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er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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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질투한 일본의 역대급 사기극

70만년 전 구석기인에게
주먹도끼란 최첨단 도구

주먹도끼는 하나를 가지고 다양한 용도로 사용이 가능한데
1. 가죽 찢기
2. 사냥
3. 나무 가공
등등등등

오늘날로 따지면 맥가이버 칼과 같음

즉 당시 기술의 집합체가 주먹도끼라는 것

그런데 이 주먹도끼가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에서 출토됨
동아시아에서는 발굴이 안됐었음
이것이 정설로 내려오고 있었음

여자친구가 우리나라 사람이였음
상미씨!
고고학자였던 그렉고웬은 데이트 중 발견한 돌을 보고
"원래 동아시아에는 주먹도끼가 없는데 내가 한반도에서 발견한 것 같다"
그래서 정밀검사를 요청함

그동안 쓰여졌던 논문도 다 바꿔야 하는
동아시아권의 역사를 뒤바꾸는 위대한 사건이 됨

그렉과 상미씨는 결혼했다고 함♥

다니던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구석기 유물을 찾으러 다님
고고학 전공도 아님

이 시간은 시기했던게
음~~ 이쯤에서 구석기시대인들이 살았을 것 같다 해서 파보면
뭔가 쑥하고 나옴

그래서 80년대 초반에
일본의 구석기시대 역사를 널리알리게 됨

그러나
오랜 기간 땅에 묻혀있었으면 축축해야 하는데
냄새가 나~ 느낌이 있어~
자기자랑하기 바빴음

그래서 기자는
이 이후에 국제 고고학 학술대회가 있었는데
겨우 참석한 학술제에서도 꿀먹은 벙어리로 있었다고 함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건
70만년전의 이야기가 국격과 이어지는 문제로 전쟁처럼 이어지고 있다는 것

관심좀 주세요..
귀찮으실까봐 댓글 달아달라고 못하는데
클립과 하트 정말 좋아해요...♥
5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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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설의 근거가 애초에 잘못되긴 했지만, 우리는 그렉 보웬한테 정말 고마워해야 한다.
고맙네 그서방
보서방 아닌가요??
헐 나였음 그냥 돌멩이1로 봤을텐데 신기하다
원래 구석기시대 유물은 전공자도 자세히 안 보면 모릅니다. 이게 대체 자연적으로 깨진건지 사람이 인위적으로 깬 건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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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츠카’가 아식스로 이름을 바꾼 이유
... ‘일본 브랜드 네이밍’ 이야기 3편(1편 카레, 2편 커피)은 스포츠용품 회사다. 일본 3대 스포츠용품 메이커는 아식스, 미즈노, 데상트다. 이들 메이커는 글로벌 시장에서 최강자인 나이키, 아디다스 등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나이키, 승리의 여신 니케(Nike)에서 출발 나이키는 미국 오리건대 육상선수였던 필 나이트(Phil Knight)가 육상부 감독이던 빌 바워만(Bill Bowerman)과 함께 만들었다. 이들이 1964년 설립한 회사가 ‘블루 리본 스포츠’(Blue Ribbon Sports)다. 이후 1971년 나이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를 회사 이름으로 사용한 것. 1971년 캐롤린 데이비슨(Carolyn Davidson)이라는 그래픽디자인과 학생이 빠른 것을 상징하면서 하키 스틱처럼 날렵하게 뻗은 마크를 만들어냈는데, 그게 바로 나이키의 상징인 ‘스우쉬’(Swoosh)다. 나이키는 35달러에 이것을 구입했고, 스포츠화를 대표하는 로고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됐다. 독일 브랜드 아디다스(Adidas)는 1920년대 제화업자 아디 대슬러(Adi Dassler)가 형 루돌프 대슬러와 함께 만든 회사다. 이 상표가 공식등록된 건 1949년. 아디 대슬러의 이름 ‘Adi’와 Dassler의 세 글자 ‘Das’를 붙여 Adidas라고 이름을 지었다. 형 루돌프는 나중에 독립해 퓨마(Puma)를 설립했다. 아식스, 라틴어 구절에서 회사 이름 따와 이제, 일본 메이커로 들어가 보자. 일본 스포츠용품의 리더는 아식스다. 창업주는 돗도리현 출신의 오니츠카 기하치로(鬼塚喜八郞: 1918~2007). 그가 1949년 효고현 고베에서 회사(농구화 제조사)를 설립할 당시의 사명은 ‘오니츠카’였다. 그의 이름을 딴 회사명은 이후 현재의 ASICS(아식스)로 바꾸었다. 오니츠카에서 아식스로 바꾼 까닭은 뭘까. 창업주 오니츠카 기하치로는 어릴 적 할아버지로부터 “남을 행복하게 하면, 자신도 행복하게 된다”(他人を幸せにすれば自分も幸せになれる)는 말을 들었다. 오니츠카는 살면서 이 말을 마음속에 새기고 살았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스포츠화 브랜드를 만드는 데도 작용했다. 아식스라는 브랜드는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Mens sana in corpore sano)’는 뜻인 라틴어 구절에서 따왔다. 창업주 오니츠카는 이 구절의 앞 단어 Mens를 좀 더 의미가 강한 ‘정신’이라는 뜻의 Anima로 바꾸어 ‘Anima sana in corpore sano’라는 문장을 만들었다. 이 구절의 앞 글자를 하나씩 딴 게 ASICS다. 오니츠카는 왜 하필 라틴어 구절에서 브랜드 이름을 따왔을까. 그는 ‘혼의 경영’이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봐 친구, 청소년들에겐 스포츠화가 필요해” <전쟁이 끝나고 군대에서 사회로 복귀하여 잿더미가 된 고베로 돌아온 나는 암거래시장에 모여드는 청소년들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아팠다. 회사를 설립하기에 앞서, 군대 친구 중의 한 사람이며 효고의 교육위원회 보건체육 과장인 호리씨를 찾아가 “앞으로 청소년들의 교육에 도움이 될 만한 사업으로 어떤 것이 좋을까”를 상의했는데, 그때 그가 해준 말이 ‘건전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것이었다.> 당시 친구 호리 코헤이(堀公平)는 “오니츠카, 지덕체의 세 가지를 균형있게 교육시켜 훌륭한 사회인으로 만들려면 스포츠가 최적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포츠를 청소년들에게 권장하려면 스포츠화가 필요했다. 아식스의 탄생 이유다. 2007년 11월, 오니츠카가 사망하자 그의 추도식에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이던 스즈키 이치로 선수, 마라톤 선수 다카하시 나오코(高橋尙子:시드니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등 스포츠 선수들을 포함해 1600여 명이 참석했다.(돗도리현 추모 기사 중에서) 오니츠카는 그렇게 일본 청소년들에겐 ‘꿈의 운동화’를, 스포츠 선수들에겐 ‘땀의 운동화’를 선물하고 세상을 떠났다. <미즈노, 데상트 이어집니다>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1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동전 던지지 말라" 간판 설치했는데도 사주 때문에 동전 던진 관람객…결국 죽은 악어
원문글 : http://www.animalplanet.co.kr/news/?artNo=3724 사진 : 同園 일본의 한 동물원에서 죽은 악어의 뱃속에서 동전이 무려 330개 이상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동물원 측은 "동전을 던지지 말라"는 간판을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람객들이 사주를 이유로 던진 동전을 악어가 집어 삼킨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일본 교도통신 등은 지난 2일(현지 시간) 나고야시에 있는 히가시야마 동식물원에서 지난 5월 사망한 미시시피 악어 뱃속에서 동전 330개 이상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는데요. 사진 : 同園 악어의 뱃속에서 나온 동전은 100엔짜리 4개, 50엔짜리 11개, 10엔짜리 225개, 5엔짜리 90개 등 모두 3,650엔(한화 약 4만 948원)이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위산에 녹은 1엔짜리와 동전 여러개, 게임용 코인 6개, 작은 돌 등도 나왔는데요. 죽은 악어 몸에서 나온 동전의 무게만 2.6㎏에 달했다고 하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동전을 먹은 것일까요. 처음 악어가 동물원에 들어왔을 때 유리창문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지만 지난 1989년 새 전시시설이 완공되면서 관람객들이 연못 위의 통로에서 악어에게 동전을 던지게 됐다고 합니다. 사진 : 同園 악어는 본래 먹은 음식을 갈아 으깨기 위해 작은 돌을 삼키는 습성이 있다는 점에서 동물원 측은 악어가 작은 돌을 삼키는 과정에서 동전도 함께 집어삼켰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동전을 던지지 말라"는 간판을 설치하기도 했었지만 효과는 없었다고 하는데요. 다행히도 해부한 결과 장기부전 징후가 발견되지 않아 사인은 노쇠로 판명됐지만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해부를 담당한 수의사는 "동물원 악어에게 동전을 던져줘도 공덕이 되지 않습니다"라며 "장이 막힐 가능성도 있는 만큼 동전을 던지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고 동물에게 동전을 던지지 말아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저작권자 ⓒ 애니멀플래닛,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볼만한 콘텐츠
신기하고 애틋한 숙명공주가 받은 한글 편지들.jpg
1. 효종이 숙명공주에게 쓴 편지 너는 시집에 가 (정성을) 바친다고는 하거니와 어찌 괴양이는 품고 있느냐? 행여 감기나 걸렸거든 약이나 하여 먹어라. 숙명공주가 고양이 덕후였다고 함 ㅋㅋㅋㅋ 나무라면서도 감기 걱정하는 효종 2. 이번엔 인선왕후가 숙명공주에게 ㅋㅋㅋ 편지를 보고, 아무 탈 없으니 기뻐하며 보는 듯 든든하며 반긴다. 그리 나간 지 여러 날이 되도록 아무래도 섭섭하기 비할 데가 없다. ‘녹의인전’은 다시 보내려 한다 하니 기뻐한다.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고 있느냐? 숙휘는 작은 베개에 석가산 수를 놓으니, 기고 서고 하는 등 낑낑거리면서 베개에 석가산 수를 놓으려 하고 시방 한다고 부스대는데, (언니인) 너는 어찌하려 하느냐? 첨엔 보고싶다는 내용인데 뒤로 갈수록 니 동생 숙휘는 임신해서 수도 놓고 하는데 넌 뭐하냐는 내용 ㅋㅋㅋㅋㅋㅋ 엄마한테도 잔소리 듣는 숙명공주ㅠㅠ ㅋㅋㅋㅋ 3. 또 인선왕후가 숙명공주에게 쓴 편지 글월 보고 무탈하게들 있으니 기뻐하며 친히 보는 듯 기쁘기 뭐라 할 말이 없다. 여러 날이 되어 가니 실로 (그립기가 한이) 없어 한다. 네 아우는 밤마다 내려갈 적이면 형님 있던 (곳에) 함께 가겠다고 하고 내려가서 울고 울고 하니 이튿날 이르러 오면 눈이 붇도록 울고 다닌다. 너도 아우를 생각이나 하느냐? 네게 글월을 적어 두고 회답 기다리느라 들락날락한다. 숙명공주 동생이 언니 보고싶다고 언니한테 가겠다고 울고불고 했나봄 ㅠㅠ ㅋㅋㅋㅋ 4. 인선왕후가 보낸 편지 편지를 보고, 무사하니 기뻐하며 보는 듯 못내 반긴다. 그런데 부마(숙명공주 남편 심익현)는 어찌 그러하냐? 염려가 그지없는 가운데 머리에 난 것은 헌 지 오랜데 아직 낫지 않으니 더욱 걱정되고 등에 돋은 것도 신체의 중요한 곳과 근접한 곳이니 걱정이 그치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은 나 혼자 더욱 쓸쓸히 앉아 가지가지 마음도 서럽고 슬픈 일이 많아 아침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인평대군의 대상도 마저 지나니 어느 사이에 삼년이 다 지났더란 말이냐. 새롭게 가슴이 답답하며 마음 아파한다. 네가 내일 들어오면 볼까 기다리고 있다. 숙명공주의 남편 심익현이 아팠나봄. 인선왕후도 이쯤에 슬픈 일이 많았는지 딸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드러남 ㅠㅠ 4. 동생 현종이 보낸 편지 조자의 편지 보고 보는 듯 든든하고 반기며 어제 봉상에서 부채 두르던 거시 그 누구인가 안다 하거니와 아무 날이나 따로 볼일이 있으면 내 가 뵙겠습니다. 숙휘, 숙정 두 누이에게 한가지로 말하십시오. 이년 신축년 윤칠월 십칠일. 악착스럽고 독하게 한 장은 보내라 하였으니 이렇게 보낸다. ㅋㅋㅋㅋㅋ마지막 뭐임 ㅋㅋㅋㅋ 숙명공주가 편지 보내라 협박했나 ㅅㅂㅋㅋㅋㅋ 5. 인선황후가 보낸 편지 글월 보고 무사히들 있으니 기뻐하며 보는 듯 반가우나 사연을 보니 더욱 속이 탄다. 마음이 서럽기 한이 있을 것이 아니거니와 그리 매양 생각하여 어찌하리? 떨쳐 마음을 모질게 먹고 지내라. 채식들을 그저 한다 하니 이전에도 오래 채식만을 해서 이제까지 그저 채식을 하니 몸이 오죽하냐? 어찌 그리 셈이 없는가? 오늘부터 고기를 부지런히 먹어라. 시아버지의 상중이라 공주가 채식만 하자 걱정하는 인선황후 ㅠㅠ 6. 인선황후가 보낸 편지 글월 보고 무사하니 기뻐하며 보는 듯 든든하고 반긴다. 숙경이는 나가니 그것을 두고 소일도 하고 걱정도 하며 날을 지내더니 맞아 내여 보내니 경사로 나가건마는 섭섭 하고 호젓하며 속이 타는 것을 어이 다 적으리? 이리 섭섭하고 속이 타나 마음을 모질게 먹어 웃고 내여 보냈노라. 옛날 너희 다 모이던 일이 생각나 섭섭하되 너는 얼마 되어 탈상(脫喪)을 할 것 아니거니와 숙휘를 생각하고 아직까지 마음이 굿버 울고 있노라. 오늘 생일이니 불쌍하고 생일이면 세 살 먹은 것같이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고 가지지 마음이 탄다. 동생 중 한명인 숙경공주가 결혼해서 나가니까 쓸쓸해진 인선왕후 ㅠㅠ 옛날에 다같이 모이던 때가 생각나고 섭섭해서 우심 ㅠㅠ 숙휘공주 생각나면 슬프다는 이유는 아마 숙휘공주 남편이 사망해서인듯.. 7. 이번엔 숙명공주가 아버지 효종에게 쓴 편지 문안 여쭙고, 밤사이 아바마마께서는 안녕하신지 알고자 바라오며, 뵙지 못한 채 날이 거듭 지나니 더욱 섭섭함이 무어라고 할 말 없어 하옵니다. 숙명공주가 쓴건 딱 한장 남아있다고 함 ㅠㅠ 딸도 아빠 보고싶은건 마찬가지 ㅜㅜ 8. 인선왕후의 편지 편지 보고, 무사하니 기뻐하며 보는 듯 든든하고 반긴다. 박 상궁이 들어오거늘 기별들을 듣고 보는 듯 든든하여 하며 가상의 형제들은 막 어여쁘더라 못내 말을 하니, 나는 언제 그놈들을 볼까 일컬으며 날이나 더 덥거든 모두 데려다가 보려 한다. 아들들을 낳은 숙명공주!!!!🙆‍♀️💖 박상궁 피셜 어여쁜 형제라고 함 ㅋㅋㅋㅋ 보고싶어서 안달난 인선왕후 ㅋㅋㅋㅋ 9. 남동생 현종의 편지 밤새 평안하옵신 일 아옵고자 바라오며 오늘은 정겨운 편지도 못 얻어 보니 그립기 그지없었습니다. 이 황감(귤) 일곱 개가 극히 적어 보잘것없으나 정으로 모은 것이라 보내오니 적다고 마시고 웃고 잡수십시오. 귤 7개를 누나 먹으라고 보낸 현종 ㅋㅋㅋㅋㅋ 위에서 악착스럽고 독하다고 뭐라 해놓고 ㅋㅋㅋㅋ 근데 실제로 둘이 친했다고 함. 10. 아버지 효종의 편지 너는 어찌하여 이번에 들어오지 않았느냐? 어제 너의 언니는 물론, 숙휘까지 패물들을 많이 가졌는데 네 몫은 없으니, 너는 그 사이만 하여도 매우 안 좋은 일이 많으니 내 마음이 아파서 적는다. 네 몫의 것은 아무런 악을 쓰더라도 부디 다 찾아라. 언니 동생들은 이번에 와서 패물들을 많이 받았는데 숙명이만 못받아서 맘에 걸린 효종 ㅠㅠ 악을 써서라서도 네 몫 좀 챙기라고 함. 11. 효종이 보낸 편지 죄지은 것이야 무슨 다른 죄를 지었겠느냐 이번에 아니 들어온 죄인가 싶다. 이렇게 들어오지 못한 죄를 지은 것은 전부 네 남편인 심철동 때문에 생긴 것이니 그를 들볶고 싸워라. 니 남편 때문에 이번에 네가 집 못온거임 ㅡㅡ 니 남편 조져버려 딸!!! 남편을 들볶고 싸우라는 조언 ㅋㅋㅋㅋㅋ 효종 조언 한결 같아 자꾸 악쓰고 싸우랰ㅋㅋㅋㅋㅋ 12. 효종 편지 보고, 잘 있으니 기뻐한다 어제 두 색촉(물들인 초)을 보내었는데 받아 보았느냐 초꽂이등을 이 초의 수만큼 보낸다. 그래도 이렇게 선물도 챙겨주는 다정한 아빠임 ㅋㅋㅋ 13. 효종 기운이나 무사한가 하며 너희 집의 일이야 어이 내내 모두 적겠느냐. 그 아이가 그렇게 될 줄을 어찌 알겠느냐. 어른들이 너무나 복이 없어서 그런가 한다. 정말 잊지 못하니 이제는 아이들을 이 세상에서 정 붙여 기르지 않으려 한다. 정은 끝이 없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서 잠깐 적는다. 위로 부모를 생각하고, 무익하게 비통한 마음을 먹지 말고 밥이나 힘써 먹고, 병이 들어 근심 끼치지 마라. 이 편지를 부마와 함께 보아라. 네 시아버지인 늙은 정승의 마음을 생각하니 더욱 안타깝기 그지없다. 찾아봐도 안나오는데 정황상 숙명공주가 아이를 잃었던것 같음 ㅠㅠ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드러남. 14. 효종 아홉 가지 왜능화 무늬 있는 종이 55장을 보내니, 부마가 입춘서를 써서 궁으로 들여보낸 상으로 주는 것이니까 부마에게 주어라. 숙명공주 남편이 입춘서 쓴거 상으로 꽃무늬 종이 55장 보내줌 ㅋㅋㅋㅋ 출처
아베 "한일관계 복원 계기, 한국이 만들어야" 주장
아베 신조 일본 총리(사진=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국가간 약속'을 준수할 것을 한국 정부에 거듭 촉구하면서 한국이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복원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NHK 등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8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국가간 약속을 어기는 행위를 계속하는 한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를 묻는 세코 히로시게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한국은 중요한 이웃 나라이며 북한 문제 등에서 한일, 한미일의 협력이 중요하다"라고 전제했다. 아베 총리는 이어 "한일 관계의 근본을 이루는 한일청구권협정의 위반 상태를 방치하는 등 신뢰관계를 해치는 행위를 계속하는 한국에 대해 우선은 국제법에 근거해 국가와 국가간의 약속을 준수함으로써 한일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려 놓는 계기를 만들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오전과 오후에 최소 2차례 이상 같은 취지의 답변을 되풀이했으며, 앞서 지난 4일 임시국회 개회식에서도 이같은 내용의 발언을 한 바 있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징용 배상판결이 나온 이후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을 내세워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한편, 아베 총리는 전날 동해 대화퇴 어장에서 발생한 북한 어선과 일본 수산청 단속선간의 충돌 사태와 관련해서는 북한 어선의 불법조업 행위가 확인되지 않아 구조선원들의 신병 구속 등 강제 조치를 하지 않고 주변에 있던 북한 어선에 신병을 인계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또한 조건을 붙이지 않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변함없이 계속 추진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펌] 악덕 세금징수인이 과학자였던 이야기
오늘 우리가 다뤄볼 이야기는 세금징수인이자, 과학자였던 라부아지에에 대한 것이다. (앙투안_라부아지에) 라부아지에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부르주아지 변호사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에서 법을 전공하다가 산소를 발견해 당시 거의 상식 수준이었던 플로지스톤 이론을 개박살냈고,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했는데 변호사 지망생의 말빨이 어디 안 갔는지 다른 과학자보다 홍보에 탁월했던 그는 다른 과학자들에 비해 자신의 이름을 더 많이 알렸다. 과학이라는 학문에서 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양분한 그의 업적은 실로 대단했지만(더 알고 싶은 사람은 위인전이나 과학책을 참조하시라) 사실 과학 얘기만 하면 재미없으니 그가 얼마나 악랄했기에 시민들이 왜 그를 단두대에서 쳐죽였는지 알아보자. 이야기하기에 앞서 당대의 세금징수제도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여봐라" (루이 16세) "예 폐하" "영국놈들이 미국하고 싸운다는데" "그래요?" "영길리놈 미국 시켜서 줘패게 돈좀 줘봐" "맨입으로요?" "새끼 쪼잔하게... 130% 4년이면 되냐?" "장사 원데이 투데이 해봅니까? 오케이!" 팩트로 따지자면 깔 거리가 한둘이 아니지만, 당시 세금이 정해지는 방식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세리는 국가공무원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바꿔 이야기하자면 관세청이 민영화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국가에 대금을 해 주고 징수를 할 권리를 얻어 세금을 걷는 식으로 장사를 했다. 즉, 왕에게 100달러를 빌려주고 나면, 왕은 이들에게 얼마 동안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주었는데, 딱 100달러 받았으니 받은만큼만 걷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이자를 묻고 따블로 붙여 120% 정도를 4년에 걸쳐 걷게 하는 식으로 세금을 걷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120%도 어디까지나 마지노선을 정해놓은 것일 뿐이다. 최소 20달러의 수입이 확정된 수준에서 얼마를 더 걷든지 왕은 ㅈ도 신경 안 썼다는 얘기다. 라부아지에는 일생동안 풍족하게 살았는데, 사실 알고보면 이게 다 조병갑급 탐관오리 행실에서 비롯된 돈이었던 셈이다. "오늘의 실험은 다이아몬드 태우기입니다" "뭐야씨12발 왜태워요" "니가 탄소라는 걸 증명해야되거든" "꽥" 다이아(였던것) 그러나 이런 그의 사치스러운 행보도 곧 끝나게 되는데 별건 아니고 대혁명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못살겠다 (브루주아지들의 뚝배기를)갈아엎자" "본인 방금 살아남는 상상함" "하지만 어림도없지" (로베스피에르) "엌ㅋㅋㅋㅋㅋㅋㅋ" (사망) "뭐여;;" "저새끼도 순 나쁜새12끼에요 죽여야돼요"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러세요" "너지? 파리에 성벽 세워두고 입출입할때 돈받은 놈이?" "네?" 그랬다. 라부아지에는 탁월한 머리를 과학뿐만 아니라 세금을 걷는 데에도 사용했는데 그의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파리 내부의 돈이 일정하다고 했을 때 입출입 업자로부터 돈을 받아 세금을 징수한다면 돈이 증발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결국 일정한 금액을 얻을 수 있게 되는데, 그는 이걸 실제로 세금을 걷는 데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가 활용했던 방법은 굳이 파리 전체를 감시하지 않아도 경계만 감시하면 되는 극한의 효율성을 자랑했기 때문에 요즘에는 외화 송금을 감시하는 데 사용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시대를 앞선 세금징수 방법 잘 봤구요" "살려줘" "응 아니야 바꿔줄 생각 없어 돌아가" "ㅠㅠ" 그렇게 그는 향년 53세를 일기로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사망하게 되었고 오늘날에도 과학자이자 범죄자로서 프랑스 교과서에 실려 있다. 다행히도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샤를은 살아남아 우리가 배우는 기체반응의 법칙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후문이다. "휴... 세리가 아니라 살았다;;" + 추가로 그는 28세에 결혼을 했는데 당시 아내가 13살이었다. 이것만으로도 (굳이 세금 징수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죽을만 했다고 생각한다. (끝) [출처 - 웃긴대학 이그림]
창업자 데릴사위가 키운 스즈키 자동차
... 스즈키 자동차의 1대 창업주 스즈키 미치로(얼굴 사진). ... 은행원 하다가 오너 집안에 장가들어 마츠다 오사무(松田修)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후현 태생으로 주오대(中央大)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은행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 졸업 5년 후인 1958년, 은행원이던 그의 인생에 일대 큰 변화가 찾아왔다. 스즈키 자동차 실질적 창업주 스즈키 슌조(鈴木俊三)의 데릴사위가 된 것이다. 마츠다 오사무는 스즈키 슌조의 장녀와 결혼해 양자가 됐고, 그의 이름은 마츠다 오사무(松田修)에서 스즈키 오사무(鈴木修)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큰 변화가 닥친 것은 1977년 무렵이다. <1977년에 창업자인 스즈키 미치오와 2대 회장인 스즈키 슌조, 3대 회장인 스즈키 지츠지로 등의 경영자가 잇따라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데릴사위인 내 어깨에 회사의 운명이 지워진 절박한 순간도 있었다.>(스즈키 오사무 저 ‘작아서 더 강한기업 스즈키’(김소운 옮김, 리더스북) 전현직 동시에 쓰러지면서 사장 자리 올라 전임, 현직 CEO가 동시에 쓰러지면서 스즈키 오사무는 순식간에 사장 자리를 맡았다. 입사 20년이 지난 1978년의 일이다. 닛케이비즈(2009년 3월 2일)는 당시 스즈키 오사무의 심정을 이렇게 보도했다. <“아, 내가 사장이야”- 스즈키 오사무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등골이 오싹한 생각에 사로잡혀, 이불에서 벌떡 일어났다. 쉴 때도 사장이라는 무게감이 덮쳤다.> 스즈키 자동차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스즈키 오사무(鈴木修‧87) 회장은 이렇게 큰 변화를 두 번 겪었다. 그는 경차의 대명사인 스즈키를 ‘위대한 중소기업’(偉大な中小企業)으로 키워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즈키 오사무는 2000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 스즈키의 차는 차체만 작을 뿐, 회사는 이제 더 이상 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의 반열에 올라 있다. 스즈키자동차의 슬로건은 ‘작게(小), 적게(少), 가볍게(輕), 짧게(短), 아름답게’(美)이다. 경차는 이익을 남기기가 어렵기 때문에 생산원가 절감이 생명이다. 오사무 회장은 공장 바닥에 나사 하나가 떨어져 있으면 “공장 바닥에 돈이 떨어져 있다”며 한 푼의 돈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즈키의 효자 상품은 알토(Alto:라틴어로 높다는 뜻의 altus에서 따왔다)다. 오사무의 사장 취임 직후인 1979년 첫 출시된 알토는 오랜 기간 인기를 끈 스즈키의 주역이다. 알토는 한국 대우자동차의 티코 모델이기도 하다. 스즈키 집안은 방직기계로 출발 스즈키 자동차는 창업주 이름에서 비롯됐지만, 처음부터 자동차업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다. 목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스즈키 미치오(鈴木道雄:1887~1982)가 스즈키 방직기계(주)를 설립한 건 1920년이다. 그의 아들 스즈키 슌조(鈴木俊三)는 모터가 달린 자전거를 내놓으면서 업종을 변경했다. 1954년 ‘스즈키자동차공업’으로 회사명을 바꾸고 스포츠바이크와 경차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붉은 S자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1958년부터다. 1990년 10월에는 현재의 스즈키로 사명을 바꿨다. “우물을 파려면 제일 먼저 파야 한다” 스즈키의 역사에서 인도 진출을 빼놓을 순 없다. 오사무 회장은 “우물을 파려면 제일 먼저 파야 한다”며 일본 자동차 메이커 중 가장 먼저 인도 시장에 눈떴다. 그가 사장 4년차이던 1982년(당시 52세), 스즈키는 자동차 기업으로서는 일본에서 꼴찌였다. 그래서 그는 “국내에서 1등하기 어렵다면 해외에서 하자”고 마음 먹었다. 모두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도 시장 진출 선언이었다. 인도 정부와 공동으로 합작사‘ 마루티 우도요그’(Maruti Udyog)를 설립, 이후 자회사로 만들었다. 2007년에는 ‘스즈키 마루티 인디아’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마루티는 인도에서는 ‘국민차’로 불린다. 스즈키는 한때 인도 시장 점유율 70%를 웃돌기도 했지만, 현재는 50%대를 유지하고 있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27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펌]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도 고치지 못한 질병
고대 그리스. 서구문명의 시발점이라 부르는 이 시기에. 정치,경제,문화,군사,종교,철학,예술,건축등 이로 셀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이 시기에 발전했지만 단 의학만큼은  그리 발달하지 못 했다. 이 시절엔 질병을 신이 내린 징벌이라 믿어 신에게 벌을 거두어달라고 비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 믿었고 즉, 병에 걸리면 복불복으로 죽거나 사는 것이 정해지는 시기였다. 이 당시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고 그렇게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은 최대의 치료소이자 묘지가 되어 결국 사제들만 치료비와 장례비 명목으로 배를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원시적인 의학을 바꾼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구 의학의 선구자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였다. 그는 질병이 신이 내린 벌이 아니라 사람의 몸에서 접하는 환경이 변화하여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환자들의 상태를 관찰해 그에 맞는 치료법을 제시했다. 무려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에 현대적인 수술대를 발명하여 골절과 탈골에 대한 치료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식초를 살균제로 사용하여 환부의 감염을 예방했다. 많은 그리스 사람들은 처음엔 그를 불경하다 생각했지만 그가 실제로 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여 낫게 하는 ‘기적’을 행하자 사람들은 그를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손이라며 '의학의 아버지' 라고 부르게 됐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고치지 못한 질병이 있었다. 심지이 본인도 이 질병에 걸려 치료를 위해 반평생을 노력했지만 결국 고칠 순 없었다. 당대의 유명한 인물들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도 피할수 없었던 이 저주받은 질병은 남성형 탈모였다. 히포크라테스는 이 저주받은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관찰하며 연구에 매진하고 실험했다. 그가 처음 시도한 탈모 치료법은 아편과 장미 아카시아즙을 섞은 약을 바르는 것 이었다.. 하지만 관찰결과 머리에 좋은 냄새만 날뿐 효과는 거두지 못했고 좀더 독하고 공격적인 처방을 내리게 되었다. 바로 맵싹한 겨자무와 비둘기똥을 환자의 환부에(?) 바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두피만 매콤하게 자극할 뿐 치료법은 아니었다. 그러다 그는 한가지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여성과 환관 즉 내시에게는 대머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둘의 공통점은 '남성의 심볼'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남성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탈모가 생긴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을 무려 2400년 전에 발견한 것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거세가 바로 탈모의 궁극적인 치료방법이란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지만 그 누구도 쉽게 이것을 선택할 순 없었다. 결국 의학의 아버지였던 히포크라테스 조차 탈모는 정복 할 수 없었지만 그의 탈모에 대한 연구업적을 기려, 오늘날의 사람들은 탈모가 진행되지 않는 옆과 뒷머리를 그의 이름을 딴 히포크라테스 환'이라고 부르고 있다. [출처 : 개드립-오삼도리]
[부산IN신문] 부산반송도서관, 강원국 작가 초청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북 콘서트 개최
부산광역시립반송도서관(관장 홍연경)은 10월 25일 오후 1시 30분 부산역 유라시아 플랫폼 104호에서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강원국 작가를 초청해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주제로 북 콘서트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 행사는 부산평생학습의 대중화를 선도하기 위해 개최되는 ‘제2회 부산인재평생학습주간’사업과 연계하여 지역주민의 인문학 소양을 함양하기 위해 마련됐다. 강원국 작가는 이날 행사에서 ‘누구나 시작은 막막하다’, ‘남과 다른 글은 어디서 나오는가?’, ‘쓸수록 산으로 가지 않으려면’ 등에 대해 강연한다. 강연이 끝난 후에는 독자와의 대화 시간도 가질 예정이다. 강 작가는 김대중 대통령의 행정관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현재 전북대학교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회장님의 글쓰기’(2014), ‘대통령의 글쓰기’(2017), ‘강원국의 글쓰기’(2018)등이 있으며, ‘어쩌다 어른’, ‘대화의 희열’ 등의 TV프로그램에서 인문학 강연을 했고, TBS '강원국의 색다른 시선‘에서 진행자로도 활동했다. 참가 희망자는 반송도서관 홈페이지(http://www.bansonglib.or.kr)를 통해 선착순으로 신청하면 된다. 기타 자세한 문의는 반송도서관 자료봉사과(051-545-0102)를 통해 가능하다. 홍연경 관장은 “참가자들이 이번 북 콘서트를 통해 글쓰기의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반송도서관 #강원국 #강원국작가 #강원국의글쓰기 #북콘서트 #책추천 #강연 #인문학강의 #무료강연 #명사특강 #초청강연 #문화강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