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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시마 방문기③/ 이끼로 도배된 초록숲



<2편에서 계속>

야쿠시마 여행의 묘미는 ‘숲 트레킹’이다. 그 숲을 제대로 보려면 야쿠스기랜드, 시라타니운스이계곡, 조몬스기 코스 등 세 가지를 다 보는 게 좋다. 야쿠스기랜드에서는 천천히 걸으면서 여유를,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모노노케히메)의 배경지인 시라타니운스이계곡에서는 신비함을, 야쿠시마의 상징 조몬스기가 있는 코스에서는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야쿠시마를 두 번 방문하고서야 알았다. 세 코스가 제각각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걸.


역시 비를 피해갈 순 없었다. 시라타니운스이계곡과 조몬스기 코스에선 비옷을 입은 채 우산을 들고 산을 올랐다. 물 먹은 나뭇뿌리에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끝장. 단단히 발 아래를 주시하며 걸었다. 시라타니운스이계곡은 녹색 숲을 즐기기엔 그만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이끼가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야쿠시마를 찾는 사람들의 목적지는 조몬스기. 예전에는 7200살이라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과학적 방법으로 실제 측정 해보니 이 할아버지 삼나무의 나이는 2700살 정도란다. 조몬스기를 찾았던 그날도 전망대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신령스러운 삼나무를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몬스기 코스는 과거 벌채한 삼나무를 실어 나르던 철길을 2시간 정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왕복 4시간을 꼬박 걸어야 하는 셈.


야쿠스기랜드를 찾은 날은 비 대신 안개를 만났다. 몸은 희뿌연 안개에 젖고, 마음은 몽환적인 분위기에 젖었다. 그것도 충분히 흠뻑. 세 코스를 돌다보면 야쿠시마 원숭이, 사슴과 자주 마주친다. 이 섬에는 ‘사람 2만, 원숭이 2만, 사슴 2만’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모두가 어울려 사는 섬이다.


지인이 민박집에 부탁해 여사장님의 소형차를 빌렸다. 그 차를 타고 이틀 동안 섬을 일주했다. 야쿠시마에 살았던 야마오 산세이라는 농부시인의 집도 방문했다. 그는 오래전 고인이 됐다. 지금은 그의 아내가 집을 지키고 있지만, 찾아간 날은 70세가 넘은 산세이의 남동생분이 안내를 해줬다.


야쿠시마, 철학, 자연 등에 대해 많은 책을 쓴 산세이의 서재에 들어서자 책 냄새가 코 끝으로 스며들었다. 오래된 흔적들의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주인 없는 서재를 둘러보며 한 개인의 위대함을 다시 느꼈다.


책상 위에 방명록이 있었다. 산세이의 남동생분이 기록을 남겨도 좋다고 했다. 짧게 몇 줄 적었다. 다음 방명록을 쓰는 한국인이 있다면 누군가 내 이름을 볼 것이다. 이 또한 보이지 않는 인연이 아닐까. 산세이 남동생분의 배웅을 받으며 골짜기를 내려왔다. 한 가지 물음을 안고. ‘우리는 어떤 삶을, 우리는 어떤 인연을 맺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 <4편에 계속>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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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고감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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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④/ 재난과 메이와쿠
메이와쿠 문화는 일본 가정교육의 근간이기도 하다. 유치원과 학교에서도 이런 교육은 이어진다. 일본에서는 유치원에서부터 대중교통 이용 매너 등 공공장소 예절부터 가르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탑승객이 내린 뒤 타기, 버스·지하철 등에서 큰 소리로 떠들지 않기 등 매우 구체적이다. 초등학교에서도 ‘도덕’ ‘생활’ 등의 과목을 통해 공공장소 예의나 대중교통 이용 예절 교육을 이어간다. 한마디로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기조가 강하다. 심지어 일본 부모는 아이에게 몇 달 동안 자기물건 정리하기만 가르치기도 한다. 자기 물건 정리도 안 된다면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는 생각이다. “수준 높은 질서의식을 갖추려면 꾸준한 반복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게 일본의 가정교육이다. 뿐만 아니라 거리가 정돈이 되고 늘 깨끗하게 청소 되어 있는 것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는 인식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 집, 혹은 건물 앞을 스스로 치우기도 한다. 이러한 가정교육이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지난 2011년 대지진 참사에서 일본 공영방송 NHK는 절제된 보도를 했다. 강진 발생 직후 자막으로 속보를 내보냈고 즉시 특보체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한 시간여 뒤에는 센다이(仙臺) 상공에 헬리콥터를 띄워 쓰나미가 도로·주택·비닐하우스 등을 삼키는 모습을 생중계했다. 그렇게 화재 정보, 정부 발표 등을 신속 생중계하면서도 과도한 공포감을 막기 위해 절제된 톤을 유지했다. 이는 비탄에 빠진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식에서였다. 또한 일본인들은 복구 과정에서도 경이적이고 절제되며, 성숙된 국민성을 보여주었다. 재해로 인해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 도로에서 신호등 파란불이 바뀌어야 길을 건넜다. 자연재해 앞에서도 줄을 서서 마트를 이용하고 일체의 약탈행위가 없었다. 규슈지역에도 대지진이 났다. ..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9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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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명당자리 차지하기!!
안녕하세요! My simcafe 입니다. 미국까지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하면 정말 몸과 마음이 지쳐요.ㅠ. 다리가 저리기도 하고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이코노미석을 선택한 모든 백성들의 고충아닐까요ㅜㅜㅜㅜㅜ 저는 비행기 타면 완전 촌스럽게 약간의 멀미를 하는 관계로 비행기 타기전에 약을 먹고 비행하는 내내 잠만잔답니다. 그리고 기내식 먹고 또자고.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는 개인적으로 단거리 구간 (국내선이나 일본. 중국정도) 의 경우2-3시간정도는 화장실을 안가도 견딜만 하기때문에 아래를 내려다 볼수있는 창가쪽을 선호해요. 하지만 장거리의 경우 최소 2번이상 화장실을 가게되고 스트레칭도 중간중간해야하고 몸을 움직을 공간도 있는 복도쪽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저는 약을먹고 기절한듯 자는 타입이라.. 옆사람에게 깨워도 괜찮으니 언제든 필요할때 얘기하라고 하죠.ㅎ.ㅎㅎ 좁은공간에 많이사람들이 있는 만큼 위치가 어디인지. 옆좌석에 어떤사람이 탔는지에 따라서도 여행이 즐거울수도. 힘들수도 있는데요! 옆좌석 사람을 고를순 없어도 비행기 명당자리는 우리가 차지해 보자구요- 어디가 비행기 명당자리 일까요?? 왜 명당일까요??? 어떻게 그자리를 차지할까요???? 사진 출처: http://inside.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4/25/2013042501977.html?Dep0=twitter 비행기의 최고 명당자리는 당연 비상구 옆 좌석 (Bulk seat) 이라고 해요. 비상구 공간확보를 위해 좌석이 멀리 떨어져 있어 다리를 뻗을수도 있고 창문가에 앉은 승객이 옆사람 눈치안보고 마음대로 왔다갔다가 할수도 있구요. 하지만 비상구 옆 좌석은 "비상시 비상구를 개방하고, 승무원을 도와 다른 승객들의 탈출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앉아야 한다" 고 건설교통부 고시에 규정이 되어 있다는 사실! 청력. 시력.언어장에가 없어야 하고 비상구를 열거나 장애물을 제가하거나 비상시 승무원과 승객의 탈출을 도울수 있는 신체 건강한 15세 이상의 승객에게만 배정해요. 하지만 꼭 남자만 가능한건 아니고 여자분들도 앉을수 있어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규정에 따를건지 물어보고 동의를 해야만 좌석 배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화나 인터넷 예약이 불가능 합니다. 외국 항공사에서는 영어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확인을 하기도 한다고 하니 미리 영어공부를 조금 해놓으시면 좋은 자리 득템에 도움이 될꺼 같네요^^ 영어못하는것도 서러운데... 명당에도 못앉는다니... 내일부터 영어공부???ㅋㅋ 아! 비행기의 모양에 따라 벌크석 창가쪽 안쪽으로 튀어나와 무릎이 닿을만큼 공간이 좁을수도 있고 화장실 앞일 경우도 있어 사람들이 많이 오가기 때문에 번잡할수 있어요. (자료출처: 한국소비자원) 그 다음은 각 구역별 제일 앞자리 입니다. 화장실이나 승무원들이 기내식이나 다른 준비를 하는 공간인 갤리 (galley) 를 중심으로 3구영 정도로 나누어 지는데 앞사람이 없으니 다리도 뻗고 뒤쪽으로 의자를 젖히는 사람도 없어 편하게 갈수있어요. 그리고 요즘은 개개인의 스크린이 있지만 큰 스크린이 앞에 있어서 영화관에 온것처럼 영화를 볼수도 있구요. 하지만 어린 아가들을 위한 요람을 거는 자리라 보통 우선순위는 어린아이와 동반하는 부모님들께 돌아갑니다. 아이들과 그닥 친하지 않으신분들이나 주변이 시끄러우면 잠자기 힘들거나 밝으면 잠을 못자는 분들께는 비추에요. 그리고 같은 비행기라 해도 항공사 마다 기종별로 좌석 위치나 갯수 등이 다르기 때문에 시트구루 (WWW.SEATGURU.COM) 같은 싸이트에서 미리 안내받을수 있어요. 항공사명 (Airline), 항공편명(Flight#),출국일(Date) 를 입력하면 항공기 좌석지도를 볼수있는데 색깔로 좋은좌석/안좋은 좌석들을 구분하여 알려줘요. ↓참고하세요^^ (출처:WWW.SEATGURU.COM) 그럼 좋은 자리를 찾아봤으니 안좋은 자리도 찾아볼까요?? -승객들이 오고가는 화장실 주변은 밤이고 낮이고 시끄럽고 번잡해요. -항공기 엔진의 뒤에 위치한 좌석의 경우 엔진소음이 앞쪽보다 더 크구요. -5열중 가운데 자리는 창가쪽과 복도의 중간이라 풍경도 없고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 비행기에 따라 중간이 4-5좌석정도가 될때가 있는데 성수기에 5열 중간.... 버스라면 그냥 서서가라고 권할정도로 비추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리들도 명당중의 최고명당이 될수도 있으니! 이름하야... 비수기!!!!!!!!!!!!!!!!!!!!!!!!!!!!! 비수기 장거리 비행시 좌석이 통재로 비어있을 경우 3-4자리를 혼자 독차지 할수있어서 누워오시는 분들도 있어요. 항공기내에 자리가 많이 비어있을경우 눈치 샤샤샥 보시고 빨리 자리를 차지하는것도 도움이 될꺼에요.. ㅎㅎㅎ (자료출처: 주부생활) 자~ 대망의 명당자리 차지하는 방법을 공개합니다. ㅎㅎㅎㅎ 우선! 부지런한 새가 애벌레도 많이 먹는법! 비상구 옆자리를 제외한 자리들은 온라인으로 미리 예약할 수 있도록 온라인 좌석 예약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으니 미리미리 들어가서 예약을 하는게 좋아요. 항공사 홈페이지 혹은 앱 - 사전 좌석배정 서비스 - 예약번호 혹은 회원번호 - 좌석 선택 (대한항공 이코노미석은 출발일 기준 90일 전부터 출발시각 48시간 전까지 좌석 얘약 가능하며 일등석. 비지니스 석은 90일 전부터 24시간 전까지 예약 가능하며 출발 1시간 30분 전가지 탑승수속 못하면 취소된다고 하니 주의 하시고 아시아나는 354일 전부터 국내선은 출발 2시간 전까지 국제선은 3시간 전까지 가능하고 국제선은 항공기 출발 70분, 국내선은 20분 전까지 공항 카운터에서 수속 완료 해야 한다고 합니다) 미리 예약 했어도 출발 당일 너무 늦게 탑승수속을 하시면 다른 승객에게 그 자리가 돌아갈 수 있으니 당일에도 시간을 넉넉하고 잡고 가시는게 좋겠죠??^^ 온라인으로 미리 예약 하지 못했다면 출발당일 일찍 공항에 나가 남아있는 자리중 제일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고를수 있어요- 그리고 최고 명당인 비상구 옆자리는 일찍오는 사람들에게만 내어준다고 하네요. 그리고 한국도심공항 체크인 서비스를 이용하면 남들보다 일찍 체크인을 할수있는데 당일 새벽 부터 탐승 3시간 전까지 체크인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요. - 열심히 부지런 떨어 좋은자리 얻어셔서 장거리 비행에 지쳐 쓰러지지 마세요^^
고교야구 고시엔과 오키나와 반환 운동
열도의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100년 역사의 ‘여름 고시엔 대회’가 막을 내렸다. 효고(兵庫)현 고시엔(甲子園)구장에서 열리는 이 대회는 경기장의 이름을 따 고시엔 대회라고 불린다. 3~4월 열리는 ‘봄 고시엔’(선발고교야구대회)와 8월에 개최되는 ‘여름 고시엔’(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이 있지만, 대개 고시엔하면 여름 대회를 말한다. 고시엔 대회는 효고현 나루오 구장에서 열렸다. 대회 인기가 높아지면서 관객 수용이 문제였다. 그래서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고시엔 구장이 1924년 들어섰다. 10회 대회부터 고시엔 구장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고시엔 구장은 프로구단인 한신의 홈구장이기도 하다. 고시엔 대회가 열리는 동안은 한신 은 구장을 옮겨 경기를 치른다. 그만큼 고시엔의 인기는 프로 못지않다. 그런 고시엔이 일본 고교 야구선수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출전 선수들은 시합에 지면 눈물을 머금으며 고시엔 구장 그라운드의 흙을 담아간다. 그해 여름의 뜨거웠던 고교 청춘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선수들에겐 평생 ‘가보’와도 같은 상징물이다. 그럼, 선수들이 매번 가져가는 흙은 어떻게 보충할까. 또 이 흙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일본 스포츠매체들에 따르면, 선수들이 1년 동안 가지고 가는 양은 약 2톤에 달한다고 한다. 가지고 간 양만큼 다시 보충이 된다. 고시엔의 흙은 흑토와 모래를 혼합한 흙이다. 오카야마, 미에, 가고시마, 오이타, 돗토리현 등 전국 각지에서 엄선된 흙만 가져온다. 모래의 경우는 중국 복건성에서 들여온다고 한다. 봄과 여름 대회를 치를 때, 흑토와 모래의 비율이 각각 다르다고 한다. 비가 많은 봄에는 배수를 좋게 하기 위해 모래가 많이 사용된다. 빛 반사가 심한 여름에는 공을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 흑토를 많이 넣는다. 그런데 이 고시엔의 흙과 관련, 일본의 쓰라린 역사가 있다. 바로 오키나와다. 오키나와의 고등학교들은 한때 고시엔에 출전할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 출전은 했지만, ‘상징물’인 흙을 갖고 갈 수 없었다. 여기엔 이런 사연이 있다. 고시엔 구장의 흙 과 오키나와 슈리고교생들의 눈물. 태평양전쟁이 끝났지만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되지 않고 미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미국령이기 때문에 오키나와의 고등학교들은 고시엔 대회에 나갈 수 없었다. 마침내 첫 출전이 이뤄졌다. 1958년 8월 40회 대회였다. 첫 출전 영광의 학교는 오키나와의 슈리(首里)고교. 하지만 슈리고는 1회전에서 후쿠이현의 강호 쓰루가(敦賀) 고교에 1대3으로 패하고 말았다. 슈리고 역시 고시엔의 전통대로 흙을 가져가기로 했다. 선수 몇 명이 비닐 봉지에 흙을 담아 갔지만, 오키나와에 도착했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본토의 흙을 반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오키나와는 미국법을 적용받는 땅이었다. 그런 미국법에 따라 ‘식물 검역법’에서 제동이 걸린 것이다. 선수들은 또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소중히 가져온 고시엔의 흙을 고스란히 바다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 보도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기적과도 같은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사연을 접한 항공사의 한 여성 승무원이 고시엔 구장의 작은 돌 40개를 오키나와에 전달한 것이다. 당시 검역법에 따르면, 흙은 반입이 금지되지만 돌은 상관이 없었다고 한다. 슈리고의 고시엔 출전 기념비에는 지금도 이 ‘고시엔 돌’이 박혀 있다고 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슈리고 사건이 계기가 되면서 오키나와 반환 운동이 한층 달아 올랐다. 1960년 오키나와 조국복귀협의회(縄県祖国復帰協議会)가 결성됐고, 본격적인 대중운동이 힘을 받았다. 운동은 오래 걸렸다. 드디어 12년 뒤인 1972년, 오키나와 반환이 이뤄졌다. 드라마틱한 일은 2010년 봄과 여름에 연이어 일어났다. 2010년 오키나와의 코난(興南)고교가 봄 고시엔과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한 것이다. 오키나와로서는 ‘고시엔 흙 반입 거부 사건’(1958년)에 이어 50년 만에 거둔 최고의 경사였다. <일본 도요(東洋)대 유학생 이모씨>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당부.
안녕하세요. Three Kingdoms Generation.의 필자입니다. 일단 삼국지관련 내용의 글이 아닌 점 먼저 사과드립니다.ㅎ 오늘은 이것저것 몇 가지 말씀 올리고자 타이핑을 합니다. 1. 표절. 연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데다, 아직 카드나 팔로워가 많은 편은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이리저리 빙글을 뒤적이다보니 몇 곳에서 제가 쓴 글과 흡사한 카드들을 몇 번 목격했습니다. '삼국지'라는 역사 및 소설관련 컨텐츠를 다루다보니 당연히 내용은 비슷할 수 있는 점 십분 헤아리지만 읽어보면 제가 쓴 문장의 구성이나 표현, 어휘까지 같거나 매우 흡사한 경우들이 있더라구요. 제가 쓰는 이 칼럼은 보시는 분들의 생각 이상으로 공을 들여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제가 삼국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어린시절부터 찾아보고 조사하고 공부하며 모은 수 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쓰여지며, 이것들을 알맞게 구성하여 쓰다보면 순수 작성시간만 짧게는 2~3시간, 길면 5시간 가까이 소요됩니다. '아니, 겨우 스마트폰으로 글 쓰는게 뭐 이리 오래 걸려???' 하실 수도 있어 의아하시겠지만... 저도 그냥 베껴 쓰거나 하는게 아닌 제가 아는 지식들을 좀 읽기 편하게, 그나마 재미있게, 되도록 자연스럽게 쓰고자 어떻게 쓸 지를 고민하고 다듬으며 쓰다보니 그리 시간이 걸리며 저도 제 생업과 사생활이 있다보니 마냥 시간을 내기 힘들어 보통 2~4일에 걸쳐 써나갑니다. 물론, 제 칼럼들을 베끼셨던 참고하셨던... 그분들이 사익을 추구하여 그러시진 않은 거 같긴 해도 어쨌건 저로서는 수일 간 공들인 제 성과물이 누군가에 의해 몇 분만에 표절 되는건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전에 어느 독자분께서 자신이 활동하는 커뮤니티에 출처를 밝혀서 사용하고 싶다고 하셨던 적이 있었는데, 얼마던지 스크랩, 클립해 가셔도 좋고 오히려 그렇게 여기저기 이리저리 제 글이 퍼져나가 삼국지에 대해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느끼시는 분이 늘어나는 것은 저로서도 즐겁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단순 표절은 금해주셨으면 하고 지적재산권에 대한 존중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혹자는 '니가 첨부하는 그림과 사진은 그럼 뭐냐'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첨부하는 매체들은 누가 봐도 어디의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들이고 매체의 저작권자들이 이미 이익추구가 아닌 분야들에 대한 개방을 허한 매체들이라 제 글을 베끼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2. 부진. 안타깝게도 점점 연재가 진행될 수록 초반에 비해 '팔로워증가', '좋아요', '클립' 등의 수치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그 원인으로는 첫째가 너무 더딘 제 "연재속도", 두번째는 "인기스타의 부재"가 아닌가 싶네요ㅎ 일단 연재속도에 대해서는 참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헌데 위에서 말씀 드렸듯, 글 쓰는데 걸리는 시간 자체가 길고 또 제가 전문작가가 아닌 관계로 일과 사생활이 병행되며 연재하다보니 아무래도 더뎌지네요;;, 그렇다고 스피드를 좀 내보자고 분량을 줄이자니 이 칼럼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의 기대치와 수준을 고려할 때, 분량의 축소는 곧 내용의 양과 질의 하락.. 다시말해, 퀄리티 하향의 우려가 생길거 같아서.. 물론, 길게 쓴다 능사는 아니지만 다른 분야와 달리 역사관련물은 내용이 디테일할수록 즉, 분량이 길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연재속도 탓에 분량을 타협할 생각은 없다보니 그런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그리고 댓글보면 조운, 조조, 장료, 여몽 등등 네임밸류 있는 인물들에 대한 니즈가 많은데, 일전에 이미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제 나름으로는 그런 인기인물, 유명인물들이 초반에 나오기 시작하면 뒤로 갈수록 이 칼럼의 위력이 반감할까 싶은 우려로 좀 아껴두던 터였습니다. 게다가 비록 우리가 잘 모르는, 혹은 아예 처음 듣는 이름의 인물들을 제가 재조명하여 그들 역시 역사 속의 주요했던 이들임을 부각시켜주고픈 마음도 컸기에ㅎㅎ 아무튼 연재속도도 최대한 스퍼트를 올려보고 앞으로는 중간중간 이쯤이다 싶을 때 유명인물들도 게시하도록 하겠습니다. ^^ 3. 부탁. 대신 저도(건방지게) 부탁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읽어주시는 것으로도 참 고맙습니다만..ㅎㅎ 그래도 기왕이면, "좋아요"도 좀 클릭해주시고, 또 "클립" 해가셔서 본인들 컬렉션에도 게시하여 보다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게끔 홍보도 부탁 드립니다! 나아가 아직 팔로우 안하신 분들은 "팔로우"도 해주십사 고개 숙여 청을 좀 드립니다. 허허허;;; 물론, 다양한 내용의 "댓글"들도 언제나 대환영! 길이와 내용 관계없이 댓글들은 항상 힘이 되거든요. 제가 여기에 글 써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어디 입사지원할 때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저 취미로 쓰는 것인지라 여러분들의 "팔,좋,클,댓"의 피드백이 제 엔돌핀이고 에너지!! 또, 혹시 Three Kindoms Generation.의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좋은 아이디어나 건의사항 있는 분들은 지금 이 글에 댓글을 좀 부탁드립니다. 4. 출판. 댓글 주시는 분들 중 은근 많은 분들이 해주시는 말 중에 "책 내시면 꼭 살께요!" "한 번 책으로 내보세요ㅎ" 등등이 있습니다. ..ㅋㅋㅋ 출판이라...허헣 일단 누가 책을 내줘야 저도 출판을 하는거겠지만, 제가 전문작가가 아니다보니 필력도 부족하고 또 요즘같은 모바일시대에 설령 책을 낸들, 인쇄간행물이 과연 얼마나 판매가 될지도 의문이고..ㅋ 그리고 이 칼럼독자분들이야 아니라 생각하시겠지만 요새 들어서는 워낙에 미디어가 풍년이다보니 삼국지라는 컨텐츠가 어딘가 모르게 매니악한 소제로 치부된다는 인상도 받습니다만ㅎ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삼국지를 읽지 않은 자와는 벗 삼지 말라"는 말까지 있던 보편적 매체였는데, 지금은 삼국지가 뭔지 모르는 분들도 적잖은 세상 같아서 좀 서글프네요...T-T 여튼 출판관련 말씀들은 그만큼 좋다는 칭찬들이시니 기분좋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엇?! 벌써 새 카드가 올라왔어!?' 하시는 마음으로 반갑게 클릭했더니 왠 쓰잘데없는 사설이냐며 실망하셨을 분들께는 다시 한 번 사과와 양해를 올리며, 삼국지관련 내용은 최대한 빨리 연재할께요! 항상 많은 관심 주시고 찾아 주시며 읽어 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 드리고 싶네요ㅎ 고맙습니다!
자동차에 ‘1도’ 관심 없는 일본 젊은이들
도요타가 매달 일정액을 지불하면 자동차를 자유롭게 골라 탈 수 있는 정액제를 실시한다고 1일 발표했다. 서비스의 이름은 ‘긴토(KINTO)’. 예를 들면, ‘오늘은 렉서스, 내일은 SUV를 탈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국 자동차 메이커들이 이런 서비스를 일부 시행하고는 있지만, 일본 기업이 도입하기는 도요타가 처음이다. 도요타는 정액제와 더불어 ‘카쉐어링’(차량 공유)도 함께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30분에 OO엔으로 예약’한다는 식이다. 도요타는 전국 판매점에 전시된 약 4만대의 시승용 차를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소유’에서 ‘공유’로 전략 변화를 꾀한 도요타의 발표는 축소되는 자동차 판매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1990년 777만대였던 일본 자동차시장의 신차 판매 수는 2017년 523만대까지 떨어졌다. 특히 젊은 층의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다. 일본자동차공업회 조사에 의하면 ‘자동차 구입 의사가 있다’고 밝힌 독신 젊은이들은 12%에 불과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1월 2일 “젊은 층의 차에 대한 관심이 점차 옅어지고 있다”며‘구루마 바나레’(クルマ離れ)를 지적했다. 이는 젊은이들의 ‘자동차 이탈 현상’을 말한다. 이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2000년대 전후다. 일본 언론들의 보도를 통해 일본 젊은이들의 생각을 들여다 봤다. 일본 50~60대들에게 자동차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애지중지한다는 뜻에서 애마(愛馬)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2008년의 리먼 쇼크(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 파산)의 영향으로 소비자 마인드에 급격한 위축이 생겼다는 분석이 많다. 거기다 휘발유 가격 급등과 소비세 증가가 더해졌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젊은 층에게 자동차는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일본자동차공업회가 2017년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차량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10~20대 젊은이 중 50% 이상이 “차를 사고 싶지 않다”고 답변했다. 자동차 구입을 꺼리는 주된 이유는 돈이다. ‘돈을 쓰는게 아깝다’(お金を使うのがもったいない), ‘취미도 없고, 없어도 곤란하지 않은 자동차에 돈을 쓰는 것이 아깝다’(趣味でもないし、なくても困らないクルマにお金を使うのがもったいない)는 의견이 많다. ‘면허취득에 30만 엔 등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고, 쓸데없는 세금이 너무 많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제 그들에게 자동차는 ‘사치품’으로 여겨진다. ‘사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살 수 없는 사람도 많다’(買いたくないじゃなくて買えないって人も多い)는 것이다. 젊은 층의 취미가 다변화 한 것도 한 원인이다. 옛날과 달리 취미의 폭이 다양해졌는데, 그 중심에 스마트폰이 있다. ‘자동차에서 스마트 폰으로(クルマからスマホへ)으로, 도구가 세대교체(ツールにおける、世代交代)했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새로운 ‘욕망 충족 도구’(欲求充足ツール)로 자리를 잡으면서 자동차가 그 자리를 회복하기는 어렵게 됐다. ‘대출을 끼고 자동차를 사고, 아웃 도어를 즐기자’(ローンを組んで自動車を買い、アウトドアを楽しもう)라는 젊은이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집에서 적당히 만족감을 얻을 수 있고(家の中でそこそこの満足感が得られるし) 안전하고, 안심하고, 또 금전적 위험이 낮은 도구(安全で安心で金銭的リスクも低いツール)인 스마트폰이 있다’는 것이다. 가치관도 변했다. 자동차의 편리성은 인정하지만, 굳이 차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 렌터카 나 카쉐어링으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마스’(MaaS)다. 마스는 Mobility as a Service의 약자로,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고 돈을 주고 이용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그러니 ‘데이트 드라이브도 렌터카로 충분하다’고 한다. 요컨대, 자동차가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 요즘 일본 젊은이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김재현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이번 여름 일본을 대체할 수 있는 아태지역 휴가지
일본의 보복성 수출 규제로 인해 한일갈등이 매우 고조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유니클로 불매운동에 더불어 일본 여행 취소 추세도 늘어나는 편입니다. 실제로 일부 보도에 따르면 국내 주요 여행사의 일본 여행 예약 취소율은 80%에 달했습니다. 따라서 여름 휴가철이 한창인 오늘 일본보다 더 저렴한 여행 경비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해외 여행지 TOP 5를 살펴보았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던 휴가지인 일본 스카이스캐너에서 제공한 2018년 가장 사랑받은 여행지 10곳에 따르면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해외 여행지 1·2순위가 오사카 및 도쿄로 조사되었습니다. 특히 선정된 10곳 중 4군데가 일본에 위치해 있어 한국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일본 여행을 선호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여행가는데 필요한 최소의 휴가 비용? 통상적으로 일본으로 향한 내국인 비율이 높은 이유 중 하나는 지리적 가까움이며 이로 가능한 저렴한 여행 경비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해외 인기 여행지 1위였던 오사카와 인천과의 비행 소요 시간은 1시간45분으로 매우 가까우며 최저 항공표도 약 14만원이였으며 오사카, 도쿄, 후쿠오카, 그리고 오키나와의 휴가 경비를 조사해 본 결과 평균 최소 경비는 (항공표 + 호텔) 4일간 약 57만원으로 매우 합리적이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오사카가 가장 저렴하였으며 오키나와가 가장 비싼 편이였습니다. 이보다 더 저렴하게 휴가를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필리핀 마닐라, 그리고 베트남 다낭은 5성 호텔에 묵어도 일본으로 여행 가는 것보다 최소 필요 경비가 적습니다. 쿠알라룸프르의 최저 항공편의 가격은 187,883원에 5성 호텔 평균 일박 가격은 103,336원으로 최소 경비 497,890원으로 여행 가능합니다. 마닐라가 551,906원 그리고 다낭이 561,301원으로 그 다음으로 가장 합리적인 비용으로 여행 가능한 곳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앞서 언급되어 있는 휴가지의 물가 지수는 일본에 비해 현저히 낮기 때문에 휴가 비용을 더욱 줄일 수 있습니다. 전세계 도시 및 국가 관련 각종 수치를 제공하는 Numbeo에 따르면 일본의 식당 가격 지수는 50.05 그리고 현지 구매력 지수의 합은 147.62로 조사 휴양지 중 가장 높았습니다. 반면에 필리핀은 48.07, 베트남은 50.20, 그리고 말레이시아는 93.32로 일본에 비해 현저히 낮았기 때문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럭셔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문화생활이 뛰어난 대도시의 경우는 어떨까요?   만약 오사카나 도쿄 등 해변보다는 문화생활 위주의 대도시로 여행을 희망하는 경우 홍콩, 타이베이, 상해, 그리고 방콕을 고려해보세요. 이 도시들은 오사카나 도쿄와 견줄만한 고유의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음에 더불어 보다 더 저렴하게 여행 가능합니다. 구체적으로 이 네 도시의 평균 최저 여행 경비는 37만원으로 일본에 비해 20만원 더 낮습니다. 특히 5성급 호텔에서 숙박해도 68만원으로 일본의 오사카와 도쿄에 비해 상당히 합리적입니다. 물론 스시, 온천, 시바견 카페 등 일본 고유 문화는 경험할 수 없지만 언급된 도시의 경우 일본의 대도시와 견줄 수 있는 뛰어난 문화생활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도쿄에서 갈 수 있는 디즈니랜드는 홍콩에서, 오사카에서 유명한 각종 사원들은 방콕에서, 그리고 온천은 타이베이에서도 갈 수 있어 뛰어난 대도시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휴가 비용 더 낮추는 방법은? 보시다시피 일본보다 합리적인 비용으로 좋은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곳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비록 일본보다 지리적으로 멀리 위치해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보다 저렴한 항공편, 호텔, 그리고 물가가 이 점을 보완합니다. 더불어 항공편 및 호텔 결제 시 일부 신용카드는 매우 뛰어난 혜택을 제공하기 때문에 여행 경비를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유사히 휴가 간 해외에서 소비하는 금액도 신용카드로 결제 시 높은 할인율이 적용 가능하여 휴가 출발 전 해외 혜택이 뛰어난 신용카드를 발급하는 것도 휴가 비용을 낮추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고대해온 여름 휴가이지만 들 뜬 마음으로 과소비를 하게되면 귀국 후 마음이 더 불편해 질 수도 있기 때문에 철저한 예산 관리로 이를 예방하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 본 게시글의 원문은 밸류챔피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밸류챔피언 블로그에서 재테크 관련 더 다양한 소식들을 만나보세요.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전시체제2) 문화선전
비록 전시체제라는 특수한 상황이었지만 영화인들의 저항은 매우 수동적이었으며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거나 위장으로 협력 혹은 식민지 각처로 흩어지는 방식으로 그 시기를 맞았는데 개인적인 예술표현이 상대적으로 제한되고 힘들었던 상황에서 그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서구영화와 단절되고 일종의 식민지 지배의 용이함이나 문화선전도구로서 영화를 제작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펼치고자 하는 영화세계란 묻혀버려야 했기 때문에 차라리 지식인들 가운데서는 서양의 근대문화에 회의를 느끼느니 일본의 미학적 전통으로 회귀하자는 움직임도 일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의 전시체제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게 되는데 일본의 ‘숭고한 정신’이야 말로 이미 퇴보한 유럽문화나 물질문명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 신대륙 미국문화에 비하면 우월하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서양문화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풍토가 아니었고 나치 독일에 의해 프랑스 파리가 점령되었다는 보고는 그들에게도 자극제가 되었다. 이들은 식민지배나 통치야 말로 일본의 숭고한 문화와 정신세계를 전파하고 동화시키면서 퇴락한 유럽문화나 미국문화로부터 동양의 사상을 지켜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심지어 1942년에는 교토의 철학자를 중심으로 ‘근대(近代)의 초극(超克)’심포지엄이 개최되어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이른 시기에 포스트 모더니즘이 논의될 정도였다. 일본이 이러한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게 된 계기는 역사적 유래가 깊다. 섬나라라는 특성상 외부 문화의 유입이 컸던 것이 사실이고, 고대 일본의 경우 주로 한반도와 중국 등에서 수용된 문화와 종교가 일본의 기초를 쌓은 반면 중세시대 이후에는 아무리 통치세력들이 ‘쇄국’을 논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교역과 문화교류의 창구를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외부 문화를 수용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원칙이 적용되었는데 ▲종교를 식민지 침투의 수단으로 삼거나 ▲내정간섭 ▲사상의 전파 같은 것들은 철저하게 제약 받았으며 심지어 개항이나 무역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 할지라도 이들을 위해 인공섬(데지마, 出島)을 만들어서라도 비록 외국인들을 철저하게 외부와 격려시켰다. 다만 일본은 종교 같은 서양문명을 거부하는 대신 그 안에서 필요한 것들을 발췌하여 이질적인 것이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른바 ‘이화(異化)’정책을 펼쳐나가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생활양식이나 음식, 물건, 의복 등은 도입하지만 정신세계만큼은 일본의 고유적인 것들을 지켜나가는 전략을 썼다. 그러므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경쟁적으로 일본에 선교와 무역을 병행하려 했을 때에도 예수회의 신부들은 스스로 육식을 거두고 의식주를 일본풍으로 바꾸는가 하면 초라한 복장을 선호하지 않는 일본인의 특징을 받아들여 수도회의 원칙에 어긋나는 실크옷을 입어 사제로서의 품위를 지키기도 했다. 때문에 포교원칙도 ‘일본인에게 순응하는 것’이 최우선일 정도였다. 따라서 일본은 포르투갈로 스페인(이들이 가톨릭을 앞세워 남미를 정복한 사실을 안 후)을 먼저 견제한 후 다시 가톨릭을 탄압하면서 포르투갈인을 국외로 추방 한 후 프로테스탄트인 네덜란드를 통해 포르투갈을 견제하는 한편 교역을 포기하기에 앞서 거래처를 바꾸는 치밀함을 보였다. 심지어 1600년에 네덜란드 판델하밴 회사 소속 선박인 리푸데호가 오이타현(大分県) 우스키(臼杵駅) 북부 지역에 표착하자 당시 집권자인 센고쿠 시대 최후의 승리자이며 에도 막부 시대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이 배에 타고 있던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를 오사카로 소환한 후 외교고문으로 중용한 후 1609년 네덜란드, 1613년에는 영국과도 통상을 개시하였다. 이를 통해 이에야스는 자신이 일본의 외교권을 가지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선포하고 네덜란드와 일본을 통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견제했는데 이 때에도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남만인(南蠻人)’, 네덜란드와 영국을 ‘홍모인(紅毛人)’으로 구별하여 불렀다. 이때에도 일본 특유의 동화정책이 시행되어 윌리엄 애덤스는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였고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함께 표착한 네덜란드인과 함께 80톤, 120톤의 유럽식 범선을 설계하여 만드는 한편 네덜란드로 하여금 무역허가를 얻게 하여 히라도(平戶)에 외국인이 경영하는 상점인 상관(商館)을 설치했다. 이러한 정책은 메이지 유신이 있기 전까지 막부시대에도 외부와 교역을 통해 쇄국만은 막았고 네덜란드를 통해 얻은 지식은 ‘난학(蘭學)’이라는 학문으로 정립되었다. 이중 의학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무엇보다도 서양문명 중에 물건에 잡착하였고 이를 일본화 하는 과정에서 ‘남만’이나 ‘홍모’가 아닌 ‘란(蘭)’이라는 새로운 가치기준을 만들어 서양에서 수입한 사상이나 물건에 대한 일본적 해석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했다. 또한 나가사키는 비즈니스센터의 역할 뿐 아니라 서양의 서적, 의학, 식물학, 물리학, 천문학 등 서양의 첨단 과학기술이 들어오는 창구가 되어 주었다. 따라서 입항하는 네덜란드 선박은 반드시 유럽과 아시아의 최신정보 보고서를 에도막부에 제출하도록 의무화하였는데 이를 ‘네덜란드 풍설서’라고 불렀다. 다만 쇄국과 기독교 금교령은 유효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지식인들은 ‘나가사키’로 유학을 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설탕, 별사탕, 카스텔라, 단팥빵, 카레라이스, 돈가스로 이어지는 서양문화의 수용과 일본화, 오랫동안 육류 섭취를 법으로 금지했었고 이 때문에 ‘소고기’를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일 정도였던 일본의 서양문화 수용이 훗날 식민지 지배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또한 중국대륙으로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문물을 받아들인 것과 별개로 초기 포르투갈인으로 대표되는 일명 ‘별사탕로드’를 통해서 들여 온 비누, 안경, 유리, 망원경, 카르타, 시계, 인쇄기술, 서양의학, 서양음악, 서양회화와 신대륙에서 발견된 새로운 식물들은 일본에 생활혁명을 가져왔던 것이다. 특히 ‘카르타’의 경우 서양의 트럼프에 해당하는 것인데 화려한 색채의 유럽풍으로 그려진 총 48장의 카드를 일본화 하여 카르타(カルタ)가 만들어졌다. 그 중 4계절과 12개월의 꽃을 정하여 4장씩 만든 카드를 ‘꽃 카르타(花カルタ)’라고 불리게 되고 오늘날 화투(花鬪)가 되어 일본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 서민들의 오락수단이 되었다는 것만 해도 그들의 일본화와 식민지 지배전략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알 수 있다. 신대륙을 발명한 컬럼버스가 후추라고 생각한 ‘고추’ 나 토마토, 감자, 고구마, 옥수수, 가지, 시금치, 호박을 한반도로 유입시킨 것도 알고 보면 ‘별사탕로드’를 통해 일본에 들여 와 다시 식민지로 전파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가 음식, 의복을 비롯 생활을 바꾸고 서양문화의 수용을 통해 이질적 문화를 일본화 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문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듯이 ‘문화통치’를 통해 식민지배를 하고 이를 통해 토착화 한 사례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오랜 기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은 여러 형태로 일본이 그 흔적을 남겼고 대만 등은 기본적으로 이 흔적을 부정하지 않는 자세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일본은 제목 자체만으로도 전의를 고조시키고 하나의 강령(綱領)인 영화들을 제작하는 한편 식민지 곳곳에 일본영화를 이식시키는 작업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병행되었다. 이 흔적은 오래도록 남아 지금까지 유지 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미국 LA= 이훈구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22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요시다 쇼인 '최인아 책방'을 가다
제일기획 부사장을 지낸 최인아씨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강남 한 복판(지하철 선릉역 인근)에 ‘최인아책방’을 오픈한 건 2016년 8월이다. 어른 키 3배쯤 되는 높은 책장, 서점의 시원시원한 레이아웃, 조용하게 책을 읽으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까지. 강남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나면서 핫한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그동안 꽤나 알려진 작가들의 북콘서트(강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그런데 1월 22일, 무명의 젊은 작가가 이 공간의 주인공이 됐다. 누굴까. 그를 3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지난해 10월 12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한옥 카페에서 그와 마주 앉았었다. 그는 막 출간된 자신의 책에 자부심을 느끼며 조금은 상기된 표정의 육사(67기) 출신 청년이었다. 2016년 2월 육군 대위로 전역한 김세진(31)씨. 그가 세상에 내놓은 책은 ‘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호밀밭출판사)이다. 요시다 쇼인은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근대화 추진자들의 사상적 스승이다. 일본의 한반도 진출 야욕 이른바 ‘정한론’의 사상적 뿌리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2시간 인터뷰(기사 하단 관련기사 참고) 내내 줄곧 듣기만 했었다. 할 말이 많은 청년이었다. 그는 요시다 쇼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책 출간을 두고 “내가 할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래혁신학교 건명원(建明苑)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식으로 책을 썼다. 일본어도 전혀 모른채 접근했고, 현지(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요시다 쇼인의 관련 자료를 ‘싹쓸이’해 왔다. 장교 아버지를 둔 청년 장교 출신이었기에 그랬을까. 당돌하고 저돌적인 면을 보았다. 그런 김세진씨가 1월 22일 ‘최인아책방’에서 북콘서트를 가졌다. 저녁 7시 30분이 되자 강의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책방의 한 쪽에 강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참석자는 20여 명. 먼저 책방지기인 최인아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사실, 저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내공 있는 작가들과 교분이 많은 최대표지만 그도 낯선 이름에 호기심이 생겼던 듯하다. “전공자도, 학자도 아닌 젊은이가 뜨거운 마음으로 뛰어서 쓴 책인 것 같다”. 책에 대한 최대표의 짧은 평가다. 그는 “그런 뜨거운 마음을 가진 분(작가)이라면 우리가 함께 공유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자리를 마련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세진 작가는 일본 역사를 축약해서 소개한...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산이 움직였다”...일본 선거 최고의 어록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과반 깨지자 전 사회당 당수 도이 다카코 "산이 움직였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자민당은 중고차" 선거에서는 공약 대결이 중요하지만 공약이 유권자들에게 어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선거는 ‘입의 전쟁’에 가깝다. 일본 참의원 선거가 열기를 띄고 있는 가운데, 일본 정당 선거에서 가장 유명했던 어록 2가지를 살펴봤다. 공교롭게 모두 여성 정치인이 했던 말이다. ᐅ도이 다카코 “산이 움직였다” 때는 1989년 7월. 제15회 참의원 선거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집권 자민당은 소비세를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사회당 위원장을 맡고 있던 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는 소비세 추진에 맞서 “안 되는 것은 안 된다”(ダメなものはダメ)는 구호를 무기로 내세웠다. 선거는 어떻게 됐을까. 리쿠르트 사건, 우노 소스케 총리의 여성 스캔들 문제가 겹치면서 자민당은 참패, 참의원 과반이 깨졌다. 이런 상황을 두고 도이 다카코는 “산이 움직였다”(山が動いた)는 유명한 말을 했다. 자민당이라는 거대한 산을 밀어내고 정치 분위기를 바꿨다는 의미다. 도이 다카코는 대학(도시샤대학)에서 헌법을 강의하다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1969년 사회당 소속으로 출마해 의원에 당선된 이후에도 그는 ‘평화헌법 수호자’로 살았다. 일본 헌정 사상 첫 중의원 의장을 역임했고, 진보세력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그는 5년 전인 2014년 9월 20일, 폐렴으로 사망(당시 85세)했다. ᐅ고이케 유리코 “자민당은 큰 중고차” 다시 때는 그 4년 뒤인 1992년 7월. 제16회 참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혜성 같은 한 여성 정치 신인이 등장했다. 이름은 고이케 유리코(小池 百合子), 현 도쿄도지사다. 방송 캐스터 출신인 그는 당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전 총리)가 창당한 일본신당에 합류했다. 그는 선거에 임하면서 자민당을 큰 중고차, 일본신당을 작은 신차에 비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치를 바꾸는 데는 큰 중고차를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작지만 신차 쪽이 좋다”(政治を変えるには大きな中古車を修理するのではなく、小さくても新車の方がいい) 고이케는 또 “낡고 커다란 자민당보다, 작지만 새로운 일본신당이 좋다”(古くてでかい自民党より、小さくても新しい日本新党の方がいい)는 말로 유권자들에게 어필했다. 그는 의원 배지를 달았을까? 비례구에 출마한 고이케는 국회 진출에 성공했고 이듬 해엔 중의원 선거로 옮겨 당선됐다. 하지만 한 당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일본신당, 신진당, 자유당, 보수당, 자민당, 도민퍼스트 모임 등 여러 당을 옮겨 다녔다. 그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정치권 철새’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용모를 두고 일부에서는 ‘초록 너구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당을 자주 바꾼 음흉한 너구리의 이미지에 처진 눈과 눈 주위의 짙은 화장을 빗대 그렇게 부른다. 초록은 고이케 도지사의 이미지 색상이다. <김재현 기자>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2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아베의 악몽...2007년 참의원 참패 사건
photo=니혼게이자이 캡쳐. 아베 총리 지금까지 3번의 참의원 선거 치러 2007년엔 참패...두 달 후 건강문제 겹쳐 사임 1989년 '우노 내각'땐 69일 만에 정권 무너져 일본 참의원 선거가 21일 치러진다. 참의원(의원 임기 6년)은 3년에 한 차례 총의석의 절반을 새로 뽑는다. 현재 참의원 의석수는 248석, 이번 선거에서는 124석을 뽑는다. 문제는 연립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를 선거에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15일, 개헌세력이 개헌 발의선인 전체 의석의 3분의 2에 육박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아베 신조 총리는 집권 이후 지금까지 3번의 참의원 선거를 치렀다. ᐅ1차 내각 당시인 2007년 7월, 제21회 참의원 선거 ᐅ2차 내각 때인 2013년 7월, 제23회 참의원 선거 ᐅ3차 내각 당시인 2016년 7월, 제24회 참의원 선거다. 아베 총리에게 2007년 참의원 선거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연금기록 누락 문제, 연이은 각료의 사임으로 정권에 역풍이 불었다. 결과는 자민당의 참패, 민주당이 참의원 제1당이 되었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아베 총리는 건강 문제까지 겹치면서 선거 2개월 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차 아베 내각(2006년 9월~2007년 9월)은 그렇게 1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그 이후 2번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승리를 낚았다. 2차 내각 때인 2013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아베 총리는 ‘아베노믹스’라는 경제정책을 선거 무기로 내걸었다. 그 결과, 민주당이 대패, 자민당이 압승했다. 3차 내각 때인 2016년 7월 치러진 참의원 선거 역시 자민당이 웃었다. 당시 자민당은 공명당과 연합했다. 헌법 개정을 내건 연합여당이 의석 3분의 2를 획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참의원 선거를 말할 때, 30년 전인 1989년 7월 치러진 선거를 빼놓을 수 없다. 자민당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선거였다. 당시 정권은 우노 소스케(宇野宗佑) 내각이 잡고 있었다. 우노 소스케는 당 3역 경험도 없었고 총리로서는 지명도도 낮았다. 그런 상태에서 1989년 6월 3일, 내각이 발족했다. 한 달 뒤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는 소비세 도입과 리쿠르트 사건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정작 폭탄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우노 소스케 총리의 여성(게이샤) 스캔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것. 당시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섹스 스캔들’로 보도하면서 사태는 선거에 치명타를 줬다. 때마침 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 사회당 당수의 ‘마돈나 열풍’이 불면서 자민당은 참의원 선거에서 대참패를 맛봤다. 우노 소스케 총리는 선거 다음 날 곧바로 퇴진을 표명했다. 재임 기간 69일, 일본에서 가장 짧은 내각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우노 내각은 무너졌다. 반도체 수출 규제와 맞물린 이번 참의원 선거 결과가 향후 개헌 정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한일 양국이 예의주시 하고 있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24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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