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난히 놀기를 좋아했던 나는 알파벳 대문자만 간신히 외우고 중학교를 입학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 단어시험에서 What을 Waht으로 쓰고는 개망신을 당하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시골의 교회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추억을 생산하던 중학교 2학년 리즈시절..
요도천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아 라면을 끓여먹거나.. 교회오빠네 과수원으로 서리를 하러가거나.. 논에 쌓여있는 짚푸라기 속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달밤에 참깨 밭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등 스릴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도저히 말괄량이 삐삐처럼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 나를 구원해준 성문영문법을 정독으로 12번 이상을 공부하면서 전국영어편지쓰기 영작대회를 나가는 수준이 되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필리핀항공을 타고 필리핀 선교사님 댁으로 영어를 배우러 떠나게 되었다.
이미 비행기 안에서 따갈로그어가 섞인 억양의 핑글리쉬 방송을 들으며 지금 내가 잘못가고 있구나를 알 수 있었다.
필리핀에서 딱 일주일간은 영어가 늘었다. 그러나 오랜 식민의 영향인지 모르겠으나 필리피노들은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문장을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커뮤니케이션이 될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그 이후로 영어가 늘지 않았다.
필린핀으로 어학연수를 온 한 학생은 부모님이 주신 용돈으로 돼지를 사서 새끼를 낳게하며 돼지를 팔아 돈을 버는 아이부터.. 산족마을에 벗고사는 부족의 모습을 탐닉하고자 봉사를 위장한 변태홀릭 학생까지 여러 종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30대에 암치료를 하면서 그간의 영어라는 단어의 메모리가 삭제되기 시작했다. 내게 가장 심각했던 케모브레인이라는 기억력장애는 방사능치료의 후유증이었다.
40대 중반의 나를 캄캄한 창고 안에 세워놓고 요즘 계속 고민을 했다.
학위를 이어갈 것인가? 아님 죽기전에 영어를 해결할 것인가?
나의 꿈과 노후 그리고 미술을 하고 있는 아이의 유학을 안내하려면 영어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성문영문법을 펼쳤다.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