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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쿵심쿵 시노래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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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중요한 것들, 그러니까 다른 중요한 것들은 미루고 미루는 한이 있어도, 이 글은 어떻게든 이렇게 마감일을 지켜 쓰고 있다. 나는 나와의 약속만을 중요시하는 사람 같다. 한 번쯤은 이 지면을 시 다운 시, 그러니까 분량은 그대로라도 어느 정도 보편적인 범주에서의 시 형식으로 채우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 이 글은 이제 내 의지와는 조금 무관하게,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흘러가는 것도 같다. 나는 거들 뿐이다. 며칠 전에는 아는 사람과 낙원상가 부근에 있는, 통나무 식당이라는 곳에 해물찜을 먹으러 갔다. 해물찜의 맛을 보기 전 그는 나를 의심했다. 과연 이번에 내가 데려가는 집은 맛집이 맞는지.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올해 초에 염장을 하지 않은 맛없는 튀김 닭을 먹고 나를 비난했던 그 작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튀김 닭만으로 나를 필요 이상으로 비난한 것은 아닌 것이, 하필 그날 튀김 닭을 먹기 전 데려갔던 이태원의 ‘존슨탕’이라는 음식을 파는 바다식당이란 곳에서도 형편없는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상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태원의 바다식당은 꽤 유명한 집이며, 유명하다고 다 절대적인 맛집은 아니겠지만, 분명 내가 전에 경험한 그곳의 존슨탕 맛은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여담이지만 그날, 그러니까 맛이 괜찮았던 날, 우리 일행의 옆 테이블에는 영화 『강철비』의 감독 양우석이 그의 배우자로 보이는 사람과 그의 아이로 보이는 사람과 셋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가 과연 맛집이 맞느냐며 나를 비난했었고, 내가 생각해도 그날의 존슨탕 맛은 너무나 밍밍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주방장의 컨디션 문제였는지, 레시피 하나가 실수로 빠졌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비난을 막아낼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만회한다고 저녁에 데려간 양재동의 한 튀김 닭집은 테러 수준이었던 것이다. 사실 우연히 알게 된 그 닭집은 내가 가본 집은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맛집 그 자체였기 때문에 모험을 감행했다가 호되게 당한 꼴이었다. 그곳의 분위기가 어떤가 하면, 일단 지하로 내려가며, 다소 허름하다. 을지로의 분위기가 나기도 한다. 외관상으로는 최고의 통닭집이다. 아마도 함께 보았다면,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배웠다. 허름한 집이 꼭 맛집은 아니라는 것을. 외관이 허름한데, 맛조차 허름한 곳도 분명 있다는 것을. 이유 없이, 아니 이유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필요 이상의 비난을 받았던 나는 그에게 이번에는 제대로 된 맛을 보여줘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는 해물찜을 먹고 만족해했으며, 앞으로 더 두고 볼 테니 잘하라는 듯한 느낌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게다가 나는 해물찜을 먹이기 전 충무로의 태극당에서 그에게 모나카 아이스크림 하나를 쥐여 주었다. 그는 대체로 마음에 들어 했다. 나는 별걸 다 만회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대학로의 학림다방을 가자고 권했고, 그는 좋다고 했지만, 그곳은 만석이었으며, 대기자도 두세 팀이나 있었다. 창가의 한 4인용 테이블에는 여자 손님 한 명이 혼자서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마치 70년대의 한 풍경처럼 노트에 펜을 끼적이며, 눈을 감고 과하게 무언가에 몰입하고 있었다. 시라도 쓰고 있는 것 같았는데, 조심스레 다가가 “저기……, 시를 좋아하시나 보죠?”라고 하며, 은근슬쩍 착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사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우리는 터벅터벅 내려와 프랜차이즈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태극당에서 사 온 사라다빵을 반으로 나눠 그를 먹였다. 태극당의 사라다빵은 꽤 유명하지만, 사실 그 부피에 압도되는 것이지, 맛이 그렇게 특별한 편은 아니다. 그는 배가 부르다고 했지만, 조금 뒤 카페 건너편에 보이는, 백종원이 운영하는 한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가서 열탄불고기나 먹자고 했다. 나는 그에게 그것이 진심이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다고 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그는 잠시 망설였다. 식당이 2층이었기 때문이다.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진심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잠시 뒤 우리는 결국 그 식당에 갔다. 확실히 그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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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가 끝나버렸다. 주말이 남았지만 휴가에 포함하지 않기로 한다. 사실은 친구와 부산행을 계획하고 기차표와 숙소까지 예약해두었지만, 부득이하게도 그가 갑작스러운 회사업무로 인해 휴가를 낼 수 없게 되어, 모든 걸 취소하게 되었다. 세상에. 할 것이 없었다. 기차표를 취소하고 환불받은 돈으로 티셔츠를 두 장 구입했다. 그 티셔츠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미국에서 오고 있는 것이어서, 둘 다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내년이 되기 전에는 도착해있겠지. 준비할 시험이 있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보던 드라마를 최종회까지 마저 보았다. 그 드라마는 정치적 올바름으로만 무장돼있어서, 아이러니라고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드라마라기보다는 조금 공들여 만든 공익 캠페인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회부터 국회의사당이 폭발하는 드라마에는 낯이 익은 남자배우의 얼굴이 나왔다. 세상에. 그는 한때 나와 대학에서 타 과의 극작 수업을 같이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써온 희곡을 서로서로 배역을 맡아 리딩을 하고는 했는데, 당연히 그가 내 희곡의 한 인물을 맡아 연기를 하기도 했다(당시 내 희곡의 제목은 「독설가 구라 씨의 一日」이었다). 나는 그의 연기가 전공자치고는 그리 훌륭한 편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고, 발음도 연기하는 사람치고는 어눌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는 내가 쓴 대사의 토씨들을 조금씩 바꿔가며 읽었는데, 연기라고는 모르는 나로서는 그것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때 그는 머리가 상당히 길었었는데, 드라마에서는 짧은 머리로 등장하고 있었다. 당시에도 그렇게 젊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이 드라마에서도 역시 젊어 보이지는 않았다. 바이크를 타고 캠퍼스를 누비던 그가 생각난다. 포털 기업이 등장하는 다른 드라마의 첫 회를 보았다. 이 드라마는 김은숙 작가의 오랜 보조 작가였던 이의 입봉작이다. 그녀는 한때 나와 같은 과의 한 학년 선배이자 같은 동아리 멤버였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시청하면서, 역시 그녀 특유의 취향이랄 것이 잔뜩 묻어나는군,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필명을 쓰고 있는데, 왜 굳이 필명을 쓰는지 궁금해졌고, 이제는 연락처조차 모르는 그녀에게 왜 필명을 쓰느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너, 너 말이야. 웃기게 들리겠지만, 약 10년 뒤에 너는 이러이러한 제목의 드라마의 작가가 돼 있다. 너는 또한 이러이러한 필명을 쓰고 있을 테고. 왜 넌 필명을 쓴 거니? 아직 닥쳐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입봉한 소감이 어때? 이렇게 묻는 내 앞에서 그녀는 아마도 담배를 피우며, 그게 대체 무슨 황당무계할 정도는 아니지만,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을 것만 같다. 휴가 동안 고작 한 일이라고는 이런 엉뚱한 상상뿐이다. 아니다. 나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드디어 읽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재미있고 친절한 책을 왜 지금까지 읽지 않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년으로 미루기로 했던 <김수영 문학상> 투고를, 마음을 바꿔 예정대로 올해 하기로 했다. 내 시는 아마도 투고된 여러 원고 중 단연 튈 것이라 어느 정도는 장담한다. 시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이런 것도 시인가, 혹은 어떻게 이런 걸 시집 원고로 묶어 낼 생각을 했을까, 과연 양심이란 것이 있는가, 라는 논의에서는 꽤 유효한 지점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김수영 문학상 역대 수상자 중에는 그야말로 으리으리한 시인들의 시집이 대거 포진해있지만, 김수영 시인이 분개할만한 그야말로 형편없는 시집들도 사실 적지 않게 껴 있다. 이러한 현실을 비추어 볼 때, 내가 그곳에 투고한 것이 그렇게 문제적인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김수영 시인의 사진을 보면, 흡사 배우 안성기나 양조위와 조금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혹여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어 수상소감에 “김수영 시인을 생각하면, 첫 번째로 안성기나 양조위가 떠오릅니다. …… (중략)”라고 말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세상에. 많은 독자가 분개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박상영, 김희선, 백수린, 이주란, 정영수, 김봉곤, 이미상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이번에 읽어본 것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1에서 9회까지의 수상작품집을 놓친 것이 아쉬울 정도로 좋은 작가와 좋은 소설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앞으로 매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총 7편의 소설들은 다채로웠고 각각이 독창적이었으며 그 때문에 각 편마다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지만 그러려면 한 편마다 따로따로 리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여기서는 한 소설당 한 문단 정도 간단한 감상평을 남기기로 하겠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 박상영 주인공인 '나'가 운동권 학생이었으며 지금도 서구 열강을 끔찍이 싫어하는 옛 애인과 암에 걸렸지만 한시도 불쌍하게 여길 수 없는 엄마 사이에서 겪는 일들을 그린 소설이다. 아직도, 어쩌면 오랫동안 벗어날 수 없을 두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는 그저 살아갈 뿐이다. 분노하기도 하고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기뻐하기도 하면서. '나'와의 관계를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 싫어하고 창피해하는 동시에 과거의 운동권 학생 시절에 사로잡혀 있는 옛 애인. 언제나 강건하던, 그리고 '나'를 밀어내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에 놔둔, 그러나 암에 걸리고 성경을 필사하는 엄마. '나'는 그 둘을 추억하고 기억하고 증오하고 원망하고 안쓰러워하고 행복해하면서 삶을 산다. 그 지점에서 오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사람 간의 관계가 주는 감정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또 다른 좋았던 점은 게이의 연애를 특별하게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성애와 다르게, 뭔가 특별하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중요하게 그리지 않은 게이 커플의 연애 이야기는 성별이 별 의미를 가지지 않는 그냥 서로 사랑했던 한 커플의 이야기였고 그 부분이 세심하고 좋았다. '공의 기원' / 김희선 재밌다. 일단 재밌다. 필자는 이 소설이 거짓말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작가의 뻔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실제로 지금의 축구공이 이렇게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고 인터넷에 검색해보기까지 했다. 비유하자면, 만우절 거짓말 대회가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 대회에 나온 사람이 하는 말이 당연히 거짓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대회에 나온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데 거짓말인 걸 알고 듣는데도 사실인가? 진짜 있었던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더니 급기야 이 대회가 만우절 거짓말 대회라는 걸 잊게 만들어 버렸다고 해야 할까. 교묘하게 진실과 거짓이 섞여있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말인지 알 수가 없다. 제대로 속아 넘어간 기분이다. 한편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란 명확한 선으로 재단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 공의 기원과 실제로 지금의 축구공이 만들어진 진실된 기원의 이야기가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진짜를 가려낼 수 있을까? 진짜도 가짜가 되고 가짜도 진짜가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 '시간의 궤적' / 백수린 한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두 한국인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프랑스에서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겠다는 목표로 한국을 떠난 '나'와 프랑스에서 주재원 일을 하고 있는 언니. 둘은 타지에 놓인 한국인이라는 동질성을 매개로 아주 끈끈한 사이가 된다. 하지만 '나'가 프랑스 남자와 결혼을 하고 꿈을 버린 채 주부가 되면서 둘의 사이는 조금씩 금이 간다. 프랑스에 정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브리스와의 결혼 생활이 지속되면 될수록 '나'는 프랑스라는 땅에 뿌리를 뻗지 못한 채 부유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느낌, 브리스의 아내로, 남편의 부속품으로 존재하는 느낌을 받은 '나'는 주재원 생활을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언니에게 말한다. [그건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 필자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타국에서 사는 한국인, 여성으로서의 삶, 주체적이지 못한 존재라는 느낌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프랑스인과 결혼한 '나'는 물론이고 언니도 남성이 다수인 주재원 그룹에서의 철저한 약자이자 가십거리이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고 끝나게 된다. 그것이 그 둘의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일까? 필자는 소외된 자이자 사회적 약자의 상황에 놓인 둘의 어쩔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비틀린 동경과 선망이 그런 결과를 이끌어 냈다고 생각한다. 안타까움과 이해가 동시에 찾아오면서 '나'와 언니를 모두 토닥여주고 싶은 결말이었다. '넌 쉽게 말했지만' / 이주란 이 소설에는 딱히 서사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흥미진진한 사건이나 이야기 전개도 없고 서울에서 시골의 어머니 집으로 들어온 '나'가 시골 생활을 하는 이야기가 전부다. 그마저도 별 이야기가 없다. 예전 친구들과 가끔 데이트 비슷한 것도 하고 영화도 보고 엄마와 요리를 해 먹거나 산책하면서 미나리를 뽑고. 그나마 조금 긴장감을 주는 것이 석기와의 에피소드인데 그것도 석기가 [씨발, 너 진짜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끝난다. 얼핏 보면 지루한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필자는 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글로 쓰이지 않은 부분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나'의 과거의 조각들을 짜 맞추면서 소설 속에 글로 쓰여 있지는 않지만 '나'가 갑자기 엄마가 있는 시골집으로 돌아온 이유, 서울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고난, 외로움들을 읽을 수 있었다. 글이 없는 빈 여백을 읽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가 서울에서 이러한 일들을 겪어서 너무 힘들었고 그래서 엄마에게 같이 살자고 했고 내려와서 휴식을 하다가 다시 힘을 내서 서울로 돌아가는 것까지 모두 쓰인 소설이었다면 서사는 완성되었겠지만 여백을 독자 스스로 상상하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 읽어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가 엄마와, 예전 친구들과 살아가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그 외의 부분은 모두 독자가 스스로 쓰고 읽도록 만들었기에 이 소설은 조금 다른 방식의 공감과 감정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쓰지 않음으로써 썼다고 해야 할까. '우리들' / 정영수 '나'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책으로 내달라는 정은과 현수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정은과 현수는 각자 배우자가 있으면서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고 '나'는 정은과 현수의 모습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그들을 통해 자신과 연경의 관계를 계속해서 돌아본다. '나'와 연경의 관계와 정은과 현수의 관계의 극적인 대비, 어리고 어설프고 각자 자신만의 사랑을 주장했던 '나'와 연경의 관계는 진정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어른의 사랑을 하고 있는 정은과 연수의 관계와 대비되면서 '나'를 점점 더 그 둘의 관계에 빠져들게 만든다. 하지만 그 관계는 현수의 한마디로 끝난다. [우리 매년 여름마다 여기 올까?]라는 현수의 한마디. 각자 배우자가 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이어가던 정은과 현수의 관계는 진정한 어른의 관계가 아니었다. 언젠가 끝날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한 책임조차 지기 싫어 열정적으로 부딪히지 않았던 관계가 바로 그 둘이었고 외면하고 있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현수가 꺼내는 순간 미래의 책임과 종말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진정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어른의 사랑처럼 보였던 둘의 관계는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나'는 정은과 현수에 대해, '나'와 연경에 대해 글을 완성했을까? 약속된 끝을 재촉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질문인 것일까. '데이 포 나이트' / 김봉곤 이 소설에서는 한 문장에 꽂혔다. [H선생님과의 빙빙 돌아가는 대화, 불분명한 송수신 방향, 느리게 오가는 속도 들을 나는 좋아했다.] 이 문장인데 속도들을 이 아니라 속도 들을 이라고 띄어쓰기를 한 부분이 가슴에 확 꽂혔다. 무엇 때문에 저 띄어쓰기 하나가 감정을 건드렸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읽다 저 문장을 마주하고 다섯 번 정도 저 문장을 반복해서 읽으며 문장의 맛을 느꼈다. 처음 해보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나'가 자신의 잊고 싶은 과거의 동성 연인 종인 선배를 기억하는 내용이다. 전적으로 퀴어 서사가 중점이 된다는 면에서 '우럭 한 점 우주의 맛'과 다르다. 종인 선배는 취하면 '나'와 섹스를 하며 동시에 '나'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다. '나'는 그 폭력을 고스란히 감당하며 종인 선배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한다. 둘의 끝은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어쨌든 둘의 관계는 끝이 난다. 긴 시간이 지난 후, 지금의 '나'는 우연히 종인 선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이는 '나'를 얼어붙게 만드고 욕이 나오게 만들 만큼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걸 '나'는 깨닫는다. 종인과의 관계에서 받았던 사랑으로 위장된 상처와 고통을 직시하지 않은 채로 저 속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 이 소설은 결국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숨겨놓았던 그것을 꺼내 바라보고 되새기고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가 종인 선배와의 기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되감은 후, 결국 [한참을 걸어가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본 그곳에는 H선생님도, 종인 선배도, 나도 없었]듯이. '하긴' / 이미상 '나'가 딸 보미나래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그 이유는? 딸의 미래를 위해서? 아니면 딸이 사회에서 무시받지 않게 하려고? 전혀. 딸은 '나'의 소유물이고 내 딸이 좋은 대학에 못 간다는 것은 곧 '나'의 사회적 평판이자 '나'의 위치 하락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는 보미나래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딸을 미국의 에코 공동체에서 1년간 생활하게 하고 그곳의 생활로 영화제에 출품할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상을 받는다. 그 상을 가지고 딸을 경기도 한 대학의 사회학과에 입학시키는 장대한 계획. 딸이 가지고 온 별 쓸모도 없는 사진과 영상들로 어떻게든 혼자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하는 '나'는 갑갑하던 차에 술자리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한창 술을 마시던 중 딸이 산부인과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더니 딸은 피부가 검은 아이를 낳았다. 미국에서 성폭행을 당했거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거라고 믿는 '나'의 아내와 검은 피부의 손자인 샘을 지극히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나'. 그리고 임테기 천사가 된 보미나래를 보여주며 소설은 끝이 난다. 유독 한국에서는 아이는 부모의 전적인 소유물이자 부속품이라고 여기는 느낌이 있다. 부모가 아이를 때려가며 공부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에 잘 따르고 얌전히 공부 잘하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과연 그렇게 자란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 자기의 삶을 살아가야 할 때 자신의 두 발로 삶을 걸어갈 수 있을까?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닐뿐더러 부모의 간섭과 조종이 없더라도 생각보다 스스로 행복하게 산다. 부모의 뜻대로 전혀 이뤄지지 않은 보미나래가 누군가의 위로이자 희망인 임테기 천사가 되었듯이 말이다. 어딘가에서 보았다.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보면 현대의 문학을 이끌어가는 작가 중 자신의 맘에 드는 작가를 적어도 한 명은 반드시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말. 필자에게는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었다. 한국 소설을 읽어보고 싶은데 어떤 것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은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으로 독서를 시작해보기 바란다. 당신의 작가가 기다리고 있다.
데드 하트
'데드 하트' / 더글라스 케네디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빅픽쳐는 물론이고 템테이션, 스테이트 오브 더 유니언, 파리5구의 여인, 비트레이얼까지 늘 재미있게 읽었다. 이번에 읽은 데드 하트도 흥미진진했다. 더글라스 케네디 소설의 특징은 술술 읽히는 가독성과 빠른 스토리 진행, 그로 인해 지루할 틈 없이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인데(필자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특징이다.) 데드 하트도 고스란히 그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비슷한 개성의 주인공들과 스토리 전개가 단점일 수도 있지만 그걸 뛰어넘어서 늘 재미있는 소설을 써낼 수 있다는 것이 부러울 뿐이다. 데드 하트의 주인공인 닉은 지방 신문사를 전전하며 먹고사는 기자다. 특이한 점은 10년이 넘는 기자 경력에도 대형 신문사에는 절대 지원하지 않고 소규모 지역 신문사들, 그것도 한 신문사당 2~3년 간격으로 옮겨가며 취직을 한다는 것이다. 보스턴의 신문사로 직장을 옮기려던 닉은 우연히 호주의 지도를 보고 아무것도 없는 야생의 땅, 호주로 떠나기로 한다. 그렇게 호주의 최북단 다윈에서부터 밴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한 닉은 앤지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고 그녀가 살던 마을로 납치당한다. 앤지가 약을 투여해 의식이 없는 상태로 강제 결혼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 의한 감금생활을 하게 되는 닉. 앤지가 사는 울라누프라는 마을은 호주 지도에도 없는, 네 가족이 마을 구성원의 전부인 마을이고 그곳에서 앤지의 아빠인 대디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황무지 한가운데, 마을을 가장한 감옥에 갇힌 닉은 그 구성원 안에서 유일하게 대화가 통하는 크리스탈과 함께 마을을 탈출하기로 한다. 처음 황무지를 횡단하는 닉의 모습은 힘들고 피곤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화롭다. 그런 스토리는 앤지를 만나 납치당해 울라누프라는 마을에 당도하게 되면서 스릴러로 바뀐다. 그때부터 급격하게 진행되는 닉의 탈출을 위한 처절한 노력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항상 느끼지만 이 작가는 빠른 서사 진행으로 긴장감과 속도감 있는 글을 참 잘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책이 그리 얇지도 않은데 읽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으니 말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고, 되는대로, 자신이 편한 대로 살아가면 그만이었던 닉은 울라누프에서 탈출을 시도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낭비해왔던 삶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하루하루 아무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이 감시당하며 사는 울라누프에서의 시간이 닉에게 탈출과 삶에 대한 열정을 끊임없이 불태우도록 만든 것이다. 인간이란 참 미련하다.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간절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모든 자유와 의지를 박탈당한 그때에야 온몸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과연 나는 지금의 삶을 후회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한편으로는 카뮈의 이방인이 생각나기도 했다. 뫼르소가 죽기 직전에서야 삶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한껏 터트린 가까스로 울라누프를 탈출해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는 닉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드 하트를 한 줄로 말하자면 '이야기 속에 빠져 정신없이 읽고 나면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소설 속 한 문장 : 마침내 나는 나의 고독, 나의 뿌리가 없다는 사실이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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