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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의 비보를 듣고-

시대의 어른이 곁을 떠나다


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마치 나의 혹은 내 소중한 지인이나 가족의 아픔처럼 아프게 다가왔고, 손에 든 신간을 읽으며 문장 하나를 넘길 때마다 쾌유를 기대하곤 하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병상에서 일어나셔서는, 계속해서 글을 쓰시고 또 책 한 권을 더 내시고 나는 서점에서 그 신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손에 받아 드는, 그런 날의 도래를 생각했으며 출간 기념행사나 강연 등에 기필코 참석해 "전부터 선생님 글을 좋아했습니다"라고 수줍게 말하며 한가득 들고 간 책에 싸인을 받는, 그런 모습도 상상하곤 했다.

[어린 왕자]의 번역본(열린책들, 2015)을 출간하셨을 때, 그는 "소설은 문체로 마음을 움직인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자기가 길들인 것만 알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할 때, 이 말이 옳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직 저자 생텍쥐페리의 진솔하고 열정적인 문체만이 이 말의 진실성을 믿게 하고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라고 썼다. 확고하시되 언제나 겸손한 분이었지만, 나는 황현산 선생의 글 역시도 자신이 번역한 생텍쥐페리의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진실성을 믿게 하고 나아가 감동하게 하는 글. 특정 문장, 특정 문단이 아니라 그의 글은 매번, 그 글 전체를 가져다 인용하고 싶을 때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문학의 힘과 가치를 이야기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런 것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고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지 모를 누군가가 자신의 언어로 남긴 흔적에, 마치 나의 언어인 것처럼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 나아가 그 언어가 내포하고 있을, 문자 너머의 삶을 동경하고 그 존재들이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와 닿아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 나는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늘 그렇게 느꼈다. 십수 년 전에 쓰신 글도, 최근에 쓰신 글도, 늘 변함없이 이 세상을 성찰하고 어루만지고 있었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제가 무지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무지에 둘러싸여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다."(229쪽, 난다, 2018) 단 한 번도 만나 뵌 적 없는 분의 글을 읽으며 그 사람의 글을 좋아하게 되고, 또 그 사람을 마음속으로나마 '선생님'이라 감히 칭해볼 수 있어 행복했다. 다만 선생의 글을 모두 헤아리기에 나는 무지하다. 그러니, 앞으로도 읽을 것이다.



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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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universe 그곳에서도 편히 쉬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렇잖아도 책장에 꽂힌 황선생님의 책을 흘깃 쳐다봤습니다. 내일 오랜만에 펴봐야 겠어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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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상자 담긴 채 버려져 쓰레기 차량에 분쇄될 뻔한 고양이 목숨 살린 환경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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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에 인색하지는 않으나, 그 길에 늘 얼마간의 굴욕이 따른다는 것이 견디기 힘들다. 왜 담보되지도 않은 성장의 대가가 이리도 혹독한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은 나쁜가?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이 나쁘다기보다는, 어떤 일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겠지만,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건지, 왜 나를 궁지에 몰아넣지 못해 안달인지, 더 나은 나를 위한 것이 과연 이런 방법밖에는 없는 건지, 자문한다. 나는 앞으로 그려질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너무 쉽게, 함부로 지치고 있는 건가? 어느 것이 맞는 건지 판단력조차 흐려지고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알지만, 지나가기 전에는 나를 노골적으로 한없이 갉아먹는 이것들을 어째야 하나? 체감할 수 없는 타인들에게, 조언을 구할 수조차 없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들 하지만, 나는 인생을 건너면서 겪어온 몇 가지 굴욕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자괴감이 든다. 26년 전의 굴욕, 16년 전의 굴욕, 12년 전의 굴욕, 그 외에 굴욕이라 이름 붙이기 모호한 여러 불미스러웠던 기억들. 나는 아마 결국 나를 개척할 수 없을 것 같다. 사력을 다해 바꿔도 그건 단단한 ‘껍질’에 불과할 것이고, 그 안에 있는 나는 그대로일 것이며, 결국 팔자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세상 모두를 속여도 결국 나를 속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영원히 삶을 버벅댈 것 같다. 나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공감하지도 못하고, 위로하지도 못하는, 애초에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완전히 공감할 수 없고, 완전히 위로할 수도 없는 한 인간인 네가 새우를 먹자고 한다. 새우를 생각하면, 그것을 세는 단위를 생각한다. 새우 10 미에 2만4천 원. 새우 1 미, 2 미, 3 미. 그것을 세는 단위가 ‘미(尾)’라는 것이 귀엽다. 미라는 말도 귀엽지만, 그 한자의 뜻도 귀엽다. ‘尾’는 꼬리 미 자이다. 그러니까 꼭 새우를 세는 단위는 아니고, 물고기나 벌레 따위를 세는 단위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도 꼬리만 있었다면, ‘명’이 아니라 ‘미’라는 단위를 붙일 수 있었던 걸까. “어서 오세요. 몇 미세요?” “성인 3 미, 아이 2 미요.” 요즘은 혐오 발언으로 사람들이 자꾸 일군의 계층들에 ‘충(蟲)’ 자를 붙이는데, 그것을 악용하여 남발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다만 누가 봐도 민폐이고, 너무 싫은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완곡하게 읊조려주는 것이 좋겠다. “아, 참을 수 없는 저 1 미…….” 살아오면서 몇 미의 사람들을 본 걸까. 앞서 말했듯, 미(尾)의 사전적 정의에는 벌레를 세는 단위도 포함되므로, 적절한 쓰임새라 할 수 있겠다. 너는 오늘 저녁 새우를 몇 미나 먹을까. 어제는 감자탕이 먹고 싶어 집 근처 여기저기를 찾아보았지만, 적절한 곳을 찾지 못했다. 예전에 다니던 직장 근처에는 감자탕을 잘하는 집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그걸 먹으러 거기까지 가는 것은 너무 서러울 것 같다. 헤어진 남자친구는 생각나지 않지만, 남자친구의 어머니가 해주던 갈비찜 맛을 잊지 못하겠다는 한 여자의 인터넷 게시 글을 본 적이 있고, 나는 그 느낌이 뭔지 정말이지 알 것 같다. 참고로 그 감자탕집은 딱 두 곳이 있고, 다른 지점은 이수(총신대입구)역에 있는데, 언젠가 권여선 작가를 우연히 본 곳이 그곳이었다. 그러나 이수역도 집에서 가깝지는 않다. 어째서 맛집이란 맛집은 죄다 먼 곳에 있는가. 그러고 보니 성인이 되기 전에는 감자탕을 먹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감자탕과의 첫 만남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감자탕의 존재를 모르던 그때까지는 거리를 지나다가 감자탕 집을 보면, 그것이 무슨 감자찌개 정도나 되는 줄 알고, 아니 외식을 하면 고기 정돈 먹어야지 굳이 감자 따위를? 했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시 뭐든 편견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새우 1 미, 2 미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릴 적에는 싫어했던 음식들이 성인이 되어서야 입에 맞는 경우가 있다. 가까운 경우에는 파김치가 그랬고, 그래서 이제 나는 어릴 적 싫어하던 콩국수에 도전해보려 한다. 지금 새우 몇 미가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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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 프란츠 카프카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장편소설 소송. 웃기고 기괴하고 불편한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 한 소설이다. 90년 전 소설에서 이런 감상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은행에 근무하는 직원 요제프 카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쳐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체포당한다. 희한한 점은 분명히 체포되었지만 감시자가 몇 명 붙을 뿐 딱히 일상생활에 지장도 없고 어떤 죄목으로 체포당한 것인지도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카는 이후 진행되는 심리에 출석해서 열심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소송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 듯 하다. 카는 소송을 위해 변호사를 찾아가지만 변호사도 뭔가 이상하다. 진행 상황에 대해서 물어보면 온갖 어려운 말들과 궤변들을 늘어놓을 뿐 위대한 변호사인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맡기라는 식이다. 카는 미심쩍은 변호사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보려 하지만 법에 대해서, 법원에 대해서, 카의 소송에 대해서, 하다 못해 카가 어떤 죄목으로 체포되었는지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예심판사, 카를 감시하는 법원의 감시인, 하급 법원의 직원들조차도 그저 자신이 맡은 조그마한 역할만 수행할 뿐 카의 소송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한 권력을 가진 법 앞에서 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결국 1년간의 소송을 거쳐 카는 사형당한다. 이 소설을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났던 건 우리나라의 행정처리였다. A가 알고 싶어서 B부서에 전화하면 B부서에서는 C부서에 연락하라고 말하고 C부서에서는 D부서에 연락하라고 말하고 D부서에서는 E부서에 연락하라고 말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딱 카의 상황과 같다. 카를 체포하는 사람도, 심리를 진행하는 사람도, 변호하는 사람도, 감시하는 사람도 그냥 주어진 역할만 수행할 뿐 카의 소송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 끝내면 된다는 듯이. 그렇게 법원이라는 거대 시스템 하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카의 모습을 보면 우리나라 공공기관의 불필요하고 형식적인, 이해와 납득이 불가능한 업무 처리 시스템이 생각난다. 예전에 비해 많이 개선된 부분들도 있지만 여전히 이 서류가 왜 필요한지, 왜 이걸 제출해야 하는지, 왜 산정 기준이 이렇고 지급 기준이 이런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렇지만 국가, 정부라는 거대한 시스템은 이미 정해져 있고 아쉬운 것은 일반 시민들이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이 나서서 시스템을 바꾸는 것보다는 시스템을 따르는 것이 편하고 현명하니까. 소설을 보다 보면 카의 행동이 점점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죄가 없으니 무조건 풀려 나겠지, 잘 해결될 거야라며 낙관하다 가면 갈수록 소송에 매달리게 된다. 그 이유는 법원과 법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권위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법이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나오며 그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이 법이 맞는 것인가, 잘못된 곳은 없는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없는 사회인 것이다. 게다가 어느 누구도 법이라는 것에 대해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무죄가 나올 것이라 낙관하는 게 가능할까? 잘 짜 맞추어진 톱니바퀴처럼 법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톱니바퀴가 모여 만들어진 기계 자체(법)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카의 유무죄에 대한 판결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정체도 모르고 이해도 할 수 없는 존재(법)에 의해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카는 어떻게든, 조금이나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무의미한 노력을 계속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세계는 점점 시스템화 되어 가고 있다. 경제, 사회, 문화의 규모는 계속해서 커지고 시스템은 그에 맞춰 거대해지며 이제 모든 개인은 시스템의 부품으로써 작동한다. 예전에는 구두 장인 한 명이 하던 일을 수많은 단계로 분업화하여 일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하루 종일 구두 밑창만 붙이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구두끈만 끼운다. 이렇게 모든 개인이 철저히 시스템의 일부가 된 상황에서는 개인과 개인이 모여 편리함을 위해 만들었던 시스템이 오히려 개인을 억압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낡은 시스템이 고장 났다면 개인이 아닌 시스템을 고쳐야 하지만 이미 너무 거대해져 버린 시스템을 고치기는 어렵기 때문에 개인에게 불편함을 감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송은 소설 속 주인공 카의 모습을 통해 한 개인(요제프 카)이 거대한 시스템(법)의 부조리(죄목조차 알려주지 않음, 법에 대한 의문 제기조차 불가능) 앞에서 어떻게 농락당하고 짓밟히는지 보여준다. 물론 극단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실제로 법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닌 듯하다. 90년 전에 쓰인 고전에서 현대의 시스템과 관료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카프카가 가진 미래 사회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일 수도 있고, 2019년이 1925년의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전자이길 희망하지만 후자가 맞을 것이다. 우리는 90년 전 소설가가 그린 곳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소설 속 한 문장 "법원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이 오면 받아들이고, 당신이 가면 내버려둘 뿐입니다."
멍하니 보게되는, 찢어지고 더러워진 옛 미술품 복원과정
오늘 의뢰받은 그림은 이것. 창고에 쳐박혀있었는지 발견된지 얼마 안된건지 상태가 매우 안좋음. 으악. 수백년은 묵은듯한 시꺼먼 때. 흑흑 찢어지기까지 함...ㅠㅠ 맴찢. 일단 캔버스에 붙은 썩어가는 나무를 몽땅 분리해줌. 오래 된 못도 박혀있어서 하나하나 다 뽑는다. 파상풍 조심.. 천에 붙은 또 하나의 천.. 살살 긁어서 떼어냄. 넘 오래되서 누렇게 때가 꼈음. 마법의 붓에 신기한 용액을 촉촉하게 적시고 드디어 묵은 때 벗기기!! 살살살. 문질문질... 깨.끗. 세수끝난 아기얼굴. 십ㄴ..아니 몇백년은 족히 넘은 묵은때가 벗겨진 기분. 점같이 미새한 자국들은 칼로 설설 긁어줌. 존나 신기한게 찢긴 부분을 현미경으로 보면서 직접 꼬매줌...캔버스 천 하나하나 다 따라서. 명의가 된 기분. 너무 심하게 찢긴데는 꼬매는걸로 불가능. 접착제 같은걸 문질문질 발라줌. 접착제 굳으면 또 설설 긁어내줌... 굴곡이 없어져서 나중에 덧칠. 벌써 끝인가?! 반짝반짝 니스같은걸 한번 칠해줌 깨끗한 새 천으로 캔버스를 덧대줌. 다리미도 평범함 다리미로 안보이는건 기분탓일까. 파상풍 걱정없는 못 촤르륵!! 이 장면 개간지임. 수백년 후쯤 우리 후손들이 복원할때까지 또 부셔지면 안되니까 졸라 튼튼하게 고정해줌. 이제 끝인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이제부터 시작임... 조오오온나 미새한 부분 작업에 들어감. 세월의 흔적으로 지워져버린 부분을 직접 칠해줌... *참고로 여기서 실패하면 위에 처럼 되는거임ㅎ 전문지식없는 수도원의 관리인이 복원한답시고 집에있는 물감으로 색칠했다가 망한 예수의 얼굴. 조온나 예민한 작업임. 저 분 옆에 있다면 코로만 숨쉬길. 팔레트도 개간지... 수백년전 화가들의 팔레트도 비슷했겠지? 다크써클도 문질문질... 드디어 진짜 마지막!! 마법의 용액 나와라. 용액이 담긴 스프레이로 분사해줌. 으아아아아 거울처럼 반짝반짝 해졌어ㅠㅜ 드디어 복원 끝!! 짝짝짝 좋은건 더 가까이. 얼마나 깨끗해진건지 잘 모르겠다고?? . . . 비교샷나감 더. 러. 워. 찢어진 부분도 완벽하게 클리어...! 수고하셨습니다.. 자세한 영상은 여기에..!! 비포 애프터 쩌는 다른 작품들도 봐봐. 시간 순삭임. 이상 미국 시카고에 있는 미술품 복원 현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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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 인사했다. 유선상으로만 만났던 그녀는 나를 처음 보고는 키가 작으신 분일 줄 알았어요, 했다. 기분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사실 내 키는 작은 것도 큰 것도 아니다. 그런데 키가 작을 것 같은 목소리와 말투라는 것이 있는 걸까. 걸걸한 목소리를 듣고 상대방의 키가 작다고 상상할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내 목소리는 걸걸하지 않다. 목소리만을 들으며 상대방의 외모를 상상해보는 일은 재미있는 일이다. 물론 나는 그녀의 외모를 사진을 통해 미리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알아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신작 시집이 얼마 전에 나왔고, 나는 그녀의 시집을 편집한 사람이다. 그녀는 나와 시집 작업 진행을 하면서, 피드백하는 내내 매너를 잃지 않은 사람이다. 그녀와의 작업은 즐거웠던 편이다. 이와는 달리 어떤 시인은 시 안에 자신의 과오들을 반성하거나, 도덕적인 다짐들을 잔뜩 해놓고는, 정작 시집을 만드는 편집자에게는 무례하게 대하기도 한다. 또 어떤 시인들은 문인 모임을 진행하는 식당에서 온갖 고상함을 다 부리고, 보기 민망할 정도로 식당 직원들을 하대한다. 한자리에 앉아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는 나중에 또 어딘가에서 잔뜩 반성하고 있을까? 시인과 생활인 사이의 괴리가 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람이란 무릇 자신의 과오에 대해 반성을 할 줄 알아야겠지만, 반성은 차선의 행위이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보란 듯이 언행을 함부로 하고, 반성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그게 무슨 반성일까. 그건 반성이라기보다는 ‘나는 쿨하게 반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포장하는 행위이고, 반성을 악용하는 일일 뿐이다. 반성할 일을 결코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의식은 좀 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그런 시인들치고 좋은 시 쓰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물론 시인은 성인군자가 아니다. 개차반의 성격을 가지고도 좋은 시를 쓰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앞뒤가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선한 사람은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악한 사람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모순 같지만, 앞에서 언급한 가식적인 사람들도 좋은 시를 쓸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자기가 가식적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은 좋은 시를 쓸 수 없다고 본다. 그건 왜인지 지성과 감성이 모두 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좀 아팠는데, 엉터리 시인들을 잔뜩 험담하고 나니 머리가 더 아프다. 7월 근무 시작 이래, 이례적으로 시집 출간 문의가 쇄도해서, 정신없이 시집들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정작 내 시집의 출간은 요원해 보인다. 첫 책을 내고 나면, 정말이지 한동안은 시에서 떠나 있고 싶다. 요즘은 시 쓰기에 대한 열정이 많이 줄었다. 다른 많은 것들을 생각하느라, 걱정을 사서 하는 성격 탓에, 원고 계약이 자꾸 좌절되는 바람에 그렇겠지만, 또 일과 학업의 병행으로 다소 소진된 경향도 없지 않지만, 기계처럼 시를 쓰는 일이 어쩐지 요즘은 다 부질없다는 생각도 든다. 역시 시 쓰기란 습작생 시절이 가장 재밌다. 습작생도 아닌, 그렇다고 명함을 내밀만 한 시인도 아닌, ‘무명의 신인’이란 이토록 혹독한 위치다. 술 담배를 끊고, 운동을 하고, 지속적인 독서를 하면 삶의 질이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지금은 전에 없이 신경증적이며, 스트레스에 취약해져 있다. 천성은 어쩔 수가 없구나, 생각한다. 사회 한복판에 던져져 있지만, 골방에 처박혀 있는 느낌이 든다. 나는 세계를 골방으로 만들고 있다. 나는 이런 것이 죄다 슬픔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슬픔이라 이름 붙이기 난감한 감정이다. 마구 울다가 문득 ‘그런데 왜 내가 울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어 울음을 그친 채 어리둥절해 있는 기분이다. 잠을 자도 피곤하다. 작년에 한 잡지에 실은 좌담에서는 ‘소확행’을 묻는 질문에 그런 대답을 했다. “소확행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에겐 소행만 있을 뿐이지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결코 확실하지 않다. 그건 그냥, 이제는 잘 듣지 않는 진통제 같기도 하다. 삶에 너무 많은 내성이 생겨버렸다.
지구에서 한아뿐
'지구에서 한아뿐' / 정세랑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제목부터 지구에서 한아(하나)뿐이다. 달달한 사랑 이야긴데 그 달달함이 조금 이상하다. 달달하긴 한데 지구인과 외계인의 러브스토리고 정말 달달하긴 한데 보다 보면 과연 나는 얼마나 환경을 생각하며 살았는지 곱씹게 된다. 조금 희한하긴 하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한아는 지구를 사랑하는 의류 리폼 디자이너다. 망가져가는 환경을 안타까워하고 지구에 인간이 너무 많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한아는 못 쓰게 된 옷들을 다시 리폼해주는 '환생'이라는 작은 옷 수선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의 남자 친구 경민은 자유분방이란 말이 어울리는,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한아를 놔둔 채 늘 어딘가로 떠나버리곤 한다. 이번 여름에도 캐나다로 유성우를 보겠다며 떠난 경민. 경민이 떠나고 며칠 뒤 뉴스에 캐나다에 운석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나온다. 한아는 바로 경민에게 연락하지만 경민은 연락이 되지 않는다. 애타게 경민을 기다리며 마음 졸이는 한아. 다행히 경민은 무사히 돌아오고, 연락이 안 되는 경민에게 잔뜩 나 있던 화는 막상 경민을 보자 여름날의 눈처럼 스르륵 사그라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한아는 돌아온 경민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다. 전보다 너무 다정해졌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지도 않는다. 팔에 있던 커다란 흉터가 사라졌고 못 먹던 가지무침도 맛있다며 먹더니, 급기야 경민의 입에서 초록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목격한 한아. 경민은 진짜 외계인인 걸까? 그렇다면 원래의 경민은 어디로 간 걸까? 이 소설은 누가 뭐래도 달달한 사랑 이야기다. 한아를 만나러 2만 광년 떨어진 지구까지 날아온 외계인과의 러브스토리라니. 오직 한아를 만나기 위해 커다란 빚을 지고 엄청난 거리를 넘어온 외계인. 그 노력만 해도 지극정성인데 그 외계인이 한아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100점짜리 남자 친구다. 늘 한아를 배려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남자 친구. 유일한 단점은 외계인이라는 것뿐. 한아는 외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외계인이 경민의 겉모습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거리감을 느끼지만 점점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외계인에게 자신도 사랑을 느낀다. 경민의 탈을 쓰고 있지 않아도, 초록색 돌덩어리인 본모습이라도 사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초록색 돌덩어리라도 사랑할 수 있어. 한아의 말에서 우리는 사랑의 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랑에는 아름다운 외모, 외계인이라는 사실, 성별의 유무, 나와 전혀 다르게 생긴 모습, 그 무엇도 중요치 않다. 상대방을 아끼고 배려하고 생각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중요할 뿐. 어찌 보면 오글거리기도 하고 뭐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하겠지만 사랑이라 불리는 많은 것들 중에 저 단순한 문장을 만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어떤 사랑은 상대의 존재가 아니라 상대의 능력, 외모, 재력이 사랑의 조건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랑은 저 단순한 문장을 한없이 만족시킴에도 사랑으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그저 같은 성별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한아와 경민의 사랑을 좀 본받을 필요가 있다. 이 소설에서 다른 하나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환경에 대한 내용이다. 한아는 지구와 환경을 사랑하는 환경주의자고 외계인 경민이 한아에게 반한 이유도 한아가 환경을 사랑하는 모습과 맞닿아 있다. 고래형 외계인들이 지구의 바다 오염에 힘들어하는 고래들을 도와주는 에피소드나 얼음별에 사는 무당벌레 모습을 한 외계인들이 점점 더워지는 별의 환경 때문에 멸종되어가는 모습, 지구를 동경한 한 부자 외계인이 지구를 본떠 만든 어딘가 부족한 제2의 지구, 광합성인들의 행성을 그 모습 그대로 보존시켜주겠다는 우주의 약속 등, 소설 속 우주의 모습들은 지구의 여러 단면들을 떠오르게 한다. 환경오염에 힘들어하는 고래들의 모습은 지구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무당벌레 외계인의 멸종은 지구 온난화와 멸종 위기종들의 모습을, 제2의 지구에서 고통받는 만들어진 생명체들의 일화는 인간이 만든 동물원의 모습을, 광합성인들의 행성을 보존시켜주겠다는 약속은 아마존 열대우림 보존에 관한 첨예한 대립을 생각나게 한다. 실제로 수많은 동물들이 멸종되었고 멸종 위기 상태에 있으며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은 엄청난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는다. 심지어 동물원에서는 인간의 유희를 위해 백호나 백사자 같이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생겨나지 않는 동물들을 강제로 만들어내기도 하며 아마존의 보존과 개발에 관해서는 지금도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우주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지구의 모습을 보고 지구의 환경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한아의 말대로 지구에 인간이 너무 많은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본격 환경친화적 외계 로맨스 소설 되시겠다. 환경은 환경대로, 로맨스는 로맨스대로, 외계인과 우주라는 양념을 적절히 쳐서 비볐더니 이토록 다채로운 모습을 가진 소설이 나왔다. 삶이 힘든 사람에게, 다 때려치우고 싶은 사람에게 이 소설을 권하고 싶다. 환경 문제도, 사랑에 대한 고민도 너무나 다정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이 책은 충분히 당신의 삶을 두텁게 감싸 안아준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면 작가가 건네는 말이 들리는 듯 하다. 당신은, 지구에서 한아뿐이라고. 소설 속 한 문장 소리 없이, 먼 우주의 휘어진 빛들이 두 사람의 저녁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