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aubon
100+ Views

자라 바겐크네시트


자라 바겐크네시트(Sahra Wagenknecht, 참조 1)라는 이름이 매우 생소할 것이다. 물론 오스카 라퐁텐의 마누라...라고 하면 좀 친밀해질지 모르겠다. 당연히 농담이다. 오스카 라퐁텐도 딱히 친밀한 인물은 아니다. 최대한 빠르게 얘기하자면, 슈뢰더의 라이벌이었던 라퐁텐은 독일 재정부를 거대하게 키운 후(그 최대 수혜자는 아마 볼프강 쇼이블레일 것이다), 슈뢰더와 결별하고 동쪽으로 건너간다.

동쪽에서 라퐁텐은 동독의 구 공산당 세력과 함께 좌파당(Die Linke)을 결성하고 26살 어린 자라 바겐크네시트와 네 번째(...) 결혼도 하는데, 두 부부가 함께 좌파당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 핵심. 바겐크네시트는 동독 출생에 당연히 동독 공산당 소속이었다. 경제학 박사에 젊고 예뻐서(!) 좌파당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로서, 누구도 함부로 말 못 하는 "내가 맑시스트다"를 당당하게 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독의 지역 정당화된(!) 좌파당은 AfD에 크게 밀려난 상황이다. 게다가 AfD가 좌파 정당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에(참조 2), 그녀는 여기에 위기 의식을 느꼈던 모양이다. 좌파당과는 별개로 "봉기(Aufstehen)"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보다 강력한 반이민 정책을 내걸었다.

좌파가? 반이민?

바겐크네시트의 호소는 간단하다. 노동자와 실업자, 저소득층이 좌파당이 아닌 AfD를 택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먼저 다가서야 한다는 의미다(참조 3). 이미 지난 번 총선에서 좌파당은 의석을 크게 잃었다. (총 709명의 의원 중, 좌파당은 69석, AfD는 92석이다.) 노동자와 실업자, 저소득층과 함께 일자리를 경쟁하는 상대는 바로 외국인. 이 이슈에서 좌파당은 AfD에게 졌다.

물론 거의 나치에 가깝다는 평(...)을 받는 AfD와는 달리, 무조건 추방이나 이민 제로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제일 중요한 점은, 정체성이나 문화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슬람 비판도 없다. 다만 이민을 강력히 통제하자는 의견 뿐이다. 당연히 좌파당원들은 기사에 따르면 87%가 찬성.
게다가 바겐크네시트의 목표는 더 넓다. 출범식에 녹색당과 SPD 인사도 참여시켰기(참조 3) 때문이다. 물론 참조 기사의 한델스블라트 어조는 좌파당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있기는 한데, 과연 외연을 넓힐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결국 이 "봉기" 그룹이 적적녹(SPD-좌파당-녹색당) 연정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흥미로운 관점은 하나 더 있다. 노동자와 영세민을 향해 좌파가 다가서야 한다는 점은 사실 1894년 쟝 조레스(Jean Jaurès)가 얘기한 바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참조 4). 당시 이미 조레스는 세계화로 인해 기업들이 무조건 임금 싼 곳으로 기업을 이전할 것이라면서 국내 노동자 보호를 주장했었다. 1894년에 말이다.

그래서 그럴까? 우파의 좌경화(가령 영국에서 거론되는 "Red Tory")와 위와 같은 좌파의 우경화는 분명 흥미로운 현상이다. 러시아에서도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가 트로츠키의 인터내셔널을 누르고 이겼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참조

1. 일반적인 스펠링인 자라(Sarah)가 아닌 이유는, 아버지가 이란인이어서 그렇다. 그래서 파르시의 스펠링(زهرا)을 따라 Sahra라 지었다.

2. 좌파가 된 AfD(2018년 7월 20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6425802044831

casaubon
3 Likes
1 Share
Comment
Suggested
Recent
우파의 좌경화, 좌파의 우경화... 어느게 더 슬플까요? 어찌됐건 인간사가 그렇죠 인간이기에, 완벽할 수없기에, 이성을 따르지 않는 그 묘한 속성때문에, 결국 죄인이기에.. 암튼 어느쪽에 더 슬퍼해하할지?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독일의 5G와 화웨이
https://www.handelsblatt.com/25107766.html?share=twitter 메르켈이 또 한 건 해냈다. 독일 정부가 미국의 위협(참조 1)에도 불구하고 화웨이를 독일 5G 통신망 장비의 주요사업자로 대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건 총리실이 찍어내린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여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독일도 상명하복이다. 사실 전에 봤던 독일 양당(CDU와 SPD) 관계자들도(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화웨이에 대해 답답한 심경을 얘기했었다. 분명 미국은 압박을 주고 있고, 독일도 그 압박이 뭔지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1) 5G에 있어 화웨이만한 기술력(대규모/안정성/신뢰성 등)을 가진 회사가 말그대로 없다. (2) 절차에 맞게 경매에 신청한다면 막을 수가 없다. (3) 어차피 소스코드를 들여다봐야 할 텐데, 그건 화웨이만이 아니라 에릭슨과 노키아, 삼성도 모두 반대할 일이다. 자, 이 건은 한델스블라트가 독일 정부 문건을 입수한 폭로기사다. 원래 내가 알기로 독일 정부 내에서는 화웨이를 5G 장비 입찰에서 부분별로만, 즉 전체가 아닌 일부만 참여하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했었는데 이번에 바뀌었다. 그냥 전체 시장 진입 허용으로 말이다. (참고로 현재 화웨이의 5G 참여를 금지한 국가는 미국 외에 호주와 뉴질랜드, 일본, 대만이 있다.) 그렇다면 메르켈의 총리실이 어떻게 뛰어들었느냐, 원래는 “신뢰할 수 있는 공급업체…”라고 되어 있던 요구조건을 크게 약화시켰다. 보안이 중요한 부문을 통신사가 제출토록 했고, 그 부분만 심사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최종버전이 변경될 가능성이 여전히 없진 않다.) 미국의 압박은 음으로 양으로 상당했던 모양이다. 공식적으로도 9월 Ajit Pai FCC 의장이 직접 독일로 와서 또 위협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당연히 부처 차원에서도 우려가 있었다. 5G가 워낙 소프트웨어 기반이기 때문에 통신사 업데이트가 있을 경우, 이를 실시간으로 정부가 중국측의 “홀”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기술적으로 가능하기는 하느냐… 게다가 독일은 주요 통신사 모두 이미 화웨이 통신망 장비를 대대적으로 사용 중이다. LTE도 제대로 안 되는 지역이 많거늘(베를린에서 조금만 나아가도 아예 통신망 자체가 안 뜬다), 5G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조속히 통신망 설치라도 해야 하는데 말이다. 말인즉슨, 독일 통신사들도 모두 화웨이 편에 가깝다는 의미다. 앞서 (3)에서 말했지만 그나마 소스코드라도 봐야 할 텐데, 그걸 강제로 요구하면 중국의 사이버보안법과 뭐가 다르냐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화웨이 반대가 미국만의 압박이 아니다. 사실 EU도 화웨이를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어도 그 위험성 보고서를 상당히 최근에 냈었다(참조 2). 그런데도 메르켈은 규정을 고쳐가면서 화웨이의 장비 입찰 참여를 강행시켰는데… 아무래도 독일 경기 위축이 우려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올해 말 아니면 내년 초 즈음 마이너스 성장률까지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정확장을 못 하니 수출이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러려면 중국에게 밉보일 수가 없는,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보다도 더 딱한 처지가 독일이다. 우리는 최소한 5G를 화웨이 없이 하는 통신사들이 있거든. 더 큰 의미도 있다. EU가 중국에게 있어서 단일대오를 형성하는데 실패했다. 독일이 화웨이를 결국 금지하지 않았고 (곧 EU가 아니게 되겠지만) 영국도 화웨이에 긍정적이니 말이다. 아예 일대일로, 중국몽(…)에 참여하기로 한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겠다. -------------- 참조 1. 미국의 독일 위협(2019년 3월 14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6991440849831 2. EU-Kommission warnt vor Gefahren für 5G-Netz(2019년 10월 9일): https://www.faz.net/-ikh-9s1u4
함락된 도시의 여자
월요일은 역시 독서지. 이 책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이 저지른 베를린 집단 강간에 대한 건조한 보고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독일 여자가 쓴 이 일기가 독일어로 출판될 수는 없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텐데… 일기 원본은 그녀 스스로 마음 속의 검열 때문이었는지 약자나 암시하는 단어로 썼던 모양이다. 읽을 수 있는 글의 형태로는 1950년대 초에 그녀가 직접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출판하려 마음 먹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1950년대에 영어판이 먼저 나왔고, 독일어판이 잠시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의 책은 50년대 독일 내에서 숱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독일 여자의 명예를 떨어뜨렸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독일어판 재출판을 자기 살아 생전에는 못 하게 막았다고 한다. 그래서 독일어판은 그녀가 사망한 이후에서나 다시 나올 수 있었고, 영화(Eine Frau in Berlin)화도 그 이후에나 가능했다. 50년대 독일의 비뚤어진 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2003년 이후 다시 나온 책에 대해서는 찬사가 이어졌고(하지만 저자는 사망했는 걸?), 역사 분석의 대상이 됐다. 자, 내용 이야기를 하자면 그녀는 1933-34년간 파리 소르본에서 역사/미술사를 공부했었고 그 후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약간의 노어를 익혔다고 한다. 당시 기준에서는 상당한 지식인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제3자인 양 건조하게 당시 상황을 쓸 수 있었을까? 상황 판단도 빨랐고, 결국 그녀는 생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뭐라도 알고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이 책이 드러낼 수밖에 없을 여성주의적 시각은 나보다 훨씬 잘 쓰는 분들이 많으니 검색해서 읽어 보시기 바란다. 물론 예상한 내용이 대다수일 테지만 말이다. 내가 눈여겨 본 부분은 역시 다양한 면모를 갖춘 러시아 군에 대한 묘사와 언어였다. 공산당이라고는 하지만 러시아 군을 구성하는 것도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복수를 해야 했던 한편,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있었고, 착취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주인공이 잘 한 건, 그나마 장교들을 노렸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녀의 무기는 언어.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어눌하더라도, 어휘가 적더라도 자기 모국어를 말해주는 인물에게 마음이 열리게 되어 있다. 노어를 몰랐던 것보다는 아는 편이 생존에 훨씬 유리했다는 의미다. 게다가 제일 “서구적”인 잘 배운 러시아 장교는 그녀가 할 줄 아는 링구아 프랑카, 불어도 할 줄 알았었다. 물론 그가 큰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말이다. -------------- 그리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읽기 참 힘들었다. 번역이 안 좋아서도 아니고 책이 지루해서도 아니라 너무 먹먹해서다. 전쟁이 끝나고 남은 사람들은 전리품이 되어버렸으며, 껍데기나마 남은 조국은 남은 사람들을 버렸다. 되돌아온 남자친구가 뭘 의미하겠는가? 실제 저자는 결혼하면서 스위스로 이주했다고 한다. 차마 베를린에서, 혹은 독일 내에서 제 정신으로 살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