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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두 조각난 달(月)

노인은 서찰을 꾹 쥐었다. 그러곤 벌벌 떨며 소맷자락에서 꺼내 자객의 눈앞에 보였다. 자객의 날카로운 칼은 여전히 노인의 목을 겨눈 채 였다.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그 서찰을 오른손에 쥐었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왼손으로 땅을 짚었는데, “내가 이걸 쉬이 너에게 넘겨줄 것 같으냐!” “으윽-!” 흙을 한 줌 쥐어 재빨리 자객의 얼굴을 향해 던지고 노인은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자객은 예기치 않게 흙을 맞아 잠시 휘청이다 이내 무서운 기세로 노인의 뒤를 따랐다. “거기 서지 못 해?!” 노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달리며 서찰을 다시금 소매 폭에 집어넣었다. 발이 닿는 대로 달렸다. 노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빈 가지들을 맨 손으로 쳐내 노인의 손은 이미 피투성이였지만 노인은 멈추지 않았다. “게 섯거라!” 그러나, 거칠 것 없던 노인의 발목을 잡은 것은. “하아…하아…하아…” 발밑으로 아득히 벌어진, 낭떠러지였다. 노인은 탄식을 내뱉으며 더는 발을 내딛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다. 곧 따라온 자객은 노인의 등 뒤에 다시금 칼을 겨누었다. “서찰을 내놓거라! 서찰만 내놓는다면 니 목숨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노인은 돌아,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자객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느덧 달을 가리고 있던 밤 구름이 걷히고, 환한 달이 숲속을 훤히 비추었다. 노인은 자객의 눈 옆에 난 날카로운 칼자국을 보았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짚어도 한참을 잘 못 짚었다.” “…….” “이 서찰이 무엇인지 알고…내 놓으라는 것이냐.” 노인은 작심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 아까완 달리 당당히 곧추 섰다. 자객은 서슬 퍼런 칼날을 더더욱 노인에게 들이밀며 한 걸음 다가갔다. “무엇인지는 내 궁금치 않다. 그저 그 서찰만 무사히 가져오라는 명이 계셨다.” “…….” “네 따위가 감히! 명을 어길만한 분이 아니시다! 조용히 그 서찰만 내놓고 목숨을 부지하거라!” 노인은 자객의 말에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러곤 이내 실성한 사람처럼 꺼이꺼이 웃었다. 그런 노인의 눈에 눈물마저 설핏 어렸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지금 이게 뭐하는…” “누구의, 어느 귀하신 분의 명이 계셨대도, 그 분이 설령 주상 전하시라고 해도!” “…….” “나는.” “…….” “이 서찰을…못 내놓는다!” “니가 정녕 죽고 싶은…”“달의 기운이…결국, 두 동강 날지라도!” “……?” “달의 기운을! 결코!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천 벌을 받을 놈들아!” 노인은 서찰을 꾹 쥔 채 결국, 낭떠러지 밑으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 * * “뭣이?! 죽…어?” 우상의 집, 유정은 일전의 윤화의 뒤에 붙였던 무사에게서 노인이 서찰을 쥐고 낭떠러지 밑으로 몸을 던져 죽었단 소식을 듣곤 크게 노하였다. “아니! 그것이 뭐 그리 중헌 것이 기에! 몸까지 던져! 쯧쯧…미련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송구하옵니다.” “그래서 그 무당년은? 어찌되었어?” “그것이…” “놓치기라도…했단 말이야?!” 유정은 주먹으로 상을 내려치며 이를 악물었다. “그것이…노인을 뒤쫓고 있을 때 이미 처소를 떠난 듯 했사옵니다.” “어찌 일 하나도 제대로 처리 못 해! 쯧쯧!” “송구…하옵니다.” 유정은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리를 짚었다. 한숨을 크게 내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대체…목숨까지 바쳐가며 지키려했던 그것이 무엇이었을꼬…” “노인이 몸을 던지기 전에 달의 기운을…막지는 못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무사의 말에 유정은 감쌌던 머리를 들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달의…기운?” “예. 달의 기운이 두 동강 날지라도, 막지는 못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달의 기운이라…대체 좌상과 그 무당년은 무슨 관계며…끝까지 지키려했던 그 서찰 속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그리고 그 노인은 그 서찰을 들고 어디로 향하려 했던 것일까.” “…그래도 죽은 것이 확실하오니 심려 마시옵소서.” “어찌하였든 그 년의 뜻은 꺾은 것 같으니. 이쯤에서 갈무리 하지.” “……” “오늘 밤의 있었던 일은 자네와 나. 둘만 알아야 한다. 밖으로 새어나가선 아니 될 것이야.”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유정은 입술을 꾹 깨문 채 영 찜찜한 기운을 가시지 못했다. “그년을 당장에 여기로 끌고 와 문초라도 했어야 했는데. 못내 그 년을 놓친 것이 찜찜하구나.” * * * “부인. 이제 채비를 해야겠소.” 정경은 한 시진 전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젠 채비를 해야 한단 좌상의 말에 둘 째 아기인 채희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부인…이제 그만 채희를…” “대감…흐윽…이 어린 핏덩이를…어찌…어찌 보낸단 말이어요.” “그래야만 이 두 아이를 살릴 수 있다 하지 않았소. 마음…굳게 먹읍시다.” “흐윽…아가…채희야…” “믿을만한 보모와 주한이 채희와 함께 가지 않소…염려 마시오.” “…흐윽…흐윽 채희야….” 밖에선 이미 채비를 마친 보모 ‘화령’과 무사 ‘주한’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안채에서 들려오는 정경의 울음에 좌상의 노비들은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혹여 아가씨들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은 아니냐며, 수군댔다. 좌상 댁에서 오랜 세월을 지낸 정경부인 ‘채화’와 연이 깊은 노비, ‘화령’은 자처하여 보모가 되겠다, 했다. 오랜 세월 정경에게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하였기에. 정경의 울음이 커지자 화령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채희야…흐윽…” “채희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곧 좌상은 젖은 눈동자로 터덜터덜 안채를 나섰다. 곧 쓰러질 듯한 좌상의 행세에 노비들은 더더욱 안절부절 못했다. 좌상은 넋이 나간 얼굴로 안마루에 서서는 힘겹게 입을 떼었다. “…둘 째…아이가…” “…….” “죽었다.” “대, 대감마님!” “대감마님!” 둘째 아이가 죽었단 좌상의 말에 노비들은 죄다 땅바닥에 엎드렸다. 무사 주한과 보모 화령은 기다렸다는 듯, 안채로 들어섰다. 안채에선 정경의 울음이 더욱 커졌다. 곧 보모 화령이 포대기에 쌓인 채희를 조심히 안고 나섰고, 그 뒤를 주한이 뒤따랐다. “아이고! 대감마님!” “세상에, 무슨 일이야!” 정경은 안채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꺼이꺼이 울음만 터뜨렸다. 좌상은 화령의 품에 안긴 채희를 보듬어 안았다. 세상모르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채희. 좌상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채희를 꾹 끌어안았다. “아가…아가 미안하다…” “대감마님….” “세상에 나와, 채 눈도 뜨지 못하고 어미 품에서 떠나는 이 어린 것을.” “…….” “부디 천지신명께서 보살펴 주십시오.” 반 시진 전만해도, 밤하늘을 환희 비추던 달빛이, 곧 들이닥친 먹구름으로 인해 뿌옇게 뒤덮이고 말았다. 짙은 어둠이 깔린 좌상 댁에선 차마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노비들도 모두 숨죽여 울어야 했다. * * *
한주가마무리도어가용,
즐거운주말되셔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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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억..., 이렇게 아이가 바뀐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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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0. 나는 그의 세컨드였다.
‘양수정.’ 그에게서 들었던 ‘수정’이란 이름이었다. 저번에 팔을 다쳐 병원에 잠깐 입원했을 때도 기태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수정’이란 이름을 내뱉었다. 그리고 수정이란, 그 여자 역시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보일 때, 남자친구와 헤어질 뻔 하였다고, 그런데 헤어지지 않고 잘 풀었단 그 얘기를 한 적 있었다. 모든 것이 그제야 제자리를 찾아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무엇인가 정리되지 못한 그 느낌, 흩어져 있는 것만 같았던, 마치 퍼즐 조각 같은 것들이 이제야 하나 둘, 자리를 찾은 듯했다. “오호라…왜 울어, 갑자기.” 도헌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로라의 어깨를 감쌌다. 로라는 애써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문 채 괴로운 듯 이마를 짚었다. “내가…내가 잘 못 한 것 같아…” 자신이 잘 못한 것 같다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애써 꾹꾹 참으며 괴로워하는 로라였다. 도헌은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 지, 어리둥절한 채로 로라의 어깨를 감싸다, 이내 자신이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로라와 눈을 맞추었다. “누나…무슨 일인데, 말해 봐.” “구도…발.” 로라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도헌을 바라보았다. “니 말대로…” “…어?” “차 선생님….” “……?” “여자 친구가…있었나 봐.” * * * “일단 물어 봐, 누나.” 여전히 진정하지 못한 채, 몸을 파르르 떨며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로라를 부축한 채 도헌은 힘겹게 그 말을 내뱉었다. 집 근처,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둘. 로라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땅바닥을 쳐다보았다. 도헌은 그런 로라가 안쓰러워 한숨만 푹, 푹 내쉬었다. “뭐라고…뭘…어떻게 물어봐야…하는데.” “당장 정리할 수 있어? 여자 친구가 있는 것 같단, 그 누나의 추측 하나로.” “…….” “그렇게 좋아하는 벤츠남을 다 정리하고 빠이빠이, 할 수 있느냐고.” 현실적인 도헌의 말에, 로라는 다시 한 번 가슴이 콱, 막히는 듯했다. “그 여자의 연애중이란, 그 세 글자에 그 남자의 모든 걸 정리할 수 있느냐고.” “…….” “대답해 봐.” 도헌의 물음에…, 로라는,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파왔다. 가슴이…찢기는 듯한 격한 고통이 밀려왔다. 로라는 다시금 얼굴을 감싸고 엉엉, 목 놓아 울어버렸다. “뭘…어떻게 하라는…거야, 대체…흐윽…나더러…나더러 어쩌란 거야…” “어쩌라는 게 아니라!” “…흐윽” “바보 같이 울기만 하지 말고! 당장 그 자식한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라고.” “…뭐라고 물어봐! 그러니까! 내가 세컨드냐고?! 여자 친구 있었느냐고?! 그렇게 내가! 우스웠느냐고?!” “오호라…”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냐고?! 그만큼 내가! 만만했냐고?!” 그렇게 소리치며 로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줄줄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벅벅 닦아내며 휘적휘적 앞서 걸었다. “누나!” “따라 오지 마.” “…어디 가는데요!” “따라 오지 말라고!” 애꿎은 도헌에게 그렇게 화를 내고서 로라는 휘적휘적 정처 없이 앞서 걸어 나갔다. 도헌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정신도 없이 두고 간 로라의 가방을 챙겨 들곤 터덜터덜 로라의 뒤를 따라 걸었다. 로라는 자신의 뒤를 도헌이 따르는 지도 모른 체, 연신 손등으로 눈물만 벅벅 닦아내며 하염없이 걸었다. “하…내가 이럴 줄 알고…그렇게 말렸던 건데…하…진짜.” 도헌은 한숨만 푹, 푹, 내쉬며 로라의 뒤를 말없이 따르기만 했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 도헌은 비틀거리며 걷기만 하는 로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이건 아니다 싶어 휘적휘적, 앞서 걸어가는 로라를 잡아 세웠다. “오호라.” “…헤어져야하는 게 맞잖아.” “…네?” “이제 난…선생님하고 헤어져야 하는 게…맞잖아.” “…누나.” “그런데 진짜…나도…이런 내가 싫은데…” “…….” “이 마음이…왜…그런 나쁜 새끼인 걸…알면서도…알아버렸으면서도…” “……” “말처럼 쉽게…돌아서질 않는 거냐. 어떡하냐, 나.” 로라는 눈물로 화장이 번진 얼굴로, 도헌을 올려다보았다. 도헌은 그런 로라를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자신도 모르게 와락, 로라를 끌어안고 말았다. “오호라…그만 울어라.” “흐윽…그래야…하잖아…흐윽…끝내야 하잖아…” “…….” “근데…왜…나는…아프기만 해…? 헤어지잔 말이…왜 억장이 무너져서 나오질 않냐?” 로라의 말에 도헌은 한숨을 푹 내쉬며 신경질 난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누나 아닐 수도 있잖아. 연애 중, 차마 헤어지고도 못 내린 걸 수도 있잖아.” “…….” “누나 말대로 그 프로필 사진도, 벤츠남이랑 둘이 얼굴 보이게 찍은 것도 아니니, 옛 연인일 수도 있고…미처 여자 쪽에서 정리하지 못한 걸 수도 있잖아.” “…용기가 나질 않아.” “…뭐?” “물어 볼…용기가…이젠 나지가 않아…” “…….” “어차피…답은 정해져 있잖아.” 도헌은 로라를 품에서 놓아주며 걱정스런 얼굴로 로라를 내려다보았다. 로라는 여전히 아픈 얼굴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여자 친구가 설령 있다고 해도…내게…있다고 얘기를 할 사람일까?” “…….” “있는 걸 숨기고 날 만난 사람인데…이제야 내가 알아챘다고 해서 이실직고 할까?” “…….” “이실직고 한다고 한들, 뾰족한 수는 뭐야? 결국 헤어짐이잖아?” “…….” “내가 그 남자의 세컨드로…남을 것도 아닌데.” “…….” “그럼…전 여자 친구라고 해도…내 마음이 편할까?” “…….” “여자 쪽에서 미처 정리 되지 못한 것이라고 해도…내 마음이…이 모든 걸 납득할 수가 있을까?” “…누나.” “결국 헤어짐이잖아. 결국…그것뿐이잖아.” “…….” “결국 그것뿐인데…내 마음이…그 결국을.” “…….” “못 받아들인다잖아!” 로라는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믿었던 사람, 내가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었던 사람. 모든 것은 부질없었다. 부질없다는 것을 로라는 애초에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아니라고 해도 이 남자만은 다를 것이다, 내가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 미련함에 배신을 당하고도 로라는 또다시 믿어 버린 것이었다. “누나.” 자신을 두고도 양다리를 걸쳤던 자신의 구 남친, 이현우 역시 그녀에게 그렇게 큰 배신과 아픔을 주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땐 이현우가 바람피우는 것을 알아챘을 땐, 니가 감히?, 황당함과 당황함이 먼저였고 어떻게든 그 뻔뻔한 낯짝을 면전에 두고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 주어야 겠다, 벼르고 벼리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번은…그냥 너무도. “너무…너무 아프다…도헌아….” “…….” “내가…그 사람의…세컨드…였다는 게…믿었던 그 사람의…세컨드 였다는 게…” “씁. 그런 말 하지 마. …입에 담지도 마요.” “…구도헌.” “누나 잘 못 아니야. 당연히 그 개자식 잘 못 이지. 누가 세컨드래.” “…….” “누가 누구 세컨드야. 그런 더러운 단어 입에 담지 마. 그런…생각…하지도 마요.” 도헌은 로라를 다시금 따스하게 안아 주었다. * * * “오빠 배고프지? 어디 들러서 저녁이라도 먹고 들어갈까?” “피곤하다. 바로 어머님 별장으로 가자.” 기태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곤 눈을 감았다. 운전을 하며 슬쩍 기태의 표정을 살피던 수정은 한숨을 내쉬며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기태는 온통 로라의 생각뿐이었다. 낮에 잠깐 보았을 때, 표정이 좋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직까지 전화도, 문자도 한 통 없는 그녀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기태는 눈을 떠,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여전히 그녀에게선 연락 한 통 없었다. “하…” “뭐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는 거야?” “알 거 없잖아.” 기태는 신경질적으로 그렇게 말을 내뱉으며 대체 왜 연락이 한 통 없는 것인 지,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인 지, 평소와 같지 않는 로라의 행동에 걱정과 답답함이 밀려왔다. 기태는 창문을 열어젖히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오빠, 옛날엔 내 앞에서 담배 꺼내지도 않더니…요샌 아무렇지 않게 핀다?” 수정의 말에 대꾸도 않은 채, 기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음이 심란했다. 자신이 먼저 문자라도 보내볼까, 메시지 창만 수십 번도 더 열었다, 닫았다 반복한 그였다. 그런 낯선 기태의 모습에 수정은 모든 걸 다 알면서도 입술만 꾹 깨문 채, 아는 체 하지 않았다. 그에게 여자 생겼다는 것을, 그리고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태는 지금 그 여자에게 단단히 빠져 있다는 것을. 지금껏 기태에게서 보지 못했던 모습을, 이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게 하고 있다는 것을. - 띵동. 그때, 잠잠하던 기태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한 통 도착하고 동시에 기태와 수정의 시선은 휴대폰으로 향했다. - 선생님, 통화 가능 할까요? 로라였다. 통화 가능하냔, 로라의 물음에 기태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동시에 눈두덩 이처럼 불어나던 걱정이 사르륵, 녹고 말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기태는 피식,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요 앞 휴게소에 잠시 들리자.” * * * 곧, 기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로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문자를 보낸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울리는 로라의 휴대폰 벨소리에 덩달아 도헌의 심장도 철렁 내려앉았다. “뭐라고…하려구요.” 오히려 로라보다 더 사색이 된 얼굴로 도헌은 로라의 팔을 쥐었다. 로라는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굳은 얼굴로 말없이 휴대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한 번 꾹, 깨물곤. “선생님.” 도헌은 어쩐지 힘들어 보이는 로라를 바라보고 있기 힘들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로라씨. 무슨 일 있어요?” 한없이 다정한 사람. 어제와 다를 것 없이, 자상한 사람. 로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저…술 마신 것도 아니구요.” “네?” “맨 정신인데요…제가 원래 뭐 하나든, 마음에 못 담아 두고 있어서요. 담아두고 지내지를 못하는 성격이라 서요. 꼭…물어보고 싶은 게 있거든요.” “네? 저한테요?” 조금은 울음 때문에, 떨리는 로라의 목소리. 도헌은 심란한 마음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었다. “선생님.” “네, 말씀하세요, 로라씨.” “…혹시.” “…….” “여자 친구…있으세요?” 결국, 묻고 말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그 말을 내뱉고 나자, 로라는…이내 후회가 밀려 왔다. “네…? 그게 무슨.” 황당하다는 듯, 그게 무슨, 하고 답하는 기태의 목소리도 조금은 떨렸다. 괜한 질문을 한 것인가. 무슨 대답을 들으려고…결국 이 질문을 하고 만 것일까. 마치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듯, 로라의 심장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질문 그대로예요. 선생님…여자 친구…있어요?” “하하하하.” 로라의 질문에, 기태는 그만 호탕하게 웃고 말았다. 로라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파르르 떨리는 오른 손을 꾹, 주먹 쥐었다. “아, 웃어서 미안해요.” “…….” “너무 진지한 것 같아서요, 로라씨가.” “…….” “있죠, 당연히.” 있죠, 당연히. 란 그의 대답에 로라의 심장은 땅 끝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멀리서 도헌이 걱정스런 얼굴로 로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네?” “있죠. 무슨 질문이 그래요.” “…선생님.” “로라씨가 제 여자 친구잖아요.” “…….” “무슨 일 있었어요? 목소리가 너무 안 좋다.” 결국…결국 이거 구나. 로라는 피식,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러곤 이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제가…선생님 여자…친구라구요.” “네?” “그것 말곤…정말…없어요?” “어디서…무슨 소리라도 들은 거예요? 왜 그래요, 갑자기.” 기태의 표정은 그제야 굳고 말았다. 혹시 로라가 수정과 자신의 관계를 눈치 채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저 멀리 수정이 커피를 사들고 이쪽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기태는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버렸다. “아뇨. 무슨 소리를…들을 게 어디 있어요. 그냥요.” “네?” “선생님하고…만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 “아니, 그 전부터.” “…네.” “선생님께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한 번도 제대로 물어 본 적도.” “…….” “그리고 대답도 제대로 들어 본 적도 없는 것 같아서요.” “이제 와서…그 질문을…하기엔 좀…늦은 감…있지 않을까요?” 기태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로라에게 물었다. 전화기 너머의 로라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고, 선뜻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내뱉지 못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무슨…일이라도 정말 있는 것일까. “네. 그렇죠.” “…….” “조금이 아니라…많이 늦었죠.” “…….” “그래도 이제라도 그 대답이 듣고 싶어서요.” “갑자…기…말입니까?” 기태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굳어지고 말았다. 어느덧 수정은 기태의 뒤에 와 서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선생님.” “…네.” “정말…그게 다예요?” 정말 그게 다냐는, 로라의 질문에 기태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수정을 한 번 바라보았다. “네. 그게 다입니다. 없습니다.” 수정은 아무것도 모른 체 사들고 온 커피를 기태에게 내밀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 선생님…마지막으로 하나만 더…물어볼게요.” 로라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자신의 왼쪽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의 뻔뻔한 대답에, 이제 로라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듯 했다. “네. 말씀하세요.” “…절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로라의 진지한, 그리고 꽤나 무거운 그 질문에 기태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네. 진심으로. 많이.” “……?” “사랑하고 있습니다.” * * *
드럼통 귀신 1
안녕하세요! optimic입니다! -------------------------- 오늘은 간만에 군대 실화로 가져와 봤습니다! 그냥 소소하고 잔잔한 이야기라 별로 무섭지는 않을 거에요! 재밌게 읽어 주세요! 항상 제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많은 각색과 양념이 들어갔다는 점! 알아주세요! -------------------------- 지난 번부터 쭉 내 글을 봐 오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화천의 모 부대에서 군 생활을 보냈다. 국내 유일 경례 구호가 세 글자인 그 곳. 살면서 '이기자' 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던 그 곳... 그 부대 중에서도, 우리 부대는 구석에 덩그러니 대대 하나만 있는, 어찌 보면 독립되어 하나의 단체를 이루고 있는 대대였다. 우리 대대 안에는 이름 모를 무덤이 하나 있었다. 누가 와서 벌초를 해 주지도 않고, 흔한 비석도 하나 없는. 대대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무덤이었기에, 대대에서 진지공사 및 제초작업을 할 때 병사들이나 간부들이 가서 벌초를 해주곤 하는 무덤이었다. 궁금증이 도진 우리는 간부들이나 누군가에게 이 무덤의 주인이나 사연에 대해 물어보곤 했는데. -아 저 무덤? 주인 있어. 예전에 우리 대대가 만들어질 때 사유지였는데, 거기서 미처 이장을 못 해서 남아있는 거야. 가족들도 와서 성묘도 하고 그래. 라고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곤 했지만, 우리는 그게 거짓말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왜냐면 군생활 내내 밤낮으로 위병소에서 근무를 서는 동안, 명절에도 단 한 번도 가족들이 성묘를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동기들 사이에서는 저 무덤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 훈련받다가 죽은 병사 혹은 간부 아닐까? - 븅신아. 가족들이 다 수습해 가겠지. - 아니, 고아였을 수도 있잖아. - 고아여도 군대에서 죽으면 현충원 간다던데? 국가 유공자. - 아 그래? 아 그럼 뭐지 진짜? - 혹시 막 누가 살인하고 몰래 묻은 거 아냐? - 에이. 군대에서 누가 살인을 해. 해도 걸렸겠지. 븅신이냐? - 말이 심하네... 실없는 소리와 함께 그 무덤은 우리에게서 잊혀져갔고, 대대 내에서 하는 훈련 집중 주가 다가왔다. 화기를 다루던 우리 중대는 대대 안에서 훈련을 하게 됐고, 다른 중대원들은 전부 대대 주변 산으로 훈련을 나갔다. 늘 그렇듯, 우리는 커다란 박격포를 짊어지고 대대 구석으로 향했고, 지정된 위치에 포를 설치했다. 어느 정도 다른 대대원들이 저 멀리 산으로 사라지고, 커다란 대대에 우리밖에 남지 않았다. 어느정도 날이 추워지고 스산한 바람소리와 풀벌레 소리들만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을 무렵. -퉁....둥...둥...-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하고, 뭔가 북 같은 걸 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뭔 소리야? -어떤 소리 말씀이십니까? 내 옆에 있던 준서가 내게 물었다. -방금 뭔 소리 안들렸냐? -못 들었습니다. -개 단호하네. 너무한 거 아니냐? -강병장님이 말씀하시면 무서워서 그냥 안듣고 싶습니다. -아냐. 들어. 안 들을 거면 포 청소 다 니가 해. -.... 그렇게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그 때. -퉁.... 둥... 둥...-- -야. 들었지. 이번엔 진짜 확실히 들었지. -드...들었습니다... 근데 이거 그냥 뭐 부딪히는 소리 아님까? -약간 드럼통 같은 거에 뭐가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하다... 무섭다기보단 뭔가 흥미거리였다. 졸음과 추위를 견디며 무작정 앉아서 대기만 해야하는 우리에게, 불규칙적으로 울리는 그 소리는 온갖 상상을 하게 해 주었고, 우리는 결국 산짐승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채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온 직후 우리가 훈련을 했던 그 장소 옆에 무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지만, 우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얼마 후. 당직을 서고 있던 내게 탄약고 근무자들이 근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 아이고 고생하십니다. - 아이고 이 새벽까지 고생 많으십니다. - 특이사항이나 보고할 건? - 아, 강뱀.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납니다. - 뭔 소리가 나? - 막 자꾸 퉁퉁퉁 하는 소리가 납니다. 뭔가를 막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한데... - ...드럼통? - 맞다! 딱 그겁니다. 드럼통 두드리는 소리.. - 진짜 어디 덫에 걸린 동물이라도 있나?? - 아님 막 간첩들이 지들끼리 신호라도 보내는 거 아님까? - 말년에 간첩이라고...? 그 날 새벽, 위병소 근무를 마치고 온 후임들마저 퉁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내게 보고했고, 퉁-퉁-거리는 소리를 내는, 일명 '드럼통 귀신' 은 온 중대에 퍼져나갔고, 며칠 뒤, 당직 준비를 하고 있는 내게 퇴근 준비를 한 중대장이 다가왔다. - 너 오늘 새벽에 탄약고, 위병소 쭉 한바퀴 돌고 와라. - 잘모싼?(잘못들었습니다의 병장 버전) - 드럼통 귀신인지 지랄인지, 뭔 군인들이 통통거리는 소리를 듣고 벌벌 떨어. 니가 가서 싹 확인하고, 원인이 뭔지 알아 와. - 아....알게씀다... 그렇게 중대장은 내게 똥을 투척하고 퇴근을 했고, 그렇게 새벽이 다가왔다. 나는 한껏 무거워진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밖으로 나왔다. 새벽 두시가 넘은 시간에 초겨울 산길을 순찰한다는 건 썩 즐거운 일은 아니였다. 그렇게 손전등 하나를 손에 쥔 채, 칠흑같은 어둠을 겨우 걷어내며 탄약고로 가는 오솔길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 퉁--- 아주 작게 또 누군가가 드럼통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지만, 애써 아닐거라 생각하면서 서서히 올라갔다. - 퉁---퉁---퉁 조금 더 커진 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온 중대가 들은 이 소리는 대체 무엇일까. 정말 간첩인가, 아니면 동물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로 뒤엉킨 머리를 들고 나는 앞으로 발을 움직였다. --------------------------------- 분량조절 실패로 2화로 이어집니다!
나본 관중 (羅本 貫中) A.D.1330? ~ 1400
여기서 다뤘거나 다룰 인물들 중 예전에 다룬, "유일한" 생존인물 정대리 외에 사망인물들 중 가장 최근(?) 인물이자, 유구한 중국역사 속 찰나에 불과하며 의미도 그닥인 삼국시대를 지금의 메이져 에이지가 되는데 큰 공 세운 삼대장 중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인 "나관중" 을 한 번 다뤄 보고자 한다. (삼대장 중 둘은 정사의 진수와 그 정사에 주석자 배송지) 처음 제목보고 '응? 나본이 뭐야? 백종원의 프랜차이즈?' 하시는 분도 계실 수 있겠으나 삼국지 속 인물들이 이름 외에 자(字)가 있듯, 나관중의 본명은 "나본"이고 관중은 그의 "자"인데 이거 모르는 분 많으실 듯ㅎㅎ(이하 나관중) 사실, 이 칼럼연재를 시작하며 어찌보면 정사의 저자인 진수와 함께 가장 먼저 다뤘어야 도리였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치고 의외로 기록이 그닥 많지 않은편. 일단 이 사람의 사망연도는 딱 떨어지는 A.D. 1400이나 출생연도는 추정치가 있을뿐 정확하진 않고 고향도 지금 중국 산시성의 타이위안이란 곳쯤으로 유력하게 거론되긴 하지만 명확한 고향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게 왜 그러냐? 지금이야 삼국지가 동아시아 최고의 히스토릭 미디어떡밥이지만 나관중 생전에는 서점이 있냐, 도서관이 있냐, 스마트폰으로 검색이 가능했냐.... 인쇄라는 개념도 없어, 책 한 권이 두 권 되려면 누가 붓 가져오고 벼루에 먹 갈아 베껴적어야 하다보니 인기를 얻으며 널리 퍼지는데 막대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삼국지연의가 그 넓은, 그러나 유통망이나 인프라가 개떡인 수백 년전 중국일대에서 인기를 끌쯤, 이미 나관중은 천국에서 삼국지속 실제인물들을 만난지도 한참 이후... 게다가 지금 현재의 중국조차 인적사항등록이 누락된 인간이 있는 마당에, 당시 명나라 초기의 일반인의 기록이 세세히 있을리가 없다. 지금에나 그런 베스트셀러작가가 명망높지... 당시의 명은 당연히 관직에 나가 벼슬살이 하는게 갑이였고 그 이하 여타 직군들은 별 큰 인기나 선망직종이 아니였다. 어렸을적에 어떤 어린이였고 소년이였는지는 모르겠고, 여튼 머리 크고는 위 언급대로 벼슬아치가 최고였던 시절이다보니 나관중 또한, 명나라의 인싸가 되기 위해 과거에 응시를 했었나본데, 낙방했다.....;;;; 심지어 세 차례 이상 내리 낙방했다고 한다... 물론, 당시 과거는 지금 한국의 공무원 시험 따위와는 댈게 아닌 극악의 난이도여서 벼락치기 좀 했다고 붙는 그런건 아니였어서 수년간 공부했어도 수 차례 물 먹는 사람들이 많은건 사실이였지만, 왠지 뭔가 천재작가 이미지의 나관중조차 여러 번 불합격한건 의외다. 이건 나관중 개인에게는 불행이였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에겐 다행인거지..ㅎ 벼슬 나갔으면 삼국지같은거 썼겠나. 게다가 당시 명의 천자였던 "홍무제"는 뭐가 불만인지 수틀리면 벼슬아치들을 죽여대던 때여서 홍무제손에 킬된 벼슬아치가 10,000 명이 넘었다하니 어쩌면 나관중 본인에게도 잘된 걸 수도~ 뒤에 이야기들 보면 느끼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양반이 뭐가 딸려서라기보다 그냥 공부머리가 없었지 싶다. 정사를 꿰고 그 무수한 민담들을 캐내서 집대성하고 스토리텔링을 해낸 그의 재능은 오로지 포커스가 삼국지에 올인 되었을 뿐이였다. 과거에 계속 떨어지기를 여러 번... 어느 시점부터는 그냥 벼슬에 대한 미련 버리고 부친이 하시던 소금장사를 따라다니며 장사를 도왔는데, 공부도 못 하는 주제에, 장사도 못 했고 장사에 별 도움이 안되다보니 아버지한테 한 소리 들었는지, 나중에는 장사를 따라다니는 것도 그만뒀다.ㅋㅋㅋ 이렇게 원나라(그 시절은 아직 원)의 잉여놈이던 나관중은 동네 찻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당시의 찻집은 옛날 프랑스 파리의 카페와 비슷한... 문학도나 학자들, 혹은 예능인들이 드나들며 의견을 나누던 그런 분위기였다고 보면 된다.(술 안팔았다) 그렇게 드나들던 찻집에서 거의 매일 했던것이 "삼국희곡(三國戱曲)" 이란 공연인데, 이게 뭐냐면 몇 명의 화자가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연기와 나레이션 섞어서 간단한 연극 비슷하게 만담처럼 진행하는 요즘말로 스탠딩공연같은건데 나관중은 여기에 빠져서 이걸 보려고 싸지도 않은 찻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래도 당시에 소금집 아들이면 나름 먹고사는 집이니 가능했던 듯..ㅎ 이 때 이 찻집의 삼국희곡은 한 잉여의 삶을 바꾸게 된다. 이후 단순 삼국희곡덕후에서 끝난게 아니라, 관련 사료들을 모으고 연관 주석과 민담 및 구전설화들까지 모으게 되는데.. 당시에 이짓은 그야말로 엄청난게, 이때 인터넷이 있나, 도서관이 있나 이런저런 자료들과 이야기들을 모으려면 그야말로 발로 뛰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당시 교통이 좋기를 해.. 심지어 "중국"에서... 여튼 덕중의 덕은 양덕이 아닌 중덕이란걸 보여준 나관중은 이렇게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소설을 쓰고 소설 제목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 바로 우리가 삼국지연의라는 그 소설이다. 마치 원래는 연극영화과 전공이였고 관련하여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다 역사에 매료되어 한국사 강사가 된 설민석 선생님과 엇비슷하다. 자료를 취합하는 나관중의 정성과 열의는 실로 대단한건데, 지금같은 정보화시대에서 알기 쉽지 않은 자료나 정보가 많거늘, 그때는 위에서 말했듯 아무런 인프라도 시스템도 없고 심지어 삼국시대는 나관중이 살던 원말~명초때 당시 기준으로도 1,000년전 역사였으니 이에 대한 자료조사는 맨땅에 헤딩이였다. 그러나 소금집 잉여아들은 이 모든걸 해냈다....! 헌데 당시 그런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해 자료수집 하다보니 아무래도 칼같이 정확하고 공정한 기록들만 채집하는건 한계가 있었으며 별 말같잖은 소리나 뜬금없는 자료들도 많아 나관중은 머리를 쥐어뜯었을 것이다.. 게다가 시대상황 따라 인기인물도 바뀌고 그러다보면 아무래도 인기따라 민담이나 에피소드들도 늘고 줄고가 생겼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관중은 삼국지를 기반한 판타지를 쓰려는게 아닌 정말 역사속 사실을 모티베이션한 모큐멘터리급의 작품을 추구했기에 최대한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끔, 설령 쏠림이 발생해도 티나지 않게끔 매끄럽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오늘날에도 한중일 삼국에는 아직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속 이야기가 모두 팩트라고 잘못 아는 이들이 상당수 있고 무엇이 픽션이고 어디부터 리얼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워 하는 수작이 나온 것! 이 또한 삼국지연의가 명작반열에 오르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게 아닌가 싶다. 쉽게 말해, 영화로 치면 나관중은 '운장포터와 도술사의 돌', 이런 판타지나 '삼국불패 -촉한웅사-' 같은 무협물이 아닌 '오호대장군 : 적벽워' 같은 허무맹랑한듯 리얼하게 그려낸 덕에 더 많은 이들이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를 살펴보면 나관중의 취향을 알 수 있다. 일단 나관중은 지금 표현으로 치면 "마초스러움"을 선호했던거 같다. 서량의 그 마초말고 터프하고 와일드한 전형적 남성미의 그 마초이즘을 말한다. 그 이유는 일단 삼국시대는 물론, 나관중이 생존한 원나라 말 ~ 명나라 초에도 전투시에 그 전투지휘를 일임한 상장이나 총지휘관이 가장 선두에서 지휘하거나 심지어 적장과 1vs1 맞다이를 붙는건 확률이 0에 수렴했음에도 나관중은 그런 네임드간의 일기토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애초에 저런 방식의 전투가 없다시피했기에 당시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언뜻 생각도 못했을 개념인데 저리 도입한걸 보면 소설적 재미추구는 물론, "장수는 싸워야 장수!" 라는 그당시 기준의 마초이즘적 증거가 아닐지.... 또 한가지로, 삼국지연의내에서 장수들의 최후를 그린 부분들이 실제 역사와 다른 경우들이 꽤 있는데 대체로 병사하거나 혹은 죽음의 과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이들이 연의에서 장렬히 전장에서 간지뿜으며 전사하는 걸로 각색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이질로 앓다 병사한 감녕, 역시 병을 앓다 결국 병상에서 숨 거뒀던 서황, 역시 고열로 인해 헛소리까지 했다는 학소, 역시 죽음 과정에 대한 별 기록이 없던 황충 등... 아참 태사자도 있구나 여러 장수들이 누워서 천장을 보다 저승을 갔음에도 나관중은 이들을 명예롭게 전장에서 요단강을 건넌 것으로 그려내줬다.ㅎ 나관중의 또 다른 취향은 "물량공세" 적벽대전 당시 조조군의 83만명. 관도대전 당시 원소군과 이릉대전 당시 촉-무릉만 연합군 70만명. 촉의 남만정벌 당시 50만명 등.... 지금의 중국으로야 가능해도 당시 빈번한 전란과 자연재해 및 극악의 치안상태와 기아 등으로 전 중국의 인구가 지금의 20분의 1수준에.. 제대로 된 인구통계도 못 내며 심지어 대규모 인원이 필요한 농경사회였던 당시로는 엄두도 못낼 규모의 대병력이 마주치는 이런 물량공세는 역시 나관중이 전쟁을 더욱 흥미롭게 표현키 위한 장치였다. 삼국지연의와 함께 "중국의 4대 기서" 라 불려지는 명작들이 있는데 나머지 세 작품은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 유교마인드 뿜뿜인 우리나라 정서상... 야설의 원조격인 금병매는 거의 매장 당하다보니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가 삼대장이 되었고 서유기가 주로 애니매이션이나 게임같은 어린이~청소년 대상 매체들에서 매만지다보니 성인들에게는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이 양대산맥을 이룬다. 놀랍게도 이 중국4대 기서 중 삼국지연의의 나관중이 수호전도 집필했다...!!!! 수호전은 순전히 나관중이 창조했다기보다, 원나라 말기의 시내암(施耐庵)이라는 사람이 원작자에, 나관중이, 쉽게 말하자면 초본상태의 수호전을 사실상 마무리지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자면 시내암이 수호전이라는 그림을 대강 콘티만 그렸다면 나관중이 거기에 펜선을 그려 디테일을 추가하고 컬러링까지 했다고 하면 비슷한 표현?...ㅎ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단편이라도 소설이나 수필 등을 써본 분이 계시는지 모르겠다만... 아무리 적성이 맞고 본인이 원해 쓴다 할지라도 "글을 쓴다"는 작업은 보통의 인내와 센스로는 하기 어려운 작업이며, 더구나 실제역사를 기반해 철저한 자료조사 및 고증을 더한 작품은 요새도 쓰기가 버겁다. 게다가 요즘은 펜에 원고지로 원고작업 않고 대부분의 작가분들이 컴퓨터를 쓰지만.... 나관중은 명나라 사람이라, 벼루에 먹을 갈고.. 붓으로 먹물을 찍어 썼다. 학창시절 혹시 서예해 보신 분 계시는지?.. 먹을 가는거부터가 존니 진짜...하아..(난 그 먹냄새도 싫었어) 게다가 붓글씨는 정말 글씨쓰기가 거지같고 뭐 좀 쓸라치면 그새 붓의 먹물이 다해서 또 찍고.. 붓의 힘조절이 잘 안되면 글씨가 개판되며 오타가 나면 이건 수정이고 뭐고 처음부터 다시 써야된다.. 게다가 서예반 애들은 거의 대개 부모나 담임이 산만한 애들의 정서함양에 좋다고 시켜놓다보니 애새끼들이 전부 산만하다 -_-;;;;; (게다가 손에 묻은 먹물은 잘 씻기지도 않고 옷에 묻으면 그 옷은 그냥 버려야 된다는...) 여튼 그런 붓글씨로 쓴 소설! 심지어 그냥 소설도 아닌 중국의 4대 기서! 게다가 그중 둘이 Write By 나관중의 위엄은 말로 표현불가다. 위에서 언급했듯, 공부머리가 없었을 뿐 그는 천재고 서양의 세익스피어에 뒤지지 않는 동양최고의 문학가였다. 그런데 수호전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세상과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이들이 많이 나오고 그러다보니 명나라에서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벼르고, 그의 가문은 나관중으로 인해 온집안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그를 가문에서 파문!!! 쉽게 말해서 호적을 파버렸고, 나관중 역시 자신의 신상 및 자기네 집안안위 위해 노년에는 인적 드문곳에 짱박혀 이승윤이나 윤택이 찾아가는 그런 자연인처럼 살다 조용히 죽었다..., 그의 업적대비 참 초라한 최후지만, 당시는 뭐.. 아무거나 트집 하나 잘못 잡히면 그냥 모가지가 날아가는 시대에, 잘못 얽히면 온집안이 풍비박산 나는것도 다반사던 시절이였고 또 천재들은 항상 시대를 앞서가다보니 오히려 살아생전에는 인정은 커녕 가난과 무관심 속에 불운한 삶을 살다간 이들도 부지기수다. 아마 나관중은 앞서 언급했듯, 당시 시스템과 인프라에 따른 자기작품의 빠른 대중화의 한계와 당시 사회적인 직업인식 등으로 인해 생전에는 대문호에 대한 존경같은거 없이 살았을거다. 그냥 간신히 밥이나 먹고 맨날 방구석 처박혀 글이나 쓰고 그러는 Nerd였을 듯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와 수호전이란 두 거작을 만들어낸 그의 근성과 집념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매사가 다 그렇다. 뭘 하건 성공을 위해 우리는 당장은 미진해도 꾸준한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쌓여 결국 언젠가는 빛을 발하는거라고 나관중의 삶이 말해준다. . . . 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 - 욥기 8장 7절 - (하지만 난 무신론자)
chapter1. 오늘 '이별' 하렵니다!
“왜 전화 안 받아, 이 호랑말코 같은 새끼가.” 밖엔 억수같은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굵어진 빗방울을 쇼윈도를 통해 바라보던 로라는 주먹을 꾹 쥐었다. 조그마한 그녀의 주먹에 어마어마한 힘이 들어갔다. “이현우, 니가 이렇게 잠수를 탄다 이거지? 고백할 땐 하늘의 별도 따다준다더니. 그래도 별 하나는 따주고 가는 구나? 이별 말이다, 이 깜찍한 새끼야. 성은이 망극하다, 망극해!”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며 꾹 쥔 그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곧, 자신 뒤의 책상 위에 휴대폰이 요란스레 울렸고, 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한걸음에 카운터로 향했다. 깜찍한 새끼라며, 호랑말코 같은 새끼라며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심 지금 울리고 있는 전화벨의 주인공이 이현우 그 호랑말코 같은 새끼길 바랐다. 하지만. “스팸…이네. 썩을.”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쇼윈도 앞에 디피 되어 있는 마네킹 손가락을 툭, 툭 건드렸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곧 빗물 가득 머금은 까만 하늘이 푹 담겼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도 억수 같은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 * * “야, 오로라. 그 새끼 일방적으로 잠수 탔다며? 아주 미친 새끼네, 그거?!” 밤 열 시가 되기 오 분 전. 로라의 옷가게로 그녀의 친구로 추종되는 두 명의 여자가 우르르 들이 닥쳤다. 그녀는 손님용 탈의실 안에서 낑낑대며 어제 새로 지른 원피스를 갈아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윽-. 야, 나 살쪘나봐. 지퍼가 안 올라가.” “그래 기지배야, 너 살 쪘다니까? 살 쪘다고 해도 죽어도 아니라고 부은 거라고 하더니.” “아, 조용히 하고 빨랑 와봐. 지퍼 좀 올려줘.” “그래서. 갈 거야? 찾아 갈 거야?” “당연한 거 아니니? 이 새끼가 지금 날 가지고 놀아도 유분수지. 내가 이대로 가만히, 헤어져 줄 오로라로 보이냐?” 탈의실 안에서 쩌렁쩌렁 로라의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그녀의 친구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딸랑 하는 가게 문앞의 종소리가 울렸고 여자들은 일제히 가게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로라는 탈의실 안에서 낑낑대며 겨우 지퍼를 올려 탈의실을 나섰다. “아, 지금…문…닫으시는 건가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에 쫄딱 맞은 한 여자가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여자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로라는 아홉시 오십칠 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한 번 바라보곤 애써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아, 저희가 열시되면 마감을 하긴 하는데…” “저 급히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2분도 안 걸릴 거거든요? 어떻게…구매할 수 있을까요?” 여자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상태를 보아 급히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만 같기에 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꺼두었던 마네킹 쪽의 불을 켰다. “천천히 고르세요. 저도 어차피 화장 다시 하고 나가려던 참이었거든요.” 로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친구들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리곤 비에 홀딱 젖은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또각또각 카운터로 향했다. ‘비에 젖었지만 탐스런 갈색 빛 머리에 오똑 선 콧날. 저건 자연산이라기 보단 의느님에 의해 탄생된 듯한 비쥬얼의 코. 그리고 오렌지색이 잘 어울리는 도톰한 입술. 앞머리가 없는 긴 생머리에 속눈썹이 긴, 눈은 음…건드리지 않았군. 자연스런 쌍꺼풀이 매력적이네.’ 보통 미모의 여인이 아닌 듯 보였다. 로라는 안보는 척 하며 카운터에 서서 원피스 쪽을 기웃거리는 비에 젖은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저, 요걸로 갈아입고 가도 될까요?” 삼십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피고 있던 로라는 갑작스레 자신을 돌아보는 탓에 흠칫 놀라며 헛기침을 했다. 자신이 몰래 훔쳐보고 있던 것을 눈치 챈 것은 아닐까, 로라는 아까보다 더 씩씩한 목소리로 탈의실 문을 활짝 열었다. “흠, 흠흠. 물론이죠. 여기서 갈아입으세요!” 탈의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카운터 밑쪽에 휙 던지며 로라는 씩 웃었다. 여자 역시 로라를 따라 웃으며 탈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 나 갑자기 배 아프다. 너희 계산할 줄 알지? 마지막 손님이니까 뒷 단위 까주는 센스 알아서들 발휘하시고. 나 화장실 간닷!” “가게 문은? 바로 닫어?” “어! 내 가방 챙겨서 나와 있어! 가게 불만 좀 꺼주구!” 로라는 두루마기 휴지를 챙겨들곤 가게를 급히 나섰다. 그리곤 조심조심 비를 피해, 바로 옆 상가 복도로 향했다. 무슨 비가 이렇게 쏟아져. 태풍이라도 오려는 건가, 혼자서 중얼거리며 로라는 화장실로 향하기 위해 또각또각 걸었는데, 여간 으스스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팔을 꾹 쥔 채 로라는 구두 굽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때, 조용한 화장실 안을 가득 메우는 로라의 휴대폰 벨소리. 로라는 자신의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보세요.” “누나! 나 오늘 좀 늦는다!” “좀 늦는 거냐, 아님 해 뜨고 들어오는 거냐? 똑바로 말해라 너.” “아-. 엄마 아빠 없을 때 자유를 만끽하는 거지. 어차피 너도 오늘 늦을 거 아니냐. 보아하니 불금에 비까지 내리니 술 퍼마시러 가겠구만.” “어이, 동생. 이 누님은 오늘 술을 마시러 가는 게 아니라 인생에서 제일 중대한…” “됐고. 아무쪼록 시내에서 마주치지는 말자. 쪽팔리니까.” “야! 야 이 눔의 자식아! 너 죽을래애-?!” 쩌렁쩌렁 울리는 로라의 목소리. 하지만 돌아오는 건, 무참히 끊겨 버린 휴대폰 너머의 정적 뿐. 로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얘는 참 누굴 닮아서 이렇게 개 썅 마이웨이일까, 하며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로 향했다. “울지만 말자. 어떤 대답을 들어도. 어떤 말을 들어도. 구질구질하게 울지나 말자, 오로라.” 로라는 손을 씻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툭,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남자 친구란 자식이…어째 사귀는 1년 동안 한 달 빼곤 매일을 이리도 울리니. 로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처음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 해놓고선. 그 마음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고 해놓고선. 나만 사랑한다고, 영원히 그럴 거라고, 그러니 자신과 결혼하자고 해놓고선. 로라는 빨갛게 상기된 볼을 물 묻은 손으로 만지작이다 이내 휴지로 물기를 닦으며 화장실을 나섰다. 그러다 화장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섰다. 구겨진 원피스를 매만졌다. “야, 이현우. 이젠 내가 빠빠이야. 내가 이제 세이굿바이 하는 거라구.” 그렇게 중얼거리며 로라가 웨이브 진 머리를 손으로 만지작이고 있는데, 갑자기 또각또각 텅 빈 복도에서 남자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그녀는 그대로 굳은 채 전신 거울을 통해 뒤를 봤다. 그때, 웬 정장을 입은 훤칠한 키의 한 남자가…로라의 시야에 들어섰다. 무심한 듯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잠시 화장실 앞에 서 로라를 바라보더니 이내 또각또각 바른 걸음 걸이로 로라 옆에 섰다. 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주춤주춤 옆으로 물러났다. ‘잘…생겼다. 스타일…도 괜찮구….’ 머리를 만지던 그 손 그대로 굳은 채, 로라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로라의 말대로 잘생긴 남자였다. 한 쪽만 속 쌍꺼풀이 진 짝 눈이 매력적이었다. 옆에서 바라봐도 우뚝 선 콧날은 작은 얼굴을 더 갸름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비율도 괜찮은 것이,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저 정장에 코트를 입은 채였지만, 스타일도 좋아보였다. 올해 스물여섯이 되는 자신보다는 나이가 조금 더 많은 것 같이 보였지만. 삼십 대 초반? 중반? 넋을 놓고 남자를 바라보던 그녀. 이내 로라의 부담스런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홱 로라를 내려다보았다. ‘어머, 깜짝이야.’ 로라는 티가 날 정도로 화들짝 놀라며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곤 다시금 만지작이던 머리를 정리하며 빙그르르 뒤돌아섰다. 그런데, ‘가만. 여긴…여자 화장실인데?’ 그 생각이 들자, 로라는 다시금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남자 역시 뒤돌아서있던 로라를 거울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부딪혔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여기 여자 화장실이라, 일러주기 위해 붉은 입술을 조심스레 떼었는데. “여기 남자 화장실인데요.” “예, 예?” 지금 내가 해야 할 말을 왜 저 분이, 저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여기 남자 화장실이라구요.” 로라가 잘 못 알아들었나 싶어 아까보다 목소리에 더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하는 남자. 남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로라가 큰 잘 못이라도 저질렀다는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적이라,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아차 싶어 다시 입술을 앙다물곤 “아…네. 죄송합니다.”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조심 화장실을 나섰다. “내가 너무 급해서 남자 화장실을 들어 왔나 보네…” 그럴 리가 없는데, 싶으면서도 뭐 남자 화장실이라고 저렇게 힘주어 얘기하니 자신이 착각했나 보다, 하고 중얼거리며 로라가 화장실을 나서 입구를 돌아보았는데. “뭐야. 여자 화장실이잖아.” 여자 화장실이란 표시가 화장실 앞에 붙어 있었다. ‘뭐야, 여자 화장실인데 왜 나보고 눈치 줘.’ 로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화장실 쪽으로 눈을 흘겨보았다.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가 다시금 매장으로 향하기 위해 한 걸음 내딛었는데. “……?” 또각또각 다시금 남자의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남자가 휘적휘적 여자 화장실에서 나와 바로 옆 남자 화장실로 쏙 들어섰다. 이 무슨 황당한…. 로라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남자 화장실로 들어서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생긴 건 멀쩡한데 순…허당이네. 황당하게, 정말.” * * * 선뜻 들어서지 못했다. 로라와 그녀의 친구들은 비가와도 여전히 휘향찬란한 시내 한 가운데에서, 그녀의 현 남친인지 구 남친인지 모를 ‘이현우’란 남자가 일하고 있는 술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로라는 원피스 자락을 꾹 쥐었다. “야, 뭐해 오로라. 안 들어가?” “저 새끼, 뭐가 좋은 지 싱글벙글 서빙하고 있네.” 그래도 사랑했었다. 쓰레기 새끼인 걸 알면서도 그 놈과 사귀었었다. 소문난 바람둥이란 걸 알면서도 로라는 자신을 믿어 달란 그 놈의 말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었다. 그녀라면, 오로라 그녀 자신이라면 바람둥이에 쓰레기에 나쁜 놈이라 소문 난 저 놈을 자신만 바라보는 순한 양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거라 믿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지금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되레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찔러 버렸다. “됐어. 가자, 그냥.” 로라는 돌아섰다.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는 로라를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친구들은 바라봤다. 등지고 돌아선 로라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평소완 다르게 다운 된 목소리와 축 처진 어깨가 지금 그녀는 무지 슬프고 아프단 걸 말해주고 있었다. “들어가서 왜 전화 안 받냐고…실컷 따지고 나서 끝이라고…통보하고 나오면 뭐하겠니.” “…….” “이미 저 자식은 나와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뒤늦게 이러는 내 꼴만 우스워지지…안 그래?” 로라의 왼쪽 어깨가 비에 젖었다. 로라의 젖은 어깨를 바라보던 친구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로라의 성격대로라면 당장이고 저 술집으로 처 들어가 사장 새끼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것이었다. 그러곤 로라를 보며 당황하는 그 남자의 뺨을 시원하게 후려치며 ‘꺼져, 이 쓰레기 새끼야!’ 멋있게 말해주고 나왔을 것이었다. 하지만. “못 하겠다. 가자, 그냥.” “…오로라.” “에휴, 오로라 성격 많-이 죽었네. 하하. 가자, 제군들! 언니가 오늘 이별주 쏜다!” “야. 오로라. 정말 괜찮냐?” 그녀의 친구들은 더욱 오바스럽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는 로라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괜찮냔 친구의 말에 로라는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누굴 욕하겠니.” “…….” “쓰레기 차 인 거 알면서도 좋다고 잡아 탄 건 난데.” “…….” “야…로라야.”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널 사랑한다, 그러니 한 번만 믿어달란 저 새끼의 말을 믿었던…내 탓이지. 누굴 탓 해. 안 그래?” 로라는 그 말을 내뱉곤 노란 우산을 다시금 추켜들었다. 그러곤 방금 헤어진 전 남친의 가게를 쿨 하게 지나치려 한 발 내딛었다. 그때, “여기가 너희 오빠가 하는 가게야?” “응. 멋있지? 우리 오빠 가게 여기 말고도 또 있어. 저 밑에 고기 집도 우리 오빠 꺼야.” 로라는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오빠 가게…?’ 그녀는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짧은 단발의 여자를 돌아보았다. 우리 오빠 가게란, 앙증맞은 목소리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멈칫하는 로라를 뒤에서 지켜보던 그녀의 친구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야, 근데 저 오빠랑 사귄다고? 저 오빠 저번에 여자 친구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응. 근데 그 여자가 질척대는 거래. 헤어지자고 그렇게 눈치를 줘도 뭐…안 떨어진다나? 그래서 오빠가 그냥 차단해버렸데. 그럼 뭐 알아서 떨어지겠지?” “아, 헐! 대박. 그 여자 불쌍해.” “나두 이제 신경 안 쓰려고. 오빠가 한 달 전부터 나 좋다고 매일 밤 우리 집 앞에 찾아오는데…그 마음 어떻게 안 받아 주니? 어젠 이 목걸이까지 선물해줬다니까. 제발 자기 마음 좀 받아 달라구.” 방금 저…질척댄다는, 헤어지자고 눈치를 줘도 안 떨어진다는, 그래서 차단을 당했다는 여자는…나를…말하는 거지? 로라는 들고 있던 우산을 자신도 모르게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목걸이라니…한 달 전부터라니. 그녀의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어머. 로라야 왜 그래?” “손에 쥐났어?” 그녀의 친구들이 황급히 떨어진 로라의 우산을 주워 로라의 손에 쥐어주었지만 로라의 손은 힘이 풀려버린 지 오래. 그러곤 그런 그들의 호들갑에 가게 문 손잡이를 쥐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아마도 로라의 ‘전 남친’의 ‘현 여친’인 듯한 여자가 로라를 돌아보았다. 예쁘장하게 생겼네. 남의 남자 친구 홀라당 뺏아 갈 만큼. 로라는 멍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야, 오로라. 왜 그래.” “쓰레기차를 잡아 탄 건 내 탓이라, 그냥 날 원망하고…지나치려 했는데.” “…어?” 로라는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이현우의 ‘현 여친’인 듯한 그 예쁘장한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지지 않고 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어디로 튈지 모르는 로라의 주먹은 연신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열을 삭이고 있는 듯 했다. “그 쓰레기차. 다신 내 주위에서 냄새 못 풍기게. 폐차를 시켜버려야겠다.” “…뭐?” “이 동네에서 냄새 풍기면서 더는 못 돌아다니게, 아주 개 박살을…내버려야겠어.” “……?!” “ 이, 이현우 재활용도 안 되는 씹 쓰레기 인간아! 니가 그러고도 남자 새끼냐?!” 순간이었다. 말릴 틈도 없이 그녀가 가게 문을 박차고 안으로 돌진해버린 것은. “어머, 어머! 오로라! 로라야!” “어머, 누구세요! 누구신데 우리 오빠를!” 순식간에 가게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분에 못 이겨 가게 안으로 돌진해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서빙을 하고 있던 현우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로라. 그리고 그런 로라에게 머리채를 잡혀 들고 있던 안주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채 ‘으악!’ 외마디 비명만 내지르고 있는 현우. 가게 안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손님은 물론이거니와 술 집 앞을 지나치던 시민들은 고성과 비명이 오가는 범상치 않은 모습의 로라와 현우에게 시선 집중 했다. “으악! 뭐야! 오로라, 이거 안 놔?! 죽고 싶어?!” “못 놔! 안 놔! 오냐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어?!” “으악! 이거 놓으라고! 왜 이래! 말로 하라고!” “니 사랑은 이래?! 뒤에서 뒤통수 치고,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고, 사람 바보 만들고, 그러다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사람 울리는 게. 니 사랑이야?! 그게 니가 내게 해주겠다던 사랑이냐고!” “어머, 누구신데 우리 오빠 머리채를 잡는 거냐구요-! 이거 못 놔요?!” “악-! 야! 야! 이거 안 놔?! 이 기집애가 죽고 싶나!” 현우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로라의 긴 머리칼을 잡아 챈 현우의 현 여친인 듯한 가게 앞에서의 그 여자. 로라는 으악-!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꼬맹이 너는 빠져라, 어?! 이거 못 놓아?!” “그 쪽부터 우리 오빠 놔요! 아님 절대 못 놔요!” “상황 파악 안 되니?! 니가 방금 지껄였던 너희 오빠한테 질척대는 여자가 난데?!” “뭐? 뭐…뭐라구요?” “여친 있는 멀쩡한 남자 꼬신 것도 모자라, 니가 내 머리채 까지 휘어잡아? 어?! 니년 손모가지도 이 놈 모가지랑 같이 분질러줘?!” 로라가 악을 쓰고 여자에게 덤비자, 여자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하지만 휘어잡은 로라의 긴 머리칼은 놓지 않았다. 가게 안의 사람들 역시 술렁이며 모두 휴대폰을 꺼내 처참하다 못해 충격적인 삼각관계 스캔들의 현장을 담기 시작했다. 얼굴 팔리는 줄도 모르고 바락바락 로라가 악을 쓰자, 친구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발만 동동 굴렀다. 로라가 현우의 머리칼을 오른손에 꾹 쥔 채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려 나머지 한 손을 뻗었는데. 그런데. “이런다고 바람 난 그쪽 전 남친이.” “뭐야!” “정신 번쩍 차리고 그쪽 현 남친으로 컴백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웬 잘-생긴, 그러나 한 눈에도 장난기 많고 어려보이는 듯한 남자 한 명이 로라의 왼 손을 저지했다. 남자의 손엔 어마어마한 힘이 들어 있었고, 산발이 된 로라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은 귀여운 눈매와 어울리게 장난기가 가득했다. 로라는 엥? 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왼 손목을 꾹 쥐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로라는 왠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구요?” “보는 눈도 많고. 그 눈으로 그쪽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들은 영상까지 찍어대고 있는데.” “……?” “SNS 스타 되는 게 꿈이세요? 혹시, 관종?” “뭐라구요?! 지금 놀려?! 이거 안 놔요?!” “흥분하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하며 남자는 피식 웃었다. 피식, 웃어?! 로라는 어이없는 대사를 날리며 어이없게도 자신을 바라보며 피식, 웃는 남자를 어이없다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그럼 마무리는 이렇게 지읍시다.” “……?” “이 손목 잡힌 채로 나랑 같이 여길 나가죠.” “…….” “쿨과 찌질은 한 끗 차이인데. 여기서 나한테 이 손목 잡힌 채로 나간다면 쿨 해질 수 있을 텐데?” “…뭐래는 거야. 놔라, 이거?” “그쪽의 이 비극적인 사랑의 엔딩은 그래도 해피 해야지. 안 그래?” 하고 마지막 그 말을 내뱉는 남자의 표정은 아까완 달리 진지했다. 로라는 사뭇 진지해져버린 그 녀석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 남자는 누구일까, 누구기에 이 어마어마한 스캔들의 현장에 불쑥 끼어들어 자신의 손목을 꾹 쥔 채, 곤경에 처한 공주를 구해주는 젠틀한 왕자님스런 멘트를 날리고 있는 걸까. 로라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렀다. 남자의 얼굴을 재빠르게 스캔했다. 하지만, 로라는 이 남자가 초면이었다. 로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대체 이 남자…정체가…뭐지?’ 그리고 순간 느껴졌다, 로라는. 이것은…보통…인연은 아니라고. 자신의 26년, 살벌한 연애 경험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지금 이 순간은 아름다운 연인이 될 불타오를 썸의 발화점이던가. 아님…상상조차 하기 싫은 악연이 될 잘못된 만남의 시초이던가, 라고. * * * 반갑습니다, 신화그녀입니다! 빙글에서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너무도 반갑고, 설렙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_^ 그럼, 열심히 달려볼까요?! 함께 해주실거죠 :D
제목없음 5
안녕하세요 ^^ 제목미정 정식 제목을 제목없음으로 정하였습니다.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어도 잘 부탁드립니다 ^^ 좋아요와 댓글은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ㅎㅎㅎ [ 제목없음 5] 맥주의 차가움이 그녀의 발에 닿자 지현은 조금의 정신이 들었다. 아침에는 분명히 없었떤 신발자국을 보아하니 누군가 낮에 자신의 방을 다녀간것이 분명했다. ' 도대체 누가 ? ' 불안함에 그녀는 112버튼을 누른채 잠시 고민에 빠졌다. 신고한다고 경찰이 무엇을 해줄수 있을까. 없어진 물건도 없고 순찰 강화하겠다는 의미없는 대답만 오갈텐데 말이다. 지현에게 이정도로 위협이 올 정도라면 본인에게 성추무사건 제보자 역시 신변에 위협이 생긴게 분명했다. 그녀는 재빠르게 노트북을 켜 메일이 온것이 있나 확인했다. 퇴근 직전에도 없었던 그녀의 메일에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다. [ 새 메일 1건 ] 보내는이 : rosepiglet@hanmail.net 제보자가 보낸 메일이었다. 제목이 없이 보내진 그 메일을 열어봐도 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래도 그녀가 sos메일을 보낸거라면, 지현에게 경고라도 주려고했던 거라면 ? 떨리는 손을 움켜쥔채 지현은 메일을 열었다. 제목 : [제목 없음] 내용: 도마여쳐요 =========================================== 급하게 오타로 적힌 그녀는 분명히 도망치라는 경고의 메시지 였다. 지현은 마음이 급해졌다. 제보자가 건네준 핸드폰번호로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제보자는 본인이 혹시나 신변의 위협이 생길수 있어 핸드폰을 잘 켜놓지 않을거라고 했었고 그 핸드폰 역시 해지 예정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윤기자에게도 최대한 전화 대신 메일로 주고받으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 핸드폰이 해지도 아니고 꺼짐 상태도 아닌 전화를 아예 받지를 않는다니. 더군다나 본인에게 온 섬뜩한 메일을 보고 지현은 안절부절 못했다. 어떻게든 이 위험한 공간을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집이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고 느껴진 지현은 일단 닥치는 대로 가방에 우겨넣기 시작했다. 노트북, 핸드폰 지갑 등 생계에만 필요한 간단한 옷가지를 가방에 우겨넣고 일단 집을 나서야했다. 안전한 곳이 없다고 느껴졌다. 수연에게서 받은 핸드폰까지 챙긴후 에야 지현은 구겨진 신발에 발을 넣고서 집을 나섰다. . 당장 갈곳이 없어진 지현은 급한 마음에 뛰쳐나온 집의 베란다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어쩌다가 내가 도망자 신세가 된거냐. 며칠전 자기에게 도착했던 협박 문자가 맘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제보자에게는 별다른 협박이 없다고 해서 괜찮은줄 알았다. 그때는 본인이 그 사건을 취재한답시고 한영기업 임원들을 하도 쑤시고 다녀서 오는 문자이겠거니 했다. 1차 취재를 지현이 해서 겁을 주려고 별짓을 다하나보다 무시했다. 그런데 제보자가 연락이 되질 않는다니. 그저 손놓고 당하기만 해야하는건가 지현은 도무지 감이 오질 않았다. 지현은 그럼에도 챙겨온 담배에 불을 붙이며 행선지를 고민해야만 했다. 백팩에 일단 뭔가 다 넣어오기는 했는데 출근은 어쩌고 자신은 또 어디로 가야하는가. - Rrrrrrr- - [고딩동창 수연] “ 어 수연아. “ ‘ 미안해. 지현아 . 재촉할 생각은 없는데 혹시 조금 단서가 잡혔나 해서 마음이 불안해서 전화부터 걸었네. ‘ “ 그거 아는 기자놈한테 영상 보여줬어. 그놈은 아마 나보다 더 잘알거야. 그건 그렇고 수연아. 나 부탁좀 하자. 너네집 어느쪽이야? “ ‘ 왜? 무슨일 있어? 너희 회사하고는 별로 안멀어. ‘ “ 그럼 나 며칠만 재워줄수 있냐. ? 나 지금 좀 곤란한 상황에 빠진거같다야…. “ ‘ 정말 ?? 우리집 좁긴 하지만 며칠지내는건 괜찮아. 근데 ….. 무슨일인데? ‘ “ 그건.. 일단 만나고 얘기해줄게. 주소 좀 나한테 보내줄래? 나 지금 당장 가야할거같아 “ ‘ 그래. 톡으로 넣어줄게. 혹시 못찾겠으면 전화해 내가 마중나갈게 ‘ 지현은 속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다. 수연의 집은 생각보다 회사와 훨씬 가까웠다. 물론 좀 더 올라가야하는 곳이긴 했으나 월세살이는 본인이랑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굳이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동창회때 수연의 직업을 물어봤었던가. 지현은 일단 수연이 보내준 주소가 좀 더 계단을 올라야 하는 윗동네 임을 알고 가방을 고쳐맸다. 다행히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에 가려져 길을 헤맬때쯤 마중나와 있는 수연을 발견했다. “ 지현아~~!! 여기야 “ “ 아 김수연! 나와있었구나. 진짜 고맙다. 이 동네 올라오니까 헷갈리네 “ “ 그렇지? 여기가 그래도 집값이 좀 싸고 괜찮아. 출퇴근이 좀 고되긴 하지만. 들어가자. 배고플까봐 일단 밥도 해놨어 “ 남의 집에 와서 민폐인줄 알지만 허기짐을 참지 못한 채 지현은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며칠동안 따뜻한 밥을 먹어보질 못해서 지현은 수연이 차려준 밥상의 온기에 눈이 돌아가버린 것이다. 놓을 줄 모르고 숟가락질을 하던 그녀를 한참 보던 수연은 빙긋이 웃으며 천천히 먹으라며 물을 따라 주었다. “ 야. 너 이렇게 요리 잘했냐 ? 진짜 너네집으로 오길 잘한거 같애 “ “ 천천히 먹어. 찌개 더 있어. 하여튼 옛날부터 느꼈지만 너 진짜 수정이 닮았다니까. 잘 덜렁대는것도 그렇고 활발한것도 그렇고 “ “………” “ 아 미안. 너 잘먹는 모습 보니까 수정이 생각이 나서… “ “ 하긴 수정이가 맨날 그러더라. 니가 맨날 나랑 수정이 닮았다 그런다고. 가끔 너무 붙어다녀서 질투하는거 같다고 … “ “ 사실 그랬지. 근데 그 때는 그런거 표현하고 할 여유도 마음도 없었어. 어떻게든 나는 돈을 벌고 학교도 마쳐야 했으니까. “ “ 좀만 기다려봐. 내친구가 영상 밤새 파본다고 했으니까 . 오늘 아니여도 조만간 연락올거야 “ “ 그러고보니 그걸 안물어봤네. 너 무슨일이야 대체. 내가 물으면 안되는거야? “ “ 흠…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해야하나? 주거침입은 처음인데 일단 도망쳤어. 취재하다보니 대기업 놈을 쑤셔놔서. 지금 그래서 복잡해. 어떻게 되려는건지. 집에 누가 침입한거 같은데 경찰도 못믿겠어서 일단 도망치긴했어. “ “ 위험한거 아니야 ? “ “ 모르겠어. 일단 무서워서 튀어나왔는데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할까봐 … “ 그순간, 그녀의 주머니에 익숙한 진동이 울려퍼졌다. [ 윤기자 ] 였다.
김홍표 "배우라는 옷이 너무 행복하죠"
... <사진= 음악극 '정조와 햄릿'속의 배우 김홍표. 작품에서 정조역을 맡았다> “오늘 연습이 밤 10시 넘어서 끝나서요.” 최근 한 배우는 기자가 제안한 저녁 약속에 이렇게 문자를 보내왔다. 그러면서 무료 공연 ‘티켓 신청’ 태그를 보내주었다. 제목은 음악극 ‘정조와 햄릿’. 10여 년 넘게 인연을 맺은 이 배우의 연기 여정을 잠시 되돌아봤다. 사극 배역 유독 잘 어울리는 명품배우 뭘 입어도 잘 어울리는 배우였다. 드라마, 연극, 뮤지컬, 영화 등 네가지 옷을 번갈아 입어온 지 25년(SBS 공채 5기, 1995년 데뷔). 옷이 그냥 몸에 맞을 리 없다. 옷에 걸맞은 남모르는 노력이 있었다. 배우들 동네에선 그를 두고 ‘부지런한 놈’이라고도 했다. 유독 드라마 사극이 잘 어울렸다. 천민에서 장군까지 다양한 옷을 입었다. 천민 황천왕동(‘임꺽정’), 권력을 꿈꾸는 연개소문 아들(‘연개소문’) 천문학자 이순지(‘대왕세종’) 고려무장(‘무인시대’), 목수 출신 판옥선 제작 군관(‘불멸의 이순신’), 정발 장군(‘징비록’) 등. 역할 탓에 평소 그의 얼굴엔 늘 긴 수염이 붙어 있었다. 그가 수염을 깎을 때는 장르를 바꿔 완전 새 옷을 입는 경우다. 수염 덕에 ‘브래드 OO’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런 그가 최근엔 곤룡포(임금의 옷)를 입었다. 위에서 언급한 음악극 ‘정조와 햄릿’에서다. 이쯤에서 그의 이름을 소개해야 할 터. 배우 김홍표(45)다. <사진= 사극 배역속의 김홍표. 사진='대하사극 매니아 카페' 블로그.> 음악극 ‘정조와 햄릿’의 정조역으로 무대 김홍표는 ‘정조와 햄릿’(연출 이우천, 음악감독 라예송)에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역을 맡았다. ‘정조와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조선의 개혁 군주 정조를 음악극으로 재해석한 작품. 2016년 초연을 시작으로 매년 배우를 바꿔가며 롱런을 하고 있는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의 대표작이다. 9월 29일 오후 6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잔디마당. 주말을 즐기는 가족 단위 놀이객으로 북적였다. 6시 30분 쯤, 이들은 스르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동하기 시작했다. 무료 공연(사전 티켓 신청) ‘정조와 햄릿’ 무대가 갖추어진 관람석쪽으로. 발길을 같이하다 무대 뒤쪽으로 향했다. 배우 김홍표를 잠시 만나기 위해서다. 때마침 곤룡포를 입고 무대 준비 중인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사극에선 정말 다양한 신분으로 나왔다. 곤룡포를 입은 건 이번이 두번 째”라며 입꼬리가 올라간 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두 가지 작품 동시에 관람하는 기분” “작년 ‘조선에서 왓츠롱’이라는 웹드라마에서 ‘세종’을 맡았어요. 이번 정조역은 또 다르죠. 기분이 새롭죠(ㅎㅎ). 공연을 보시면 알겠지만 한 무대에서 두 가지 작품을 동시에 관람하는 재미가 있을 겁니다. 덴마크와 조선이라는 각기 다른 공간, 그리고 햄릿과 정조라는 고뇌하는 두 신분 말이죠. 날씨도 좋잖아요. 가족, 연인, 친구끼리 와서 편하게 관람하고 가면 좋겠습니다.” 바쁜 배우를 오래 잡아 둘 순 없었다. 후다닥 무대 뒤편으로 달려가는 배우의 뒷모습에서 작년 초, 그와 나누었던 전화 통화가 떠올랐다. 개인사업(음식)을 잠시 하다 접었다는 그는 “제가 할 일은 따로 있는 거 같아요. 옷이 안 맞는거 같습니다”라고 했다. 배우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말이었다. 당시 그의 새로운 부활을 기대하는 마음이 컸다. "연기가 너무 좋아졌습니다" 틀리지 않았다. 이날 7시 시작한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이 관객인사를 위해 무대로 걸어 나왔다. “정조역의 김홍표입니다”라는 무대 아나운서의 소개에 관객석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박수를 보탰다. 오래전 연기 초년시절엔 교통사고를 당해 큰 고비를 넘겼던 그다. 그때가 첫 부활이라면 이번 ‘정조 곤룡포 착복식’은 그의 또 다른 도약인 셈이다. “연기가 너무 좋아졌다”는 배우 김홍표. 한층 더 묵직해진 그의 연기는 10월 5~6일, 국회 잔디마당에서 계속된다.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98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제 9 장. 채희의 그림자, 무사 휘영(輝影)
“그런데 아깐 어찌 그리 늦게 나타난 것이야?” 다시 장옷을 여민 채, 좌상 집으로 향하던 채희는 걷던 걸음의 속도를 늦추곤 자신의 뒤를 따르는 휘영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휘형은 채희의 물음에 가만 채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예? 아, 분명 아가씨를 호위하고 있다 생각하였는데 돌아보니…아가씨가 사라지셔서. 지체해 송구하옵니다.” 휘영은 채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채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장옷을 거두어, 휘영을 돌아보았다. 휘영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채희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내가 사라져? 내가 잠시 너에게 다녀온다 이르고 사라지지 않았느냐?” “무언갈 아가씨가 착각을 하신 듯합니다. 돌아보니 아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라, 아가씨를 찾느라 한참 애 먹었습니다.” 휘영의 말에 채희는 가만히 장옷을 쥔 채, 이상하다…, 내 분명 너의 옷깃을 쥐곤 다녀온다 일렀는데, 중얼거렸다. 그런 채희를 가만, 휘영은 바라보았다. 늘 곁에서 채희를 호위하는 휘영이었지만 이리 가까이서 채희의 낯을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휘영은 채희의 봉긋 솟은 이마와 콧날, 도톰한 입술, 하얗고 발그스레한 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럼…너가 아니었단 말이야? 어머! 그럼 내가 누구를…” 채희는 화들짝 놀라며 휘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휘영은 채희와 눈이 마주치자 채희보다 더 놀라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내가 착각하여 다른 이를 붙잡고 끌었나보다. 어쩜 좋지. 혹여 내 얼굴을 보기라도 한 것은 아니겠지.” 채희는 울상을 지으며 땅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워낙 도성에 알려진 ‘채랑’, 자신의 언니 얼굴이라 그런 채랑과 꼭 닮은 자신의 얼굴이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지 않기 위해 애쓴 채희였다. 휘영은 그런 채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채 귀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채희. 휘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채희를 바라보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어.” 채희는 그리고 그런 휘영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가…웃을 줄도 아는 구나.” “…….” “이제야 사람과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휘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도, 웃는 얼굴도, 우는 얼굴도 보인 적 없는 채희였다. 늘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였기에 휘영 역시, 그녀를 곁에서 호위하고 있었지만 꼭 보통 사람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온기를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휘영은 알았다. 채희가 부로 무표정을 한 채 지낸다는 것을. 일부러 차가워 보이고,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 슬픔도 기쁨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그 누구보다 따스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휘영은 알고 있었다. 그때, 채희 뒤로 우상의 부인인 ‘유정’이 가마에 올라선 채, 이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좌상과 상극인 우상의 부인에게 ‘채희’의 얼굴을 들켜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 채희는 장옷을 거둔 채, 휘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곧, 유정이 좌상의 호위무사인 ‘휘영’의 얼굴을 알아보곤 채희 곁까지 성큼, 다가왔다. “……!” “송구합니다, 아가씨.” 곧, 휘영은 채희에게 송구한다하며 채희를 자신 쪽으로 바짝 잡아 당겼다. 그러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채희의 장옷을 씌워 재빨리 채희의 얼굴을 가렸다. 동시에 유정이 탄 가마가 채희의 곁을 스쳤다. “…앗.” 그제야 자신의 옆으로 우의정의 부인인 유정이 지나갔음을 깨닫곤 황급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는 채희였다. “저 무사는 좌상 댁 호위무사인 듯한데.” 유정은 휘영과 채희를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유정을 따르던 몸종이 힐끔, 휘영을 돌아보곤 황홀한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참…잘생긴 사내지 않습니까?” “잘생기긴 뭣. 우리 아드님이 훨-씬 더 잘생기셨지.” “에이, 민혁 도련님은 두 말하면 입 아프지요. 그래두 저 무사는 사내인데도 어찌 얼굴에서 색기가 철철 흘러넘치는 지…, 묘-하게 여인을 끌어드리는 멋이 있지 않습니까? 저 탄탄한 가슴에 폭, 안겨보기라도 했으면…” “나이든 여편네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뭐, 젊고 잘생긴 사내 품에 꼭 젊은 여인네들만 안기고 싶답니까? 이 늙은 여인네들두 젊고, 잘-생기고 사내 품에 안겨보고 싶습니다, 마님?” 입에 침이 마르도록 무사를 칭찬하는 몸종의 말에 유정은 다시금 고갤 돌려 무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 무사하긴 아까운 인물이긴 하네.” “그렇지요? 어쩜 좌상댁엔 호위 무사까지 인물이 훤하니…앗, 흠. 흠.” 몸종의 말 실수에, 유정은 심기가 불편한 듯, 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더니 이내 흥, 하고 무사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그래봤자 딱, 기방 기생들 기둥서방하기 좋을 외모다. 어디 우리 아드님에 비할까? 우리 아드님은 딱, 위장부시지!” 채희는 멀어져가는 유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 날 뻔 하였구나. 하마터면 우상의 부인께 얼굴을 보일 뻔 하였어.” “…….” “가자. 어머님,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시겠다.” 그리고 채희는 다시금 발걸음을 돌렸다. 휘영은 그런 채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채희 뒤를 성큼성큼 따랐다. “너는. 무술도 뛰어나고, 검도 잘 다루는데 어찌 한낱 양반댁 여식이나 지키는 호위 무사가 되었느냐? 네 정도의 검술이면 궁에 들어가 군주를 뫼시어도 될 법한데.” “…….” “뭐…내가 무술이니 검술이니…보는 눈이 있는 것은 아니나, 그저 이리 나만 지키며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그런다.” “…….” “지금이라도 내가 아버님께 일러 너를 다른 곳으로…” “되었습니다.” 휘영은 자신을 생각해주어 말하는 채희에게 되었다, 단칼에 거절을 했다. “궁이 싫으면 어디 무사들을 길러내는 곳의 스승으로 들어가 제자들을 키워도…” “…….” “그것도 싫겠지?” 채희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따르는 휘영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땅바닥만 응시하고 있는 휘영이었다. 그런 휘영을 가만 바라보던 채희는 다시금 앞장서서 걸으며 입술을 떼었다. “언제든 말 하거라.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겨 떠나야 하거든.” “…….” “주저 말고 말하도록 해. 언제든 널 보내줄 것이니.” 휘영은 채희의 말에 가만히 미소 지으며 부지런히도 걸어가는 채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이름은 빛날 휘에 그림자 영.’ ‘…….’ ‘휘영이다. 네가 그림자처럼 아가씨를 호위하여야 할 것이다.’ ‘…예, 형님.’ ‘그 때가, 네가 가장 빛이 나는 때일 것이다. 알겠느냐.’ 어린 시절, 자신에게 무술을 가르치며 늘 아가씨를 잘 보필하여야 한다 일렀던 주한이었다. 주한과 휘영의 집은 꽤 한양에서 잘나가던 무사의 집안이었지만 몇 해 전, 역모라는 누명으로 패가망신 하여, 길바닥을 떠도는 꼴이 되었다. 친척,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목숨 부지하기 급급해 생사조차 알 길 없던 그때, 주한의 손을 잡아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지금의 좌의정, ‘이한열’이었다. 때문에 어린 주한과 주한의 어머니, 그리고 부모를 모두 잃었던 갓난 아이었던 사촌 아우, 휘영은 지금껏 좌상 집에서 역모 죄로 패가망신 했단 가문을 숨긴 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가씨를 모시는 것이, 제가 하여야 할 일이고” “…….” “제가…하고 싶은 일입니다.” 휘영은 멀어져가는 채희를 우두커니 바라보다 이내 휘적휘적, 긴 걸음으로 채희의 뒤를 따랐다. * * * “어머님, 아버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좌상댁의 노비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안채로 들어온 채희는 좌상과 부인, 채화를 마주하자마자 절부터 올렸다. 좌상 ‘이한열’은 언제 채희가 이리 예쁘게 자랐나, 흐뭇한 얼굴로 채희를 바라보았다. 옆에 함께 앉아있던 정경부인은 그만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머님, 어찌 그리 눈물바람이어요. 오랜만에 보는 채희가 어리둥절하겠어요!” 곁에 서 있던 채랑이 눈물을 보이는 정경을 향해 입술을 씰룩이더니, 이내 절을 마치고 덩그러니 서 있는 채희를 와락 껴안았다. “언…니.” “채희야, 어째 안색이 더 좋지 않아.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 거야?” 살뜰히 채희를 살피는 채랑이었다. 둘이 이렇게 나란히 서니, 꼭 똑같은 사람이 둘이 서 있는 듯하였다. 채랑은 자신을 닮은 채희의 손을 맞잡은 채 가만히 채희를 바라보았다. “아프기는, 없어. 그저 이틀을 꼬박 예까지 오느라 진이 빠져 그렇게 보이나 봐.” “나 너에게 줄 것이 있어! 내 방으로 가자.” 하며 채랑은 채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채희는 아이처럼 들뜬 언니를 보곤 피식, 웃으며 좌상과 부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채랑을 따라 나섰다. “아, 잠시 내 장옷.” 안채를 나서자마자 마당에서 비질을 하고 있는 몇몇의 노비를 발견하곤, 채희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채랑은 자신의 얼굴을 숨기는 채희를 보곤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곧, 무사 휘영이 채희에게 들고 있던 장옷을 건넸고, 채희는 황급히 장옷을 뒤집어썼다. “이제, 되었어. 가자 언니.” “미안…해, 채희야. 나 때문에.” “무슨 말이 그래. 나 때문에 언니가 곤욕만 치루지.” “왜 너 때문에 내가 곤욕을 치루어?” “언니는 장차 세자빈이 될 사람인데…내가 있어 걸림돌만 되잖아.” “얘, 세자빈은 무슨! 나는…궁에서 살기 싫어.” “…언니.” “세자빈은 가당치도 않어. 그리구, 나는 그래도 여기서 어머님과 아버님과 함께 지내잖아. 너는 그 험한 산 속에서…나 때문에…” “자꾸 그런 말 하면. 나 다음부턴 집에 오지 않을 거야, 언니 시집갈 때까지.” 채희의 말에 채랑은 울상을 짓다, 이내 피식 웃으며 채희의 손을 꼭 잡았다. “나 시집가면. 너랑 꼭 한 집에서 살 거야.” * * * “이걸…나 준다고?” “응. 너무 예쁘지?”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 옷과 꽃신이었다. 연분홍의 연꽃이 수놓인 샛노란 개나리색 저고리에 고운 보라색의 풍성한 비단 치마. 그리고 파란색의 어여쁜 노리개까지. 무명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는 채희는 채랑이 건넨 옷을 가만히 만지작였다. “너무 예쁘지! 내가 아버님을 졸라, 청국에서 사와 달라고 했어.” “…언니 입어. 나는 이런 것은…” “너 주려고 내가 아버님께 직접 청을 드린 것이야. 나는 이런 쨍한 색깔은 안 어울려.” “…….” “너와 내가 외모가 꼭, 닮았다고 하지만.” “…….” “내 눈엔 나보다 너가 몇 곱절 더 고와. 그래서 이런 쨍하구 고운 색깔은 나보다 너가 더 잘 어울려.” 채랑의 말에 채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곤 화려한 비단 옷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였다. 채랑은 곧 채희에게 저고리를 대어보곤 너무 잘 어울린다며, 환히 웃었다. “입고 나와 봐! 너가 이걸 입구 저잣거리에 나가면 나라고 생각하지, 널 다른 이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야. 물론 좌상 댁 여식 ‘채랑’이가 무얼 먹고 저리 더 고와졌나?, 수군대겠지? 호호호.” “언니…하지만.” “너도 한양 구경하고 싶어 했잖어. 꽃놀이도 가고 싶어 했구, 연등회에도 가보고 싶다며.” “그건…” 망설였다. 이리도 화려한 옷은 입어본 적이 없었기에. 매번 집에서 비단 옷이며 장신구들을 보내왔지만 채희는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펼쳐 쓸어보기만 하고 다시 보따리에 싸, 서랍에 곱게 넣어 두기만 했었다. 꼭, 자신과는 맞지 않은 옷이라 여겨졌기 때문에. “여기 연 하늘빛 저고리와 분홍색 치마는 연등회 때 입구. 우선 이 옷부터 입고 나와 봐! 너랑 손 꼭 붙들구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시켜 주고 싶지만.” “…….” “그것은 아버님이 추호도 허락지 않으실 것이니.” “…….” “매번 다 낡은 장옷 뒤집어 쓰구, 누구에게 들킬까 연연하면서 그리 좋아하는 책방에도 쉬이 못 들려보았잖아. 이 옷으로 갈아 입구 내일 해 뜨면 휘영이랑 저잣거리나 다녀와. 언니 소원이야. 너, 내 소원 하나 못 들어줘?” 채랑의 말에 채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참으로 고운 옷이었다. 채랑이 채희가 며칠 예서 머무는 동안 외출복으로 입을 옷들과 장신구들을 손수 챙겨 놓았다. 채희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응? 응? 하며 어린 아이처럼 칭얼대는 채랑을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언니 때문에…못살아, 정말.” “정말 입을 것이지? 그치?” “들켜서 곤혹을 치루어도 나는 몰라. 다-, 언니가 책임져. 알았지?” “그럼! 이 언니만 믿어! 호호호.” “하하하하.” 모처럼 채 자매는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호호호,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 * *
제 5 장. 달(月)의 기운이 흩어지다!
“아악-.” 잠자리에 누웠던 윤화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에 흥건히 젖은 채였다. 윤화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달…달의 기운이…흩어지려해. …이를 어쩐담.” 윤화는 더듬더듬 초를 찾았다. 윤화의 비명에 마루에 누워있던 노인은 황급히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 게야?” “악몽을 꾸었어.” “…….” “안…좋아. 기운이…좋지 않아.” 오늘이 좌상댁과 약조한 꼭 열흘이 되기 이틀 전 날이었다. 이미 두 아가씨의 운명을 본 윤화는 오늘 무화산을 떠나기 위해 미리 짐을 꾸려놓은 상태였다. 약조한 날까지 좌상 댁에 답을 드리려면 적어도 오늘 출발해야 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윤화는 마루로 뛰쳐나왔다. “아가씨들의 운명을…가로 막고 있는 게 더 있었어.” “…뭐?” “그 날. 그 저잣거리에서 마님을 뵈었을 때 국모의 기운을 지닌 분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쌍생아라는 것. 달의 기운이 두 개였다는 것.” “…….” “그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 “아니었어, 할아버지.” “…….”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검은 기운이 있었어.” 윤화는 맨발로 뛰쳐나와 아직 검푸른 새벽녘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좌상댁에 답을 드리러 사람을 보낸다 했지.” “…….” “내가 가마.” “할아버지.” 윤화는 노인의 말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노인을 돌아보았다. 뒷짐을 진 채, 윤화 곁에 선 노인은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중헌 일 아니냐.” “할아버지, 그치만.” “서찰만 그 댁에 무사히 전해주면 된다하지 않았느냐.” “…그렇지만.” “네 어미의 처녀시절의 연서도 네 아비에게 내가 은밀히 전해주고 했었지. 걱정 붙들어 매.” 노인은 가벼운 농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윤화의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윤화는 슬픔과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혹여나 그 서찰이 다른 이의 손아귀에 넘어간다거나 전해주지 못하게 되면 큰일 아니냐.” “아냐. 내가 직접 가야겠어.” “그러다 네가 변이라도 당한다면.” “…….” “그것은 니가 그리 귀히 여기는 그 분들 모두에게 해가 되는 일 아닐 게냐.” “할아버지….” 노인의 고집을 꺾기는 어려워 보였다. 불길한 기운이 자꾸만 엄습해 와 윤화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떨기만 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흑(黑)의 기운에, 윤화는 떨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윤화가 겪고 있는 무녀로서의 이 고초를 이미 자신의 처였던, 윤화의 외조모에게서 종종 보았기에 낯설지 않았다. “흑의 기운이든, 정의 기운이든. 그 모든 기운을 받아내고 견뎌내고 이겨내야 하는 것이 무녀인 너의 몫, 아니더냐.” “할아버지.” “나도…네가 네 할미처럼 무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노인은 자신의 손녀에게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속내를 오늘에서야 드러냈다. 윤화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자신의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주름이 깊게 팬 얼굴이 윤화의 속을 더욱 아프게 내려치는 듯했다. “하지만 네 말대로, 네 할미의 말대로 다 연유가 있겠지.” “…….” “그리고 내가 그 서찰을 그 댁에 전해주려고 마음먹은 데에도 다…연유가 있지 않겠느냐.” 노인의 말에 윤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날이 밝는 대로 서찰을 써서 줄게, 할아버지.” “…….” “정말…무사히…아무 탈 없이 좌상 댁에 전해드리고…와야 해.” “예끼, 이 놈! 네 할배를 그리 만만히 보는 것이냐? 이래봬도 소싯적에 산 속 도적놈들은 내가 다 때려잡았다, 이눔아!” “할아버지….” 노인은 껄껄껄 웃으며 윤화의 등을 어루만졌다. 어느덧 무화산 저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밝아 오고 있었다. * * * “예상이 빗나갔어.” “…….” “달의 기운을 받으신 분은 채랑 아가씨가 아니라.” “…….” “채희 아가씨였어.” 윤화는 정수를 떠 놓은 상 앞에 예를 갖추고 앉아 치성을 드리다, 입을 열었다. 그러곤 붓과 노란 화선지 한 장을 꺼내 좌상 댁에 전할 서찰을 써내려갔다. ‘마님, 예측이 빗나갔사옵니다. 둘 째 아기씨인 채희 아가씨가 국모가 되실 운입니다. 이 서찰을 받는 즉, 채랑 아가씨를 이 곳 무화산, 제 처소에 머물게 하소서. 세자빈 간택이 있고 난 후, 초하룻 보름달이 환히 뜨는 밤이, 세자저하와 세자빈의 합궁일이 될 것이옵니다. 그 날의 보름달의 충만한 기운을 채희 아가씨와 채랑 아가씨가 각자의 자리에서 맞으신다면 두 분의 운명은 제자리를 찾을 것이옵니다. 이 서찰은 즉시 태워 없애주셔요. 저는 무화산을 떠나 치화산으로 거처를 옮길 생각입니다. 부디, 다시 마님을 뵙는 그날 까지 안녕, 또 안녕하시옵소서.’ 그렇게 서찰을 쓰고 난 후, 윤화는 다시금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께 절을 했다. 노인은 그런 윤화의 뒤에서 모든 걸 체념한 얼굴로 하늘만 바라보고 섰다. “할아버지. 다 되었어.” “먼저 치화산으로 떠나 있거라.” “싫어. 할아버지가 예 당도하면 같이 떠날 것이야.” “만일을 대비하자는 것이다. 만일 내가 변을 당한다면 그것은 필시 이 서찰의 존재나 너와 나의 행보를 꿰뚫고 있는 이가 있다는 말일 텐데.” “…….” “그자들이 너를 가만히 살려 둘 것 같으냐?” “할아버지 왜 자꾸 그런 재수 없는 소리만 하는 거야! 누가 우리 목숨 줄을 노리기라도 한 단 말이야?” “네 할머니는 항상 그래왔다. 이런 위험한 일을 풀고자 할 땐, 항상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행했다. 알고서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렇지만….” “곧 뒤따라 갈 터이니 딴 곳으로 새지 말고 곧장 치화산으로 향하기나 해.” 노인은 윤화가 건넨 서찰을 받아 낡은 도폭 소맷자락에 푹, 넣곤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연신, 윤화의 마음이 불안하기만 했다. “할아버지! 꼭 바로 뒤따라야 해! 알았지?!” “알겠다고 이눔아! 얼른 짐이나 싸!”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산을 내려가는 노인의 뒷모습에서 윤화는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 * * “약조한 날이 오늘이지요.” 좌상 댁, 정경 채화는 마른 침만 꼴깍 꼴깍 삼키며 마당을 왔다, 갔다 불안에 떨었다. “부인.” “왜이리 불안한 것일까요.” “믿어봅시다, 운명을.” 좌상은 채화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방에선 이미 채비를 끝낸 두 아기가 누워있었다. 둘 중 하나는 오늘 이 집을 떠나 기약 없는 그 날까지 무화산에서 지내야만 했다. 정경은 한숨을 푹 내쉬며 안채로 들어와 두 아기를 보듬었다. “미안하구나. 따뜻한 밥 지어 맥이고, 예쁜 옷 지어 입혀서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함께…살고 싶었는데…” “…….” “부족한 어미라…, 이리도 못난 어미라…미안하구나, 내 새끼들.” 채화는 두 아기를 보듬고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찌하였든, 둘 중 하나와는 이별인 날이었으니. 곱게 싸놓은 보따리를 먹먹한 눈동자로 내려 보던 채화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약조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 신시가 되었는데, 아직 아무 소식도 없으니…” 좌상은 안채로 들어서며 근심 가득한 얼굴로 둘 째, 아기인 채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이 곳에 아무도 당도하지 않는다면 윤화가 예언한대로 첫 째인 채랑이 국모의 운을 타고난 아이고, 둘 째 아기인 채희가 이곳을 떠나야 했다. 이미 예견된 운명이었지만…, 좌상은 심란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 “채희가…떠나야 할 운명인가 봅니다.” 좌상은 담담한 척, 그 말을 내뱉었지만 마음이 착잡해져오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좌상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곤히 잠들어 있는 채희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하염없이 채희를 내려다보았다. “아가…참으로 기구한 운명이구나.” 어느덧 좌상의 눈동자에도 뿌연 눈물이 드리웠다. * * * 무화산을 떠난 지 이틀 째 되는 날, 노인은 부지런히도 걷고 걸었다. 끼니조차 거른 채, 제 시간 안에 좌상 댁에 당도하기 위해 묵묵히 걸었다. “이 서찰을 무사히…전해드려야 할 텐데.” 어느덧 날이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시간은 신시를 지나 유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이제 도성까지 한 고개만 넘으면 되었다. 노인은 도포 소맷자락 속에 담긴 서찰을 다시금 더듬으며 깊은 산 속으로 들어섰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내일 눈이라도 한바탕 내릴 참인지, 달빛을 밤 구름이 뿌옇게 에워싼 듯 했다. 옷깃을 여미며 노인은 오로지 구름이 쌓인 뿌연 달빛에 의존한 채, 어두운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 때, “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걷던 걸음을 멈추어 섰다. 등 뒤로 식은 땀 한 줄기가 슥, 흘렀다. 좋지 않은 예감이 몰려왔다. 노인은 그대로 멈춘 채, 뒤를 돌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노인은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아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그리고 그런 노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는 분주한 발 소리 하나.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서찰이 든 도포 소맷자락을 꾹 쥔 채, 내달리기 시작했다. 낙엽과 빈가지가 노인의 다급한 발자락에 스쳐 바스락 바스락 다급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 뒤를 맹렬히 따르는 검은 그림자! 노인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내달리고 또 내달렸다. 이 고개만 넘으면, 이 고개만 넘어 저잣거리에만 당도한다면 몸을 숨길 방도가 있을 테였지만. “허억-허억-허억-” 이 어둠이 내린 숲에서 노인은 그저 독 안에 든 쥐일 뿐이었다. 노인의 거친 숨소리가 숲을 가득 매웠다. 그리고 순간, 노인이 있는 힘껏 내달리다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으윽-!” 그리고 노인이 예상한대로 노인이 넘어져 숲속을 뒹굴자 그런 노인의 목에 서늘한 칼이 겨누어졌다. 노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자를 올려다보았다. 주위에 불빛 한 점 없는 탓에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건장한 사내인 듯 했다. “누구냐! 원하는 게 무엇이냐!” 노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뒷걸음질 쳤다. “내 놓거라, 그 서찰을.” “…무, 무슨 서찰을 말이냐, 이놈아!” 노인이 발뺌하자, 자객은 더욱 노인의 목에 칼을 깊숙이 들이밀었다. 노인은 마른 침을 살피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렀다. “그 무당 년이 준 서찰을 내놓으란 말이다. 그 서찰을 들고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던 게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러는지 모르겠으나! 짚어도 한참을 잘 못 짚었소이다! 내겐 서찰 따위는…!” “너는 어차피 죽게 되어있다. 끝까지 발뺌하고 그 서찰을 내놓지 않는다면 너는 내 손에 죽을 것이고, 그 서찰을 내놓지 않고 도망을 간다 해도,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 “니가 살 길은 오직 하나. 그 서찰을 내게 넘겨주는 것 뿐.” “…….” “그 서찰을 내게 넘긴다면 니가 그 서찰을 들고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 지는 궁금해 않겠다. 목숨 또한 살려줄 것이다.” 노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복면을 쓴 자객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더듬더듬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에 기댔다. 마른 침을 삼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윤…화야….” 노인은 비통한 표정으로 손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이것을 내어줄테니…그럼…약조하시오. 내 손녀만큼은…손녀만큼은 꼭 살려주시오.” “약조하지.” 그리고 노인은 벌벌 떨며 소맷자락 속 서찰을 꾹, 쥐었다. * * *
제 10 장. 낭자, 이름이 무엇이오. (1)
“참으로 어여쁘다.” 다음 날, 채랑이 손수 준비해 놓았던 옷을 곱게 차려입은 채희가 경대 앞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썩 분칠 솜씨가 좋지는 않지만.” “…….” “내가 한 번 해주어 볼게.” 채랑은 자신이 더 들떠, 뽀얀 채희의 얼굴에 분을 톡톡 두드렸다. 채희는 양 볼이 발그레 상기된 채, 낯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샛노란 저고리에, 자줏빛 치마. 고운 색감의 배씨댕기 까지. 한 번도 치장해본 적 없던 채희라, 영 낯설기만 했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와…너무도 곱다. 양귀비가 따로 없어.” “언니두 참…” “이리 꾸며놓고 보니…나와 조금, 다른 것 같기두 하구?” 채랑은 그리 말하며 호호호, 웃었다. 밖에선 좌상과 정경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듣고 있었다. “얘, 채랑아. 들어가도 되겠느냐.” “예? 예, 어머님.” 좌상과 정경이 채랑의 방으로 들었다. 곱게 옷을 입고 한껏 꾸민 채 경대 앞에 앉아 있던 채희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좌상과 정경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쩜…이리도 고울 수가 있느냐.” 좌상과 정경 역시 처음 보는 채희의 어여쁜 모습에 감탄해 마지않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쑥스러운 듯 채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냥 장옷을 뒤집어쓰고 책방만 서둘러 다녀오면 되는데…언니가 이리 아침부터 꾸며 놓아서…” “그래두 이리 입혀 놓으니 참으로 곱지 않아요? 나랑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그렇죠, 어머님 아버님?” “그러게? 우리 채희가 채랑이보다 훨씬 더 어여뻤구나? 하하하!” 모처럼 만에 핀 웃음꽃이었다. 언제나 채희를 산 속 깊은 곳에 홀로 지내게 해두어 마음 편한 날 없던 정경과 좌상이었다. 채희는 곧 고운 비단 장옷을 채랑에게 건네받곤 방을 나섰다. 채랑은 채희가 저잣거리를 다녀올 때까지 이 방에서 꼼짝 않고 자수나 놓고 있겠다 했다. 혹여, 채랑이 방 밖을 나서 돌아다니다 노비들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채랑 아가씨가 둘이라는 소문이 날 게 뻔 하였으니. “그럼…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모처럼, 아니 처음으로. 채희는 장옷을 뒤집어쓰지 않고서 방 밖으로 나섰다. 마루 아래서 채희를 기다리고 있던 휘영은 처음 보는 채희의 어여쁜 모습에, 눈이 동그래져 흠칫 놀랐다. 채희는 그런 휘영의 놀라는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많이 어색한가.” “…아, 아닙니다, 아가씨.” 꼭,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 했다. 휘영은 괜히 자기가 쑥스러워져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한 손에 비단 장옷을 꼭 쥔 채, 사뿐사뿐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서는 채희. 그리고 마당에서 옹기종기 비질을 하고 있던 노비들은 채희의 모습에 저들끼리 모여 숙덕댔다. “채랑 아가씨, 간밤에 좋은 꿈이라도 꾸었나 보오.” “그러게. 안색이 훨씬 더 좋아지셨다?” “오랜 벗이라는 그 무녀가 와서 그런가?” “아, 어제 그 허름한 차림의 여인이 무녀인가?” “그런 소문이 있던데. 확실치는 않어. 무녀란 말도 있고, 오랜 벗이란 말도 있고.” 채희의 정체를 두고 노비들은 왈가왈부하다, 이내 꾸민 채희의 모습이 너무 곱다며, 채랑 아가씨가 혼례를 치룰 때가 다되어 미모에 물이 오른 것이라 저들끼리 감탄했다. * * * “내 모습이…언니와 흡사하지 않은가…?” 채희는 연신 길을 지나며 자신을 보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고개를 푹 숙였다. 휘영은 그런 채희의 뒤를 따르다 숙덕대는 사람들을 보곤 옅게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채랑 아가씨와 같사옵니다.” “그런데…어찌 사람들이 저리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보는 것인지.” “이상한 눈초리가 아니라, 아가씨가 고와서 그러는 것일 겁니다.” 휘영의 말에 채희는 걷던 걸음을 멈추곤 휘영을 돌아보았다. 휘영의 곱다는 말에 양 볼이, 그만 발그레해졌다. 채희는 흠흠, 헛기침을 하곤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늘 숨어 지내는 것이 익숙한 터라 사람들의 평범한 시선들도 불편하신가 봅니다.” “…그런 것인가. 그냥 장옷을 뒤집어써야겠다.” 채희는 곧 비단 장옷을 뒤집어썼다. 한결, 편안해졌다. 채희는 처음으로 편안한 걸음걸이로 여유 있게 주위의 풍경들을 둘러보며 저잣거리로 향했다. 언제나 꽁꽁 싸맨 채, 행여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든 채 바삐 걸음을 움직여야만 했다. 이리도 바람도 부드럽고, 햇살도 따사롭고, 꽃 냄새도 향기로운 지 채희는 그간 알지 못했다. “아름다운…봄날이구나.” 채희는 그렇게 읊조리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뒤에서 그런 채희를 바라보던 휘영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평소와 달리 조금 들떠 보이기까지 하는 채희. 그러던 그때, “하하하! 술이라도 한 잔 따르라니까!” “이거 놓아주셔요!” “어허!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야” 웬 으리으리한 기방 앞에서 삿갓을 비뚤어지게 쓴 도령이 가채를 높게 올린 기생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끌고 있었다. 채희는 걷던 걸음을 멈추곤 둘의 실랑이를 바라보았다. “보는 눈이 많사옵니다. 도련님. 제발, 제발 놓아주셔요.” “네깟 년이 술을 따르라면 따를 것이지! 웬 말이 많아!” “그러니 안으로 드시라니까 왜 쇤네의 손을 잡아끌고 나오신답니까!” “집으로 가자! 내 오늘 네 년이 말만 잘 들으면 내 첩이라도 삼아 줄 터이니, 하하하!” 그러곤 재미있다는 듯, 삿갓을 비뚤어지게 쓴 도령 무리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곧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도령의 손에 질질 이끌려 기방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곱게 생긴 기생. 채희는 장옷을 꾹 쥔 채, 저벅저벅 그들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그런 채희의 앞을 휘영이 가로막고 섰다. “그냥 모른 체 하고 가시지요, 아가씨.” “비켜라.” “그러다 곤혹이라도 치루시면…” “치러도 내가 치른다. 너에게도, 그리고 언니에게도, 아버님에게도 누가 될 행동은 하지 않을 터이니 비켜라.” “하지만. 채랑 아가씨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겁니다. 차라리 관아에 가서 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런 무례한 짓거리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버님께 누가 되는 행동이다. 비키라 하지 않았느냐.” 그때, 그런 휘영과 채희 뒤로 우의정 장자인 민혁과 부인, 유정이 지나다 이내 걸음을 멈추곤 채희와 휘영을 바라보았다. 일전의 면이 있던 휘영을 유정은 빤히 바라보곤 이내 장옷을 뒤집어 쓴 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민혁 역시, 유정을 따라 민혁과 채희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관아에 간들 달라질 것이 무엇 있느냐.” “…….” “관아에서 저 도령에게 곤장이라도 칠 것이냐?” 당돌한 채희의 말에 유정은 눈이 동그래져 채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민혁 역시 그런 채희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가재는 게 편이라, 저 여인을 지켜줄 이는 관아엔 없다. 그러니 비키거라.” 하고 채희는 휘적휘적 휘영을 지나쳐 무례하게 기생을 질질 끌고 가는 도령 앞에 우두커니 섰다. 도령의 가까이에 가니 술내가 진동을 했다. 채희는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미 창피함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기생은 갑작스런 채희의 등장에 흠칫 놀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손 놓아주시지요.” 채희는 장옷을 뒤집어쓴 채, 도령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술이 거나하게 취한 도령은 피식, 웃으며 채희를 한 손으로 거뜬히 밀어재꼈다. “상관할 바 아니잖아? 비켜!” 두어 걸음 물러난 채희는 다시금 도령 앞에 멈추어 서서는 도령과 그의 무리들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 당돌한 채희의 모습에 유정은 눈이 동그래져 고개를 갸우뚱했다. “좌상대감 여식 채랑 규수가 아니더냐?” “……” “일전에 보았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듯한데.” 늘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조곤조곤 말하던 얌전한 채랑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채희의 모습에 유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옆에서 그런 채희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민혁은, 낯익은 목소리에, 그리고 장옷 새로 보이는 낯익은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 했다. “어…혹시…그때…?” 채희는 뒤집어썼던 장옷을 벗으며 무례하게 구는 도령들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채희의 얼굴을 보곤 흠칫 했다. “좌상댁…채랑…아가씨 아닌가?” “그러한 듯한데.” 기생은 좌상댁의 채랑 아가씨라며 수군대는 무리들의 말을 듣곤 눈물을 훔치며 채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같은 여자가 보아도 한 눈에 반할만한 아름다운 외모였다. “그 손. 놓아 주시라 했습니다.” “아가씨가 참견할 일이 아니오. 가던 길이나 가시오!” 이번에도 채희를 손으로 밀치려 그 도령이 오른 손을 뻗었는데, 채희는 그 손을 잡아 채 아프게 홱, 꺾었다. “아! 아아! 아아아!” “놓으라, 했습니다.” 화가 많이 난 듯, 채희는 그 말을 딱딱하게 내뱉으며 술에 취한 도령의 오른 손을 아프게 꺾었다. 그러자 도령은 팔짝팔짝 뛰며 기생을 쥐었던 손을 잽싸게 놓곤 채희에게 놓아 달라 사정했다. “이거, 이거 놓아 주시지요! 놓았소! 놓았소!” 기생의 손을 놓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채희는 꺾었던 도령의 손을 놓았다. 당돌한 채희의 행동에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기생은 물론이거니와, 그걸 바라보고 서 있던 유정은 물론, 옆에 있던 민혁까지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이내 민혁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코끝을 매만졌다. 유정은 그런 채희의 행동에 입을 떡하니 벌린 채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어디 반가의 규수가 사내의 손을 저리 함부로 꺾어. 채랑 규수에게 저런 면이 다 있었나 봅니다.” “왜요, 어머님. 씩씩하고 정의로운 모습이 보기 좋은데요.” “아드님! 그런 말은 함부로 마세요! 이 어미는 보기만 해도 무섭습니다.” 하며 유정은 이마를 짚으며 슬쩍 민혁의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어찌! 이런단 말이오!” 아직 통증이 가시지 않은 도령은 채희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채희는 피식, 차갑게 미소 짓더니 이내 기생의 빨갛게 부운 손목을 쥐어 도령 앞에 보여 주었다. “그러는 도련님은 어찌, 연약한 여인네에게 이러신단 말입니까?” “흠…흠흠! 그것은 내 술이라도 한 잔!” “술을 기방에서 드실 것이지 어찌 기방에 있는 여인을 무례하게 잡아끌고 나와 이런 행패를 부리신단 말입니까?” “행, 행패…? 행패라니?!” “학문을 배우고 행하시는 공자님들이 이런 추악스런 행동을 하는 것이 행패지, 행패가 달리 행패겠습니까.” “…뭐?” “더는 부친의 존함에 누를 끼치지 말고 공자님답게 행동들 하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채희는 생긋,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이리도 고운 여인이 이리도 고운 미소를 지으니, 도령들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흠, 흠 마른기침만 내뱉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하나같이 옳은 말이었기에 채희에게 더 말대꾸도 못한 채, 서로 눈치만 보던 도령들은 이내 헐레벌떡 도망치듯 사라졌다. 채희는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치는 도령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괜찮습니까?” “괜, 괜찮습니다, 저는.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기생은 채희에게 고개를 푹 숙여 보이며 수치의 눈물을 닦았다. 그러자 채희는 자신의 소매 폭에 넣어 두었던 손수건을 꺼내 채희에게 건넸다. “은혜는 무슨. 괜찮다면 되었습니다. 창피해서라도 앞으론 그대를 저들이 찾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세요.” 하며 채희는 미련도 두지 않고 휙, 돌아섰다. 휘영은 그런 채희의 뒤를 따랐다. 기생은 시원스레 돌아서는 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채희를 황급히 불렀다. “아가씨! 아가씨!” “……?” “이 수건은…” “가지세요. 나보단” “…….” “그대가 더 필요할 것 같으니.” “…….” “저깟 놈들 때문에 눈물 보이지 마세요. 고운 얼굴 버립니다.” 하고 채희는 뒤돌아서서 갔다. 여인이었지만 참으로 멋있단, 생각이 들었다. 기생은 한참을 채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채희를 바라보고 있던 민혁은 서둘러 채희를 뒤따랐다. “아드님! 아드님 어딜 가십니까!” “어머님, 잠시만요! 잠시만 지체하겠습니다!” 채희는 다시금 장옷을 뒤집어쓴 채 책방으로 향하려 모퉁이를 돌았는데, 어디선가 급히 나타난 민혁이 그런 채희의 팔을 쥐었다. “……?” 자신의 팔을 갑작스레 쥐는 민혁에 채희는 화들짝 놀라며 장옷을 떨어뜨려 버렸다. 채랑과 꼭 닮은 얼굴. 하지만 어딘가 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일전에 채랑과 대화를 나누어 본 적 있는 민혁은 채랑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채랑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 채희는 경계의 눈초리로 민혁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가까이에서 본, 채랑의 아니 채희의 얼굴은 참으로 고왔다. 민혁은 가만히 채희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섰다. 그때, 휘영이 황급히 채희의 앞을 가로막고 서며 민혁을 제지했다. “무례하십니다.” 채희는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민혁을 덩달아 빤히 바라보다 이내 서둘러 떨어뜨린 장옷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는데, “낭자.” “…….” “우리…안면…있지 않소?” “……?” 채희는 안면이 있지 않냔 민혁의 말에 다시금 민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는데. “그저 지나치는 바람이라 여겨, 내 다시 낭자를 마주한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 “그것이 한낱 지나치는 바람이 아니었나봅니다. 이리 다시 만나, 한 눈에 알아보는 것이.” “……!” 채희는 민혁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장옷을 황급히 주어 뒤집어썼다. 심장이 쿵쾅 거렸다. 혹여 자신의 정체가 노출된 것은 아닐까 채희는 장옷을 뒤집어 쓰고도 모자라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모, 모릅니다, 나는.” 하고서 황급히 자리를 뜨려는데, “낭자. 이름이 무엇이오.” 어찌…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고서…, 저잣거리의 아니 한양 사람이라면 채랑의 얼굴을 모를 이 없을 텐데…어찌, 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고서 이름을 묻는 것인지. 채희는 순간 숨이 멎을 듯 했다. * * *
제목미정
1. 칠흑같이 어두운 골목길을 걷는다. 가로등이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 불빛 마저 희미해지는 곳을 걷고 있다. 지금 몇시쯤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시계를 들여다 보니 아날로그 싸구려 가죽시계가 깨져 있다. 대학 입학을 축하한다고 아버지께서 사주신 낡은 가죽 시계였다. 이제는 단종이 되서 건전지를 갈아끼우는일 조차 쉽지 않은데 시계 유리가 깨져 있다. ‘ 시계유리만 교체해주는 곳이 있었던가?’ 결국 정확하게 몇시인지는 확인하지 못한 채로 길을 걷는다. 와본 기억이 없는 곳인데도 이상하게 낯이 익다. 창문에 붙여진 찢어진 창호지, 철로 된 대문위에 붙여진 껌 씹고 나서 붙이는 스티커까지... 어디서 보았던가? 여름이 다가왔는데도 아직은 밤공기가 차가워 대충 걸치고 왔던 자켓을 여미어 본다. 길을 걷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 그래. 분명 그녀밖에 없었다. 분명 아까 시계를 보려고 손을 올리기 전까지는 저 여자는 없었다. 분명히 없었는데... 흐릿하게 보이는 가로등 밑에 누군가가 서있다. 아까는 확인하지 못했던 사람이 길 끝에 서 있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좀 더 앞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데도 그 사람의 얼굴은 확인하기 어렵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얼굴이 없는 것 같았다.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그 자리에 서있던 사람은 여자였다.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았는데 슬픈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처연했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누구인지 몰라도 확인해야한다. 머리가 지끈거려 얼굴이 찡그려진다. 그때 문득 생각이 났다. 매일 온 것 같았던 이곳은 매일 밤 그녀를 괴롭히던 꿈속이었다는 것을. 지금 꿈속에서 괴롭히는 이 여자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또 다시 손을 뻗는 것이다. 이번에야 말로 기필고. ‘ 너 대체 누구니? ’ 짜증섞인 말투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순간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 언니.... ” 땀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서 꿈에서 깨어났다. 침대 옆 시계를 확인해보니 매일 그렇 듯 시간은 새벽 4시 26분이었다. 마른 세수를 하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술을 깨지 못한 것처럼 정신이 몽롱하고 머리가 아파왔다. 시계 옆에 놓여진 두통약 한 개와 물을 삼키고 나서야 비로소 현실임을 깨달았다. 벌써 일주일째 반복되는 꿈을 꾸고 있다. 어두운 골목길을 걷고 있고 어떤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가까이 다가가면 자꾸 꿈에서 깬다. 이상하게 그여자는 지현과 스친 적이 있는것처럼 낯이 익었고 막상 생각을 해보면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멍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자리를 정리했다. “ 다시 자기는 틀렸네 ” 언제나처럼 자켓 하나를 두르고 베란다로 나갔다. 담배 한개와 라이터를 챙기고 베란다에 놓여진 의자에 앉았다. 무신하게 불을 붙이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처음 서울로 올라 왔을 때 유일한 낭만이라며 구매했던 작은 테이블과 의자는 맥주 한잔 대신 수북히 쌓인 담배와 재떨이가 놓여져 있었다. 아직 차가운 새벽 공기에 불을 부치며 쓰게 뱉는 담배연기가 하얗게 번진다. 그 때 손이 시려워 넣은 왼손에 무엇인가 잡혔다. 어제 충전해야지 하면서 챙기지 못했던 핸드폰이었다. “ 아,,, 충전해야 했는데 배터리가 남았던가 ? ” 눈을 찌푸리며 켜본 핸드폰 액정에는 배터리 12% 절전모드 화면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빨갛게 표시된 알림표시. 부재중 3통, 메시지 1통 막상 이런 부재중 연락이 요즘 들어 무서울법도 한데 일단 확인해 보았다. 부재중 1통 고딩친구 김수연 부재중 1통 고딩친구 김수연 부재중 1통 고딩친구 김수연 모두 고등학교 동창 수연의 번호였다. 혹시나 하고 확인 한 메시지에도 역시 그녀의 번호가 찍혀져 있었다. 지현아 일어나면 전화좀 줘 - 낯선 그녀의 연락은 당황스러웠다. 지난번 억지로 끌려간 고등학교 동창모임때 번호를 교환했었지만, 지현과 수연은 친한편이 아니였다. 물론 사회에 나와서도 연락하는 사이는 더욱 아니였다. 다만 으레 그렇듯 어색하기 짝이 없는 그 공간의 훈훈한 분위기를 채워보고자 멋쩍게 교환한 번호였다. 동창회 이후로 잘 들어갔냐는 흔한 안부인사도 없었던 사이에 갑자기 전화라니. 더군다나 일어나면 전화를 달라는 그녀의 메시지는 잘못보냈나 생각하는 의심조차 들수 없게 했다. 낯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책추천] 복지 정책이 궁금할 때 읽으면 좋은 책
안녕하세요. 책과 더 가까워지는 곳, 플라이북 입니다 :) 평소와 다름 없는 일상이 이렇게 소중한 일이었던가요? 오늘도 감사한 마음과 잘 될거라는 믿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로 정부에서는 여러 복지 정책으로 지원금도 지원해주고 있는데요. 알면 알수록 삶에 도움이 되는 복지에 대한 책 5권을 소개해드릴게요! 모두 건강에 유의하세요 :) 대한민국 복지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 우리나라의 복지 원리를 알려주는 책 복지의 원리 양재진 지음 | 한겨레출판사 펴냄 > https://bit.ly/2UE3ax3 기본소득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시행 중인 영국을 통해 본 기본소득의 힘 왜 우리에겐 기본소득이 필요할까 말콤 토리 지음 | 생각이음 펴냄 > https://bit.ly/3aF1AAH 스웨덴은 어떻게 복지 강국이 되었을까? 스웨덴이 100년간 지킨 좋은 정책을 담은 책 스웨덴의 저녁은 오후 4시에 시작된다 윤승희 지음 | 추수밭 펴냄 > https://bit.ly/39BZRuj 눈부신 정치적 경제적 성장에도 왜 우리는 힘들까? 복지와 통일의 나라 독일을 통해 바라본 우리나라의 현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지음 | 해냄출판사 펴냄 > https://bit.ly/2JDaq5Q 무엇이 덴마크를 행복의 나라로 만들었을까? 행복지수 1위 덴마크의 6개의 핵심 키워드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펴냄 > https://bit.ly/3bKU6Mv 플라이북 앱 바로가기 > https://bit.ly/3bOltW8
[책추천] 넷플릭스로 다시 만날 수 있는 책 5
안녕하세요! 나만의 스마트한 독서 앱 플라이북입니다. 요즘 넷플릭스를 이용해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는 분들이 많은데요. 오늘은 넷플릭스 속에서 찾은 이야기들을 추천해드립니다. 똑같은 이야기라도 책으로 읽는 것과 영상으로 보는 것은 각각 다른 경험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번 주말, 넷플릭스에서 만났던 이야기를 책으로도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남몰래 쓴 편지가 그에게 발송되었다! 읽다보면 연애하고 싶어지는 사랑스러운 이야기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제니 한 지음 | 한스미디어 펴냄 작은 시작이 큰 변화를 만든다! 마을을 변화시킨 한 소년의 감동 실화 바람을 길들인 풍차 소년 윌리엄 캄쾀바, 브라이언 밀러 지음 | 서해문집 펴냄 과연 저곳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초자연적이면서 미스테리한 환상적인 이야기 서던 리치 제프 밴더미어 지음 | 황금가지 펴냄 그녀는 살인자일까? 피해자일까? 아주 섬세하고도 미묘한 심리게임 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 민음사 펴냄 그것을 보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책 버드 박스 조시 맬러먼 지음 | 검은숲 펴냄 지금 플라이북 앱에서 추천 더 받기 > http://me2.do/5DPodUE8
Chapter 55. 당분간 너, 내 ‘자기’ 해라.
“남자…친구요?” 수정의 질문에 로라는 머뭇, 거렸다. 머뭇거리는 로라의 모습을 수정은 의아스럽게 바라보았다. “있…어요.” 그 말을 하는데 로라의 심장이 찌릿, 했다. 수정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이 여자…무엇을 알고 날 찾아온 걸까?’ “다짜고짜…이렇게 찾아와서…상담을 나누기엔…” “…네?” “우리 둘 사이가…그리 가까운 건 아니라…많이 망설였어요.” “…….” “그런데…도저히, 말을 할 곳이 없어서.” 수정은 자신 없다는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여전히 긴장한 채, 로라는 수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 듯하였다. 꼭, 유부남 꼬시다 걸린 불륜 녀가 된 심정이었다. “그래도 앞에서 눈물 한 번 보였다고.” “…….” “두 번은…쉬울 거란 생각에.” 수정은 들었던 고개를 들어 로라를 올려다보았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였다. 로라는 당황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리…무례함을 범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니…저…저기.” “남자…친구가…” “…….” “양다리인 것 같아요….” “예, 예?!” “저는…이제 어떡하죠? 흐윽…” 수정의 말에 로라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인 즉슨, 그 양다리의 상대가 ‘로라’인 것은 수정이 아직은 모른다는 것!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틀어막고서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는 로라였다. 수정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가녀린 어깨를 들썩였다. “그…그게…무, 무슨…” “많이…놀라셨죠…, 저도 너무 놀라, 처음엔 믿을 수 없었어요.” “저…그러니까 그게….” “실은 제 남자 친구가…” “네?” “여기 바로 옆…동물 병원…” “……!” “원장…선생님이거든요….” “아…!” 쾅, 쾅, 쾅! 로라의 귓가에 판사봉이 쾅, 쾅, 쾅 크게 내려쳤다. 그랬다, 이로써…맞을까, 아닐까 미련과 의심, 희망과 고문 사이에서의 기나긴 밀당은 끝이 나버렸다! * * * 기태는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고 운전석에 기대었다. 머리는 더욱 지끈거려다. 두통약을 먹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어, 벌써 세 알 째 흡입 중이었다. 병원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주차장에 한 시간 째 버티고 있던 기태. 곧 기태는 차에서 내리기 위해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떠, 정면을 바라보았는데. “……?!” 수정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또 무슨 일로…, 기태는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리기 위해 문고리를 쥐었던 손을, 놓아버렸다. - RRRRRRR 아버지, 새 어머니, 번갈아 가며 휴대폰에 불을 내고 있었다. 기태는 성가시다는 듯, 전원 버튼을 눌러 휴대폰을 끄고 말았다. 자신의 숨통을 조여 오는 통에, 기태는 이제 숨마저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기태는 습관처럼 로라를 찾았다. 두 눈을 감아도, 선명히 떠오르는 로라의 얼굴. 밝고, 활기찬 그녀를 떠올리면 기태의 갑갑해져 오던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듯 했다. “로라씨….” 기태는 로라의 이름을 기침처럼 내뱉으며, 시동을 걸었다. 로라에게 가기 위해서, 아니…자신이 살기 위해서. * * * “어디 갔데?!” 도헌은 일찍 볼 일을 보고 병실로 돌아왔는데 로라는 없고, 덩그러니 침대 위에 메모지 하나만 놓여 있었다. -구도발. 이 몸은 워커홀릭이라, 도저히 못 쉬고 워커 하러 간닷! 술 마시러 간 거 아니니까, 늦게 들어와도 의심하기 없기. 너 오늘 피곤하면 집 가서 자도 됨. ㅃㅃ “뭐야…이제 와서 워커홀릭인 척 하기는.” 도헌은 어깨를 으쓱하며, 사 온 아이스커피를 내려놓았다. 가게에 간 거겠지, 도헌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2시. 밥은 먹었으려나…, 의사 선생님이 무리하지 마라고 했는데. 도헌은 손목시계를 한참 내려다보다, 이내 로라의 가게로 가기 위해 다시금 커피를 쥐었다. 그때, - RRRRRRR “어….” 집이었다. 집에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도헌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선뜻 전화를 받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전화가 곧, 끊겼고 10초 정도 후에, 다시금 걸려왔다. 집이었다. 더는…, 피할 길이 없다고 도헌은 판단하였다. “여보세요.” “한국이지, 너? 당장 집으로 와라.” “엄…마.” “엄마고, 아빠고, 부를 것 없어. 당장 와.” “…오늘은 못가요.” “내가 그리로 찾아갈까?!” “내일…갈게요. 죄송합니다.” 하고 도헌은 전화를 끊었다. 분명, 지혜의 짓일 테였다. 도헌은 한숨을 내쉬며, 이젠 자신의 전화번호 목록부에선 지워지고 없는 그녀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여보세요.” “한지혜.” “어머님 전화…받았니?” “…뭐하는 짓이냐?” 역시, 그녀의 짓이었다. 마치 도헌이 전화가 걸려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지혜는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도헌은 밀려오는 분노감에, 당장이라도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뭐라고…지껄였냐, 너.” “어머님께 다 말씀 드렸어. 내 잘못도, 너 귀국한 것도.” “근데…우리 엄마가 아직 널 며느리로 생각하고 계시더냐?” “무릎 꿇고 빌었거든. 필요하다면 너에게도 무릎 꿇고 빈다고도 했고.” “필요…하다면? 너 굉장히 골 때리는 애구나? 이 정도였냐?” “만나. 만나서 얘기해. 너 여자랑 동거한다는 얘긴 아직 안했어. 그거까진 못 하겠더라.” “미친….” “뭐라고?” “넌 진짜 미친 애야. 만나긴 뭘 만나. 총 맞았냐, 내가? 밥 맛 떨어지게 너랑 얼굴 마주보고 앉아 있게?” “뭐?” 뭐?, 하는 황당해하는 지혜의 목소리를 끝으로 도헌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앞에 놓인 의자를 쾅, 하고 발로 차 버리곤 병실을 나섰다. * * * “아니…그…건 제가…” “혹시…보신 적 없을까요?” “네…뭐, 옆 집…선, 선생님이라면…왔, 왔다, 갔…갔다.” ‘이건…대체 무슨 상황이야? 내가 여기서 이렇게 모른 척 하고 넘어가버리면 불륜 녀랑 다를 게 뭐야? 나도 피해자라구! 나도 모르고 만난 거라구! 얼른 이 여자에게 모든 상황을 이야기 해야만 해!’ 하고 마음먹었지만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이 여자에게, 로라는 차마 그 말만은 하지 못했다. “혹시 다른 여자랑…같이 있는 건…못…보셨나요?” “…예에?! 아, 저, 저는…그, 글쎄요.” ‘다른 여자 = 오로라’ 로라는 머릿속으로 그 공식을 그리며 난감하다는 듯, 울상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수정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거든요…. 놓치고 싶지 않아요.” “…겨, 결혼이요?!” ‘그래놓고 나한테 결혼 하자고?! 이 새끼가 진짜?!’ 로라는 울컥, 화가 치솟았다. “이해…안 되시겠지만…저, 그 남자 놓치기 싫어요. 나쁜 사람인 거 알고, 지금 다른 여자 생긴 것두 알고…헤어지는 게 맞다는 것도 알지만.” “…….” “마음이 그러질 못해요…, 잠시 그 남자가…방황하는 거라…생각하고 있거든요. 다시…꼭 돌아올 거라 생각해요.” 로라는, 진심어린 그녀의 말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어쩌면 지금의 자신보다 기태를 더욱 사랑하고, 또 기태의 방황에 더욱 마음 아파하고 있는 듯 하여 로라는 불편해져 왔다. “상대방의 그 여자는…남자 친구 분이 여자 친구가 존재한다는 걸…알고…있나요?” 모든 것이 꼭, 드라마 속 같았다. 자신이 철저하게 연기를 하고 있으니, 꼭 짜인 대본을 두고 드라마를 촬영하는 것만 같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 질문을 던지며, 로라는 수정의 표정을 살폈다. 순간, 수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요.” 수정의 말에 로라는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이것이 안도를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안도하고 말았다. “그럼…이제 어쩌실 생각이죠?” 자신도 지금 어찌해야 할지 모르면서. 그 질문이 얼마나 그녀에게 가혹한 것인 지, 알면서도 로라는 물었다. 지금 자신의 남자 친구인 기태의, 퍼스트 여자 친구인 그녀에게. “헤어지진…못해요. 기다릴 거예요.” “…기다리면…돌아는, 간데요 남자 친구 분이?” “네. 그럴 거라고 믿어요, 저는.” “확신…하시는 것 보니, 오래 사귀셨나 봐요.” “2년 조금 넘게요. 결혼은 이번 해에…약속했었어요.” 이것은 상담을 가장한, 뒷조사였다. 현 남친의 양다리에 대한 조사. 로라는 그 질문을 내뱉으며 스스로의 뻔뻔함을 칭찬했다. “그럼 상견례는…다 한…상태겠군요.” “네. 식 날짜만 잡으면 되는 거였는데…그랬는데….” “울지 마시구요. 아마 그 상대방 여자도 몰라서 그럴 거예요.” ‘거짓말. 다 알면서!’ 로라는 자문자답하는 것도 아니고, 입 밖으로는 질문을 내뱉고 대답은 속으로 하고 있었다. 그녀의 진심어린 눈물이, 어쩐지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이렇게 마주보고 있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그래서…제가…고민이에요.” “네?” “이걸…그 여자에게 모두…말을 해야 할지.” ‘헉! 그 여자…가 누군지…설마 알고 지금 날 찾아 온 거 아냐?! 괜히 나한테 차 선생님한테서 떨어져라, 경고라도 하려고?!’ 로라는 속으로 화들짝 놀라며 입을 떡 벌린 채 그녀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 그녀는 로라를 응시하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말을 하면 헤어져 줄까요?” “예, 예?!” ‘헤어져 줄 거예요?’ 하고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로라는 난감하다는 듯 입술만 물었다, 달싹였다, 안절부절이었다. “그 분이 알아서 헤어져주길 바라기엔…그 시간들이 너무도 지옥 같아요.” “그 여자가…누군지…알고는 계신건가요?” “아니요…, 하지만 오빠 휴대폰만 뒤져보면…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 싸이코패스도 아니고 설마 모든 걸 다 알고 와서 지금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연기를 펼치진 않을 것이었다. 수정은 연신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그 여자도 사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조금만 더…기다려 보세요.” “…흐윽…흑.” “그 여자도…아예…모르진 않을 거예요.” 이래놓고, 그 여자가 자신인 걸 이 여자가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큰 상처와 배신감을 얻게 될지, 로라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거렸다. 로라는 주먹을 꾹 쥐곤 수정을 빤히 바라보다,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세컨드 주제에, 퍼스트를 위로하다니. 살다 살다, 돈 주고도 경험 못할 희귀한 경험이구만.’ 로라는 멋쩍게 웃으며 수정을 위로했다. “그 상대방 여자는 더 알려고 하지 마시구요, 그 남자 친구 분…굳게 믿구…기다려보세요.” “네…, 그럴게요. 그래야겠어요.” “그렇게 믿고…계신 남자 친구 분이라면…꼭 돌아갈 겁니다. 그런데요.” 로라는 말리고 싶었다. 자신 역시 지금, 기태의 손아귀에 있는 상태였지만…그녀를, 이토록 마음 여린 수정을 말리고 싶었다. “웬만하면…헤어지는 쪽으로 생각해보세요.” “…예?” “그렇게 썩…좋은 사람 같진 않아요.” “…….” “있죠, 돌아올 사람이었음.” “…….” “애초에 떠나지도 않아요.” “…….” “그런 사람은 돌아와도 돌아온 것이…아닌 거죠.” “…….” “또 언젠간 떠날 거예요. 그리고 습관처럼 다시금…찾을 거예요, 그쪽을.”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로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그리고 그럴 처지도 아니었으면서 로라는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로라의 말에 생각에 잠긴 듯, 수정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제 말…너무 야속하게 듣진 마시구요.” “알아요. 감사해요, 이런 푸념…들어주셔서. 그래도 이렇게 말하고 나니 속이…시원해요.” “…아, 뭘요.” “혹시나 제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랑 있거나…지나가는 걸 보게 되면…” “…예?” “제 번호예요, 이쪽으로 연락 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아, 네….” ‘대체 나는 이 드라마 속에서 세컨드 인거야, 아님 악역인거야, 아님 스파이인거야.’ 로라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자신의 번호가 담긴 쪽지를 건네자, 손을 덜덜 떨며 받았다. “죄송해요, 이런 부탁…드려서.”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때, 누군가가 벌컥 가게문을 열고 들어섰다. 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뒤를 돌아보았다. “오호라! 밥 먹었어?!” 구도발이었다. 수정은 도헌의 등장에, 도헌을 한 번 로라를 한 번 바라보더니 황급히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남자…친구 분이신가봐요.” 하는 수정의 말에 도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라를 바라보았다. 로라는 그런 도헌에게 눈을 찡긋해보였다. “네…! 자, 자기! 왔어?!” ‘자기라니…구도발에게 자기라니!’ 로라는 속으로 절규하며 성큼 도헌의 곁에 섰다. “자…자기?!” “그래, 자기, 내 허니. 하하하!” “돌았…어요?” “하하하! 돌다니, 아, 자기-. 여긴 우리 가게 단골 손님이셔.” 도헌은 로라의 말에 수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낯이 익었다. 눈물범벅이 된 수정을 빤히 바라보다, 도헌은 로라가 갑자기 왜 이러나, 다시금 수상쩍은 눈으로 로라를 돌아보았다. 수정은 가만히 도헌과 로라를 바라보더니 이내 입술을 굳게 앙다물곤 로라 앞에 섰다. “양…수정이에요.” “…….” “종종…이렇게 들러도 되죠?” “…네? 아…네, 네. 저, 저는.” “…….” “오로라…입니다.” 수정은 로라에게 악수를 청했다. 로라는 그런 수정을 빤히 내려다 보곤 이내 수정의 손을 맞잡았다. 이로써 ‘차기태’의 퍼스트와 세컨드가 손을 맞잡은 경사스런 순간이었다. * * * “뭐어?! 그 여자라구요?! 미쳤어요?! 이름 가르쳐주게?!” “아, 나는 이제 안 해. 복수고 나발이고 안 해!” 수정이 돌아간 뒤 로라는 벌벌 떨며 휴대폰을 꺼냈다. “뭐하게요!” “전화하게. 차씨한테.” “차…씨?” “차기태말이야!” “언젠 선생님, 선생님, 정중히도 부르더니만?!” “선생 같은 소리하네! 이런 파렴치한!” 로라는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기태의 전화번호를 꾹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는 왜 꺼놓고 지랄이래?! 그래, 지은 죄가 많아서 전화도 제대로 못 받겠지!” 로라는 부르르 떨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도헌은 그런 로라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이제 어쩌시게? 퍼스트 보고 나니, 겁이 확 나요? 뺏니 뭐니 어쩌니 하더니만?” “야, 야. 그건 진짜 뺏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 다 사정이 있었잖냐. 아무튼! 이제 안 해.” 로라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카운터에 머리를 쿵, 하고 박았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은 그 누구보다 문드러지고 아파왔다. “왜…내 사랑은…” “…….” “다…이따위야?” “…똥차 가고 폐차 온 격이지, 뭐. 그러니 뭐랬어요! 잘 알아보고 사귀라…” “야. 구도발.” “아, 놀래라.” 로라는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도헌을 응시했다. 그러자 도헌은 미간을 찌푸리며 로라를 흘겨보았다. “뭘 또 그렇게 느끼한 눈으로 쳐다보고 난리래?!” “너.” “뭐요.” “당분간만 내 자기 해라.” ******* 오늘이 그러니까,,,월수금중에 월인데,,, 화,,,,^_^;욜 업,,,,뎃! 송구하옵니다ㅠ_ㅠ 그래두,,,화욜 날밝기전에 후딱,,,업뎃했으니,,용서를,, 전,,도망을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