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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 군기시정 의성김공(제민) 묘소

김제민(金齊閔, 1527 ~1599)
본관 의성. 자 사효(士孝). 호 오봉(鰲峰). 시호 충강(忠剛). 이항(李恒)의 문인.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형조낭관(郎官)을 지냈다. 화순현감 ·순창군수, 1586년 전라도도사(都事)를 지낸 뒤, 병으로 물러났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향리(鄕里)에서 의병을 모아 싸웠으며, 난이 끝나자 학문에 전심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에 정통하였고, 많은 저서가 있었으나 전란으로 거의 타 없어졌다. 이조판서가 추증되었고, 문집에 《오봉집》이 있다.
[네이버 지도]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 700-1
右旋水,水局辰破口,禄存消水自旺向,癸丑(庫方)得水,庚酉向(旺方),丙午(浴方)破水,甲坐庚向,庫來旺浴,禄存流盡佩金魚,浴處逢旺向。(70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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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인도 읽기 힘든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벽안의 교수
▲ 스페인 말라가대 안토니오 도메네크 교수 [사진=뉴스투데이 정진용 기자] 스페인 말라가대 한국학 안토니오 도메네크 교수 15년 째 한국문학, 전통문화 스페인에 꾸준히 소개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은 스페인 사람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는 내용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더 많은 한국고전들이 스페인어뿐 아니라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으면 합니다.” 6일 오후 7시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리는 제15회 ‘한국문학번역상'과 '제16회 한국문학번역신인상' 시상식에서 한국문학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문학번역원 공로상’을 수상하는 벽안의 외국인 교수가 있다. 주인공은 안토니오 도메네크(52) 교수.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주 말라가대학에서 동아시아학부 한국학 교수로 재직중인 그는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뿐 아니라 2000년 초반부터 굿판 등 한국의 샤머니즘을 꾸준히 스페인에 소개한 대표적인 친한파 교수로 이름나 있다. 뉴스투데이와의 인터뷰도 능숙한 한국어로 대답할 정도로 한국어실력이 뛰어난 그는 스페인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면서 줄곧 한국문학과 한국문화를 스페인에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Q. 한국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A. 1992년 한국을 방문한 것이 계기였다. 한국의 문화, 그 중에서도 전통문화에 관심이 컸다. 내친 김에 서강대에서 샤머니즘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불교와 기독교 여성의 종교적 관행에 관한 비교연구를 했고, 이후 스페인으로 건너가 마드리드자치대학에서 사회인류학 관련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Q. 한국문화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인가. A. 2007년 스페인 마드리드 시내 복합문화공간인 마타데로에서 무형문화재 김금화씨가 직접 시연한 한국의 전통 굿판을 소개한 적이 있다. 스페인은 가톨릭국가다. 그럼에도 당시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강렬한 색채의 한국 굿판을 보고 큰 인상을 받았다. 한국문화는 서양인의 눈으로 보면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가 많다. 그런 점을 강조하면 한국문화도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다고 본다. Q. 요즘은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나. A. 17세기 한국의 귀신문화에 대한 번역작업을 진행 중이다. 힘이 닿는 한 계속해서 한국문학, 한국문화에 대한 번역작업을 통해 스페인에 한국을 알리고 싶다. Q. 한국문학번역상 공로상을 받은 소감은. A. 개인적으로 영광이다. 스페인뿐 아니라 남미 등 스페인어를 쓰는 국가는 많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번역작업을 통해 스페인어권 국가에 한국을 더욱 많이 알리고 싶다. 한편 이날 시상식에서는 영어, 러시아어, 터키어, 프랑스어 등 4개 언어권에서 ‘한국문학번역상' 수상자가 결정됐다. 올해 번역상 수상자로는 영어권 정예원, 러시아어권 승주연, 알렉산드라 구델레바, 터키어권 괵셀 튀르쾨쥬, 프랑스어권 한유미, 에르베 페조디 등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공로상에는 안토니오 도메네크 교수와 함께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출판부 디렉터인 제니퍼 크루 씨가 수상자로 결정됐다. 올해로 15회 째를 맞이한 한국문학번역상은 한 해 동안 해외에서 출간된 한국문학 번역서 중 최고의 번역작품을 선정, 수여하는 상이다. 격년제로 시행하던 번역상은 해외에서 출간되는 한국문학 종수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지난 2013년부터 매년 시상으로 바뀌었다. 뉴스투데이=정진용 기자 오늘과 내일의 일자리 전문미디어
[펌] 냉혹한 대일본제국의 희생정신 썰
옛날 옛적 중일전쟁 시절의 이야기다 상하이에서 중꿔와 일본이 멱살잡고 드잡이하던 시절 존나게 웃긴 주작질이 있었드랬다 기세도 등등하게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에 트위스트를 추면서 처들어온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상하이를 지키는 중국군은 지금까지의 오합지졸 븅딱들이 아니라 독일에서 온 나치훈련교관한테 착실하게 훈련받은 파워 짱깨였던고로 일본군은 피떡이 된다 가장 일본군을 괴롭힌게 중국군이 치밀하게 깔아둔 철조망이었는데, 독일식 철조망 진지라 굉장히 튼튼했다 철조망이 개같으면 철조망을 치워야지 일본군은 철조망을 조지러 갈 자원자를 뽑기 시작했다 옛날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도 나온 파괴통이라는게 있음 길쭉한 원통 안에 폭탄을 넣어서 멀리서 구조물 철거하는데 써먹을 수 있는 신통한 물건이다 이렇게 여러개 이어서 길쭉하게 만들어서 철조망이나 지뢰밭에 넣고 도화선 불 붙여서 터뜨리고 안전하게 진군하는 거다 말로 설명하면 감이 안 잡힐테니까 움짤로 보면 됨(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뱅갈로어라고 부른다) 겨우 철조망 뚫자고 쓰기엔 좀 비싸 보이는 물건인데 그래도 병사의 목숨은 소중하니까 앵간한 나라는 다 들고 다녔다 물론 인권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대일본제국의 자랑스런 육군에도 당연히 파괴통이 없지 설마 있을 거라고 생각했음? 일본군은 철조망이 있으면 사이오닉 정신에너지로 뚫고가라는 프로토스들인데 파괴통 같은게 제식 장비로 있겠냐 그래서 나온게 이 현지급조파괴통(대나무제)다 일본 대나무도 아니고 상하이 현지에서 대나무 짤라다 폭약 채우고 도화선 쑤셔박은게 끝인 조잡한 물건이다 생짜 대나무를 짤라 만든 물건이니 당연히 길이 조정 기능 따윈 없다 도화선도 조잡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라 설치 후에 땡기는 게 아니라 미리 땡겨놓고 달리는 거다 그러니까 농담 아니라 이거랑 똑같다 저 존나 길쭉하고 무거운걸 3명이서 발맞춰서 존나게 달리면서 터지기 전에 던지고 돌아와야 됨 놀라운건 저 병신짓을 자원자를 받아서 처리했다는 건데 위의 3명이 그 자원자들이다. 각각 다케지, 스스무, 이노스케라는 엑스트라같은 이름이 있지만 그냥 개또라이 1호기 2호기 3호기로 통칭하자 이런 개또라이짓에 자원했으니 틀림없이 개또라이들이 분명하니까 이 개또라이 트리오가 그나마 보여준 상식은 딱 하나였는데 이딴 짓을 밤에 했다는 거다. 낮에 했으면 100% 총맞고 죽었을건 분명하고 개 쪽팔렸을 거다 헛둘헛둘헛둘 야밤의 상하이를 트위스트를 추면서 3명의 개또라이가 나아간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맨 앞에 가던 개또라이 1호기가 진흙에 미끄러져 트위스트를 추면서 넘어져버린 것이다 호엑! 호에에엑! 일제히 패닉을 일으키는 상하이 트위스트 3인조. 자원했을 때의 깡은 어디갔는지.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거 도화선에 미리 불 붙이고 달리는 물건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물건이니 뭐 겁에 질린 건 이해가 간다만 그 뒤의 행동이 또 코미디다 자빠져버린 개또라이 트리오가 도화선을 꺼버리곤 본대로 복귀해버린 것이다 장렬하게 짱깨의 방어선을 작살내고 돌아왔어야 할 개또라이 트리오가 맨몸으로 복귀하자 부대장은 기가 막혔다 당연히 오지게 깨졌다 얼마나 깨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개또라이 트리오가 겁에 질려서 다시 대나무 파괴통을 들고 도로 방어선으로 달려갈 정도는 깨진 모양이다 부대장의 개지랄을 피해 다시 개또라이 3인조는 방어선을 향해 돌격한다 헛둘 헛둘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 잠시 후 요란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다시 말하지만 폭파 타이밍 조절 기능 따위 없는 물건이었다. 불 땡기고 터뜨리러 갔다가 자빠져서 돌아오는 시간이 짧았겠냐 이미 타들어갈 대로 타들어간 도화선은 이 빡대가리 3인조와 함께 그대로 폭사했다 1932년 2월 22일의 머저리같은 콩트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더이상 ㅄ같을 수 없단 생각이 들겠지만 진짜 ㅄ짓은 이제 시작이다 상하이 사변을 취재하러 온 일본 기레기가 기레기 만랩 스킬을 터뜨린 것이다 아사히 신문에서 온 이 일본 기레기 새끼가 이 작전을 지휘했던 장교를 취재했는데, 당연히 무의미하게 병사를 꼬라박았다고 할 수는 없으니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3명의 위대한 육탄용사들이 대나무 폭탄을 껴안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카미카제를 시도했다는, 듣기만 해도 엄청난 뻥카 인터뷰가 튀어나온 것이다. 개또라이 3인조는 어느 틈엔가 구국의 용사가 되었다. 얼타다 자빠져서 호에엑 거리던 폐급들은 즉시 2계급 승진한 것은 당연하고 그 뒤의 일이 더 가관이다. 오사카 아사히 신문을 통해 중국을 날려버린 감염된 테란 3인조의 영웅담이 전국으로 흘러나가니 온사방에서 자폭찬양이 울려퍼졌다. 심지어는 죽은 병사들을 기린답시고 육군에 기부금이 쏟아져들어왔다. 정말 일본스러운 상황이군 개또라이 3인조는 맥주 광고에 나오기도 하고 조선 학교에서 어린이 논술문제로 출제되기도 했으며(내용: 개또라이 3인조는 어떤 심정으로 꼬라박을 했을지 서술하시오 초우셴징) 결국에는 동상까지 세워진 것이다 물론 당연히 개또라이 3인조를 주인공으로 한 군가도 만들어졌다 과연 대일본제국이다 정말 대-단해 부실한 병신 무기 만들어놓고 닥돌하라는 일본군이나 하란다고 그걸 자원해 하는 또라이들도 븅신이지만 저렇게 자폭 자체를 신성시하면서 몸 흔드는 일본 국민들이야말고 최종병기 아닐까 이렇게 감염된 테란 3인조는 50년 넘게 찬양받다가 뜬금없이 2007년에 아사히 일보가 아 그거 구라였음 ㅈㅅ 정정보도를 내면서 정체가 까발려지고 만다 진짜 개쪽팔렸겠다 상하이 상하이 상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출처 - 디시인사이드 고질라맛스키틀즈]
히틀러의 비밀병기가 된 원시 OMR카드
18세기 말 미국 당시 미국은 급격히 늘어나는 사람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나라에 몇 명이 살고 있는지 조사해야 하는데 엄청난 이민 열풍으로 온 세상의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니까 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은 미국 인구 조사국의 반응은 매우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조사 방법은 집마다 찾아가서 펜이랑 종이를 들고 머리 수를 센 다음 전국의 종이를 모아 합계를 계산하는 방식으로 1년에만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이주를 하는 판국에  인구조사를 하더라도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결과는 부정확해지고 만들면 또 새로 만들어야 되는 매우 비효울적인 일이었다. 인구조사국은 자기들이 직접 수를 세는 대신 공모전을 열어서 제일 빠르게 인구를 조사하는 사람에게 거액의 상금을 주기로 결정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공모전을 유심히 보던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통계학자이자 발명가였던 허만 홀러리스였다. 홀러리스는 일정한 크기의 종이에 조사할 항목인 나이나 성별을 적고 규칙적으로 구멍을 뚫어서 이 구멍의 위치로 정보를 확인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이것이 바로 천공카드 시스템이었다. 순식간에 수 많은 정보가 처리되는 천공카드 시스템을 바탕으로 인구조사가 시작되자 이전까진 작성 하는 데만 7년이 걸린다는 인구조사는 단 6주만에 끝나게 됐다. 신세계를 경험한 인구 조사국은 홀러리스에게 만장일치로 상금을 수여했고 홀러리스는 상금을 바탕으로 이 천공카드를 읽는 기계에 특허를 내고 1896년에 회사를 차려 천공카드를 관공서에 팔며 아주 막대한 돈을 벌게 됐다. 그리고 이 회사는 합병과 인수를 거쳐 이후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국제 사무기기 회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바로 'IBM'으로 말이다. IBM이 천공카드 사업을 전세계로 확장하며 승승장구 하고 있던 순간 이것을 매우 유심히 보던 한 인물이 있었다. 독일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였다. 당시 히틀러의 지시하에 이루어진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기 전 독일의 지도부는 홀러리스의 천공 카드시스템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단지 간단하게 숫자를 세는 기계가 아니라 특정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곧 이것을 자신들의 엄청나고도 무시무시한 계획에 사용하기로 한다. 1939년 인구조사를 위탁받은 IBM의 독일 지사인 데호마그는 무려 75만명에 달하는 인구조사원들을 고용한 후 독일 전역에 퍼져 매우 특정한 사람들의 데이터 목록을 하나 둘 모으기 시작했다. 이들이 모은 것은 바로 집시 유색인종 공산주의자 그리고 유태인의 목록이었다. 이 목록들은 1942년 독일이 실시했던 인종청소의 살생부 역활을 톡톡히 해내게 됐고 그들이 점령한 지역 어느 곳 에서나 이 천공카드가 사용됐다. 학대와 처형방법의 규정은 총 16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됐고 천공카드로 인해 결과적으로 약 20만명의 달하는 사람들이 말 그대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어두운 과거를 뒤로한 채 이후 IBM은 기존의 천공카드 식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 OMR 시스템을 개발하게 되어 우리의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준 이 편리한 천공카드는 어떤 사람이 어떤 목적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희대의 발명이 되었고 희대의 학살도구가 되기도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수 없다. [출처 - 개드립]
따발총을 든 소녀
이 사진은 도대체 누구인가?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아마 알고 계실 텐데 당시 11월 초 부다페스트 거리에서 촬영한 반소련 저항군 일원 중 하나이다. 이름은 Szeles Erika Kornélia, 셀레시 에리커 코르넬리어(참조 1)이다. (헝가리어는 성씨가 앞에 오는 거 알고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어디에 실렸는가? 덴마크의 오래된 주간지, Billed Bladet의 1956년 11월 13일자로 나와 있었다고 한다. 촬영자는 Vagn Hansen. 문제가 있다. 잡지가 나온 11월 13일은 이미 셀레시 에리커가 목 뒤로 총을 맞아 사망한 이후였다(참조 2). 일단 셀레시 얘기부터 해 보자. 그녀는 1941년생이고 유태계 가족에서 태어났었다. 그래서 잠시 세이브더칠드런 덴마크 지부로 보내서 살려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덴마크어를 좀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연히(?)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사망했고 어머니가 무남독녀로 홀로 키워낸다. 당시 사정에 맞게 크고 나서는 고등학교까지 진학하지는 않고 조리학교에 들어간 다음, 한 호텔에 보조 요리사가 된다. 그당시 서너살 위의 한 오빠와 사귀면서 사상전향(?)이 일어난다. 유태계 집안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상당한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딸인 에리커는 급격한 반공주의로 바뀐다. 그래서 당시 소련의 억압에 대해 반항했고 급기야는 반항군에도 들어간 것. 어차피 헝가리군을 당시 소련이 해체시켰기에 반항군은 군 출신도 많았다. 이때가 10대 중반, 헝가리 혁명의 시기인 1956년이다. 다르게 보면 스탈린 사망 이후, 헝가리가 간이 커졌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 아직 너무나 어린 나이인 15세여서 반항군 내에서는 에리커가 전투병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나 하는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간호 보조로 역할을 바꾼다. 바로 그당시 Vagn Hansen을 포함한 덴마크 저널리스트들이 멋대로(외교관 차량을 위조(!)해서 들어갔다, 참조 3) 헝가리에 들어갔었고, 아직 편제가 바뀌기 직전의 에리커를 촬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에리커는 수 일 후, 적십자 마크를 달고 쓰러진 반항군을 구하러 다니다가 소련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11월 7일이었다. -------------- 1956년 당시 에리커의 사진이 나온 잡지를 본 Henning Schultz는 이 소녀에 대한 동경과 사랑의 감정이 휘몰아쳤다. 도대체 이 따발총을 들고 다부진 표정을 한 소녀는 누구일까? 문제는 잡지 사진에 이름만 덩그러니 있다는 점이었다(참조 4). 과연 그 때 살아있기는 했을까? (답: 사망했다.) 에리커 사진에 대한 집념을 갖고 있던 그는 지리학자로서 은퇴한 이후인 2000년대 후반부터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그 잡지를 여러 권 갖고 있던 그에게 있어 그녀는 일종의, 헝가리 혁명의 상징(참조 4)이었다. 슐츠는 헝가리 언론사와 정부, 박물관 등 여러 군데에 의뢰를 했고 그제서야 초등학교 동창, 포크댄스 그룹의 일원 등등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때에서야 자세한 신원을 알 수 있었다(참조 5). 2008년, 슐츠의 도움을 통해 사진 촬영가였던 Vagn Hansen은 공식적으로 이 사진을 포함한 헝가리 혁명 당시 촬영한 사진들을 헝가리 역사 박물관 측에 기증한다(참조 6).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헝가리 혁명의 상징 중 하나가 됐다. -------------- 참조 1. 한국에도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는 하다. 자유를 향한 '혁명의 순간' 사진으로 남았다(2016년 11월 7일): http://naver.me/FcUMXfsQ 2. The heroes of 1956: The girl, who was already dead when her photo went around the world (2016년 10월 17일): https://dailynewshungary.com/heroes-1956-girl-already-dead-photo-went-around-world/ 3. »Pressefotograf var det værste. Jeg ville være fin portrætfotograf på femte sal”(2005년 5월 25일): https://journalisten.dk/pressefotograf-var-det-vaerste-jeg-ville-vaere-fin-portraetfotograf-pa-femte-sal/ 4. "Vörös hajú, szeplős, zsidó származású kislány volt" - Rábukkantunk a forradalom titokzatos jelképére!(2008년 11월 2일): https://mazsihisz.hu/hirek-a-zsido-vilagbol/archiv/voros-haju-szeplos-zsido-szarmazasu-kislany-volt-rabukkantunk-a-forradalom-titokzatos-jelkepere 5. https://hu.wikipedia.org/wiki/Szeles_Erika_Korn%C3%A9lia 6. AJÁNDÉK DÁNIÁBÓL(2008년 3월호): http://fotomuveszet.net/korabbi_szamok/200803/ajandek_daniabol
동독을 살리려 했던 중국
https://www.welt.de/geschichte/plus202839652/Akten-Fund-So-wollte-China-1989-in-letzter-Minute-die-DDR-retten.html?wtmc=socialmedia.twitter.shared.web 이 내용은 독일 외교부 문서 공개가 되면서 알려진 사실인데 다른 나라 언론에 보도가 잘 안 된 것 같다. 동독이 무너지려 할 때 중국이 손을 뻗치려 했었다는 내용이다. 어쩌면 중국의 유럽통이 이탈리아가 아닌 동독이 됐을지도? 그 뿌리는 천안문 항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경 천안문의 1989년 여름은 정말 뜨거웠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시민을 밀어버리고 “질서와 안전”을 회복했었다. 당시 동독 외교부 장관이었던 Oskar Fischer는 중국 외교부장 첸치천(錢其琛)에게 “중국과의 연대”를 표방하고 사회주의의 안정을 무너뜨리려 했던 최근의 반사회적 열정의 시도를 비난했다. 심지어 2주일 후 최후의 동독 서기장이 될 에곤 크렌츠가 중국일 직접 방문하기도 했었다. 중국을 이렇게 강력히 지지하는 나라는 정말 많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소련도 중국에게 개혁을 요구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때가 1989년 10월 얘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때가 11월 9일이다. 이미 당시 동독에서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 20여만 명이 속속 나라를 빠져나가는 중이었다(참조 1). 여행 허가 없이 그냥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로 빠진 다음, 오스트리아나 서독으로 들어간 것이다(참조 2). 10월 27일, 중국은 북경 주재 동독 대사를 불러 제안을 한 가지 하고, 동독 대사관은 그 내용을 본국에 전문으로 보낸다. 제안을 듣자마자 말이다. “…원하는 수만큼 능력 있는 중국 노동자들을 보내드리겠음. 금전적인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며, 이는 정치적 도움임. 다만 그 값은 제품으로 보내주면 좋겠음.” 에곤 크렌츠 서기장에게 전달된 것은 10월 28일, 그러나 그는 빠져나가는 동독인들 처리에 정신 없었다. 그래서 총리 역할을 맡고 있던(참조 3), 빌리 슈토프(Willie Stoph)에게 이 전문이 전달된다. 이때가 10월 30일이었다. 슈토프는 중국의 제안에 호의적이었다. 심지어 서구 통화를 대가로 지급할 필요조차 없다니! 중국측이 동독을 방문해서 관련 부처와 함께 필요한 협정을 체결해 보자는 내용으로 전문을 보내고자, 동독 외교부로 문서를 보낸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외교부로 바로 전문 내용을 보냈건만… 독일의 관료주의도 이상하게 힘을 발휘한다. 빨간 “지급(Eilt)” 도장도 찍혀있었건만 11월 1일에서야 동독 외교부는 해당 공문을 받았다. 게다가 동독 외교부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최후의 평양 주재 동독 대사를 지내게 될 Klaus Zorn은 이미 918명의 중국 계약 노동자들이 콤비나트에서 일하고 있는데(참조 4) 더 들여오려면 조건을 좀더 꼼꼼히 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11월 2일, 슈토프는 다시금 내각 회의를 소집하는데…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그리고 위에 썼지만 11월 내내 동독인들은 동독을 빠져나가고 있었다.논의할 여유가 없었고, 며칠 후 동독 내각은 모두 사표를 제출한다. -------------- 참조 1. Massenflucht(2016년 2월 29일): https://www.hdg.de/lemo/kapitel/deutsche-einheit/wandel-im-osten/massenflucht.html 2. 인상적인 역사적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겐셔 서독 외교부 장관이 직접 체코로 날라가서 동독인들을 구하는 장면이다. “동독 주민들의 대탈출을 막기 위해 동독 정부는 체코에게 동독 사람들 나가지 못 하게 하라 부탁했었지만, 겐셔가 아예 직접 체코로 날라가서 체코 주재 독일 대사관 발코니에 섰다. 내가 당신들 데리러 왔노라고.” 한스 디트리히 겐셔(2016년 4월 3일): https://www.vingle.net/posts/1508089 3. 정확히는 정부 내 각 부처를 아우르는 내각의장(Vorsitzender)이 더 가까운 번역어일 테지만 보통의 경우는 그냥 ‘총리’로 번역한다. 4. 동독도 서독처럼 구인난이 좀 있어서 중국만이 아니라 베트남 노동자 59,000명, 모잠비크 노동자 15,000명, 쿠바 노동자 8,300명이 당시 동독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8년 당시 동독 내 외국인 노동자는 93,500명 정도였다. 모두 공동생활을 했는데 지금과 비슷하게(…) 일상적으로는 차별당하기 일쑤였고 동독인들이 저지르는 혐오 범죄의 대상이기도 했다.
[펌] 공무원들을 쥐어짜냈던 중국의 흙수저 출신 황제
출생, 1328년 원나라 말기 심한 기근에 각지에서 도적들이 들끓는 막장 상태의  사회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넷째 아들로 태어남. 이름 중팔. 소작농인 부모와  농사일, 목동일을 하면서 지독한 가난을 겪음 유년기, 끼니도 제대로 못 먹는 상태에서 천연두까지 걸렸으나 이겨내고 살아남.  얼굴이 곰보로 모두 얽어버림. 10대 초반, 지주의 소를 치던 중 너무 배가 고파 친구들과 송아지 한마리를 잡아먹음.  자신이 대표로 몽둥이로 개맞듯이 맞음. 17세, 심한 가뭄과 전염병으로 부모, 형 전원 사망. 마지막까지 막내 중팔과 함께  살아남았던 중팔의 형은 13알의 마지막 볍씨로 풀죽을 쑤어 중팔에게 주었고  형 자신은 배를 곪다가 사망. 재산이 없어 부모와 형의 묘를 세울 땅도 없었고 유계조라는 사람에게 땅을 빌어  귀퉁이의 땅을 얻음. 찢어진 옷 몇벌을 겨우 구해 시신을 덮고  손수 부모와 형의 시신을 매장하고 장례를 치룸. 17세 이후, 절에 가면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고,  머리를 밀고 황각사라는 절에 들어감. 절에서 마당을 쓸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등  허드렛일을 하고 죽을 얻어먹음. 그곳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고 서적을 읽음. 절이 어려워지자, 탁발승(당시에는 거렁뱅이 취급)을 하며 전국을 4년동안 떠돌아다님.  민심이 흉흉하던 때라 바가지로 물을 맞거나 침을 맞는 수모를 당하기도 함. 24세, 곽자흥의 홍건군 휘하에 말단 병졸로 들어가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 2인자의 자리까지 오름. 처음 홍건군에 투신하였을 때, 외모 때문에(...) 첩자로 의심받아 포박 당하여 끌려갔으나  곽자흥이 그의 담력과 총명함을 알아보고 천거함.  곽자흥의 양녀 마씨와 당시 기준으로 늦은 나이에 결혼. 27세, 곽자흥이 죽자 곽자흥이 이끌던 홍건군 군단의 지도자로 추대됨 28세, 남경 점령. 남부의 대 군벌 중 하나로 부상 35세, 최대의 라이벌 진우량을 파양호 대전에서 격파. 36세, 진우량의 세력을 모두 흡수하고 스스로 '오왕'의 자리에 오름. 39세, 또 다른 군벌 장사성을 격파하고 남부 패권 장악 40세, 25만의 대군으로 북벌 단행, 원나라 잔존 세력과 군벌들을 모두 격파하고  베이징 (대도) 점령.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만리장성 이북으로 몰아내고 명(明) 건국. 그 이름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 중국 역사상 평민으로부터 시작해서 황제가 된 인물들은 있지만, 대부분 젊은시절에도 세력을 키울만한 기본적인 밑천은 가지고 있었다.  평민에서 황제가 되었다는 한 고조 유방조차도 말단이나마 관직이 있었고,  장인이 지역 유지였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징기스칸과 누르하치는 젊은 시절 고생을 겪었지만 유목세계에서 귀한 혈통을 이었으며 둘 다 부족장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가난한 천민에 가까운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홍건적에 투신하기 전까지는 세력도 배경도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가 된 이후, 부모의 묘자리를 내어준 유계조에게 엄청난 포상을 내렸으며 절에서 있던 시절, 가장 힘들었던 일이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에 있는  먼지를 청소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모든 절의 사천왕상은 청소하기 편하도록 반드시 한 발을 들게 만들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이러한 출신 성분과 이후의 치적으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명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신하들 사이에서는 폭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는 개국 공신들을 쥐 잡듯이 족쳤기 때문이다.  백성들에겐 명군인데 신하들에겐 폭군이라고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무래도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신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도자의 권력 한계상 백성과 신하 둘 중 하나만을 챙길 수밖에 없는데,  신하들은 자기들이 잘 살아야 태평성대라고 봤기 때문이다. 또한 엄청난 워커홀릭으로 유명했다. 그 자신부터 관리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신념을 유지했는데, 이것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그 자신조차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엄청난 양의 업무를 소화했다.  태어날 때부터 황실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란 그 아들들이나 손자부터는  생전 주원장의 그 업무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보조하는 신하를 두기 시작했고  이것이 사실상의 승상제도처럼 변해버렸다.  그런데도 주원장은 죽을 때까지 승상을 두지 않고 본인이 업무를 맡았다.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얼마나 업무를 처리하는지 계산을 해봤는데  8일 동안 3,391건의 문서를 처리했다고 한다. 대략 하루에 처리한 것이 400건이 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라서 누가 글자는 1만 5천자나 되는데 내용은 쥐뿔도 없고 쓸데없는 문서를 올렸다. 주원장은 노발대발하며 그를 숙청해버렸다. 건국군주임에도 후비를 많이 들이지 않은 군주로도 유명한 주원장은,  당시 황후와의 의리를 지킨 점 때문에도 당시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주원장은 자신이 쥐뿔도 없던 시절부터 뒷바라지를 해 주던 마 황후가 사망하자  그녀의 죽음을 매우 비통해 하였으며, 약 일주일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며  마 황후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그리고 평생 후비를 들이지도 않았으며 일에 몰두했다. 숙청과 후계 구도 실책으로 후대 신하들에게도 엄청나게 부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당대 백성들에게는 영웅으로 추앙받던 황제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