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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장. 채희의 그림자, 무사 휘영(輝影)

“그런데 아깐 어찌 그리 늦게 나타난 것이야?” 다시 장옷을 여민 채, 좌상 집으로 향하던 채희는 걷던 걸음의 속도를 늦추곤 자신의 뒤를 따르는 휘영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휘형은 채희의 물음에 가만 채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예? 아, 분명 아가씨를 호위하고 있다 생각하였는데 돌아보니…아가씨가 사라지셔서. 지체해 송구하옵니다.” 휘영은 채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채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장옷을 거두어, 휘영을 돌아보았다. 휘영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채희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내가 사라져? 내가 잠시 너에게 다녀온다 이르고 사라지지 않았느냐?” “무언갈 아가씨가 착각을 하신 듯합니다. 돌아보니 아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라, 아가씨를 찾느라 한참 애 먹었습니다.” 휘영의 말에 채희는 가만히 장옷을 쥔 채, 이상하다…, 내 분명 너의 옷깃을 쥐곤 다녀온다 일렀는데, 중얼거렸다. 그런 채희를 가만, 휘영은 바라보았다. 늘 곁에서 채희를 호위하는 휘영이었지만 이리 가까이서 채희의 낯을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휘영은 채희의 봉긋 솟은 이마와 콧날, 도톰한 입술, 하얗고 발그스레한 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럼…너가 아니었단 말이야? 어머! 그럼 내가 누구를…” 채희는 화들짝 놀라며 휘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휘영은 채희와 눈이 마주치자 채희보다 더 놀라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내가 착각하여 다른 이를 붙잡고 끌었나보다. 어쩜 좋지. 혹여 내 얼굴을 보기라도 한 것은 아니겠지.” 채희는 울상을 지으며 땅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워낙 도성에 알려진 ‘채랑’, 자신의 언니 얼굴이라 그런 채랑과 꼭 닮은 자신의 얼굴이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지 않기 위해 애쓴 채희였다. 휘영은 그런 채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채 귀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채희. 휘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채희를 바라보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어.” 채희는 그리고 그런 휘영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가…웃을 줄도 아는 구나.” “…….” “이제야 사람과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휘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도, 웃는 얼굴도, 우는 얼굴도 보인 적 없는 채희였다. 늘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였기에 휘영 역시, 그녀를 곁에서 호위하고 있었지만 꼭 보통 사람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온기를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휘영은 알았다. 채희가 부로 무표정을 한 채 지낸다는 것을. 일부러 차가워 보이고,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 슬픔도 기쁨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그 누구보다 따스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휘영은 알고 있었다. 그때, 채희 뒤로 우상의 부인인 ‘유정’이 가마에 올라선 채, 이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좌상과 상극인 우상의 부인에게 ‘채희’의 얼굴을 들켜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 채희는 장옷을 거둔 채, 휘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곧, 유정이 좌상의 호위무사인 ‘휘영’의 얼굴을 알아보곤 채희 곁까지 성큼, 다가왔다. “……!” “송구합니다, 아가씨.” 곧, 휘영은 채희에게 송구한다하며 채희를 자신 쪽으로 바짝 잡아 당겼다. 그러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채희의 장옷을 씌워 재빨리 채희의 얼굴을 가렸다. 동시에 유정이 탄 가마가 채희의 곁을 스쳤다. “…앗.” 그제야 자신의 옆으로 우의정의 부인인 유정이 지나갔음을 깨닫곤 황급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는 채희였다. “저 무사는 좌상 댁 호위무사인 듯한데.” 유정은 휘영과 채희를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유정을 따르던 몸종이 힐끔, 휘영을 돌아보곤 황홀한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참…잘생긴 사내지 않습니까?” “잘생기긴 뭣. 우리 아드님이 훨-씬 더 잘생기셨지.” “에이, 민혁 도련님은 두 말하면 입 아프지요. 그래두 저 무사는 사내인데도 어찌 얼굴에서 색기가 철철 흘러넘치는 지…, 묘-하게 여인을 끌어드리는 멋이 있지 않습니까? 저 탄탄한 가슴에 폭, 안겨보기라도 했으면…” “나이든 여편네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뭐, 젊고 잘생긴 사내 품에 꼭 젊은 여인네들만 안기고 싶답니까? 이 늙은 여인네들두 젊고, 잘-생기고 사내 품에 안겨보고 싶습니다, 마님?” 입에 침이 마르도록 무사를 칭찬하는 몸종의 말에 유정은 다시금 고갤 돌려 무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 무사하긴 아까운 인물이긴 하네.” “그렇지요? 어쩜 좌상댁엔 호위 무사까지 인물이 훤하니…앗, 흠. 흠.” 몸종의 말 실수에, 유정은 심기가 불편한 듯, 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더니 이내 흥, 하고 무사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그래봤자 딱, 기방 기생들 기둥서방하기 좋을 외모다. 어디 우리 아드님에 비할까? 우리 아드님은 딱, 위장부시지!” 채희는 멀어져가는 유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 날 뻔 하였구나. 하마터면 우상의 부인께 얼굴을 보일 뻔 하였어.” “…….” “가자. 어머님,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시겠다.” 그리고 채희는 다시금 발걸음을 돌렸다. 휘영은 그런 채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채희 뒤를 성큼성큼 따랐다. “너는. 무술도 뛰어나고, 검도 잘 다루는데 어찌 한낱 양반댁 여식이나 지키는 호위 무사가 되었느냐? 네 정도의 검술이면 궁에 들어가 군주를 뫼시어도 될 법한데.” “…….” “뭐…내가 무술이니 검술이니…보는 눈이 있는 것은 아니나, 그저 이리 나만 지키며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그런다.” “…….” “지금이라도 내가 아버님께 일러 너를 다른 곳으로…” “되었습니다.” 휘영은 자신을 생각해주어 말하는 채희에게 되었다, 단칼에 거절을 했다. “궁이 싫으면 어디 무사들을 길러내는 곳의 스승으로 들어가 제자들을 키워도…” “…….” “그것도 싫겠지?” 채희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따르는 휘영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땅바닥만 응시하고 있는 휘영이었다. 그런 휘영을 가만 바라보던 채희는 다시금 앞장서서 걸으며 입술을 떼었다. “언제든 말 하거라.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겨 떠나야 하거든.” “…….” “주저 말고 말하도록 해. 언제든 널 보내줄 것이니.” 휘영은 채희의 말에 가만히 미소 지으며 부지런히도 걸어가는 채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이름은 빛날 휘에 그림자 영.’ ‘…….’ ‘휘영이다. 네가 그림자처럼 아가씨를 호위하여야 할 것이다.’ ‘…예, 형님.’ ‘그 때가, 네가 가장 빛이 나는 때일 것이다. 알겠느냐.’ 어린 시절, 자신에게 무술을 가르치며 늘 아가씨를 잘 보필하여야 한다 일렀던 주한이었다. 주한과 휘영의 집은 꽤 한양에서 잘나가던 무사의 집안이었지만 몇 해 전, 역모라는 누명으로 패가망신 하여, 길바닥을 떠도는 꼴이 되었다. 친척,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목숨 부지하기 급급해 생사조차 알 길 없던 그때, 주한의 손을 잡아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지금의 좌의정, ‘이한열’이었다. 때문에 어린 주한과 주한의 어머니, 그리고 부모를 모두 잃었던 갓난 아이었던 사촌 아우, 휘영은 지금껏 좌상 집에서 역모 죄로 패가망신 했단 가문을 숨긴 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가씨를 모시는 것이, 제가 하여야 할 일이고” “…….” “제가…하고 싶은 일입니다.” 휘영은 멀어져가는 채희를 우두커니 바라보다 이내 휘적휘적, 긴 걸음으로 채희의 뒤를 따랐다. * * * “어머님, 아버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좌상댁의 노비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안채로 들어온 채희는 좌상과 부인, 채화를 마주하자마자 절부터 올렸다. 좌상 ‘이한열’은 언제 채희가 이리 예쁘게 자랐나, 흐뭇한 얼굴로 채희를 바라보았다. 옆에 함께 앉아있던 정경부인은 그만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머님, 어찌 그리 눈물바람이어요. 오랜만에 보는 채희가 어리둥절하겠어요!” 곁에 서 있던 채랑이 눈물을 보이는 정경을 향해 입술을 씰룩이더니, 이내 절을 마치고 덩그러니 서 있는 채희를 와락 껴안았다. “언…니.” “채희야, 어째 안색이 더 좋지 않아.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 거야?” 살뜰히 채희를 살피는 채랑이었다. 둘이 이렇게 나란히 서니, 꼭 똑같은 사람이 둘이 서 있는 듯하였다. 채랑은 자신을 닮은 채희의 손을 맞잡은 채 가만히 채희를 바라보았다. “아프기는, 없어. 그저 이틀을 꼬박 예까지 오느라 진이 빠져 그렇게 보이나 봐.” “나 너에게 줄 것이 있어! 내 방으로 가자.” 하며 채랑은 채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채희는 아이처럼 들뜬 언니를 보곤 피식, 웃으며 좌상과 부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채랑을 따라 나섰다. “아, 잠시 내 장옷.” 안채를 나서자마자 마당에서 비질을 하고 있는 몇몇의 노비를 발견하곤, 채희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채랑은 자신의 얼굴을 숨기는 채희를 보곤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곧, 무사 휘영이 채희에게 들고 있던 장옷을 건넸고, 채희는 황급히 장옷을 뒤집어썼다. “이제, 되었어. 가자 언니.” “미안…해, 채희야. 나 때문에.” “무슨 말이 그래. 나 때문에 언니가 곤욕만 치루지.” “왜 너 때문에 내가 곤욕을 치루어?” “언니는 장차 세자빈이 될 사람인데…내가 있어 걸림돌만 되잖아.” “얘, 세자빈은 무슨! 나는…궁에서 살기 싫어.” “…언니.” “세자빈은 가당치도 않어. 그리구, 나는 그래도 여기서 어머님과 아버님과 함께 지내잖아. 너는 그 험한 산 속에서…나 때문에…” “자꾸 그런 말 하면. 나 다음부턴 집에 오지 않을 거야, 언니 시집갈 때까지.” 채희의 말에 채랑은 울상을 짓다, 이내 피식 웃으며 채희의 손을 꼭 잡았다. “나 시집가면. 너랑 꼭 한 집에서 살 거야.” * * * “이걸…나 준다고?” “응. 너무 예쁘지?”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 옷과 꽃신이었다. 연분홍의 연꽃이 수놓인 샛노란 개나리색 저고리에 고운 보라색의 풍성한 비단 치마. 그리고 파란색의 어여쁜 노리개까지. 무명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는 채희는 채랑이 건넨 옷을 가만히 만지작였다. “너무 예쁘지! 내가 아버님을 졸라, 청국에서 사와 달라고 했어.” “…언니 입어. 나는 이런 것은…” “너 주려고 내가 아버님께 직접 청을 드린 것이야. 나는 이런 쨍한 색깔은 안 어울려.” “…….” “너와 내가 외모가 꼭, 닮았다고 하지만.” “…….” “내 눈엔 나보다 너가 몇 곱절 더 고와. 그래서 이런 쨍하구 고운 색깔은 나보다 너가 더 잘 어울려.” 채랑의 말에 채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곤 화려한 비단 옷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였다. 채랑은 곧 채희에게 저고리를 대어보곤 너무 잘 어울린다며, 환히 웃었다. “입고 나와 봐! 너가 이걸 입구 저잣거리에 나가면 나라고 생각하지, 널 다른 이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야. 물론 좌상 댁 여식 ‘채랑’이가 무얼 먹고 저리 더 고와졌나?, 수군대겠지? 호호호.” “언니…하지만.” “너도 한양 구경하고 싶어 했잖어. 꽃놀이도 가고 싶어 했구, 연등회에도 가보고 싶다며.” “그건…” 망설였다. 이리도 화려한 옷은 입어본 적이 없었기에. 매번 집에서 비단 옷이며 장신구들을 보내왔지만 채희는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펼쳐 쓸어보기만 하고 다시 보따리에 싸, 서랍에 곱게 넣어 두기만 했었다. 꼭, 자신과는 맞지 않은 옷이라 여겨졌기 때문에. “여기 연 하늘빛 저고리와 분홍색 치마는 연등회 때 입구. 우선 이 옷부터 입고 나와 봐! 너랑 손 꼭 붙들구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시켜 주고 싶지만.” “…….” “그것은 아버님이 추호도 허락지 않으실 것이니.” “…….” “매번 다 낡은 장옷 뒤집어 쓰구, 누구에게 들킬까 연연하면서 그리 좋아하는 책방에도 쉬이 못 들려보았잖아. 이 옷으로 갈아 입구 내일 해 뜨면 휘영이랑 저잣거리나 다녀와. 언니 소원이야. 너, 내 소원 하나 못 들어줘?” 채랑의 말에 채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참으로 고운 옷이었다. 채랑이 채희가 며칠 예서 머무는 동안 외출복으로 입을 옷들과 장신구들을 손수 챙겨 놓았다. 채희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응? 응? 하며 어린 아이처럼 칭얼대는 채랑을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언니 때문에…못살아, 정말.” “정말 입을 것이지? 그치?” “들켜서 곤혹을 치루어도 나는 몰라. 다-, 언니가 책임져. 알았지?” “그럼! 이 언니만 믿어! 호호호.” “하하하하.” 모처럼 채 자매는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호호호,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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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달(月)의 기운이 흩어지다!
“아악-.” 잠자리에 누웠던 윤화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에 흥건히 젖은 채였다. 윤화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달…달의 기운이…흩어지려해. …이를 어쩐담.” 윤화는 더듬더듬 초를 찾았다. 윤화의 비명에 마루에 누워있던 노인은 황급히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 게야?” “악몽을 꾸었어.” “…….” “안…좋아. 기운이…좋지 않아.” 오늘이 좌상댁과 약조한 꼭 열흘이 되기 이틀 전 날이었다. 이미 두 아가씨의 운명을 본 윤화는 오늘 무화산을 떠나기 위해 미리 짐을 꾸려놓은 상태였다. 약조한 날까지 좌상 댁에 답을 드리려면 적어도 오늘 출발해야 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윤화는 마루로 뛰쳐나왔다. “아가씨들의 운명을…가로 막고 있는 게 더 있었어.” “…뭐?” “그 날. 그 저잣거리에서 마님을 뵈었을 때 국모의 기운을 지닌 분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쌍생아라는 것. 달의 기운이 두 개였다는 것.” “…….” “그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 “아니었어, 할아버지.” “…….”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검은 기운이 있었어.” 윤화는 맨발로 뛰쳐나와 아직 검푸른 새벽녘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좌상댁에 답을 드리러 사람을 보낸다 했지.” “…….” “내가 가마.” “할아버지.” 윤화는 노인의 말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노인을 돌아보았다. 뒷짐을 진 채, 윤화 곁에 선 노인은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중헌 일 아니냐.” “할아버지, 그치만.” “서찰만 그 댁에 무사히 전해주면 된다하지 않았느냐.” “…그렇지만.” “네 어미의 처녀시절의 연서도 네 아비에게 내가 은밀히 전해주고 했었지. 걱정 붙들어 매.” 노인은 가벼운 농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윤화의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윤화는 슬픔과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혹여나 그 서찰이 다른 이의 손아귀에 넘어간다거나 전해주지 못하게 되면 큰일 아니냐.” “아냐. 내가 직접 가야겠어.” “그러다 네가 변이라도 당한다면.” “…….” “그것은 니가 그리 귀히 여기는 그 분들 모두에게 해가 되는 일 아닐 게냐.” “할아버지….” 노인의 고집을 꺾기는 어려워 보였다. 불길한 기운이 자꾸만 엄습해 와 윤화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떨기만 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흑(黑)의 기운에, 윤화는 떨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윤화가 겪고 있는 무녀로서의 이 고초를 이미 자신의 처였던, 윤화의 외조모에게서 종종 보았기에 낯설지 않았다. “흑의 기운이든, 정의 기운이든. 그 모든 기운을 받아내고 견뎌내고 이겨내야 하는 것이 무녀인 너의 몫, 아니더냐.” “할아버지.” “나도…네가 네 할미처럼 무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노인은 자신의 손녀에게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속내를 오늘에서야 드러냈다. 윤화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자신의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주름이 깊게 팬 얼굴이 윤화의 속을 더욱 아프게 내려치는 듯했다. “하지만 네 말대로, 네 할미의 말대로 다 연유가 있겠지.” “…….” “그리고 내가 그 서찰을 그 댁에 전해주려고 마음먹은 데에도 다…연유가 있지 않겠느냐.” 노인의 말에 윤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날이 밝는 대로 서찰을 써서 줄게, 할아버지.” “…….” “정말…무사히…아무 탈 없이 좌상 댁에 전해드리고…와야 해.” “예끼, 이 놈! 네 할배를 그리 만만히 보는 것이냐? 이래봬도 소싯적에 산 속 도적놈들은 내가 다 때려잡았다, 이눔아!” “할아버지….” 노인은 껄껄껄 웃으며 윤화의 등을 어루만졌다. 어느덧 무화산 저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밝아 오고 있었다. * * * “예상이 빗나갔어.” “…….” “달의 기운을 받으신 분은 채랑 아가씨가 아니라.” “…….” “채희 아가씨였어.” 윤화는 정수를 떠 놓은 상 앞에 예를 갖추고 앉아 치성을 드리다, 입을 열었다. 그러곤 붓과 노란 화선지 한 장을 꺼내 좌상 댁에 전할 서찰을 써내려갔다. ‘마님, 예측이 빗나갔사옵니다. 둘 째 아기씨인 채희 아가씨가 국모가 되실 운입니다. 이 서찰을 받는 즉, 채랑 아가씨를 이 곳 무화산, 제 처소에 머물게 하소서. 세자빈 간택이 있고 난 후, 초하룻 보름달이 환히 뜨는 밤이, 세자저하와 세자빈의 합궁일이 될 것이옵니다. 그 날의 보름달의 충만한 기운을 채희 아가씨와 채랑 아가씨가 각자의 자리에서 맞으신다면 두 분의 운명은 제자리를 찾을 것이옵니다. 이 서찰은 즉시 태워 없애주셔요. 저는 무화산을 떠나 치화산으로 거처를 옮길 생각입니다. 부디, 다시 마님을 뵙는 그날 까지 안녕, 또 안녕하시옵소서.’ 그렇게 서찰을 쓰고 난 후, 윤화는 다시금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께 절을 했다. 노인은 그런 윤화의 뒤에서 모든 걸 체념한 얼굴로 하늘만 바라보고 섰다. “할아버지. 다 되었어.” “먼저 치화산으로 떠나 있거라.” “싫어. 할아버지가 예 당도하면 같이 떠날 것이야.” “만일을 대비하자는 것이다. 만일 내가 변을 당한다면 그것은 필시 이 서찰의 존재나 너와 나의 행보를 꿰뚫고 있는 이가 있다는 말일 텐데.” “…….” “그자들이 너를 가만히 살려 둘 것 같으냐?” “할아버지 왜 자꾸 그런 재수 없는 소리만 하는 거야! 누가 우리 목숨 줄을 노리기라도 한 단 말이야?” “네 할머니는 항상 그래왔다. 이런 위험한 일을 풀고자 할 땐, 항상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행했다. 알고서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렇지만….” “곧 뒤따라 갈 터이니 딴 곳으로 새지 말고 곧장 치화산으로 향하기나 해.” 노인은 윤화가 건넨 서찰을 받아 낡은 도폭 소맷자락에 푹, 넣곤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연신, 윤화의 마음이 불안하기만 했다. “할아버지! 꼭 바로 뒤따라야 해! 알았지?!” “알겠다고 이눔아! 얼른 짐이나 싸!”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산을 내려가는 노인의 뒷모습에서 윤화는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 * * “약조한 날이 오늘이지요.” 좌상 댁, 정경 채화는 마른 침만 꼴깍 꼴깍 삼키며 마당을 왔다, 갔다 불안에 떨었다. “부인.” “왜이리 불안한 것일까요.” “믿어봅시다, 운명을.” 좌상은 채화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방에선 이미 채비를 끝낸 두 아기가 누워있었다. 둘 중 하나는 오늘 이 집을 떠나 기약 없는 그 날까지 무화산에서 지내야만 했다. 정경은 한숨을 푹 내쉬며 안채로 들어와 두 아기를 보듬었다. “미안하구나. 따뜻한 밥 지어 맥이고, 예쁜 옷 지어 입혀서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함께…살고 싶었는데…” “…….” “부족한 어미라…, 이리도 못난 어미라…미안하구나, 내 새끼들.” 채화는 두 아기를 보듬고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찌하였든, 둘 중 하나와는 이별인 날이었으니. 곱게 싸놓은 보따리를 먹먹한 눈동자로 내려 보던 채화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약조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 신시가 되었는데, 아직 아무 소식도 없으니…” 좌상은 안채로 들어서며 근심 가득한 얼굴로 둘 째, 아기인 채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이 곳에 아무도 당도하지 않는다면 윤화가 예언한대로 첫 째인 채랑이 국모의 운을 타고난 아이고, 둘 째 아기인 채희가 이곳을 떠나야 했다. 이미 예견된 운명이었지만…, 좌상은 심란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 “채희가…떠나야 할 운명인가 봅니다.” 좌상은 담담한 척, 그 말을 내뱉었지만 마음이 착잡해져오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좌상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곤히 잠들어 있는 채희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하염없이 채희를 내려다보았다. “아가…참으로 기구한 운명이구나.” 어느덧 좌상의 눈동자에도 뿌연 눈물이 드리웠다. * * * 무화산을 떠난 지 이틀 째 되는 날, 노인은 부지런히도 걷고 걸었다. 끼니조차 거른 채, 제 시간 안에 좌상 댁에 당도하기 위해 묵묵히 걸었다. “이 서찰을 무사히…전해드려야 할 텐데.” 어느덧 날이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시간은 신시를 지나 유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이제 도성까지 한 고개만 넘으면 되었다. 노인은 도포 소맷자락 속에 담긴 서찰을 다시금 더듬으며 깊은 산 속으로 들어섰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내일 눈이라도 한바탕 내릴 참인지, 달빛을 밤 구름이 뿌옇게 에워싼 듯 했다. 옷깃을 여미며 노인은 오로지 구름이 쌓인 뿌연 달빛에 의존한 채, 어두운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 때, “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걷던 걸음을 멈추어 섰다. 등 뒤로 식은 땀 한 줄기가 슥, 흘렀다. 좋지 않은 예감이 몰려왔다. 노인은 그대로 멈춘 채, 뒤를 돌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노인은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아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그리고 그런 노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는 분주한 발 소리 하나.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서찰이 든 도포 소맷자락을 꾹 쥔 채, 내달리기 시작했다. 낙엽과 빈가지가 노인의 다급한 발자락에 스쳐 바스락 바스락 다급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 뒤를 맹렬히 따르는 검은 그림자! 노인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내달리고 또 내달렸다. 이 고개만 넘으면, 이 고개만 넘어 저잣거리에만 당도한다면 몸을 숨길 방도가 있을 테였지만. “허억-허억-허억-” 이 어둠이 내린 숲에서 노인은 그저 독 안에 든 쥐일 뿐이었다. 노인의 거친 숨소리가 숲을 가득 매웠다. 그리고 순간, 노인이 있는 힘껏 내달리다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으윽-!” 그리고 노인이 예상한대로 노인이 넘어져 숲속을 뒹굴자 그런 노인의 목에 서늘한 칼이 겨누어졌다. 노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자를 올려다보았다. 주위에 불빛 한 점 없는 탓에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건장한 사내인 듯 했다. “누구냐! 원하는 게 무엇이냐!” 노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뒷걸음질 쳤다. “내 놓거라, 그 서찰을.” “…무, 무슨 서찰을 말이냐, 이놈아!” 노인이 발뺌하자, 자객은 더욱 노인의 목에 칼을 깊숙이 들이밀었다. 노인은 마른 침을 살피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렀다. “그 무당 년이 준 서찰을 내놓으란 말이다. 그 서찰을 들고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던 게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러는지 모르겠으나! 짚어도 한참을 잘 못 짚었소이다! 내겐 서찰 따위는…!” “너는 어차피 죽게 되어있다. 끝까지 발뺌하고 그 서찰을 내놓지 않는다면 너는 내 손에 죽을 것이고, 그 서찰을 내놓지 않고 도망을 간다 해도,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 “니가 살 길은 오직 하나. 그 서찰을 내게 넘겨주는 것 뿐.” “…….” “그 서찰을 내게 넘긴다면 니가 그 서찰을 들고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 지는 궁금해 않겠다. 목숨 또한 살려줄 것이다.” 노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복면을 쓴 자객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더듬더듬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에 기댔다. 마른 침을 삼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윤…화야….” 노인은 비통한 표정으로 손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이것을 내어줄테니…그럼…약조하시오. 내 손녀만큼은…손녀만큼은 꼭 살려주시오.” “약조하지.” 그리고 노인은 벌벌 떨며 소맷자락 속 서찰을 꾹, 쥐었다. * * *
Chapter 56. 좋게 말할 때, 헤어져 주라.
“아 뭔 그런 이상한 요구를.” “……?” “뭘 믿고 그렇게 당당하게 한데?” “아 해줘! 해줘! 해줘야만 해. 나 정말 더는 못 만나겠어.” “…차 씨?” “아까 그 여자 막 우는데 나 왜 눈물 나냐? 나도 엄연히 피해자잖아! 씨-!” “피해자라….” “내 남자친구인 척 해줘. 차 씨 앞에서만. 그래야 순순히 헤어져 줄 것 같아.” 로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야속했다. 자신도 위로받아야 마땅할 처지였다. 그런데, 세컨드 주제에 퍼스트를 걱정해주고 있다니. “피해자지만.” “……?” “뺑소니지?” “뭐…?” “꽝! 하고 사고를 냈음.” “…….” “자수를 해야지.” “…….” “누난 방금. 모른 척, 휙- 달려버린 거잖아.” “…야!” 도헌은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헌의 말에 로라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어안이 벙벙해졌다. 멍한 표정으로 도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는데. “뭐해?” “어, 어?” “밥 먹으러 가야죠, 자기.” 자기, 자기! 자기란 말에 로라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기? 너 방금 자기랬지? 어?!” “그래. 자기요.” “예쓰! 너 내 자기 해주기로 했다? 난중에 딴 말 하면 안 돼! 알았지?!” 로라는 폴짝폴짝 뛰며 기뻐하다 이내 와락, 도헌을 끌어안았다. 도헌은 화들짝 놀라며 로라를 밀어 냈는데, 다시금 로라는 도헌을 세게 끌어안았다. “어허! 내외하나 자기!” “이거 왜이래요! 스킨십은 불가거든요?!” “야! 이게 뭔 스킨십이야!” “대신! 딱, 차 씨랑 헤어질 때 까지만 입니다! 알았어요?!” “당근이다! 더 연애 하자고 매달려도 내가 싫어, 임마.” * * * 둘은 모처럼 고기 집에서 포식을 하고 배를 두드리며 병원으로 향했다. “나 근데 퇴원해도 될 것 같지 않냐?” “그러니까. 애초부터 나일론 환자였어.” “그래도 그 날은 엄-청 아팠다니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둘은,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내일, 퇴원해도 되겠다고 선생님께 말씀 드려야 겠다.” “열은 이제 안나요?” 하고 자연스럽게 도헌이 로라의 이마에 손을 짚었는데,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로라씨.” “아.” 기태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도헌과 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 로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곤 자신의 이마를 짚고 있는 도헌의 손목을 쥐었다. “선생님.” “…기다리다 안 와서 이제 가려던 참이었는데.” 기태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곤 도헌을 올려다보았다. 도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기태를 바라보곤 이내 싸늘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곧, 자신의 옆에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기태를 올려다보고 있는 로라를 응시했다. “할 말 있다 하지 않았어요?” “어? 아…어.” “먼저 올라가 있을게요.” 하고서 도헌은 로라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곤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기태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자신의 옆에 성큼 다가와 선 도헌을 아니꼽다는 듯, 바라보았다. “안 내립니까?” “…….” “그럼 닫힘, 버튼 누르고.” 하고서 도헌이 닫힘 버튼을 누르기 위해 검지를 뻗자, “내가 대체 어디까지.” “…….” “당신의 건방을 받아주어야 할지, 도통 감이 안 잡혀서 그러는데.” “…….” “당신이 페이스를 조절할래요. 아님…나한테 그 적정선을 말 해줄래요.” 기태는 싸늘하게 도헌을 바라보았다. 도헌 역시 기태의 말에 차갑게 기태를 바라보곤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페이스도, 적정선도. 다 성가 시는 듯한데.” “…….” “내리기나 하시죠. 난 지금 그쪽이 엘리베이터에서 안 내리는 것부터가 성가시니까.” 도헌과 기태는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로라는 그런 기태를 빤히 보고 있다, 나지막이 기태를 불렀다. “선생님.” “…….” “드릴 말씀이…있습니다.” 기태는 고개를 돌려 로라를 바라보았다. 다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는 로라를 바라만 보았지만, 기태는 이미 그 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으며 기태는 고개를 숙였다. “그 말씀…” “…….” “안 드려도, 난 이미 받은 것 같은데.” * * * “죄송해요. 그만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로라는 그 말을 내뱉으며 기태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유, 물어봐도 될까요.” 의외로 덤덤한 목소리의 기태였다. 때문에 로라는 오히려 당황하며 기태를 올려다보았다. 알고 있었다는 듯, 기태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로라를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선생님을 만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 만나지 못할 것 같다에, 저 구도헌씨가 연관되어 있는 겁니까.” 그 말을 내뱉는 기태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로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계약 아닌, 계약 비스무리한 가짜 연애를 도헌에게 제의한 것 역시 기태와 헤어지기 위해서였다. 로라는 마음을 굳게 먹고 기태를 올려다보았다. “예.” “…두 사람 연애라도 하는 겁니까?” “아직은 시작 안 했습니다. 곧 하려구요.” “…….” “선생님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만나려고 합니다. 양다리는 아니니, 노여워 마시구요.” 그 말에 뼈가 담긴 듯하였다. 기태는 한 쪽 눈썹을 찡그렸다, 폈다. ‘양다리’ 굳이 그 단어를 선택하여야 했을까. 기태는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똑똑하고, 자신의 주장이 뚜렷한 그녀였으니 다부진 목소리로 헤어짐을 고하는 이번 역시, 그녀의 진심일 것이고 바람일 것이었다. 기태는 가만히 로라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대답도 않고, 자신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기태의 시선이 부담스러, 로라는 흠, 흠 헛기침을 하며 그의 대답을 재촉하였다. “양다리는 아니다.” “…….” “그렇다면 지금은 제가 로라씨의 남자 친구겠네요.” 어쩐지 그 말을 하는 기태의 어투가 많이 삐뚤어져 있는 듯하였다. ‘기분 탓이겠지…?’ 하며 기태를 빤히 올려다보았는데, ‘핏.’ 핏? 갑자기 그가 피식, 웃어 버린다. 웃어 버린다?! “저기…” “그럼 내가 못 헤어지겠다 하면.” “……?” “로라씨도 구도헌씨와 만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양다리는 아니라고 했으니.” “이봐요, 차 선생님. 그게 무슨.” “로라씨에겐 이유가 생겼을지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이유가 없습니다. 로라씨를 놓쳐야 할.” ‘아니 이 자식이…퍼스트까지 있는 주제에 뭐? 이유가 없어?!’ 당장이고 네 놈의 실체를 까발리고 싶지만!, 로라는 한 템포 참으며 침을 꼴깍 삼킨다. “놓치고, 안 놓치고 가 아니라요.” “…….” “헤어지자고 저는 지금 이별을 통보하고 있어요. 선생님께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우리의 관계를 대화로 풀고자 함이 아니라요.” “…네, 그래요. 나 역시도 통보하고 있는 겁니다.” “……?” “못 헤어지겠다구요.” 이 무슨 기가 막힌 상황인가! 로라는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며 기태를 세차게 올려다보았다. “헤어지자구요. 헤어져 주세요. 쫌.” 이별도 구걸해야 한다니. 로라는 자신의 사랑이 참으로 눈물겹다,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이였기에 이별만큼은 정중하게 하고 싶었다. 똥차가고 벤츠 왔다, 한 때는 너무도 행복했고 미래를 그리며 설레어 했던 사랑이었기에 이별만큼은 추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쪽의 양다리도, 나의 세컨드 신분도 모두 접어두고 사랑했고 좋았던 그 기억만 묻은 채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런데, “나에겐 그럴 이유가 없어서요. 그럼.” 그 말을 내뱉고 휙, 돌아서는 기태. 끝까지 로라를 자극하는 그 ‘놈’이었다. 그때, 우지끈-, 로라의 이성의 끈이 부서져 버렸다. “이봐.” “……?” “좋게 말할 때 깔끔하게 끝냈음 좋잖아.” “…….” “왜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로라는 악을 쓰며 기태에게 달려들었다. 기태는 무표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 로라를 바라보았는데, 로라는 야무지게 주먹을 쥐곤 있는 힘껏 그의 배를 내려쳤다. “윽!” 기태는 배를 쥐곤 털썩, 주저앉았다. “세컨드로도 모자라, 셋 째, 넷 째, 줄줄이 소시지처럼 몇 명을 더 달아놔야!” “……?” “그 때 놔 줄거냐? 니 퍼스트처럼?” “무슨…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기태는 벙찐 표정으로 로라를 올려다보았고, 로라는 기가 찬다는 듯 한껏 쳇! 하고 콧방귀를 뀌어주곤 있는 힘껏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네 놈 양다리의 실체를 내가 말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 * * 그어느연재사이트보다 빙글러분들이더편하고 가까운듯한느낌은,,,멀까효*^^* 장마시작인데ㅠ건강조심합시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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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빙글러님들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아(적ㅇㅓ보이지만 많은걸로.. ㅎㅎ) 다음편을 가져왔습니다. 곧 추석이라서 빠르게 업로드 해야겠습니다. 추석때 해야할 노동이 많으므로...또르르.. 추천과 댓글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ㄴㅣ다. ====================================================== 제목없음 11 “ 일단 차를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 “ 지금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근처를 뒤지는건 무리에요 “ 그들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은 점점 더 거세져갔다. 구름이 어느새 내려앉아 주변은 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워졌고 이렇게 수풀이 우거진곳에서 차를 찾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였다. “ 이 주변 지리를 어느정도 파악하고 나서 차를 찾는게 쉬울거같아요. 저도 지금 네비로 여기를 처음와봐서 주변지리를 모르거든요. 사실 두분이 말씀하기 전까지 이쪽에 요양원이 있다는 사실도 잘 몰랐습니다. “ 그나마 제주도에 사는 권기자에게 기대를 걸어보려 했지만 주변 지리를 모르는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인듯 했다. “ 혹시 두분 아까 오다가 봤던 야영장에다가 한번 물어보는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 “ 맞아. 그쪽밖에 들어오는 길이 없다면 그쪽에서 애들을 봤던 차를 봤던 하지 않았을까요? “ “ 맞아요. 야영장 주인을 한번 만나보는게 좋겠어요. “ “ 건물내부를 찾아보는건 비가 그치면 다시 오는걸로 하죠. 시야가 너무 어두워져서 밝을때 들어오는게 좋을거 같아요. “ 지현은 일단 잔뜩 젖어서 머리가 엉겨붙은 수연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 수연아 일단 비도 너무 많이 오니까 야영장으로 가보자 . 거기 한번 물어보면 뭔가 얘기해주실지도 몰라. “ “ 그러자. “ 건물 한 귀퉁이에 놓여진 새마음요양원 표지판을 뒤로 한 채 그들은 다시 풀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차를 찾을수 있을 거 같진 않았지만 일단 수연의 마음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야영장 주인과 대화를 해보는것이 좋을 듯 했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랜턴 하나에 의지한채 길지 않은 길을 빠져나왔다. 벌써 세사람은 쓰고온 우산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잔뜩 젖었고 한여름의 장마라도 시작된 듯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야영장 관리소 : 부재시 연락바람 010******** 정진규] 허술하게 세워진 표지판에 야영장이라고 적힌걸 보니 이곳이 맞는 듯 했다. 관리소는 간이로 만들어진 곳 같았고 그 뒤에는 좀 더 커다란 가정집이 있었다. “ 불이 꺼져있는거 같은데 전화를 해봐야 할까요? “ 지현은 우산을 잡은 손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불이꺼진 곳의 문을 함부로 열수도 없었다. ‘똑똑똑’ “ 저기요 !!! 사람 없어요 ? “ 머뭇거리던 틈 사이로 수연은 관리소의 문을 두드렸다. ‘ 쾅쾅쾅 ‘ “ 저기요!!! 누구 없어요? !!!! “ 문안에서는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주변의 힘차게 내리는 빗소리만 들려올뿐. 우산에 의지한채 셋은 갈피를 잡지 못해 그저 멍하게 서있었다. 대꾸도 없는 문안이 짜증이 났는지 기어이 지현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발로 관리소 문을 차버렸다. ‘퍽 ! ‘ “ 사람 없냐구요 !!! “ “ 누구요 . 누군데 남의 집 문을 발로 참수꽈 “ 빗소리에 시끄러워진 그 공기를 깨며 누군가 뒤에서 소리쳤다. 그는 매우 키가 컸고 커다란 덩치를 자랑했다. 까칠하게 올라온 수염은 며칠 씻지 않은것 처럼 꾀죄죄해 보였고 그의 손에는 비에 흠뻑하게 젖은 뗄깜이 묶여있었다. 머리는 빡빡하게 스포츠 머리를 했고 눈은 부리부리해서 첫인상 치고는 쎄다는 느낌을 받았다. 움푹 패인 눈에 위압감이 느껴진 그들은 누가 먼저 말을 건네야할지 각자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결국 제일 다급했던 수연이 말을 걸었다. “ 저기요. 여기 관리소장님 되세요? “ “ 내가 여기 관리소장 이우다. 무슨 일이꽈 “ 사투리가 조금 섞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관리소장이라고 하는 부분은 알아들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의 표정을 보고 수연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몇가지 질문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 “ 비가 쏟아졈시난 일단 들어오십서 “ 무뚝뚝한 말투로 들어오라며 거구의 남자는 문을 열쇠로 열어주었다. 내부는 좁을 거라 생각한것과 달리 그곳은 그 가정집으로 이어지는 입구 같은 곳이었다. 아마 사무실 겸 입구로 사용하시는것 같았다. 가정집 문까지 열자 그 안에서 넓직하고 커다란 내부가 펼쳐졌다. 값비싸 보이는 가죽 쇼파가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고 영화에서나 보던 벽난로를 보고 지현은 신기해했다. “ 여기 앉으십서. “ “ 감사합니다. “ “ 딱보난 육지사람 닮은디. 무슨 일인지 … “ “ 아 안녕하세요. 제주 향기 권영민 기자입니다. “ 갑자기 말을 끊고 권영민이 끼어들어 대답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지현이 영민을 쳐다보자 영민은 눈을 찡긋하며 빠져있으라는 신호를 보내는 듯 했다. “ 아… 제주도 사람이구나. 육지사람인줄 알아신디 … “ “ 취재중에는 저희도 사투리 많이 안씁니다. 어르신 . “ “ 지역신문이면 도와줘사쥬. 무슨 일이꽈 “. “ 실종된 사람들을 찾고있는데요. 혹시 여기 차세워서 위로 올라가거나 뭐 돌아다니는 아이들 본적 있으세요? “ “ 아이들은 여기 오질 못하쥬게. “ “ 아니 그정도 어린애들 말고 대학생 또래 정도 되보이는 아이들 마씸 ….” “ 흠….. 애들은 못본거 닮은디…. …. “ “ 혹시 그러면 낯선 차를 보신 적은 없으세요 ? 아마 렌트카였을텐데 “ 내용을 바꿔서 질문을 하자 관리소장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뭔가 생각이 날듯 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 했다. “ 여기는 죄다 렌트카인디 내 차 찾는게 빨라지 아 그런데 예전에 우리 손님 차 아닌 차는 봤던거 닮은디…… “ “ 손님 차 아닌건 어떻게 아셨어요 ? “ “ 우리 야영장 쓰는 사람들은 다 들어올때 차남바를 적게 되있어요. 그래야 내가 주차장 관리하기가 편하니까. 그런데 가끔 야영장 주차장 옆이나 바깥에 세우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바깥까지 한번 돌아보는데 우리 주차장 입구옆에 누가 차를 세웠더라고. 내가 목록을 보면서 체크를 하는데 그 목록에는 그 차번호가 없었어요. 그래서 딴 놈이 우리 주차장 근처에 차를 세웠네 하면서 욕을 한번했지. 거기다가 세워버리면 우리 손님들이 차를 빼기가 힘들다고 “ “아,,, 혹시 번호는 기억하세요 ?” “ 내가 차 남바를 적긴 해신디.. 나중에 안 치우면 불법주차로 신고전화하잰 남바 적어놓긴 했수다. 잠깐 기다려봅서. “ 관리소장은 일어나 어딘가 서랍을 뒤지더니 주차목록 이라고 커다란 견출지가 붙은 철 한개를 가져와 앉았다. 목에 걸린 돋보기를 쓰며 여기저기 넘기던 관리소장은 표시해둔 곳을 찾아 그들에게 건네 보였다. “ 여기있네요. 6월 22일 토요일에 . 허. 4018 검정색 그랜저 차. 이때가 어린애들 데리고온 손님이 많아서 우리가 주차장이 꽉찼었거든요. 그래서 꼭 전화할라고 했었는데 너무 바빠서 나중에 있는지 확인을 못했어. “ “ 렌트카 어디 였는지는 모르시져? “ “ 나가 거기까지 어떵알아. 그냥 남바만 적어놔신디 “ 옆을 살짝 보자 지현은 몰래 대화내용을 녹음 중인걸로 보였고 수연은 수첩에다가 차 번호를 적어놓았다. 투덜거리던 관리소장은 바깥에 갑자기 쏟아지는 빗소리에 흠칫하며 창문을 열어 바깥을 확인하였다. “ 비가 영 하영 내리는데 다시 어떵 갈거라 . 좀 그치면 가던가. 여기 커피 이시난 알앙 타마시고. 난 건물에 물새는데 이신디 봐야하니까 뭐 물어볼거 이시믄 아까 거기 번호로 전화하던가 합서. “ 무뚝뚝하게 내뱉던 관리소장은 비가 새는 곳을 찾아야 한다며 고무 대야를 들고 사라졌다. 아마 알아서 가던가 말던가 하라는 뜻 같았다. “ 뭐라고 하시는거에요 ? “ 지현은 사투리가 연속적으로 나오는 말에 당황해했지만 이내 영민이 그 뜻을 설명해주었다 . “ 커피 마시고 비 그치면 가라하시네요. 소장님은 비새는데 있나 보러 가셔야한대요. 혹시 물어볼거 있으면 문에 붙어진 번호로 전화하라고 하셨어요 “ “ 혹시모르니 저장해놔야겠네요. 관리소장 이름이 정진규씨 맞죠? “ “아깐 말잘라서 미안해요. 제주도 분들이 육지 신문사에서 왔다고 하면 대답을 잘 안해주시거든요… 좀 폐쇄적인 곳이라… “ “ 이해해요. 다른 지역도 그러는걸요 . 영민씨 덕분에 그래도 수월하게 대화 했어요.“ 관리소장의 말을 듣고 나니 더 의문투성이가 되었다. 사라진 유심. 차로 이곳을 왔는데 지금은 어디있는지 알수가 없다. 아마 야영장 곁에 차를 세우고 요양원까지 올라간건 맞는거 같은데 그 뒤에 행방이 묘연하니… 어디에 있는거니 수정아… 12편 이어집ㄴ니다 https://vin.gl/p/2672350?asrc=copylink
제 4 장. 궁궐에 드리운 검은 구름.
“이렇게까지 하려는 연유가 무엇이냐.” 노인은 막 당도하여 장의를 벗는 윤화를 향해 물었다. 윤화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냥. 하고 싶어서.” “그래서 이 무화산을 고집한 것이냐.” “…….” “무녀로 살지 않겠다, 지난 날 그리도 발버둥 치더니. 무녀였던 니 할머니가 평생 지낸 이곳을 다신 발도 들이지 않겠다, 그리 호언장담하고 가출까지 마다하지 않던 니가.” “…….” “고작 그 분을 돕기 위해 그리 꼴도 보기 싫어하던 이 무화산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냐.” “고작 이라니.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게 해주신 귀하신 분이야.” “…….” “그때, 마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난 어머니 마지막 가는 길, 배웅도 못 해드렸을 거야. 그리고 난 아마 그날 그 우상댁 부인에게 곤장만 맞고 내팽개쳐졌을 테지.” 윤화는 무덤덤하게 그 말을 내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지체했더라면…엄마는…쓸쓸히 죽어갔을 거야. 저잣거리 왈짜패들에게 쫓겨 달아나고 있었으니…난 마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왈짜패들에게 잡혔거나, 우상댁 부인에게 잡혀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도 못해줬겠지….” “니 할머니도 그런 위험한 일은 마다하셨다. 니가 지금 하려는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한 지 알기는 아는 것이야?” 노인은 한숨을 쉬며 털썩, 마당에 주저앉았다. “할매가 그랬어.” “…….” “모든 것엔 다 연유가 있다고. 까닭 없는 것들은 없어.” “…….” “처음엔 무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싫어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겠다, 몸부림 쳤었지. 그래서 운명을 거스르는 위험한 내 행동에 결국 엄마가…죽고 말았지.” “네 탓이 아니다, 연화야. 네 어미는 오래 앓던 병 때문에…” “그래. 그 오래 앓던 병 때문에 그 해, 갑자기 돌아가신 건. 나의 위험한 행동에 엄마의 명줄을 재촉한 것이겠지. 나에게 무녀가 되라고 하늘이 점지해주신 까닭은 분명 있을 거야.” “…….” “그리고 그 연유를 난 그 날 찾았을 뿐이고. 그 날 나는 무녀로 살아야겠다, 마음먹었어. 처음으로 내 스스로를 무녀라 칭한 날이야.” “…….” “내게 무녀라는 운을 헛되이 내려주시진 않았을 거라, 할매가 맨날 얘기했었어. 그리고 난 이제야 그 말을 알 것 같고.” “윤화야.” “그 운명을 거스르는 것. 내 눈에 보이는 그 분들의 운명을 바로잡아 주지 않고 외면하는 것.” “…….” “그것만큼 위험한 일이 어디 있겠어.” 윤화는 허탈해하는 노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곤 괜찮다는 의미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열흘 뒤에 떠날 거야.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무사히 있으면 돼.” 그 말을 남기고 윤화는 방으로 들어섰다. 노인은 그런 윤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부녀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이가 있었으니…. “열흘…뒤에 떠난다라.” * * * “세자가 이리 어린데 벌써 빈 얘기라니요, 대비마마.” 중전과 후궁 최씨가 대비 전에 나란히 앉아 다과를 들고 있었다. 희끗희끗 머리가 센 대비가 찻잔을 조심히 내려놓으며 중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이가 지긋했지만 곧추 선 허리에서나, 힘 있는 목소리에서나, 날 선 눈빛에서나 권력의 힘이 그대로 묻어났다. “세자가 책봉된 지 꽤 되었습니다. 미리 세자빈을 물색해놓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리 이른 것은 아닙니다, 중전.” “하지만…” 최숙원은 중전과 대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생각해두신 규수는 있으십니까, 대비마마?” “세자빈은.” “…….” “예로부터 하늘이 점지해준다 하였습니다. 이 뒷방 늙은이가 생각해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대비는 무언가 속내를 감춘 듯한 얼굴로 찻잔을 다시금 쥐었다. 중전은 그런 대비의 속내를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최숙원도 이번 세자빈 간택 때 한 유세 펼치셔야지요?” “예, 예…대, 대비마마?” 대비의 갑작스런 말에 최숙원은 화들짝 놀라며 중전의 눈치를 살폈다. 중전은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안 그렇소, 중전? 최숙원이 세자의 친모이니.” “…대, 대비마마.” “어찌 보면 모후 아니오? 그러니 아들 낳은 유세, 이럴 때 아님 언제 부려보겠습니까.” 도발이었다. 그것은 중전에 대한 대비의 도발이었다. 대비는 그 말을 그렇게 내뱉고 나선 농이라는 듯 허심탄회하게 웃어버렸다. 중전 역시, 대비의 말에 화를 낼 수도 없는 처지였기에 쓴 웃음을 지으며 최숙원을 돌아보았다. 대비와 중전의 기 싸움에서 최숙원만 안절부절 못하였다. “그렇지요. 최숙원이 세자의 친모이니…, 세자빈 간택 때는 중전인 나보다 더 발 벗고 나서야지요.” “황, 황공하옵니다…중, 중전마마.” “무얼 그리 떱니까, 최숙원. 가볍게 웃어넘기자 하는 소리들 아닙니까, 허허허.” 대비는 여전히 호탕하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중전은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대비는 애써 화를 억누르고 있는 중전의 표정을 살피며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세자빈은 하늘이 정해준다고는 하지만.” “…….” “내 눈여겨 두고 있는 규수가 있기는 한데.” 이제야 속내를 드러내는 구나, 중전은 속으로 생각하며 덤덤하게 찻잔을 쥐었다. “대비마마께서 점해두신 규수가 있다면 아마 세자빈으로 꼭 맞는 아이일 테지요. 어느댁 규수를 눈여겨 두고 계시옵니까.” 중전의 물음에 대비는 묘한 웃음기마저 거두고 대비는 진지한 낯빛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번에 좌상이 딸아이를 낳았다지요.” “좌상댁…여식말입니까?” “좌상의 성품이나 정경부인의 인품은 말해 무엇합니까. 입만 아프지. 안 그렇소?” “예. 그렇지요.” “가문도 가문이거니와 좌상과 정경부인 사이에서의 아이는 분명 세자빈으로 손색없을 아이일 겝니다. 세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에요.” 대비의 본심을 들은 중전은 다시금 치맛자락을 꾹 쥐었다. 최숙원은 좌상이라는 말에 가만히 차를 들이켰다. 남몰래 우상댁의 여식을 세자빈으로 점지해두고 있던 중전은 이렇게 또 한 번 대비와 맞서게 되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 중전의 마음을 읽은 듯 대비는 한 수 굽히고 들어갔다. “하지만 뭐 이건 어디까지나 이 늙은이의 생각인 게지요.” “…….” “중전이 며느리를 보는 것이니, 중전이 생각해두고 있던 규수가 있으시면 이 늙은이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중전 뜻대로 하세요.” 그러고 대비는 흐음, 헛기침을 하며 몸을 살짝 비틀어 앉았다. 중전은 미묘한 미소만 띤 채, 말없이 차만 들이켰다. 둘 사이에 낀 최숙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가만히 찻잔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세자빈은. 늘 그래왔듯이.” “…….” “세자빈 간택령이 내려지고 금혼령이 떨어지는 것은 백성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관례일 뿐이지.” “…….” “다, 미리 점지해두고 간택령을 내립니다.” “…….” “잘, 아시지요 중전? 중전 역시 그리 간택되신 것이니.” “그렇지요, 대비마마.” “세자빈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최숙원과 주상과 잘 논의하여 세자빈을 간택토록 하세요. 그것이 곧. 하늘의 뜻일 터이니.” * * * 대비 전을 나오며 중전은 붉은 치맛자락을 꾸욱 쥐었다. “이 번만큼은 내 대비전과 맞서고 싶지 않았거늘.” “…….” “어쩔 수 없지. 해보시자는 게지.” “중전마마.” 중전은 대비 전을 한껏 노려보았다. 사사건건 부딪히는 대비와 중전이었다. 슬하의 자식 하나 없는 중전이 왕가의 혈통을 중시 여기는 대비에겐 늘 눈엣가시였다. 결국 최숙원의 몸을 빌려 낳은 수안을 원자로 봉하였고 곧 수안은 세자로 책봉되었다.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지 않은 중전에게 곧 남은 궁 생활은 시한부와도 같았다. 자신을 이 넓은 궁에서 지켜줄 이는 하나 없었다. 중전은 그래서 세자빈만큼은, 자신의 세력에서 간택하고자 했다. 그래도 자신을 지켜줄, 지금의 왕이 죽고 최숙원의 몸에서 나온 수안이 임금이 되었을 때 자신이 이 넓은 궁에서 쫓겨나지 않고 버틸 힘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금의 모후가 아닌 자신이 대왕대비 전에 앉아 그래도 궁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후에 자신의 자리에 앉게 될 세자빈이 자신이 세운 사람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중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이상궁을 불렀다. “우의정을 들라하라.” 자신의 뒷배를 봐주는 세력이자, 폭주하는 야망과 검은 속내를 지닌 어쩌면 지금의 중전과 꼭 닮은 우의정, ‘조민환’을 중전은 늘 가까이 했으며 믿고 따랐다. 그리고 그의 여식인 ‘민선’을 중전은 꼭 세자빈으로 세워야만 했다. “대비마마와 결국 또 척을 지려 하십니까.” “나를. 이 넓은 대궐에서 나를 지켜줄 이는 그 누구도 없다. 지금의 전하가 승하하시고 나면 내 목숨 줄은 썩은 동아줄과 다름없겠지. 지금의 좌상은 그 세력이 대단하다고 하나, 언젠간 그 곧고 바른 성품 때문에 좌상의 날개가 꺾일 날이 있을 게야.” “…….” “지금의 전하는 좌상을 가까이 하시겠지만. 후에 세자가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되면.” “…….” “내가 그 세력을 바꾸어 놓아야지. 그때쯤이면 대비도…죽고 없어지겠지.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세자빈만큼은…우의정 여식이 되어야 해. 나도 지금부터 내 목숨 줄 하나는 부지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중전마마…듣는 귀가 많사옵니다.” 중전은 붉은 치맛자락을 꾹 쥔 채, 성큼성큼 중궁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중전을 뒤에서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던 최숙원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김상궁.” “예 숙원마마.” “궁궐에 검은 구름이 드리우려 하는 구나. 아무래도 중전마마께서는 우의정댁 규수를 세자빈으로 점지해 두셨나 보다. 은밀히 우의정의 뒤를 살피게.” “예.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나도…다음 보위에 오를 왕세자…내 아들을, 내 방식대로 지켜야 겠습니다, 중전마마.” 최숙원의 푸른 치맛자락이 봄바람에 사뿐 사뿐 흩날렸다. 분홍빛으로 옅게 물든 최숙원의 양 볼이 햇빛을 받아 복숭아처럼 탐스럽게 빛났다. * * *
Chapter 44. 나에게 더는 다가오지 마.
로라는 거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 팔목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팔목이 아려왔지만 그 보다 마음이 더 아려왔다. “왜…나한테…승질이야…나쁜 자식이.” 로라는 눈물을 훔치며 빨갛게 부어 오른 팔목을 바라보았다. 속이 상했다. 왜 저렇게 자신에게 화를 냈는지, 왜 구도발은 차 선생님에게 그토록 부정적인 것인지. 그리고 왜…왜, 저 자식이 화를 내는 게 마음에…걸리는 것인 지. 로라는 굳게 닫힌 도헌의 방문을 한껏 노려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책상에 엎드려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으어어엉, 왜…왜 나한테 그래!” 그렇게 소리 내어 엉엉 울기를 십분이 지났을까. 로라는 뻘개진 눈으로 서랍을 열었다. “…….” 그때, 그 손님이, 오늘 아침에 기태의 병원 앞을 서성이던 그 여자가 선물해주었던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로라는 입술을 깨물곤 그 손수건을 꺼냈다. “현재를…즐겨라…” 의미심장했다.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로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손수건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그냥, 과거도 미래도 아무것도 생각 말고 현재만 즐기란 말인가. 로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곤 조금 전, 도헌이 화를 내며 자신에게 내뱉었던 말들을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여자 없을 것 같냐고?…, 여자 친구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르고 만난 거 아니냐고?” 여자 친구가…당연히 없으니 자신을 만났을 거라 생각했다. 순서가 뒤 바뀌긴 했지만, 여자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만날만한 그런 쓰레기는 아니라고, 로라는 생각했다. “그럴…사람이 아니라는 건 세상에 없다지만…정말…정말 선생님만큼은….” 로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두 눈이 빨개지도록 울고 나니, 속이 어쩐지 후련한 듯하기도 했다. 로라는 그 손수건을 손에 꼭 쥐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멋있는 사람과 연애를 하고 있는 이 행복한 순간에 그토록 자신이 울어야 하는 지. “믿고 싶은 거…믿어만 버리고 싶어서라는 거…알잖아, 너도.” 괜히 도헌이 미웠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믿어 주고 싶고 믿어 버리고만 싶다는 걸, 지도 잘 알면서. 왜 자신한테만 그렇게 모질게 말하는 것인 지. 도헌이 있는 방 쪽으로 눈을 흘겼다. 그런데 마음이, 쉽사리 나아지질 않았다. 자신에게 화를 낸 구도헌에 대한 원망보단, 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선생님이 아니라고 했잖아. 지금은 선생님이 내 남자 친구인 걸.” 그러면 믿어 주어야 했다. 그보다, 믿고 싶었다. 차기태였기에. 다른 이도 아닌 차기태였기에. 자신이 한 눈에 반해버렸고, 자신의 마음을 단번에 빼앗아갔던 이었기에. 바람둥이 전 남친에게 아프게 데이고 난 후에 만난이라, 더욱 그랬다. 젠틀 하고 매너 있는 행동과 말투. 그리고 다정하고 자상한 성품. 서툴렀지만, 그래도 어색하고 차가움이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에게만큼은 한없이 다정해지는 사람. “…하지만.” 로라는 입술을 깨문 채, 손수건을 다시금 내려다보았다. “넌…너는 진짜 정체가…뭐니.” 로라의 마음이 어지러웠다. 불안하기도 했고, 찜찜해져 오기도 했다. “구도발이…내게 그런 말을 그냥 해 줄 일은 없어. 구도발은…” 좀 전에 자신을 꼭 끌어안아 주었던 도헌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리고 다시금 쿵쿵, 뛰기 시작하는 자신의 심장. 로라는 며칠 전부터 구도헌과 마주하면 심장이 뛰는 자신의 이상증세를 헤아려 보며, 그 여자가 준 손수건을 꾹 쥐었다. “구도발 역시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나한테 그냥, 그저 그런 걸로 섣부르게 상처를 줄 리가 없지.” 미안해요, 선생님. 나 선생님의 마음을 의심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속으로 읊조리며 로라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는 빗줄기를 젖은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 * * “이상하지 않냐, 정말.” “어련히 알아서 만날라고? 그리고 또 쓰레기 만나도 오로라 몫이지, 너보고 책임지라고 안 하잖아.” “방관하는 것 같잖냐.” 집 앞, 포장마차에서 로준과 도헌은 마주보고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오로라에게 화를 내고 난 뒤, 마음이 편치 않은 도헌이었기에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그래서 뒤숭숭한 마음에 귀가하던 로준에게 연락을 해 술 한 잔을 하고 있었다. “너가 왜 방관하는 것 같은데.” “그 새끼한테…여자가 있었거든.” “…진심?” “전 여친인 지, 현 여친인 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서. 섣불리 오로라한테 얘기는 못 해줬었다.” 그렇게 말하며 도헌은 괴로운 듯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아직도 있는 것 같아?” “아니. 내가 정리 하고 만나라고 말하긴 했었거든. 그래서 지금은 정리한 듯싶은데.” “그럼 됐지, 뭐. 미처 정리 못 하고 오로라 만났다고 하더라도 지금 잘 하면 됐지.” “…….” “그리고 그 남자 몇 번 마주치긴 했는데. 오로한테 진심인 것 같던데.” “…….” “오로라도 진심으로 좋아하는 듯 보였고.” 로준은 도헌의 빈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로준이 애써 그렇게 도헌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려 했지만, 도헌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굳어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그래. 그 남자도 진심으로 오호라, 생각해주는 것 같고.” “…….” “여자가 많아 보이긴 했지만. 뭐 다 능력 있고 잘생겼으니 그런 거겠지. 깔끔해 보이긴 했는데, 그래도 영 찝찝해서 말이다.” “…동생인 나보다 더 극성이다, 진짜.” “…그러니까. 나 왜 이렇게 오지랖이냐?” 도헌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차갑게 웃었다. “니 심성이 착해서 그렇지 뭐. 철없는 오로라가 니 깊은 맘을 알 길은 없을 테고.” “아까…오호라한테 소리 질렀어. 손목도 아프게 잡아 끌어버렸고.” “…….” “답답해서. 나 혼자만 이렇게 답답한 가 싶어, 화도 나고.” “…….” “걱정되기도 하고.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까지 하나 싶어, 이해가 안가기도 하고.” “…….” “왜 둘 사이에 끼어서 사서 고생인 지,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괴로운 듯 보였다. 도헌은 거푸 술잔만 비워댔다.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아까 오로라와 함께 우산을 쓰고 순대를 사러갔던 그 길을 회상했다. “더는…그러지 말아야겠다. 신경 쓰지 말아야 겠다. 생각하지 말아야 겠다.” “…….” “내게 경고 아닌 경고 했던 그 남자 말처럼. 더는 오호라의 일에 신경을 안 쓰는 게, 맞는 건데.” “…….” “그런데 나 왜…그게 안 되냐.” 천둥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신의 품에 와락 다가왔던 오로라의 모습이,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떠선 초롱초롱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던 오로라의 눈망울이, 그리고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던 빗방울을 손으로 닦아주던 오로라의 손길이, 여전히 눈앞에 선명한 듯 했다. 구도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오로라의 모습을 눈앞에서 떨쳐내려 했다. “너….” 오로준은 그런 도헌을 빤히 바라보다 굳은 표정으로 도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설마, 오로라.” “…….” “좋아하는 것 아니냐.” “뭐?” “너…오로라 좋아하는 거 아니지?” 로준의 질문에 도헌은 순간 굳었다. 이 마음이, 이 걱정이, 이 오지랖 넘치는 감정이. “…내가 오로라를 좋아한다고?” * * * 집으로 돌아온 둘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먼저 씻는다며 로준이 화장실을 차지했고 도헌은 알딸딸해져 오는 술기운에 다시금 불 꺼진 주방으로 돌아왔다. “…다 식었네.” 도헌은 식탁위에 오로라와 먹기 위해 차려놓았던 식어버린 순대와 떡볶이를 멍하니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아까 너무 심했나, 도헌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더니 저벅저벅 닫혀있는 로라의 방 문 앞으로 다가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미안. 아깐 화내서 미안해요.” 세찬 빗소리만이 거실을 가득 메웠다. 마음이 먹먹해져 왔다. 도헌은 주먹을 꾹 쥔 채, 로라의 방문 앞에 편의점에서 사 온 멍 든 곳에 바르는 연고를 내려놓았다. “더는…더는…다가가지 않으려고….” “…….” “그러니…누나도 더는…다가오지 마라.” 그렇게 혼잣말로 읊조리며 다시금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헌이 발걸음을 돌렸는데. 삐걱-, 로라의 방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내가 언제 다가갔다고 그러냐?” “…안 잤어요?” 퉁퉁 부운 눈으로 로라가 방문을 빼꼼히 열어 도헌을 바라보았다. 그런 로라의 부운 눈을 보니, 도헌의 마음이 아려왔다. “손목…괜찮아?” 도헌은 멀찌 감치서 로라의 손목을 바라보며 물었다. 평소 같았음 로라의 손목을 덥석 쥐곤 자신이 약을 발라주었겠지만, 이젠 그러기 쉽지 않았다. 도헌의 말에 로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도헌을 향해 빨갛게 부어 오른 손목을 올려다 보였다. “이게 괜찮아 보이냐? 나쁜 자식 같으니라고…손해배상 청구할 거…” “미안.” “…….” “미안해요, 누나.” “…….” “앞으론…화도 안 내고…누나 아프게도 안 할게요.” “…야.” “방 문 앞에 약 사다 놨어요. 발라요.” 하고 도헌이 다시금 등을 돌렸다. 로라의 마음이 아려왔다. 풀이 죽은 채, 등을 돌리는 도헌을 향해, 이번엔 로라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곤 도헌의 옷깃을 슬며시 쥐었다. “배고픈데.” “……?” “순대 먹자, 우리.” 자신에게서 멀어지려는 도헌에게, 이젠, 이번엔 로라가 먼저 다가섰다. * * *
제 10 장. 낭자, 이름이 무엇이오. (1)
“참으로 어여쁘다.” 다음 날, 채랑이 손수 준비해 놓았던 옷을 곱게 차려입은 채희가 경대 앞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썩 분칠 솜씨가 좋지는 않지만.” “…….” “내가 한 번 해주어 볼게.” 채랑은 자신이 더 들떠, 뽀얀 채희의 얼굴에 분을 톡톡 두드렸다. 채희는 양 볼이 발그레 상기된 채, 낯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샛노란 저고리에, 자줏빛 치마. 고운 색감의 배씨댕기 까지. 한 번도 치장해본 적 없던 채희라, 영 낯설기만 했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다. “와…너무도 곱다. 양귀비가 따로 없어.” “언니두 참…” “이리 꾸며놓고 보니…나와 조금, 다른 것 같기두 하구?” 채랑은 그리 말하며 호호호, 웃었다. 밖에선 좌상과 정경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듣고 있었다. “얘, 채랑아. 들어가도 되겠느냐.” “예? 예, 어머님.” 좌상과 정경이 채랑의 방으로 들었다. 곱게 옷을 입고 한껏 꾸민 채 경대 앞에 앉아 있던 채희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좌상과 정경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쩜…이리도 고울 수가 있느냐.” 좌상과 정경 역시 처음 보는 채희의 어여쁜 모습에 감탄해 마지않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쑥스러운 듯 채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냥 장옷을 뒤집어쓰고 책방만 서둘러 다녀오면 되는데…언니가 이리 아침부터 꾸며 놓아서…” “그래두 이리 입혀 놓으니 참으로 곱지 않아요? 나랑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그렇죠, 어머님 아버님?” “그러게? 우리 채희가 채랑이보다 훨씬 더 어여뻤구나? 하하하!” 모처럼 만에 핀 웃음꽃이었다. 언제나 채희를 산 속 깊은 곳에 홀로 지내게 해두어 마음 편한 날 없던 정경과 좌상이었다. 채희는 곧 고운 비단 장옷을 채랑에게 건네받곤 방을 나섰다. 채랑은 채희가 저잣거리를 다녀올 때까지 이 방에서 꼼짝 않고 자수나 놓고 있겠다 했다. 혹여, 채랑이 방 밖을 나서 돌아다니다 노비들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채랑 아가씨가 둘이라는 소문이 날 게 뻔 하였으니. “그럼…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모처럼, 아니 처음으로. 채희는 장옷을 뒤집어쓰지 않고서 방 밖으로 나섰다. 마루 아래서 채희를 기다리고 있던 휘영은 처음 보는 채희의 어여쁜 모습에, 눈이 동그래져 흠칫 놀랐다. 채희는 그런 휘영의 놀라는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많이 어색한가.” “…아, 아닙니다, 아가씨.” 꼭,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 했다. 휘영은 괜히 자기가 쑥스러워져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한 손에 비단 장옷을 꼭 쥔 채, 사뿐사뿐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서는 채희. 그리고 마당에서 옹기종기 비질을 하고 있던 노비들은 채희의 모습에 저들끼리 모여 숙덕댔다. “채랑 아가씨, 간밤에 좋은 꿈이라도 꾸었나 보오.” “그러게. 안색이 훨씬 더 좋아지셨다?” “오랜 벗이라는 그 무녀가 와서 그런가?” “아, 어제 그 허름한 차림의 여인이 무녀인가?” “그런 소문이 있던데. 확실치는 않어. 무녀란 말도 있고, 오랜 벗이란 말도 있고.” 채희의 정체를 두고 노비들은 왈가왈부하다, 이내 꾸민 채희의 모습이 너무 곱다며, 채랑 아가씨가 혼례를 치룰 때가 다되어 미모에 물이 오른 것이라 저들끼리 감탄했다. * * * “내 모습이…언니와 흡사하지 않은가…?” 채희는 연신 길을 지나며 자신을 보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고개를 푹 숙였다. 휘영은 그런 채희의 뒤를 따르다 숙덕대는 사람들을 보곤 옅게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채랑 아가씨와 같사옵니다.” “그런데…어찌 사람들이 저리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보는 것인지.” “이상한 눈초리가 아니라, 아가씨가 고와서 그러는 것일 겁니다.” 휘영의 말에 채희는 걷던 걸음을 멈추곤 휘영을 돌아보았다. 휘영의 곱다는 말에 양 볼이, 그만 발그레해졌다. 채희는 흠흠, 헛기침을 하곤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늘 숨어 지내는 것이 익숙한 터라 사람들의 평범한 시선들도 불편하신가 봅니다.” “…그런 것인가. 그냥 장옷을 뒤집어써야겠다.” 채희는 곧 비단 장옷을 뒤집어썼다. 한결, 편안해졌다. 채희는 처음으로 편안한 걸음걸이로 여유 있게 주위의 풍경들을 둘러보며 저잣거리로 향했다. 언제나 꽁꽁 싸맨 채, 행여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든 채 바삐 걸음을 움직여야만 했다. 이리도 바람도 부드럽고, 햇살도 따사롭고, 꽃 냄새도 향기로운 지 채희는 그간 알지 못했다. “아름다운…봄날이구나.” 채희는 그렇게 읊조리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뒤에서 그런 채희를 바라보던 휘영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평소와 달리 조금 들떠 보이기까지 하는 채희. 그러던 그때, “하하하! 술이라도 한 잔 따르라니까!” “이거 놓아주셔요!” “어허! 어느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야” 웬 으리으리한 기방 앞에서 삿갓을 비뚤어지게 쓴 도령이 가채를 높게 올린 기생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끌고 있었다. 채희는 걷던 걸음을 멈추곤 둘의 실랑이를 바라보았다. “보는 눈이 많사옵니다. 도련님. 제발, 제발 놓아주셔요.” “네깟 년이 술을 따르라면 따를 것이지! 웬 말이 많아!” “그러니 안으로 드시라니까 왜 쇤네의 손을 잡아끌고 나오신답니까!” “집으로 가자! 내 오늘 네 년이 말만 잘 들으면 내 첩이라도 삼아 줄 터이니, 하하하!” 그러곤 재미있다는 듯, 삿갓을 비뚤어지게 쓴 도령 무리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곧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도령의 손에 질질 이끌려 기방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곱게 생긴 기생. 채희는 장옷을 꾹 쥔 채, 저벅저벅 그들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그런 채희의 앞을 휘영이 가로막고 섰다. “그냥 모른 체 하고 가시지요, 아가씨.” “비켜라.” “그러다 곤혹이라도 치루시면…” “치러도 내가 치른다. 너에게도, 그리고 언니에게도, 아버님에게도 누가 될 행동은 하지 않을 터이니 비켜라.” “하지만. 채랑 아가씨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겁니다. 차라리 관아에 가서 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런 무례한 짓거리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버님께 누가 되는 행동이다. 비키라 하지 않았느냐.” 그때, 그런 휘영과 채희 뒤로 우의정 장자인 민혁과 부인, 유정이 지나다 이내 걸음을 멈추곤 채희와 휘영을 바라보았다. 일전의 면이 있던 휘영을 유정은 빤히 바라보곤 이내 장옷을 뒤집어 쓴 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민혁 역시, 유정을 따라 민혁과 채희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관아에 간들 달라질 것이 무엇 있느냐.” “…….” “관아에서 저 도령에게 곤장이라도 칠 것이냐?” 당돌한 채희의 말에 유정은 눈이 동그래져 채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민혁 역시 그런 채희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가재는 게 편이라, 저 여인을 지켜줄 이는 관아엔 없다. 그러니 비키거라.” 하고 채희는 휘적휘적 휘영을 지나쳐 무례하게 기생을 질질 끌고 가는 도령 앞에 우두커니 섰다. 도령의 가까이에 가니 술내가 진동을 했다. 채희는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미 창피함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기생은 갑작스런 채희의 등장에 흠칫 놀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손 놓아주시지요.” 채희는 장옷을 뒤집어쓴 채, 도령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술이 거나하게 취한 도령은 피식, 웃으며 채희를 한 손으로 거뜬히 밀어재꼈다. “상관할 바 아니잖아? 비켜!” 두어 걸음 물러난 채희는 다시금 도령 앞에 멈추어 서서는 도령과 그의 무리들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런 당돌한 채희의 모습에 유정은 눈이 동그래져 고개를 갸우뚱했다. “좌상대감 여식 채랑 규수가 아니더냐?” “……” “일전에 보았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듯한데.” 늘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조곤조곤 말하던 얌전한 채랑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채희의 모습에 유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옆에서 그런 채희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민혁은, 낯익은 목소리에, 그리고 장옷 새로 보이는 낯익은 모습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 했다. “어…혹시…그때…?” 채희는 뒤집어썼던 장옷을 벗으며 무례하게 구는 도령들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채희의 얼굴을 보곤 흠칫 했다. “좌상댁…채랑…아가씨 아닌가?” “그러한 듯한데.” 기생은 좌상댁의 채랑 아가씨라며 수군대는 무리들의 말을 듣곤 눈물을 훔치며 채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같은 여자가 보아도 한 눈에 반할만한 아름다운 외모였다. “그 손. 놓아 주시라 했습니다.” “아가씨가 참견할 일이 아니오. 가던 길이나 가시오!” 이번에도 채희를 손으로 밀치려 그 도령이 오른 손을 뻗었는데, 채희는 그 손을 잡아 채 아프게 홱, 꺾었다. “아! 아아! 아아아!” “놓으라, 했습니다.” 화가 많이 난 듯, 채희는 그 말을 딱딱하게 내뱉으며 술에 취한 도령의 오른 손을 아프게 꺾었다. 그러자 도령은 팔짝팔짝 뛰며 기생을 쥐었던 손을 잽싸게 놓곤 채희에게 놓아 달라 사정했다. “이거, 이거 놓아 주시지요! 놓았소! 놓았소!” 기생의 손을 놓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채희는 꺾었던 도령의 손을 놓았다. 당돌한 채희의 행동에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기생은 물론이거니와, 그걸 바라보고 서 있던 유정은 물론, 옆에 있던 민혁까지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이내 민혁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코끝을 매만졌다. 유정은 그런 채희의 행동에 입을 떡하니 벌린 채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어디 반가의 규수가 사내의 손을 저리 함부로 꺾어. 채랑 규수에게 저런 면이 다 있었나 봅니다.” “왜요, 어머님. 씩씩하고 정의로운 모습이 보기 좋은데요.” “아드님! 그런 말은 함부로 마세요! 이 어미는 보기만 해도 무섭습니다.” 하며 유정은 이마를 짚으며 슬쩍 민혁의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어찌! 이런단 말이오!” 아직 통증이 가시지 않은 도령은 채희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채희는 피식, 차갑게 미소 짓더니 이내 기생의 빨갛게 부운 손목을 쥐어 도령 앞에 보여 주었다. “그러는 도련님은 어찌, 연약한 여인네에게 이러신단 말입니까?” “흠…흠흠! 그것은 내 술이라도 한 잔!” “술을 기방에서 드실 것이지 어찌 기방에 있는 여인을 무례하게 잡아끌고 나와 이런 행패를 부리신단 말입니까?” “행, 행패…? 행패라니?!” “학문을 배우고 행하시는 공자님들이 이런 추악스런 행동을 하는 것이 행패지, 행패가 달리 행패겠습니까.” “…뭐?” “더는 부친의 존함에 누를 끼치지 말고 공자님답게 행동들 하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채희는 생긋,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이리도 고운 여인이 이리도 고운 미소를 지으니, 도령들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흠, 흠 마른기침만 내뱉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하나같이 옳은 말이었기에 채희에게 더 말대꾸도 못한 채, 서로 눈치만 보던 도령들은 이내 헐레벌떡 도망치듯 사라졌다. 채희는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치는 도령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괜찮습니까?” “괜, 괜찮습니다, 저는.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기생은 채희에게 고개를 푹 숙여 보이며 수치의 눈물을 닦았다. 그러자 채희는 자신의 소매 폭에 넣어 두었던 손수건을 꺼내 채희에게 건넸다. “은혜는 무슨. 괜찮다면 되었습니다. 창피해서라도 앞으론 그대를 저들이 찾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세요.” 하며 채희는 미련도 두지 않고 휙, 돌아섰다. 휘영은 그런 채희의 뒤를 따랐다. 기생은 시원스레 돌아서는 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채희를 황급히 불렀다. “아가씨! 아가씨!” “……?” “이 수건은…” “가지세요. 나보단” “…….” “그대가 더 필요할 것 같으니.” “…….” “저깟 놈들 때문에 눈물 보이지 마세요. 고운 얼굴 버립니다.” 하고 채희는 뒤돌아서서 갔다. 여인이었지만 참으로 멋있단, 생각이 들었다. 기생은 한참을 채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채희를 바라보고 있던 민혁은 서둘러 채희를 뒤따랐다. “아드님! 아드님 어딜 가십니까!” “어머님, 잠시만요! 잠시만 지체하겠습니다!” 채희는 다시금 장옷을 뒤집어쓴 채 책방으로 향하려 모퉁이를 돌았는데, 어디선가 급히 나타난 민혁이 그런 채희의 팔을 쥐었다. “……?” 자신의 팔을 갑작스레 쥐는 민혁에 채희는 화들짝 놀라며 장옷을 떨어뜨려 버렸다. 채랑과 꼭 닮은 얼굴. 하지만 어딘가 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일전에 채랑과 대화를 나누어 본 적 있는 민혁은 채랑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채랑은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 채희는 경계의 눈초리로 민혁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가까이에서 본, 채랑의 아니 채희의 얼굴은 참으로 고왔다. 민혁은 가만히 채희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섰다. 그때, 휘영이 황급히 채희의 앞을 가로막고 서며 민혁을 제지했다. “무례하십니다.” 채희는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민혁을 덩달아 빤히 바라보다 이내 서둘러 떨어뜨린 장옷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는데, “낭자.” “…….” “우리…안면…있지 않소?” “……?” 채희는 안면이 있지 않냔 민혁의 말에 다시금 민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는데. “그저 지나치는 바람이라 여겨, 내 다시 낭자를 마주한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 “그것이 한낱 지나치는 바람이 아니었나봅니다. 이리 다시 만나, 한 눈에 알아보는 것이.” “……!” 채희는 민혁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장옷을 황급히 주어 뒤집어썼다. 심장이 쿵쾅 거렸다. 혹여 자신의 정체가 노출된 것은 아닐까 채희는 장옷을 뒤집어 쓰고도 모자라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모, 모릅니다, 나는.” 하고서 황급히 자리를 뜨려는데, “낭자. 이름이 무엇이오.” 어찌…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고서…, 저잣거리의 아니 한양 사람이라면 채랑의 얼굴을 모를 이 없을 텐데…어찌, 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고서 이름을 묻는 것인지. 채희는 순간 숨이 멎을 듯 했다. * * *
제8장. 불량세자 수안과, 꽃 도령 민혁(2)
채희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칼, 꿈속에서 보았던 그 금빛용이 그려져 있던 검. 순간 채희는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수차례 꿈속에서 자신을 내려쳤던 그 검이, 지금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까닭에 금방이라도 이 검이 자신의 가슴을 베고 스칠 것 같단 생각에 숨통이 죄어 오는 듯했다. “흐읍….” “정체를 밝혀라!” 채희가 겁에 질려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하고 가쁜 숨만 내뱉으며 벌벌 떨었다. 그리고 그때, 그런 사내 뒤로 휘적휘적 걸어 나오는 한 도령. “놔두거라.” “…하지만.” 부채를 활짝 펴, 얼굴을 가린 채 채희 앞에 우뚝 선 도령. 채희는 장옷을 꾹 쥔 채 갑작스레 등장한 도령을 올려다보았다. 훤칠한 키에 고운 비단 도포를 입은, 코와 입을 가린 채였지만 한 눈에 봐도 수려한 외모가 돋보이는 듯한, 사대부가의 자제인 듯 했다. 채희는 마른 침을 삼키며 붉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안하오. 내 잠시 그쪽에게 볼일이 있어.”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사내에게 볼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뒤를 따르게 된 채희였기에 채희는 정중히 도령의 호위무사 쯤으로 되어 보이는 사내에게 미안하다, 말을 건넸다. 그런데, “허허허허.” “……?” “그리 미안할 것은 없소. 한 두 번 겪는 일은 아니니.” 왜 그 옆의 도령이 대신 채희의 말에 대꾸를 하는 것인지, 채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도령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도령은 펼쳤던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더니 이내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채희를 응시했다. 억, 소리 나게 경탄스런 미공자였다. 뽀얀 피부며, 날카로운 턱선, 매섭지만 길고 시원스레 뻗은 눈. 게다가 사내인대도 풍성한 속눈썹까지. 사내이지만 요염한 색까지 지닌 듯 했다. 채희는 가만히 도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도 저자에 내 외모를 두고 옥골선풍이라 칭하여 반가의 규수들이 그저 내게 말이라도 한 번 붙여볼까, 이리 졸졸 따라오는 것이.” “…….” “어디 어제 오늘 일이더냐.” 도령의 말에 채희는 꿀 먹은 벙어리 마냥 가만히 도령을 바라보았다. 자아도취 해, 자기 칭찬도 마다않고 하는 도령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러자 도령은 가만히 채희를 바라보더니 이내 그 차가운 미소마저 거둔, 싸늘한 얼굴로 채희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디서, 누구에게서 그런 소문을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 “내 성격은 불량스럽다,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한단, 그런 소문은 듣지 못하였소?” “네?” 채희는 갑작스런 도령의 질문에 흠칫 놀라며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은 놀란 기색의 채희를 바라보던 도령은 피식, 차가운 그러나 속된 말로 ‘네 가지’없는 실소를 흘렸다. 채희의 기분이 조금, 언짢아졌다. “뭐 나와 어찌 해보려 내 뒤를 밟은 것이면. 헛짓을 한 것이지.” “헛…짓.” “그리고 대부분 그런 것들을 헛수작이라고들 하지.” “…….” “그래보았자 내 눈엔 다…돌덩이에 불과하거늘.” 그 말에 채희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피식,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풉….” “……?” “그러하군요. 예. 자기도취하실 만한 인물이십니다.” “뭐…라?” “그런데 송구하게도 제가 볼일이 있어 따라온 것은 도령이 아니라 이쪽 무사인데. 어쩌지요.” 채희는 딱딱한 어투로 그리 말하며 용의 검을 지닌 무사를 바라보았다. 도령은 뜻밖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한 듯, 물끄러미 채희만 바라보고 섰다. 그때, 저 멀리서 휘영이 번개처럼 날아와 채희를 겨누고 있던 칼을 매섭게 처냈다. 덕분에 용의 검은 저 멀리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감히 뉘 안전이라고!”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아가씨란 말에 도령은 채희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허름한 무명 치마저고리에, 다 낡은 장옷을 뒤집어쓴 여인이, 이런 호위무사의 호위를 받을 만한 반가의 규수라니. 도령은 채희를 위아래 훑었다. 그런 도령의 시선을 느낀 채희는 더더욱 장옷을 여미며 무사와 도령을 바라보았다. “되었다, 휘영아. 미안하게 되었소. 내 경솔한 행동거지에 일이 시끄럽게 되었습니다.” “…….” “내 이 무사가 든 검이 낯이 익어, 출처를 묻고자 이리 뒤를 쫓게 되었습니다. 무례하였다면 사과하겠소이다.” 한없이 차갑고 딱딱한 어투였다. 다정함이라곤 티끌도 찾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도령은 정말 채희가 자신에게 말을 붙이고자 뒤쫓아 왔음이 아니란 것을 알고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다시금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무, 무…례까지야. 흠, 흠.” “그런데. 무례는 그쪽 도련님도 만만찮으신 것 같은데.” “무엇…이라?” 한 ‘네가지’없기로 소문난 도령이었다면 채희 역시 소문만 나지 않았다 뿐이지 만만찮은 성깔을 지닌 인물이었으니. 채희는 지지 않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도령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미색이 뛰어난 것은 알겠사오나.” “…….” “그렇다고…아무 여인네에게나…그리 오해를 하시고…섣불리 언행을 행하신다니요.” “…….” “그런 소문은 내 듣지 못했으나, 소문이 틀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미색은 뛰어나나 성격이 불량스럽다.” “뭐라?!” “도련님의 미색만 보고 뒤쫓은 여인네들의 행실이 참으로 헛수고이겠습니다. 한양의 규수들은 사내보는 눈이 그리 없다니, 자처해서 돌덩이들이 된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군요.” “……?” “그럼, 이만. 가자, 휘영아.” “예. 아가씨.” “저…저!” 그러곤 도령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보이곤 여지도 두지 않고 홱, 돌아서서 가버리는 채희였다. “저렇게…보내도…되겠습니까, 저하. 저하를 헤아려는 무리에서 보낸 자일 수도 있습니다.” 도령은, 아니 세자 ‘수안’은 민망함에 얼굴마저 발그레 해진 채, 멀어져가는 채희의 뒷모습을 보았다. “허참! 어느 댁 규수이기에…나를 보고도 저리 쌀쌀맞게 구는 것일까.” “…….” “나를 노린 것이 아니고 참으로 너의 검 때문에 뒤를 따른 것 같으니. 그냥 두어도 되지 싶다만 이것 참…웃을 수도…울 수도 없는 상황이구나.” 그리고 그런 모퉁이에서 세자 ‘수안’과 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다른 도령은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는 채희를 말없이 응시했다. 곁눈도 주지 않고 곧장 앞만 보고 걷는 채희. 그런 채희를 바라며 또 다른 도령은 자신의 옷깃을 만지작였다. 여전히 자신의 옷깃에서 채희의 온기가 묻어 있는 듯했다. “저…” 무슨 말이라도 걸어보려 했지만 너무도 재빠르게 지나치는 탓에 도령은 채희를 미처 잡지 못했다. 도령은 가만히 멀어지는 채희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좀 전의 상황을 다시금 상기하며 도령은 팔짱을 꼈다. ‘정말…꿈이 아니었던 것일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웬 여인이 자신의 도포자락을 쥐었다. 도령, 민혁은 화들짝 놀라며 옆을 바라보았는데 웬 허름한 차림의 여인이 자신의 도포자락을 쥐고 있었다. 민혁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여인의 손을 빼내기 위해 팔을 올렸는데, 하도 도포를 당기는 힘이 세, 민혁은 이리저리 여인에게 끌려 다니고 말았다. ‘보통 무사들이 쓰는 검은 아닌 듯 보였다. 몇 번이고…내 꿈에 나와 나를 베는 것이…우연한 꿈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 ‘어찌…이리도 똑같은 검이 나타날 수가…’ 여인이 왜 검에 관심을 가지나, 민혁은 까치발을 들고 서서는 이리저리 살피는 여인을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그리 보고 있는 것인지…. “…….” 민혁은 가만히 장옷 사이로 보이는 여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장옷에 절반 넘게 가려져 그 얼굴이 확실히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언뜻언뜻 보이는 여인의 외모는 보통 미모는 아닌 듯하였다. 봉긋 솟은 이마와 오똑선 콧날, 그리고 굳게 다문 앵두 같은 입술이 장옷에 채 가려지지 않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민혁은 넋을 놓고 여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 나 잠시만, 저 검을 어디서 구했는 지 만 물어보고 올게!’ 그러더니 곧, 여인은 자신의 도포자락을 휙 놓더니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민혁은 바람처럼 자신에게 나타나,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그 여인이 못내 궁금했다. 누구와 착각을 해, 자신을 이리 끌고 온 것인지, 정신을 놓을 만한 해이한 여인은 아닌 듯 했는데. 민혁은 몇 번이고 머뭇거리다 이내 자신도 모르게…여인이 사라진 곳으로 따라가고 말았다. 그런데 그 곳엔! “하…” 세자 수안과 그 여인이 맞닥뜨리고 있었다! 민혁은 흠칫 놀라며 수안의 호위무사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 그 여인을 곤경에서 도와주기 위해 한 걸음 내딛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그 여인의 호위 무사쯤으로 보이는 사내가 나타나 여인을 감쌌다. 도대체…정체가 무엇일까, 민혁은 허름한 차림이었지만 목소리에서나 자태에서나 뿜어져 나오는 당당한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느꼈다. “그런데. 무례는 그쪽 도련님도 만만찮으신 것 같은데.” 한 성질 한다는 세자에게도 지지 않고 할 말을 다 내뱉고서야 돌아서는 여인의 모습에, 괜히 민혁은 피식 웃음이 났다. 세자에게 한바탕 면을 주고 매몰차게 돌아서서 지나치는 여인이 연신 궁금한 민혁이었다. 달려가 여인을 붙잡고 이름이나 물어볼까 했지만, “…어, 민혁.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수안이 어느덧 민혁 곁에 와 섰다. 민혁은 멀어져가는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수안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잠깐 길을 잃어서…그러는 저하께선 잠행 중이십니까.” “나야 뭐, 늘 그런 것 아니겠나. 그런데 길을…잃어?” 수안과 민혁은 어릴 때부터 절친하던 벗이었다. 동갑내기이자 함께 무예와 도술, 그리고 학문을 익히며 자라온 학술의 동반자이기도 했다. 수안도 수안이었지만 민혁 역시 수려하고 훤칠한 풍채였기에 도성의 반가 규수들은 죄다 수안과 민혁의 얼굴 한 번 보고자 줄을 섰더랬다. 민혁의 가문 역시, 세자에 견줄 것은 못되었지만 그 기상은 대단하였다. 민혁의 친부는 한양 최고 실세인 우의정이었고 그의 누이는 세자빈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최고의 가문이었기에. 두 도령이 나란히 서서 한양을 걷는 날엔, 혼기 찬 규수들은 물론이거니와 규수들을 모시는 여종들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둘의 자태를 감상하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안은 길을 잃었단 민혁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곤 민혁의 눈길이 머무는 곳을 바라보았다. “네.” “……?” “무언가에 홀린 듯, 예까지 왔습니다.” “…홀리다니? 자네가 무엇에 홀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것이 꼭 바람과도 같이 나타났다 사라졌기에.” “…….” “온기조차 남지 않았는데.” “…….” “마음 한편이 연신 울렁입니다.” “허허, 자네. 연심을 품은 여인네라도 있는 것인가?” 연심이란 세자의 말에 민혁은 피식 웃으며 고갤 절레절레 저었다. “연심이라뇨. 한양에서 눈 높기로 소문난 제가 연심은…가당치 않습니다.” “그러니 하는 말 아닌가. 마음 한편인 연신 울렁이고, 홀리듯 예까지 당도했다는 것이 꼭 연심을 품은 여인네 뒤를 쫓다 길을 잃은 모습과 다를 것 없지 않은가.” 세자의 말에 민혁은 어느덧 흔적조차 없어진 채희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봄 날에, 스쳐지나간 바람이라 일러두지요. 훗, 다시 내 곁을 스친다 해도 알아보지도 못할 바람이니.” * * *
새마음 요양원 14[제목없음 14]
안녕하세요 빙글러님들. 드디어 14편을 올리네요. ㅎㅎ 다들 제가 미리 글을 쓰시는 줄 알겠지만 전 구성되어있는 커다란 틀만 있을뿐 그때마다 쓰는 글은 그날 떠오르는 내용을 토대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허.... 그래서 여러분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갈수가 있을거에여. ㅎㅎㅎㅎ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현재 뚱고레 치료와 저의 치료를 위해 매우 애쓰고있어서 틈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성실하게 연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글의 썸네일 이미지 하나 넣어야할거같은데....뭐가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이전편 주소 [새마음 요양원 13편 ] https://www.vingle.net/posts/2675909 @ofmonsters @gloomnfancy @goodmorningman @uruniverse 기....기억나는 분들만 일단...;;; ========================================================== 새마음요양원 14 “ “ 아….아니……. 그게 무슨소리야......... 우리집 옆집…….. 빈집이야….. “ 수화기 너머로 확신에 찬 그에 물음에 지현은 적잖게 당황스러웠다. 지현의 옆집은 이사를 떠난지 불과 2주일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옆집 여자는 지현의 회사와 근처에 근무하던 사람이었는데 가끔 지하철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가끔 고민이 되서 눈이 마주치면 가벼운 목례정도만 하던 어색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퇴사를 하게 되서 이제 지방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며 이사짐을 정리하던 도중 지현과 몇번 인사를 나눈 것이 다였다. 흔한 친구조차 집에 들이는 법이 없어보이던 그녀가 이사를 떠났는데 그 빈집에 누가 왔다갔다 한다는 것일까. “ 너 자세하게 알아본거 맞아? 거기 정말 빈집이야. “ “ 야 진짜야? 헐,,,, 대박이네. 그럼 빈집까지 와서 몰래 머물다가 너네집 뒤지고 갔다 그런소리인가 ? “ “ …. 하 미치겠네 “ 지현은 답답하고 초조한 마음에 애꿎은 담배만 질겅질겅 씹어댔다. “ 백지현 너 한일기업 취재 시작한거 언제였지? “ “ 내가 시작한거 ? “ “ 어 제보자 메일받고 진짜 취재시작한거 언제부터 였냐고 “ “ 음…. 한 10일전이지 아마 ? “ “ … 내 예상이 맞다면 그 제보자가 메일 간거부터 이미 너의 정체가 밝혀진거고 감시당하고 있었던거같아 . “ “ 뭐 ??? “ “ 아무래도 그 제보자를 이미 감시하고있었을지도 몰라. 내가 알아본거는 일단 너네집 뒤지기 전까지만 cctv를 확인한 상태라 그전까지 한번 뒤져봐야 할거같다. “ “ …. 하 나 살아있을수있을까? “ “ 기사는 결국 내가 썼으니 니가 죽겠냐. 내가 죽지 “ “ 불길한 소리좀 하지마 미친놈아 “ “ 쫄기는. 일단 내가 더 알아볼 테니까 너 몸조심하고. 제주도에서도 조심해. 거기 첩자 없으리란 법 있냐 . “ “ 니걱정이나 해라. 난 지금 여기 취재도 머리아프다 “ “ 혹시 물어볼거 있음 전화하고. 물어볼거 없어도 좀 전화해. 살아있는지 확인은 해야할거아냐. “ “ 알았다. 너도 일단 몸조심해 “ 한숨이 나오는 대화를 끝으로 지현은 뒷목이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어째 그 한일 기업을 취재하기 시작한날부터 본인의 인생이 무지하게 꼬여가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현이 알지도 못하는 순간부터 감시를 받고있었던 거라면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 집에 돌아갈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 지현씨. 여기서 뭐해요. 한참 찾았잖아요 . 얼른 가요 !! “ 멍하게 필터까지 타고있는 담배를 쥐고있는 지현에게 영민이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예상하지못한 영민의 등장에 지현은 적잖게 놀랐지만 일단 해야할 일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미안해요. 친구랑 전화좀 하느라고 . “ “ 그런거 같았어요. 그런데 지현씨 핸드폰이 두개에요 ? “ “ 아… 친구가 걱정된다고 폰 하나를 줬거든요. “ “ 기자님들이 취재용 핸드폰 별도사용하는 경우는 봤는데 이건… 대포폰 같은데 … 아니에요? “ “ 아.. 아니에요 . 그냥 굴러다니던 폰이래요 “ “ 그렇구나…. 일단 취재 하러 가시죠. “ “ 네. 얼른 갑시다 “ . . . . . 다행히 바깥의 날씨는 언제 비가왔냐는 듯 맑고 깨끗하게 개어있었다. 영민의 차에는 어제의 비냄새가 빠지지않은 상태였는데 밖은 야속하게도 햇빛이 뜨거워 썬팅된 차문을 좀 닫아야했다. “ 토스트랑 커피좀 드세요. 잠도 좀 깨시고 허기도 채우셔야죠. 진짜 피곤하실텐데 “ “ 아 먼저 먹어도 될까요? 배가 고파서… “ “ 드세요. 전 이미 먹고 나왔어요. 커피는 저희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직접 볶은 핸드드립 커피에요. 아마 맛은 몰라도 향은 기가막힐 겁니다. “ 보온병에 들어있는 드립커피를 컵에 살짝 따라 향을 맡으니 핸드드립 답게 구수하고 풍미 진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맛을 보니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었다. 어차피 아메리카노만 주구장창 마시는 편이 아닌 지현에게는 핸드드립도 다 비슷한 맛 같았기에 그냥 잠깨는 물처럼 들이킬 뿐이었다. 요즘 게스트 하우스를 하려면 진짜 별거 다해야겠구나.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현은 밀려오는 허기에 계란이 듬뿍 들어있는 토스트를 한입 베어물었다. ‘일하기 딱 좋은 날씨네. ‘ 탄수화물이 위장을 자극하니 몸이 따뜻해졌다. 어제 비를 너무 많이 맞아 지현도 몸상태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는데 따뜻한 음식을 먹고나니 그나마 온기가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창밖에 비춰진 본인의 모습에 지현은 많은 생각에 잠겼다. 꿈에 나타난 수정이 너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뜨거운 피를 흘리며 고통에 눈을 감았을 수정. 정말 수정은 그렇게 죽은것일까? 아니면 힌트를 주기 위해 나타난 것일까. 알수없는 질문의 대답에 지현은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눈을 붙이고 일어나보니 벌써 도착해있었다 다급하게 시계를 보니 길을 나선지 벌써 2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고, 운전석에 있어야할 영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살짝 띵하게 올라오는 두통에 지현은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일단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들어 영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 어디가신거지 ‘ 차에서 내려 가볍게 기지개를 편 지현이 영민을 찾으러 길을 나설 채비를 했다. “ 어디보자. 녹음기는 주머니에 있고 카메라를………….. 카메라…. 카메라 어딨지 “ 조수석과 운전석 뒷좌석까지 뒤져보았지만 카메라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 영민씨가 들고간건가 ‘ 아무래도 지현이 잠들자 영민이 먼저 길을 나선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 지현은 차문을 닫고 길을 나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으로 영민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지현은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 먼저 새마음 요양원 근처로 길을 잡았다. ‘아마 거기서 만나던 못만나면 전화가 오겠지.’ 확실히 비가 그친 다음날이라 그런지 풀이 무성하게 올라온 기분이었다. 풀에 맺혀진 물방울이 지현의 바지와 발목을 적셔 축축함이 올라왔다. 어제 분명 길을 내고 갔다고 생각했는데 비가 와서 그 길은 다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몇분동안 길을 헤매는 기분이 들었으나 다행히 저멀리 우중충한 건물의 실루엣이 보였다. 맑은 날씨에 봐도 건물은 조금 음침했다. 워낙 넓고 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폐건물이 주는 위압감고 중압감이 지현을 짓눌렀다. 일단은 핸드폰으로 요양원 외관의 사진을 찍었다. 외관의 전경과 건물 층마다 비춰지는 모습. 창문들 외관 장식들을 줌을 당겨 사진을 찍었다. 오래된 폐건물의 창문은 깨지거나 사람들의 낙서로 가득했다. 줌을 당겨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확실히 스마트폰의 클로즈업은 이미지가 깨지는 것을 막을순 없는 모양이었다. ‘ 에잇. 똥폰 사진 겁나 깨지네 ‘ 애꿎은 스마트폰에게 화풀이를 하던 지현이 1층부터 줌을 당겨서 사진을 올려 찍는데 문득 5층까지 다다르자 창문에 무언가 지나가는 느낌이 들어 깜짝 놀랐다. 시력이 좋지 못한 지현이었기에 1층부터 5층까지 손가락으로 세어 올려다보자 지나갔다고 생각한 그곳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기분탓인가 ‘ 다시 5층의 사진을 찍으려 핸드폰을 들어올리자 그곳에는 아까 보이지않았던 희미한 그림자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또다시 깜짝놀라 지현이 다시 손가락으로 5층을 세어 창문을 살폈지만 또 아무것도 없었다.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다시 용기를 내어 스마트폰을 들어올려 사진을 찍으려 하자 아까보다 좀 더 선명하게 5층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지도 않았지만 여자인 것 처럼 보였다. ‘ 이건 꿈일거야. 정신차려야해 백지현. 눈 한번 깜빡하고 뜨면 저거 없어질거야 . ' 지현이 떨려오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한채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5초를 세고 눈을 뜬다면 저 흐리멍텅한 건 없어져 있을거야. 지현은 숨을 한번 크게 쉬고 손가락 다섯개를 펴고 5초를 세었다. 5 4 3 2 1 눈을 뜨고 요양원 외관을 다시 살피니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카메라 어플을 실행시키고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줌을 당겨 사진에 초점을 맞추려 화면을 터치하자 분명하게 들어온 5층의 그것. 눈코입이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온몸에 피 칠갑이 되어 멀리서는 눈코입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떨리는 손을 화면을 다시 들여다보자 분명하게 알수 있었다. 창문곁에 서 있는 그것의 정체는 …… 수정이였다.
Chapter 55. 당분간 너, 내 ‘자기’ 해라.
“남자…친구요?” 수정의 질문에 로라는 머뭇, 거렸다. 머뭇거리는 로라의 모습을 수정은 의아스럽게 바라보았다. “있…어요.” 그 말을 하는데 로라의 심장이 찌릿, 했다. 수정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이 여자…무엇을 알고 날 찾아온 걸까?’ “다짜고짜…이렇게 찾아와서…상담을 나누기엔…” “…네?” “우리 둘 사이가…그리 가까운 건 아니라…많이 망설였어요.” “…….” “그런데…도저히, 말을 할 곳이 없어서.” 수정은 자신 없다는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여전히 긴장한 채, 로라는 수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 듯하였다. 꼭, 유부남 꼬시다 걸린 불륜 녀가 된 심정이었다. “그래도 앞에서 눈물 한 번 보였다고.” “…….” “두 번은…쉬울 거란 생각에.” 수정은 들었던 고개를 들어 로라를 올려다보았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였다. 로라는 당황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리…무례함을 범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니…저…저기.” “남자…친구가…” “…….” “양다리인 것 같아요….” “예, 예?!” “저는…이제 어떡하죠? 흐윽…” 수정의 말에 로라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인 즉슨, 그 양다리의 상대가 ‘로라’인 것은 수정이 아직은 모른다는 것!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틀어막고서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는 로라였다. 수정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가녀린 어깨를 들썩였다. “그…그게…무, 무슨…” “많이…놀라셨죠…, 저도 너무 놀라, 처음엔 믿을 수 없었어요.” “저…그러니까 그게….” “실은 제 남자 친구가…” “네?” “여기 바로 옆…동물 병원…” “……!” “원장…선생님이거든요….” “아…!” 쾅, 쾅, 쾅! 로라의 귓가에 판사봉이 쾅, 쾅, 쾅 크게 내려쳤다. 그랬다, 이로써…맞을까, 아닐까 미련과 의심, 희망과 고문 사이에서의 기나긴 밀당은 끝이 나버렸다! * * * 기태는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고 운전석에 기대었다. 머리는 더욱 지끈거려다. 두통약을 먹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어, 벌써 세 알 째 흡입 중이었다. 병원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주차장에 한 시간 째 버티고 있던 기태. 곧 기태는 차에서 내리기 위해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떠, 정면을 바라보았는데. “……?!” 수정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또 무슨 일로…, 기태는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리기 위해 문고리를 쥐었던 손을, 놓아버렸다. - RRRRRRR 아버지, 새 어머니, 번갈아 가며 휴대폰에 불을 내고 있었다. 기태는 성가시다는 듯, 전원 버튼을 눌러 휴대폰을 끄고 말았다. 자신의 숨통을 조여 오는 통에, 기태는 이제 숨마저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기태는 습관처럼 로라를 찾았다. 두 눈을 감아도, 선명히 떠오르는 로라의 얼굴. 밝고, 활기찬 그녀를 떠올리면 기태의 갑갑해져 오던 숨통이 조금은 트이는 듯 했다. “로라씨….” 기태는 로라의 이름을 기침처럼 내뱉으며, 시동을 걸었다. 로라에게 가기 위해서, 아니…자신이 살기 위해서. * * * “어디 갔데?!” 도헌은 일찍 볼 일을 보고 병실로 돌아왔는데 로라는 없고, 덩그러니 침대 위에 메모지 하나만 놓여 있었다. -구도발. 이 몸은 워커홀릭이라, 도저히 못 쉬고 워커 하러 간닷! 술 마시러 간 거 아니니까, 늦게 들어와도 의심하기 없기. 너 오늘 피곤하면 집 가서 자도 됨. ㅃㅃ “뭐야…이제 와서 워커홀릭인 척 하기는.” 도헌은 어깨를 으쓱하며, 사 온 아이스커피를 내려놓았다. 가게에 간 거겠지, 도헌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2시. 밥은 먹었으려나…, 의사 선생님이 무리하지 마라고 했는데. 도헌은 손목시계를 한참 내려다보다, 이내 로라의 가게로 가기 위해 다시금 커피를 쥐었다. 그때, - RRRRRRR “어….” 집이었다. 집에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도헌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선뜻 전화를 받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전화가 곧, 끊겼고 10초 정도 후에, 다시금 걸려왔다. 집이었다. 더는…, 피할 길이 없다고 도헌은 판단하였다. “여보세요.” “한국이지, 너? 당장 집으로 와라.” “엄…마.” “엄마고, 아빠고, 부를 것 없어. 당장 와.” “…오늘은 못가요.” “내가 그리로 찾아갈까?!” “내일…갈게요. 죄송합니다.” 하고 도헌은 전화를 끊었다. 분명, 지혜의 짓일 테였다. 도헌은 한숨을 내쉬며, 이젠 자신의 전화번호 목록부에선 지워지고 없는 그녀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여보세요.” “한지혜.” “어머님 전화…받았니?” “…뭐하는 짓이냐?” 역시, 그녀의 짓이었다. 마치 도헌이 전화가 걸려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지혜는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도헌은 밀려오는 분노감에, 당장이라도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뭐라고…지껄였냐, 너.” “어머님께 다 말씀 드렸어. 내 잘못도, 너 귀국한 것도.” “근데…우리 엄마가 아직 널 며느리로 생각하고 계시더냐?” “무릎 꿇고 빌었거든. 필요하다면 너에게도 무릎 꿇고 빈다고도 했고.” “필요…하다면? 너 굉장히 골 때리는 애구나? 이 정도였냐?” “만나. 만나서 얘기해. 너 여자랑 동거한다는 얘긴 아직 안했어. 그거까진 못 하겠더라.” “미친….” “뭐라고?” “넌 진짜 미친 애야. 만나긴 뭘 만나. 총 맞았냐, 내가? 밥 맛 떨어지게 너랑 얼굴 마주보고 앉아 있게?” “뭐?” 뭐?, 하는 황당해하는 지혜의 목소리를 끝으로 도헌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앞에 놓인 의자를 쾅, 하고 발로 차 버리곤 병실을 나섰다. * * * “아니…그…건 제가…” “혹시…보신 적 없을까요?” “네…뭐, 옆 집…선, 선생님이라면…왔, 왔다, 갔…갔다.” ‘이건…대체 무슨 상황이야? 내가 여기서 이렇게 모른 척 하고 넘어가버리면 불륜 녀랑 다를 게 뭐야? 나도 피해자라구! 나도 모르고 만난 거라구! 얼른 이 여자에게 모든 상황을 이야기 해야만 해!’ 하고 마음먹었지만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이 여자에게, 로라는 차마 그 말만은 하지 못했다. “혹시 다른 여자랑…같이 있는 건…못…보셨나요?” “…예에?! 아, 저, 저는…그, 글쎄요.” ‘다른 여자 = 오로라’ 로라는 머릿속으로 그 공식을 그리며 난감하다는 듯, 울상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수정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거든요…. 놓치고 싶지 않아요.” “…겨, 결혼이요?!” ‘그래놓고 나한테 결혼 하자고?! 이 새끼가 진짜?!’ 로라는 울컥, 화가 치솟았다. “이해…안 되시겠지만…저, 그 남자 놓치기 싫어요. 나쁜 사람인 거 알고, 지금 다른 여자 생긴 것두 알고…헤어지는 게 맞다는 것도 알지만.” “…….” “마음이 그러질 못해요…, 잠시 그 남자가…방황하는 거라…생각하고 있거든요. 다시…꼭 돌아올 거라 생각해요.” 로라는, 진심어린 그녀의 말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어쩌면 지금의 자신보다 기태를 더욱 사랑하고, 또 기태의 방황에 더욱 마음 아파하고 있는 듯 하여 로라는 불편해져 왔다. “상대방의 그 여자는…남자 친구 분이 여자 친구가 존재한다는 걸…알고…있나요?” 모든 것이 꼭, 드라마 속 같았다. 자신이 철저하게 연기를 하고 있으니, 꼭 짜인 대본을 두고 드라마를 촬영하는 것만 같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 질문을 던지며, 로라는 수정의 표정을 살폈다. 순간, 수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요.” 수정의 말에 로라는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이것이 안도를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안도하고 말았다. “그럼…이제 어쩌실 생각이죠?” 자신도 지금 어찌해야 할지 모르면서. 그 질문이 얼마나 그녀에게 가혹한 것인 지, 알면서도 로라는 물었다. 지금 자신의 남자 친구인 기태의, 퍼스트 여자 친구인 그녀에게. “헤어지진…못해요. 기다릴 거예요.” “…기다리면…돌아는, 간데요 남자 친구 분이?” “네. 그럴 거라고 믿어요, 저는.” “확신…하시는 것 보니, 오래 사귀셨나 봐요.” “2년 조금 넘게요. 결혼은 이번 해에…약속했었어요.” 이것은 상담을 가장한, 뒷조사였다. 현 남친의 양다리에 대한 조사. 로라는 그 질문을 내뱉으며 스스로의 뻔뻔함을 칭찬했다. “그럼 상견례는…다 한…상태겠군요.” “네. 식 날짜만 잡으면 되는 거였는데…그랬는데….” “울지 마시구요. 아마 그 상대방 여자도 몰라서 그럴 거예요.” ‘거짓말. 다 알면서!’ 로라는 자문자답하는 것도 아니고, 입 밖으로는 질문을 내뱉고 대답은 속으로 하고 있었다. 그녀의 진심어린 눈물이, 어쩐지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이렇게 마주보고 있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그래서…제가…고민이에요.” “네?” “이걸…그 여자에게 모두…말을 해야 할지.” ‘헉! 그 여자…가 누군지…설마 알고 지금 날 찾아 온 거 아냐?! 괜히 나한테 차 선생님한테서 떨어져라, 경고라도 하려고?!’ 로라는 속으로 화들짝 놀라며 입을 떡 벌린 채 그녀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 그녀는 로라를 응시하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말을 하면 헤어져 줄까요?” “예, 예?!” ‘헤어져 줄 거예요?’ 하고 자신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로라는 난감하다는 듯 입술만 물었다, 달싹였다, 안절부절이었다. “그 분이 알아서 헤어져주길 바라기엔…그 시간들이 너무도 지옥 같아요.” “그 여자가…누군지…알고는 계신건가요?” “아니요…, 하지만 오빠 휴대폰만 뒤져보면…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 싸이코패스도 아니고 설마 모든 걸 다 알고 와서 지금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연기를 펼치진 않을 것이었다. 수정은 연신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그 여자도 사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조금만 더…기다려 보세요.” “…흐윽…흑.” “그 여자도…아예…모르진 않을 거예요.” 이래놓고, 그 여자가 자신인 걸 이 여자가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큰 상처와 배신감을 얻게 될지, 로라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거렸다. 로라는 주먹을 꾹 쥐곤 수정을 빤히 바라보다,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세컨드 주제에, 퍼스트를 위로하다니. 살다 살다, 돈 주고도 경험 못할 희귀한 경험이구만.’ 로라는 멋쩍게 웃으며 수정을 위로했다. “그 상대방 여자는 더 알려고 하지 마시구요, 그 남자 친구 분…굳게 믿구…기다려보세요.” “네…, 그럴게요. 그래야겠어요.” “그렇게 믿고…계신 남자 친구 분이라면…꼭 돌아갈 겁니다. 그런데요.” 로라는 말리고 싶었다. 자신 역시 지금, 기태의 손아귀에 있는 상태였지만…그녀를, 이토록 마음 여린 수정을 말리고 싶었다. “웬만하면…헤어지는 쪽으로 생각해보세요.” “…예?” “그렇게 썩…좋은 사람 같진 않아요.” “…….” “있죠, 돌아올 사람이었음.” “…….” “애초에 떠나지도 않아요.” “…….” “그런 사람은 돌아와도 돌아온 것이…아닌 거죠.” “…….” “또 언젠간 떠날 거예요. 그리고 습관처럼 다시금…찾을 거예요, 그쪽을.” 이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로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넬 수도, 그리고 그럴 처지도 아니었으면서 로라는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로라의 말에 생각에 잠긴 듯, 수정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제 말…너무 야속하게 듣진 마시구요.” “알아요. 감사해요, 이런 푸념…들어주셔서. 그래도 이렇게 말하고 나니 속이…시원해요.” “…아, 뭘요.” “혹시나 제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랑 있거나…지나가는 걸 보게 되면…” “…예?” “제 번호예요, 이쪽으로 연락 좀…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아, 네….” ‘대체 나는 이 드라마 속에서 세컨드 인거야, 아님 악역인거야, 아님 스파이인거야.’ 로라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자신의 번호가 담긴 쪽지를 건네자, 손을 덜덜 떨며 받았다. “죄송해요, 이런 부탁…드려서.”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때, 누군가가 벌컥 가게문을 열고 들어섰다. 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뒤를 돌아보았다. “오호라! 밥 먹었어?!” 구도발이었다. 수정은 도헌의 등장에, 도헌을 한 번 로라를 한 번 바라보더니 황급히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남자…친구 분이신가봐요.” 하는 수정의 말에 도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라를 바라보았다. 로라는 그런 도헌에게 눈을 찡긋해보였다. “네…! 자, 자기! 왔어?!” ‘자기라니…구도발에게 자기라니!’ 로라는 속으로 절규하며 성큼 도헌의 곁에 섰다. “자…자기?!” “그래, 자기, 내 허니. 하하하!” “돌았…어요?” “하하하! 돌다니, 아, 자기-. 여긴 우리 가게 단골 손님이셔.” 도헌은 로라의 말에 수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낯이 익었다. 눈물범벅이 된 수정을 빤히 바라보다, 도헌은 로라가 갑자기 왜 이러나, 다시금 수상쩍은 눈으로 로라를 돌아보았다. 수정은 가만히 도헌과 로라를 바라보더니 이내 입술을 굳게 앙다물곤 로라 앞에 섰다. “양…수정이에요.” “…….” “종종…이렇게 들러도 되죠?” “…네? 아…네, 네. 저, 저는.” “…….” “오로라…입니다.” 수정은 로라에게 악수를 청했다. 로라는 그런 수정을 빤히 내려다 보곤 이내 수정의 손을 맞잡았다. 이로써 ‘차기태’의 퍼스트와 세컨드가 손을 맞잡은 경사스런 순간이었다. * * * “뭐어?! 그 여자라구요?! 미쳤어요?! 이름 가르쳐주게?!” “아, 나는 이제 안 해. 복수고 나발이고 안 해!” 수정이 돌아간 뒤 로라는 벌벌 떨며 휴대폰을 꺼냈다. “뭐하게요!” “전화하게. 차씨한테.” “차…씨?” “차기태말이야!” “언젠 선생님, 선생님, 정중히도 부르더니만?!” “선생 같은 소리하네! 이런 파렴치한!” 로라는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기태의 전화번호를 꾹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는 왜 꺼놓고 지랄이래?! 그래, 지은 죄가 많아서 전화도 제대로 못 받겠지!” 로라는 부르르 떨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도헌은 그런 로라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이제 어쩌시게? 퍼스트 보고 나니, 겁이 확 나요? 뺏니 뭐니 어쩌니 하더니만?” “야, 야. 그건 진짜 뺏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 다 사정이 있었잖냐. 아무튼! 이제 안 해.” 로라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카운터에 머리를 쿵, 하고 박았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속은 그 누구보다 문드러지고 아파왔다. “왜…내 사랑은…” “…….” “다…이따위야?” “…똥차 가고 폐차 온 격이지, 뭐. 그러니 뭐랬어요! 잘 알아보고 사귀라…” “야. 구도발.” “아, 놀래라.” 로라는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도헌을 응시했다. 그러자 도헌은 미간을 찌푸리며 로라를 흘겨보았다. “뭘 또 그렇게 느끼한 눈으로 쳐다보고 난리래?!” “너.” “뭐요.” “당분간만 내 자기 해라.” ******* 오늘이 그러니까,,,월수금중에 월인데,,, 화,,,,^_^;욜 업,,,,뎃! 송구하옵니다ㅠ_ㅠ 그래두,,,화욜 날밝기전에 후딱,,,업뎃했으니,,용서를,, 전,,도망을 가보겠습니다!
제 7 장. 불량 세자, 수안과 꽃 도령, 민혁 (1)
“오늘 채희가 오는 날이지요?” 채랑은 환히 웃으며 안채로 달려갔다. 곱게 땋은 머리가 찰랑, 찰랑 고운 비단 저고리 위로 사부작이었다. 너무도 곱고 다정한 여인으로 자란 채랑이었다. 자신의 몸종에게까지 쉽사리 말을 놓지 못하여 꽤 오래도록 곤혹을 치룰 만큼, 자신보다 아래인 사람들에게까지 다정히 대하는, 꼭 자신의 어머니인 채화의 온화하고 다정한 성품을 고대로 닮았다. “그리도 좋으냐? 채희가 오는 것이.” 채랑과 달리 정경의 낯이 어두워졌다. “어머니는 좋지 않으셔요? 꼭 그믐 만에 보는 채희어요. 그동안 잘 지냈을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 지, 걱정 되어요.” 채랑은 두 손을 꼭 모은 채, 대문을 왔다 갔다, 하며 채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런 채랑을 바라보는 정경의 낯이 좋지 않았다. 그런 정경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듯, 좌상은 정경 곁에 나란히 서서는 한껏 들뜬 모습의 채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꼭 십 년하고도 칠 년 입니다. 이렇게 채희를 산 속에 숨겨두고 지내게 하는 것도, 맘 편하지 않습니다, 대감.” “그건 나도 그렇소. 채희와 채랑이와 함께 이 집에서 오순도순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그럴 수가 없으니….” “혹여나 산 속에서 예 까지 오다, 저잣거리 왈패에게 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산을 나와 한양에 닿는 그 날이면 걱정이 되어 밥 한 톨도 넘길 수가 없습니다.” “부인….” “게다가 혹여, 채희와 채랑이 쌍생아란 말이 새어나가진 않았을까, 그래서 채희의 신변을 노리는 자가 있진 않을까. 하루도 편히 잠드는 날이 없어요.” 정경은 눈물을 훔쳤다. 좌상은 그런 정경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웬 호들갑이야, 채랑아. 조용히 기다려야지. 그러다 소문이라도 돌면 어쩌려고.” “오라버니도 참. 언젠간 그럼 같이 살 채희인데. 쉬쉬한다고 될 일 이어요? 나는 꼭 채희랑 같이 살 테야. 쌍생아로 태어났다고 해서 채랑이만 산 속에 숨어 지내는 건, 너무 싫어.” “쉿, 채랑아….” 어느덧 늠름한 청년이 된 ‘한이’는 철없이 어리기만 한 채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마당 한 가운데에서 하염없이 대문 밖만 바라보고 있는 좌상과 정경을 발견하곤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어머니, 아버지.” “그래. 채희는 어디까지 오고 있다더냐. 보낸 이도 어찌 이리 함흥차사인 게야.” “이제 막 한양에 닿았다고 합니다.” “…오늘도 무사히 당도할 수 있겠지?” “그럼요. 아버지가 아끼는 휘영이 직접 호위하지 않사옵니까. 걱정 마십시오.” 좌상 곁에 서 있던 주한 역시, 덩달아 긴장했다. 17년 전, 채희가 이 집을 떠나 산 속으로 몸을 숨기러 들어갔을 때 채희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호위무사로 주한이 따랐었다. 그러고 두 해 년 전부터 주한의 사촌 아우인 ‘휘영’이 주한을 대신해 채희의 호위무사로 채희를 보필했다. “휘영을…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대감마님.” 주한은 좌상을 향해 말했다. 좌상 역시 주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저 멀리 대문 밖을 응시했다. “그럼. 휘영이라면…내가 믿지. 믿고말고.” * * * “아가씨. 힘드시면 지금이라도 가마를.” 휘영은 저 멀리서 또박또박 걷고 있는 채희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채희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장의를 뒤집어 쓴 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아가씨.” 이틀 째, 좌상 댁에서 내어준 가마도 마다 한 채 투정 없이 걷기만 하는 채희가 걱정된 휘영은 다시금 채희를 불렀다. 그제야 채희는 걷던 걸음을 우뚝 멈춰 서곤 장옷을 걷었다. “내가 무슨 큰 효를 다하였다고 가마까지 타고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 곳을 간단 말이냐.” 차가움과 냉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였다. 장옷을 걷고서 드러난 채희의 검은 머리칼이 햇빛 아래에 반짝였다. 까맣고 반듯한 채희의 머리칼. 그리고 그 옆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하얀 목선이 참 고왔다. “아가씨. 그런 말씀은…” “부지런히 가자. 오늘 안에 당도하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다시금 장옷을 뒤집어쓰는 채희였다. 채랑과 달리 차가움과 냉정함이 몸에 밴 채희였다. 꼭 좌상인 이한열의 곧고 냉정함을 닮은 듯 했다. 아니 어쩌면 채희의 삶이, 삶의 환경이 그녀를 그리 만든 걸지도 몰랐다. 채희 역시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곱게 자랐더라면 채랑이처럼 다정하고 어여쁜, 살가운 여인으로 자랐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매번 좌상 댁에서 보내는 화려한 비단 옷은 마다한 채, 그저 무명실로 지은 옷만 고수하는 채희였다. 곱게 땋아 내린 비단결 같은 머리 밑엔 다 낡아 빠진 댕기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채희의 미모는 채랑보다 몇 곱절이나 더 고왔다. 채랑과 똑 닮은 이목구비였지만 채랑과는 달리 채희의 얼굴에선 차가운, 그러나 찬란한 빛이 나는 듯했다. 봉긋이 솟은 이마와 끝매가 살짝 올라간 검고 짙은 눈초리는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도톰하고 맑은 빨간 빛이 도는 입술은 탐스럽기만 했다. “휘영아.” “네.” “너도…그렇게 생각하느냐?” “…….” “내가…언니의, 그리고 아버님의 위상을, 앞길을 가로 막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요즘엔 자꾸 내가 칼에 베여 죽는 꿈을 꾼다.” “…….” “나의 가슴을 황금빛의 용이 그려진 검으로 누군가가 내려쳐.” “아가씨.” “그러곤 꿈속에서 죽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 꿈을 꾸고 나면…무섭거나 슬프지 않아.” “…….” “오히려 속이 후련하고 나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것들이 잠시나마 벗겨져 나가는 기분이다.” “아가씨.” 채희의 장옷을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휘영은 그런 채희를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곤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도 그 꿈만 반복해서 꾸니, 이젠 그것이 꿈인지…생시인지…분간조차 되지 않는구나.”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채희와 휘영은 한양 땅에 발을 딛게 되었다. 휘황찬란한 한양의 저잣거리 모습에 채희는 잠시 부지런히 걷던 걸음을 멈추곤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분주히 움직이는 장사꾼들, 곱게 단장한 채 채희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반가의 규수들, 부채로 낯을 가린 채 한껏 분내를 내며 지나쳐가는 기생들. 그리고 그 속에 우두커니 선 채희는 자신은 이 땅 어디에도 동화되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채희의 마음을 읽은 듯 휘영은 채희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아가씨, 제 옆에 꼭 붙으십시오. 지체하시다 길을 잃습니다.” 채희는 휘영의 말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휘영에게 곁을 내주었다. 휘영은 채희를 아까보다 더 삼엄하게 호위하며 발걸음을 분주히 움직였다. “한양은 언제와도 적응이 되질 않는구나. 정신이 하나도 없…” 그때, 자신의 곁을 스쳐지나가는 웬 사내의 허리춤에 놓인 검이 눈에 들어왔다. 금빛이 화려한 용이 그려져 있는 검. 채희의 시선이 곧 그 검에게 빼앗겼다. 동시에 채희의 등골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 “저것…저 검이야. 똑같아.” 채희는 잠시 머뭇거리며 자신의 곁을 스쳐 저 멀리 사라져가는 사내의 검을 고개가 돌아가게 바라보았다. 꿈에서 자신을 연신 베었던 그 검. 그 검이었다. 채희는 오싹해졌다. “정말…꿈이 아니었던 것일까?”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휘영의 옷깃을 꾹 쥐곤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그자들을 향해 돌렸다. 웬일로, 휘영이 채희의 걸음을 끊지 않고 따라 나섰다. 채희 역시 이리 한 눈 판 것은 처음이었기에 어쩌면 휘영이 자신의 뜻대로 내버려 두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보통 무사들이 쓰는 검은 아닌 듯 보였다. 몇 번이고…내 꿈에 나와 나를 베는 것이…우연한 꿈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 “어찌…이리도 똑같은 검이 나타날 수가…” 평소답지 않게 말수도 많아졌다. 조금은 상기된 듯 보였다. 채희는 한 손을 장옷을 꾹 쥔 채, 또 한 손은 행여나 휘영을 놓쳐 길을 잃을까 휘영의 옷깃을 꾹 쥔 채 자신의 시선을 뺏은 검을 찬 사내의 뒤를 따랐다. “어? 어디 갔지?” 그러다 그만, 채희의 시야에서 벗어나고만 사내. 채희는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모퉁이를 지나쳐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발견하곤 휘영의 옷깃을 놓았다. “나 잠시만, 저 검을 어디서 구했는 지만 물어보고 올게!” 채희는 장옷을 꾹 쥔 채, 사내가 돌아선 모퉁이를 향해 잰 걸음으로 걸었다. 채희는 마른 침을 삼키며 더듬더듬 모퉁이를 돌아섰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아서자, “어…?” 막다른 골목이었다. 사내는…그 검을 찬 사내는 어디로 사라졌다 말이지. 채희는 붉은 입술을 꾹 깨문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앗…!” “웬 년이냐!” 채희의 목에 날카로운 칼 하나가 겨눠졌다. * * *
chapter1. 오늘 '이별' 하렵니다!
“왜 전화 안 받아, 이 호랑말코 같은 새끼가.” 밖엔 억수같은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굵어진 빗방울을 쇼윈도를 통해 바라보던 로라는 주먹을 꾹 쥐었다. 조그마한 그녀의 주먹에 어마어마한 힘이 들어갔다. “이현우, 니가 이렇게 잠수를 탄다 이거지? 고백할 땐 하늘의 별도 따다준다더니. 그래도 별 하나는 따주고 가는 구나? 이별 말이다, 이 깜찍한 새끼야. 성은이 망극하다, 망극해!”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며 꾹 쥔 그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곧, 자신 뒤의 책상 위에 휴대폰이 요란스레 울렸고, 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한걸음에 카운터로 향했다. 깜찍한 새끼라며, 호랑말코 같은 새끼라며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내심 지금 울리고 있는 전화벨의 주인공이 이현우 그 호랑말코 같은 새끼길 바랐다. 하지만. “스팸…이네. 썩을.”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쇼윈도 앞에 디피 되어 있는 마네킹 손가락을 툭, 툭 건드렸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 곧 빗물 가득 머금은 까만 하늘이 푹 담겼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도 억수 같은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 * * “야, 오로라. 그 새끼 일방적으로 잠수 탔다며? 아주 미친 새끼네, 그거?!” 밤 열 시가 되기 오 분 전. 로라의 옷가게로 그녀의 친구로 추종되는 두 명의 여자가 우르르 들이 닥쳤다. 그녀는 손님용 탈의실 안에서 낑낑대며 어제 새로 지른 원피스를 갈아입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윽-. 야, 나 살쪘나봐. 지퍼가 안 올라가.” “그래 기지배야, 너 살 쪘다니까? 살 쪘다고 해도 죽어도 아니라고 부은 거라고 하더니.” “아, 조용히 하고 빨랑 와봐. 지퍼 좀 올려줘.” “그래서. 갈 거야? 찾아 갈 거야?” “당연한 거 아니니? 이 새끼가 지금 날 가지고 놀아도 유분수지. 내가 이대로 가만히, 헤어져 줄 오로라로 보이냐?” 탈의실 안에서 쩌렁쩌렁 로라의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그녀의 친구들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딸랑 하는 가게 문앞의 종소리가 울렸고 여자들은 일제히 가게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로라는 탈의실 안에서 낑낑대며 겨우 지퍼를 올려 탈의실을 나섰다. “아, 지금…문…닫으시는 건가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에 쫄딱 맞은 한 여자가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여자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로라는 아홉시 오십칠 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한 번 바라보곤 애써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아, 저희가 열시되면 마감을 하긴 하는데…” “저 급히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2분도 안 걸릴 거거든요? 어떻게…구매할 수 있을까요?” 여자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상태를 보아 급히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만 같기에 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꺼두었던 마네킹 쪽의 불을 켰다. “천천히 고르세요. 저도 어차피 화장 다시 하고 나가려던 참이었거든요.” 로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친구들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리곤 비에 홀딱 젖은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또각또각 카운터로 향했다. ‘비에 젖었지만 탐스런 갈색 빛 머리에 오똑 선 콧날. 저건 자연산이라기 보단 의느님에 의해 탄생된 듯한 비쥬얼의 코. 그리고 오렌지색이 잘 어울리는 도톰한 입술. 앞머리가 없는 긴 생머리에 속눈썹이 긴, 눈은 음…건드리지 않았군. 자연스런 쌍꺼풀이 매력적이네.’ 보통 미모의 여인이 아닌 듯 보였다. 로라는 안보는 척 하며 카운터에 서서 원피스 쪽을 기웃거리는 비에 젖은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저, 요걸로 갈아입고 가도 될까요?” 삼십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피고 있던 로라는 갑작스레 자신을 돌아보는 탓에 흠칫 놀라며 헛기침을 했다. 자신이 몰래 훔쳐보고 있던 것을 눈치 챈 것은 아닐까, 로라는 아까보다 더 씩씩한 목소리로 탈의실 문을 활짝 열었다. “흠, 흠흠. 물론이죠. 여기서 갈아입으세요!” 탈의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자신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카운터 밑쪽에 휙 던지며 로라는 씩 웃었다. 여자 역시 로라를 따라 웃으며 탈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 나 갑자기 배 아프다. 너희 계산할 줄 알지? 마지막 손님이니까 뒷 단위 까주는 센스 알아서들 발휘하시고. 나 화장실 간닷!” “가게 문은? 바로 닫어?” “어! 내 가방 챙겨서 나와 있어! 가게 불만 좀 꺼주구!” 로라는 두루마기 휴지를 챙겨들곤 가게를 급히 나섰다. 그리곤 조심조심 비를 피해, 바로 옆 상가 복도로 향했다. 무슨 비가 이렇게 쏟아져. 태풍이라도 오려는 건가, 혼자서 중얼거리며 로라는 화장실로 향하기 위해 또각또각 걸었는데, 여간 으스스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팔을 꾹 쥔 채 로라는 구두 굽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때, 조용한 화장실 안을 가득 메우는 로라의 휴대폰 벨소리. 로라는 자신의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보세요.” “누나! 나 오늘 좀 늦는다!” “좀 늦는 거냐, 아님 해 뜨고 들어오는 거냐? 똑바로 말해라 너.” “아-. 엄마 아빠 없을 때 자유를 만끽하는 거지. 어차피 너도 오늘 늦을 거 아니냐. 보아하니 불금에 비까지 내리니 술 퍼마시러 가겠구만.” “어이, 동생. 이 누님은 오늘 술을 마시러 가는 게 아니라 인생에서 제일 중대한…” “됐고. 아무쪼록 시내에서 마주치지는 말자. 쪽팔리니까.” “야! 야 이 눔의 자식아! 너 죽을래애-?!” 쩌렁쩌렁 울리는 로라의 목소리. 하지만 돌아오는 건, 무참히 끊겨 버린 휴대폰 너머의 정적 뿐. 로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얘는 참 누굴 닮아서 이렇게 개 썅 마이웨이일까, 하며 손을 씻기 위해 세면대로 향했다. “울지만 말자. 어떤 대답을 들어도. 어떤 말을 들어도. 구질구질하게 울지나 말자, 오로라.” 로라는 손을 씻으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툭,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남자 친구란 자식이…어째 사귀는 1년 동안 한 달 빼곤 매일을 이리도 울리니. 로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처음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 해놓고선. 그 마음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고 해놓고선. 나만 사랑한다고, 영원히 그럴 거라고, 그러니 자신과 결혼하자고 해놓고선. 로라는 빨갛게 상기된 볼을 물 묻은 손으로 만지작이다 이내 휴지로 물기를 닦으며 화장실을 나섰다. 그러다 화장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섰다. 구겨진 원피스를 매만졌다. “야, 이현우. 이젠 내가 빠빠이야. 내가 이제 세이굿바이 하는 거라구.” 그렇게 중얼거리며 로라가 웨이브 진 머리를 손으로 만지작이고 있는데, 갑자기 또각또각 텅 빈 복도에서 남자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그녀는 그대로 굳은 채 전신 거울을 통해 뒤를 봤다. 그때, 웬 정장을 입은 훤칠한 키의 한 남자가…로라의 시야에 들어섰다. 무심한 듯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잠시 화장실 앞에 서 로라를 바라보더니 이내 또각또각 바른 걸음 걸이로 로라 옆에 섰다. 로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주춤주춤 옆으로 물러났다. ‘잘…생겼다. 스타일…도 괜찮구….’ 머리를 만지던 그 손 그대로 굳은 채, 로라는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로라의 말대로 잘생긴 남자였다. 한 쪽만 속 쌍꺼풀이 진 짝 눈이 매력적이었다. 옆에서 바라봐도 우뚝 선 콧날은 작은 얼굴을 더 갸름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비율도 괜찮은 것이,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저 정장에 코트를 입은 채였지만, 스타일도 좋아보였다. 올해 스물여섯이 되는 자신보다는 나이가 조금 더 많은 것 같이 보였지만. 삼십 대 초반? 중반? 넋을 놓고 남자를 바라보던 그녀. 이내 로라의 부담스런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홱 로라를 내려다보았다. ‘어머, 깜짝이야.’ 로라는 티가 날 정도로 화들짝 놀라며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곤 다시금 만지작이던 머리를 정리하며 빙그르르 뒤돌아섰다. 그런데, ‘가만. 여긴…여자 화장실인데?’ 그 생각이 들자, 로라는 다시금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남자 역시 뒤돌아서있던 로라를 거울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부딪혔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여기 여자 화장실이라, 일러주기 위해 붉은 입술을 조심스레 떼었는데. “여기 남자 화장실인데요.” “예, 예?” 지금 내가 해야 할 말을 왜 저 분이, 저렇게 얘기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여기 남자 화장실이라구요.” 로라가 잘 못 알아들었나 싶어 아까보다 목소리에 더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하는 남자. 남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치 로라가 큰 잘 못이라도 저질렀다는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매력적이라,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아차 싶어 다시 입술을 앙다물곤 “아…네. 죄송합니다.”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조심 화장실을 나섰다. “내가 너무 급해서 남자 화장실을 들어 왔나 보네…” 그럴 리가 없는데, 싶으면서도 뭐 남자 화장실이라고 저렇게 힘주어 얘기하니 자신이 착각했나 보다, 하고 중얼거리며 로라가 화장실을 나서 입구를 돌아보았는데. “뭐야. 여자 화장실이잖아.” 여자 화장실이란 표시가 화장실 앞에 붙어 있었다. ‘뭐야, 여자 화장실인데 왜 나보고 눈치 줘.’ 로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화장실 쪽으로 눈을 흘겨보았다.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가 다시금 매장으로 향하기 위해 한 걸음 내딛었는데. “……?” 또각또각 다시금 남자의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이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남자가 휘적휘적 여자 화장실에서 나와 바로 옆 남자 화장실로 쏙 들어섰다. 이 무슨 황당한…. 로라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남자 화장실로 들어서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생긴 건 멀쩡한데 순…허당이네. 황당하게, 정말.” * * * 선뜻 들어서지 못했다. 로라와 그녀의 친구들은 비가와도 여전히 휘향찬란한 시내 한 가운데에서, 그녀의 현 남친인지 구 남친인지 모를 ‘이현우’란 남자가 일하고 있는 술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로라는 원피스 자락을 꾹 쥐었다. “야, 뭐해 오로라. 안 들어가?” “저 새끼, 뭐가 좋은 지 싱글벙글 서빙하고 있네.” 그래도 사랑했었다. 쓰레기 새끼인 걸 알면서도 그 놈과 사귀었었다. 소문난 바람둥이란 걸 알면서도 로라는 자신을 믿어 달란 그 놈의 말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었다. 그녀라면, 오로라 그녀 자신이라면 바람둥이에 쓰레기에 나쁜 놈이라 소문 난 저 놈을 자신만 바라보는 순한 양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거라 믿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지금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되레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찔러 버렸다. “됐어. 가자, 그냥.” 로라는 돌아섰다.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는 로라를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친구들은 바라봤다. 등지고 돌아선 로라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평소완 다르게 다운 된 목소리와 축 처진 어깨가 지금 그녀는 무지 슬프고 아프단 걸 말해주고 있었다. “들어가서 왜 전화 안 받냐고…실컷 따지고 나서 끝이라고…통보하고 나오면 뭐하겠니.” “…….” “이미 저 자식은 나와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뒤늦게 이러는 내 꼴만 우스워지지…안 그래?” 로라의 왼쪽 어깨가 비에 젖었다. 로라의 젖은 어깨를 바라보던 친구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로라의 성격대로라면 당장이고 저 술집으로 처 들어가 사장 새끼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것이었다. 그러곤 로라를 보며 당황하는 그 남자의 뺨을 시원하게 후려치며 ‘꺼져, 이 쓰레기 새끼야!’ 멋있게 말해주고 나왔을 것이었다. 하지만. “못 하겠다. 가자, 그냥.” “…오로라.” “에휴, 오로라 성격 많-이 죽었네. 하하. 가자, 제군들! 언니가 오늘 이별주 쏜다!” “야. 오로라. 정말 괜찮냐?” 그녀의 친구들은 더욱 오바스럽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는 로라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괜찮냔 친구의 말에 로라는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누굴 욕하겠니.” “…….” “쓰레기 차 인 거 알면서도 좋다고 잡아 탄 건 난데.” “…….” “야…로라야.”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널 사랑한다, 그러니 한 번만 믿어달란 저 새끼의 말을 믿었던…내 탓이지. 누굴 탓 해. 안 그래?” 로라는 그 말을 내뱉곤 노란 우산을 다시금 추켜들었다. 그러곤 방금 헤어진 전 남친의 가게를 쿨 하게 지나치려 한 발 내딛었다. 그때, “여기가 너희 오빠가 하는 가게야?” “응. 멋있지? 우리 오빠 가게 여기 말고도 또 있어. 저 밑에 고기 집도 우리 오빠 꺼야.” 로라는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오빠 가게…?’ 그녀는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짧은 단발의 여자를 돌아보았다. 우리 오빠 가게란, 앙증맞은 목소리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멈칫하는 로라를 뒤에서 지켜보던 그녀의 친구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야, 근데 저 오빠랑 사귄다고? 저 오빠 저번에 여자 친구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응. 근데 그 여자가 질척대는 거래. 헤어지자고 그렇게 눈치를 줘도 뭐…안 떨어진다나? 그래서 오빠가 그냥 차단해버렸데. 그럼 뭐 알아서 떨어지겠지?” “아, 헐! 대박. 그 여자 불쌍해.” “나두 이제 신경 안 쓰려고. 오빠가 한 달 전부터 나 좋다고 매일 밤 우리 집 앞에 찾아오는데…그 마음 어떻게 안 받아 주니? 어젠 이 목걸이까지 선물해줬다니까. 제발 자기 마음 좀 받아 달라구.” 방금 저…질척댄다는, 헤어지자고 눈치를 줘도 안 떨어진다는, 그래서 차단을 당했다는 여자는…나를…말하는 거지? 로라는 들고 있던 우산을 자신도 모르게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목걸이라니…한 달 전부터라니. 그녀의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어머. 로라야 왜 그래?” “손에 쥐났어?” 그녀의 친구들이 황급히 떨어진 로라의 우산을 주워 로라의 손에 쥐어주었지만 로라의 손은 힘이 풀려버린 지 오래. 그러곤 그런 그들의 호들갑에 가게 문 손잡이를 쥐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아마도 로라의 ‘전 남친’의 ‘현 여친’인 듯한 여자가 로라를 돌아보았다. 예쁘장하게 생겼네. 남의 남자 친구 홀라당 뺏아 갈 만큼. 로라는 멍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야, 오로라. 왜 그래.” “쓰레기차를 잡아 탄 건 내 탓이라, 그냥 날 원망하고…지나치려 했는데.” “…어?” 로라는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이현우의 ‘현 여친’인 듯한 그 예쁘장한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지지 않고 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어디로 튈지 모르는 로라의 주먹은 연신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열을 삭이고 있는 듯 했다. “그 쓰레기차. 다신 내 주위에서 냄새 못 풍기게. 폐차를 시켜버려야겠다.” “…뭐?” “이 동네에서 냄새 풍기면서 더는 못 돌아다니게, 아주 개 박살을…내버려야겠어.” “……?!” “ 이, 이현우 재활용도 안 되는 씹 쓰레기 인간아! 니가 그러고도 남자 새끼냐?!” 순간이었다. 말릴 틈도 없이 그녀가 가게 문을 박차고 안으로 돌진해버린 것은. “어머, 어머! 오로라! 로라야!” “어머, 누구세요! 누구신데 우리 오빠를!” 순식간에 가게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분에 못 이겨 가게 안으로 돌진해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서빙을 하고 있던 현우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로라. 그리고 그런 로라에게 머리채를 잡혀 들고 있던 안주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채 ‘으악!’ 외마디 비명만 내지르고 있는 현우. 가게 안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손님은 물론이거니와 술 집 앞을 지나치던 시민들은 고성과 비명이 오가는 범상치 않은 모습의 로라와 현우에게 시선 집중 했다. “으악! 뭐야! 오로라, 이거 안 놔?! 죽고 싶어?!” “못 놔! 안 놔! 오냐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어?!” “으악! 이거 놓으라고! 왜 이래! 말로 하라고!” “니 사랑은 이래?! 뒤에서 뒤통수 치고,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고, 사람 바보 만들고, 그러다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사람 울리는 게. 니 사랑이야?! 그게 니가 내게 해주겠다던 사랑이냐고!” “어머, 누구신데 우리 오빠 머리채를 잡는 거냐구요-! 이거 못 놔요?!” “악-! 야! 야! 이거 안 놔?! 이 기집애가 죽고 싶나!” 현우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로라의 긴 머리칼을 잡아 챈 현우의 현 여친인 듯한 가게 앞에서의 그 여자. 로라는 으악-!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꼬맹이 너는 빠져라, 어?! 이거 못 놓아?!” “그 쪽부터 우리 오빠 놔요! 아님 절대 못 놔요!” “상황 파악 안 되니?! 니가 방금 지껄였던 너희 오빠한테 질척대는 여자가 난데?!” “뭐? 뭐…뭐라구요?” “여친 있는 멀쩡한 남자 꼬신 것도 모자라, 니가 내 머리채 까지 휘어잡아? 어?! 니년 손모가지도 이 놈 모가지랑 같이 분질러줘?!” 로라가 악을 쓰고 여자에게 덤비자, 여자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하지만 휘어잡은 로라의 긴 머리칼은 놓지 않았다. 가게 안의 사람들 역시 술렁이며 모두 휴대폰을 꺼내 처참하다 못해 충격적인 삼각관계 스캔들의 현장을 담기 시작했다. 얼굴 팔리는 줄도 모르고 바락바락 로라가 악을 쓰자, 친구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발만 동동 굴렀다. 로라가 현우의 머리칼을 오른손에 꾹 쥔 채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려 나머지 한 손을 뻗었는데. 그런데. “이런다고 바람 난 그쪽 전 남친이.” “뭐야!” “정신 번쩍 차리고 그쪽 현 남친으로 컴백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웬 잘-생긴, 그러나 한 눈에도 장난기 많고 어려보이는 듯한 남자 한 명이 로라의 왼 손을 저지했다. 남자의 손엔 어마어마한 힘이 들어 있었고, 산발이 된 로라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은 귀여운 눈매와 어울리게 장난기가 가득했다. 로라는 엥? 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왼 손목을 꾹 쥐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로라는 왠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구요?” “보는 눈도 많고. 그 눈으로 그쪽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들은 영상까지 찍어대고 있는데.” “……?” “SNS 스타 되는 게 꿈이세요? 혹시, 관종?” “뭐라구요?! 지금 놀려?! 이거 안 놔요?!” “흥분하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하며 남자는 피식 웃었다. 피식, 웃어?! 로라는 어이없는 대사를 날리며 어이없게도 자신을 바라보며 피식, 웃는 남자를 어이없다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그럼 마무리는 이렇게 지읍시다.” “……?” “이 손목 잡힌 채로 나랑 같이 여길 나가죠.” “…….” “쿨과 찌질은 한 끗 차이인데. 여기서 나한테 이 손목 잡힌 채로 나간다면 쿨 해질 수 있을 텐데?” “…뭐래는 거야. 놔라, 이거?” “그쪽의 이 비극적인 사랑의 엔딩은 그래도 해피 해야지. 안 그래?” 하고 마지막 그 말을 내뱉는 남자의 표정은 아까완 달리 진지했다. 로라는 사뭇 진지해져버린 그 녀석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 남자는 누구일까, 누구기에 이 어마어마한 스캔들의 현장에 불쑥 끼어들어 자신의 손목을 꾹 쥔 채, 곤경에 처한 공주를 구해주는 젠틀한 왕자님스런 멘트를 날리고 있는 걸까. 로라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렀다. 남자의 얼굴을 재빠르게 스캔했다. 하지만, 로라는 이 남자가 초면이었다. 로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대체 이 남자…정체가…뭐지?’ 그리고 순간 느껴졌다, 로라는. 이것은…보통…인연은 아니라고. 자신의 26년, 살벌한 연애 경험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지금 이 순간은 아름다운 연인이 될 불타오를 썸의 발화점이던가. 아님…상상조차 하기 싫은 악연이 될 잘못된 만남의 시초이던가, 라고. * * * 반갑습니다, 신화그녀입니다! 빙글에서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너무도 반갑고, 설렙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_^ 그럼, 열심히 달려볼까요?! 함께 해주실거죠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