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nh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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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람 이야기 / 김설하

​두사람 이야기 / 김설하

그 여자는
머리를 자르고 싶었어
사각사각 머리카락 잘리는 소리가
귓전을 할퀴고 후드득 바닥에 떨어지면
우울이 슬픔을 부르고
슬픔이 눈물을 생성하는 일
그렇게 버릴 수 있거든

그에게 물어보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지만
머리를 잘라야지 하고 나섰다가
저만치 가리개가 처진 미용실 문이 보이자
길바닥에 발이 저당 잡혀 꼼짝 안하는 거야

그가 머리를 왜 잘라 하는것 같아
기어이 돌아서는 걸음이 더 헐거워
부는 바람에 가슴속 참빗질하면
어느새 헝클어진 맘이 다소곳해져서
머리는 왜 잘라 하며 피식 웃지만
그래도 묻고 싶었어

나 머리 자를까
반쯤 접어서 올려 보이며 물었을 때
머리는 왜 잘라
지금이 예뻐 그랬는지 그냥 둬 그랬는지
자르면 이상해 그랬는지
슬몃 올렸던 팔을 내리며
웃는 백치의 여자

그 남자가
나 머리 잘랐는데 어때
라고 물었을 때
긴 머리가 더 좋아
곧바로 대답하는 내게 보내는 뜨악한 시선
많이 서운했던가봐
짧아진 머리가 익숙하지 않았을 뿐
변함없는 당신인걸

우리 처음 만났을 때처럼
똑 같은 모습
똑 같은 마음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사랑하고
오랫동안 그리워하며 살아갈 사람이야

당신은 특별히 세세하진 않아도
변함없이 내 마음 안에 있고
긴 세월 함께 할 사람이라서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 모습이었으면 해

나 머리 기를까
왜 기르고 싶은지 물었더니
그냥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다고 그랬는지
느낌을 바꿔보고 싶다고 그랬는지
가발을 쓸까 그랬는지
눈빛 마주치자
피식 웃는 싱거운 남자

사랑해
하늘만큼 땅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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