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act
▲많은 이들이 남을 탓한다. ▲부모를 탓하고 사회를 탓하고 세상을 탓하고 시대를 탓한다. ▲꼰대문화에 찌든 이들은 남탓하는 이들을 탓한다. ▲사회구조가 아니라 본인의 노력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모자란다고 탓하는 것이다. ▲이 또한 남탓 임은 부정할 수 없다. ▲어디에도 자신을 돌아보는 이를 보기는 어렵다.
View
子曰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자왈유녀자여소인 위난양야 근지즉불손 원지즉원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힘드니 가까이 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논어 양화편)
논어 양화편의 이 구절은 논어에서 ‘여자’가 언급되는 유일한 부분이고, 또한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유일한 구절이기도 하다. 이렇듯 분명하게 적혀 있으니 페미니스트들이 이를 근거로 공자를 비난한다 해도 반박할 말이 없다. ‘여성의 몸으로는 성불하기 어렵다’는 관점은 불교에도 있다. 도덕경에서 여성성을 높이 평가하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모두 지금 시대와는 맞지 않지만, 여기서 여자와 소인을 ‘감정에 치우치는 인간’으로 해석한다면 공자의 단언에 공감할 여지가 생긴다. 인간에게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부분이 있다지만 사실은 감성이 그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이성은 과격하게 말하자면, 그 뿌리인 감성을 포장하는 도구일 뿐이다.
이성과 감성을 음양으로 구분하자면 이성이 양이고 감성이 음이다. 논리와 합리로 무장하는 이성은 그 메마르고 강건한 모습으로 인해 양의 속성을 띤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논리로도 파악이 되지 않는 감성은 물처럼 고정된 형체가 없으니 음이다. 음은 양의 뿌리가 되고 양은 음의 발현이 된다.
감성의 근간은 감정이고 감정은 육체에서 기인한다. 이성이 중시되는 시대에는 이성의 역할과 이성의 독자성이 주목받는 듯 했으나 인간에 대한 이해가 진전되면서 시대적 사조 또한 이성에서 감성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음양의 관점은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나뉘어서 나타나고 작용한다는 것이지 그 본체는 하나라는 것이다. 본체의 측면에서 보면 이렇다 저렇다 구분할 것이 없는 것이 음양론이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 이성 역시 감성의 표현일 뿐이며 감성은 이성의 근거가 된다. 작용면으로 보자면 오히려 이성이 음적(陰的)이고 감성이 양적(陽的)이다. 한번 확립된 이성은 쉽게 그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협상의 과정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명분에 집착하는 쪽이 오히려 협상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실리를 빼앗기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감성이기 때문이다.
‘여자와 소인’을 ‘감정에 치우치는 인간’으로 해석하면 이런 사람들은 ‘기준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기분의 좋고 나쁨’을 우선시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기분과 이익에 충실한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을 도구로 삼기 마련이다. 그러니 거리가 가까울수록 나를 이용하려 할 것이다. 가깝다고 생각하는 만큼 막무가내로 대할 여지도 크다. 배신자와 사기꾼은 대개 근처에 있는 법이다.
또한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공존은 필수인 법. 타인에게 받는 인정과 사랑은 삶의 필요조건이 된다. 만약 누군가로부터 배척당한다면 대부분은 자신의 잘못보다 배척당한 사실에 원망하는 마음을 품을 것이다. 굳이 여자와 소인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가까이 하면 불손해지고 멀리하면 원망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이성보다는 감성
논어에서 사람의 유형은 ‘군자’와 ‘소인’으로 대별된다. 양화편의 이 구절에서 ‘여자와 소인’을 하나로 뭉뚱그려놓고 그 반대쪽에 군자를 놓는다면 다음과 같은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군자는 사람들이 가까이 한다고 불손하게 행동하지 않고 또한 사람들이 배척한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논어에서 말하는 군자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이상적이다. 인기가 많은데 교만하지 않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대중의 사랑을 받다가도 교만한 언행으로 한 순간 추락하는 모습은 너무도 흔하디 흔하다. 한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고 해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군자 구저기 소인 구저인 (君子 求諸己 小人 求諸人 논어 위령공편). 군자는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군자의 아름다움은 세상을 원망하는 것에 있지 않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남을 탓한다. 부모를 탓하고 사회를 탓하고 세상을 탓하고 시대를 탓한다. 꼰대문화에 찌든 이들은 남탓하는 이들을 탓한다. 사회구조가 아니라 본인의 노력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모자란다고 탓하는 것이다. 이 또한 남탓 임은 부정할 수 없다. 어디에도 자신을 돌아보는 이를 보기는 어렵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처럼 남탓인줄 모르고 남탓을 하는 것이 세상의 모습이다.
만약 누가 나에게 불손하거나 원망을 해온다면 우선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할 일이다. 내가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가까이 했는지 아니면 멀리 했는지 살펴볼 일이다. 이것이 남 탓을 하지 않는 군자의 태도이다. 세상 탓만 해서는 결코 세상을 바꿀 수 없으며, 남의 잘못을 탓한다고 결코 그 사람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김태경
오랜 시간 동안 동양학과 유불선을 공부한 동양학자. 특히 사람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사람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한의학과 명리학에 천착했다. 호주 University of Technology Sydney를 졸업했으며, 한국교통방송에서 PD로 일했다. 호주에서 한의사 자격을 획득, 시드니 서울한의원의 원장을 맡았다.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과 대한불교조계종 국제포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비등단 무시집의 시인으로, ‘나’와 ‘남’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세상을 바로 보게 한다고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