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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물에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1부 나의 대학시절
물이 흘러서 강이 되고 사람이 걸어서 길이 된다. 마라톤의 주자가 뒤를 돌아보는 행위는 기실 불안한 몸짓일 뿐이다. 그러나 한나절의 북한산 등반을 끝마치고 내려와서 하늘에 걸려있는 봉우리들을 되돌아볼 때의 감개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제 발로 넘은 우람한 봉우리들을 바라볼 때의 대견함은 귀중한 것이다. 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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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이란 그 속에 상당한 분량의 반성과 그의 가난한 소망이 담긴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각색된 것을 ‘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색된 이야기가 물론 사실이 아니지만 실제로 살았던 사실로서의 그의 인생은 도리어 사회가 각색한 것이나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볼 건가. 사실을 중심으로 볼 건가, 진실을 기준으로 해서 봐야 할 건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이라고 생각되었어요. 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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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겋게 달군 연탄집게로 덤볐어요. 주먹으로 맞고 발길에 걷어차이면서도 죽인다, 죽여라 하면서 버텼어요. 머리채 잡혀 골목을 끌려 다니기도 하고 약 먹고 유리창 깨트려서 배를 긋고 피 칠갑으로 덤볐어요. 결국 아무도 이 여자를 잡지 못했어요. 그래서 중동 창녀촌에서 유일하게 ‘자주국방’ 체제를 확립한 그런 여자였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것입니다. 만약 그 노랑머리라는 여자에게 중산층 여성의 정숙성을 요구하거나 설교한다면 그 설교야말로 폭력이라는 것이지요. 그 사람이 발 딛고 있는 처지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 개인에 대해서, 그 사람의 생각에 대해서 관여하려는 것은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처지가 바뀌지 않고 그 생각만 바뀐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만약 그 생각을 바꾼다면 단 하루도 그 여자는 그런 처지에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요구는 그 여인을 돌로 치는 것입니다. 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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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키모의 개가 끄는 썰매 이야기입니다. (중략) 열다섯 마리의 개 중에서 가장 병약한 개를 끈을 짧게 매는 거예요. 썰매에 가깝게. 그리고 썰매를 모는 사람은 썰매 위에서 그 개만 채찍으로 때리는 것이지요. 다른 개들은 그 개가 지르는 비명 소리 때문에 빨리 달리는 거예요. 짧게 매인 병약한 이 개의 역할을 비명 지르는 일이지요. 얻어맞고 비명 지르는 역할만 해요. 그러다가 죽으면 나머지 중에서 제일 약한 놈이 또 짧은 끈에 매여 가까운 거리로 와요. (중략) 병약해서 비명만 지르는 역할을 하는 개를 우리는 증오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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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저항의 형태와 강자의 억압의 형태에 대해서 우리가 그 형식만 가지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고 믿습니다. 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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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존재라는 것이 과연 나의 개별적 존재로서 완성되는 것인가.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그 사람들의 걱정과 어떤 배려 속에 내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내가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내가 받았던 교육들이 그런 서구 근대성의 어떤 특징인 존재론적인 사고로 굳어져 있는 건 아닌지. “관계는 존재”라는 말도 생각났어요. 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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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두 부류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 자신을 잘 맞추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에게 세상을 맞추려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이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에 자신을 맞춘다는 것은 세상과 민첩하게 타협하는 것이고 세상을 추수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행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려는 그 우직한 노력이 좀 더 인간다운 세상으로 변화시킵니다. 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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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 사람의 사상은 그가 주장하는 논리 이전에 그 사람의 연상세계, 그 사람의 가슴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연상세계를 그 단어와 함께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봐요. 6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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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런 미인을 아내로 가진 남자는 얼마나 능력이 있을까?’ 이렇게 보는 세상이지요. 정치경제학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남자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그 아내와의 교환가치로써 그 남자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용가치라는 규정이 다소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성, 인격이라고 해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아내의 미모를 통해 그 남편을 평가한다는 것은 남편을 사용가치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교환할 것도 아니면서 그를 교환가치로 보는 것입니다. ‘저런 멋진 남편이랑 사는 여자는 근사하겠구나! 근사하지 못하면 머리가 굉장히 좋거나, 아니면 친정집이 되게 부자이거나.’ 그런 식으로 스스로의 고유한 가치는 없고 타자를 통해서 자기 가치를 드러내고 있지요. 자녀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까? 서울대 무슨 어려운 학과에 다니는 아들을 자주 거론하는 엄마는, 자식을 교환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요. 가치의 본질 자체가 그런 것입니다. 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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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自己)의 이유(理由)가 자유(自由)라고 생각해요. 자기의 이유를 갖는 것이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유로 자기가 움직이는 것, 그것은 자기가 동의했건 또는 충분히 공감을 하건 그건 부자유한 거라고 생각해요. 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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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그 남자와 결혼했나요?”라고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와 결혼한 이유는 “Because I could be a better person with him.”이었어요. 그 남자와 같이 살아간다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입니다. 나를 편안하게 해 주고 능력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지요. 원칙과 근본이란 바로 인간과 인간관계라고 믿습니다. 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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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낮은 바닥을 마치 무릎으로 걷듯이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 또한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처지에 놓임으로써 그때까지 내가 버리지 못했던 엘리트 의식과 인문고 콤플렉스는 참으로 사치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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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재현’이 아니라 ‘재구성’되는 것이다. 현재의 내가 어떠한 고민, 어떠한 철학 그리고 어떠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같은 과거라 하더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재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재구성이나 단 하나의 재구성이 아니라 부단히 재구성되고 여러 형태의 재구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1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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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물에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강물 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이 노래는 감옥에서 만기 출소자를 보내는 출소 파티(?)에서 마지못해 부르던 나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중략) 감방 동료들이 어린이 노래를 못마땅해 하다가도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는 대목에 이르면 다들 눈빛이 숙연해지곤 했다. 그런데 나는 순두부집 종강 파티에서 학생들과 이 <시냇물>을 부르면서 깜짝 놀라게 되었다. 학생들의 얼굴에서 감옥 동료들과 같은 눈빛을 다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감옥은 범죄자를 구금하는 물리적 공간이지만 동시에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은 갇히지 않았다는 착각을 갖게 하는 정치적 공간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떠올리기도 했다. 1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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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현실과, 인간에 대한 세속적 욕망을 떨쳐버리기는 쉽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을 떨쳐버리고서도 계속하여 사회와, 현실과, 인간을 사랑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냉연한 인간의 현실 속에서 자연을, 신을 발견하여야 하는 것이다. 피 속에 용해되는 자연을 발견하여야 한다. 1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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