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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의 기원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너무나 유명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들 중 하나다(같은 맥락으로 너무나 유명하지만 너무 몰라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모나리자같은 그림도 있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가 피카소에게 의뢰하여 나온 그림으로서, 당연히, 말그대로 전쟁의 참상을 그렸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인 시각에 도전하는 이론이 나왔다. 한 마디로, 게르니카는 이기주의가 충만했던 나르시스트, 파블로 피카소의 가족 초상화(참조 1)라는 얘기다. 스페인 내전에서 폭격을 당했던 게르니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José María Juarranz(참조 2)라는 스페인의 한 연구자가 저서, “La obra maestra desconocida”에서 내놓은 이론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복잡한 여성편력을 감추기 위해 인민전선 정부가 의뢰해서 그린 그림인양 행세했었다. 사실 피카소의 모든 그림은 자화상의 다양한 변형에 불과하다.

후아란스 교수는 피카소를 벨라스케스, 혹은 고야보다 뛰어난 르네상스 예술가에 비유했다. 또한 대단히 비-정치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에 일절 관심을 주지 않았고, 그에 따라 게르니카에도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는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파리(la Rue des Grands-Augustins)에 있던 피카소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던 폴 엘뤼아르(Paul Éluard)와 크리스티앙 제르보스(Christian Zervos). 그리고 후안 라레아(Juan Larrea) 중 한 명이 그림을 보고 “게르니카!”라 외쳤고, 그게 그대로 제목이 됐을 뿐이다. 그랬더니 피카소가, “너네들이 그리 부른다면, 게르니카라 하지 뭐”라 답했다고 한다(참조 3).

그림을 보면, 종래 스페인(정부이든, 파시스트이든)을 상징한다든 황소는 피카소 자신이라고 한다. 말은? 당시 이혼 중이던 부인, Olga Khokhlova이다. 폭력적인 묘사를 통해 관계 악화를 그리고 있다.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그림은 애인 중 하나인 Marie-Thérèse Walter과 사망한 그녀의 아이다.

램프를 든 여인은 보통은 인민전선 정부를 상징한다고 하나 실상은 피카소의 어머니. 1923년에 제작한 어머니 초상화와 비슷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이 어머니의 아래, 달리는 아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뭔가 외치는 여자가 있다. 1884년 말라가 지진을 의미한다고 한다.

맨 아래, 누워 있는 남자는 피카소의 막역한 친구였던 Carles Casagemas, 여자친구인 Germaine Pichot에게 차여서 권총 자살(참조 4)한 인물이다. 워낙 충격이 커서 피카소의 “블루 피리어드”를 만들어버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림 속의 사내가 들고 있는 잘린 칼이 바로 권총을 상징.

그렇다면 게르니카는 크게 3 부분으로 구성된 셈이다. (1) 왼쪽에는 이혼 중인 처 올가(황소에게 막 뭐라 말하는 모습이라 왠지 모르게 납득…), (2) 오른쪽에는 말라가의 지진, (3) 아래에는 자살한 친구. 왠지 모르게, 입체주의/초현실주의/블루피리어드가 모두 모인 모양새다.

어떠신가? 작가의 말대로 Si non è vero, è ben trovato(참조 5)인가?

주말 특집. 믿거나, 말거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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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스페인의 유명한 가족 초상화가 바로 벨라스케스의 “Las Meninas”와 고야의 “La familia de Carlos IV”이다. 그래서 아래 단락에 발라스케스와 고야를 비교했던 것이다.

2. Institutos de Bachillerato의 지리학/역사학 교수였고, 게르니카만 14년 동안 연구했다고 한다.

3. 당시 파리에서 게르니카 폭격에 반대하는 시위 때문에 제목이 붙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그 시기에 그런 시위는 없었다고 한다.

4. 제르맨은 유부녀이자(...) 그림 모델이었으며, 그녀의 친구랑 피카소가 사귀고 있었다. 위에 언급한 Casagemas가 자살한 뒤, 그녀는 피카소랑 사귀었다.

5. Si non è vero, è ben trovato. / 사실이 아니더라도 잘 만들었죠. - 16세기 때부터 이탈리아어에서 쓰인 표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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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그럴싸한데요. 어마어마한 여성편력임을 보유한 나르시스트임에 입각했을때!
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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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타로 카드
https://www.vanityfair.fr/savoir-vivre/story/le-tarot-de-salvador-dali/10573?fbclid=IwAR2HjALqldM0bUymxnL6zAuHXbsPPfsQOprHD-DppdxqDfqtdvMevN_Cfq4 뭔가 아쉬워서 하나 더 쓰는 주말 특집, 살바도르 달리가 정말 온갖 미디어에 다 손을 댔다는 사실(참조 1)을 알고 계시면 이 또한 역시나, 하실 수 있겠다. 살바도르 달리가 직접 제작한 타로 카드들이기 때문이다. 올해 연말 혹은 내년 연초 선물로 제격 아닐까? 원래는 절판됐던 것을 독일의 아트북 전문 출판사인 타셴에서 다시 판매 시작했다(참조 2). 60불 밖에 안 하니까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구매 가능(그리고 인쇄된 책은 관세는 물론 부가세도 없습니다?). 잠깐, 절판됐었다고 표현했으니, 이미 이전에도 나왔다는 뜻? 그렇다. 이전에 아주 소량의 한정판으로 판매된 적이 있었다. 그 이유가 있는데… 자, 그럼 달리가 어째서 타로 카드를 제작했을까? 원래는 영화 소품으로 내보내려고 했었다. 어떤 영화? 007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 편이었다. 하지만 달리는 비싼 분이다(참조 1). 가격 협상이 안 맞아 결국 그 영화에 소품으로 내보내지 못 했다. 그래서 그냥 소량의 한정판매로 뿌려버린(?) 것(그걸 구매한 이들은 정말 투자를 잘 한 셈이다). 참고로 실제 007 영화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일러스트레이터 Fergus Hall의 타롯 카드(참조 3)를 사용했다. 달리는 짜증이 났다. 그래서 그리던 타로 카드의 “황제” 그림을 007에 나오는 로저 무어가 아닌, 션 코너리를 모델로 해서 그린다(참조 4). 그런데 이 사실 아시는가? 전혀 그런 이미지가 아니고 상당히 흔한 일도 아닌데, 살바도르 달리는 한 아내와 꽤 오랫동안 같이 삶을 살았었다. 러시아(타르타스탄) 출신의 갈라 달리 여사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달리는 아내를 모델로 하여 타로 카드의 황후 그림을 그렸었다. 마술사 카드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말이다. 이쯤 되면 달리 마음대로 막나가는 거냐, 할 수 있을 텐데 달리는 그래도 됩니다, 고객님. 물론 예술사적으로 이 타로 카드의 가치는 션 코너리나 갈라 달리가 아니다. 달리가 고전 그림을 재해석한 카드 그림이 워낙 많아서다. 고전 그림 뿐만도 아니다. 마르셀 뒤샹의 그림을 풍자한 것도 있다(참조 5). 참고로 달리는 이 카드 작업을 10년간 했었다. 한정판 출시는 1984년이었으며, 타로 카드 놀이, 혹은 예언(…)을 할 때 달리가 무엇을 참조해서 그렸는지,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몰라도 된다고 한다. p.s. 자기가 달리의 친딸이라 해서(부관참시까지 하여 수행한 DNA 테스트 결과는 아닌 것으로…) 잠시 세계 뉴스에 올랐던 Pilar Abel씨는 직업이 타로 카드 상담사(?)였다. -------------- 참조 1. 살바도르 달리와 플레이보이(2017년 6월 2일): https://www.vingle.net/posts/2113113 2. The Magician, Death, and the Moon : https://www.taschen.com/pages/en/catalogue/art/all/44640/facts.dali_tarot.htm 3. Tarot of the Witches cards by Fergus Hall : https://www.jamesbondlifestyle.com/product/tarot-witches-cards-fergus-hall 4. 숀 코너리와 로저 무어는 당시 상당한 경쟁 관계였다고 한다. 5. 가령 “컵의 여왕” 그림을 보면 두 가지 그림을 섞어서 뒤틀었다. (1) 프랑수아 클루에(François Clouet)의 엘리자베트 도트리슈(Élisabeth d'Autriche) 초상화(1571) (2)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L.H.O.O.Q.(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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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목요일은 역시 독서지. 그동안 너무 한국 현대미술을 등한시했었는데, 종합적으로 살펴보려면 아무래도 이 책이 좋지 싶다. 두껍지만 타이트하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어지간한 전공은 대체로 서울대학교가 최상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데 미술은 왜 홍익대학교인지 의문을 가지셨다면 좋은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화대학교 교수다.) 한국 현대미술도 다른 나라의 현대미술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됐다고 봐야 할 텐데, 현대의 한국 거의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 베끼기부터가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후 유럽과 미국은 추상화가 점령했다. 이들은 각각 앵포르멜(informel)과 추상표현주의로 나뉘었는데, 전쟁 중 미술계의 폰 브라운들(가령 뒤샹이나 이브 땅기) 미국도 드디어 미술에 한 몫 끼기 시작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전쟁을 누가 구해주고, 누가 한국에 문명을 가져왔다? 일단 미국이다. “일단”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우리가 식민지를 겪었기 때문인데, 그때문에 일본 유학파 출신도 많았다. 즉,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들은 미국에서 유행한 추상표현주의를 따라 그리면서도, 일본을 통해 접목한 유럽식(특히 프랑스) 전통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서는 자기들을 “앵포르멜”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미국+일본(프랑스)이 우리나라 현대미술이라는 얘기다. 둘은 한국에서 꼭 구분되지 않았고 합쳐지기도 했었다. 물론 이 “앵포르멜”이라 불리우는 한국식 추상표현주의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다른 식으로의 탈출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화가가 둘 등장한다. 박서보와 이우환이다. 분위기가 베끼기에서 좀더 “한국화”가 되면서 단색화가 나타난 것이다. 단색이라고 해서 그냥 로스코 류를 연상하실 수 있을 텐데 이게 그렇지 않습니다. 제일 비정치적이랄 수 있을 단색으로 작품을 그릴 수밖에 없는 환경과 위에 거론한 중요 인물 두 명 때문이다. 박서보는 한국에서 활동했고 이우환은 일본에서 활동했다(참조 1). 둘이 협력관계로 지내다가 나중에 라이벌 비슷하게 변해가는 과정이 한국 현대미술의 회화 쪽 전개양상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참조 2). 박서보가 한국적 모더니즘에 천착한 반면 이우환은 모더니즘을 해체하고 한국적인 것을 비껴갔었다. 물론 한국 현대미술은 베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신 조류인 팝아트는 물론 하이퍼리얼리즘도 그대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조상현이나 변종곤과 같은 작가를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뒤샹을 따라한 김구림도 생각할 수 있다. 이른바 K-모더니즘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조류가 비단 회화만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예술에도 적용됐다. 그런데 위에 사례로 나온 작가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미술계는 여자 작가들의 존재를 잊을 수 없을 일. 예전부터 나혜석과 천경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작가들이 누가 있었는지 알려주고 있으니 확실히 종합적으로 훑어보기에 제격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미국과 유럽(일본)을 베끼면서/들여오면서 끊임 없이 우리식으로 바꿔버린 이야기이다. 즉, “문화번역은 근본적으로 오역이다. 그러나 오역이야말로 번역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p. 197)”. -------------- 참조 1. 박서보가 홍익대를 나왔었고, 그가 이끄는 화가군이 우리나라 미술의 주류를 장악했었다. 이우환은 서울대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평론가 활동을 하고, 그 다음에 화가로 나서면서 박서보를 활용(?)했다. 물론 둘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2. 물론 이건 절반의 진실에 해당된다. 여성화가들의 존재와 함께 민중미술이라는 독특한 영역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무슨 약을 빠셨습니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보면 물을 만한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어쌔신 크리드 얘기가 아니다). “무슨 약을 하셨길래…?” 최근에 발굴되어 아부다비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세계의 구세주(Salvator Mundi, 참조 1)를 보자. 예수의 눈이 붉은 색이고 표정이 매우 미묘하다. 한 마디로 약에 취한(stoned 혹은 high) 모습이다. 혹시 레오나르도도 마리화나 물고 그림을 그렸던 것 아닐까? 아니, 마리화나가 당시 북부 이탈리아에 있기는 있었나? 짧은 주말 특집 답변: 예, 있었습니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1484년 교황 자리에 오르자마자, 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라는 칙서(참조 2)를 발표한다. 여러가지 악마적 행위(즉, 마녀 행위다, 참조 3) 등등을 금지하는 칙서인데, 이 중에 마리화나(허브로 표현되어 있다)가 있다. 성체 대신 약을 빠는 행위가 미사 중에 있었다는 것인데... 이때는 레오나르도가 한창 일하던 시기임에 주목. 물론 믿거나, 말거나의 얘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눈빛은 물론 표정도 상당히 high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느낌이다. 게다가 레오나르도는 말그대로 만물박사였기 때문에 “허브”에도 분명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참조 4). 하지만 하필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현대적인 관심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기가 시작이기 때문에, 다 빈치의 양성애적인 성향과 함께 마리화나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타부”였다. 결론은, 재즈의 도시 뉴올리언즈(혹은 뉴욕), 현대 예술의 도시 파리처럼, 약 빤 르네상스의 도시(참조 5) 피렌체...라 할 수 있을지도. 증거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모나 리자도 약 빨아서 나온 그림일 수 있겠다. ---------- 참조 1. 4,500억 달러에 매각됐다. 뉴욕타임스는 이 그림의 실구매자가 우리 모두 주목하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라 보도했는데(크리스티는 보도를 부인했다), 아무래도 사우디아라비아보다는 UAE의 루브르에 내거는 편이 그에게 더 나았으리라. 2. 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 https://sourcebooks.fordham.edu/source/witches1.asp 3. 씐나는 마녀 생활(2017년 5월 13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5205402364831 4. 거 왜, 다 빈치의 블로그 출판물(...)인 Codex Atlanticus에는 분명 식물학 챕터도 있다. 5. 기사는 소설의 도시 런던을 거론하고 있는데, 소설의 도시는 필자에게는 애석하겠지만 파리가 아닐까. 19세기 중후반을 따진다면(그 이전에도?) 당시 미디어 제국은 프랑스였지 영국은 아니었다.
당대 최고 화가의 모델이자 인기남들에게 둘러싸인 여성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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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예술작품들
https://www.spiegel.de/international/zeitgeist/hidden-legacy-time-for-a-new-look-at-nazi-art-a-1281602.html 나치가 독일을 통치했던 기간이 거의 12년인데, 이 긴 세월동안 나치가 탄압했던 예술 작품들은 지금도 퇴폐예술(Entartete Kunst) 장르로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당연히 나치가 좋아했던 예술작 품들도 존재하고, 나치를 찬양한 예술 작품들도 분명 있기는 있다. 혹시 이거 연합군 측에서 파괴했을까? 아니다. 미국과 독일의 모처 창고에 그냥 모셔두고 있다. 독일에 있는 작품들부터 얘기해 보자. 베를린에 있는 독일 역사 박물관이 Spandau 창고에 900여 나치 작품들을 그냥 모셔두고 있는 이유는 “잊혀지기” 위함이다. 나치 찬양 예술 작품들은 일종의 “타부”이고 그렇게 반성 좋아하는 독일도 그 시절 친나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부담스러워한다. 미국은 워싱턴 D.C. 근교의 Fort Belvoir에 있는 군용(!) 창고에 있다. 여기에 히틀러의 두상도 고이 모셔져 있다. 전쟁 이후 미군은 대략 9천여 점의 작품을 독일로부터 가져온다. 물론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독일에 돌려준 작품들도 좀 있기는 한데, 친 나치 작품들의 영향력이 우려되는 민감한 작품들은 그냥 미국이 갖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독일측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에 있는 나머지 작품들도 독일로 다시 반납해야 할까? 미군 대변인은 송환할 계획이 현재로서는 없다 답했고, 독일 문화부는 답변을 독일 외교부로 돌렸다. 게다가 그냥 있다는 점만 알 뿐, 미국에 정확히 어떤 작품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독일도 잘 모른다고 한다. 자… 혹시 이 두 곳 외에, 다른 미술관이나 개인 소장 작품이 있을까? 물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예외가 없지 않지만 감히 전시까지는 못 하는 듯 하다. 그래서 당시 시절 친 나치 작품들에 대한 완전한 연구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여론도 정말 그런 작품의 존재 자체를 대단히 부담스러워 한다. 에밀 놀데 전시회(참조 1)도 결국은 평이 별로 안 좋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냥 없는 셈 칠까? 그냥 나타났다 사라진 UFO처럼 여기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오히려 미국이 연구한 것이 있다(참조 2). 게다가 미군은 내년, 바로 저 장소에 육군 미술관을 개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과연 친 나치 작품들을 그때 공개할까? 게다가 그 연구를 보면,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친 나치 작품들 중에 모더니즘 작품들도 꽤 존재한다. 나치가 모더니즘을 싫어한 건 맞는데, 그냥 일관성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예술가들의 문제도 있다. 타락했다는 비판을 받은 후, 자기 스타일을 고쳐서 승승장구하다가, 독일 패전 이후 다시금 추상 스타일로 바꿔서 거의 꺼삐딴 리 급으로 계속 성공한 작가도 있는 모양이다. 즉, 에밀 놀데에 대한 독일의 차디찬 반응이 좀 위선성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예술계가 실질적으로는 나치 청산을 못 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게 다 인간의 삶보다 그림에 훨씬 더 신경썼던 독재자 한 명 때문이라고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 참조 1. 에밀 놀데(2019년 6월 19일): https://www.vingle.net/posts/2630740 2. 가령 뉴욕 St. John’s University의 Gregory Maertz 교수가 쓴 Nostalgia for the Future(2019년 5월) : https://cup.columbia.edu/book/nostalgia-for-the-future/9783838212814
가브리엘레 뮌터
주말은 역시 전시회 아니겠는가. 큰 마음 먹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전시회 정보다. 제목: 가브리엘레 뮌터, 단도직입적인 그림(GABRIELE MÜNTER. MALEN OHNE UMSCHWEIFE) 기간: 2017년 10월 31일 - 2018년 4월 8일 장소: 독일 뮌헨 렌박하우스(Lenbachhaus) 웹사이트: http://www.lenbachhaus.de/ausstellungen/gabriele-muenter/ 가브리엘레 뮌터는 당연히 별도의 소개가 필요한 인물인데, 또 그렇지도 않다는 점이 함정이다. 가령 까미유 끌로델을 얘기할 때 오귀스트 로댕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이다. 바실리 칸딘스키 때문이다. 물론 뮌터의 경우 끌로델보다는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점이 함정. 그래서 영화화가 안 됐을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칸딘스키랑 백년해로한 것도 아니다. 대략 10년 정도 같이 살았을 뿐(선생과 제자로 만나서 사랑했던 건 로뎅의 경우와 동일하다). 게다가 상당히 삶도 주체적이었다. 바로 “청기사파(Der blaue Reiter)”의 주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뮌헨의 렌박하우스가 세계에서 아마 청기사파 그림을 제일 많이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청기사파의 본거지였기 때문이기도 한데 애초에 이 청기사파는 무슨 특별한 미술 사조를 상징하는 파벌이 아니었다. 뮌헨 신인 작가 협회(NKVM)에서 칸딘스키 그림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렸다 하여 항의의 의미(참조 1)로 바이에른 진더스도르프의 한 커피 탁자에서 만들었다(참조 2). 다만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청기사파도 칸딘스키를 언급하면서 잠시 지나갔을 뿐이다. 하지만 당연히 고향 독일에서는 유명한 화가였고, 히틀러 통치 기간 동안 숨겨왔던 엄청난 그림들을 모두 렌박하우스에 기증했다(이제 렌박하우스가 왜 중요한 미술관인지 아시겠나?). 그래서 이번 회고전은 네 번째. 여기 전시회가 끝나면 미국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에서 8월 19일까지, 그 다음에는 독일 쾰른의 루트비히 미술관에서 내년 1월까지 한다. 다시 뮌터로 돌아와서, 그녀와 칸딘스키와의 관계 때문에 그녀의 그림이 평가절하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독자적인 스타일이 있다. 색깔의 선택은 물론이거니와 유머(!)도 꽤 보이기 때문이다(참조 3, 4). 그걸 보이려는 것이 이번 전시회 목표 중 하나다. 다만 링크한 FAZ의 이 기사가 뮌터를 몰랐던 사람이 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듯 하다. 뮌터에 대한 평가가 변화하는 상황을 복잡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칸딘스키 및 청기사단하고만 관련지어 얘기하는 것도 좀 협소하다. 그녀의 그림이 청기사를, 독일 표현주의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녀도 당당히 미술사에 이름을 크게 올릴 만하다. ---------- 참조 1. 이 협회(Neue Künstlervereinigung München)는 뮌헨의 표현주의 화가들 모임으로서 유명했으며 칸딘스키 본인이 협회장을 지낸 적도 있었는데, 칸딘스키의 추상화 경향을 협회측이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후에 히틀러의 퇴폐 예술 지정으로 협회 자체가 사라졌다.) 2. 커피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여러분. Der Sindelsdorfer Malerweg: http://www.sindelsdorf.de/seite/272861/sindelsdorfer-malerweg.html 3. 가령 기사에 나와 있는 “탁자에 앉은 칸딘스키와 에르마 보시/„Kandinsky und Erma Bossi am Tisch“(1912)”를 보시라. 4. Gabriele Münter: Mit Farbe ins Freie(2017년 12월 29일): https://derstandard.at/2000071147757/Gabriele-Muenter-Mit-Farbe-ins-Fre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