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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다만 긴 거짓말
삶은 다만 긴 거짓말 사라지는 것들은 왜 단단한 것들 만을 남기고 떠나나요 말랑한 것들은 왜 사라지고 마나요 바다의 바닥에 딱딱한 죽음 하나가 구릅니다 조개 껍데기 하나가 구릅니다 때마침 옆을 지나던 소라 게 한 마리 관심을 보이며 다가옵니다 빈 껍데기 앞에 선 게는 그 안을 오래도록 들여다 봤습니다 집이 너무도 깨끗했기에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웠거나 그게 아니면 누군가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게는 생각했습니다 죽음이 보기에 삶은 다만 긴 거짓말이고 삶이 보기에 죽음은 유치한 장난이겠죠 금방이라도 누군가 돌아올 것 같은 깨끗한 빈집 앞에서 게는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집게로 조개껍데기를 두 어번 두드려 보고 또 괜히 주위를 서너 바퀴쯤 돌아보고 나서야 빈 껍데기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한 게는 그제야 말랑한 아랫배를 껍데기 속에 밀어 넣었습니다 가장 단단한 것 속으로 가장 부드러운 것을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또 한 번의 밤이 찾아옵니다 등껍질이 막 영글어 가는 이른 밤 속에서 게는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소리의 출처를 찾던 게는 이내 그 출처가 자신의 집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껍데기가 알맹이를 집이 저를 비워놓고 사라진 주인을 단단한 것이 말랑한 것을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그리하여 게도 빈집처럼 가만히 눈을감고 집게발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습니다 게가 잉태한 슬픔은 별이 되어 빈집의 벽을 타고 흐르고 게의 바다는 그 농도를 더해갔습니다
습관을 연구한 공학자, 길브레스 부부 (2)
지난 글에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서 놀랐습니다. 괴짜 부부에 얽힌 일화를 나열했을 뿐이고, 어쩌면 지루할 법한 얘기인데도 말예요. 하지만 저도 그렇습니다. 처음엔 프랭크 길브레스와 동작 연구에 대해 알아보다가, 우연히 이들 부부의 가정사 얘기를 보게 되었죠.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어' 싶은 뜨악함과 함께, 이들 가족에 대한 흥미도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지난 글을 적은 이유도 그런 감상을 다른 분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였지만, 과연 얼마나 의도가 통했을까요? 각설하고 다시 길브레스 부부 얘기입니다. 흐름대로라면 릴리언 길브레스의 삶에 대해 얘기해야겠지만, 우선은 프랭크 길브레스 얘기부터 하죠. 한 가지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올바른 습관을 익히면, 다른 작업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일하는 데 도움이 되는 습관은 하는 일의 종류와 상관없이 중요하다. 한 가지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습관을 익히는 방법을 알게 된 사람은 당연히 다른 일에도 같은 방법으로 좋은 습관을 지니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상은 헨리 간트의 책, <일과 임금 그리고 이익>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합니다. 헨리 간트는 오늘날 간트 차트로 알려진 일정 관리 도표를 창안한 인물인데, 세계 최초의 컨설턴트이자 과학적 관리론을 창시한 프레데릭 테일러의 제자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테일러나 길브레스 부부와도 생각이 통하는 부분이 있었겠죠. 때는 1907년, 아직 프랭크 길브레스가 살아 있을 때 얘기입니다. 길브레스 부부는 무언가를 계기로 프레데릭 테일러와 만날 기회를 얻습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두 거장은 이내 서로가 하는 연구가 거의 유사하단 걸 눈치채죠. 테일러의 <시간 연구>와 길브레스 부부의 <동작 연구>는 다소 차이점이 있었지만 노동자의 능력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작업 방식을 개선한다는 발상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프레데릭 테일러 개인적으로도 살면서 지금껏 걸어온 길이 프랭크와 유사했습니다. 우수한 성적을 올린 학생이었지만, 개인 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든 점도,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 이윽고 자신만의 분야로 독립하게 된 것도 비슷했죠. 프랭크와 테일러 사이에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던지, 1912년 프랭크는 <과학적 관리 입문>이라는 문답 해설서를 출간해 테일러의 이론에 관심과 지지를 보였습니다. 프레데릭 윈슬로우 테일러. 세계 최초의 컨설턴트. 부유한 집안 출신에 직장에 다니면서 이런저런 특허로 많은 돈을 벌었고, 은퇴 후 강연, 자문, 저술 활동을 왕성하게 수행했습니다. 작업장에 스톱워치를 끌어들여 노동자의 작업과 휴식 시간을 통제한 게 그의 업적 중 하나인데, 이후 노동자들이 반발하자 1912년 미 의회에서 작업장에서 스톱워치를 쓰지 못하게 하는 법까지 제정했다고 하죠. 또 테니스와 골프를 잘 쳐서 1881년 미 테니스 복식 챔피언십에서 우승 트로피를 따는가 하면, 1900년 하계 올림픽에서 골프 종목 4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골프채를 손수 디자인하기도 했다네요! 테일러와 만남을 가진 지 몇 년 후, 프랭크는 <동작 연구(1911년)>라는 저서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재미있게도 1911년은 테일러가 <과학적 방법론>을 출간한 해이기도 합니다. 이 <동작 연구>에서, 프랭크는 작업자의 동작을 분석해 가장 기초 단위 요소 17개로 분류하고, 이들 각각에 부호를 붙이는 한편 효율적인 행동과 비효율적인 행동을 구분합니다. 자신이 고안한 이 새로운 체계를, 프랭크 길브레스는 서블릭therblig이라고 지칭합니다. 혹시 눈치채셨나요? 서블릭이란 이름은, 바로 길브레스gilbreth 성을 뒤집어 쓴 거란 사실을요. 이것 또한 그가 남긴 묘한 기행 중 하나입니다. 1912년 이들 부부에게 또 한 번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부인 릴리언이 그동안 부부가 함께 연구한 바를 토대로 산업심리학 논문 한 편을 써서 대학 측에 학위논문으로 제출합니다. 하지만 대학 당국이 논문 접수에 조건을 걸죠. 대학 측 논리는 이렇습니다. 릴리언의 주전공은 영문학이고, 따라서 제출한 논문은 학위 취득에 부적합하다. 하지만 릴리언이 본교로 돌아와 1년간 산업 공학 전문 실습을 수료한다면 논문을 접수받겠다. 문제는 미 동부에 사는 릴리언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모교로 홀로 돌아가 수업을 수료하는 게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단 사실이었죠. 고민하는 릴리언을 위해 프랭크가 아이디어를 내죠. 그는 출판업자를 찾아가 설득한 후, <산업공학잡지>에 릴리언의 논문을 1년간 연재할 수 있도록 허가를 따냅니다. 릴리언의 논문은 1914년 <경영심리학>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판됩니다. 이 책에서 릴리언은 여러 기업들이 권위와 수직적 명령에만 의존하는 전통적 체제에서 탈피해 과학적인 관리방법론에 기반한 새 체제에 따라 운영해야 한다고 역설하죠. 책에 적은 저자명은 L.M.Gilbreth였습니다. 저자가 여자인 게 알려지면 불리한 대우를 받을까 우려해서 필명처럼 이름을 적은 거죠. 그러다보니 평소 길브레스 부부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대체 저자가 누구냐는 이야기가 나왔던 모양입니다. 그럴 때면 프랭크 길브레스는 자신에게 질문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했다지요. '우린 결혼한 사이입니다.' 마치 두 사람은 일심동체이니 누가 썼느냐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처럼 말이죠.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학 측은 새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릴리언이 경영 혹은 심리학 학위를 주는 어느 대학에서건 전문 실습을 받는다면 학위를 수여하겠다고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릴리언은 1915년 브라운 대학 응용경영관리 박사 학위를 무사히 취득합니다. 학위를 취득한지 불과 3일 후에 출산을 하게 됐지만요. 1916년 부부는 노동자의 피로를 유발하는 요소들을 분석한 <피로 연구>를 발표합니다. 1917년엔 <응용동작연구>를 내놓으면서 동작연구를 위해 활동사진기 촬영, 작업자 몸에 꼬마전구를 달아 행동 궤적을 찍는 사진 등 독창적인 방법론을 제시했고요.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랭크는 육군 소령으로 입대합니다. 릴리언은 부상 군인의 재활 연구에 뛰어들죠. 장애인들을 위해 몇몇 장치를 새로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팔만 가지고도 쓸 수 있는 타자기 같은 거죠. 부부는 전쟁 후 상이 군인들의 재활을 돕는 전쟁위험보험법 통과에도 협력했습니다. 이러한 연구 성과는 1920년 <장애인을 위한 동작 연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죠. 친구 프레데릭 테일러도 그랬지만, 길브레스 부부는 동작 연구가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여 더 나은 처우를 받게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생각한 건 프랭크 자신의 개인적 경험 탓이기도 했죠. 건축 일을 할 때, 프랭크는 자신의 동작 연구 성과를 실제 현장에 적용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프랭크의 저서 <동작 연구>는 벽돌 쌓기나 건축에 관계된 사례가 많습니다. 예컨대 벽돌쌓기의 경우 동작연구를 적용했을 때 사용하는 동작 수는 18개에서 5개로 줄고, 시간당 쌓는 벽돌 수는 175개에서 350개로 크게 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작업 생산량은 두 배가 증가했죠. 한편, 테일러는 작업자의 근로 의욕을 높이기 위해 성과급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올바른 작업 방식으로 생산성을 높이면, 그 혜택이 곧 작업자에게 돌아가도록 설계한 거죠. 또 작업자 개개인의 효율이 증진되면 회사 전체의 수익성도 높아집니다. 결과적으로 노사 모두 윈윈이죠. 정작 노동자들에게는 기계적 수탈과 착취를 위한 이론으로 비판받았지만, 프랭크의 저서에는 작업자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작 연구>의 몇몇 구절을 아래 옮겨 적을까 합니다. 작업자가 맡은 일 이외의 건강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전적으로 회사 복지 부서의 담당이다(...) 작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작업자의 개인 생활을 살펴보는 일도 복지 담당 부서의 역할이다. 복지 부서는 작업자가 개인은 물론 속한 집단에서 더욱 가치 있는 경제인이 되도록 지원한다. ...따라서 작업자를 배치할 때는 작업자가 일을 대하는 태도와 성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작업자는 자신의 성향에 적합한 작업에 배치될 때 작업 지시를 더 잘 지키며 더 높은 성과를 낸다. 수습공이 당장 오늘 해야 할 일을 훈련하면 그 훈련은 무조건 실패한다. 수습공은 이론적인 훈련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실습에 적응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실습이 없으면 수습공은 실제 작업에서 연습을 하게 되고 결국 제대로 된 결과를 얻지 못한다... 미국의 건축 분야에서 수습공이 훈련을 받는 기간은 일반적으로 3년 정도이며 때로는 21세가 될 때까지 훈련을 받기도 한다. 최상의 조명은 작업자가 피로를 해소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줄여준다. 가장 좋은 조명과 가장 나쁜 조명의 설치비용 차이는 눈의 피로를 줄여 휴식 시간을 단축함으로써 절약되는 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많은 생산량을 달성하려면 작업자가 개인 공구를 쓰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작업자에게 개인 공구를 쓰게 하면, 작업자는 공구 구매 비용을 아끼고 도난을 당할 경우 손해를 줄이기 위해 같은 종류의 공구는 한 가지 크기만을 구입한다. 그러나 대부분 작업에서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다양한 크기의 공구를 사용해야만 보다 많은 생산성을 얻을 수 있다. 1910년대 인물의 시각으로 적은 것이기에 오늘날 현실과는 다소 맞지 않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프랭크 길브레스가 얼마나 꼼꼼하게 작업자들을 봐오고 개선책을 나름대로 궁리했는지를 알 수 있는 구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https://ridibooks.com/books/2602000003 프랭크 길브레스의 <동작 연구>. 이 책이 번역 출판되어 있단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이미 출간된 지 100년도 넘은 고전이라 할 만한 책이네요. 릴리언 길브레스 이야기는 이 다음 글에서 적겠습니다.
펌) 오늘 첫 출근했는데 펑펑 울었다.
올해 쭉 백수로 놀다가 최근에 좋은 기회가 생겨서 일하게 됐어. 오늘 긴장하고 첫 출근해서 회사 이메일도 뚫고 명함도 만들고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가다가 다음에서 클라우드 쓰는게 하나 있대서 정말 오랜만에 다음 메일에 접속을 했어. 스팸 메일만 쌓여있길래 쭉 지우고 지우다가 중간에 내가 쓴 메일함을 궁금해서 들어가보게 됐는데 내가 2001년에 쓴 메일이 하나 남아있더라.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생각없이 썼던 메일 한통이. 기억도 안나지만 참 철없을 때였나봐.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 암이 걸리셔서 3년동안 고생하다가 돌아가셨어. 그때 나는 부모님이랑 떨어져 지내면서 학교에서는 전교 1등하다 공부도 안하게 되서 부모님 실망시켜드리고 학교에선 왕따도 당하는데 말할 사람도 없어서 집에서 폭식으로 살도 엄청 쪘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실망만 드린거 같아서 항상 죄송스러운 마음이 커. 지금도 엄마한테 효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고등학교때 대학교, 또 군대에서도 좋은 친구, 선배, 선생님들을 만나서 지금은 살도 빼고 웃으면서 잘 지내. 아무튼 갑자기 내가 메일을 쓴 거 보니까 설마 답장이 있을까 싶어서 지우던거 멈추고 메일 하나 하나 찾아봤어. 첫 출근이라는 놈이 ㅎ  그런데 맨 처음 페이지에 아버지 답장이 있는 걸 보는 순간 심장이 털컥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어. 손이 떨리더라 정말. 아버지가 지켜보는 것만 같았어. 사실 학교 졸업할때, 군대 갈때,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추억으로만 남아있어서 참 원망스러웠는데 오늘은 아들 처음 출근한다고 아버지가 하늘에서 편지를 보내셨나봐. 이거보고 화장실 뛰어가서 소리없이 눈물이 나는데 멈추지가 않더라. 19년만에 아버지한테 답장을 보내네. 아버지 저 잘 컸어요. 늘 지켜봐주시는데 몰라서 죄송했어요.  보고싶어요. 나중에 아버지랑 꼭 소주 한잔하면서 저 나름 잘 살았다고 어리광한번 부리고 싶어요 사랑해요 아빠   (출처) 오열 ㅠㅠㅠㅠㅠㅠㅠㅠㅠ
MBTI별 관심 표현법.txt
오떠냐곰 맞는 거 같냐곰? 너무 짧은 거 같아서 긴 버전도 가져왔으니 아직도 목마르다면 보라곰ㅋㅋ MBTI 성격 유형에 따라 사랑에 빠졌을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INFJ 내향적인 타입은 가끔 외향적 활동을 배제하고 상황을 분석하고 잘못 될 수 있는 것을 고치는 반복에 빠질 수 있습니다. INFJ는 진실에 실망하지 않게 상대의 매력을 이상화 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부끄러워하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합니다. 상대가 먼저 힌트를 얻기를 바라고 그와 관계를 맺게되면 사려깊은 일을 하려 노력할 것입니다. 가끔 너무 미루고 너무 오래 기다렸다가 움직이기 때문에, 행동 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을때 상대를 놓칠 수 있습니다. INFP INFP는 가끔 로맨틱한 상상속 호감을 현실로 만들 위험을 겪지 않도록 스스로 설득합니다. 그들은 상대를 지나치게 이상화시켜 실망에 빠질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포함해 어떤 방법으로든 호감가는 사람에 대해 알수 있는 모든걸 알고자 할것입니다. 감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기에 용기를 내는 것이 어려울 수 있으며 먼저 친구로 다가가려 합니다. 상대의 삶게 깊게 들어가서 그들과 친밀하게 느끼게 하는것이 전략입니다. 그런 다음에 사랑과 매력으로 낭만적 유대감을 형성해서 더 진전 시킬 수 있습니다. INTJ INFJ와 마찬가지로 욕구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상대를 분석하는 길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거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기 때문에 로맨틱한 기회는 지나간 후입니다. 또 그들은 감정에 당혹감을 느껴 두려워하고 자신을 낭만적 상황에 빠지게 하는데에서 보호하게 됩니다. 사랑에 빠졌을때 조차도 감정의 크기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제를 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기에 너무 높은 수준이나 기대를 합니다. INTP INFP와 마찬가지로 INTP는 누군가에게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고도 편하게 있을 수 있습니다. 상대에게 관심이 있을때, 어떤일이 일어날 적절한 장소에 자신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려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특별한 사람과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기회를 극대화 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화 시작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통 관심사를 찾습니다. 그들의 지식과 재치로 상대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 노력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최상의 타이밍이 언제인지 측정하는데 시간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ENFJ ENFJ는 사람들과 친근감을 가지는 것에 거의 어려움이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우호적이고 잠재적인 이성 관계에도 자신의 독특한 매력과 재치로 자연스러운 관계를 추구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 강하게 빠졌을때 그들은 열정적이기 힘들고 보통때 처럼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런점이 그들을 한발 물러나게 만들고 상대의 마음을 얻을 능력을 고심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평가 받는데 지나치게 걱정할 수 있으며 상대를 쟁취하지 위해 옳은 것들을 하려 할 것입니다. ENFP ENFP는 본질적으로 자연스럽고 로맨틱한 긴장을 주는 관계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기면 갑자기 마음과 정서적 안녕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낙관적 전망으로 떨림을 극복하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긴장과 떨림을 느낄 수 있지만 거절당할 위험은 그들의 긍정적 사고를 멈추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이상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호감으로 발전하는데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 그들은 어떻게 진행 해야할지 갈등을 느낄 수 있습니다. ENTJ ENTJ가 감정에 눈이 멀게 되면 실제로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결과를 바탕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서, 장기적 전망이 확실하고 그것이 인생의 목표와 호환된다 생각되면 호감을 느낄 것입니다. 관계에 대해 장기적인 관점이 있기 때문에 막다른 골목이 있는지 원치않은 결과가 있을지 모든요소를 신중하게 살핍니다. 그럼에도 위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신속하게 계획을 세우고 수행합니다. 일부 ENTJ는 고집스럽고 쉽게 포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다른 ENTJ들은 불필요한 감정을 끊어내고 갈길을 가는 면을 보일 수 있습니다. ENTP 미숙한 ENTP는 무의식적으로나 외부의 힘에 자신의 감정이 통제되거나 제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감정에 저항 할 수 있습니다. 외부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내면을 항상 살피지는 못합니다. 자체적 반사 기능이 모자랄 수 있어 다른 유형보다 실행하는데 더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있거나 지능적 대화가 가능한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는 자연 탐험가입니다. 많은 가능성에 열려 있어서 기다리는 자세를 유지하고 감정이 확실해 질 때까지 자연스럽게 발전하고록 선택 할 수 있습니다. ISTJ ISTJ가 호감에 빠지면 감정적으로 멈춰버릴수있습니다. 그들은 표현력이 없어져 어색하게행동합니다. 그것 때문에 노력하는데 시간을 소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발적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며 아마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말할지 연습하고 계획하려 할 것 입니다. 상대를 도와서 교감을 만들려하고 노력하면서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다가가려 할 것 입니다. ESTJ ESTJ는 심장 문제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내면적으로 반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결정할때 길을 잃은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수동적이 될 수 있고 상대가 먼저 다가와 주면 그로 인해 비로소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취약해 부정적 전망에 민감합니다. 그들은 다른사람을 관찰해 ‘테스트를 통과 하는지’ ‘여지가 존재하는지’를 결정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행동이 없으면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거나 맞지 않다고 스스로 설득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ISFJ ISFJ는 낭만적인 호감에 따르기전 신중하게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충분히 독립적이지만 상대를 향한 열망에 빠지면 내적 안정감을 잃을 수 있습니다.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으려 그들은 상대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알고자하는 것에 집착 할 수 있습니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모든 종류의 작은 세부 사항들을 모을 것입니다. ISFJ는 자신의 필요와 우선순위를 희생해서 상대에 대해 모든 관심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ESFJ ESFJ는 외적으로 집중되어 있어서 누군가에게 끌리고 있다는 인식, 자신의 내면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한 경향이 있습니다. 이전에 관심없던 상대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으면 호감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위에 맞춰져 있고 누가 더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에 대해 예리 합니다. 그래서 누가 더 큰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보고 있을 것이며 상대가 자신의 리그에서 벗어났다고 느끼면 자신감 부족과 거절의 두려움 때문에 감정을 숨기려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ISTP ISTP는 정서적으로 예민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에 대한 강한 끌림을 경험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이 실제로 위험한지 가치가 있는지 결정하려고 시도하지만 혼란스럽습니다. 안전한 거리에서 상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 관심의 대상을 열심히 연구합니다. 호감이 있을때 그들은 떨리는 신경 에너지를 숨기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며 열정적이고 흥분할 수 있습니다. ESTP ESTP는 추격의 스릴을 즐기고 일반적으로 자신감이 있고 재미를 추구합니다. 그들은 실패나 실망에 대한 두려움에 관심을 두지 않지만 감정이 깊어지면 거절에 방어적으로 두려워 할 수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취약함이 그들의 재미와 편안함을 망칠 것을 걱정합니다. 구애의 과정을 전략 게임으로 취급해서 상대방의 감정에 대해 파악하고 원하는 반응을 얻기위해 모든 수를 쓰려 합니다. ISFP ISFP는 일반적으로 호감의 흥분을 즐깁니다. 그러나 보통 행동을 취하기는 쉽지 않으며 처음에는 조용히 감정을 키워가는 것을 선호합니다. ISFP는 현재 느끼는 모든것에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혼란을 주는 것이나 두려움을 거부하기 때문에 호감을 추구하는 것에 수줍고 주저할 수 있습니다. 이로인해 그들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알기에 복잡해 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전에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매순간 느끼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선호합니다. ESFP ESFP는 내면적으로 그들 자신의 감정을 보호하도록 강요하며 호감을 추구하지 못하게 합니다. 한편 감정이 극적으로 밀려오는 것을 즐기지만 거절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들은 내면의 감정에 대한 통제권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호감에 저항 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향해 있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면 눈에 보이는 ‘사인’은 감정적인 혼란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 (2)
지난 글에선 냉동선의 등장에 대해 잠깐 다뤘습니다. 그 내용을 잠시 보충할까 합니다. 냉동선이 개발되기 전까지, 호주나 남미 등지 국가들은 염장이나 통조림 등으로 가공해 고기를 수출했습니다. 당연히 그 품질은 만족스럽지 않았죠. 양은 양모를 생산하고 남는 고기는 폐기하기가 다반사였습니다. 장기 보존 기술에 대한 특허만도 200여 건이 넘게 쏟아질 정도로 관심도 높았죠. 1800년대 영국은 산업 혁명과 과학 혁명을 겪으며 인구가 폭증하고, 동시에 식량 생산은 원할하지 못한 형편이었습니다. 1850년 2800만인 인구가 1880년 3500만까지 증가합니다. 이 30여 년간 영국내 육류 가격은 두 배 이상 폭증했죠. 이런 추세에 따라 영국의 식민지인 호주와 뉴질랜드에선 소와 양의 사육이 증가합니다. 1851년 소 6만 8천 두, 양 23만 두를 키우던 게, 1880년 소 70만 두, 양 1300만 두로 급증했을 정도로요. 자연히 육류 수송 문제가 각국에서 큰 고민거리가 된 겁니다. 최초 냉동 선박에서 냉매로 채택된 건 암모니아 가스였습니다. 첫 항해는 순탄치 않았지만, 가능성을 본 사람들은 이제 세계 각지에서 고기와 과일을 배에 실어 날랐죠. 호주에선 스트라스레븐 사가 영국으로 고기를 실어 나릅니다. 다른 회사인 뉴질랜드호주랜드 사는 양고기와 돼지고기 500두를 싣고 98일만에 런던에 도착합니다. 그 결과 싣고 온 상품을 현지보다 두 배 이상 이익을 올렸죠. 수익성 있는 사업엔 자연히 투자가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마토라 호는 냉기 전달 방식을 개선해 에너지 효율을 높였죠. 1890년대에 이르면 선박도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바뀝니다. 1902년에 설립된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는 바나나를 운송했는데요. 바로 지난 글에서 자메이카산 바나나를 미국인들에게 소개했던 선원, 로렌조 베이커가 이 회사의 공동 창립자입니다. 냉동선은 과일과 육류로 전 세계를 연결했지만, 다국적 기업과 독재자의 유착 행태를 낳기도 했습니다. 과테말라 독재자 호르헤 유비코는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 등 외국 기업이 자국 농지를 사들여 농장을 여는 것을 허용했고, 이 때문에 자국민 농부들이 이들 외국 기업의 농장에 고용되어 일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1902년은 또 다른 기념비적인 발명이 있었던 해입니다. 바로 윌리스 캐리어가 에어컨의 원리를 발명한 해죠. 처음엔 인쇄소를 위해 이 기술을 발명했다는 얘기는, 빙글에서 이미 다른 분이 올려 주신 바 있죠. 1906년 공기조절장치 특허로 업계에 인정받은 캐리어는, 1915년 여섯 명의 동업자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캐리어 사를 설립합니다. 이게 지금도 우리가 잘 아는 바로 그 캐리어 사죠. 백화점에 설치된 세계 최초 터보 냉동기(1922년), 극장 내에 에어컨 설치(1925년), 20년대 말 발표한 소형 에어컨에 고층건물 냉방 공조 설비 발명(1939년)에 이르기까지, 캐리어는 정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겼습니다. 캐리어 사가 에어컨 기술로 명성을 떨치고, 유사 기술을 가진 업체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아직 이 글의 주인공은 무대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이 두 사람은 캐리어 못지않게 세상을 바꿔놓을 참이죠. 캐리어가 세계 최초 에어컨을 내놓은 후 한참이 지나 1929년, 조셉 누메로라는 한 청년은 곤경에 처해 있었죠. 상당한 엄친아 기질이 있던 그는, 일찌감치 부동산과 제조업, 금융업 등에 뛰어들어 25세가 되자 잠시 은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은 이미 벌 만큼 벌었으니, 못해본 공부를 해보자는 마음이 불현듯 든 거죠. 미네소타 대에 들어가 법학 공부를 한 끝에, 그는 졸업 시험에는 합격합니다. 하지만 이수 학점이 살짝 부족한 게 발목을 잡죠. 설상가상 1929년 대공황으로 미국 주식 시장이 붕괴하면서 그 역시 파산에 이릅니다. 고민 끝에 그는 졸업을 포기하고 학교를 나옵니다. 다시 사업에 뛰어들려던 그에게 한 친구가 좋은 사업 아이템을 소개해 줍니다. 그가 알려준 건 이제 막 대중에 소개되기 시작한 유성 영화 사업이었죠. 당시 업계 선두인 웨스턴 일렉트릭(호손 공장 운영하던 걔네 맞습니다), 그리고 RCA 두 회사는 비싼 영화 장비를 극장에 파는 대신 이를 빌려주고 임대료를 받는 식으로 사업을 운영했습니다. 누메로는 이들 제품보다 덜 비싸고 품질이 나은 극장 설비를 개발한다면 승산이 있겠다고 여겼죠. 그렇게 해서 새 회사인 울트라폰 사운드 시스템 사가 설립됩니다. 야심만만한 누메로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실력 있는 기술자였죠. 그 무렵, 미네소타의 Hallock이라는 지역에선 한 재능 있는 영사 기사에 대한 소문이 극장가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독학으로 기술을 익힌 실력 있는 기사였죠. 게다가 창고에 있는 잡동사니만으로 당대 무성 영화 장비를 유성 영화용으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실력자라나요? 소문을 들은 누메로가 대번에 그를 미니에폴리스에 있던 회사로 초청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소문난 기술자에겐 한가지 지울 수 없는 흠이 있었습니다. 기술자 프레데릭 존스의 아버지는 아일랜드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죠. 193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인종 차별은 극심했습니다. 캔터키 코빙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어머니가 일찌감치 가출해 아버지 손에서 7세까지 자랐습니다. 그가 7세가 되던 해, 아버지는 캔터키의 한 사제에게 보내 버렸죠. 2년 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그에겐 기댈 곳이 없어졌습니다. 프레데릭은 11살 되던 해 사제에게서 도망쳐 신시내티로 갔죠. 원래 재능이 있었는지, 아니면 부지런히 노력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과 11세에 홀로 도시로 온 아이는 16세가 되자 이미 신시내티 한 자동차 수리점의 십장이 되었죠. 가게 주인은 자동차 경주에 관심이 많았는데, 프레데릭은 고용주를 위해 경주용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개발했습니다. 그 자신도 언젠가 자신만의 경주용 차를 갖는 게 꿈이었죠. 하지만 곧 흑인은 자동차 경주에 나갈 수 없단 걸 알고 맙니다. 상심한 나머지 그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여러 수리공 일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갔죠. 미네소타 Hallock의 한 농장에서 그는 30만 에이커 규모 농장 내 모든 장비를 수선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여기서도 그는 더트용 레이싱 카를 만들 기회가 있었죠. 한발 더 나아가 초기형 설상차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에겐 자동차에 남다른 열정과 집착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프레데릭은 기계공, 전기공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하다 1919년 귀국합니다. 군대에서 익힌 기술에 폭넓은 관심까지 더해져, 그는 이후로도 잡지 등을 참고하며 독학으로 실력을 쌓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기회가 찾아오게 되죠. 당시 영화관들은 기존에 설치된 무성 영화 장비를 새 유성 영화 설비로 바꾸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때 영사기사로 일하던 프레데릭이 자기가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나섰죠. 가죽 벨트 부품 등 여러 잡동사니를 이용해 그는 정말로 음향과 영상을 동시 상영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해냅니다. 이후 기술 변화에 따라 그때 그때 적절하게 대응해 준 건 덤이었죠. 막 유성 영화 산업에 뛰어든 누메로에겐 프레데릭 존스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인재였습니다. 흑인이라서, 당대 만연한 인종 차별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누메로의 회사에서 프레데릭은 수석 엔지니어 자리를 꿰차죠. 하지만 누메로도 프레데릭도 새 파트너가 평생을 함께할 사이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을 겁니다. 1991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에게 National medal of Technology & Inovation을 헌정합니다. 특히 프레데릭 존스는 이 상을 받은 최초의 흑인으로 기록되었죠. 1930년 두 사람의 만남은 그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조셉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 오늘날 우리가 사철 신선한 음식을 마트나 슈퍼마켓, 심지어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바로 이들 덕분입니다.
콜드 체인, 세상을 바꾼 냉기의 혁명(번외)
1. 세계 최초의 냉동선, 리퍼Reefer선이라고 불린 선박들에서 화물을 냉동하는 데엔 다양한 기술이 동원되었습니다. 암모니아 가스 방식, 암모니아-탄산가스 냉매 공기 순환 방식, 증기 기관을 이용해 압축된 공기를 화물칸에 불어넣어 급속한 공기 팽창으로 열을 식히는 방식 등 적용된 기술은 각양각색이었던 모양입니다. 오늘날 선박이나 비행기에 쓰이는 냉동 컨테이너도 Reefer container라고 불립니다. 2. 미 동부에 바나나를 소개한 유나이티드 후르츠 컴패니는 중남미 국가들을 상대로 정부와 결탁하고 농부들을 착취해 악명이 높았습니다. 콜롬비아에서는 고용된 현지인 농부들이 주 6일, 하루 8시간 근무와 배급표 아닌 현찰 급여 지급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지만 정부군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죠. 또 과테말라는 유나이티드 후르츠 컴패니 및 미국 CIA 등과 연관된 쿠데타가 발발, 친미 독재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소설가 오 헨리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국가 자체가 다국적 기업에 장악당한 상태를 비꼬아 바나나 공화국이라고 칭했습니다. 물론 국가가 정상적인 상태라면 기업에 잡아 먹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만... 3. 냉동/냉장 기술이 유통 과정에 결합하면서 언제나 사시사철 신선한 먹거리가 있는 슈퍼마켓과 대형마트가 곳곳에 생겨났습니다. 어떤 이는 냉동식품과 슈퍼마켓이 등장하면서 각 가정이 장을 봐야 하는 빈도가 줄었고, 덕분에 가정일에서 해방된 여성들이 맞벌이를 통해 노동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고도 하네요. 각 가정에 냉장고가 필수품이 된 건 물론이고요! 4. 써모킹은 90년대 들어 발생한 환경 문제 해결에도 동참하려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인 듯 합니다. 1987년 몬트리올 의정서가 오존층을 파괴하는 기존 냉매 사용을 단계적으로 금지하자고 규정한 후, 늦었지만 1994년에 써모킹은 오존층에 해를 덜 끼치는 새 냉매를 비로소 전 제품에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80년대부터 연구한 기술이 그때서야 겨우 결실을 맺게 되었다네요. 5. 국내에서는 삼원써모가드라는 회사가 써모킹의 국내 총판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트럭 냉동기 시장에서 국내 점유율은 2016년 기준 15% 정도였다네요. 제품의 장점으로는 정확한 온도 조절, 저연료, 저소음과 내구성 등 차별화된 기술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약점은 가격으로, 국산 타 제품군이 1000만원대 가격을 형성하는 반면, 써모킹 사 제품은 2000만원으로 비쌉니다. 과거 빙그레나 롯데같은 대형 빙과업체들이 직접 트럭을 구매해 운영했을 때는 장기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점이 어필했지만, 지금은 개인 업자들이 냉동차를 구매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무래도 초기 구입비가 싼 제품을 더 찾는다네요. 6. 국산 냉동기 업체는 여러 곳이 있지만, 써멀마스터라는 회사의 창업 스토리가 흥미롭습니다. 지금 대한항공의 전신인 한진에서 20대 때 알바를 하던 창업주가 미군 식품납품용으로 쓰던 일제 스즈키 사 냉동차를 보고 이 사업에 대해 눈을 떴다네요. 당시 냉동기 관련 지식이나 기술을 접하기도 어렵고 교육기관도 전무해서 닥치는 대로 알 법한 사람을 찾아 다녔다는 사장님은, 재미있게도 군 입대를 통해 기회를 잡게 됩니다. 써모킹의 프레데릭 존스가 1차대전 당시 입대해 기술을 익혔듯, 또 누메로가 2차 대전 당시 자원 입대하려다 기회를 포착하고 회사를 성장시켰듯 여기서도 군대가 기회가 된 거죠. 입대 후 사장님은 배치된 미사일 부대에서 무기 냉각 장비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관련 기술을 익혔습니다. 제대 후에도 삼성종합건설 중동 건설 현장에서 4년간 냉동 관련 업무를 맡고, 87년 귀국해 창업한 후에도 첨단 기술 동향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97년에야 겨우 자체 제품을 개발해 현대차에 납품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2007년 써멀마스터 사는 기술력을 인정받아 태국,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등에 납품할 UN 선정 냉동기 납품업체가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해외 시장에 진출하며 크게 성장했죠. 한때 써멀마스터 회사 정문에는 '써모킹이 가장 부러워하는 써멀마스터가 되자'라는 슬로건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걸려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껏 써모킹의 역사를 훑어본 탓인지 저 슬로건이 유독 주목을 끄네요. 7. 예전에 전지현이 출연한 광고로도 화제를 끌었던 유통 스타트업 마켓컬리는 국내 최초로 새벽배송을 시작한 업체로 유명합니다. 이 회사가 내세우는 게 자사에서 판매하는 모든 제품을 유통 전 과정에 걸쳐 가장 적정한 온도로 관리해 가장 신선한 상태로 고객에게 전달한다는 풀 콜드체인인데요. 유통 산업은 투자 비용이 워낙 커서 스타트업을 시작하기 힘들다는 시각에도 사장님의 뚝심으로 현재도 계속 성업 중에 있습니다. 지난 물류센터 코로나 확진자 발생 때는 세심한 고객 관리로 좋은 평판을 얻기도 했죠. 스타트업의 본래 의미처럼, 우리가 전에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서비스를 이렇게 계속해 제공받을 수 있는 것도 앞서 소개했던 수많은 선구자들이 헌신하고 궁리해 혁신한 덕분입니다. 오늘날에도 그 혁신은 계속해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요. 앞으로도 계속해 나올,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해줄 신기술과 새 산업에 기대하며 또 응원을 보냅니다.
서해안 해수욕장 베스트 5 소개
안녕하세요. 여행작가 호미숙입니다. 뜨거운 여름 7월입니다. 코로나가  여전히 확진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여름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찾는다면 역시 여름바다가 아닐까 싶네요. 그동안 호미가 직접 다녀온 서해안 가볼 만한 곳으로 여름 해수욕장 몇 곳을 소개합니다.  충남 보령의 대천해수욕장과 무창포 해수욕장 충남 태안 해수욕장들 안면도 꽃지해수욕장 전남 무안의 톱머리해수욕장을 소개합니다. 1. 대천해수욕장 대천해수욕장이야 워낙 명소이죠. 글로벌 축제 보령머드축제가 열리는 곳입니다. 주변에 먹거리와 놀거리도 풍성한데요. 2020년 보령머드축제는 온라인으로 대신한다고 합니다. 일전에 다녀온 여행기는 블로그에 상세히 써서 대신 링크로 보내드립니다.  서해안의 장점이라면 해 질 녘의 일몰 풍경과 낙조가 아름다움이 빼어나긴 해요.바닷물도 즐기고 석양도 즐길 수 있다면 최고입니다.  대천해수욕장 즐길거리: 짚트랙, 스카이바이크, 가상현실, 총쏘기, ATV, 카트, 서바이벌 게임, 제트서핑 등 다양합니다.  2. 보령 대천 가볼만한곳 무창포해수욕장 모세의 기적을 볼 수 있는 신비의 바닷길을 경험할 수 있고 해수욕과 갯벌체험을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 송림이 울창해서 산림욕도 즐길 수 있습니다. 여름에 8-9월 사이에 신비의 바닷길 축제도 열립니다.  충남 보령의 무창포해수욕장에서 정말 행운처럼 우연히 보령시 모델을 만나 멋진 사진을 찍었던 곳이었습니다. 일몰이 아름다운 곳으로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3. 안면도 꽃지해수욕장. 일몰 사진 찍기 좋은 곳  안면도에서 제일 큰 해수욕장으로 넓은 백사장과 완만한 수심, 맑고 깨끗한 바닷물, 알맞은 수온과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해마다 100만 명이 넘는 피서객들로 붐ㅣ는 곳입니다. 물이 빠지면 갯바위가 드러나 조개·고둥·게·말미잘 등을 잡을 수 있다. 오른 편에는 전국에서 낙조로 가장 유명한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가 있어서 연중 사진작가들이 찾고 있는 곳입니다. 여기도 자전거로 일주 때 안면도를 들러 나오면서 다녀온 곳입니다. 꽃지해수욕장의 추억은 아주 오래전 아이들 아빠 살아 계실 때 가족 여행지로 떠났던 기억이 납니다.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에 꽃지해수욕장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 아린 곳이기도 해요. 4. 만리포해수욕장, 몽산포해수욕장, 청포대해수욕장 대천해수욕장·변산해수욕장과 더불어 서해안의 3대 해수욕장의 하나로 손꼽히며, 북쪽으로 이어져 있는 천리포해수욕장과 함께 태안해안국립공원의 명소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래전 워크샵으로 갔다가 아주 특별했던 것을 보았어요. 바로 금속탐지기로 쇠붙이, 귀금속 등을 찾는 것을 보았는데요. 그 경험이 아주 기억에 남는 곳입니다.   태안의 몽산포해수욕장도 자전거로 서해안 일주 때 처음 들러보면서 그 뒤로 태안과 인연을 맺어 가끔 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5. 안면도 꽃지해수욕장. 일몰 사진 찍기 좋은 곳  안면도에서 제일 큰 해수욕장으로 넓은 백사장과 완만한 수심, 맑고 깨끗한 바닷물, 알맞은 수온과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해마다 100만 명이 넘는 피서객들로 붐ㅣ는 곳입니다. 물이 빠지면 갯바위가 드러나 조개·고둥·게·말미잘 등을 잡을 수 있다. 오른 편에는 전국에서 낙조로 가장 유명한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가 있어서 연중 사진작가들이 찾고 있는 곳입니다. 여기도 자전거로 일주 때 안면도를 들러 나오면서 다녀온 곳입니다. 꽃지해수욕장의 추억은 아주 오래전 아이들 아빠 살아 계실 때 가족 여행지로 떠났던 기억이 납니다.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에 꽃지해수욕장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 아린 곳이기도 해요. 5. 전남 무안의 톱머리해수욕장 간만의 차가 심하여 간조 때면 넓은 백사장이 드러납니다.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한 데다 바닷물도 깨끗해 피서지로 최적입니다. 백사장 뒤로 200년 된 곰솔이 숲을 이루어 해변 경치가 아름답습니다. 지인들과 함께 무안 연꽃 축제 취재하러 갔다가 톱머리해수욕장 쪽에서 하룻밤 보내면서 들렀던 곳입니다. 마침 도착시간이 일몰 시간이라서 솔숲에서 멋진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8751077&memberNo=1275074 서해안 가볼만한곳 여름 해수욕장 추천 베스트 5 #서해안가볼만한곳 #해수욕장추천 #여름가볼만한곳 #해수욕장가볼만한곳 #대천해수욕장 #꽃지해수욕장 #만리포해수욕장 #몽산포해수욕장 #무창포해수욕장 #톱머리해수욕장 #군헌갯벌체험장 #서해안해수욕장 
막장드라마 특) 기억상실증 걸린 사람이 한국말은 정확하게 구사함
여느 때와 달리 왠지 일찍 일어난 아침, 목마른 속을 달래러 거실로 나온 당신은 빨래를 하는 엄마 옆에서 홀린 듯이 일일연속극 ‘내 딸 주영이’를 본다. 예나, 주영이 딸이예요! (주-륵) (주르륵) (찰싹) 쾅 ... 어머 주영아… 의사쓰앵님, 우리 주영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어…하필이면…총알이…아니 차가 영 좋지 않은 곳을 스쳤어요. 잘 알아두세요. 이제 주영씨는 앞으로… 이전에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시말해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이말입니다. 아... 머리야, 여긴 어디지? 주영아, 기억 안 나니? 내가 누군지 알겠어? 난 누구죠? 여긴 어디죠? 아줌마는 누구예요? (이 막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내 모습)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생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 구사하지? 기억을 못하면 아무런 지식도 없어야 하는게 아닌가?” 나는 일일연속극 고인물이신 어머니께 여쭤봤지만 속 시원한 답을 듣지는 못했다. 상식적으로, 만약 기억상실증으로 어떠한 일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배웠던 지식도 모두 알지 못하는 것 아닐까? 이에 대한 해답은 심리언어학자들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53년 뇌수술로 해마를 잃었던 27살 청년 헨리 몰리슨(1926~2008)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수술 후 세상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평생 그가 수술을 받은 27살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갔다. 하지만 그가 언어를 구사하거나 새로운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즉 인간의 개인적인 기억과 개념적인 기억은 구조적으로 다른 기억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일화기억(Episodic Memory)과 의미기억(Semantic Memory)이라고 구분한다. 이 둘의 명백한 차이점은 ‘주관적 경험으로 기억이냐’의 가부이다. (이미지 출처: tulving 중다 기억체계 모형/1985) 즉 만약 ‘내가 3년 전에 제주도에서 애인이랑 했던 첫키스’는, 물론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에겐 없는 기억이겠지만 일화기억이다. 왜냐면 ‘내’가 직접 경험했던 것이니까. (나도 아직 경험해본 적 없다.ㅠㅠ) ‘내가 3년 전에 제주도에서 애인이랑 했던 첫키스’는, 물론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에겐 없는 기억이겠지만 일화기억이다. 하지만 ‘제주도 몽돌해수욕장이 무엇인가?’는 의미기억이다. 특정 시간이나 장소와 결부된 경험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통 우리의 지식을 형성하는 기억들이다. 기억 상실증이란 의미기억이 아닌 일화기억의 상실을 의미한다. 즉, 기억 상실증과 한국어 구사 능력에는 서로 큰 영향이 없는 것이다. 일화기억을 잃어버린 헨리 몰리슨의 경우 자가 인지적 의식(autonoetic consciousness)이 결함됐다. 그는 주관적으로 경험한 시간을 인지하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미래에 대한 걱정없이 27살로 살다가 죽었다. 과거를 빼앗긴 그는 시간이라는 철로에서 탈선해 헛바퀴를 돌고 있는 열차와 같은 삶을 살다 간 것이다. 헨리 모리슨의 사례를 보면 우리의 자의식은 우리의 경험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가진 최초의 기억의 시점이 우리의 자의식이 처음으로 형성된 시기다. 나의 경우 막 기어다닐 무렵 우리집에 도둑이 들어 새벽 내내 일어났던 소동이 기억난다. 그 때 반지하 전셋방의 쾌쾌한 냄새와 새벽녘의 서늘한 빛과 공기가 기억이 난다. 나의 의식은 누군가의 도둑질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볼 수도 있겠다. (출처: 기생충 반지하집 볼수 있을까/ 한국일보) 말미에 글이 매우 늘어졌는데, 헨리 모리슨 외에도 여러 뇌손상 환자들의 케이스를 살펴보면 약간의 씁쓸함도 든다. 가깝게는 치매 걸린 할머니부터 차에 치여 뇌를 다친 30대 아저씨까지 모두는 의식에 미로에 갇혀 길을 헤메고 있는 미아들이다. (출처: 판의 미로) 우리가 지키고 사랑하던 모든 것은 작은 충격이나 노화로 사라지기 쉬운 기억에 의존한다. 만약 저들처럼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무엇일까, 하고 조용히 생각해보는 저녁이다. 참, 혹시 이 글을 읽고 흥미가 있었다면 자신의 최초의 기억을 한번 떠올려봐 달라. 그리고 만약 기억이 난다면 언제였고 어떤 상황이었는지 밑에 댓글로 써주길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