘밸리 같은 느낌이려나 싶음
영화 '리버티 하이츠' 인종과 종교에 대하여 [5분고전겉핥기]
과제로 영화는 보고 있지만 최신영화를 못 보는 게 많아 슬프다ㅠㅠ 그래도 나름 영화가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어서 참는다... 방학 때는 참지 않겠어요!! 오늘의 영화는 유대인과 흑인, 인종에 관한 이야기! 영화 '리버티 하이츠'입니다! 리버티 하이츠는 미국에서 유대인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을 뜻하는데요 그 근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작품입니당 두 유대인 형제가 주인공인데ㅋㅋㅋ 이름이 Ben과 Ven이라 엄청 헷갈림ㅋㅋㅋ 원어로 들으며 봤으면 아마 거의 다 놓쳤을 듯 싶네요! 그래도 형제가 유쾌하고 풋풋해서 꽤 재밌었다는... 유대인 가족을 중심으로 유대인에 대한 인식의 문제 그리고 흑인과의 관계, 더 나아가 인종에 대한 고찰을 시사하는 작품입니다. 얼핏보면 평범한 가족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예기치 못한 고난과 차별이 숨어있죠. 영화는 종교 얘기도 간간히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복잡하고 구시대적이다!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요 문제는 이러한 문제가 현시대에서도 그대로 보여진다는 점이죠ㅠ 영화가 나온지는 엄청 오래됐지만 내용에서 다루는 얘기는 익숙합니다 아직도 미국은 종교에 예민하고 인종에 예민하죠.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그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기에 더욱 생각할 점이 많은 영화였습니다ㅠ 언제 어디서나 갈등은 똑같이 존재하네요... 정도와 차원의 차이만이 있을뿐! 영화 '리버티 하이츠'였습니다.
기록덕후들의 나라 조선의 기록 디테일 수준.jpg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현릉원에 행차한 8일간의 기록을 다룬 의궤 한권은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8일간의 주요 행사 모습 각종 물품의 설계도에 이르기까지 행차를 위해 혜경궁의 가마를 새로 제작했는데 가마를 장식한 문양까지 다 기록 총 112장의 그림으로 구성 나머지 7권은 행사의 준비과정, 내용, 사후처리까지 다 기록 심지어 행사에 참여한 기생의 이름도 있고 행사에 입었던 복식이 그대로 기록 (의상, 장신구, 속옷까지) 행사에 사용된 그릇의 종류와 쓰임새도 기록 참석자들의 역할과 직책에 따라 출장비를 받았는데 그 내역까지 다 있음 역시 기록덕들의 나라ㄷㄷㄷㄷㄷ 행사 준비 과정이 날짜별로 기록 참여 부서와 담당자 기록 각종 예산은 물론 물품 제작에 참여한 장인의 이름, 일한 날짜까지 기록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위해 만든 가마는 내부부터 외향까지 모든게 다 기록되어 있어서 언제든 복원 가능함 실제 그림에 있는 인원의 수ㄷㄷㄷ 혜경궁이 수원으로 가면서 먹었던 음식의 종류, 재료 어디서 먹었는지도 기록 교수님들도 감탄에 감탄 음식 재료의 시세까지 싸그리 기록ㄷㄷㄷㄷㄷ 남은 비용을 어디에 썼는지 사후 기록도 다 있구요 언제 인쇄했는지 기록까지 다 있음 정말 기록의 나라 기록물 다운 클라스ㅋㅋㅋㅋㅋ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정조가 널리 많이 보라고 목판본으로 만들어서 흑백이지만 보통 다른 의궤들은 궁궐에 보관하면서 보는 것이라 올 컬러에 비단 커버b 참고로 이 다큐는 의궤, 8일간의 축제 3부작임을 알려드립니다
<농담> 밀란 쿤데라
<농담> / 밀란 쿤데라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농담>은 말 그대로 한 농담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은 하나의 농담이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누군가의 별 뜻 없던 말 한 마디에 프레임과 이념의 시각이 씌일 때, 한 인간의 삶 전체가 어떻게 역사의 잔인한 농담 속으로 끌려들어가는지 보여준다. 1948년 2월(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가 일어난 시기다.) 이후의 첫 해, 체코의 청년인 루드비크 얀은 모범적인 사회주의자였다. 자신도,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개인주의자 같다거나 지식인 냄새가 난다거나 하는 모두의 평가에 한 줄 쯤은 들어가는 비판은 있었지만 말이다.) 루드비크는 젊었고 당연히 아름답고 순진했던 마르케타라는 여학생과 사랑에 빠진다. 루드비크는 방학 기간 중 마르케타와의 연애 사업을 진전시켜보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마르케타는 그 기간 동안 당 교육 연수에 참가해버린다. 마르케타로부터 당 교육 연수가 너무나 기대되고 신난다는 편지를 받은 루드비크는 연수 때문에 훼방받은 연애사업과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마냥 신나 있는 마르케타로 인해 삐지다 못해 질투심에 활활 타오른다. 결국 마르케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루드비크.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질투심으로 별 생각 없이 보낸 이 농담 한 줄은 이후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루드비크의 인생을 삼켜버린다. 루드비크의 농담은 정말 그저 농담이었다. 질투심에 눈이 먼 젊은 청년의 치기 어린 농담. 그러나 그 농담은 시대의 이념 하에서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불순한 의도가 겹겹이 덧씌워져 마침내는 농담을 한 루드비크마저도 자신의 무의식 속에 정말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어떤 의도도 없이 단순한 질투심에서 쓰인 농담 한 줄은 루드비크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지인에게, 연인에게 버림받게 만들고, 집단 전체에서 배척받게 만들었으며, 루드비크의 인생을 송두리째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단순히 보면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넓게 보면 개인의 가치를 훼손하는 모든 집단과 이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집단이 있고 집단의 의지 혹은 이념이 있으면 그 속에서 집단을 이루는 개인은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런 일은 국가에서도, 종교 집단에서도, 회사 내에서도, 심지어는 조그만 한 사무실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쿤데라는 개인이 어떠한 불순한 의도도 없이 던진 농담 한 줄이 집단과 이념의 시각 하에서 어떻게 매도되고 잘못 해석되어, 그 속에 존재하지도 않던 새로운 의미들이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며 집단 속에서 무시되는 개인이 가지는 중요성을 일깨운다. 한 인간의 삶은 집단의 의지 하에 마음대로 유린당하고 파멸당해도 좋은 물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소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농담 이후로 루드비크의 삶은 그 시기에 묶여버린다. 자신을 당에서 축출하기 위해 손을 쳐들던 친구들의 모습, 하루 아침에 석탄 광산으로 내던져진 자신,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합리한 자신의 운명. 과거의 감정과 시간에 갇혀 있던 루드비크는 15년 후, 자신의 고향 모라비아로 돌아온다.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그 기대를 철저히 배신하고 당에서 루드비크를 축출하는 데 앞장 섰던 제마네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제마네크의 부인인 헬레나와 성관계를 맺어 그에게 복수하려던 루드비크였지만 이미 제마네크는 다른 젊은 여학생과 연애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루드비크의 복수는 실패한다. 여기서 루드비크는 깨닫는다. 자신이 복수를 해야 하는 때는 15년 후가 아니라 제마네크가 자신을 당에서 축출하던 오로지 그 때 뿐이었음을. 여기서 쿤데라는 집단 속 개인의 비극을 보여줌과 동시에 개인이 그 비극을 대하는 실존적 태도에 대해서도 고찰한다. 루드비크가 복수하려는 15년 후의 제마네크는 15년 전의 제마네크와는 다른 인간이다. 예전의 제마네크는 15년이란 시간 동안 사라져버렸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제마네크의 어린 연인, 브로조바 양이다. 그녀는 15년의 시간이 지나 이전 세대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다. 제마네크도 그런 그녀와 연인이 될 만큼 15년 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루드비크가 과거에 묶여 살아가는 동안 제마네크는 현재를 대표하는 브로조바 양의 옆에 서서 자신이 과거의 제마네크와는 다른 인물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갈 수 밖에 없고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것, 루드비크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복수가 처절히 실패했음을, 아니 사실 그 복수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대상이 없는 복수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다. 과거의 일들이 인간의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인간은 지금 살아가고 있고 그 족쇄를 떨쳐버려야만 한다. 15년 전 과거에 대한 복수, 제마네크에 대한 것인지 자신을 축출한 당에 대한 것인지 당시의 사회 이념에 대한 것인지도 명확히 알 수 없는 복수를 하러 고향에 왔던 루드비크는 소설의 끝에서 과거의 흔적이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피해 왔던 자신의 진정한 친구 야로슬라프가 쓰러지자 그를 두 팔에 안으며 전율한다. 과거에 묶여 끌려왔던 고향으로의 여정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진정한 벗을 두 팔에 안은 채 현재의 그를 위해 눈물 흘리며 끝났기 때문이다. 제마네크가 외면했던 모든 가치들은 결백했다. 고향 모리비아의 노래들, 침발롬이 있는 악단, 고향 도시 모리비아, 그에게 협박처럼 들리던 동무라는 말까지 그 어떤 것도 죄가 없다. 단지 그 결백한 가치들이 과거와 집단과 이념과 사회와 역사의 잔인한 농담에 의해서 유린당했을 뿐이다. 우리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소설 속 한 문장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송
"소송" / 프란츠 카프카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장편소설 소송. 웃기고 기괴하고 불편한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 한 소설이다. 90년 전 소설에서 이런 감상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은행에 근무하는 직원 요제프 카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쳐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체포당한다. 희한한 점은 분명히 체포되었지만 감시자가 몇 명 붙을 뿐 딱히 일상생활에 지장도 없고 어떤 죄목으로 체포당한 것인지도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카는 이후 진행되는 심리에 출석해서 열심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소송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 듯 하다. 카는 소송을 위해 변호사를 찾아가지만 변호사도 뭔가 이상하다. 진행 상황에 대해서 물어보면 온갖 어려운 말들과 궤변들을 늘어놓을 뿐 위대한 변호사인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맡기라는 식이다. 카는 미심쩍은 변호사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보려 하지만 법에 대해서, 법원에 대해서, 카의 소송에 대해서, 하다 못해 카가 어떤 죄목으로 체포되었는지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예심판사, 카를 감시하는 법원의 감시인, 하급 법원의 직원들조차도 그저 자신이 맡은 조그마한 역할만 수행할 뿐 카의 소송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한 권력을 가진 법 앞에서 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결국 1년간의 소송을 거쳐 카는 사형당한다. 이 소설을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났던 건 우리나라의 행정처리였다. A가 알고 싶어서 B부서에 전화하면 B부서에서는 C부서에 연락하라고 말하고 C부서에서는 D부서에 연락하라고 말하고 D부서에서는 E부서에 연락하라고 말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딱 카의 상황과 같다. 카를 체포하는 사람도, 심리를 진행하는 사람도, 변호하는 사람도, 감시하는 사람도 그냥 주어진 역할만 수행할 뿐 카의 소송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 끝내면 된다는 듯이. 그렇게 법원이라는 거대 시스템 하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카의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 공공기관의 불필요하고 형식적인, 이해와 납득이 불가능한 업무 처리 시스템이 생각난다. 예전에 비해 많이 개선된 부분들도 있지만 여전히 이 서류가 왜 필요한지, 왜 이걸 제출해야 하는지, 왜 산정 기준이 이렇고 지급 기준이 이런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렇지만 국가, 정부라는 거대한 시스템은 이미 정해져 있고 아쉬운 것은 일반 시민들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이 나서서 시스템을 바꾸는 것보다는 시스템을 따르는 것이 편하고 현명하니까. 소설을 보다 보면 카의 행동이 점점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죄가 없으니 무조건 풀려 나겠지, 잘 해결될 거야라며 낙관하다 가면 갈수록 소송에 매달리게 된다. 그 이유는 법원과 법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권위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법이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나오며 그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이 법이 맞는 것인가, 잘못된 곳은 없는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없는 사회인 것이다. 게다가 어느 누구도 법이라는 것에 대해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무죄가 나올 것이라 낙관하는 게 가능할까? 잘 짜 맞추어진 톱니바퀴처럼 법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톱니바퀴가 모여 만들어진 기계 자체(법)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카의 유무죄에 대한 판결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정체도 모르고 이해도 할 수 없는 존재(법)에 의해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카는 어떻게든, 조금이나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무의미한 노력을 계속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세계는 점점 시스템화 되어 가고 있다. 경제, 사회, 문화의 규모는 계속해서 커지고 시스템은 그에 맞춰 거대해지며 이제 모든 개인은 시스템의 부품으로써 작동한다. 예전에는 구두 장인 한 명이 하던 일을 수많은 단계로 분업화하여 일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하루 종일 구두 밑창만 붙이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구두끈만 끼운다. 이렇게 모든 개인이 철저히 시스템의 일부가 된 상황에서는 개인과 개인이 모여 편리함을 위해 만들었던 시스템이 오히려 개인을 억압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낡은 시스템이 고장 났다면 개인이 아닌 시스템을 고쳐야 하지만 이미 너무 거대해져 버린 시스템을 고치기는 어렵기 때문에 개인에게 불편함을 감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송은 소설 속 주인공 카의 모습을 통해 한 개인(요제프 카)이 거대한 시스템(법)의 부조리(죄목조차 알려주지 않음, 법에 대한 의문 제기조차 불가능) 앞에서 어떻게 농락당하고 짓밟히는지 보여준다. 물론 극단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실제로 법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닌 듯하다. 90년 전에 쓰인 고전에서 현대의 시스템과 관료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카프카가 가진 미래 사회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일 수도 있고, 2019년이 1925년의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전자이길 희망하지만 후자가 맞을 것이다. 우리는 90년 전 소설가가 그린 곳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소설 속 한 문장 "법원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이 오면 받아들이고, 당신이 가면 내버려둘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