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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의 모험



기사에 나빌라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 인물은 모르셔도 된다. 리얼리티 TV 쇼로 뜬 모델/배우이고, 뭔가 좀 맛이 간(?) 느낌으로 말을 하기 때문에 대중의 호오가 극도로 갈린다. 하지만 나빌라의 상징어라 할 수 있는 말이 바로 “여보세요(allô)”다.

그렇다면 여보세요는 어디서 나왔을까? 친구들도 알고 계시다.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처음 전화를 만들었을 때 사용했던 단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음모론으로 나가자면(여기서 이 글이 주말 특집임이 드러난다), 벨 형님의 여인(!) 중에 Allessandra Lolita Oswaldo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를 그리워하던 벨이 이름의 약자인 ALO를 사용해서 그렇다는 설이다.

정말 그랬다면 좋겠지만(신빙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사실 “헬로”를 누가 먼저 고안했는지는 밝혀져 있다(참조 1). 그 고안자는 다름 아닌 토마스 에디슨. 하지만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그래도 누군가 에디슨에게 헬로가 좋다고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지 않을까?

여기서 헝가리인 푸쉬카시 티버더르(Puskás Tivadar, 성-이름 순이다)가 등장한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뭔가 스티브 워즈니악스러운 인물인데, 원래는 전보 시스템을 궁리하다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그리고 토마스 에디슨의 소식을 듣고 에디슨과 같이 일하기로 한다. 그리고 바로 이 푸쉬카시가 전화 교환기를 발명했다.

초기의 전화기에는 교환 시스템이 없었다. 그냥 설치 장소간 선으로 연결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교환기의 발명은 전화기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아마 처음 들어보셨을 것이다. 푸쉬카시가 곧바로 에디슨 회사의 유럽 지사를 세우러 파리에 들어가서 미국에서의 에디슨과 일은 금방 끝났 때문이다(1879년). 동생과 함께 그는 전화 테스트에 들어간다.

듣고 있니? Hallod?
듣고 있어. Hallom.
들려. Halló.

헬로랑 너무 비슷하지 않으신가? 그렇기 때문에 아마 에디슨도 헬로우를 더 좋아했을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푸쉬카시는 고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돌아간 다음, 전화 뉴스 서비스를 개설한다!

아마 예전에 썼던 19세기의 전화 스트리밍 서비스, 이른바 Théâtrophone이다(참조 2). 다만 이 Théâtrophone이 오페라 위주였고, 푸쉬카시의 Telefon Hírmondó는 뉴스 위주. 전자가 MTV라면 후자는 CNN의 느낌? 역시 세상은 바뀌지 않는가.

시기를 따지자면 원래는 비행기 엔지니어의 선구자로 유명한 Clément Ader의 Théâtrophone은 1881년이고 푸쉬카시의 Telefon Hírmondó은 1893년이니 아무래도 뉴스보다는 음악이 먼저일 것이다(응?). Théâtrophone의 경우, 빅토르 위고나 마르셀 푸르스트와 같은 네임드(...) 얼리 어돕터들이 덕질을 해대니 더 빨리 발생했을 테고 말이다.

P.S. 여보세요나 모시모시는 유래가 모두 각각 한국어와 일본어에서 나왔다. 별로 낭만적인 연원은 없는 셈이지만, Hello 및 그 계열의 단어를 안 쓰는 나라가 별로 없기 때문에 좀 튀기는 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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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Great 'Hello' Mystery Is Solved(1992년 3월 5일): http://www.nytimes.com/1992/03/05/garden/great-hello-mystery-is-solved.html

2. 19세기의 스트리밍 서비스(2014년 4월 22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2322654979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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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Hello란 말이 원래 있었던 게 아니라 전화의 발명과 더불어 창시됐다는거 금시초문이어요 스페인계에서는 알로 알로 하던데 !! 우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인사말이 아닙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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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를 한 번 완벽히 이해해보자. 다리가 몇 개인지, 등받이가 있는지, 재질은 무엇인지, 바퀴는 있는지 없는지.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의자'라는 사물에 대해 정말로 더 파악할 것이 없는지 질문해보라. 분명 놓친 것이 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어느 정도의 무게까지 견딜 수 있는지, 단면은 어떻게 생겼는지 등등. 사실 '의자'라는 사물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나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자'를 만들어 낸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의자'가 인간의 앉음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왜 '인간의 앉음'이라는 목적을 수행하는 사물로써 정확히 저러한 모양과 재질, 무게, 길이의 사물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의자를 만든 사람조차도 왜 등받이 길이를 50cm로 했는지, 51cm나 49cm면 왜 안 되는 건지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명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만든 '의자'조차도 완전한 필연성 속에 놓이기에는 그 외의 설명되지 않는 '여분'이 너무나 많다. '의자'는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필연성을 지닐 뿐, 현실에 사물로서 만들어지는 순간 필연성은 사라져 버린다. 즉, '의자'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것들은 사실 어떤 속성이나 본질, 필연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여분의 존재, 완전한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존재들을 지칭하는 언어며 기호, 또는 인간이 생각하는 그 존재들의 의의, 사용법, 특징 등은 우리가, 그리고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안에서 절대적인 어떤 의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제대로 이해하지조차 못하는 어떤 존재를 기만적으로, 오만한 방식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로캉탱은 공원에서 마로니에 뿌리를 보며 앞에서 말한 사실들을, 자신이 '구토'를 일으키는 이유를 인식한다. '3,4일 전만 해도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결코 예감하지 못했다.'(p.237)라고 말한 그는 '나는 '속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바다가 초록색 물건의 계급에 속해 있다고, 또는 초록색이 바다의 성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p.238)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초록색'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어떤 속성이 존재하고 그 속성으로 '바다'의 일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로캉탱이었지만 공원에서 마로니에 뿌리의 특징들을 파악하고 설명해보려고 하다 실패한다. '껍질이 그래도 검은 것을 나는 보았다. 검다니? 나는 이 말이 부풀어올라서, 엄청난 속도로 그 의미가 공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검다니? 뿌리는 검지 '않았다'. 그 나무조각 위에 있었던 것은 조금도 검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것이었다. 원과 마찬가지로 검은 빛깔도 존재하지 않았다.'(p.243)라는 말에서 보듯이 마로니에 뿌리껍질이 검다고 말하려던 로캉탱은 사실 진정한 '검은 빛깔'이라는 것은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할 뿐 현실에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마치 완전히 관념적인 단어, 존재의 세계가 아닌 설명이나 이치의 세계에 존재하는 '원'과 같은 단어처럼 말이다. '원은 부조리하지 않다. 왜냐하면 원은 직선의 일부분이 그 끝에서 회전한 것이라는 정의에 의해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은 또한 존재하지도 않는다.'(p242)라는 로캉탱의 말처럼 모든 언어와 단어는 인간의 관념 속에서 필연성을 지니며 이치에 맞게 설명되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 세계로 옮겨오는 순간 그냥 존재하고 있는, 이해와 표현이 불가능한 부조리한 사물들이 된다. '역부 회관의, 그날 밤의 아돌프의 멜빵. 그것은 바이올렛빛이 '아니었다''(p.243)나 '맥주잔의 그 애매한 투명.'(p.244)처럼 로캉탱은 주위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자신이 언어로 혹은 다른 무언가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로캉탱은 그러한 주위의 사물들의 부조리와 우연성을 앞에서 말했듯 '여분'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거기에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당황하고 어딘지 불안한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여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분', 이것이야말로 저 나무, 저 철책, 저 조약돌들 사이에서 내가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p.240)라는 로캉탱의 말을 보자. 여기서 '여분'은 필연적이지 않은 어떤 부분을 말한다. '의자'는 인간이 앉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꼭 다리가 4개에 등받이가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상상도 못 한 모양의 사물이더라도 앉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의자'다. '의자'를 만든 사람이 전혀 누군가 앉을 것을 고려하지 않았더라도, 혹은 앉는다는 행위와 전혀 관련 없는 어떤 부분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의자'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의자'라고 부르는 모든 사물에는 앉는다는 행위와 관련 없는 여분이 반드시 존재한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등받이의 길이가 50cm라고 해보자. 등받이의 길이가 49cm이더라도, 40cm이더라도 앉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의자'를 만든 사람의 목적과 의도에 포함되지 않은 어떤 '여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등받이의 길이가 될 수도, 의자의 색이 될 수도, 의자 다리의 개수가 될 수도, 그 외의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인간이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만든 사물조차도 수많은 여분이 존재하는데 나무는, 돌은, 잔디는 어떻겠는가? 그것들은 완전한 '여분'의 존재, 완전한 우연 속에서 태어나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인 존재인 것이다. '약간 왼편 쪽으로 나의 정면에 서 있는 마로니에, 그것은 '여분의 것'이었다. 라 벨레다도 '여분의 것'......'(p.240)처럼 모든 것은 '여분'의 존재다. 로캉탱의 인식은 주위의 사물에서 자신, 혹은 인간의 존재로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나'도-힘 없고, 피곤하고, 추잡하고, 음식을 삭이며, 우울한 생각을 되씹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의 존재였다.''(p240)나 '그 여분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라도 말소시키기 위해서 자살이나 할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죽음 자체가 여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체도, 그 미소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흐를 피도 여분이다. 그리고 썩은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속에서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나의 뼈도 여분의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히 여분의 존재였다.'(p.240)처럼 로캉탱은 자신이나 인간조차도 어떤 본질이나 의미, 속성이 없는 '여분'의 존재이며 우연히 태어났고 우연히 살아가고 있는 우연성 속의 존재임을 깨닫는다. ''부조리'라는 말이 지금 나의 펜 아래에서 태어난다.'(p.241)라는 문장에서 '부조리'는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로캉탱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 나무, 건물, 돌, 바다, 동물, 인간, 심지어 자신이나 자신의 삶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우연히 의미 없이 생겨났고 '부조리'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 로캉탱의 삶에는 어떤 의미도 없고 앞에는 무한한 자유가 놓여 있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치즈 나이프를 독서광의 눈에 꽂는 일.'(p.230)과 같은 로캉탱의 말처럼 말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떤 의미도 없는 '부조리'한 것이므로 인간은 무슨 행동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엄청난 형벌이나 다름없다. 어떤 이유도, 의미도 없이 무한히 자유로운 선택지가 주어진 상황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반드시 내려야만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인간의 몫이다. 앞으로의 선택에 대한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자유는 당연하게도 선택의 결과와 책임에 대한 엄청난 불안감을 야기한다. 끝없이 펼쳐진 흰 무(無)의 공간에 나침반도 지도도 아무것도 없이 뚝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은 것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까지 쓴 내용을 정리해보자. 로캉탱이 구토를 일으키는 이유를 정리해보자면 첫째로 로캉탱의 주변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들 수 있다. '그것들이 쫓기는 토끼처럼 우리의 코밑을 빨리 지나갔을 때, 그리고 거기에 너무 주의를 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아주 간단하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고 세상에는 진짜 청색, 진짜 분홍색, 진짜 편도나 오랑캐꽃 냄새가 있다고 믿을 수가 있었다.'(p.244)는 로캉탱의 말처럼 우리가 주변의 사물들을 슥 지나가듯 보았을 때는 그 사물의 '여분', 우연성, 적나라한 이해 불가의 존재성을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로캉탱은 어느 순간(마로니에 뿌리를 보며) 자신이 이해하고 있고 말로써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존재들이 사실 그렇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잠시나마 붙잡아 놓으면, 이 평안과 안전의 느낌은 심각한 불안에 자리를 양보한다. 빛깔, 맛, 냄새 들은 절대로 진짜가 아니었다.'(p.244)를 느끼는 순간이 로캉탱에게 도달한 것이다. 언어는 그저 인간이 만든 텅 빈 기호일 뿐 어떤 실제적 의미도 가지지 않으며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모든 존재는 언어로 표현되어 왔던 속성과 본질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인식하는 존재에는 늘 '여분'이 존재하며 그것은 모든 존재가 우연성 속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로캉탱이 당연히 이해하고 알고 있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음을, 의미나 본질, 속성 따위는 전혀 가지지 않은 채 존재할 뿐인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자신이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인식의 범주를 넘어선 것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포와 불안감, 두려움이 '구토'라는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둘째는 인간, 그리고 로캉탱 자신의 존재가 가진 우연성과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다. 로캉탱은 모든 사물이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존재에 어떠한 이유나 근거도 없음을 즉, 모든 사물이 우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곧 로캉탱은 인간도 사물과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인간도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존재에 어떠한 이유도 의미도 근거도 없다. 로캉탱 자신이 왜 이렇게 생겼고, 왜 머리가 붉은색이며, 왜 로르봉 후작의 전기를 써야 되는지 그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인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로캉탱은 형벌과도 같은 무한한 자유 속에 놓인다. 우연히 존재할 뿐인 로캉탱은 완전히 우연한 존재이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치즈 나이프를 독서광의 눈에 꽂는 일.'(p.230)과 같은 짓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 질서상으로 안된다고 생각했던, 도덕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규제했던 일들은 사실 언제든지 실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규제는 스스로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음을 외면하는 것이며, 자유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가 지는 것이 두려워 사회 질서와 그것을 만든 타인들에게 떠넘기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로캉탱은 알게 된다. 즉, 로캉탱 자신의 삶과 존재에 어떠한 이유도 없음을, 그러므로 어떠한 근거도 이유도 없이 무한한 선택지에서 영원히 형벌과도 같은 자유를 누리며 선택을 해나가야 함을 깨달은 로캉탱이 자신에게 주어진 한없이 자유로운 자유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이 '구토'로 나타나게 된다. 3. '구토'를 극복하는 방법은? '구토'는 로캉탱에게만 나타나며 다른 이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이들은 모두 깨달음을 얻어 '구토'를 극복한 것일까? 이번에는 다른 이들이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그리고 로캉탱이 '구토'의 극복 방안으로 제시한 내용을 알아보자. 3.1. 부빌 시의 시민들이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구토>에 보면 부빌 시의 시민들이 일요일에 교회를 방문하며 거리에 온통 모자의 행렬이 이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 광경은 '머리만이 그 두 줄에서 완전히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모자들, 모자의 바다가 보인다.'(p.87), '행렬의 진행은 멈추지 않는다. 겨우 약간 사이가 벌어졌을 뿐이다. 서로 악수를 하고 있는 여섯 사람들 앞을 우리는 걸어간다.'(p.87),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고는 소용돌이를 이루면서 인사를 한다. 모자 춤은 내가 자세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재빨리 시작했다.'(p.89)와 같이 묘사된다. 부빌 시의 시민들은 일요일 미사를 보기 위해 붐비는 대로를 휩쓸려 다니듯 걷고, 아는 이를 만나면 일제히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모자 춤을 추며, 모두가 비슷비슷한 인사를 나누고 비슷비슷한 복장으로 대로를 걷는다. 즉,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고민해 선택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나 사회가 정한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이들 혹은 사회의 규칙이나 질서에 자신의 자유에 대한 선택과 그 책임을 내맡겨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나 임무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부빌 시의 시민들은 주위의 모든 것,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우연성 속에 놓인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른 모든 이들과 같이 행동하며 사회 질서를 철저히 지키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인 것처럼, 자신의 직업이, 위치가, 성별이, 지위가 자기 자신의 본질인 것처럼 행동한다. 사르트르는 이를 일컬어 '자기기만'이라고 명명했다. '이미 지나간 일요일은 씁쓸한 맛을 그들의 입 안에 남겼고, 그들의 생각은 이미 월요일에 가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월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다. 있다는 것이라곤 무질서하게 밀려오는 나날과 그리고 번갯불같이 돌연 생겨나는 마음속의 움직임이다.'(p.106)라는 문장이 로캉탱과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의 차이를 확연히 보여준다.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일요일과 월요일이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요일과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질서에 자신을 맡기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평소와 같은 일요일을 보내고 월요일을 준비한다. 그러나 로캉탱에게는 오늘도 내일도 그저 밀려오는 새로운 나날일 뿐 일요일이나 월요일이라는 가상의 관념으로 정의되는 날이 아니며 7일 전의 일요일이나 월요일과 같은 날이 전혀 아니다.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이 추구하는 안정된 삶, 일주일 단위로 같은 나날들이 이어지는 삶, 늘 새로운 날임을 외면하며 사회에서 만든 가상의 가치에 안주해버린 삶이 로캉탱이 깨달은 무한한 자유 속 인간의 삶, 존재함을 깨달은 인간의 삶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심지어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자유를 책임질 노력도 하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으로 판단을 하는 일조차 없이 사회에서 준 직책, 지위, 역할에 몰두한 자들을 초상화로 남겨 기념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자유를 방임한 자,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외면해 버린 자, 끊임없이 자신을 기만하며 자신의 본질이, 의무가, 사명이 존재한다고 여기던 자들의 그림을 보고 로캉탱은 말한다.'작은 그림의 성당 속에 한없이 고운 백합이여 안녕, 우리의 자존심이여, 우리의 존재 이유여 안녕, '더러운 자식들'이여 안녕.'(p.178)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그 무한한 자유 속에서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뇌하며 올바른 선택을 찾아내고, 그 올바른 선택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올바른 인간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자신 앞에 놓인 무한한 자유를 외면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역설적인 두려움과 불안감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막중한 책임이 너무나 버겁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자유가 없는 듯이 행동한다. 사회 질서로 정해진 월요일이기 때문에 출근하며, 일요일이기 때문에 교회 미사에 참석하고, 사회가 정한 방식대로,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 대로 자신의 자유를 외면한 채 거짓 근거를 만들어 행동한다. 그러한 행동들이 자신의 임무나 사명, 의무인 것처럼. 그러나 그 속을 끈질기게 파고들어본다면 그 행동들에 스스로 납득할만한 근거는 없다. 사회가 정한 규칙이 무조건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규칙적이고 정해진, 평안한 삶에 안주할 뿐 그 삶의 방식이 올바른 선택인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 속에서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는다.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다. 자신에게 선고된 무한한 자유에서 눈을 돌린 부빌 시의 시민들은 당연히 '구토'를 겪지 않는다. '구토'는 존재의 '여분'에서 깨닫는 세상 모든 것들의 우연성, 그리고 우연히 만들어져 존재하는 존재들이 가지는 무한한 자유를 직시하고 그것의 두려움을 체감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3.2. 독서광이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독서광은 도서관에서 알파벳 순으로 모든 책을 읽어나간다. 그는 책 속에 진리가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만드려 노력한다. 하지만 책은 과거의 것이다. 이미 지나간 사실에 대한 기록이며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떠한 답도 줄 수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며 현재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로캉탱이 로르봉 후작의 전기 집필이 자신의 '구토'를 해결해 줄 수 없음을 깨닫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나는 내 주위를 불안한 눈초리로 둘러보았다. 현재뿐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p.180), '현재의 진실한 본성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 속에도, 나의 생각 속에도 없었다. 확실히 오래전부터 나의 과거가 나에게서 도주해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p.180)처럼 과거는 이미 사라졌으며 존재하는 것은 현재뿐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과거의 기록으로 점철된 책들이나, 이미 사라진 과거의 존재인 로르봉 후작의 전기 집필이 현재의 로캉탱이나 독서광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현재의 존재,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과거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영어 문제를 수식을 이용해서 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로캉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르봉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그의 뼈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뼈 자체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들은 염분과 수분을 포함한 인산염과 탄산석회에 불과하다.'(p.182). 이처럼 현재를 과거로 재단하려 하는 것은 '염분과 수분을 포함한 인산염과 탄산석회'를 보고 "로르봉 후작님, 잘 지내셨나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독서광은 로캉탱과의 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사회주의 단체 S.F.I.O. 에 입당했음을 밝힌다. 그때 '그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빛난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그는 나를 바라본다. 그는 순교자처럼 보였다.'(p.216)고 로캉탱은 묘사한다. 그는 과거 전쟁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회주의 단체에 입당하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휴머니스트적 면모를 보인다. 로캉탱은 "여기 있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p.222)라고 말하는 독서광에게 일침을 가한다. 로캉탱은 독서광에게 "당신이 저 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길거리에서 그들을 알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그들은 상징에 불과하니까요. 당신이 흐뭇해하고 있는 그것은 전혀 그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청춘' 특히 '남녀의 사랑' '인간의 목소리'지요."(p.224)라고 말한다. 독서광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사회주의 단체에 입당하고 모든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을 왜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것을 현재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으며 현재 자신의 행동, 지금 자신이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입당으로부터 긴 시간이 지난 지금 사회주의가 현재의 상황에 적합한지에 대한 고민 없이 맹목적으로 과거의 깨달음과 과거의 경험을 따른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사람 그 자체인지, 로캉탱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청춘'이나 '남녀의 사랑' 혹은 '인간의 목소리'인지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만큼. 그런 독서광이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우연성, 존재의 '여분', 지금 이 곳에 주어진 무한한 자유를 깨달으며 생기는 불안감이 형상화된 '구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존재란 현재에 있는 것이지만 독서광은 과거에 묻힌 자이기 때문이다. 3.3. 안니가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사실 안니는 로캉탱과 같은 '구토'라는 현상을 겪지 않을 뿐, 어렴풋이 로캉탱과 비슷한 불안감,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 과정은 안니가 자신이 추구해오던 '완전한 순간'이 허상임을 깨달으면서 나타난다. 안니는 로캉탱과 만나던 시절에도 늘 '완전한 순간'을 추구했다. 일상을 벗어난 특권적인 상태에 이른 어떤 한순간에 그 공간, 그곳에 속한 인물, 그들의 행동 등을 통제해 마치 스틸컷을 찍듯 완벽한 질서를 부여한 '완전한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안니는 어느 순간 그 '완전한 순간'이란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 완전한 순간이 없단 말이야?" "없어요."'(p.267)가 보여주는 로캉탱과 안니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안니가 '완전한 순간'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로캉탱이 '구토'를 겪으며 깨달은 사실, 세상 모든 존재가 어떠한 존재 이유나 근거가 없는 우연성 안에 놓인 존재라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감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안니는 '완전한 순간'을 만듦으로써 그 공간과 시간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질서를 부여해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들에 필연성,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이유, 근거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 물론 안니 자신이 명확하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닐 테지만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피상적으로 느끼던 불안감이 '완전한 순간'을 만듦으로써 해소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위에서 안니가 말한 것처럼 '완전한 순간'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순간이 가지는 시간적 한계 때문이다. 3.2. 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거는 현재 존재하는 것들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모든 인간, 모든 생명체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와 과거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만약 안니가 추구하던 '완전한 순간'이 정말 완전하다면 그 순간은 현재에도 '완전'해야만 한다. 그러나 과거의 '완전한 순간'이 현재에 완벽히 재현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 공간, 인물, 위치, 기억 등등 온갖 요인들이 달라졌고 '완전한 순간'에 포함되어 있던 것들은 현재의 것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다. 그러므로 '완전한 순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안니는 '완전한 순간'을 만들고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을 통해 현재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잊고 또한 미래에도 과거의 '완전한 순간'이 그러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과거의 '완전한 순간'은 그 순간이 지나는 그때 이미 사라지고 완전함은 남아있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안니가 과거의 '완전한 순간'을 떠올리고 그것에서 현재의 고뇌와 불안을 잊으려 해도 안니의 기억에 남아 있는 '완전한 순간'은 그 당시의 한 부분이자 현재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일 뿐이다. 게다가 과거의 '완전한 순간'을 기억하고 추억한다고 해도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현재 존재하는 세계는 전혀 달라지지 않으며 어떠한 실재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안니는 결국 그 사실을 깨닫고 말한다. "나는 일종의 물리학적...... 확신이 있어요. 완전한 순간이란 없는 것 같아요."(p.268)라고. 안니는 '완전한 순간'의 허상을 깨달았으며 만물이 가지고 있는 우연성과 혼돈의 세계를 직면했다. 그녀는 과연 어떤 해답을 찾게 될까. 3.4. 로캉탱이 '구토'를 극복하는 방법 로캉탱은 부빌의 카페에서 격렬한 '구토'를 느끼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재즈곡을 들으며 '구토'가 사라지는 걸 느낀다. 재즈곡이 시작된 순간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 음악이 시작되고 정확히 몇 초 후 흑인 여자가 노래를 시작하고 정해진 가사와 음과 시간이 소비되면 노래가 멈추고 음악이 끝난다.'몇 초 후면 흑인 여자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 같다. 그만큼 이 음악의 필연성은 강하다. 이 세상이 주저앉아버린 그 시간, 그 시간으로부터 오는 그 어떤 것도 이 필연성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그 필연성은 질서에 따라 스스로 멈출 것이다.'(p.48)라는 로캉탱의 말처럼 이 재즈곡은 철저히 작곡자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한 질서와 필연성 속에 놓여 있다. '일어난 일, 그것은 '구토'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침묵 속에서 소리가 튀어나왔을 때, 나는 내 몸이 굳어지고 '구토'가 사라진 것을 느꼈다.'(p.49)에서 보듯 재즈곡은 로캉탱의 '구토'를 그 즉시 잠재웠다. 이처럼 작곡자의 철저한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여분'이 없는 완벽한 필연성의 산물인 재즈곡은 존재 이유가 없는 존재들의 우연성이 가져다주는 불안감과 '구토' 증상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로캉탱은 부빌을 떠나기 전 같은 카페에서 같은 재즈곡을 들으며 다시 한번 재즈곡의 완전한 질서, 필연성을 체감하고 곡을 부른 가수와 작곡가를 생각한다. 그들이 음악 속에 남긴 생각, 관념, 필연성, 질서는 그들이 이미 사라진, 현존하지 않는 존재임에도 로캉탱이 그들을 기억하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나는 7월의 어떤 날, 어두운 자기 방의 더위 속에서 그것을 작곡한, 저쪽의 그 사나이를 생각하고 있다. 멜로디를 '통해서', 색소폰의 희고 시큼한 소리를 통해서 그에 대한 생각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p.327)처럼 말이다. 또한 로캉탱은 '그런데 내가 그들을 다정하게 생각하는 만큼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p.328)라고 말한다. 작곡가와 가수, 그들은 무의미와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임에도 자신들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완전한 필연성, 존재 이유를 가진 산물인 재즈곡을 만들어냈고 그 음악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우연성과 무의미에 속한 것들 사이에서 필연성과 존재의 의미를 가진 음악으로 남을 것이다. 즉, 그들은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로 태어났지만 필연성과 질서를 가진 산물을 창조해냈고 그로 인해 우연성에서 태어난 그들의 존재가 필연성을 가지도록(존재 이유가 존재하도록) 만든 것이다. 로캉탱은 그 과정에서 '구토'의 극복 방법을 찾아낸다. 로캉탱은 자신의 글 쓰는 능력을 이용해 한 권의 책을 쓰기로 한다. 단 지금까지 쓰던 로르봉 후작의 전기나 역사책이 아닌 소설을 쓰기로 한다. '역사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존재했던 것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한 존재는 결코 다른 존재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p.329)는 이유 때문이다. 로캉탱은 철저히 자신의 의도와 목적으로 만들어진, 완전한 질서와 필연성 속에 놓인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 소설을 읽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그것을 쓴 사람은 앙투안 로캉탱이다. 그는 카페에 빈들빈들 드나들던 머리칼이 붉은 놈이었다"라고.'(p.330)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로캉탱의 손에서 쓰인 한 권의 소설, 즉 로캉탱이 의도한 질서와 필연성 안에 놓인 소설은 영원히 그 존재가 남을 것이고 로캉탱은 영원히 그 존재 이유를 지닌 소설의 창작자로서 의미 없이 우연히 태어난 존재에서 자신의 의미,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낸 존재가 된다. '구토'는 모든 것들이 존재의 이유가 없는 우연성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므로 그 우연성을 벗어나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만들어 내는 순간 극복된다. 그런 의미에서 로캉탱은 소설 쓰기를 통해 '구토'를 극복하려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구토'를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재즈곡이 녹음된 CD나 로캉탱이 쓴 소설책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토'를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CD나 책 같은 사물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창작자의 관념, 사상 그리고 창작자가 의도한 질서와 창작 이유, 의미이다. 음악은 음표로 표시된 악보, 혹은 녹음된 CD나 음악 파일로써 현실에 존재하지만 사실 그 속에 담긴 음악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창작자의 머릿속, 그리고 그 음악을 들은 청중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소설이 쓰인 책이 곧 그 소설인 것이 아니다. 소설의 이야기는 창작자의 머릿속과 독자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글자, 혹은 책 그 자체가 소설이 아니다. 악보나 CD, 책이나 글자는 창작자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음악과 이야기, 즉 생각의 산물을 현실의 세계, 존재의 세계에 현존하도록 만들어주는 매개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원이나 검은 빛깔은 관념의 세계 속에서는 충분히 이치에 맞게, 필연성을 지니며 설명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하는 것이 우연성 속에 놓인 현실 세계에서, 창작자는 관념 속 필연성을 지닌 어떤 것들(음악, 소설)을 현실 세계에 존재하도록 만듦으로써 필연성을 지닌 존재를 현실 세계, 존재의 세계에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4. <구토> 리뷰를 마치며. 며칠에 걸려서 문헌들과 책을 몇 번씩 들여다보며 썼지만 지금도 제대로 쓴 것인지 걱정이 든다. 사실 <구토>에 대해 얼마나 이해했는지도 의문이다. 절반이나마 제대로 이해하고 썼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구토>에 드러난 사상은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에 적용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절대적 존재의 이유를 부여하던 신이 과학에 의해 부정당하고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은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따위는 없다고. 인간이 사는 이유는 우연히 태어났기 때문이며 우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그렇지만 존재하는 이유가 없으니 살 가치가 없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로캉탱이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는 <구토>의 결말은 인간은 우연성 아래서 태어났지만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필연성,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 주변에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떠넘겨버리고 '자기기만'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 내 삶의 이유,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지 <구토>를 통해 깊게 고민해 볼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 소설 속 한 문장 나는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작가의 오후
'어느 작가의 오후' / 페터 한트케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짧은 중편 소설이다.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페터 한트케의 소설로 제목 그대로 어느 작가의 오후를 그리고 있다. 평범한 오후의 일상은 글을 쓰는 자, 작가가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현실과 환상을 넘나 든다. 소설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어느 작가는 글쓰기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식당에 들어가 무언가를 먹기도 하며, 하늘과 광장과 건물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기도 한다. 그리고 작가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게 전부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사건도 없으며 그저 작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오후의 풍경이 묘사될 뿐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들을 작가의 눈으로 바라보고 작가의 언어로 기술하면서 온갖 환상과 상상과 사건들이 생겨난다. 갑자기 누군가 길을 틀어막고 작가에게 "당신의 문학을 기소합니다!"라고 외치기도 하고 머리카락이 다 빠진 늙은 여자가 나뭇가지 위에 걸쳐져 있기도 하며 일에 대한 강박에 화자가 갑작스러운 대인기피증에 걸리기도 한다. 작가는 일반인에게는 평범한 오후의 풍경에서 온갖 문장들과 언어, 새로운 상상들을 불러낸다. 그 때문에 이 소설에서는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오후의 풍경이고 또 작가의 생각과 언어의 확장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페터 한트케는 언어 자체에 대한 연구에 골몰하며 전통적인 문학의 형식, 언어를 사용하는 기법 등에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과감히 파괴하기도 하는 작가다. 그는 "문학이란 언어로 서술된 사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언어 그 자체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하며 언어의 기능과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의 본질을 깊게 탐구했다. 만약 이 소설이 "언어로 서술된 사물"로 이뤄진 소설이었다면 작가가 지나다니는 경로에서 보이는 풍경과 사물들의 묘사만으로 소설이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소설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평범한 오후의 사물들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으로 언어의 기술을 끝내지 않는다. 단순하게 묘사된 오후의 풍경과 사물들에서 출발한 화자는 자신의 기분, 감정, 생각, 사상 등을 묘사된 사물들에 투영하여 언어를 확장시킨다. 작가를 지나치는 인파들은 작가의 글을 읽는 독자로 둔갑하여 작가가 느끼는 자신의 작품, 그리고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묘지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묘비명을 보고 그들이 살아생전 내질렀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비명을 듣기도 한다. 작가의 주관적인 경험과 생각들이 오후의 풍경과 사물 속에 스며들어 단순한 묘사가 아닌 새로운 언어로 탄생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확정적인 모든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무시무시하게 생각했다." 언어란 한없이 비확정적이다. 같은 문장, 같은 단어를 보고도 모든 사람은 제각각 모두 다른 생각을 떠올린다. "사과"라는 하나의 단어를 보고도 누군가는 뉴턴의 사과를, 누군가는 사과의 단맛을, 누군가는 사과를 딴 경험을 떠올린다. 어느 누구도 "사과"라는 단어를 보고 정확히 같은 것을 떠올린 사람은 없다.(같은 빨간 사과를 떠올렸을지언정 크기, 모양, 빨간색의 진하기 등등 어느 사소한 부분에서라도 차이가 생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오후의 풍경에서 느낀 한없이 주관적인 자신의 경험들을 언어로 기술함으로써 독자들이 객관적인 사물에 대한 단어가 아닌 주관적인 경험의 언어를 과연 어디까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알아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언어가 사유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써 어느 정도까지 정확하게 기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짧은 중편소설이기에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읽어보고픈 이들의 시작으로 좋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언어의 불확정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소설 속 한 문장 확정적인 모든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무시무시하게 생각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언어
일요일은 역시 공부지. 서유럽 언어들, 특히 로망스 언어 계열은 올리브 기름을 당연히 olive oil과 같은 표현을 각자에게 맞게 사용한다. 여기서 로망스 언어 계열은 로마 제국/라틴어의 후예들을 의미하는데, 대체로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카탈루니아어, 갈리시아어 등등을 말함이다. 그래서 같은, 혹은 같아 보이는, 뿌리가 하나로 보이는 단어들을 상당히 많이 공유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이 여러가지 언어를 한꺼번에 하는 건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한국어와 일본어의 관계보다 더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뿌리가 다른 게르만 어족이나 슬라브 어족의 언어까지 다 한다면 그건 신기한 게 맞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언어들이 다른 로망스 계열 언어와 다른 점이 있다. 기본적인 단어들이 전혀 다른 것이 많기 때문이다. 가령 위에 사례로 든 올리브 오일을 포르투갈어에서는 azeite, 스페인어와 갈리시아어에서는 aceite라 부른다. (카탈루니아어는 그렇지 않지만 이건…) 범인은 하나, 아랍어입니다요. 아랍어에서 올리브를 어디서 많이 들어 보셨을 자이툰(زيتون), 올리브유를 자이트(زيت)라고 한다. 이제 올리브를 스페인과 포르투갈, 갈리시아가 어째서 저렇게 부르는지 아셨을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가 아랍의 지배를 거의 750년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랍식 어휘가 대량으로 들어온 것이 오늘날의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이다. 다만 또 한 가지. 미묘하게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그리고 갈리시아어까지)에 차이점이 있다. 아랍어의 영향이 포르투갈어보다는 스페인어에 더 많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가령 스페인어의 /ㅎ/ 발음이 나는 자음은 g와 j, 그리고 x이다. 아랍어 철자의 ح와 خ, ه와 같다. 두 번째로 아랍인들이 이베리아/안달루시아에서 주로 다스리던 지역이 아무래도 까스떼야 지방이었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은? 세 번째 이유, 까스떼야 지방보다 비교적 일찍 크리스트교 세력의 레콩키스타가 진전됐었다. 지금의 갈리시아 지방과 지도에서 보이는 스페인 북부가 중심인데, 그때문에 갈리시아가 지금도 독자적인 언어를 보존하고 있기도 하고, 포르투갈어가 갈리시아어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봐도 좋은 이유 중 하나다(똑같은 이치로, 카탈루니아어는 프랑스어와 상당히 유사하다). 이 갈리시아-레온 왕국에서 싸우라고 보낸 기사들이 대체로 남프랑스, 프로방스였다 이거다. 게다가 남프랑스로부터 이민도 많이 내려왔었고, 그 영향이 포르투갈에 남았다. 그 결과 포트투갈어에서는 여러 어휘가 아랍어에서 다시 로망스어 계열로 바뀐다. 스페인어는 아랍식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말이다. (어쩌면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의 R 그리고 J발음이 그토록 차이나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대표적인 것이 스페인어에서 市長을 의미하는 alcalde, 포르투갈어에서는 prefeito이다. 카페트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의 alfombra(al이 있다!)는 포르투갈어에서 tapete, 옥상을 의미하는 azotea가 포르투갈어에서는 terraço. 테라스다. 그러니까 스페인어를 공부하실 때는 아랍어와 함께, 포르투갈어를 공부하실 때는 프랑스어와 함께 공부하시면 능률이 더 오릅니다?
EU 학생들의 언어 선택
재미나는 보고서가 하나 있다. EC에서 발행(2018.4)한 The European Education Area이다. 링크: http://ec.europa.eu/commfrontoffice/publicopinionmobile/index.cfm/survey/getsurveydetail/instruments/flash/surveyky/2186?CFID=6256953&CFTOKEN=4dd869d36a40e090-5A86A3A8-D751-3923-103574A43137FD75 (영어로 되어 있으니 걱정 말고 보시라.) 사실 써머리만 봐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학생 8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절대 다수(90%)는 해외 경험이 중요하다 여기고 이왕이면(91%) 자동적으로 해외 수학 기간이나 학위도 회원국끼리 인정하면 좋겠다고 본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EU 내 대학들끼리 연계된 학위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유럽학생증 같은 것도 좋겠다는 의견이 90%였다. 다만 의외로(?) 1/3 가량은 언어 한 가지로만 공부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기꺼이 외국어를 배우겠다는 의견은 77%. 응답자의 84%는 이미 알고 있는 외국어 능력을 더 기르고 싶다고 답했다. 흥미로운 통계는 뒤편에 있다. 언어 하나만 아는 학생 비율은 역시나 명불허전, 영국이 제일 많다(68%). 다른 언어를 배울 필요가 없는 나라이니까 말이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 학생들은 언어 2-3개를 구사했다. 3개 언어 이상을 구사하는 학생이 제일 많은 나라는 (또) 역시나 룩셈부르크, 무려 69%가 3개 이상 언어 구사자들이다. (당연할 것이다. 학년별로/과목별로 가르치는 언어(독어, 불어, 영어)가 바뀌는 나라다.) 그래서 다른 나라(영어가 공식 언어가 아닌 나라들) 학생들 입장에서 제1외국어는 당연히 영어다. 그 다음 인기 있는 언어는 불어, 독일어 순이다. 하지만 인기 투표를 하면 어떨까? 그것이 바로 별첨한 그림이다. 스페인어가 1등이다. 왠지 가성비가 좋을 것 같아서 아닐까? 재밌는 건, 인기 2위가 독일어인데, 모두 다 독일에서 일해야 할 입장의 나라들(루마니아, 포르투갈, 스페인, 헝가리, 슬로베니아, 라트비아)이다. 체코와 리투아니아가 불어를 좋아하는 건 의외이고, 키프로스가 러시아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것도 눈여겨 보자. 이게 다 지정학의 효과다. 러시아가 얼마나 많이 투자를 했으면 그럴까. 그러나 절대 다수의 국가 학생들은 다들 영어 실력을 좀 키우고 싶어한다. 우리나라만 그렇지 않다는 점에 위안을 갖되, 얘네들은 어순이 대충 비슷한 언어가 많으니 우리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빠르게 익힌다는 점에 대해서는 위안을 갖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