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너무나 유명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들 중 하나다(같은 맥락으로 너무나 유명하지만 너무 몰라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모나리자같은 그림도 있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가 피카소에게 의뢰하여 나온 그림으로서, 당연히, 말그대로 전쟁의 참상을 그렸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인 시각에 도전하는 이론이 나왔다. 한 마디로, 게르니카는 이기주의가 충만했던 나르시스트, 파블로 피카소의 가족 초상화(참조 1)라는 얘기다. 스페인 내전에서 폭격을 당했던 게르니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José María Juarranz(참조 2)라는 스페인의 한 연구자가 저서, “La obra maestra desconocida”에서 내놓은 이론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복잡한 여성편력을 감추기 위해 인민전선 정부가 의뢰해서 그린 그림인양 행세했었다. 사실 피카소의 모든 그림은 자화상의 다양한 변형에 불과하다.
후아란스 교수는 피카소를 벨라스케스, 혹은 고야보다 뛰어난 르네상스 예술가에 비유했다. 또한 대단히 비-정치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에 일절 관심을 주지 않았고, 그에 따라 게르니카에도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는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파리(la Rue des Grands-Augustins)에 있던 피카소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던 폴 엘뤼아르(Paul Éluard)와 크리스티앙 제르보스(Christian Zervos). 그리고 후안 라레아(Juan Larrea) 중 한 명이 그림을 보고 “게르니카!”라 외쳤고, 그게 그대로 제목이 됐을 뿐이다. 그랬더니 피카소가, “너네들이 그리 부른다면, 게르니카라 하지 뭐”라 답했다고 한다(참조 3).
그림을 보면, 종래 스페인(정부이든, 파시스트이든)을 상징한다든 황소는 피카소 자신이라고 한다. 말은? 당시 이혼 중이던 부인, Olga Khokhlova이다. 폭력적인 묘사를 통해 관계 악화를 그리고 있다.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그림은 애인 중 하나인 Marie-Thérèse Walter과 사망한 그녀의 아이다.
램프를 든 여인은 보통은 인민전선 정부를 상징한다고 하나 실상은 피카소의 어머니. 1923년에 제작한 어머니 초상화와 비슷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이 어머니의 아래, 달리는 아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뭔가 외치는 여자가 있다. 1884년 말라가 지진을 의미한다고 한다.
맨 아래, 누워 있는 남자는 피카소의 막역한 친구였던 Carles Casagemas, 여자친구인 Germaine Pichot에게 차여서 권총 자살(참조 4)한 인물이다. 워낙 충격이 커서 피카소의 “블루 피리어드”를 만들어버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림 속의 사내가 들고 있는 잘린 칼이 바로 권총을 상징.
그렇다면 게르니카는 크게 3 부분으로 구성된 셈이다. (1) 왼쪽에는 이혼 중인 처 올가(황소에게 막 뭐라 말하는 모습이라 왠지 모르게 납득…), (2) 오른쪽에는 말라가의 지진, (3) 아래에는 자살한 친구. 왠지 모르게, 입체주의/초현실주의/블루피리어드가 모두 모인 모양새다.
어떠신가? 작가의 말대로 Si non è vero, è ben trovato(참조 5)인가?
주말 특집. 믿거나, 말거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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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스페인의 유명한 가족 초상화가 바로 벨라스케스의 “Las Meninas”와 고야의 “La familia de Carlos IV”이다. 그래서 아래 단락에 발라스케스와 고야를 비교했던 것이다.
2. Institutos de Bachillerato의 지리학/역사학 교수였고, 게르니카만 14년 동안 연구했다고 한다.
3. 당시 파리에서 게르니카 폭격에 반대하는 시위 때문에 제목이 붙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그 시기에 그런 시위는 없었다고 한다.
4. 제르맨은 유부녀이자(...) 그림 모델이었으며, 그녀의 친구랑 피카소가 사귀고 있었다. 위에 언급한 Casagemas가 자살한 뒤, 그녀는 피카소랑 사귀었다.
5. Si non è vero, è ben trovato. / 사실이 아니더라도 잘 만들었죠. - 16세기 때부터 이탈리아어에서 쓰인 표현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