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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만 입은 남성이 물에 젖은 채 숨져있었다

故 박종철 군 검안의 오연상 씨가 말하는 그날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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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그당시 쉽지 않았을 용기에 진심 어린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실제로 저런 상황이 닥쳤을때 저런 용기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 감히 상상도 못하겠습니다. 정말 존경합니다. 또 감사합니다.
진정한 애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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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 고화질 복원 사진
1. 이화학당 보통과 입학 직후 1915~1916년 추정, 13세 2. 이화학당 고등과 졸업사진 1918년 추정, 16세 3. 1920년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18세 (고문으로 인해 얼굴이 부은거 감안하고 봐주세요.) 아래는 연필스케치 버전 유관순 출생: 1902년 12월 16일(음력 11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옛 지명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유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18세에 순국했습니다. 1. 전세계 17살 소녀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잔다르크와 유관순 열사 뿐임.(3.1운동 당시 만16세 3개월) 2. 이화학당의 동기들과 5인 결사대 조직하여 만세운동하다가 경찰서 끌려간 후 온갖 협박과 고문 당하심. 학교장인 외국인 '프라이'의 간곡한 부탁으로 석방되어 집으로 내려감. 3. 천안으로 내려가서 부모님과 동네 유지 4분이랑 만세운동 계획 4.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하다 현장에서 부모님 두분이 즉사. 5. 유관순 열사는 옆구리에 칼로 찔린채로 머리채를 잡힌채 일본 순사에게 끌려감. 6. 1심에서 일본시민으로 충성하면 석방해주겠다는 재판장에게 의자 집어던져 법정 모독죄 추가. 7. 1심애서 7년형 인도 받음.(33인보다 더 많은 형을 언도받음) 8. 2심에서 3년형으로 감형 9. 상고하지않음 '나라가 없으니 어딜가도 갇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상고하지 않겠다' 10. 악명 높은 서대문 형무서로 이감 11. 칼에 찔렸던 옆구리에서 계속 피고름이 나고 썩어감. 12. 감옥에서도 여전한 항일 정신으로 모진 고문이 계속됨. 13 고문 : 손톱을 다 뺀지로 뺌, 고추가루 탄 물을 코에 붓고, 17살 소녀를 발가벗겨 매달아 때림. 옆구리 칼에 의한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음 14. 3.1절 1주년에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만세운동 주동함 15. 감형 받고 출소 2일전 모진 고문에 방광이 터져 사망. 16. 아무도 시체를 안찾아감. 17.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집안은 풍비박산나서 거두어 갈 사람이 없었음. 주변 지인들도 일제의 협박에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않음. 18.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인도함. 19. 출소할거라 믿었던 이화학당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새옷과 머리 핀을 준비했었음. 20. 그러나 죽은지 10여일이 지나 시신으로 돌아옴. 21. 그날 이화학당 교정이 썩은 내로 진동했다고 함.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IpQgS6u6W5A, https://theqoo.net/1336361241
막장드라마 특) 기억상실증 걸린 사람이 한국말은 정확하게 구사함
여느 때와 달리 왠지 일찍 일어난 아침, 목마른 속을 달래러 거실로 나온 당신은 빨래를 하는 엄마 옆에서 홀린 듯이 일일연속극 ‘내 딸 주영이’를 본다. 예나, 주영이 딸이예요! (주-륵) (주르륵) (찰싹) 쾅 ... 어머 주영아… 의사쓰앵님, 우리 주영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어…하필이면…총알이…아니 차가 영 좋지 않은 곳을 스쳤어요. 잘 알아두세요. 이제 주영씨는 앞으로… 이전에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시말해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이말입니다. 아... 머리야, 여긴 어디지? 주영아, 기억 안 나니? 내가 누군지 알겠어? 난 누구죠? 여긴 어디죠? 아줌마는 누구예요? (이 막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내 모습)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생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 구사하지? 기억을 못하면 아무런 지식도 없어야 하는게 아닌가?” 나는 일일연속극 고인물이신 어머니께 여쭤봤지만 속 시원한 답을 듣지는 못했다. 상식적으로, 만약 기억상실증으로 어떠한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배웠던 지식도 모두 알지 못하는 것 아닐까? 이에 대한 해답은 심리언어학자들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53년 뇌수술로 해마를 잃었던 27살 청년 헨리 몰리슨(1926~2008)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수술 후 세상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평생 그가 수술을 받은 27살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갔다. 하지만 그가 언어를 구사하거나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즉 인간의 개인적인 기억과 개념적인 기억은 구조적으로 다른 기억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일화기억(Episodic Memory)과 의미기억(Semantic Memory)이라고 구분한다. 이 둘의 명백한 차이점은 ‘주관적 경험으로 기억이냐’의 가부이다. (이미지 출처: tulving 중다 기억체계 모형/1985) 즉 만약 ‘내가 3년 전에 제주도에서 애인이랑 했던 첫키스’는, 물론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에겐 없는 기억이겠지만 일화기억이다. 왜냐면 ‘내’가 직접 경험했던 것이니까. (나도 아직 경험해본 적 없다.ㅠㅠ) ‘내가 3년 전에 제주도에서 애인이랑 했던 첫키스’는, 물론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에겐 없는 기억이겠지만 일화기억이다. 하지만 ‘제주도 몽돌해수욕장이 무엇인가?’는 의미기억이다. 특정 시간이나 장소와 결부된 경험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통 우리의 지식을 형성하는 기억들이다. 기억 상실증이란 의미기억이 아닌 일화기억의 상실을 의미한다. 즉, 기억 상실증과 한국어 구사 능력에는 서로 큰 영향이 없는 것이다. 일화기억을 잃어버린 헨리 몰리슨의 경우 자가 인지적 의식(autonoetic consciousness)이 결함됐다. 그는 주관적으로 경험한 시간을 인지하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미래에 대한 걱정없이 27살로 살다가 죽었다. 과거를 빼앗긴 그는 시간이라는 철로에서 탈선해 헛바퀴를 돌고 있는 열차와 같은 삶을 살다 간 것이다. 헨리 모리슨의 사례를 보면 우리의 자의식은 우리의 경험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가진 최초의 기억의 시점이 우리의 자의식이 처음으로 형성된 시기다. 나의 경우 막 기어다닐 무렵 우리집에 도둑이 들어 새벽 내내 일어났던 소동이 기억난다. 그 때 반지하 전셋방의 쾌쾌한 냄새와 새벽녘의 서늘한 빛과 공기가 기억이 난다. 나의 의식은 누군가의 도둑질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볼 수도 있겠다. (출처: 기생충 반지하집 볼수 있을까/ 한국일보) 말미에 글이 매우 늘어졌는데, 헨리 모리슨 외에도 여러 뇌손상 환자들의 케이스를 살펴보면 약간의 씁쓸함도 든다. 가깝게는 치매 걸린 할머니부터 차에 치여 뇌를 다친 30대 아저씨까지 모두는 의식에 미로에 갇혀 길을 헤메고 있는 미아들이다. (출처: 판의 미로) 우리가 지키고 사랑하던 모든 것은 작은 충격이나 노화로 사라지기 쉬운 기억에 의존한다. 만약 저들처럼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무엇일까, 하고 조용히 생각해보는 저녁이다. 참, 혹시 이 글을 읽고 흥미가 있었다면 자신의 최초의 기억을 한번 떠올려봐 달라. 그리고 만약 기억이 난다면 언제였고 어떤 상황이었는지 밑에 댓글로 써주길 부탁드린다.^^
치마, 남자가 입어봤다
이틀간 치마 입고 출·퇴근, 시선에 옴짝달싹 못하고 결국 포기…통풍 잘돼 여름에도 시원, '편견' 없었다면 걸을 때마다 치마 위 하얀 꽃들이 물결처럼 넘실댔다. 사뿐사뿐, 흡사 아무것도 안 입은 듯 가벼운 느낌이었다. 한여름 오후 기온은 섭씨 29도, 푹 찌는 공기는 마스크 안에서 맴맴 돌아 숨구멍을 턱턱 막았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내겐 고역이었다. 그때였다. 휙 불어온 바람이 치마 안까지 들어와, 두 다리와 엉덩이를 시원히 감싸는 게 아닌가. 더웠던 몸이, 순간 기분 좋게 시원해졌다. 오감(五感)을 곤두세워 그 느낌을 한땀 한땀, 메모장에 적었다. 이 좋은 걸, 남성들에게 꼭 알려야 했기에. -- 이 모든 일은, 38년이 지나도록 살아 있는 나의 몹쓸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어느 주말이었다. 아내와 난 저녁을 먹으며, 벌써 다섯 번째 사망한, 내 바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인(死因)은 바지의 한계점을 고려하지 않은, 두 다리의 장력 때문이랄까. 쉽게 말해, 하체가 뚱뚱한데 의자에 자꾸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니 가운데 부분이 터진 거였다. 수선 비용이 3000원인 것까지 외울 정도였다. 아내는 실소를 터트렸다. 영 면목이 없었다, 난 꽉 끼는 바지 탓을 했고, 여름이라 덥고 답답하다며 토로했다. 아내는 "내가 입는 치마는 참 편하고 시원한데"라고 했고, 난 "그게 그렇게 시원해?"라고 하지 말았어야 할 질문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안방으로 향했고, 아내는 편한 베이지색 치마 하나를 건넸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것은 내 뱃살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난 탄성이 터졌다. "대박이야, 신세계다. 왜 이제 알려줬어?" 난 치마를 체험해보겠다고 했다. 아내는 그렇게까지 돈을 벌진 않아도 된다고, 그 정도로 집이 어렵진 않다고 했다. 그래서 난 아내에게 진지하게 얘기했다. 38년 동안 바지를 입었었고, 중요 부위가 상당히 억압돼 있었다고. 왼쪽으로 향할지, 오른쪽으로 갈지 항상 갈팡질팡했다고. 그러니 어쩌면 치마는 남성에게 더 적합한 옷인지도 모른다고. 그로 인해 몇몇 남성들이 치마를 입고, 그래서 그곳이 좀 더 시원해지고, 그러면 저출산 해결에 다소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그것이 '나 비효과(화려한 치마가 나를 감싸네)'라고 말이다. 내 멘탈이 허락하는 데까지 체험해보기로 했고, 정확히 이틀(15~16일)을 채웠다. 치마를 벗으면서 거실 바닥에 쓰러졌고, 장장 10시간을 푹 자고 일어나 다시 두통약을 먹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다음은 나를 스쳐 간 두 벌의 치마를 추억하며, 세세하게 남긴 기록들이다. 아내는 치마를 빌려주겠다 했지만, 난 새로 사기로 맘먹었다. 그 치마는 재질이 좀 두꺼웠고, 혹시 허리 고무줄을 늘어나게 할까 봐 몹시 두려웠다.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했으니까(아무 말). 기왕 사는 거 취향에 맞게 잘 사고 싶었다. 월요일(15일) 점심에 명동에 갔다. 매장 한 곳에 들어갔다. 형형색색의 치마들이 날 유혹했다. '트로피컬(열대 지방의)' 느낌이 나는 치마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취향 저격이었다. 돈 없어서 못 간, 하늘빛 몰디브 해변이 떠올랐다. 그러나 도무지 용기가 나질 않았다.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발걸음을 아쉽게 돌렸다. 첫 도전이니 조금 무난한 걸 고르기로. 밝은 푸른빛이 감도는 부들부들하고 시원한 재질의 치마를 집었다. 살짝 주름이 지지만, 전반적으로 평범한 편이었다. 옷걸이에서 빼내어 두어 번 접었다. 그리고 3층에 있는 남성 탈의실로 향했다. 심장이 괜스레 쿵쿵거렸다. '난 부끄럽지 않아', '그냥 호기심 많은 서른여덟 살이야', 하체가 더운 것뿐이야', 그리 자기 암시를 했다. 남성 탈의실 앞을 여성 직원이 지키고 있었다(그냥 서 있는 거지만 그리 느껴졌다). 작전상 후퇴를 했다. 남성복 몇 벌을 보며 딴짓을 했다. 한 10분쯤 지나니, 직원이 잠시 자릴 비웠다. 이때다 싶어 황급히 탈의실로 들어갔다. 양쪽으로 닫는 기이한 문 구조라, 살짝 진땀을 뺐다. 치마를 걸고, 바지를 벗었다. 고무줄을 늘여 치마를 입었다. 입는 게 이렇게 편할 수가. 그것부터 이미 맘에 쏙 들었다. 탈의실 에어컨 바람이 치마 안으로 솔솔 들어왔다. 긴장하느라 더워진 다리가 찬바람과 만나 시원해졌다. 난 묘한 황홀감을 느꼈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잠시 그 기분을 만끽했다. 구매 전 아내에게 검사를 받기로 했다. 사진을 찍어서 보여줬다. 키읔(ㅋ)이 13개나 이어진 답장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멋이 난다고 했다(이런 게 진짜 사랑). 더 끌어 올려 보라고 했다. 티를 넣고 확 끌어 올렸다. 한복 치마 같이 됐다. 아내는 키읔(ㅋ)을 11개 보내더니, "티는 안구보호를 위해 바깥으로 빼줄래?"라고 책망했다. 그 말을 따랐다. 할인해서 2만2900원, 생애 첫 치마를 득템하고, 매장 바깥으로 나왔다. 종이봉투에 담아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화장실로 향했다. 거기서 갈아입을 참이었다. 화장실 안 두 칸이 모두 잠겨 있었고, 그중 한 곳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화생방 훈련을 방불케 했다. 잠시 뒤 문이 열렸다. 처음 보는 이에게 속으로 응원을 건넸다. 그리고는 숨을 참고 들어가 치마를 잽싸게 갈아입고 나왔다. 걷는 기분이 이리 가뿐했었나. 두 다리가 참 홀가분했다. 빙 둘러 감싸는 게 없었고, 중요 부위를 압박하던 것도 사라졌다. 걸을 때마다 허벅지에 닿는 치마의 가벼운 느낌, 그 틈으로 공기가 살포시 들어와 스쳐 갔다. 바람이 어쩌다 불어오면, 치마 아래까지 들어와 발목부터 무릎, 그리고 허벅지와 엉덩이까지 열을 식혀줬다. 상체는 땀이 쉬이 마르지 않는데, 하체가 시원하니 몸 전체가 한결 쾌적해졌다. 치마를 위아래로 살짝 흔드니, 바람을 더 많이 빨아들일 수 있었다. ---- 사진만 몇개 추가 전문은 여기서 ㅋㅋㅋㅋ https://m.mt.co.kr/renew/view.html?no=2020061916404731398&type=outlink&ref=%3A%2F%2F 모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분 정말 대단한게 지하철로 치마입고 출퇴근... 회사에도 치마 입고 가심 ㅋㅋㅋㅋ 읽다보면 또 다른 치마 구입하신 후기 나와있음ㅇㅇ 너무 재밌는 기사라 같이 읽어보고 싶어서 가져옴. 심심할때 한번씩 읽어보길 추천^^^
심정지 온 남편 두번이나 살린 아내.jpg
심장이 멈춰 맥박도 호흡도 끊긴 상태를 심정지라고 하는데, 두 달 새 두 번이나 심정지에 빠졌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아내가 집에 CCTV까지 설치하고 남편을 두 번 구했습니다. 침대에 자고있던 구본철 씨가 기운을 잃고 몸을 축 늘어뜨립니다. 구 씨의 아내가 달려와 남편을 똑바로 눕히고 가슴 부분을 계속 누릅니다. 심정지에 빠진 남편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는 겁니다. 잠시 뒤 도착한 119구급대원이 구 씨를 바닥에 옮기고 한참 응급처치를 하자, 구 씨의 호흡이 돌아오면서 가슴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의식도 되찾았습니다. 구 씨는 두 달 전에도 심정지로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도 아버지와 아내가 구급대원과 영상통화를 하며 심폐소생술을 시행해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이후 아내는 만일에 대비해 남편이 자는 방에 CCTV를 설치하고, 심폐소생술 방법을 자세히 익혔습니다. 아내의 경험과 대비가 남편의 생명을 구한 겁니다. 구 씨는 두 번째 심정지 이후 심장 시술을 받고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심정지 환자가 뇌 손상 없이 소생 가능한 골든타임은 4분 남짓. 심폐소생술 시행법 관련 영상은 대한심폐소생협회나 한국소방방송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채널A 어후 다행이다 다행이야 남편분 평생 아내를 생명의 은인으로 모시면서 떠받들어야될듯 애기도 어린데 진짜 다행이다 아내분 넘 대단하심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