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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취향’ 복구하는 피규어 수리 장인

“돈 안되는 일 계속 하는 이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피규어 수리 장인 안경섭 씨가 말하는 ‘일의 의미’

▼ '피규어 수리 장인' 안경섭 씨가 피규어를 복원하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세요.
얼마 전 온라인에 ‘루리웹(게임 커뮤니티)의 흔한 피규어 수리 장인’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게시물 한 편. 누군가가 망가진 피규어(캐릭터 정밀 모형)를 복구하는 과정을 담은 이 게시물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엉망진창이 된 피규어가 감쪽같이 제모습을 되찾는 광경을 목도한 이들은 그를 ‘피규어계의 이국종 교수님’이라 불렀다.

이‘장인’의 정체는 피규어 파손 복구 전문가 안경섭(만 41세·사진) 씨다. 부러지거나 칠이 벗겨진 피규어를 의뢰 받아 새것과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해주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온라인 상에서 '장인' 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는 “처음부터 피규어 수리업으로 먹고 살 생각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 업종을 생계 수단으로 삼을 만큼 돈벌이가 되는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은 탓이다.그럼에도 그가3년째 이 일을 지속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인의 간절한 부탁으로 시작한 일, 어느 순간 ‘직업’이 되다


만화나 영화, 게임 캐릭터처럼 가상의 존재를 실물로 구현한 ‘피규어(figure)’.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실물을 소장할 수 있다는 매력 덕에 마니아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왔다. 최근 만화를 소재로 한 히어로 영화들이 인기를 끌고, 웹툰·메신저 서비스에서도 캐릭터 상품을 앞다퉈 내놓으면서 대중에게도 친숙한 장난감으로 자리 잡았다.

피규어의 가치는 가상의 형태를 실물로 얼마나 세밀하게 구현했느냐로 결정된다. 여기서 ‘내구성’은 중요한 조건이 아닌 탓에 대부분의 피규어는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러지거나 칠이 벗겨진다. 그러나 ‘관상’이 주목적인 피규어는 파손되면 그 가치가 사라지기 마련. 문제는 손상된 제품을 수리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다. 본래 영상 편집 일을 하던 안 씨가 처음 망가진 피규어에 손을 댄 것도 수리 업자를 찾지 못한 지인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비즈업 촬영 날 작업한 피규어는 만화 <원피스>의 ‘럭키 루’. 두 무릎과 발목이 동강나 안 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
“아는 형이 집들이를 갔다가 남의 피규어를 쳐서 부러뜨렸나봐요. 다시 사 줄 수도 없는 한정판 제품이라 제게 부탁을 한 거예요. 그때 일을 잠깐 쉬고 프라모델(조립 모형)을 만들고 있었거든요. 형은 혼자 고민을 엄청 하다가 부들부들 떨면서 부탁한 건데 딱 보니까 쉽게 고칠 수 있겠더라고요. 수리를 해줬더니 주인이 굉장히 좋아하더라는 말을 들었죠. 그땐 그냥 그러고 말 줄 알았어요.(웃음)”

안 씨가 다른 모든 일을 접고 본격적으로 수리업에 ‘올인’하게 된 건 인터넷에 복구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면서 부터다. 게시물이 유명세를 타면서 그에게 망가진 피규어를 맡기고 싶다는 연락이 물 밀듯 밀려든 것이다.

“제각기 간절한 사연을 지니신 분들에게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적당히 오다 끊길 줄 알고 의뢰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끝이 없는 거예요. 좀 잦아들었다 싶으면 또 밀려오고. 그러다보니 계속 이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죠. 지금은 이것 때문에 다른 일을 아예 못하고 있어요.”
부러진 발목 부분에 구멍을 뚫어 황동봉을 박아 넣고 순간접착제로 종아리와 신발을 붙여 준다.

“이 일이 직업이 될 줄은 몰랐다, 결코”


안 씨 이야기를 접한 사람들이 흔히 갖는 두 가지 오해가 있다. 그가 ‘엄청난 피규어 마니아일 것’, '이 일로 돈 방석에 올랐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안 씨는 오히려 ‘그 반대’라며 고개를 젓는다. 

“의뢰가 들어온 피규어들은 대부분 제가 잘 모르는 캐릭터예요. 피규어에 대한 애정도 별로 없습니다.(웃음) 제가 이걸 직업으로 삼게 될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이 일이 돈이 되는 직업도 아니거든요. 새 제품 가격보다는 낮아야 하니까 무작정 공임을 높이기 힘들어요. 손기술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박리다매로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도 아니고요. 수요는 넘쳐나는데 공급이 적은 이유죠.”
같은 방법으로 무릎 역시 몸통에 접착, 황동봉을 넣어 접착부를 지지해줘야 다시 부러질 확률이 낮아진다.
안 씨의 말처럼 피규어 수리업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좋은 직업은 아니다. 피규어를 판매하는 곳이 갈수록 늘고 있지만 전문 수리 업자는 쉽게 찾기 힘든 이유기도 하다. 게다가 창작자의 자존심 문제 역시 큰 심리적 장벽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원래 하던 영상 일도 그렇고 프라모델을 만드는 일도 ‘창작’이잖아요. 시작부터 끝까지 제 손으로 완성하는 사람이었는데, 피규어 수리는 남이 만들어 놓은 걸 손대는 일이잖아요. 자존심이 상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피규어 전문 제작자들이 복구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거고요. 그래서 저도 처음에는 방법만 알려주면서 ‘직접 해보세요’ 한 적도 있죠. 사람을 대해야 하는 일이니까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도 엄청나고요. 이래저래 정말 힘든 일인 건 사실이에요.”


그럼에도 손놓지 못하는 이유…“이 일이 가진 가치”


큰 벌이가 안되고, 아주 좋아하는 분야도 아니며, 스트레스도 만만찮은 일. 그럼에도 그가 피규어 수리를 계속하는 이유는 딱 하나, “내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다

“일단 피규어는 다시 구하기 힘든 한정판이 많고 보통 예약을 하면 6개월씩 기다렸다 받아야 해요. 그래서 배송 중에 파손이 된다거나 잘못 건드려서 망가지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거의 울면서 전화가 와요. 저한테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거든요. 떨어진 곳 붙여서 사포질하고 비슷한 색 칠해주면 끝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쉬운데 아무나 못하는 거긴 하지만.(웃음)” 
주변부를 마스킹 테이프로 꼼꼼히 감싸준 후 ‘비슷한 색’을 만들어 에어브러시로 칠한다.
‘비슷한 색’을 구현해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안 씨에게 피규어 수리는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 그는 “피규어 때문에 끙끙 앓던 사람들의 고민거리를 내 능력으로 쉽게 해결해줄 수 있는 데서 이 일의 가치를 찾는다”고 했다. 

“피규어를 받아서 장식장에 진열해 놓고 고맙다며 사진을 찍어 보내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복구가 잘 돼서 굉장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 좋죠. 그래서 이 일을 적당한 선에서 그만 두고 싶은데 그걸 못하겠어요. 피규어를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줬다가 ‘이제 그 일 안합니다’라고 할 수가 없는 거죠. 특별한 계기가 생기지 않는 한 계속할 것 같아요.”
반대편 다리도 같은 과정을 반복해주면 복구 완료
안 씨가 그의 일에서 찾은 가치는 ‘생계를 위해 지속적으로 하는 일’이라는 '직업’의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진로와 직업’ 교과서에서는 ‘직업’을 이렇게 정의한다. “직업이라는 말에는 생계 유지의 뜻과 사회적 역할 분담, 그리고 자기 능력의 발현이라는 자아 실현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

글·인포그래픽·영상 촬영= 비즈업 김현주 기자 joo@bzup.kr
사진·영상 촬영/편집= 비즈업 백상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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