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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무슨 약을 빠셨습니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보면 물을 만한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어쌔신 크리드 얘기가 아니다).

“무슨 약을 하셨길래…?”

최근에 발굴되어 아부다비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세계의 구세주(Salvator Mundi, 참조 1)를 보자. 예수의 눈이 붉은 색이고 표정이 매우 미묘하다. 한 마디로 약에 취한(stoned 혹은 high) 모습이다.

혹시 레오나르도도 마리화나 물고 그림을 그렸던 것 아닐까? 아니, 마리화나가 당시 북부 이탈리아에 있기는 있었나? 짧은 주말 특집 답변: 예, 있었습니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1484년 교황 자리에 오르자마자, 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라는 칙서(참조 2)를 발표한다. 여러가지 악마적 행위(즉, 마녀 행위다, 참조 3) 등등을 금지하는 칙서인데, 이 중에 마리화나(허브로 표현되어 있다)가 있다. 성체 대신 약을 빠는 행위가 미사 중에 있었다는 것인데... 이때는 레오나르도가 한창 일하던 시기임에 주목.

물론 믿거나, 말거나의 얘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눈빛은 물론 표정도 상당히 high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느낌이다. 게다가 레오나르도는 말그대로 만물박사였기 때문에 “허브”에도 분명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참조 4). 하지만 하필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현대적인 관심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기가 시작이기 때문에, 다 빈치의 양성애적인 성향과 함께 마리화나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타부”였다.

결론은, 재즈의 도시 뉴올리언즈(혹은 뉴욕), 현대 예술의 도시 파리처럼, 약 빤 르네상스의 도시(참조 5) 피렌체...라 할 수 있을지도. 증거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모나 리자도 약 빨아서 나온 그림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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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4,500억 달러에 매각됐다. 뉴욕타임스는 이 그림의 실구매자가 우리 모두 주목하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라 보도했는데(크리스티는 보도를 부인했다), 아무래도 사우디아라비아보다는 UAE의 루브르에 내거는 편이 그에게 더 나았으리라.

2. 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 https://sourcebooks.fordham.edu/source/witches1.asp

3. 씐나는 마녀 생활(2017년 5월 13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5205402364831

4. 거 왜, 다 빈치의 블로그 출판물(...)인 Codex Atlanticus에는 분명 식물학 챕터도 있다.

5. 기사는 소설의 도시 런던을 거론하고 있는데, 소설의 도시는 필자에게는 애석하겠지만 파리가 아닐까. 19세기 중후반을 따진다면(그 이전에도?) 당시 미디어 제국은 프랑스였지 영국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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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가능하다고 봐요 아주 옛날이라고 문명 혹은 문화가 후졌다고 보는건 선입견이죠 단지 현대는 기술문명이 좀 나아보이지만 그 옛날 르네상스 시대도 분명 오늘과마찬가지로 최고도의 문화를 즐긴다는 의식은 있었을듯 그러니 퇴폐문화 발달도 최고였을듯 그나저나 저 예수화.... 불경하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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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니카의 기원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너무나 유명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들 중 하나다(같은 맥락으로 너무나 유명하지만 너무 몰라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모나리자같은 그림도 있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가 피카소에게 의뢰하여 나온 그림으로서, 당연히, 말그대로 전쟁의 참상을 그렸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인 시각에 도전하는 이론이 나왔다. 한 마디로, 게르니카는 이기주의가 충만했던 나르시스트, 파블로 피카소의 가족 초상화(참조 1)라는 얘기다. 스페인 내전에서 폭격을 당했던 게르니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José María Juarranz(참조 2)라는 스페인의 한 연구자가 저서, “La obra maestra desconocida”에서 내놓은 이론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복잡한 여성편력을 감추기 위해 인민전선 정부가 의뢰해서 그린 그림인양 행세했었다. 사실 피카소의 모든 그림은 자화상의 다양한 변형에 불과하다. 후아란스 교수는 피카소를 벨라스케스, 혹은 고야보다 뛰어난 르네상스 예술가에 비유했다. 또한 대단히 비-정치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에 일절 관심을 주지 않았고, 그에 따라 게르니카에도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는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파리(la Rue des Grands-Augustins)에 있던 피카소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던 폴 엘뤼아르(Paul Éluard)와 크리스티앙 제르보스(Christian Zervos). 그리고 후안 라레아(Juan Larrea) 중 한 명이 그림을 보고 “게르니카!”라 외쳤고, 그게 그대로 제목이 됐을 뿐이다. 그랬더니 피카소가, “너네들이 그리 부른다면, 게르니카라 하지 뭐”라 답했다고 한다(참조 3). 그림을 보면, 종래 스페인(정부이든, 파시스트이든)을 상징한다든 황소는 피카소 자신이라고 한다. 말은? 당시 이혼 중이던 부인, Olga Khokhlova이다. 폭력적인 묘사를 통해 관계 악화를 그리고 있다.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그림은 애인 중 하나인 Marie-Thérèse Walter과 사망한 그녀의 아이다. 램프를 든 여인은 보통은 인민전선 정부를 상징한다고 하나 실상은 피카소의 어머니. 1923년에 제작한 어머니 초상화와 비슷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이 어머니의 아래, 달리는 아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뭔가 외치는 여자가 있다. 1884년 말라가 지진을 의미한다고 한다. 맨 아래, 누워 있는 남자는 피카소의 막역한 친구였던 Carles Casagemas, 여자친구인 Germaine Pichot에게 차여서 권총 자살(참조 4)한 인물이다. 워낙 충격이 커서 피카소의 “블루 피리어드”를 만들어버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림 속의 사내가 들고 있는 잘린 칼이 바로 권총을 상징. 그렇다면 게르니카는 크게 3 부분으로 구성된 셈이다. (1) 왼쪽에는 이혼 중인 처 올가(황소에게 막 뭐라 말하는 모습이라 왠지 모르게 납득…), (2) 오른쪽에는 말라가의 지진, (3) 아래에는 자살한 친구. 왠지 모르게, 입체주의/초현실주의/블루피리어드가 모두 모인 모양새다. 어떠신가? 작가의 말대로 Si non è vero, è ben trovato(참조 5)인가? 주말 특집. 믿거나, 말거나죠. ---------- 참조 1. 스페인의 유명한 가족 초상화가 바로 벨라스케스의 “Las Meninas”와 고야의 “La familia de Carlos IV”이다. 그래서 아래 단락에 발라스케스와 고야를 비교했던 것이다. 2. Institutos de Bachillerato의 지리학/역사학 교수였고, 게르니카만 14년 동안 연구했다고 한다. 3. 당시 파리에서 게르니카 폭격에 반대하는 시위 때문에 제목이 붙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그 시기에 그런 시위는 없었다고 한다. 4. 제르맨은 유부녀이자(...) 그림 모델이었으며, 그녀의 친구랑 피카소가 사귀고 있었다. 위에 언급한 Casagemas가 자살한 뒤, 그녀는 피카소랑 사귀었다. 5. Si non è vero, è ben trovato. / 사실이 아니더라도 잘 만들었죠. - 16세기 때부터 이탈리아어에서 쓰인 표현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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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은 역시 전시회 아니겠는가. 큰 마음 먹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전시회 정보다. 제목: 가브리엘레 뮌터, 단도직입적인 그림(GABRIELE MÜNTER. MALEN OHNE UMSCHWEIFE) 기간: 2017년 10월 31일 - 2018년 4월 8일 장소: 독일 뮌헨 렌박하우스(Lenbachhaus) 웹사이트: http://www.lenbachhaus.de/ausstellungen/gabriele-muenter/ 가브리엘레 뮌터는 당연히 별도의 소개가 필요한 인물인데, 또 그렇지도 않다는 점이 함정이다. 가령 까미유 끌로델을 얘기할 때 오귀스트 로댕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이다. 바실리 칸딘스키 때문이다. 물론 뮌터의 경우 끌로델보다는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점이 함정. 그래서 영화화가 안 됐을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칸딘스키랑 백년해로한 것도 아니다. 대략 10년 정도 같이 살았을 뿐(선생과 제자로 만나서 사랑했던 건 로뎅의 경우와 동일하다). 게다가 상당히 삶도 주체적이었다. 바로 “청기사파(Der blaue Reiter)”의 주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뮌헨의 렌박하우스가 세계에서 아마 청기사파 그림을 제일 많이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청기사파의 본거지였기 때문이기도 한데 애초에 이 청기사파는 무슨 특별한 미술 사조를 상징하는 파벌이 아니었다. 뮌헨 신인 작가 협회(NKVM)에서 칸딘스키 그림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렸다 하여 항의의 의미(참조 1)로 바이에른 진더스도르프의 한 커피 탁자에서 만들었다(참조 2). 다만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청기사파도 칸딘스키를 언급하면서 잠시 지나갔을 뿐이다. 하지만 당연히 고향 독일에서는 유명한 화가였고, 히틀러 통치 기간 동안 숨겨왔던 엄청난 그림들을 모두 렌박하우스에 기증했다(이제 렌박하우스가 왜 중요한 미술관인지 아시겠나?). 그래서 이번 회고전은 네 번째. 여기 전시회가 끝나면 미국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에서 8월 19일까지, 그 다음에는 독일 쾰른의 루트비히 미술관에서 내년 1월까지 한다. 다시 뮌터로 돌아와서, 그녀와 칸딘스키와의 관계 때문에 그녀의 그림이 평가절하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독자적인 스타일이 있다. 색깔의 선택은 물론이거니와 유머(!)도 꽤 보이기 때문이다(참조 3, 4). 그걸 보이려는 것이 이번 전시회 목표 중 하나다. 다만 링크한 FAZ의 이 기사가 뮌터를 몰랐던 사람이 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듯 하다. 뮌터에 대한 평가가 변화하는 상황을 복잡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칸딘스키 및 청기사단하고만 관련지어 얘기하는 것도 좀 협소하다. 그녀의 그림이 청기사를, 독일 표현주의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녀도 당당히 미술사에 이름을 크게 올릴 만하다. ---------- 참조 1. 이 협회(Neue Künstlervereinigung München)는 뮌헨의 표현주의 화가들 모임으로서 유명했으며 칸딘스키 본인이 협회장을 지낸 적도 있었는데, 칸딘스키의 추상화 경향을 협회측이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후에 히틀러의 퇴폐 예술 지정으로 협회 자체가 사라졌다.) 2. 커피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여러분. Der Sindelsdorfer Malerweg: http://www.sindelsdorf.de/seite/272861/sindelsdorfer-malerweg.html 3. 가령 기사에 나와 있는 “탁자에 앉은 칸딘스키와 에르마 보시/„Kandinsky und Erma Bossi am Tisch“(1912)”를 보시라. 4. Gabriele Münter: Mit Farbe ins Freie(2017년 12월 29일): https://derstandard.at/2000071147757/Gabriele-Muenter-Mit-Farbe-ins-Freie
제3제국을 묘사한 예기치 못한 출판물
https://www.faz.net/-in2-9mo4g 엘리자베트 뵈데커(Elisabeth Boedeker)라는 사서이자 여성운동 역사가가 있다. 1893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한 인물로서 그녀의 저서 중에, "25 Jahre Frauenstudium in Deutschland. Verzeichnis der Doktorarbeiten von Frauen 1908 - 1933 / 독일 여성 학문 25년, 여성 박사논문 목록(1908-1933)"이 있다. 1935년에 나온 책이다. 하필이면 왜 1933년에서 끊었을까? 독일과 1933년을 아신다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실 것이다. 1933년 3월 총선을 통해 나치가 집권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지 않지만) 독일 대학교에서 여학생 입학이 일반적으로 허용된 것은 1908년부터였다. 그래서 입학 허용 이전인 1902년 남녀 대학생 비율 36,000명 vs. 70명이었던 것이 1931년부터는 115,000명 vs. 22,000명으로 대폭 늘어난다. 그러니까 1908년부터 25주년 기념이기 때문에 1933년에서 끊었다는 이유도 있기는 하다. 뵈데커의 책에는 총 5,949편의 논문이 실려 있으며, 의학(참조 1)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망라하고 있다. 이중에 눈여겨 볼 전공은 다름 아닌 미술사학이었다. 히틀러가 제일 먼저 추진한 정책 중 하나가 바로 "퇴폐예술(Entartete Kunst)" 추방이었기 때문이다. 이 퇴폐예술은 다름 아닌, 모더니즘을 가리켰고, 그때문에 바우하우스는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폐교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참조 2). 따라서 이 책에 있는 미술사학 논문의 저자들(여성 박사들)은 모두 1933년까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일하던 이들이었고, 대부분 1933년에 쫓겨난다. 1. Margaret (Grete) Ring(1887 베를린 - 1952 취리히): 그녀의 어머니는 다름 아닌 막스 리베르만의 처제. 네덜란드 회화를 전공했으며 영국으로 이주했지만 영국 갤러리도 1940년 독일 공군에게 폭격을 당했... 2. Lotte Eisner(1896 베를린 - 1983 파리): 그리스 화병 그림을 전공했으며, 독일 영화 비평으로 유명했지만... 3. Agnes Waldstein: 1929년 Folkwang-Museum zu Essen 최초의 카탈로그를 작성했다. 그런데 그 카탈로그 제목이 "Moderne Kunst/모던 아트"... 4. Annie Mainz, Elisabeth Henschel-Simon: 각각 함부르크, 베를린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다가 쫓겨난 다음, 아예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다. 5. Lilli Fischel(1891 브룩샬 - 1978 카를스루에): "14세기 라인강 중류 지역의 조각"으로 박사 논문을 받았다. 그녀는 카를스루에 주립미술관 관장 역할을 맡으면서 모더니즘 화가들(대표적으로 반 고흐와 인상파) 전시를 추진했었고, 그때문에 쫓겨난다. (게다가 아버지가 유대인!) 6. Hanna Stirnemann(1899 바이스엔펠스 - 1996 베를린): 중세 독일 후기고딕 스타일로 박사를 받았으며, 나이 서른에 독일 최초의 정식 여자 관장이 됐다(예나 시립미술관/Jenaer Stadtmuseum). 그러나 6년뒤 관장 자리에서 축출되고, 해방 후에는 동독에서 다시 한 번 축출... 소위 "퇴폐 예술" 때문에 나치 정권 때문에 박해를 받았던 예술 관련자들은 매우 많다. 그래서 별도의 책(참조 3)이 있을 정도인데, 2010년에 나온 이 책보다는 당시 생상한 기록으로 남긴 뵈데커의 책이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이 바로 이 기사다. 유대인 혹은 유대계라서, 게다가 모더니즘 전문가라서 쫓겨난 그녀들의 일대기는 박사로 승승장구하다가 몰락하는 여성 지식인들에 대한 서사이기도 하다. 기사의 표현처럼, 제3제국을 묘사한 예기치 못한 출판물이기도 하다. -------------- 참조 1. 의학의 경우 1908년 입학이 허용되자마자 공식적으로 5천 명이 졸업했었다(여자 의사의 수요는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학위를 안 줬을 뿐이지). 그래서 논문이 워낙/이미 많은지라 제외. 2. 바우하우스 100년(2019년 1월 8일): https://www.vingle.net/posts/2553277 3. Biographischen Handbuch deutschsprachiger Kunsthistoriker im Exil / 유배당한 독일 미술사학자들 약사(略史): https://www.amazon.de/dp/3598113390/ref=cm_sw_r_tw_dp_U_x_rqp2CbWQP0MJP 4. 참고로 짤방 그림은 Thomas Theodor Heine (1867-1948)의 만평이다. "수험생, 환자에 대해 뭘 알아보시겠습니까?" "실크 속치마를 입고 있군요."
기차타고 다시 부다페스트로...
빈에서의 마지막날이 밝았네요... https://vin.gl/p/2716209?isrc=copylink 보세이 빈도 안녕~~~ 아침은 요거트 하나로... 숟가락이 안습이네요 ㅋㅋㅋ 렌터카 반납하기전에 연료 만땅 채워줍니다. 역 지하에 있는 AVIS 주차공간에 주차를 하고 키는 사무실에 반납... 머 차량 상태를 확인한다거나 하지도 않네요. 소쿨... 여기가 빈 중앙역입니다... 깔끔하네요... 아시다시피 아침을 요거트 하나로 때웠기에 점심은 제대로 먹어야죠... 커피도 한잔... 흠, 저희가 타고갈 기차가 15분 연착됐네요... 음, 이 아이가 뭐냐면요... 기차안에서 혹시라도 생길지모를 캐리어 도난에 대비해 자물쇠를 사려구요^^ 하지만 사용도 못하고... 제가 연착된 기차시간을 이용해 역에 있는 필론에서 자물쇠 포함 약간의 쇼핑을 했는데 넘 친절한 직원분이 하나하나 포장을 해주시는게 아닙니까... 동생은 시간 다됐으니 언능 오라고... 결국 직원분은 포장지를 싸주고 보내주시더라구요... 근데 부다에 오니 거기에도 필론이 있더라구요. 자리잡고 얼마 안있으니 직원분이 검표하러... 아, 자물쇠는 결국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캐리어 놓는 곳은 이미 full... 다행히 자리 위에 캐리어를 놓을 공간이 있어 올리고 나머진 좁지만 다리 앞에 놨어요 ㅡ.,ㅡ 추억의 이동 매점도 ㅋㅋㅋ 두시간 반정도 걸려서 빈에서 부다로 넘어왔네요... 빈 중앙역보단 좀 작고 낡아보였던 부다페스트 역... 이제 캐리어 끌고 숙소로...
달리의 타로 카드
https://www.vanityfair.fr/savoir-vivre/story/le-tarot-de-salvador-dali/10573?fbclid=IwAR2HjALqldM0bUymxnL6zAuHXbsPPfsQOprHD-DppdxqDfqtdvMevN_Cfq4 뭔가 아쉬워서 하나 더 쓰는 주말 특집, 살바도르 달리가 정말 온갖 미디어에 다 손을 댔다는 사실(참조 1)을 알고 계시면 이 또한 역시나, 하실 수 있겠다. 살바도르 달리가 직접 제작한 타로 카드들이기 때문이다. 올해 연말 혹은 내년 연초 선물로 제격 아닐까? 원래는 절판됐던 것을 독일의 아트북 전문 출판사인 타셴에서 다시 판매 시작했다(참조 2). 60불 밖에 안 하니까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구매 가능(그리고 인쇄된 책은 관세는 물론 부가세도 없습니다?). 잠깐, 절판됐었다고 표현했으니, 이미 이전에도 나왔다는 뜻? 그렇다. 이전에 아주 소량의 한정판으로 판매된 적이 있었다. 그 이유가 있는데… 자, 그럼 달리가 어째서 타로 카드를 제작했을까? 원래는 영화 소품으로 내보내려고 했었다. 어떤 영화? 007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 편이었다. 하지만 달리는 비싼 분이다(참조 1). 가격 협상이 안 맞아 결국 그 영화에 소품으로 내보내지 못 했다. 그래서 그냥 소량의 한정판매로 뿌려버린(?) 것(그걸 구매한 이들은 정말 투자를 잘 한 셈이다). 참고로 실제 007 영화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일러스트레이터 Fergus Hall의 타롯 카드(참조 3)를 사용했다. 달리는 짜증이 났다. 그래서 그리던 타로 카드의 “황제” 그림을 007에 나오는 로저 무어가 아닌, 션 코너리를 모델로 해서 그린다(참조 4). 그런데 이 사실 아시는가? 전혀 그런 이미지가 아니고 상당히 흔한 일도 아닌데, 살바도르 달리는 한 아내와 꽤 오랫동안 같이 삶을 살았었다. 러시아(타르타스탄) 출신의 갈라 달리 여사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달리는 아내를 모델로 하여 타로 카드의 황후 그림을 그렸었다. 마술사 카드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말이다. 이쯤 되면 달리 마음대로 막나가는 거냐, 할 수 있을 텐데 달리는 그래도 됩니다, 고객님. 물론 예술사적으로 이 타로 카드의 가치는 션 코너리나 갈라 달리가 아니다. 달리가 고전 그림을 재해석한 카드 그림이 워낙 많아서다. 고전 그림 뿐만도 아니다. 마르셀 뒤샹의 그림을 풍자한 것도 있다(참조 5). 참고로 달리는 이 카드 작업을 10년간 했었다. 한정판 출시는 1984년이었으며, 타로 카드 놀이, 혹은 예언(…)을 할 때 달리가 무엇을 참조해서 그렸는지,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몰라도 된다고 한다. p.s. 자기가 달리의 친딸이라 해서(부관참시까지 하여 수행한 DNA 테스트 결과는 아닌 것으로…) 잠시 세계 뉴스에 올랐던 Pilar Abel씨는 직업이 타로 카드 상담사(?)였다. -------------- 참조 1. 살바도르 달리와 플레이보이(2017년 6월 2일): https://www.vingle.net/posts/2113113 2. The Magician, Death, and the Moon : https://www.taschen.com/pages/en/catalogue/art/all/44640/facts.dali_tarot.htm 3. Tarot of the Witches cards by Fergus Hall : https://www.jamesbondlifestyle.com/product/tarot-witches-cards-fergus-hall 4. 숀 코너리와 로저 무어는 당시 상당한 경쟁 관계였다고 한다. 5. 가령 “컵의 여왕” 그림을 보면 두 가지 그림을 섞어서 뒤틀었다. (1) 프랑수아 클루에(François Clouet)의 엘리자베트 도트리슈(Élisabeth d'Autriche) 초상화(1571) (2)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L.H.O.O.Q.(1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