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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노발대발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안 특집!]

[팟캐스트 노발대발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안 특집!]
오늘 업로드 된 '해결사, 갑파라치'에서는
실제 사례와 급여 유형 바탕으로 개정안 전후의 차이를 알아봅니다.
*노발대발은 두 눈 크게 뜨고! 계속해서 지켜보며 노동자의 소리를 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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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논평] ‘폭죽 난동’ 미군 전원 공개하고 처벌하라
지난 3~6일 해운대 해수욕장 일대에서 벌어진 주한미군의 난동으로 우리 국민 다수의 생명이 위협받는 일이 발생했다. 수많은 미군들은 해운대 해수욕장 일대에 떼로 몰려다니며 폭죽을 쏴댔다. 미군이 건물이나 지나가는 시민을 가리지 않고 폭죽을 쏴대자, 미군의 광기에 공포를 느낀 시민들의 경찰 신고가 이어졌다고 한다. 해운대 해수욕장 일대에서 난동을 부린 미군은 대부분 오산과 군산, 대구 등지에서 주둔하는 미군이라고 한다. 미군은 자국의 독립기념일을 기념한다는 이유로 무질서하게 음주가무를 즐긴 채 폭죽을 터뜨리며 국민들을 위협했다. 미군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는 등 안전 수칙도 전혀 지키지 않았다. 시청과 구청 직원들이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 두기를 안내했지만 많은 미군들은 이를 무시했다고 한다. 평소 한국의 주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미군의 안하무인에 분노한다. 미군 사령부는 국민의 분노가 높아지자 폭죽 난동에 미군 장병이 연루됐는지 확인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가한 처사다. 미군은 폭죽 난동에 당장 사과하고 연루 미군들을 전원 공개, 처벌해야 한다. 외교부, 국방부 등 미군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관계 당국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점은 씁쓸하다. 미군은 우리 경찰의 제지에도 이를 우롱하며 시민을 직접 겨냥해 폭죽을 쏘는 등 온갖 추태와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우리 경찰은 단 한 명의 미군을 붙잡아 조사한 뒤 5만원의 과태료만 처분했다. 언제나 적극적인 처벌 의지가 미군 앞에서 멈춘다는 점은 서글픈 일이다. 미군의 안하무인은 비루한 사대주의에서 나온다는 것을 관계 당국은 잊어선 안 된다.
SK텔레콤, 과연 그들이 그리는 그림은 무엇인가?
보안, 금융, 스마트팩토리' SKT=ICT' 성패는? 세상은 변화하고 기업은 진화한다. 삼성은 설탕 팔았고, SK는 천 쪼가리 만들던 데였어. 지금의 삼성의 모태는 설탕 공장이었던 제일제당이고, SK그룹은 선경직물이었다. SK가 ‘선경’의 영문 이니셜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는 젊은 세대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세상이 변화하듯, 그들도 적응하며 변화한 결과다. 기업은 세상과 함께 진화를 거듭한다. 진화에 실패하면 몰락한다. 핀란드의 대표 기업이었던 노키아가 대표적인 사례.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하고, 핀란드 국가 예산보다 더 높은 매출을 올리던 노키아는 모바일과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린 후 시장을 읽지 못하고 사라졌다. 2015년 노키아 모바일사업부가 MS에 인수되며, 파란만장했던 휴대전화 전성기는 역사로 남겨졌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반도체로, 또 스마트폰 기업으로 진화에 성공한 삼성전자가 차지했다. 그리고 SK가 SK텔레콤을 중심으로 또 한 번의 진화를 준비하는 모양새다. 보안, 금융, 스마트팩토리...차근차근 확장하는 '박정호 SK텔레콤 군단' SK텔레콤은 1994년 SK그룹(당시 선경그룹)이 인수한 ‘한국이동통신주식회사’가 모태다. 1996년 SK텔레콤은 2G 방식인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기술 상용화에 성공하며 ‘011’ 정착시킨다. 전화만 가능하던 이동통신 서비스에 문자도 보낼 수 있게 만든 것. 이후 KT와 함께 대표 통신회사로 자리 잡게 된다. 지난해 10월 SK텔레콤은 SK(주) 아래 있던 정보보안 1위 업체인 SK인포섹을 자회사로 편입했다. 앞서 물리보안 2위 업체였던 ADT캡스를 인수했다. SK텔레콤은 하나금융지주, 키움증권과 함께 컨소시엄을 결성하며 제3인터넷 전문은행 예비인가를 신청하기로 결정했다. 정부 입장에서도 보안 역량을 품고 있고 자본력을 갖춘 통신 1위 사업자의 참여는 향후 인터넷전문은행 시장 확대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 선다.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기존 성공방식으로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지난해 12월 SK텔레콤은 ‘스마트제조혁신센터’에서 5G 스마트팩토리 전략을 발표하고, ‘5G 스마트 유연생산 설비(Smart Base Block)’ 등 솔루션을 공개했다. 올해 출시할 5G 네트워크를 산업 현장에 도입하는 연결고리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스마트팩토리의 바탕이 되는 AI 연구는 2017년 조직개편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은 ‘AI 사업단’을 직속으로 신설하고 기술 강화를 지시해왔다. 여기에 다시 ’SK인포섹+ADT캡스’에 바탕한 IoT기반 6세대 보안까지 더해진다면, SK텔레콤이 그리는 ‘SKT=ICT’가 완성되는 셈이다. 또한 , SK텔레콤의 카테고리는 하나 더 있다. 바로 OTT 시장이다. SK텔레콤은 자회사인 SK브로드밴드와 국내 2위 케이블 TV 사업자 티브로드의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물론 규모만 놓고 보면, KT와 LG유플러스에 이은 3위다. 그러나 ‘통신 + 금융 + 스마트팩토리 + 금융 + 동영상 스트리밍’으로 이어지는 결집은 무게감이 다르다. 지난 1월 2019년 신년사에서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은 “기존 성공방식으로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으며,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전혀 다른 業(업)의 경쟁자와 겨루기 위해 더욱 강한 SK텔레콤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성범죄자의 선처호소 편지 집어던진 미국판사
지난 2018년, 미국 미시간주 법원. “멸시당한 여자의 분노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내가 한 모든 일을 잘못으로 몰아갔습니다” 성범죄 혐의로 법정에 선 피고인이 쓴 해당 내용의 편지를 읽던 판사는 편지를 휙 내던졌다. 이날 법정에 선 피고인은 선수들에게 치료를 빙자해서 성폭력을 저지른 미국 체조 대표팀 주치의였다. 판사는 주치의를 향해 일갈했다. “아직도 당신이 한 짓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이 편지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난 의사인 당신에게 내 반려견 치료도 맡기지 않을 것입니다.” 판사가 주치의에게 선고한 처벌은징역 175년 “당신에게 175년, 2,100개월 형을 선고합니다. 방금 당신의 사형 집행 영장에도 서명했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벌을 내리는 것은 판사로서 제 영예이자, 권한입니다. 당신은 다시는 감옥 밖으로 걸어서 나갈 자격이 없습니다.” 선고가 끝나자 법정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판사는 판결을 내리며 이같은 말을 남겼다. “오늘 판결은 내가 내리지만, 두 번째 판결은 신이 내릴 것입니다.” + 어린 체조선수 등 10~30대 여성들을 상대로 장기간 상습 성폭행·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 30여년에 걸쳐 자신의 치료실에서 체조·수영·축구·배구 선수 등 10~30대 여성 156명을 성추행거나 성폭행한 천하의 ㄱㅆㄹㄱ같은 놈 손정우 사건 담당 판사 정신차려라... 판사님 내한 소취...
출퇴근 자가용 카풀 허용
택시-카풀 사회적 대타협 첫발 지난 7일 택시·카풀 사회적 대타협기구가 극적으로 합의에 도달했다. 평일 오전 7∼9시와 오후 6∼8시로 출퇴근 시간을 한정하고 자가용 유상 카풀을 허용한 것이다. 다만 카카오모빌리티를 제외한 다른 카풀 업체들과의 마찰은 계속될 전망이다. 택시4단체와 카카오모빌리티, 당정은 국회 정론관에서 합동 기자회견을 열어 합의문을 발표했다. 카풀은 현행법상의 본래 취지에 맞게 출퇴근 시간(오전78시~9시, 오후6시~8시)에 허용하되,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제외하는 것이 골자다. 현재 여객자동차 운수사업 제81조제1항에서는 출퇴근 때 승용자동차를 함께 타는 경우와 천재지변, 긴급 수송, 교육 목적을 위한 운행, 그 밖에 국토교통부령으로 정하는 사유에 해당되는 경우는 카풀을 허용하고 있다. 이 중 '출퇴근 시간'을 명확하게 못박은 것이다. 합의문에는 ▲플랫폼 기술을 자가용이 아닌 택시와 결합 ▲올해 상반기 안으로 규제혁신형 플랫폼 택시 출시 ▲택시산업 규제 혁파 ▲택시노동자 근로시간에 부합하는 월급제 ▲초고령 운전자 개인택시 감차 방안 적극 추진 ▲친절한 서비스 정신을 준수 등의 내용도 담겼다. 아울러 택시·카풀 사회적 대타협기구는 현재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에 계류 중이거나 발의 예정인 관련 법률안을 3월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키도록 노력할 방침이다. 아울러 합의사항을 구체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당정과 업계가 참여하는 실무 논의기구를 즉각 구성한다는 계획이다. 3명의 택시기사가 분신을 하면서까지 반대하며 첨예한 갈등을 빚었던 '카풀 논란'이 합의의 첫발을 뗐다. 다만 아직도 갈등 불씨는 존재한다. 사회적 합의 기구에 카풀 업체 측으로는 카카오모빌리티만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타다와 풀러스 같은 승차공유 업체는 현재 24시간 서비스를 지속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유지하겠다는 방침이다. 카풀 업계서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가 오후 9시 이후~새벽 시간의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및 택시 업계의 승차거부 문제다. 이번 합의문에서 출퇴근 시간으로 카풀을 제한해, 이용자 편의는 제고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업계 내에서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택시 업계 또한 타다·풀러스에 대한 고소·고발은 예정대로 진행한다는 입장이다.
습관을 연구한 공학자, 길브레스 부부 (1)
1904년 10월 19일, 미 오클랜드. 막 결혼식을 마치고 나온 신혼부부가 기차에 올라 몇 마디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이는 몇이나 낳았으면 좋겠어?' '글쎄, 한 다스만 낳지. 기왕이면 남녀 각각 여섯 명씩.' 대화 내용이 살짝 소름끼치긴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이 말은 실제로 실현됩니다. 평생 길브레스 부부는 여섯 명의 아들과 여섯 명의 딸을 가졌고, 개중 다섯째 아들과 일곱째 딸에게 자신들 이름을 각각 붙여줬죠(프랭크 2세, 릴리언 2세). 비록 둘째는 1912년 디프테리아로 사망하지만, 나머지 형제자매들은 모두 잘 성장해 주었습니다. 길브레스 부부와 11명의 자식들. 자녀들은 부부의 실험 연구 대상이자 참가자였습니다. 부부는 여러 번 자녀들이 접시를 닦는 동작을 촬영해 분석하거나, 그들이 개발한 방식으로 타자기 사용을 보름 만에 숙지하게 교육하는 등 일상 생활에 그들의 연구를 접목했습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이 기억하는 부모는 유머러스하고 자상한 사람들이었다고 하네요. 어째서 남편, 프랭크 길브레스가 열두 명 자식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프랭크 길브레스는 매번 가족들을 데리고 국립공원이나 영화관에 입장할 때, 혹은 기차나 차편을 타야 할 때면 항상 단체 할인을 받아냈다고 하네요. 나중에 프랭크는 아이들 중에 쌍둥이나 세쌍둥이가 없어서 섭섭해했답니다. 여러 명 아이들을 한 번에 낳아 한 번에 기르는 편이 더 효율적이라나요? 뉴저지 몽클레어에 집을 한 채 마련해 두고, '과학적 관리법과 낭비의 동작을 없애는 학교'라고 이름붙인 집에서 길브레스 부부는 평생 자신들의 연구를 그 자신과 자기 자식들에게 적용했습니다. 나중에 셋째 어네스틴과 다섯째 프랭크 2세는 자기 가족들이 그 집에서 살았던 경험담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는데요. 이 책이 어찌나 유행했던지 속편에 영화, 뮤지컬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기억하는 프랭크 길브레스는 자상하고 유쾌한 가장이었던 모양이지요.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혁신주의 운동이 미국 사회 전체에 영향을 떨칠 때가 1900년대 초 일입니다.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 프레데릭 테일러가 활발하게 강연, 저술 활동을 하며 자신의 소위 과학적 관리론을 설파하고 다닌 때도 이 즈음이죠. 1904년 결혼한 길브레스 부부가 어떻게 평생에 걸쳐 공동연구를 수행했는지는 잠시 미뤄 두고, 먼저 프랭크 길브레스에 대해 잠깐 조명을 해보겠습니다. 프랭크는 메인 주 페어필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아났습니다.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결과 MIT에 입학 허가를 획득하지만 가정 형편상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하기를 선택했죠. 17세이던 그가 선택한 첫 직업은 벽돌공 수습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차차 능력을 인정받아 현장감독으로 승진했고, 나중엔 아예 독립해 건축회사를 차리게 됩니다. 이때 프랭크 나이가 34세였습니다. 사장이 된 프랭크가 집요하게 파고든 건, 바로 벽돌쌓기의 효율을 높이는 일이었습니다. 다양한 수단으로 현장 연구를 실시한 후, 그가 내린 결론은 바로 불필요한 작업 동작을 선별해내 제거하거나 교정하는 동작 연구였죠. 프랭크는 자기 연구를 바탕으로 건설업계의 작업 방식을 합리적으로 개선하는 여러 방안을 줄줄이 내놓았습니다. <현장 시스템(1901)>, <콘크리트 시스템(1908)>, <벽돌쌓기(1909)> 3부작 저서가 바로 그 방안이었죠. 운명적인 만남은 정말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1903년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한 부유한 집안 여성이 미 동부로 여행을 옵니다. 그녀 응접을 맡은 안내원 미니 번커는 프랭크의 친척이었죠. 결국 미니 번커의 소개로 여성은 프랭크 길브레스와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 뒤 약 1년간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서로 마음이 맞음을 확인한 두 남녀는 결국 결혼에 이르게 되는데요. 이 여성이 바로 프랭크의 영원한 반려, 릴리언 길브레스였죠. 릴리언의 아버지는 독일 태생의 미국인으로 설탕 정제업으로 나름대로 부를 쌓은 인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해 집안일에서 자주 릴리언의 도움을 받았죠. 릴리언은 학업 성적이 뛰어났는데, 부모는 대학 진학을 반대했습니다. 자기 딸이 형편 넉넉한 집 자녀와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게 두 사람의 바람이었죠. 릴리언은 그런 부모를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그렇지만 전 너무 평범해서, 부자들은 아무도 저와 선뜻 결혼하려 하지 않을 거에요.' 설득이 먹힌 건지, 아니면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는 건지, 릴리언은 소원대로 근처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 입학하게 됩니다. 당시 캘리포니아 대학은 주 시민은 누구든지 무료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형 강의가 많아서 심지어 건물 밖에 텐트를 치고 진행하는 수업도 있었다고 하네요. 또 학교에 기숙사가 따로 없어서 릴리언은 매번 집에서 통학을 해야 했습니다. 전공은 영문학이었는데, 심리학 등에도 관심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릴리언은 대학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올려, 졸업식 연사로 연단에 올랐죠. 캘리포니아 대학에선 처음으로 여성이 졸업 연사를 맡은 사례였습니다. 1900년 릴리언은 콜롬비아 대학의 대학원에 지원하는데요. 본인은 영문학 전공을 희망했지만, 지도 교수 소개를 받아 찾아간 영문학 교수는 여학생을 제자로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는 대신, 그녀는 전공을 심리학으로 바꾸어 진학하는데요. 도중에 건강 문제로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1902년 모교인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돌아와 기어이 석사 학위를 마친 후, 릴리언은 바로 박사 과정을 지원합니다. 이때 지원한 전공은 영문학, 부전공으로 심리학을 선택했죠. 이후 1903년 동부 여행 도중 소개받은 프랭크와 1904년 결혼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앞서 적은 그대로입니다. 결혼 이후 프랭크의 연구는 부부 공동의 연구가 되었습니다. 프랭크는 릴리언에게 산업심리학 분야를 공부해 보라고 권유하죠. 릴리언 역시 그 편이 프랭크의 일을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해 동의합니다. 결혼 당시 이미 프랭크는 길브레스 사Gilbreth inc.라는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거든요. 이후 두 사람이 꾸리는 가정 생활은 여러모로 독특했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1. 그 집에선 항상 심부름거리가 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용돈이 추가로 필요한 아이들은 자신이 할 심부름거리를 골라 길브레스 부부에게만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와 입찰액을 적어 제시했는데요. 부부는 이중에 최저입찰액을 제시한 사람에게 응찰해 심부름을 맡기고 용돈을 주었다네요. 2. 프랭크는 매번 조끼를 입을 때면 아래부터 위로 올라가며 단추를 채웠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위에서 아래로 끼우면 7초가 허비되지만, 아래서부터 채워 올라가면 고작 3초밖에 안 걸린다나요? 3. 한번은 면도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면도솔 두 개로 거품을 낸 후, 면도칼 두 자루로 한꺼번에 면도를 하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걸 확인하려고 직접 실행에 옮겼다고 합니다. 당연히 면도칼에 목이 베여서 피가 났는데, 자녀들 증언에 따르면 프랭크는 베인 것 자체보다 그걸로 인해 목에 붕대를 감느라 2분이 오히려 허비된 것에 실망한 듯 보였다네요. 4. 평소에 프랭크는 가족 집합 신호로 휘파람을 정해 놓고 스톱워치까지 동원해서 신호 즉시 모든 가족이 무슨 일이 있어도 모이도록 훈련했다고 합니다. 가족들 전체가 모여야 할 일이 있거나 손님이 와서 가족을 소개시킬 때 등 여러 상황에서 휘파람 신호를 이용했다는데요. 어느날 이들 가족이 길가에서 낙엽을 태우던 중, 그만 불이 나무 벽에 옮겨 붙었다고 합니다. 프랭크가 즉시 휘파람을 불자, 불과 14초만에 온 가족이 밖으로 뛰쳐나왔죠. 불은 소방수에게 채 연락할 틈도 없이 꺼졌답니다. 5. 프랭크 길브레스가 가족 중에서도 유난히 특이한 성격이 아니었냐고요? 화장실에는 가족들이 매일 할 일과 공정표가 붙어 있었는데요. 이건 부부가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각종 가사일을 해낼 수 있을지 연구한 결과였습니다. 아이들은 밤에 자기 전 체중을 달아 그래프에 적고, 숙제를 마무리하고 손과 얼굴을 씻고 이를 닦으면 또 도표에 표시를 했습니다. 이때 아내 릴리언 길브레스는 스케줄에 기도하는 것도 표시하고 싶다고 제안했는데요. 프랭크는 심사숙고 끝에 각자 자유로 두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다네요. 특이한 성격은 부부 양쪽 모두였던 모양입니다. 1924년 프랭크 길브레스는 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제 1회 국제경영컨퍼런스에 참석하려고 여행길에 오릅니다. 도중에 그는 무언가를 문득 떠올리고 근처 공중전화로 아내이자 파트너인 릴리언에게 전화하죠. '오는 도중에 가루비누 담는 동작을 생략할 좋은 생각이 났는데 어떻게 생각해?' 믿기지 않지만, 그게 프랭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되었습니다. 슬로바키아에 가기도 전에 프랭크 길브레스는 심장병으로 사망합니다. 홀로 남은 릴리언 길브레스에겐 11명의 자녀와 집, 남편이 남긴 사업체와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남아 있었죠. 프랭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돌자, 심지어 그동안 길브레스 사와 거래해 온 업체들이 컨설팅 계약 중지를 통보했습니다. 릴리언 길브레스에겐 두 선택지가 있었죠. 모든 일을 접고 고향에 가서 남편 잃은 미망인으로 평생 가족을 돌보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남편의 업무 파트너로서 그의 연구와 일을 이어갈 것인가. 릴리언 길브레스는 남편의 모든 것을 자신이 잇기로 결심했습니다. 산업 공학의 퍼스트 레이디는 그렇게 탄생한 겁니다.
[무엇이든물어보살] 다른 무속인 점괘 들고 이수근, 서장훈 찾아온 출연자
돌아가신 아빠가 걱정돼서 점집에 갔는데 무속인이 아빠 빙의해서 "내 목숨값 어디갔어?" 라고 함 아빠를 잘 보내주고 싶은게 소원 찐으로 곤란해 하는중ㅋㅋㅋㅋㅋㅋㅋ 아버지가 6년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음 아빠 모습이 꿈에 자주 나옴 혹시 이승에서 떠돌고 있는게 아닌가 걱정 됨 (영상으로 보고싶으면 영상 궈궈) https://tv.naver.com/v/14646773 ★선녀보살 등판★ 1) 꿈에 자주 나오는거 본인 및 가족에게 전혀 문제 안됨 2) 생전에 억울하실 만한 일도 없었음 =진짜 아무 일도 없는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본인도 심지어 11시간씩 숙면취함ㅋㅋㅋ) 그렇다면 걍 긍정적이게 생각해라!! 이런 조언 아님xx 예전에 신동엽한테 들었던 얘기 너무너무 그리워서 꿈에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가족들 꿈에만 나오고 자기 꿈에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음 점점 얼굴을 잊게 된다면 얼마나 슬픔ㅠㅠㅠㅠ "누군가는 돌아가신 아빠가 꿈에 나타나면 걱정을 하고 점집을 찾지만" "어떤 사람은 오늘은 좋은 일이 있을건가 보다! 라고 생각하더라고" "아버지도 분명 딸이 즐겁게 살길 바랄거야" "무슨일이 있어도 아빠가 지켜줄거야 라고 생각해봐" 갬덩ㅠㅠㅠㅠㅠㅠㅠㅠ 아버지 생각하는 마음도 예쁘고 출연자분 걱정도 덜어주게끔 조언도 잘해주고 보는 나도 흐뭇해서 가져옴😌 ​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4)
남들 한 번 가기도 꺼리는 군대를 두 번 가겠다고 자원한 누메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 첫 영화 <퍼스트 어벤저>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까요? 영화 초반에 비쩍 마른 주인공이 군대에 자원했다가 퇴짜맞는 장면이 있었죠. 1차 대전 발발 즈음엔 젊은이들 사이에서 군에 자원하는 것이 의무이자 일종의 모험 같은 것으로 여겨진 모양입니다. 낯선 유럽 대륙에 가서 군에서 선전한 것처럼 안전하고 안락한 참호에 틀어박혀 적을 노려보며 몇 개월쯤 있다보면 어느새 예정된 주둔 기한이 끝나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당시 군에 지원한 청년들이 전쟁에 대해 가진 인식은 그런 정도였죠. 그 전쟁이 수년이 넘게 이어지고 전세계 열강이 참전하는 국제전이 될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https://youtu.be/JerVrbLldXw <퍼스트 어벤저> 영화 트레일러. 영상 가장 앞부분에 주인공이 군에 지원했다 퇴짜맞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실제에 비하면 신병 지원소가 만화처럼 과장되게 표현되긴 했지만요. 어쨌거나 누메로도 캡틴 아메리카처럼 호기롭게 군에 자원하러 일부러 워싱턴까지 옵니다. 막 설립한 회사 운영이 아직 채 본궤도에 오르기도 전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이 누메로와 프레데릭에겐 전화위복이 됩니다. 워싱턴에서 누메로는 우연히 육군이 가진 고민을 알게 됩니다. 미 육군은 유럽 대륙으로 보낼 장병들을 위해 각종 보급품을 안정적으로 수송해야 했죠. 그 보급품들 가운데는 물론 식료품이나 의약품 따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도중에 상하거나 훼손되지 않고 신선하게 목적지까지 물품을 수송하자면 무엇보다도 향상된 냉동 기술이 꼭 필요했죠. 마침 누메로에겐 그들의 고민을 해소해 줄 기술이미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자, 누메로는 군에 자원하겠다는 계획을 접고 다시 서모컨트롤 사로 돌아옵니다.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 유닛을 군 사양으로 개량해 생산하기 위해서였죠. 완성해 군에 납품한 냉동 장비는 현장에서도 고장 없이 잘 작동했습니다. 미군은 정식으로 서모컨트롤 사 제품을 군 장비로 채택하기에 이르죠. 곧 미군의 식수부터 혈장에 이르기까지 온도에 민감한 모든 품목이 서모컨트롤 사의 냉동 트럭으로 미군이 진출한 모든 전역에 배송됩니다. 유럽과 아프리카, 심지어 태평양 전선에서도 누메로와 프레데릭이 개발한 냉동차가 수송을 맡았죠. 군과 협력하면서 서모컨트롤 사는 비로소 두각을 보였습니다. 프레데릭이 완성한 기술은 단순히 트럭을 개선할 뿐 아니라, 야전병동과 병기창, 심지어 B-29 폭격기의 조종석과 엔진에까지 적용되었죠. 전쟁 동안 서모컨트롤 사가 미군과 계약한 금액은 천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서모컨트롤 사는 더 이상 작은 회사가 아니었죠. 1949년 기준 직원 200명에 매출 400만 달러 이상을 달성한 회사는 냉동 기술 훈련 학교를 자체 설립해 보유했고, 미 대륙과 중동, 유럽까지 진출해 제품을 판매했습니다. 프레데릭은 대전 후 기차, 배, 트럭 등으로 쉽게 옮겨 실을 수 있는 냉장 컨테이너를 개발했고, 동업자 중 하나인 Myron Green은 전국 유통 및 서비스망을 구축해 회사의 기틀을 세웠죠. 때맞춰 1950년대 새로운 산업이 등장해 급속히 성장합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냉동 식품과 슈퍼마켓 산업이죠. 프레데릭은 이 이후로도 다양한 기술을 연구해 특허를 내고 신제품을 출시했습니다. 1955년 버스용 에어컨을 최초 개발했고, 58년에는 기존 가솔린 엔진보다 훨씬 뛰어나 장거리 수송에 적합한 디젤 엔진 냉동차 설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가 생전 제출한 특허만도 60개가 넘죠. 그 분야도 냉동 설비에만 국한하지 않고, 엑스레이와 엔진, 음향 설비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1944년 프레데릭은 미국 최초로 냉동 엔지니어 협회 회원이 된 흑인이었습니다. 누메로는 계속 프레데릭과 다른 동업자들 도움을 받아 회사를 키웠죠. 50년대 중반에 서모컨트롤 사는 사명을 변경, 써모 킹Thermo king coperation 사로 바뀝니다. 현재도 전세계에서 검증된 기술력과 우수한 품질로 트럭용 냉동기뿐 아니라 다양한 냉동 수송 기술이 필요한 분야에 진출해 있는 기업입니다. 써모 킹 사가 1960년에 발표한 NWD 62 모델. 현재 써모 킹 사의 냉동 트레일러 제품들의 기본 틀이 된 모델입니다. 냉동차 이외에도 프레데릭 존스는 화물 열차의 냉동 차량, 군에서 혈장이나 약물 따위를 수송할 수 있는 휴대용 냉장 장치 등도 발표했습니다. 써모 킹 사가 발표한 상품 가운데는 심지어 우유 냉각기나 골프 카트 따위도 있습니다. 자신의 발명이 세상을 바꾸어놓은 것을 본 후, 1961년 2월 프레데릭 존스는 폐암으로 사망합니다. 미네소타는 1977년 그의 공로를 인정해 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죠. 고아로 자라나 흑인이란 이유로 차별받던 그가 마지막엔 어느 누구도 그 공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위인이 된 겁니다. 한편 사장인 조셉 누메로는 평생을 함께 한 파트너가 사망한 후, 회사를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 사에 팝니다. 1963년까지 그는 계속 사장으로 자리를 지킨 후, 동업자였던 마이론 그린Myron Green에게 넘기고 스스로는 명예 회장으로 물러납니다. 회사는 60년대 극심한 파업을 여러 차례 겪지만 흔들리지 않았죠. 하지만 66년, 써모킹 사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참사를 겪게 됩니다. 때는 1966년 3월. 회사는 우수 딜러와 직원들을 뽑아 포상 여행을 보내 주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출발해 하와이 호놀룰루, 일본 하네다를 거쳐 홍콩 카이탁 공항으로 향하는 영국해외항공 소속 911편 비행기에 75명의 임직원이 몸을 싣죠. 회사는 이들에게 17일간의 동양 여행 패키지를 제공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행 도중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호놀룰루에서 도쿄 하네다로 향하던 중, 비행기는 기상 악화로 후쿠오카 공항으로 회항합니다. 후쿠오카에서 하루 대기한 후, 비행기는 다음날 원래 계획했던 하네다 공항에 착륙하죠. 기상 상황은 좋아서 후지산이 뚜렷이 보일 정도로 맑았다고 합니다. 지상에서 비행 계획을 브리핑한 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이륙한 비행기는 예정대로 홍콩을 향해 날아갔죠. 그러다 문득 기장은 기수를 잠시 돌려 후지산 정상으로 향합니다. 물론 비행기 고도는 충분히 높아서 산 정상에 부딪칠 우려는 없었습니다. 탑승객들에게 하늘에서 보는 후지산 정상 풍경이라도 보여주려 했던 걸까요? 하지만 정상 즈음에서 비행기는 난기류를 만나 견디지 못하고 동체가 공중분해되어 버립니다. 날개를 잃은 항공기는 후지산 동쪽 6킬로 떨어진 숲에 뿌연 연기를 내며 추락하죠. 써모킹 임직원 75명을 포함해 당시 탑승객과 승무원 124명은 모두 사망합니다. 사망한 임직원 가운데엔 임원급이 3명, 주요 딜러가 35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망한 임원 가운데엔 부사장 랄프 포터도 있었죠. 또 회사에서 보내주는 포상 여행이었기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한 경우가 총 52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바람에 63명의 아이가 부모를 잃었죠. 써모 킹 사 입장에선 창사 이래 최악의 참사를 경험한 것입니다. BOAC 911편 추락 사고. 피해자 중엔 일본인, 한국인도 소수 있었지만 대부분이 써모 킹 사 임직원과 같이 외국인들이었습니다. 이 사고 이후 난기류에 대한 주의 대응이 강화되었다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회사는 이후로도 건재했습니다. 모기업 웨스팅하우스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그룹 내에서 유일하게 좋은 성적을 내어 알짜 기업 노릇을 톡톡히 해냈죠. 1991년 누메로가 사망할 당시엔 이미 회사는 수백만 달러 규모 사업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2700여 명을 고용하고, 도미니카나 아일랜드, 스페인에도 공장이 있었죠. 1993년엔 일본 시장 거의 절반을 점유했고, 이듬해에는 동유럽, 아시아 지역에서 딜러망이 36%나 신장했습니다. 1991년, 미리 적은대로 조시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프레데릭 존스는 이미 사망한 뒤여서 직접 훈장을 전달받지는 못했지만, 그 미망인이 행사장에서 대신 수령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이 흑인에게 수여된 건 프레데릭 존스가 최초였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냉동 운송 기술을 개발해 선적과 식료품 시장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은 공로가 인정되었죠. Medal of Technology & Innovation. 1985년 레이건 행정부에서 처음 수여한 이래, 역대 대통령들이 산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들을 선정해 표창했습니다. 듀폰 사나 빌 게이츠, 3M 등도 같은 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이러한 영광을 누릴지는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하나는 대공황으로 완전히 파산하고 학점이 모자라 법대 졸업을 하지 못한 청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경주용 차를 가지고 대회에 나가길 바랐던 극장 영사기사였죠. 그들에겐 기회가 있었고, 기회를 붙잡을 능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편의점과 마트에서, 혹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그들이 남긴 유산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1930년대 누메로와 프레데릭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손을 맞잡은 그 때 덕이란 생각이 듭니다.
내년부터 수입맥주 4캔 만 원이 없어진다?
맥주를 즐기는 사람들은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싼 가격에 다양한 맥주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소위 '4캔 만 원' 수입맥주를 구입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더 나아가 '8캔에 만 원'인 프로모션도 더러 있습니다. 최근 정부의 주류 과세 개선안에 의해 수입 맥주의 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오늘 RedFriday에서는 주세율 과세체계 개편에 따라 우리 일상생활에 미칠 영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주류 종량세 도입과 '4캔 만 원' 수입 맥주 얼마 전 홍남기 경제 부총리가 전체 주류에 대한 종량제 전환을 검토할 것을 밝히면서 지지부진하던 세제 개편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수입산 맥주가 싼 가격에 할인행사를 통해 팔리는 이유는 주세율 과세체계가 국산 맥주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산 맥주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2. 국산 맥주와 수입 맥주의 주세는 같다? 우리나라에 유통되는 맥주의 주세는 모두 72%로 동일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술의 출고 가격에 주세를 부과하는 '종가세' 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즉 세금 부과의 기준이 되는 가격인 과세표준이 높을수록 세금이 높아집니다. 국산 맥주의 과세표준은 제조원가 + 판매관리비 + 이윤이 과세표준이고 수입 맥주는 관세를 포함한 수입신고가가 과세표준으로 책정되어 판매관리비와 이윤은 빠져있습니다. 또한 수입사가 현지 판매 가격과 상관없이 수입가격을 낮게 신고하면 세금을 그만큼 덜 낼 수 있습니다. 5. 소맥 필수 맥주 카스(CASS)는 국산 맥주가 아니다? 카스(CASS)로 유명한 오비맥주는 안호이저부시-인베브(AB인베브)라는 브라질 자본의 회사가 모기업입니다. 즉 오비맥주는 100% 브라질 자본회사로 우리나라 회사가 아닙니다. AB인베브는 세계 맥주 점유율 1위 기업이며 이름만 대면 알만한 외국 맥주들이 그 회사의 소유입니다. 국내에서 나오는 수익을 신규 공장 증설 등에 재투자하지 않고 한국에서 벌어들인 영업이익의 70%가량을 해외 본사의 배당금으로 보내 것이 국부유출이라는 논란에 있기도 합니다. 지난 4월 당기순이익보다 177억 많은 3,450억 원 규모의 배당을 실시하였으며 모두 AB인베브로 돌아갔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원문을 참고하세요. # 원문 출처: https://redfriday.co.kr/147 # 많이 본 컨텐츠 # 매일 업데이트되는 생활꿀팁과 알아두면 도움되는 이야기를 팔로우 하셔서 쉽게 구독하세요. # ‘좋아요’ 와 ‘공유하기’ 많이 부탁드려요.
메이드 인 공장
'메이드 인 공장' / 김중혁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소설가들의 에세이를 읽는 걸 좋아한다. 소설을 읽으며 상상해보던 작가의 성격, 가치관, 삶의 모습 등을 에세이를 통해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메이드 인 공장'을 읽으면서 김중혁 작가님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글에서부터 얘기를 나눠보면 즐거울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 에세이는 저자가 한겨레에 1년 동안 연재한 칼럼을 모은 책이다. 총 열네 군데 공장을 돌아다니며 쓴 공장 탐방기가 들어있다. 제지, 콘돔, 브래지어, 간장, 가방, 지구본, 초콜릿, 도자기, 엘피, 악기, 대장간, 화장품, 맥주, 라면 공장까지 다양한 공장들의 이야기가 유머러스한 문체와 만나 즐겁게 읽힌다.(사실 열다섯 군데지만 한 군데는 김중혁 작가님의 개인 글 공장이다. 김중혁 사장님?) 우리는 공장 하면 회색빛 벽으로 된 커다란 건물과 웅웅 거리는 기계의 소음, 왠지 오존층을 파괴하고 있을 것만 같은 검은 연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직접 돌아다닌 공장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칙칙한 공장의 이미지를 깨고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 노력, 땀과 열정을 보여준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읽는 것은 즐겁고 놀라웠다. 하나의 물건을 만드는 과정 속에는 생각보다 훨씬 큰 노력과 구슬땀이 들어가고 생각지도 못한 과정들이 존재하기도 했다. 당연히 기계가 넣는 줄 알았던 너구리 라면 속 다시마는 사실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넣는 것이고(그 덕에 다시마가 두 개나 들어있는 로또가 존재하는 것이다!), 콘돔 불량품 검사 과정에서는 사람이 직접 콘돔을 하나하나 검사를 위한 철형에다 끼운다(아주 정확하고 재빠르고 일사불란하게). 그냥 종이를 인쇄해서 붙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지구본 공장에서는 정확한 정보를 지도에 넣기 위해서 어느 나라가 수도를 옮기는지, 나라의 이름이 바뀌거나 독립한 나라는 없는지(버마에서 미얀마로 이름이 바뀌었다거나 남수단이 분리독립을 했다거나) 눈에 불을 켜고 정보를 모으고 간장 공장에서 나오는 간장은 숙성 탱크 안에서 1그램당 100만 마리 이상의 효소들과 함께 무려 6개월이라는 시간을 거쳐서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마트에서 몇 천 원을 주면 살 수 있는 간장에도, 오동통한 면발의 너구리 라면 속에도,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살 수 있는 콘돔 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매일 식사 전 농부 아저씨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머릿속에 새겼던 사실을 나이를 먹으면서 잊어버릴 때가 잦다.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실은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이 책을 단순한 공장 탐방 보고서가 아니라 감칠맛 나는 에세이로 끌어올리는 데는 김중혁 사장님의 글 공장이 단단히 한몫했다. 군데군데서 튀어나오는 (아재끼가 다분한) 유머들과 소설가의 관점으로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바라보는 시선. 두 가지가 합쳐져 나온 김중혁 글 공장의 완성품 '메이드 인 공장'은 품질 보증 상품이다. 간장 공장 산책기에서 어김없이 처음부터 치고 들어오는 간장 공장 공장장 말장난이라던가(사실 안 나오면 서운할 뻔했다), 단거는 위험(danger)하다는 아재 냄새가 풀풀 풍기지만 5분 후 피식 웃게 되는 문장, 지구본 조립 전문가가 툭툭 쳐가며 남반구와 북반구를 조립하면 이렇게 쉽게 지구가 만들어진다는 귀여운 농담까지. 작가님 본인의 에피소드들과 섞이며 여기저기 들어가 있는 유머들은 윤활유처럼 '메이드 인 공장'이 부드럽게 돌아가도록 만든다. 각 물건들에 대한 작가님의 남다른 시각도 '메이드 인 공장' 완성에 큰 역할을 했다. 코르셋 대신 간편한 속옷으로 제작된 브래지어가 여자의 속옷이라기보다는 일하는 여자의 작업복 같다는 말이나 화장을 지우고 나서야 감정의 전쟁터에서 겨우 벗어나는 셈이라는 문장, 갓 만들어진 지구본을 향해 팽팽하고, 따끈따끈하고, 온화하고, 주름 하나 없는, 새것인 지구가 부럽다고 말하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는 독자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주위를 둘러보도록 만든다. 소설가의 시각과 관점, 유머러스하고 유려한 문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공장 내부의 이야기가 합쳐져 만들어진 '메이드 인 공장'. 김중혁 글 공장에서 1년의 기간을 거쳐 제작된 상품이다. 김중혁 글 공장 속 수필 라인 노동자들의 실력과 노력을 믿어보기로 하자. 소설 속 한 문장 다시마만큼은 인간이 넣는 세상을 꿈꾸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기계는 더욱 진보할 것이다.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 (2)
지난 글에선 냉동선의 등장에 대해 잠깐 다뤘습니다. 그 내용을 잠시 보충할까 합니다. 냉동선이 개발되기 전까지, 호주나 남미 등지 국가들은 염장이나 통조림 등으로 가공해 고기를 수출했습니다. 당연히 그 품질은 만족스럽지 않았죠. 양은 양모를 생산하고 남는 고기는 폐기하기가 다반사였습니다. 장기 보존 기술에 대한 특허만도 200여 건이 넘게 쏟아질 정도로 관심도 높았죠. 1800년대 영국은 산업 혁명과 과학 혁명을 겪으며 인구가 폭증하고, 동시에 식량 생산은 원할하지 못한 형편이었습니다. 1850년 2800만인 인구가 1880년 3500만까지 증가합니다. 이 30여 년간 영국내 육류 가격은 두 배 이상 폭증했죠. 이런 추세에 따라 영국의 식민지인 호주와 뉴질랜드에선 소와 양의 사육이 증가합니다. 1851년 소 6만 8천 두, 양 23만 두를 키우던 게, 1880년 소 70만 두, 양 1300만 두로 급증했을 정도로요. 자연히 육류 수송 문제가 각국에서 큰 고민거리가 된 겁니다. 최초 냉동 선박에서 냉매로 채택된 건 암모니아 가스였습니다. 첫 항해는 순탄치 않았지만, 가능성을 본 사람들은 이제 세계 각지에서 고기와 과일을 배에 실어 날랐죠. 호주에선 스트라스레븐 사가 영국으로 고기를 실어 나릅니다. 다른 회사인 뉴질랜드호주랜드 사는 양고기와 돼지고기 500두를 싣고 98일만에 런던에 도착합니다. 그 결과 싣고 온 상품을 현지보다 두 배 이상 이익을 올렸죠. 수익성 있는 사업엔 자연히 투자가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마토라 호는 냉기 전달 방식을 개선해 에너지 효율을 높였죠. 1890년대에 이르면 선박도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바뀝니다. 1902년에 설립된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는 바나나를 운송했는데요. 바로 지난 글에서 자메이카산 바나나를 미국인들에게 소개했던 선원, 로렌조 베이커가 이 회사의 공동 창립자입니다. 냉동선은 과일과 육류로 전 세계를 연결했지만, 다국적 기업과 독재자의 유착 행태를 낳기도 했습니다. 과테말라 독재자 호르헤 유비코는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 등 외국 기업이 자국 농지를 사들여 농장을 여는 것을 허용했고, 이 때문에 자국민 농부들이 이들 외국 기업의 농장에 고용되어 일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1902년은 또 다른 기념비적인 발명이 있었던 해입니다. 바로 윌리스 캐리어가 에어컨의 원리를 발명한 해죠. 처음엔 인쇄소를 위해 이 기술을 발명했다는 얘기는, 빙글에서 이미 다른 분이 올려 주신 바 있죠. 1906년 공기조절장치 특허로 업계에 인정받은 캐리어는, 1915년 여섯 명의 동업자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캐리어 사를 설립합니다. 이게 지금도 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캐리어 사죠. 백화점에 설치된 세계 최초 터보 냉동기(1922년), 극장 내에 에어컨 설치(1925년), 20년대 말 발표한 소형 에어컨에 고층건물 냉방 공조 설비 발명(1939년)에 이르기까지, 캐리어는 정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겼습니다. 캐리어 사가 에어컨 기술로 명성을 떨치고, 유사 기술을 가진 업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아직 이 글의 주인공은 무대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이 두 사람은 캐리어 못지않게 세상을 바꿔놓을 참이죠. 캐리어가 세계 최초 에어컨을 내놓은 후 한참이 지나 1929년, 조셉 누메로라는 한 청년은 곤경에 처해 있었죠. 상당한 엄친아 기질이 있던 그는, 일찌감치 부동산과 제조업, 금융업 등에 뛰어들어 25세가 되자 잠시 은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은 이미 벌 만큼 벌었으니, 못해본 공부를 해보자는 마음이 불현듯 든 거죠. 미네소타 대에 들어가 법학 공부를 한 끝에, 그는 졸업 시험에는 합격합니다. 하지만 이수 학점이 살짝 부족한 게 발목을 잡죠. 설상가상 1929년 대공황으로 미국 주식 시장이 붕괴하면서 그 역시 파산에 이릅니다. 고민 끝에 그는 졸업을 포기하고 학교를 나옵니다. 다시 사업에 뛰어들려던 그에게 한 친구가 좋은 사업 아이템을 소개해 줍니다. 그가 알려준 건 이제 막 대중에 소개되기 시작한 유성 영화 사업이었죠. 당시 업계 선두인 웨스턴 일렉트릭(호손 공장 운영하던 걔네 맞습니다), 그리고 RCA 두 회사는 비싼 영화 장비를 극장에 파는 대신 이를 빌려주고 임대료를 받는 식으로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누메로는 이들 제품보다 덜 비싸고 품질이 나은 극장 설비를 개발한다면 승산이 있겠다고 여겼죠. 그렇게 해서 새 회사인 울트라폰 사운드 시스템 사가 설립됩니다. 야심만만한 누메로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실력 있는 기술자였죠. 그 무렵, 미네소타의 Hallock이라는 지역에선 한 재능 있는 영사 기사에 대한 소문이 극장가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독학으로 기술을 익힌 실력 있는 기사였죠. 게다가 창고에 있는 잡동사니만으로 당대 무성 영화 장비를 유성 영화용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실력자라나요? 소문을 들은 누메로가 대번에 그를 미니에폴리스에 있던 회사로 초청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소문난 기술자에겐 한가지 지울 수 없는 흠이 있었습니다. 기술자 프레데릭 존스의 아버지는 아일랜드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죠. 193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인종 차별은 극심했습니다. 캔터키 코빙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어머니가 일찌감치 가출해 아버지 손에서 7세까지 자랐습니다. 그가 7세가 되던 해, 아버지는 캔터키의 한 사제에게 보내 버렸죠. 2년 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그에겐 기댈 곳이 없어졌습니다. 프레데릭은 11살 되던 해 사제에게서 도망쳐 신시내티로 갔죠. 원래 재능이 있었는지, 아니면 부지런히 노력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과 11세에 홀로 도시로 온 아이는 16세가 되자 이미 신시내티 한 자동차 수리점의 십장이 되었죠. 가게 주인은 자동차 경주에 관심이 많았는데, 프레데릭은 고용주를 위해 경주용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개발했습니다. 그 자신도 언젠가 자신만의 경주용 차를 갖는 게 꿈이었죠. 하지만 곧 흑인은 자동차 경주에 나갈 수 없단 걸 알고 맙니다. 상심한 나머지 그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여러 수리공 일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죠. 미네소타 Hallock의 한 농장에서 그는 30만 에이커 규모 농장 내 모든 장비를 수선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여기서도 그는 더트용 레이싱 카를 만들 기회가 있었죠. 한발 더 나아가 초기형 설상차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에겐 자동차에 남다른 열정과 집착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프레데릭은 기계공, 전기공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하다 1919년 귀국합니다. 군대에서 익힌 기술에 폭넓은 관심까지 더해져, 그는 이후로도 잡지 등을 참고하며 독학으로 실력을 쌓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기회가 찾아오게 되죠. 당시 영화관들은 기존에 설치된 무성 영화 장비를 새 유성 영화 설비로 바꾸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때 영사기사로 일하던 프레데릭이 자기가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나섰죠. 가죽 벨트 부품 등 여러 잡동사니를 이용해 그는 정말로 음향과 영상을 동시 상영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해냅니다. 이후 기술 변화에 따라 그때 그때 적절하게 대응해 준 건 덤이었죠. 막 유성 영화 산업에 뛰어든 누메로에겐 프레데릭 존스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인재였습니다. 흑인이라서, 당대 만연한 인종 차별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누메로의 회사에서 프레데릭은 수석 엔지니어 자리를 꿰차죠. 하지만 누메로도 프레데릭도 새 파트너가 평생을 함께할 사이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을 겁니다. 1991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에게 National medal of Technology & Inovation을 헌정합니다. 특히 프레데릭 존스는 이 상을 받은 최초의 흑인으로 기록되었죠. 1930년 두 사람의 만남은 그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 오늘날 우리가 사철 신선한 음식을 마트나 슈퍼마켓, 심지어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