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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다음에 내릴 비가 씻어줍니다




죽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과

모른 체 지나가게 되는 날이 오고





한때는 비밀을 공유하던 가까운 친구가

전화 한 통 하지 않을 만큼 멀어지는 날이 오고





또 한때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던 사람과 웃으며 볼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이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변해 버린 사람을 탓하지 않고

떠나버린 사람을 붙잡지 말고

그냥 그렇게 봄날이 가고 여름이 오듯





내가 의도적으로 멀리하지 않아도

스치고 떠날 사람은 자연히 멀어지게 되고

내가 아등바등 매달리지 않더라도

내 옆에 남을 사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알아서 내 옆에 남아준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고

아껴주지 않는 사람에게 내 시간, 내 마음 다 쏟고

상처받으면서 다시 오지 않을 꽃 같은 시간을

힘들게 보낼 필요는 없다.





비바람 불어 흙탕물 뒤집어 쓴다고 꽃이 아니더냐.

다음에 내릴 비가 씻어준다.





실수들은 누구나 하는 거다

아기가 걸어 다니기까지 3,000 번을 넘어지고서야

겨우 걷는 법을 배운다.





나는 3,000번을 이미 넘어졌다가 일어난 사람인데,

별것도 아닌 일에 좌절하나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너무 일찍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고

가장 불행한 것은 너무 늦게 사랑을 깨우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잘 났다고 뻐긴다 해도

결국 하늘 아래에 놓인 건 마찬가지인 것을,





높고 높은 하늘에서 보면

다 똑같이 하찮은 미물일 뿐인 것을...





아무리 키가 크다 해도 하찮은 나무보다도 크지 않으며

아무리 달리기를 잘 한다 해도 하찮은 동물보다 느리다.





나보다 못난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려 하지 말고

나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하여 질투하지도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하늘 아래 있는 것은 다 마찬가지니까...


- 김소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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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본심
클리포드 나스, 코리나 옌/ 인간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책, 관계의 본심에서 성격이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법은 누군가에게 호감을 사고싶다면 그 사람과 유사한 성격으로 바뀌라는 것이었다. 특히, 처음에 달랐더라도 나와 성격이 비슷해지는 사람을 보면 호감도가 상승한다는 실험결과를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 실험에서 중요하게 집고 넘어가지 않은 것은 '누가' 성격을 바꾸냐는 것이다. 그리고 성격을 바꾸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호감을 살 수 있지만, 자신의 특성을 바꿔버린 사람이 장기적으로 관계를 유지시켜나갈 수 있을까? 결론은 있는 그대로의 사람보다, 나에게 맞춰주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그리고 왜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에 대하여 이 책은 호감의 본질은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도 누군가에겐 별로인 사람일 수 있고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는 방법이 다르기때문이다. 내가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드러내는 부분이 상대방에게는 전혀 어필이 되지않는 것이다. 호감은 결국,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는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더불어 이책은 결속력의 본질 즉 결속력을 위해 소위 왕따의 존재조차 감내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왕따를 괴롭히고, 놀리면서 팀의 결속력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너무 맞는 말이라 인정은 하지만 가장 건강한 방식은 아니라는 생각이든다.
백령도 1일차.
6시15분 차를 운전하여 삼전동 집을 나설 때 비가 내렸다. 염곡동 사거리를 지나 강남순환고속도로와 제2경인고속도로를 타고 인천 연안부두까지 1시간 남짓 걸린 7시 13분에 도착했다. 강남순환고속도로 들어설 때 1,800원 + 나올 때 1,700원 + 제2경인 450원 = 3,950원의 통행료가 무료도로보다 15분을 앞당겼다. 7시50분 미끄러지듯 인천항을 빠져나와 인천대교 밑을 지나고 소청도의 하울의 성같은 통신탑이 보일 때까지 3시간 10분, 대청도까지 15분이었지만 화물이 많았는 지 대청도 선착장에서 꾸물대더니 백령도에 11시 50분에 도착했다. 힐링펜션 쥔장이 렌트카를 용기포선착장까지 가지고나와 타고 백령로를 따라 펜션까지 갔다. 1층 방 하나, 화장실 하나, 계단 위 다락방 하나, 거실 하나, 주방 하나로 10명은 숙박해도 되는 큰방이었다. 금요일밤이라 손님이 없어서 작은방 값인 7만원에 큰방을 준것이다. 아반떼를 타고 심청각 앞 콩깍지로 가서 짬뽕순두부와 굴순두부 각 8,000원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심청각으로 갔다. 대인 1,000원이었지만 매표소 직원이 점심먹으러 갔는 지 공짜로 들어가 장산곶을 보고 주차했다. 심청이를 빠뜨렸던 인당수가 장산곶 앞이라면 엄청 많은 배들이 좌초했을텐데, 통일되면 보물선 발굴로 북적댈게 뻔하네. 콩돌해변을 먼저 보라는 펜션쥔장의 말에 따라 모래보다 크고 바둑돌보다 작고 길쭉한 쌀알같은 콩돌해변에서 맨발트래킹을 하고, 남포리 습곡을 찾다가 용틀임바위 주차장에 주차했는데 까나리 여행사 버스가 있었다. 천안함 위령탑을 들르지 않고 두무진으로 직행하여 주차하고, 걸어서 왼쪽 산으로 가서 육지에서 두무진을 관광했다. 수직으로 줄선 바위들이 작은 장가계를 보는 듯했다. 30분이나 일찍 유람선 매표소에 가서 매표하고 오른쪽 끝 자갈밭에 앉아 두무진 나루를 아이쇼핑했다. 4시에 승선하여 4시20분 출항 두무진 유람선을 타고 선암대, 코끼리 바위, 부처바위, 심청이 타고온 잠수함을 보고 천안함위령탑 앞바다에서 배를 돌려오는데 40분이 걸렸다. 돌아오는 길 사자바위를 보러갔다가 방파제 옆으로 갈수도 없고 육지와 바위사이에 테트라포드로 막아놓아 경관을 버려놓아 실망했다. 저녁으로 조개구이 무한리필에 갔다. 인당 26,900원에 키조개, 백합, 피조개가 관족도 잘 안익고 전복과 꼬막을 몇개 먹다보니 입에 잘 안 맞아 바지락과 꼬막, 동막 한바가지 넣고 새우 두마리 섞어 안성탕면 끓여 먹었더니 육수가 천상의 맛이었다. 물론 삶은 조개살이 안 익은 것도 없고 맛도 둘이 먹다 둘이 다 죽어도 모를 맛이었다. 힐링편션로 돌아오니 저녁 7시, 울타리에 심은 앵두 몇개를 따먹고 잔디밭가에 심어진 알록달록한 톱풀과 금계국, 꽃양귀비, 노란 낮달맞이꽃, 검붉은 우단동자를 감상하다가 내일을 위하여 씻고 일찍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