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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튀스 전시회


아는 사람은 아시겠지만 발타사르 쿼숍스키(Balthasar Kłossowski), 일명 "발튀스(Balthus, 당연히 발타사르를 줄인 이름, 참조 1)"는 상당히 장수 만세(1908-2001)...가 아니고, 논란이 많은 작가다. 예전에 쓰긴 했지만(참조 2), 조숙한 어린 여자애에게 요상한 포즈를 시켜 놓고 그린 그림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후 발견된 소녀 사진이 워낙 많아서...

전시회를 하기가 참 껄끄러워진 화가가 됐다. 즉, 회고전을 열었다 하면 가서 봐야 하겠지만 언제나처럼 큰 마음 먹지 않으면 가기 힘든 전시회 정보다.

제목 : 발튀스
장소 : 스위스 바젤, Baselstrasse 101, 바이엘러 미술관(Fondation Beyeler)
기간 : 2018.9.1 - 2019.1.1

그래서... 발튀스가 어떤 인물인지를 설명하려면, 시간 순서로 일단 봐야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성에서 보듯 폴란드-독일 계 가문이며, 어머니도 화가였다. 문제는 어머니가 너무 인기가 많았고(...), 결국 어머니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릴케가 맞다) 랑 바람이 났는데...

그때부터 어머니와 발튀스 형제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살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린 발튀스의 능력이 너무나 뛰어났는지, 릴케는 작품집을 내라고 부추겼고(발튀스는 미술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다), 스무 살 때 나온 작품집에 자기가 직접 서문을 써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일단은 학습 단계. 10대 때부터 루브르 그림을 베껴 그리기 시작했고(카피 페이스트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특히 기사(참조 3)에도 나오지만, 콰트로첸토(참조 4)에 몰입했던 그는 화가 두 명을 특히 많이 베꼈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마사치오.

저 두 이탈리아 화가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발튀스를 바라봐야 한다. 기괴한 느낌을 주는 표정과 몸짓이 다 저 르네상스 그림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저 두 화가의 그림에 꾸르베를 좀 섞어서 현대화(?) 시킨 것이 바로 발튀스의 그림이다.

그는 파리에서 정착한 다음, 초현실주의 운동에 합세했지만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자 선언에는 공감하지 않았다고 한다(다만 알베르 까뮈하고는 죽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의 연극 의상과 설치를 도왔다). 그의 스타일이라 할 수 있을 애매모호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첫 전시회는 26살 때인 1934년에... 바로 "기타 레슨"과 짤방 이미지인 "테레즈"를 내걸었다. 당연히 엄청난 논란을 낳는다. 궁금하시면 검색해 보시라.

이 테레즈는 동네 소녀였고, 3년 정도 발튀스의 뮤즈 역할이었다. 그래서 다양한 버전의 테레즈가 있는데, 아마 제일 화제가 됐던 건 "꿈꾸는 테레즈(Thérèse rêvant, 1938)"일 것이다. 다리를 벌리고 포즈를 취한 모양이 선정적이라는 이유다. 그래서 이 그림이 실제로 걸려 있는 뉴욕 MET를 향해, 그림을 내리라는 청원이 있었다.

메트로폴리탄 측은 당연히 거절(참조 5), 하지만 논란의 여지(참조 2)는 여전하기 때문에, 금번 바이엘러 미술관 측은 관람객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나 원탁 회의, 직접 생각을 적을 수 있는 장소 등을 함께 마련했다. 최대한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발튀스는 전쟁 중 사귄 프랑스 레지스탕스들과 인연을 계속 맺었다. 그래서 앙드레 말로가 그를 이탈리아 로마, Villa Medici에 있는 Académie de France(참조 6) 의장으로 임명한다. 이때 그린 유명한 그림이 "터키식 방(La Chambre turque (1965-1966))".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이데타 세츠코(出田節子, 1943-현, 참조 7) 여사의 누드를 그린 그림이다. 둘의 금술은 매우 좋았던 듯.

그는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기보다는 "노동자(travailleur)"라 칭했었다. 프라이빗 컬렉션으로부터도 징발(!)하여 40여점을 전시하는 흔치 않은 기회가 이번 전시회인데... 사실 이 전시회를 기획한 큐레이터 중에 코노 미치코라는 분이 있어서 주목했다. 일본-프랑스 혼혈인데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다가 예술사학으로 전직한 특이 이력을 갖고 있다(참조 8). 그녀 자신이 하나의 작품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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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14살 때부터 자기 이름을 줄여서 Baltusz 라는 서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었다. 나중에 Baltus로 더 줄어든다.


3. Sie alle waren Puppen seiner Phantasie(2018년 9월 13일): http://www.faz.net/-gsa-9e01m

4. 400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단어이지만 현재 이 단어는 일반명사화됐다. 1400년대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을 총칭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천을 의미하는 밀레가 빠졌다.) 사실 피아트의 친퀘첸토(500)는 400을 계승한다는 의미도 들어있지 않을까?

5. Met Defends Suggestive Painting of Girl After Petition Calls for Its Removal(2017년 12월 4일): https://nyti.ms/2nsGC3K

6. 아카데미 프랑세즈와는 좀 다른 기관이다. 1666년 콜베르가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이탈리아 로마에 세운, 이탈리아와 관련 있는 프랑스 예술가들을 후원/관리(?)하는 곳이다. 르네상스 작품들을 보고 배울 프랑스의 거점인 셈인데, 발튀스는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의장이었으며, 그가 아카데미가 위치한 메디치 빌라를 현대식으로 개수했다.

7. 발튀스가 1962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사귀어서 1967년에 결혼한다. 현재 발튀스 재단의 명예 이사장. 그녀가 최근 케이트 모스랑 보그 이탈리아판 사진을 찍은 것이 눈에 띈다. Kate Moss & Setsuko Ideta Are 'The Women of Style' By Tim Walker For Vogue Italia September 2015(2015년 8월 31일): https://www.anneofcarversville.com/style-photos/2015/8/31/kate-moss-setsuko-ideta-are-the-women-of-style-by-tim-walker.html

8. Michiko Kono(2011년 7월 1일): http://subject.fr/interviews/michiko-kono-155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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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lefigaro.fr/arts-expositions/2018/08/26/03015-20180826ARTFIG00100-joseph-et-marie-hackin-des-compagnons-de-la-liberation-tres-genereux.php 큰 마음 먹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전시회 시리즈. 오늘은 미술이 아니라 고고학이다. 제목 : DE L’ASIE A LA FRANCE LIBRE. / 아시아에서 자유 프랑스로. / JOSEPH ET MARIE HACKIN, ARCHEOLOGUES ET COMPAGNONS DE LA LIBERATION / 조제프와 마리 아깡, 고고학자이자 자유 프랑스의 동지 시기 : 2018년 6월 15일 - 9월 16일 장소 : 파리 7구 Musée de l’Ordre de la Libération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드골 및 레지스탕스 전문 박물관이다. 포스터에도 로렌의 십자가가 떡 하니 박혀 있다.) 사이트 : https://www.ordredelaliberation.fr/fr/actualites/49/exposition 우선 피가로지의 이 사진부터 상당히 강렬함을 말해야겠다. 날짜는 미상이지만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마리 아깡, 속칭 "리아"의 모습이다. 롤라이 카메라와 식민주의자다운 모자를 쓰고 뭔가 고민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 쿠샨 왕조(베르세르크 얘기가 아니다)의 중심부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지역이었고 개중에서도 베그람(쿠샨 왕조의 수도로 추정된다)에서 나온 유물들은, 동서 문화교류의 핵심이자 원천적인 증거다. 바로 그것을 1937년 발견했던 장본인이 바로 그녀였다. 중국과 인도, 그리스, 로마 사이의 교류를 증명해낸 인물이다. 물론 남편인 조제프 아깡도 고고학자였기에 가능했을 일이다. 둘 다 룩셈부르크와 관련이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거의 납치에 가까운(...) 결혼이었다. 실제로는 스승과 제자 사이로서, 남편과의 나이 차이가 29살이나 되기 때문이다. 조제프 아깡은 결혼 당시, 아시아 유물 전문 박물관으로 현재까지 명성이 드높은 기메(Guimet) 박물관의 수석 큐레이터였다. 그 스스로가 실존 인물 에밀 기메의 비서이기도 했었다. 조제프 아깡은 참전 용사다. 마른과 베르됭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레종도뇌르까지 받은(참조 1) 그는 20년대부터 아프가니스탄으로 출동한다(결혼은 1928년에 했다, 참조 2). 탈리반이 2001년 폭파시킨 것으로 유명한 바미얀 석굴을 조사한 것도 그들 부부이고, 위에 언급한 베그람도 마찬가지. 특히 베그람의 발굴단은 마리 아깡이 직접 지휘했었다. 우리 모두 문화교류사에서 그녀에게 빚졌다는 의미다. 그들이 열정적으로 아프가니스탄 외의 지역을 삽질하고(!) 다녔던 시기가 1929년부터 1940년 사이다. 네 번의 대규모 탐사를 이끌었고, 프랑스 정부가 나서서 조제프를 프랑스의 아프가니스탄 고고학 발굴단(참조 3) 단장으로 임명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특히 마리 아깡은 사진은 물론 영상으로(!) 촬영을 하여 문서화시켜 놓았다. 그런데 애국자였던 남편은 물론 부인도 나라에 충성하는 인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조제프는 바로 입대했고, 비시 정부의 자리 제안도 거절했으며, 부인과 함께 드골의 자유프랑스 저항군에 들어간다. 드골처럼 그도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도 했고 마리 아깡은 자유프랑스 여성연대로 편입됐다. 그러나 이동 중 1941년 독일군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고 사망. 하지만 부부가 발견한 유물들은 우리의 공백을 상당히 많이 채워줬다(참조 4). ---------- 참조 1. 미술관 사이트의 정보에 따르면, 그는 부상으로 휴양하던 중에 박사 논문을 작성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은 모르고 싶다(...). 2. 사실 마리 아깡은 1905년 독일 치하의 모젤에서 태어났기 때문에(룩셈부르크 가정이기는 했다), 프랑스 국적이 학생일 시절에는 없었다. (당시는 여권이라는 개념도 아직 나타나기 전이었음을 알고 계시라.) 따라서... 내 추측은 사랑(?)은 물론 프랑스 국적을 위해서 교수와 결혼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둘의 사랑이 가짜라는 얘기는 아니다. 3. Délégation archéologique française en Afghanistan(DAFA)로서, 아프가니스탄 아마눌라(Amanullah) 국왕의 요청으로 프랑스 정부가 만든 조직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에게 점령당한 1982년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려 2002년! 프랑스 외교부의 주도로 다시금 재개된다. 확실히 식민제국의 움직임은 감탄스러울 때가 많다. 4. 가령 알렉산드리아 등대의 가장 좋은 견본이 있겠다. 유리컵들도 마찬가지. Exposition : Ria et Joseph Hackin, découvreurs de l’Alexandrie du Caucase(2018년 8월 28일): https://www.lemonde.fr/arts/article/2018/08/28/exposition-ria-et-joseph-hackin-decouvreurs-de-l-alexandrie-du-caucase_5347047_1655012.html
도라 마르
http://shr.gs/GRLmbGR 주말 특집, 오늘은 이베이에서 발견된 그녀의 다이어리이다. 시작은 자꾸만 뭘 잃어버리는 남편이었다. 계속 다이어리를 잃어버리고 다니는 남편은 자신이 원래 갖고 다니던 다이어리와 똑같은 브랜드와 똑같은 가죽, 똑같은 크기의 다이어리를 이베이에서 발견한다. “이제는 안 잃어버릴 거야.” 과연, 똑같은 모양의 다이어리가 배달됐다. 하지만 이건 중고였다. 그런데 안을 들여다 보니 이게 웬 걸? 자그마한 주소록이 다이어리 안에 놓여 있었는데, 누가 이걸 안 보랴? “콕토, 몽팡시에 거리 36번지 샤갈, 도핀 광장 22번지” 이 뿐만이 아니었다. 루이 아라공,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등등 수 많은 “네임드(참조 1)”들의 주소와 연락처가 알파벳 순서로 들어 있었다. 도대체 언제적 다이어리일까? 1951년이었다. 이런 천재들을 연락처에 죄다 갖고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역시 천재 아닐까? 흥미가 돋기 시작한다. 저널리스트인 Brigitte Benkemoun는 돋보기를 이용해 조사를 시작했다. 다른 정보를 보니 미용실도 있고, 뷰티 살롱도 있고, 모피 가게도 있다. 소유주는 여자였다. 그러다가 핵심적인 정보가 나왔다. Ménerbes의 건축가… 메네르브에서 살 집을 위해 건축가가 필요했었다. 메네르브에서 살았던 여자 아티스트는 단 한 명이었다. 도라 마르(Dora Maar). 원래 이름은 Henriette Dora Markovitch(크로아티아 출신이다). 그녀는 이를테면, 프랑수아즈 질로(참조 2)가 나타나서 피카소랑 사귀는 바람에 쫓겨난(…) 피카소의 애인이었다. 옛날로 돌아가 보자. 도라 마르는 젊고 아름다운 사진사였다. 조르주 바타이유의 연인이기도 했고, 앙드레 브르통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서른 살에 피카소의 애인이 됐는데, 실제로는 그녀가 피카소를 꼬셨다고 한다. 까페, Les Deux Magots(참조 3)에서 그녀는 손가락 사이로 칼을 넣었다. 피를 흘리는 채로, 그녀는 피카소에게 말했다. “Regarde où je suis prête à aller pour toi.” / “당신에게 갈 준비가 됐어요. 그곳이 어디인지 봐요.” 그녀는 기본적으로 사진가였기 때문에,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의 제작 장면을 모두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1937년의 일이다. 당연히 피카소의 그림 모델도 그녀였다. 특히 우는 여자(la femme qui pleure)의 모델이었다. 아마도 피카소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고 화가로 바뀐다. 그러나 피카소는 1943년부터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나기 시작했고, 도라 마르는 큰 충격에 빠진다. 전기 쇼크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고, 피카소는 그녀를 자끄 라깡에게 소개시키고, 위에 등장한 Ménerbes의 집을 사준다. 이때부터 그녀는 불교와 신비주의, 그리고는 결국 가톨릭에 흠뻑 빠진다. 이때 그녀에게 도움이 됐던 친구는 아는 분들은 아실, 발튀스(참조 4). 상황이 안 좋을 때는 자고 있는 발튀스에게 찾아가서 신세 타령을 한 적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1958년 이후로는 서서히 외부와의 접속을 줄였고, 피카소가 사망했던 1973년 이후로는 아예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계속 그림만 그렸다. 미스터리로 남아 사망(1997)한 것이다. 저널리스트의 조사 작업은 책(참조 5)으로 나왔고, 마침 6월 5일부터 7월 29일까지 퐁피두에서는 전시회가 열린다. 큰 마음 안 먹으면 갈 수 없는 전시회 정보다. 제목 : Dora Maar 기간 : 2019년 6월 5일 - 7월 29일 장소 : 프랑스 파리, 퐁피두 센터 예고편 : https://youtu.be/LZYJmPfmdNY -------------- 참조 1. 설명을 간단히 붙이면 아래와 같다. 장 콕토 : 설명이 불필요할 것 같다. 극작가이자 시인, 비평가 등등 어지간한 아트는 다 관여했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 설명이 필요한가? 벨로루시 출신 프랑스 화가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 시인이자 초현실주의 운동의 리더 격, 여담인데 그의 시집, “Le Fou d'Elsa” 안에 “남자의 미래는 여자다(L'avenir de l'homme est la femme)”라는 어구가 나온다. 홍상수의 영화 제목은 이 문장을 앞뒤로 바꿨다(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이건 Jean Ferrat의 노래 제목(1975)이기도 하다. 브라사이(Brassaï) : 원래 이름은 Gyula Halász, 헝가리 출신이다. 동시대 아티스트들을 촬영한 사진으로 유명하다.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 작가이자 시인, 초현실주의 선언(Manifeste du surréalisme)의 작성자 중 하나다. 폴 엘뤼아르(Paul Éluard) : 시인이자 초현실주의 운동의 창설자 중 하나다. 2. 프랑수아즈 질로(2015년 6월 10일): https://www.vingle.net/posts/882446 3. 아티스트와 지식인들이 모이는 까페로서 오늘날에는 여행 명소가 됐다. 간단히 말해서 시몬 드 부아르와 장-폴 사르트르, 에른스트 헤밍웨이, 제임스 조이스 등등이 커피를 마셨던 까페다. 4. 발튀스(2014년 2월 5일): https://www.vingle.net/posts/282933 5. Je suis le carnet de Dora Maar : https://www.editions-stock.fr/livres/la-bleue/je-suis-le-carnet-de-dora-maar-9782234083608
에이핑크 나은이도 인스타그램에 인증샷 남긴 핫한 전시회는 어디?
지난 주말 에이핑크 손나은의 개인 인스타그램에는 노란색 팸플릿을 들고 편안한 차림으로 미술작품 앞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 손나은의 모습이 업로드되었습니다. 저곳은 어디일까요? 오늘 RedFriday에서는 그녀가 작품 감상을 즐긴 장소에 대해 알려드립니다. 1. 스프링브레이크 아트쇼 손나은이 참석하여 인증샷을 남긴 전시회는 바로 LA에서 열린 Spring Break Art Show였습니다. 2019년 2월 15일에서 17일까지 열린 이 전시회는 LA 1925 East 8th Street에서 열렸습니다. 매년 이맘때쯤 열리는 이 전시회는 원래 뉴욕에서 시작되었으나 올해 처음으로 뉴욕을 벗어나 LA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40개 이상의 전시가 열렸으며 지역의 아티스트, 비영리단체, 독립큐레이터, 미술수집가, 갤러리 등이 참석했습니다. 2. 손나은 사진 배경에 등장한 작품은? 손나은의 인스타그램에 등장한 작품은 누구의 것일까요? 바로 뉴욕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이자 영화제작자인 그렉 해버니(Greg Haberny)의 작품입니다. 손나은의 인스타그램에 등장한 의자는 그렉 해버니의 인스타그램에서도 1000개 이상의 좋아요를 받은 작품입니다. 그 외에도 낙서한 듯한 추상작품, 오브제 등을 전시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원문을 참고하세요. # 원문 출처 : https://redfriday.co.kr/286 # 많이 본 컨텐츠 # 매일 업데이트되는 생활꿀팁과 알아두면 도움되는 이야기를 팔로우 하셔서 쉽게 구독하세요. # ‘좋아요’ 와 ‘공유하기’ 많이 부탁드려요.
에밀 놀데
https://www.lemonde.fr/culture/article/2019/06/17/emil-nolde-peintre-magnifique-et-homme-abject_5477081_3246.html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지난 4월에 내린 결정이 하나 있었다. 마침 베를린 현대미술관(Museum für Gegenwart)에서 전체적인 에밀 놀데 전시회를 한다고 하니, 마침 총리실에 걸려 있던 에밀 놀데 그림을 미술관 측에 건네주자… 다만 미술관측이 원했던 것은 에밀 놀데의 그림 한 점이었는데, 메르켈은… 총리실에 걸려 있던 에밀 놀데의 그림 두 점을 전부 다 줘버렸다. 자, 큰 마음 먹지 않으면 갈 수 없을 전시회 정보부터 봅시다. 제목 : Emil Nolde - Eine deutsche Legende. Der Künstler im Nationalsozialismus / 에밀 놀데 - 독일의 전설. 국가사회주의 시대의 예술가 기간 : 2019년 4월 12일 - 9월 15일 장소 : 독일 베를린 함부르크 역사(驛舍, Hamburger Bahnhof) 현대미술관(Museum für Gegenwart) 사이트 : https://www.smb.museum/museen-und-einrichtungen/hamburger-bahnhof/ausstellungen/detail/emil-nolde-eine-deutsche-legende-der-kuenstler-im-nationalsozialismus.html 에밀 놀데를 좋아한 독일 총리는 메르켈만이 아니었다. 헬무트 슈미트(참조 1)도 그러했다. 슈미트 총리는 총리관저 내에서 에밀 놀데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었고, 메르켈의 집무실에는 2006년부터 놀데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참에 아예 놀데의 그림을 없애기로 한 것이다(참조 2). 왜냐… 에밀 놀데가 나치 당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에밀 놀데를 아신다면, 그의 그림이 실패한 화가 아돌프 히틀러의 취향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 또한 알고 계실 것이다. 그렇다. 제아무리 나치 당원이라 하더라도 나치 정권은 에밀 놀데 또한 “퇴폐 예술(참조 3)”로 찍었고, 그에 따라 그의 그림 갖고 전시회를 개최하지 못 하게 만들었었다(참조 3). 기사에도 나오지만 에밀 놀데 자신은 확실히 친-나치였다. 그가 나치 정권의 홍보 책임자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독일 예술의 타락을 개탄하며, 유대인의 지배에 반대함”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30년대 그의 집은 슈바스티카 깃발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참조 4).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히틀러는 그를 퇴폐예술가로 비정했다. 동료 “퇴폐 예술가”들에 속하는 게오르그 그로스(George Grosz)는 미국으로 도망쳤고,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은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오토 딕스(Otto Dix)는 스위스 국경으로 도망쳤고,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는 자살했다. 에밀 놀데는 은둔을 택했고, 당연히 그림을 숨겼다. 어떻게 보면 그래서 더 “전설”이 됐다고 볼 수 있을 테고, 이번 전시회의 의미는 도대체 나치 당원이라고 하는데, 그의 그림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보자는 뜻으로 열린다고 봐야 하겠다. 아니, 그렇다면 앙겔라 메르켈은 그 오랜 기간 동안 총리로 있으면서 하루 종일 놀데의 그림을 바라봤을 텐데, 그 전에는 몰랐을까? 혹시 메르켈이 매년 바그너 축제에 가는 것도 관련이 있을까? 모를 일이다. 당연히 메르켈른(…참조 5)하니까. 현재 메르켈의 집무실에는 콘라트 아데나워의 초상화 하나만 걸려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을 누가 그렸게? 오스카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다. 그 또한 퇴폐 예술가로 찍혀서 영국으로 도망쳤던 화가였다. 메르켈의 집무실(출처: http://www.taz.de/!5556836/) -------------- 참조 1. 헬무트 슈미트의 사망(2015년 11월 11일): https://www.vingle.net/posts/1193237 2. Angela Merkel ne veut plus des toiles d’Emil Nolde dans son bureau(2019년 6월 18일): https://www.lemonde.fr/culture/article/2019/06/17/angela-merkel-ne-veut-plus-des-toiles-d-emil-nolde-dans-son-bureau_5477265_3246.html Blumengarten (Thersens Haus) (1915) 및 Brecher(1936)의 두 그림을 집무실에서 내렸다. 3. Entartete Kunst 전시회(2014년 4월 15일): https://www.vingle.net/posts/319826 4. Le passé trouble d’Emil Nolde, une ombre au tableau(2019년 4월 11일): https://www.lemonde.fr/big-browser/article/2019/04/11/le-passe-trouble-d-emil-nolde-une-ombre-au-tableau_5448982_4832693.html 5. 메르켈른(2015년 8월 27일): https://www.vingle.net/posts/1024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